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과 광화문 복원에 이르기까지
경복궁과 광화문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다섯 개의 궁궐 중 첫 번째로 만들어진 곳으로, 조선 왕조의 법궁이다.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후
종묘, 성곽과 사대문, 궁궐 등을 짓기 시작하는데 1394년 공사를 시작해 이듬해인 1395년에 경복궁을 완성한다. ‘큰 복을 누리라’는
뜻을 가진 ‘경복(景福)’이라는 이름은 정도전이 지은 것이다.
왕자의 난 등이 일어나면서 다시 개경으로 천도하는 등 조선 초기 혼란한 정치 상황 속에서 경복궁은 궁궐로서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하다가
세종 때에 이르러 정치 상황이 안정되고 비로소 이곳이 조선 왕조의 중심지로 역할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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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의 광화문 앞으로는 조선에서 가장 넓은 대로인 육조거리가 남쪽으로 뻗어있고 좌우로는 행정관청이 밀집하여 있는 조선의 정치 1번지였다.
서울에는 궁궐이 5곳 있는데,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만 성문처럼 돌로 된 문위에 누각이 올라간 형태로 조선의 건국 이후 오랫동안 국가를
상징하는 중심이였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이 나 무너지게 되는데 조선 말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지휘 아래 새로 지어진다. 이때 광화문도 다시 세웠다.
경복궁 중건을 통해 조선 왕실의 위엄을 높이고자 하였지만 얼마 되지 않아 건천궁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이곳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가게 되니, 단청의 색이 채 마르기도 전에 또 다시 빈집이 되어 버리는 비운을 겪는다. (네이버)
조선총독부청사(朝鮮總督府廳舍)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일본 제국의 식민 통치를 시행한 최고 행정 관청인
조선총독부가 사용한 건물이다.
1910년 한일 병합 이후 35년의 식민 통치 기간 동안에 조선총독부는 남산 왜성대와 경복궁의 총독부 청사 등 2곳이 있었다. 조선총독부 청사는
한일 병합 조약에 의해서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자 1907년에 건립된 남산 왜성대의 통감부 청사를 총독부 청사로 전용하였다가 사무 공간의
부족으로 1926년에 경복궁 흥례문 구역을 철거한 터에 신청사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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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 제국이 패망하자 조선총독부 청사는 미군정청에 인계되었다.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대한민국 정부가 청사를 다시 인계받아 정부 청사, 박물관 등으로 활용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청사 일부가 파괴되었고, 1990년대 중반에 일제 강점기의 잔재 청산을 이유로 그때까지 현존하던 청사를 철거하였다. (위키백과)
중앙청이라 불리운 일제 때 조선총독부 건물을 경복궁 내에 만듦으로써 조선 왕조의 상징을 훼손하고 조선의 자존심을 무너뜨렸으며,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또한 해체해 지금의 건춘문 자리 근처 북쪽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누각이 소실되었던 것을 이후 1968년 콘크리트로 복원했는데 당시 남아 있던 중앙청 자리를 기준으로
해서 세우다 보니 1865년 고종 중건 당시 원래의 경복궁 건물들이 이루고 있었던 선상에서 벗어나 틀어졌던 각도에 세웠던 것을 철거하고 원래
위치로 돌려 2010년 8월 15일 광화문의 복원공사를 마쳤다.
1894. 11. 서울의 중심부 남대문로 모습에 잡힌 광화문과 백악산 (광교통으로 가는 길)
19세기 후반(1895년) 서쪽에서 본 경복궁과 궁성 앞의 모습. 중앙에 광화문, 그 왼편에 흥례문, 근정문,
근정전이 차례로 보인다.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면 광화문 좌우측 담장 모서리에는 서십자각, 동십자각이
궁장과 연결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구한말 동편(측면)에서 본 경복궁 모습. 크기 w1287 h296 (크게보기 이미지 클릭!)
경복궁 동북쪽의 북촌에서 바라본 경복궁 전경. W 900 h375 (클릭하면 크게보기 됨)
1876년 교태전에서 시작된 화재로 내전 일곽이 대부분 불에 타버렸다. 사진에 강녕전과 교태전 등이 없는것으로 보아1888년 복구하기 이전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춘휘당과 보광당은 1890년 이후에 헐리고 이자리에 함회당과 집경당이 세워진다.
경복궁(景福宮) 정문인 광화문(光化門) 모습.
?과거의 모습이지만 광화문 누각의 단청과 편액(현판) 등 원형 그대로의 모습이 잘 보이는 사진이다.
1395년(태조 4년) 9월에 창건되어 정도전(鄭道傳)에 의해 사정문(四正門)으로 명명되었고 오문(午門)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425년(세종 7년) 집현전 학사들이 광화문(光化門)이라고 바꾸었다. 광화문 앞으로 지금과 달리 지면보다 높은 단(壇)위에 월대(月臺)가 놓여있어 궁궐 정문으로서의 위엄을 더했다.
