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수필에 있어서 문학적 장치에 관한 사견과 그 밖의 잡다한 생각들
비록 내가 수필가로 등단을 하였지만 어쩌면 나는 수필 뿐 아니라 문학에 관한한 주인공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무슨 자괴적인 말인가 하고 의아해 할 분들이 많겠지만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의 능력이 아무리 출중하거나 문재가 뛰어나 그들보다 많은 시간과 수고를 할애하지 않고도 능력을 인정받게 된다면 이는 매우 불합리한 처사이다. 역설적으로 내가 수필가로서 성공적인 삶을 산다면 어쩌면 그것은 평생 문학을 하며 살아왔던 사람들에 대한 모독이 될 것이다. 생각건대 적어도 그것은 순리가 아니다. 또한 내 자신 그런 공명심이나 욕심이 없다. 그런 마음가짐에 의해 사심 없는 눈으로 작품을 대하고 거침없이 문제를 토론하는 원동력 된다면 내 자신의 영달보다는 동료 문우들에게 더욱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명문이 무엇인가?
일전에 K선생이 ‘명문이라 여기는 수필이나 문장을 뽑아보라’는 과제를 주었다. 허다하게 많은 작품 속에서 내가 ‘참 좋다. 참 좋은 글(수필, 작품)’이라고 느꼈던 것은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 중 딱 한 작품을 선택하고 딱 한 문장을 뽑아 ‘명문’이라 선택하는 일은 로또복권의 당첨번호 맞히기보다 더 어려웠다.
가뜩이나 그 작품이나 문장이 명문인 이유나 근거까지 들라니 이건 단순한 숙제가 아닌 고문이었다. 하지만 명색이 수필가라고 그런 질문에 대해 한 번 쯤은 숙고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보았다.
그런데, 생각이 그 즈음에 이르자 우선 ‘명문장’에 대한 정의부터 내려야 했다. 수 십 년 전에 그런 문제를 생각했다면 분명 교화적이거나 철학적이면서도 고상한 성어나 문자가 깃든 문장을 꼽았을 것이다. 그런데 굳이 그러려면 차라리 명언집이나 격언집에서 한 문장을 고르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가뜩이나 수필 작품 속에서 그런 부분을 발췌하는 것이라면 이는 분명 질문에 모순이 있다고 여겨진다. 그 이유는 수필에서의 명문장이란 그 수필 속에 함께 해야만 명문장이 되는 것이지 그것을 독립적으로 분리하여서는 그 의미마저 모호해질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그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고심하던 중에 하루는 내게 재미있는 일화가 생겼다.
내가 근무하는 약국에는 40세의 아주머니 전산원이 있다. 상대적으로 완벽에 가깝도록 일처리를 하는 나의 방식과는 대조적으로 그녀는 소소한 실수가 잦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녀를 쉬 팽하지 못하고 함께하는 이유는 내가 갖지 않은 좋은 면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늘 쉼 없이 너스레를 떨고 언제나 밝고 긍정적인 모습을 잃지 않았다. 특히 상대와의 대화에 어떤 형태로건 추임새를 넣는 듯하며 대화를 이끌어 가는 모습은 그녀의 친구나 지인들로부터 쉴 새 없이 그녀의 전화벨을 울리게 하는 원동력이라 유추할 수 있었다.
몇 달 전에 옆 건물에 있던 식당이 문을 닫고 난 뒤부터 가뜩이나 마뜩찮은 점심식사 해결문제가 더욱 난관에 봉착했다. 밥을 먹는 중에도 눈치 없이 손님이 들이닥치는 약국 업무의 구조상 약국 안에서 점심을 해결해야 했고 가끔 도시락을 싸다닐 때도 있지만 시켜 먹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와중에 애용하던 이웃 분식점까지 없어져 버렸으니 늘 점심때가 다가오면 무엇을 먹을지 고민해야 했다. 평소에 입맛이 깐깐한 나로서는 시켜 먹는 것도 마뜩찮아 가끔은 간단한 조리기구가 준비되어 있는 것을 활용하여 직접 간단한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문론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니 사전에 합의하여 그런 날은 도시락을 싸 오지 않는 대신 각자 재료를 분담하여 가지고 와 요리를 해 먹었다.
