원각사(圓覺寺)는 탑골공원에 있던 조선시대의 명찰(名刹)이었다. 세조 10년(1464년)에 지은 절인데 당시 규모로서는 가장 큰 절이었다. 세조가 양주 고을 회암사에서 법회를 갖던 중에 원각경(圓覺經)을 송경하던 숙부인 효령대군 앞에 여래가 나타나서 사리를 분신(分身)하였다. 이에 크게 감동한 세조가 그 영험함을 기리기 위하여 옛날 흥복사가 있었던 절터에 원각사를 건립한 다음에 10층 석탑을 세웠다고 전한다.
※ 세조실록 33권, 세조 10년 5월 2일 갑인 1번째기사
“흥복사(興福寺)를 세워서 원각사(圓覺寺)로 삼고자 한다.”
그런데 조선 제10대 왕인 연산군은 재위 10년이 되던 1504년 원각사를 폐지하고 장악원을 설치하여 기녀들을 육성시키는 훈련장 겸 유흥장으로 만들었다. 기생들과 풍유놀음에 빠졌던 연산군은 전국에서 미녀들을 징발하여, 장악원에 합숙시키면서 기녀로 양성하였던 것이다.
※ 연산군일기 57권, 연산 11년 2월 21일 정축 1번째기사
“장악원(掌樂院)을 원각사(圓覺寺)에 옮기어, 가흥청(假興淸) 2백, 운평(運平) 1천, 광희(廣熙) 1천을 여기에 상사(常仕)케 하고, 총률(摠律) 40인으로 하여금 날마다 가르치게 하라.” 하였다.
본래 장악원(掌樂院)은 조선시대 때 성률의 교열, 곧 음성의 흐름을 바로 잡아주는 성악교육을 담당하던 곳이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고려말기의 전악서와 아악서를 계승하였으며, 세조 때에 장악서로 개편하였다.
이곳에는 악사를 배치하고 음악에 재능이 있는 양반 가문의 자제들을 선발하여 교육시켰는데, 연산군 때에 이르러 미녀를 징발하는 ‘채홍준사(採紅駿使)’ 관리를 각도로 파견하여 전국에서 미녀들을 뽑아다가 기녀교육을 시키면서 임금의 향락을 위한 방탕의 기구로 만들었던 것이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쫓겨나고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제11대 중종은 장악원의 폐습을 없애버린다면서 원각사 건물을 헐어버리고 그 재목으로 민가를 짓게 하였다. 중종은 연산군 때에 변질된 장악원의 제도를 고치고 다른 곳으로 이전한 뒤 본래의 기능을 되살렸다.
※ 중종실록 20권, 중종 9년 8월 6일 병신 2번째기사
호조(戶曹)가 아뢰기를, "원각사(圓覺寺)의 재목 중에서 퇴락(頹落)하려는 것은 영선(營繕)에 쓰소서." 하니, ‘그리하라.’고 전교하였다.
1897년(광무 1) 조선시대의 원각사 자리에 영국인 고문 브라운이 설계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으로 알려져 있으나 1888년 인천 만국공원(자유공원)이 조성되었기 때문에 잘못 알려진 것이다. 서울에 조성된 최초의 공원이라고 불리는 것이 맞을 것이다.
1919년 3.1운동의 함성이 펼쳐진 곳이 바로 탑골공원이다. 1919년 1월 중순, 일본 유학생 송계백이 보성학교 교장 최린을 찾아왔다. 이 학교 졸업생인 송계백은 모자 안감에 숨겨 온 명주 헝겊을 최린에게 내밀었다. 거기에는 “일본에 있는 한국인 유학생들이 2월 8일에 독립 선언을 합니다. 이것은 그때 발표할 선언서입니다.”라고 하였다. 최린은 송계백이 돌아간 뒤 천도교 지도자들을 만났다. 모두 일본 유학생들의 용기를 칭찬하며 독립운동에 찬성했다.
전문학교 학생들은 물론 이승훈 등도 교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종교계와 학생들이 거의 같은 때에 독립운동을 준비한 이유는 당시 국제 사회의 움직임과 관계가 있다.
1918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민족 자결주의’를 주장했다. 민족 자결주의란 어느 민족이든 정치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식민지 민족도 독립하여 정부를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다.
민족 자결주의가 발표되자 한국 사람들은 큰 희망을 가졌고, 한국도 독립운동을 벌이면 강대국들이 관심을 갖고 도움을 줄 것이라 믿었다. 각자 독립운동을 준비하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서로 힘을 합치기로 했고,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가 힘을 모으고 학생들에게도 손길을 내밀었다.
그런데 마침 그 무렵,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을 두고 일본이 음식에 독을 넣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고종의 장례식이 열리기 전인 3월 1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거사일을 3월 1일로 결정한 데는 또 다른 까닭이 있었다. 고종의 인산(因山) 일인 3월 3일로 내정했다가, 인산일을 택하는 것은 전 황제에 대한 불경이라는 의견과 2일은 일요일이므로 기독교의 안식일이라 피하자는 의견이 나와 결국 거사일이 3월 1일로 결정되었다.
학생대표였던 정재용은 민족대표를 대신에 탑골공원 팔각정 단상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당시 33인의 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중 서울에 있던 20여 명은 2월 28일 손병희 집에서 극비리에 회합을 갖고 거사를 최종 점검했다. 이 자리에서 당초 탑골공원에서 하기로 한 독립선언서 발표 대신에 태화관으로 장소를 옮길 것을 결정했다. 흥분한 학생ㆍ시민과 일제 경찰의 충돌로 불상사가 생길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민족대표들은 3월 1일 오후 2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일본경찰에게 통고하여 구속되었다. 태화관 별실에 모인 민족대표들은 이종일이 인쇄하여 가져온 <독립선언서> 1백여 장을 나눠보면서 간략히 행사를 진행했다.
한용운은 이 자리에서 "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것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기 위한 것으로 자못 영광스러운 날이며, 우리는 민족대표로서 이와 같은 선언을 하게 되어 책임이 중하니, 금후 공동협심하여 조선독립을 기도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라는 요지의 선언식 인사말을 하고, '독립만세'를 삼창했다.
뒤이어 태화관 주인에게 경찰에 알리도록 하여 달려온 일본 헌병과 경찰 80여 명에 의해 29인의 민족대표들은 전원 연행되었다. 그들은 군중의 만세소리를 들으면서 자동차에 실려 끌려갔다.
태화관에서 민족대표라고 불리는 사람의 대부분은 우리가 신간회에서 알려주었던 사회주의와 함께 한축을 이끌었던 자치론자들과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자치론자들과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 중에서 후에 친일파로 전향하거나 3.1운동 이후에는 적극적인 독립운동에 관여하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종교인들은 자기 종교를 지키기 위해 일제에 타협적인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이들을 민족대표라고 불리는 것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1967년에는 공원의 현대화 계획의 한 부분으로 상가 건물인 ‘파고다 아케이드’를 공원 둘레에 건축하였다. 1983년 7월 파고다 아케이드의 철거되었다. 1991년 10월 25일 사적 제354호로 지정되었고, 1992년 5월 28일 탑골 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공원 내에는 팔각정을 중심으로 원각사지10층석탑(국보 제2호), 대원각사비(보물 제3호) 등의 문화재와 3·1운동 기념탑, 3·1운동 벽화, 의암 손병희 동상, 한용운 기념비 등이 있다.
탑골공원 舊 정문
『구 탑골공원 정문』은 1910~1913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1967년 공원 정비 당시 서울대학교 법대 정문으로 이전(1969년 실시)되어 현재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초등학교의 정문으로 이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