광화문(光化門)은 3개의 홍예로 되어있는데 가운데 큰문은 왕이 사용하는 어문, 동서의 동협문, 서협문은 문관과 무관이 사용하는 문이다.
1863년 정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떨어진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위해 1865년 경복궁 공사를 착수하는데 이때 광화문도 다시 세웠다. 광화문 앞으로는 조선에서 가장 넓은 대로인 육조거리가 남쪽으로 뻗어있고 좌우로는 행정관청이 밀집하여 있는 조선의 정치 1번지였다.
서울에는 궁궐이 5곳 있는데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만 성문처럼 돌로 된 문위에 누각이 올라간 형태로 조선의 건국 이후 오랫동안 국가를 상징하는 중심이였다.
경복궁(景福宮) 정문인 광화문(光化門).
?예전의 광화문 앞은 지면보다 높은 단(壇)위에 월대(月臺)가 놓여있어 궁궐 정문으로서의 위엄을 더했다
광화문은 석축기단(石築基壇)에 3개의 홍예문(虹霓門)를 만들고 그 위에 정면 3칸의 중층우진각 지붕으로 된 목조문루를 세웠다. 목조건축의 양식은 다포식(多包式)으로 상하층이 모두 외이출목(外二出目)·내삼출목(內三出目), 외부는 제공(諸工) 뿌리를 쇠서로 하고, 내부는 운공(雲工)을 만들었으며, 첨차(墅遮) 양측면에는 모두 파련초각(波蓮草刻)을 하였다. 이 건물은 섬세한 수법과 웅대한 구조를 보여주고,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장려한 외관을 지닌 가장 뛰어난 궐문(闕門)으로 평가되었다.
광화문 3개의 궐문 중 가운데 칸이 높고 크다. 이곳은 임금이 행차하는 문이며 천정에는 주작(朱雀)을 그려넣었다. 동쪽문에는 천마(天馬)를 그렸고 서쪽문에는 거북을 그렸다. 정면 좌우에는 상상의 동물이자 영물인 해태상을 설치했다. 광화문 앞으로는 궐외각사인 이조(吏曹)·호조(戶曹)·예조(禮曹)·병조(兵曹)·형조(刑曹)·공조(工曹) 육조의 관아들이 늘어서 있었고 이를 육조거리라고 불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270여년 간 중건되지 못하다가 1864년(고종 1)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재건으로 다시 옛 모습을 되찾았다. 한일병합 후 1927년 조선총독부가 해체하여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북쪽에 이전시켰고, 설상가상 6·25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되고 말았다.
1968년에 전통적인 광화문의 모습을 상실한 채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복원시켰다. 그나마 도로확장을 위해 위치도 뒤쪽으로 밀려나 있었다. 2006년 12월부터 광화문 복원 및 이전 공사가 시작되어 전통적인 옛 모습을 찾기 시작했으며 2010년 8월에 완공되었다. (이상 네이버 지식백과)
? 광화문 동측면
구한말의 광화문과 육조거리 경복궁의 남쪽 정문인 광화문 앞 좌ㆍ우에 의정부를 비롯한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육조(六曺) 등 주요 관아가 건설 되면서 형성되었다. 광화문을 바라본 우측에는 의정부와 이조, 한성부, 호조가, 좌측에는 예조, 중추부, 사헌부, 병조, 형조, 공조 및 사역원이 차례로 세워졌다.
광화문을 통과하면 홍례문이 있고 그 뒤로는 근정문이 나오고 근정문을 지나면 조선정치의 핵심이자 경복궁의 중심건물인 근정전이 통과 해온 3개의 문과 중심축에 맞춰져 놓여 있고, 그 뒤로는 왕의 집무실, 왕의 침실, 왕비의 침실, 후원(지금의 청와대 일대) 그리고 담장을 넘어 북악(백악)산과 이어지며, 이는 육조거리와 함께 서울 도성 안의 남북의 중심축이자 조선의 상징적인 장소였다.
1890년 경 광화문 모습. 위와 같은 사진으로 보이는데 왼쪽에 해태가... 눈이 쌓여있는 겨울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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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光化門) 앞의 육조거리(六曹距離)
광화문 앞(육조거리)으로 배치된 국가의 정무(政務)를 맞아보던 행정관청은 다음과 같다.