딱히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나는 간단한 인스턴트 음식을 해 먹어도 그냥 있는 그대로 끓여 먹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다못해 라면을 끓여 먹어도 최소한 파나 김치, 또 그에 맞는 단무지를 가져와야 하고, ‘짜○○티’를 끓여 먹으려면 오이와 단무지 채를 준비하고 면과 소스를 따로 만들었다. 그래봐야 인스턴트 음식이 별다르겠는가만 그래도 평소에 그런 식으로 먹어 보지 못한 그녀에겐 색다른 맛이 났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내가 마련해준 그런 음식을 먹을 때 마다 늘 ‘맛있어요, 정말 맛있어요’라는 덕담을 연발하며 그릇을 싹싹 비웠다. 하지만 어떨 땐 ‘맛은 있는데 자신에겐 짜다’는 둥, ‘아무래도 인스턴트 음식이라 미원이 많이 들어가서 그런지 느끼하다’는 둥 자신의 솔직한 의견도 빼 놓지 않았다. 나는 상대적으로 그녀보단 다소 짜게 먹는지라 궁리 끝에 일부러 다소 싱겁게 음식을 만든 뒤 나는 따로 소금으로 간을 맞춰 먹었다.
그렇게 음식을 먹다보면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음식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고, 우연히 ‘수제비’이야기가 나왔는데 늘 반죽하는 것을 실패해 좀처럼 맛있는 수제비를 먹어 보질 못했다고 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 보니 수제비 반죽을 할 때 간수를 넣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말로 설명을 해 줘도 그녀에겐 엄두가 나질 않는가 보았다. 하는 수 없이 다음 날은 수제비를 끓여 주기로 했다. 가장 중요한 반죽은 집에서 미리 준비해 오기로 하고 그 밖의 재료는 내가 일러 준 대로 그녀가 가져 오기로 했다. 다음 날, 마침내 두 사람은 간이 식탁 위에 놓인 당근 채와 참기름이 살짝 얹어진 수제비가 담긴 그릇을 마주하였다. 그녀가 먼저 맛을 보더니 그 다음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도 그냥 따라서 먹다가 아무래도 평소와는 달리 아무런 반응이 없자 ‘어때, 먹을 만 해?’라고 물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내가 먹어봐도 별 문제가 없는 듯 했는데, 간이 맞질 않나 왜 반응이 없지...이런 저런 생각에 다시 재차 물었다. ‘아 맛이 어떠냐는 데 왜 대답이 없어~’한참을 먹는데 열중하던 그녀는 그제야 정신이 퍼뜩 든 듯 고개를 들었는데 무슨 일인지 그녀의 눈이 촉촉해 보였다. 연신 입속의 수제비를 씹으며 그녀가 내뱉는 말.
‘음 음 행복해욤...’ 그녀는 그 말 한마디를 남기곤 다시 정신없이 다시 그릇에 코를 박고있었다.
그 순간, 나는 무릎을 치며 말했다. ‘아하하, 네 그 말 한마디가 내가 고민하던 문제를 해결해 주었네’ 무늣소리냐는 듯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그녀에게 나는 ‘명문’이란 무엇인가에 관해 고민해 왔던 그 동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명문이란 ‘어떤 상황에 가장 적합한 최상의 표현’이라는 것을.
그녀는 맛있는 것을 먹으며 단지 ‘맛있다, 정말 맛있다’는 등의 평소에 자주 쓰던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솔직히 음식이 맛있는 것을 ‘맛있다, 진짜 맛있다,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르겠다’는 등의 표현 외에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언어적 수단이 무엇이란 말인가. 아무리 명 수필가라고 해도 ‘맛있다’는 것을 ‘행복하다’는 표현으로 대신할 수 있는 발상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생각건대 명문이란 바로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가장 적절한 최상의 표현방법. 수필가는 바로 그런 발상을 부단히 생각하고 그것을 적절하게 글 속에 담아내려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그러한 연유로 나는 명문장을 독립적으로 떼어 내서 보인다는 것은 불가한 일이란 결론에 도달했고 그러한 적절한 문장이 한껏 어우러져 좋은 글을 이루는 작품은 존재할 것이라 생각한다.
좋은 글과 수필의 진정성
명문장을 고민하면서 이런 저런 책을 뒤지다 장 돈식 선생의 “빈산의 노랑꽃”을 참 인상적으로 읽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작품이 훌륭한 것은 아닐 뿐 아니라 그다지 명 수필이라고 할 정도로 딱히 눈에 번쩍 뜨이는 것은 없었지만 참으로 묘한 마력을 지닌 듯 글 속으로 빨려 들어갔던 것 같았다. 그 추위 속의 산 속 생활에서 벙거지를 뒤집어쓰고 글을 쓰면서 행복하다고 주장? 하는데 이걸 믿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만 당신의 글 속에서는 진심이 느껴졌고 도시의 편함에 젖어 이따금 그런 노후를 꿈꾸거나 상상하며 낭만에 젖는(하지만 정작 그렇게 살라면 아마 몇 달도 버티지 못하고 튀어나갈 것이면서(사실 나도 노후에는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런 한적한 곳에서 살 꿈을 꾸고 있다) 진정 그런 삶을 사랑하고 그 속에서 행복해 하는 모습이 그려졌기 때문이다.(진정성)
서사수필에서의 작가의 개입
근자에 서사수필에 대한 독자의 호응이 크다. 에세이스트가 출범한 이후로 지금까지 서사수필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고 작가의 적극적인 참여로 우수한 작품들도 많이 선 보였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하여 수필의 중흥이 곧 서사수필의 양산으로 이루어진다고는 생각지 않으며 이는 일시적인 유행이라 보여 진다. 서사수필은 여러 수필장르의 한 부분일 뿐이다.