서쪽부터 삼군부(三軍府)는 군사업무 담당, 중추부(中樞府)는 시대에 따라 기능이 달랐고 사헌부(司憲府)는 지금의 검찰과 비슷하고, 병조(兵曺)는 국방부, 형조(刑曺)는 법무부, 공조(工曺)는 건설교통부 정도가 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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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부터 의정부(議政府)는 내각회의, 예조(禮曺)는 교육, 의례, 외교 등을 담당하고, 이조(吏曺)는 人事를 담당하는 행정안전부, 호조(戶曺)는 재정, 세금 담당, 한성부(漢城府)는 서울시청, 기로소(耆老所)는 국가 원로 클럽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1903년 해태상의 두 소년. 1904년 이라고 된 것도... 이 아이들은 비교적 단정하게 차려입고 깔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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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태상 앞의 댕기머리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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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초, 광화문 앞 좌우의 해태상 모습.
좌) 복장으로 보아 관청에 들린 관료의 마부로 보인다. 말 주위의 둥글게 뭉쳐놓은 눈덩이를 보니 많은 량의 눈이 내린듯 하다.
우) 해태상 머리 위에 올라 서있는 소년 모습이 천진스럽게 보인다.
광화문(光化門) 앞 육조거리(六曹距離)에 어떤 연유인지 광화문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
1900년대 광화문 앞 인력거 행렬
1904년의 광화문. 이무렵 부터 광화문과 육조거리에 전봇대가 보이기 시작 한다.
광화문과 육조거리 양옆의 해태상이 한눈에 보인다.
광화문과 문 앞의 석재 난간(월대)의 원형 전체 모습을 가장 잘 보이게 촬영한 사진으로 보인다.
오른쪽 홍예문 안에 보이는 흰색의 가건물은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1915년 9월)하기 위한 준비작업 중인지 또는 총독부청사의 공사가 시작 된것으로 추정된다. 이무렵 전봇대 숫자도 늘었고 전선이 선명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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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위의 사진과 같은 것인데 최근 광화문 재 복원 당시 20세기 초에 사진에 나타난 광화문 현판 글씨체를 참고? 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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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리서 바라본 광화문(光化門)과 육조거리(六曹距離)
광화문 뒤로 조선 총독부 건물을 짓는 구조물이 보인다.
경복궁 안쪽 흥례문에서 바라본 광화문 뒷 모습.
흥례문이 헐리기 전의 사진으로 추정되는데, 넷상에서 광화문 전면 사진은 흔하게 볼 수 있지만 후면(안쪽)의 모습은 그리 흔치 않은 자료다.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에 저 무성한 잡초를 보면 궁의 주인이 없어 관리되지 않은 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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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미사변의 경복궁
? 을미사변을 묘사한 삽화.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 (三浦梧樓)의 지휘 아래 낭인들과 일부 조선 훈련대들이 경복궁에 침입 건청궁 옥호루에서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즉 을미사변이 발생했다.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를 제거한 일본제국은 김홍집을 비롯한 친일 내각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경복궁은 일제가 훈련시킨 군인들이 호위하게 했고 경복궁 밖에는 수많은 일본군을 배치시키는 등 고종을 철저히 유폐시켰다.
경복궁을 에워싼 수많은 일본군들 ㅣ KBS TV 화면 캡처
일본 공사 미우라(三浦梧樓)는 1895년 8월 군대와 낭인들을 동원하여 왕궁을 습격하고 왕비(명성황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켰다. 명성황후는 이때 폐서인(廢庶人) 되었으나 얼마 후 복위되었고,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하자 황후(明成)로 추존되었다.
일본의 정치적 간섭과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친러 세력과 내통하고 왕세자와 함께 1896년 2월 11일 갑자기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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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친러 정부가 집정하면서 열강에게 많은 이권을 넘겨주는 등 국가의 권익과 위신이 추락하고 국권의 침해가 심해지자 독립협회 인사들을 비롯한 많은 국민들이 국왕의 환궁과 자주 독립을 요구하였다. 이에 고종은 1897년 2월 경복궁이 아닌 덕수궁으로 환궁하였다. (생략 - 고종실록 중에서)
을미사변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명성황후가 시해된 건청궁 곤녕 옥호루 모습이다.
그 뒤로 서양식 건물인 관문각의 모습이 보인다.
경복궁 흥례문(興禮門)과 행각(行閣) 1910년대 초 모습. 임금이 살지 않는 경복궁의 모습은 보는 바와 같다.
광화문을 들어서면 2번째 문이며, 이 문을 통과하면 금천이 흐르고 그곳을 건너는 다리인 영제교가 있고 바로 앞에 근정문이다. 일제는 후일 잡초가 난 이 자리와 저 흥례문과 행각을 철거하고 총독부건물을 짓게 된다.
(인터넷 상에서 철거 전의 흥례문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그것도 행각과 함께있는 모습을 찾기란...)
광화문과 근정문(勤政文) 사 문인데 경복궁 내 광화문과 영제교(永濟橋) 또는 금천교(禁川橋)에 있는 문이다. 이 문은 임진왜란으로 경복궁과 함께 소실되었는데고종 때 복원하였으나 또 일본의 한일병합 후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기 위해 훨어냈다.
? 근정문과 모습. 영제교를 건너면 바로 근정문이고 근정전의 정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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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정문은 3문으로 되어있고 흥례문과 마찬가지로 답도가 있고 가운데 큰 문으로는 왕만이 드나들었다. 근정문 양 옆 동서로 난 문으로는 문관과 무관의 전용 출입문인데 동쪽의 일화문(日華門)으로는 문관(文官)이, 서쪽의 월화문(月華門)으로는 무관(武官)이 드나들었다.
당시 총독부는 남산에 있었는데 건물이 좁고 협소하였기 때문에 새로 건설계획에 착수하게 된다. 총독부청사를 지을 부지로 지금의 서울대학교 병원과 대학로 근처 등도 후보지로 선정 되었다고 한다. 반대가 있었음에도 권력에 의해 조선의 상징인 경복궁 안 근정문 바로 앞에 세워지게 된다. 위 사진의 영제교는 1915년 이전에 철거된 상태였다
근정문으로 가는 다리인 영제교와 다리 양 옆 금천을 내려다 보고 있는 천록
다리 남북 양쪽으로 4마리의 천록이 조각되어 있다. 이 주변으로는 벽을 두른 행각이 둘러져 있어 이곳에 내병조, 정색, 마색, 결속색의 관청이 있었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안쪽으로 벽을 만들지 않고 복도와 같은 텅빈 회랑처럼 복원 되어 있다.
어느새 광화문과 근정문 사이에 있는 홍례문과 그 옆을 둘러쌌던 행각도 자취없이 헐려버렸다. 흥례문에서 근정전의 주 출입구인 근정문으로 건너가던 영제교(사진) 다리 난간도 치우고 다리밑을 흐르던 금천, 명당수 개울도 묻어버려 물줄기가 끊겨 버렸다. 이 모든것들을 헐고 터를 넓혔다.
1900년대 초의 근정문 모습. 자료를 수집하며 이 사진이 대단히 중요한 자료라는 것을 알게 됬다.
?이 영역은 행각으로 둘러 싸여 있는데 이 안에 기별청, 정색, 마색, 결속색 등 하위 관청이 있었다. 근정문은 출입을 위한 단순한 문이 아닌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데, 정종, 세종, 단종, 세조, 성종, 명종, 선조 등 총 일곱 임금의 즉위식이 근정전에서 거행되기도 했으며,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 송씨가 이곳에서 책봉식을 가졌다.
일제는 한일병합이 이루워 지자 박람회(공진회)를 연다는 구실로 전각과 행각을 헐게 되는데 일제가 새 청사부지로 선택한 곳이 바로 오백년 조선왕조를 호령했던 경복궁 근정전 앞뜰이다.
그러니까 총독부 부지는 광화문을 들어서게 되면 보이는 흥례문 부터 위 사진에 보이는 근정문 바로 앞까지 총독부 청사가 들어서게 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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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복궁 유화문(維和門) 모습. 경복궁 서쪽 궐내각사에 근무하는 행정 관원들이 궁내로 출입할 때 주로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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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문(維和門)은 경복궁 홍례문과 영제교를 지나 근정문(勤政門)으로 들어서기 전 좌측에 있는 문이다.
이 문은 경복궁 서쪽에 위치했던 궐내각사(闕內各司)의 관원(신하)들이 경복궁을 출입할 때 이용했던 문이다. 당시 경복궁 서쪽에는 행정을 담당했던 춘추관(春秋館), 승정원(承政院),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등 궐내각사들이 모여있었는데 관원들이 출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건립되었던 문이다.
1900년대 초 경복궁(景福宮)의 정전(正殿)인 근정전(勤政殿)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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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의 근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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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 모습
근정전 월대 위에서 남쪽으로 바라본 근정문 뒷 모습. 1900년대 초중반
이 때만 해도 근정문 너머(앞)에 공진회장 시설물도 총독부건물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고종도 순종도 살지 않는 경복궁은 보는 바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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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사신 접대와 궁중 연회를 여는 장소로 사용된 경복궁(景福宮) 경회루(慶會樓) 정면 모습.
태종 때인 1412년 완공되었는데 돌기둥에는 용무의가 새겨져 있어 화려했다고 한다.
1904년의 경복궁 경회루. 서쪽 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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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회루는 넓이가 300평 정도로 1200명이 모여 연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경복궁에서 가장 넓은 건물이며 우리나라에서 면적이 가장 큰 누각이다.