나는 지금까지 서사수필은 단지 작가가 경험했거나 겪은 각별한 이야기(물론 독자에게도 이야기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을 주거나 강한 인상을 남기는 그런) 자체만을 서술하는 것은 문학이 될 수 없다고 배웠다. 적어도 어느 부분에 작가가 개입하여 작가의 사유를 피력하거나 표현해야만 어느 개인의 (특별한 또는 감동적이거나 등등) 이야기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닌 문학이 된다고 배웠고 또 그렇게 써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어떤 에피소드가 문학이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개입(여기서 말하는 일정한 개입이란 규칙적인 개입을 말하는 것이 아닌 부분 부분에 또는 전체적인 이야기의 말미 등에 개입한다는 의미)이 필요하다는 것, 즉 의미화가 필요하다는 것인데 근자에 들어 그 부분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요는 과연 스토리의 전개만으로는 명 수필이 될 수 없는 것인지, 또 그렇게 개입하는 문장을 넣는다면 요소 요소에 조금씩 들어가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전체적인 이야기를 아우른 다음, 말미 즈음에 방점을 찍듯 문장을 넣는 것이 좋은지(물론 이러한 공방은 사실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case by case 이기 때문이다) 등등에 대한 생각이다.
이런 생각을 정리해 보기 위해 그 동안 에세이스트 지면에 실렸던 ‘문제작가 특집’에 수록된 작품 중 주로 서사수필에 대해 다시 한 번 리뷰 해 보았다.
에세이스트의 문제작가 특집에 한 때 고백수필(내가 그냥 이름 지어 본 것)류의 서사수필들이 유행했고 많은 독자들의 호응과 찬사를 받았다.
그 중 다수는 극적인 이야기가 펼쳐지고 말미에 작가의 사유가 개입하는 (이른바 문학화를 위한 작업?) 것으로 마무리 짓는 형태의 작품이 다수 있다. 또한 호응도 컸으며 그 중에는 그 해의 베스트 10 작품상도 수상한 작품들도 다수 있다.
지난 에세이스트지에 소개 된 그런 류의 수필작품들을 개략적으로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개인적으로 뽑은 것이므로 객관성은 없음)
예)
4회 조 정은 종달새는 날아오르고
8회 채 환 인형 짓는 여자
15회 허 원주 가상환자, 머리카락, 변비...
19 김 병기 화두 외
22회 강 병기 어머니는 아직도 꿈만 꾸신다
25회 이 귀복 아버지의 난닝구
26회 김 종길 속죄
27 안 정혜 아버지를 부탁해
30 변 애선 그 여자
32 김 기철 비
38 김 윤재 나는 혼자서 고개를 넘고 있었다, 유화 한 점, 당숙
작품 중에는 작가가 말미에 개입하여 이야기의 결론을 지은 작품도 있고 작가가 전혀 개입하지 않고 서사만을 보여주는 작품도 있다. 전자를 이른바 닫힌 문장, 후자를 열린 문장이라 한다고 들었다.
다시 말해서 그 표현은 이른바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작가가 결론을 보여줌으로서 독자의 사유를 일부 제한하여 생각게 하는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작가가 일체 개입하지 않음으로서 모든 이야기의 결론과 그에 따른 사유를 독자에게 맡기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분명 장단점이 있을 것이다. 애초에 나는 이 부분을 숙고해보려 했지만 사실 결론은 이미 나 있었다. 이 또한 정답은 없다는 것이다. 오직 그것은 작가의 마음이며 글의 성격에 따라 선택되어질 부분일 것이다.
다만, 예로 들은 작품에서 내가 가장 좋게 생각했던 작품은 김기철 선생의 “비”였다. 소위 말하는 열린 텍스트(문장) 형태의 수필작품이다. 굳이 그 작품을 선택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닫힌 문장의 작품들의 경우는 대부분의 결론이 글을 읽는 중에 독자가 유추할 수 있는 결론 이었다. 물론 설령 그러하더라도 작가의 설득력 있는 문장이나 독특한 사유나 기발한 시각이 보였다면 내 생각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아쉽게도 대부분의 닫힌 문장의 서사수필의 경우 거개가 일반적이거나 통상적인 사유의 법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았고 설령 다소 독특하거나 신선한 사유를 보였다 할지라도 어떤 이유에선지는 몰라도 오히려 억지스러운 느낌을 받게 되어 차라리 그 부분을 쓰지 않고 독자의 몫으로 남겨 두는 것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구체적으로 특정 작품을 찍어서 논하기에는 다소 논란의 소지가 있을 것 같아 나의 사유는 이 정도로 하려한다. 대신 내 주변의 작가의 작품에서가 아닌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서사수필의 작품 두 편을 소개한다.