48개의 높은 화강석 기둥 위에 떠있는 누각 내부는 3층으로 높이를 달리한 마루가 깔려 있고 누각 둘레에는 계자난간이 있으며 기둥 사이에 낙양각이 장식되어 있다. 기둥과 기둥 사이는 병풍이 되어 북악산, 인왕산의 풍경과 연못, 경복궁의 여러 전각들의 풍경이 빨려 들어 온다
경회루 동쪽 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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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회루 2층 내부 모습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기 위한 사전 준비작업으로 경복궁 전각이 훼손되기 시작
일제는 1914년 7월 근정전 전면에 있는 흥례문과 연결한 행각, 그리고 세자가 머물던 자선당을 비롯한 많은 건물과 문, 담장을, 그 외 이용하지 않는 석재들을 모두 제거하였다. 설살가상으로 1915년 '정(始政) 오년(五年)기념 조선물산공진회' 를 개최하는데 이 공진회 전시장을 마련한다는 핑계로 경복궁을 마구 헐어버린다
경술국치로 일본이 조선을 병탄한지 몇년 되지 않아 경복궁은 다시 시련을 맞는다. 1915년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는 일종의 산업박람회 비슷한 이벤트를 열기로 했는데, 일제가 조선에 대한 식민통치 5주년을 자축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통치로 인해 조선이 훨씬 살기 좋아졌다는 것을 국내외에 두루 알리고자 하는? 속셈이 숨어 있었고, 거기엔 더 큰 계획인 조선총독부는 새청사를 지을 계획을 세운다. 그 속뜻은 영원히 지배하겠다는 식민 통치의 야욕이었다.
다음은 1910년 5월15일 '대한매일신보' 에 실린 '경복궁이 없어지네' 라는 제목의 기사이다.
[1910년 5월 10일 왕실사무를 총괄하던 궁내부는 경복궁 내 공원 신축을 위해 전각 4,000여칸을 경매 했다. 조선인과 일본인 80여명이 경매에 참여했고, 이중 10여명에게 전각이 매각되었다. 특히 일본인 '기타이' 에게 전체의 3분의 1이 매각도었는데, 그는 척식회사 총재 '우사가와 카즈마사' 의 첩자로 알려져 있다.....]
이 기사를 통해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기 이전부터 경복궁이 훼손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경복궁의 전각들은 ?일제 강점기
이후 줄곧 살림집, 요릿집, 기생집, 사찰 등으로 팔려 나가고 또는 일본으로 가져가 지어 놓기도 했다
조선총독부 관보(대정3년)1914년 7월 1일자에는 "경복궁 구내 와용건물(瓦茸建物)"에 대한 "입찰불하공고"가 수록되어 있다. 1915년 열릴 조선물산공진회의 사전 정지작업으로 이뤄진 이때의 입찰불하에 따라 흥례문 구역과 동궁지역(즉 자선당, 비현각, 시강원 등)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입찰에 참여한 조선인 및 일본인이 다수 였다.
? 공진회로 손님을 맞는 광화문은 요란한 문구로 장식되었는데, 천황기를 상징하는 노란색 국화꽃 문양이 그려졌다.
? (조잡하지만 바로 위의 이미지를 수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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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기 때의 공진회, 손님을 맞는 광화문 앞 좌우에 휀스는 무엇인지? (w200을 확대한 사진)
전 같으면 광화문 3개의 홍예문 사이로 흥례문과 그 문과 연결된 행각이 보여야 정상이지만 공진회장 시설물(흰색 구조물)들이 보인다.
총독부 청사를 건축 중인 이때만 해도 광화문과 월대 난간이 건재하고 좁은 형태의 계단이 남아 있는 모습이다. 오른쪽 뒤에는 총독부 건물의 돔이 보인다.
어느 사이에 석재로 된 월대 난간도, 해태도 사라져 버린 광화문 앞에 육조거리 방향으로 전차가 가고있는 모습이다. 원래 자리의 광화문도 총독부 청사 완공에 따라 헐리게 되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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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컬러로 된 이미지를 보는데 당시에는 채색한 사진을 볼 수 있었다고...
경성 태평통(太平通) 이라는 사진에서 멀리 광화문과 총독부청사 모습이 보인다.
광화문 원래는 철거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반대여론으로 옮겨 세우는 것으로 결정 되었다.
1926년 총독부 건물이 세워지자 그 앞에 있는 광화문도 철거될 운명을 맞았는데 조선인뿐만 아니라 일본인 중에서도 반대여론이 있어서 광화문을 경복궁 동쪽으로 이전하는 것으로 결정한다.
그 중 일본의 미술평론가인 야나기 무네요시는 신문의 기고를 통해 "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 너의 생명이 조석(朝夕)에 절박 하였다. 아! 어찌하면 좋을까?" 하고 탄식하고 일번인들에게 "가령 일본이 쇠약하여 마침내 조선에 합병됨으로 궁성이 폐허가 되고 그 자리에 저 양풍(洋風)의 일본총독부 건물이 세워지고 에도성(江戶城)이 헐리는 모습을 상상해주길 바란다" 라고 쓰며 광화문 철거를 강력히 반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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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 부터 얼마지나지 않아 해체공사가 진행되어 1927년 경북궁 동문인 건춘문 북쪽에 옮겨 세워진다.