-닫힌 문장의 예
주 자청의 아버지의 뒷 모습(1925년)
(참고로 주자청의 아버지의 뒷모습의 경우, 다소 신파적이고 유치하다고 할 정도의 작품이겠지만 문제는 이 작품이 쓰여 진 시기이다. 1925년. 이미 그 시대에 작가는 현대적인 수필의 골격을 갖춘 수필작품을 썼으며 서사적 묘사 또한 대단히 섬세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작가가 요소요소에 개입하여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그리움 등의 감성적 표현을 집어넣음으로서 오히려 독자로 하여금 다소 부담스럽게 한다는 것이다.
-열린 문장의 예
나가이 다카시 로사리오의 사슬(1945년 이후?) 51년에 사망
이 작품을 읽고 나는 한동안 패닉상태에 빠졌었다. 작가의 감성이 일체 개입하지 않고 담담히 서술 하는 듯 했지만, 실제로 작가의 감성은 그 속에 깊숙이 내재되어 있음을 느꼈고,(다시 말해서 작가는 당신의 감정이나 사유를 한 결 같이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역사적인 충격적 사실을 무엇보다 담담하고 냉정하게 써 내려간 것에 모골이 송연함을 느꼈다. (어떻게 그렇게 냉정하게 쓸 수 있느냐고...) 굳이 작가가 문학적으로 개입한 문장이라고 한다면 마지막 대목의 “미안해요 미안해요” 일 것이다. 어쩌면 이 부분이 유일하게 작가가 개입하여 심경을 드러낸 부분이라 하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직설적으로 드러내지 않았기에 최고의 작품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선생의 작품을 접하고 난 후에야 서사수필에서 작가의 개입은 그런 형태로 하여 열린 문장으로 쓰는 것이 더욱 독자에게 어필 할 수 있으며 이는 더 훌륭한 문학적 가치를 가진다고 개인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더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 우리 수필가들은...
보다 나은 수필가가 되기 위해서는...이라는 질문으로 고민하던 중 K 선생으로부터 책 한 권을 소개 받았다.
신 형철(문학 평론가, 1976년 생)선생이 쓴 “느낌의 공동체(저서)”였다. 알다시피 그 책은 주로 시에 관한 신 선생의 평론을 실을 글이었다. 본문의 내용 중에도 주옥같은 글과 생각해 볼만한 이야기가 많았지만 특히 시에만 국한되지 않고 소설과 수필 등 모든 문학에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글이 “전문”과 “후주”여서 소개한다.
(후주 발췌문)
모든 훌륭한 예술 작품에는 최소한 다음 세 가지 종류의 가치가 따로 도 같이 존재한다. 물론 문학의 경우도 그렇다.
첫째는 인식적 가치이다.
훌륭한 예술 작품은 인간과 세계에 대해서 우리가 미처 몰랐던 무언가를 알게 한다. 그 ‘무언가’는 과학 철학 종교 등이 제공하는 인식적 가치와 함께 갈 수도 있고 그것들을 거스를 수도 있지만, 최상의 경우에는 그것들과 무관한 곳에서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 경우 그 인식적 가치는 과학 철학 종교의 언어들로 잘 번역되지 않을 것이다. 좋은 문학 작품에서 인식적 가치는 그 작품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때 작품은 내용물을 꺼내려 하면 부서지고 마는 도자기와 같다.
-수필에서도 훌륭한 작품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다. 그것을 분석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하는 것이 때로는 그 작품을 망치는 것 일 수 있다.-
둘째는 정서적 가치다.
훌륭한 예술 작품은 우리를 기쁘게 혹은 슬프게 한다. 기쁨이 필요한 사람에게 기쁨을, 슬픔이 필요한 사람에게 슬픔을 제공하는 일이 일반적으로 작품에 요구되는 것들이다. 그러나 어떤 작품은 기쁨을 슬프게 하고, 슬픔을 기쁘게 해서 낯선 정서를 창출해내기도 한다. 그 경우 우리는 익숙한 정서를 작품에서 재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제공하는 낯선 정서에 서서히 젖어 들어가게 될 것이다. 어떤 정서는 특정한 작품 안에서만 느낄 수 있다. 작품은 정서의 창조다.
셋째는 미적 가치이다.
훌륭한 예술 작품은 아름답다. 문학의 경우 그 아름다움은 대개 모국어의 조탁(彫琢)과 선용(善用)에서 생겨나는 아름다움이고 내용과 형식의 긴밀한 조화가 뿜어내는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작품은 흔히 아름답다고 간주되는 것을 전복하는 추의 미학을 보여주기도 하고 심드렁한 방식으로 미추를 해체하여 이상한 아름다움에 도달하기도 한다. 아름다움을 더욱 아름답게 하는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다.
독자가 이 가치들을 전달받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다. 그것이 먼저 찾아오기 때문에 독자가 마중을 나가기만 하면 될 때도 있고, 그것을 만나기 위해 독자가 낯선 길을 더듬어가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분명하게 눈에 보여서 편안하지만 그래서 재미가 덜 할 때도 있고, 너무 희미해서 과연 그것이 있기는 한가 수상쩍어 보일 때도 있을 것이다. 대개 전자를 ‘고전적’이라 하고 후자를 ‘실험적’이라 한다. 그러나 오늘의 고전은 어제의 실험이었고, 오늘의 실험은 내일의 고전이 될 수 있다.
(전문 중 발췌문)
브레히트 진실을 말해야 한다
아우슈비츠 생존자 첼란
말들로부터 진실을 지켜내야 한다.
진실은 그것이 참으로 진실인 한에서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인은(수필가는) 함부로 진실을 진술하기 보다는 진실이 거주하는 고도의 언어적 구조물을 구축해야 한다.
중략
요컨대 문제는 언어를 대하는 태도이다. 우리가 보기에, 재현해야 할 진실이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언어는 그 진실을 투명하게 담아낼 수 있다는 느슨한 믿음은 미학적으로 보수적이다.
반대로 언어가 사태를 객관적으로 재현하고 진실을 투명하게 포착할 수 있다는 믿음을 의심하는 태도는 미학적으로 진보적이다....
--------------------------부록
아버지의 뒷모습
주자청
아버지를 뵙지 못한 지 벌써 두 해가 지났습니다. 하지만 그때 본 아버지의 뒷모습만큼은 가슴에 사무쳐 잊히질 않습니다.
그해 겨울, 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게다가 아버지도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참으로 엎친 데 덮친 격이었습니다. 베이징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나는 할머니 장례를 치르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도착해서 아버지를 뵙고, 마당에 쌓여 있는 너저분한 살림살이들을 보니, 또다시 할머니 생각이 솟구쳐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꿋꿋했습니다.
"기왕 당한 일을 어쩌겠느냐. 너무 괴로워 마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는 법이다!"
아버지는 살림살이를 팔아 그간의 빚을 겨우 갚았습니다. 하지만 할머니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또 빚을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집안 상황은 그야말로 참담했습니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고, 아버지도 실직했으니까요. 장례를 다 치르자, 아버지는 일자리를 구하러 난징으로 가야 했습니다. 나도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가야 해서 우리는 난징까지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난징에 도착한 첫날,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하루를 보냈습니다. 이튿날 오후에 베이징으로 떠나는 기차를 탈 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기차역에 나오지 않기로 했습니다. 대신 아는 사람에게 나의 배웅을 부탁했습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얼마나 신신당부를 하는지, 정말이지 시시콜콜한 일까지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안심이 안 되는지, 자꾸 머뭇거렸습니다. 사실 그때 내 나이 벌써 스무 살이었고, 베이징까지 서너 번이나 갔다 온 적이 있던 터라, 아버지가 염려할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자신이 손수 배웅해 주기로 했습니다. 나는 몇 번이나 그럴 필요 없다고 만류했지만, "아니다, 내가 직접 가야겠다." 며 고집을 부렸습니다.
우리는 배를 타고 강을 건너 기차역에 도착했습니다. 내가 표를 사는 동안, 아버지는 짐을 지켰습니다. 짊을 옮기려니 짐이 너무 많아, 짐꾼을 불러야만 했습니다. 아버지는 짐꾼과 값을 흥정하느라 바빴습니다. 아무리 봐도 아버지의 말솜씨가 부족한 듯하여, 내가 나설까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아버지가 흥정을 마쳤고, 나는 기차에 올랐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사 주신 자주색 털외투를 의자 위에 깔았습니다. 아버지는 짐들 잘 살피고, 감기 조심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아버지는 역무원에게도 나를 잘 보살펴 달라 부탁했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세상 물정에 어두운 것 같아 속으로 몰래 웃었습니다. 역무원들이야 돈만 아는 사람들인데, 그들에게 그런 부탁을 해 봐야 헛일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나 같은 어른이 자기 앞가림도 못할까요? 아,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는 정말 제 잘난 줄만 알았습니다.