이렇게 남았던 광화문도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문루 전체가 소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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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15년 7월 6일 자에 수록된 공사 중인 조선물산 공진회장 전경이다. 광화문 위에 올라가 촬영한 것으로 흥례문 구역을 포함하여 경복궁 일대를 헐어낸 황량한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일제는 조선물산 공진회장을 조성하기 위해 그 이벤트 장소로 경복궁의 4000여 칸 200여 동을 헐고 그 자리에 총독부 박물관(미술관)을 세우고 임시로 지은 전시장과 여러 시설물, 야외에는 조선 각지에서 가져온 유서 깊은 석탑과 석불들이 장식물로 채워졌다. 이때부터 조선의 약탈 상징의 건물들이 경복궁 안에 들어서기 시작했던 것이다.
근정전의 어좌.
어좌와 일월오악도 - 해와 달, 다섯 산봉우리, 붉은 소나무, 폭포가 그려져 있는 이 그림은 왕권의 상징으로 왕의 초상이 있는 어진 주변이나 왕이 있는 자리에 펼쳐 놓았다고 한다.
1910년대 중반의 근정전 어좌. 일 관리인이 어좌 앞에 펜스를 쳐놓은 모습
근정전 내부. (최근 모습)
경복궁 사정전(景福宮 思政殿). 1867년(고종 4) 건립. 왕이 일반 업무를 보던 집무실(유리건판 복원 사진)
왕의 침전인 경복궁 강녕전(景福宮 康寧殿) 모습. 유리건판 복원 사진 (일 강점기 때 헐어버린 것을 현재 복원)
왕의 거처인 대전(大殿)인 강녕전은 다른 내전 전각들과 달리 앞에는 월대가 있어 이곳에 차양을 치고 왕이 공식행사를 치르거나 그 가족들과 마당에서 벌어지는 공연을 관람하면서 연회를 즐겼다.
주변으로는 4개의 보조 침전이 있으며, 중전의 침소인 교태전과 함께 유일하게 지붕 위에 용마루가 없는 전각이다.
왕비의 침전인 중궁전(中宮殿)인 교태전(交泰殿) 모습. (복원) 강녕전과 달리 좌우로 행각이 붙어있으며 궁녀들이 기거하며 시중을 담당했다.
대비의 침전인 경복궁 자경전(慈慶殿) 모습. (현존), 고종을 왕으로 옹립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조대비의 거처.
조대비는 순조의 세자인 익종의 비이자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로 고종을 양자로 들여 왕으로 즉위 시켰다.
아미산 북쪽에 있었던 경복궁 흥복전(興福殿) 모습. (미복원) 흥복전은 주변으로 많은 행각들로 둘러싸여 내명부에 적절한 소임을 주고 각 전에 배속시키는 본부 역할을 하였으며 외국 사신을 만나는 편전으로도 활용되었다.
1917년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의 중건을 위해 흥복전 일곽이 철거되고 이곳에 일본식 정원 조성되었다.
일장기가 걸린 경복궁 근정전(景福宮 勤政殿) 모습.
1915년 9월 11일 오전 10세에 경복궁 근정전에서 예정대로 공진회 개장식이 열렸다. 서양식 대례복을 갖춰 입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비서관의 안내를 받으며 근정전 돌계단에 올라섰고, 근정전 가운데 놓인 용상으로 다가가 거리낌 없이? 앉았다.
근정전은 국왕 즉위식, 세자 책봉식, 외국 사신의 접견, 문무관의 조례 등 국가의 공식 행사 시나 의례가 열리는 곳이다. 일제는 더 이상 조선의 왕은 존재하지도 인정하지 않는 종이호랑이에 불과했다. 하늘이 내리는, 오로지 군왕만이 앉는 존귀함이 깃든 용상에 온 백성과 이 땅을 희생으로 지켜낸 선조들의 통곡을 뒤로하고 데라우치 총독이 거만하게 앉아서 회심의 웃음을 흘린다.
조선 물산 공진회 홍보물
그림에서도 이때는 광화문과 해태 상이 제자리에, 경복궁의 전체 담과 근정전, 경회루 등 몇몇 건물만이 남아있고 나머지 전각과 행각들은 모조리 허물고 전시장 건물과 오른편 위쪽의 총독부 박물관이 모습이 보인다.
시정 5년 기념 조선 물산 공진회장 배치도 (크게 보기 됨)
예정대로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50일 동안 경복궁에서 시정오 년 기념 조선 물산공진회가 열렸다.
왼쪽에 조선총독부 박물관 모습이 보인다.
조선총독부 박물관
조선 물산 공진회장을 조성하기위해 경복궁의 전각과 행각이 헐릴 때 자선당도 함께 헐고 그 자리에 총독부 박물관을 세웠다.
자선당 자리에 세워진 총독부 박물관(미술관) 자료 출처:국립중앙박물관 블로그에서
조선총독부 박물관은 1915년 세우고 1916년 일본은 식민지 지배의 효과를 강조하기 위해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 공진회를 경복궁에서 열 때 조선의 물산과 근대의 물품을 비교하는 전시로서 이때 수집된 자료를 보관, 전시하기 위해 그 해 12월 1일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개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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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박물관은 미술관 건물 외에 경복궁의 수정전, 사정전, 금정전을 비롯한 궁궐 건축을 전시실 및 수장고로 쓰고 자경전을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그 후 30여 년간 조선 총독부 박물관은 고적조사 사업을 통해 수집된 유물과 구입품, 사찰의 기탁품 등을 전시하였다.
▲ 총독부 박물관 본관 제1실 내부 ▲ 총독부 박물관 본관 제3실 내부 출처:국립박물관 블로그
조선총독부 박물관 증축 설계도 정면. 자료 출처:국립중앙박물관 블로그
1935년 경복궁 건청궁(乾淸宮) 터에서 조선총독부 종합박물관을 짓기 위한 지진제를 지내고 있다.
일본 신도(神道) 방식으로 식장이 차려지고 우가키 가즈시케 조선 총독이 절하고 있다. 건청궁은 명성황후 민비가 시해당한 현장으로 총독부는 이를 모두 철거하고 종합박물관을 지으려고 했다가 전시체제가 확산됨에 따라 그쳤다.
경복궁 조선물산 공진회 때 광화문 야간 점등 모습 - 매일신보 1915년 8월 8일 자
전광화(電光化 ) 된 광화문(光化門) 밤의 공진회를 장식할 광화문의 뎐(전)등... 칠일(8/7) 밤 시험뎜(점)등
1915년의 '시정 오년 기념 조선물산 공진회(始政 五年 記念 朝鮮物産 共進會)'는 그네들이 조선을 지배한 지 5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고 식민통치의 업적을 자랑하기 위해 개최한 대규모 박람회였다. 이 바람에 그나마 남아 있던 강녕전, 교태전, 수정전, 사정전, 근정전과 같은 전각들은 모조리 근대 문물의 전시공간으로 변했고,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구경거리를 찾아 밀려든 관람객도 무려 백만 명을 웃돌 정도였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말이 궁궐이었지 경복궁이 더 이상 궁궐의 기능과 위상을 이어나갈 여지는 거의 없었다. 이곳은 이미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유흥과 오락의 공간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조선물산 공진회만으로 그치질 않았다.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경복궁이 박람회장으로 사용된 경우는 여섯 차례가 넘었다.
우선 1915년의 '시정 오년 기념 조선물산 공진회' (조선총독부 주최)가 있었고, 그 이후 1923년의 '조선 부업품 공진회' (조선농회 주최)가 있었고, 곧이어 1925년의 '조선 가금 공진회' (조선 축산협회 주최)가 있었고, 다시 1926년의 '조선박람회' (조선신문사 주최)가 있었고 또 1929년의 '조선박람회' (조선총독부 주최)를 거쳐 맨 나중에는 1935년의 '조선산업박람회' (조선신문사 주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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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6월 그들은 조선왕조의 법궁(法宮:임금이 주로 거처하고 공식 활동을 하던 궁궐)인 경복궁의 근정문 앞뜰에서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조선총독부 새 청사 신축을 위한 지진제(地鎭祭:건물의 안전을 비는 뜻으로 터를 닦기 전에 지신(地神)에게 지내는 제사)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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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조선의 정기와 혈맥을 끊는 민족말살정책의 첫 삽이 떠지는 경복궁 안은 순간이었다.
총독부는 한·일 합병 이후의 건물 4000여 간을 헐어 불하했고 1916년에는 근정전 앞마당에 총독부 청사를 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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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경복궁 흥례문과 행각(行閣)을 헐어내고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기 위해 기초 공사를 하는 모습
원형이 잘 보이는 19세기 후반 경복궁 궁성의 근정문과 근정전 앞에 한창 공사 중인 조선총독부 청사
조선총독부 청사 신축 중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경복궁의 근정전 하면 명색이 조선왕조의 핵심 공간이 아니었던가...!