"아버지, 이제 그만 가 보세요."
내가 말했습니다.
그러자 창밖을 내다보던 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가서 귤을 몇 개 사 오마. 넌 여기 있어라."
건너편 플랫폼의 난간 너머로 잡동사니를 파는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그곳까지 가려면 철로를 가로질러야 합니다. 게다가 이쪽 철로로 내려갔다가 건너편 플랫폼을 기어올라야 합니다. 뚱뚱한 아버지가 다녀오기에는 힘든 길이었습니다. 내가 가겠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한사코 말렸습니다. 나는 아버지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색 두루마기 위에 검정색 마고자를 걸친 아버지가 뒤뚱뒤뚱 철로로 다가가더니, 천천히 밑으로 내려갔습니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별로 힘들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철로를 건넌 다음 건너편 플랫폼 위로 다시 오르는 일은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두 손으로 플랫폼의 바닥을 움켜잡고 두 다리로 벽을 기어오르려 했습니다. 아버지는 뚱뚱한 몸을 살짝 왼쪽으로 기울인 채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때 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순간 내 두 눈에서 눈물이 왈칵 솟아올랐습니다. 나는 재빨리 눈물을 닦았습니다. 아버지가 보면 어쩌나, 다른 사람들이 보면 어쩌나 걱정을 하면서요. 내가 다시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을 때, 아버지는 굴을 한 아름 사서 가슴에 품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철로를 다시 건너오기 위해, 우선 귤들을 땅바닥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런 다음 플랫폼을 천천히 기어 내려와 다시 귤을 들고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아버지가 이쪽에 거의 다다르자, 나는 재빨리 나가 아버지를 부축했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다시 기차를 탔고, 아버지는 내 외투 위에 귤을 몽땅 올려놓았습니다. 그런 다음 옷에 묻은 먼지를 탈탈 털었습니다.
아버지는 그제야 마음이 좀 가벼워진 듯 보였지요. 잠시 후,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 난 이제 가 보마. 도착하면 편지해라!"
나는 아버지가 가는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았습니다. 몇 걸음 걸어가던 아버지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그만 들어가거라."
분주한 사람들 사이로 아버지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나는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을 때, 나는 흐르던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루하루 바쁘게 지냈습니다. 집안 형편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고향을 떠나 타지를 떠돌던 아버지는 많은 일들을 혼자 힘으로 치러 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 또 이렇게 어려워질 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가슴 속에 화가 쌓이면 저절로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예전의 아버지는 나의 잘못된 행동과 집안일에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아버지는 나의 허물을 다 잊어버리고, 내 걱정만 했습니다. 베이징으로 돌아온 후, 아버지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편지에는 ……
"나는 편히 잘 지내고 있다. 다만 어깨가 몹시 아프구나. 젓가락질을 할 때나 붓을 들 때도 많이 불편하단다. 나도 이제 많이 늙었나 보다."
여기까지 읽어 내려가자, 반짝이는 눈물방울 속에 남색 두루마기에 검은 마고자를 입은 뚱뚱한 아버지의 뒷모습이 어른거렸습니다.
아! 언제쯤 아버지를 다시 볼 수 있을까요. -1925년, 베이징에서
글쓴이: 1898년 중국에서 태어나 북경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청화대학교에서 중국 문학을 가르치면서 아름다운 글을 많이 썼다. 그의 글은 감정이 진실 되고 묘사가 정교하여 마치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것 같다는 평을 듣는다. 특히 《아버지의 뒷모습》은 중국 현대 산문 문학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지은 책으로는 《달밤의 연못》《여인》《봄》등이 있다.
로사리오의 사슬
-나가이 다카시
내가 결혼을 한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삼 년째 되는 해였는데 당시 조수로서 월급이 사십 원이었다. 만주 사변 당시로 물가는 싼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사십 원으로 살림을 꾸려가는 건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아내로부터 불평을 들은 적이 없다. 새 옷 한 벌 사 주지 않았다. 극장에 간일도 없다. 둘이서 요리 집으로 외식을 하러 간일도 없다. 오락이라고 해 보았자 일 년에 한 번 바다에 간 정도뿐이다. 나는 매일 밤늦게까지 연구실에 틀어 박혀 있었고 아내는 살림에 전념하고 있었다. 월 사십 원의 생활은 칠년 간 계속됐다. 가족의 옷은 전부 아내의 수제품이었다. 내 양말에서부터 와이셔츠에 이르기까지 한 땀 한 땀 정성을 쏟아 만든 것이었다. 그걸 보고 연구실의 아가씨가 "선생님은 낮에도 사모님에게 안겨 있군요"라고 했다.
아내는 화장을 하지 않았다. 프랑스제의 입술연지도 아탈리아제 향수도 손쉽게 살 수 있는 시절이었다. 그리고 거리에는 유한마담이라고 불리는 계급의 사람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는 시대였다. 식량도 썩어나도록 풍부했다. 아내는 갠 날엔 거름통을 메고 밭에서 일하고 비가 오는 날에는 바느질이랑 뜨개질로 일손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마을의 부인회 연합 반장의 바쁜 역할도 해내고 있었다. 거기에다 나의 아내로서의 임무, 반미치광이의 시중도 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한 가지 새로운 연구에 착수하면 나라는 인간은 변해 버린다. 연구 테마에 온통 정신을 빼앗겨 버린다. 며칠씩 도서실에 틀어박혀 선인들의 업적을 조사한다. 카드를 만든다. 그리고 그걸 실험에 착수한다. 몇 개월 만에 결과가 나온다. 그걸 정리하여 논문을 쓴다. 교정을 본다. 이런 수순인데 그러는 동안에는 연구 이외의 것은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아이가 울면 노려본다. 그러나 무슨 말을 했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이 없다. 내가 대학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스쳐 지나가는데 모르고 지나친 일이 두 번 있었다고 한다. 뒤에 아내에게서 그 말을 듣고 나는 '저런' 하고 놀랐다. 그럴 때의 나는 허공을 쏘아보면서 입속에서 무언가 중얼중얼하기 때문에 어쩐지 무섭다고 한다. "마치 몽유병자를 간호하고 있는 것 같아요"라고 아내가 말한 적이 있다. 꼭 의논해야 할 집안 일이 생겨도 말을 못하고, 남편의 주의를 산만하게 할 수도 없고, 두뇌를 씀으로 특별 요리를 만들어야 하고, 자칫 방심하고 있으면 넥타이도 잊어버리고 뛰쳐나가기 때문에 몸에 걸치는 일상사도 신경을 늦출 수가 없고, 방안에 가득히 늘어놓은 조사 카드, 노트, 참고서, 사진, 휴지 등등 치워도 되는 건지 안 되는 건지 알 수 가 없고, 저녁 귀가 시간은 일정하지 않고... 이런 남편의 시중을 용케도 아내는 그 연약한 팔로 해낸 것이다.
이런 아내의 노고에 대해서 내가 보답한 것은 겨우 잡지에 실린 내 논문을 보여 주는 것뿐이었다. 남들 같으면 소파에 편안히 기대고 파이프를 피우면서, 혹은 방바닥에 드러누워서 대충대충 읽는 시늉이나 하는 잡지를 아내는 단정하게 고쳐 앉아 정중히 받들고 난 다음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었다. 잉크 냄새 나는 활자가 내 이름을 찍어놓은 그 페이지, 그것은 전문 용어로 가득 차 읽어도 이해 못 하는 문장이다. 그것은 몇 페이지에 불과한 짧은 것이지만 그 속에 남편의 생명이 마치 가다랭이포처럼 깎여 들어 차 있는 것을 아는 아내는 눈시울까지 적시면서 읽어 가는 것이었다. 그 옆에서 나는 아내 대신 어린 것을 안고 어르면서 잠시 가슴속에 온천물이 솟아나는 것 같은 생각에 잠겨 있다.
우리 집의 행복한 시간, 그것은 일요일 아침 모두 함께 성당에 미사 참례하러 가는 때였다. 나는 큰아이 손을 끌고 아내는 작은아이를 업고 밭둑길로 언덕 위 빨간 벽돌 성당에 간다. 종각에서는 우리를 부르는 종소리가 맑고 부드럽게 울려 퍼진다. 저 집에서도 이 집에서도 나들이옷으로 갈아입은 사람들이 밝은 얼굴로 나와서 같은 길에 합류했다.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비쳐드는 아침 햇살의 물결 속에 앉아서 내 목소리도 아내의 목소리도 더듬거리는 어린 것 목소리도 옆자리에 앉은 늙은 농부의 탁한 목소리도 하나가 되어 하늘에 계신 우리들의 아버지를 찬미해 올렸다. 그런 행복한 날은 이제 나에게는 오지 않는다. 나의 교우는 매우 적었다. 모두 비슷한 처지의 가난한 학자들이었다.
어느 여름밤이었다. 내가 좁은 마당, 돌에 앉아서 달빛을 받고 있으려니까 해부학과의 나카무라 조교수가 한손에 부채를 들고 훌쩍 찾아왔다. 그는 내 앞에 있는 돌에 걸터앉자마자, 도롱뇽 알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다. 이런 것이 언제나 우리 집 평상에서의 화제였다. 그는 처녀 생식의 실험을 하고 있었다. 작년에 참개구리 알의 실험에서는 성공을 거두었다. 알의 어느 극(極)을 백금 침으로 가볍게 콕콕 찔려 주면 그것이 정충 진입과 같은 자극이 되는지 알은 정상적으로 분할을 시작하고 차츰 성장하여 정상적인 개구리가 되었다. 금년에도 그것을 도롱뇽의 알로 실험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에 성공하면 어떻게 해서든지 포유류로 해보고 싶은 것이다. 아내가 들통에 우물물을 길어 왔다. 그 안에 오이와 토마토가 떠 있었다. 니카무라 군은 왼손에 토마토를 올려놓고 오른손에 오이를 쥐고 그걸 난자와 정자로 가장하여 바싹 갖다 댔다가 떼었다가 하면서 계속 설명을 하면서 덥석덥석 베어 먹었으므로 어느 틈에 난자도 정자도 위장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아내는 언제나처럼 좁은 뜰을 향해 나 있는 안방에서 셔츠에 다림질을 하면서 두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느닷없이 나카무라 군이 안방에다 대고 말을 걸었다.
"사모님 머지않아 아이를 낳는 데는 남편이 필요 없을 것 같아요."
그랬더니 아내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럴까요?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부부의 목적이 아이를 낳는 일만은 아닐 텐데요."
나카무라 군은 이 대답을 듣고 방긋이 웃었다. 나는 조교수가 되어 월급이 백 원으로 올랐다. 아내는 그래서 겨우 마음을 놓았다. 머지않아 아이가 소학교에 다니게 되므로 사십 원으로는 난감할 처지였다. 우리에게는 아직 연극 구경 같은 걸 갈 여유는 생기지 않았다.
그로부터 5년이 흘렀다. 나는 연구실에서 오랫동안 몰두하고 있던 방사선의 장해를 받아 백혈병에 걸리고 말았다. 남은 목숨이 앞으로 몇 년 되지 않는다는 진단을 받은 날 나는 신뢰하고 있는 아내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선후책을 생각하자고 말했다. 그때 아내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듣고 있었다. 내가 예상하고 있었던 대로 아내가 믿음직스러워 기뻤다. 이런 운명은 아내도 각오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아내라면 내가 죽은 뒤에 아이들을 훌륭히 키워 나처럼 방사선 연구에 종사하는 학자로 만들어 주겠지. 나는 사후의 근심 없이 연구의 마지막 마무리에 몰두할 수 있었다. 아내는 더욱 깊은 애정을 가지고 나를 위로해 주었다.
병세가 차츰 진행하여 공습경보가 내려 무거운 철모를 쓰거나 하면 다리가 비틀거릴 정도였다. 한번은 아내에게 업혀서 출근한 일도 있었다. 8월 8일 아침 아내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생글생글 웃으면서 출근하는 나를 배웅했다. 조금 가다가 나는 도시락을 잊은 것이 생각나 집에 되돌아갔다. 그리고 뜻밖에도 현관에 엎드려 울고 있는 아내를 본 것이다. 그것이 이별이었다.
그날 밤은 방공 당번이어서 연구실에서 묵었다. 다음날인 9일. 원자 폭탄은 내 위에서 폭발했다. 나는 상처를 입었다. 순간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환자들의 구호에 바빴던 다섯 시간 뒤 나는 출혈로 밭에 쓰려졌다. 그때 아내의 죽음을 직감했다라고 하는 것은 아내가 끝내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서 대학까지 1킬로미터니까 기어서 와도 다섯 시간이면 올 수 있다. 설령 증상을 입었더라도 목숨이 있는 한은 기어서라도 기어코 나의 안위를 물으러 와 주었을 아내였다. 사흘째, 학생들의 사상자 처리도 일단락되었으므로 황혼 무렵 집에 돌아갔다. 온통 잿더미였다. 나는 금방 발견했다. 부엌이 있던 자리에 남아 있는 검은 덩어리를. 그것은 탈대로 타버리고 남은 골반과 요추였다.
곁에 십자가가 달린 로사리오의 사슬이 남아 있었다. 불에 탄 양동이에 아내를 주워 담았다. 아직 따뜻했다. 나는 그걸 가슴에 안고 묘지로 갔다.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죽어버려 저녁 해가 비치는 잿더미 위에 같은 모양의 까만 뼈가 여기저기 점점이 보였다. 내 뼈를 머지않아 아내가 안고 갈 예정이었는데... 운명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내 가슴에 안긴 아내가 바스락바스락 인산석회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미안해요 미안해요"라고 말하고 있는 거라고 들었다.
-나가이 다카시(1909-1951) 의학자. 나가사키 의과대학 졸업. 같은 학교 교수 역임. 1945년 피폭당하여 원자병 환자가 됨. 원자병 연구와 치료에 전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