일제는 1915년~ 1935년까지 6차례의 박람회의 개폐회식을 치른 장소이고, 뿐만 아니라 별의별 온갖 자질구레한 연회와 기념식과 각종 대회가 벌어지는 단골 장소로 활용되었던 사례들은 역시 정말 수두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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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총독들은 근정전의 단상(용상)에서 행사를 주제하는 등 이처럼 근정전의 수난인 용상에 오른 조선 총독의 모습은 일제강점기가 지속되는 내내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1923년 조선부업품 공진회 당시에 사이토 총독이 경복궁 근정전에서 포상 수여식을 거행하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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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박람회 포스터. 1929. 9. 12.~ 10. 31.까지 50일간 시정 20주년 기념 박람회를 열다.
1929년 조선박람회 때 경복궁 근정전에서 벌어진 폐회식에서 사이토 총독이 훈시하는 장면이다
그뿐만 아닌 근정전은 독립군과 싸우다 죽은 왜놈 경찰 등 ‘순직 경찰관 초혼제’ 장소로 사용되다.
조선일보 1935년 5월 호에는 경복궁 근정전 내에서 벌어진 '순직 경찰관 소방수 초혼제'의 광경을 수록하고 있다.
임금의 자리인 근정전 용상이 '왜놈 순사들'의 제단으로 변해 버린 지는 이미 오래전의 일이었다.
일제의 조선 말살에 대한 만행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
일본 오쿠라 호텔에 옮겨진 직후의 자선당(資善堂 ) 전경 1916년.
(자선당은 세자와 세자빈의 침전이며 동궁전 이라고도 부른다. 자선(資善)이란 "착한 성품을 기른다"는 뜻)
?광화문은 옮겼다 치더라도, 공진회장 사전 정지작업 때 철거해 일본에 가져가 지들 멋대로 지은 자선당(資善堂) 모습이다.
세자 내외가 함께 생활하던 동궁의 내당인 자선당(資善堂)은 동궁 철거에 참여한 일본 기업인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1837~1928)는 해체한 부재를 일본으로 빼돌린 뒤 멋대로 재구성해 자신의 집에 설치했다.
오쿠라는 이 건물에 조선관(朝鮮館)이란 간판을 붙이고 우리나라에서 가져간 문화재 여러 점을 전시했다가 1923년 일본을 강타한 관동대지진 때 완전 불타 없어지고 기단석 288개만 남았다.
옮겨간 직후(바로 위 사진)의 사진에는 향로가 없으나 향로 4개가 전면에 보인다. 이것도 훔쳐 간 우리나라의 문화재가 아닌가...
경복궁 복원을 하면서 문화재 환수운동을 거치며 8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자선당의 유구는 경복궁 복원공사 때 자선당의 기단석으로 사용하고자 검토되었으나 관동대지진 때 불에 그슬리어 사용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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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일본 오쿠라 호텔에서 발견된 자선당 유구와 현재 경복궁 내 건천궁 부근에 위와 같은 모습으로 설치해 놓은 모습을 볼 수 있다.
문화재 약탈 재벌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는 경복궁 자선당을 뜯어가 자기 집 후원에 세워 놓는 등 조선 문화재 무단 반출로 악명이 높았던 인물이다.
▲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강탈해 간 이천 5층석탑 ▲ 북한 문화재인 평양 율리사지 석탑
위 석탑은 원래 경기도 이천 향교에 있던 고려 초기의 5층 석탑과 북한의 평양 율리사터의 고려 때 5층 석탑은 조각 기법의 정수를 보여주는 유물로 평가받는데 1915년 조선총독부가 조선물산 공진회 전시를 위해 서울로 옮겨온 것을 당시 조선에서 군수산업으로 떼돈을 벌었던 문화재 재벌 오쿠라 기하치로가 일본으로 몰래 반출한 이후 우리 문화재가 박물관에 보관되지 못하고 도쿄 오쿠라 호텔 뒷마당 장식용으로 전락하는 수모를 겪은 사례다. 이 외에도 오쿠라가 일본에 가져가 떠둘고 있는 망국의 문화재는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다.
오쿠라가 약탈해간 이런 문화재뿐이겠는가? 이런 덩치가 큰 문화재를 헤체하여 가져갔다면 그 외 비교적 자그마한 보물급 문화재들은 얼마나 되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전문가들은 문화재청이 조사한 6만 1409점보다 훨씬 더 많은 우리 문화재가 일본에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임진왜란과 일제 강점기 등을 거치며 개인 소장가들에게 흘러들어간 문화재가 상당할 것으로 예측한다. 일본 궁내청 등에 소장된 한국 문화재 실태를 조사했던 한국 문화유산연구원장(박상국)은 "최소 10만 점 이상은 될 것으로 추정한다" 고 말했다.
두 탑이 나란히 서있는 곳. 빨간 선 안에 오층 석탑이 가려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2011년 지진 피해로 오층 석탑이 훼손되었다는... 일본이 가져간 이천 오층석탑, 대지진 피해 ☜ 기사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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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춘문의 담장 남쪽 끝에는 동십자각(東十字閣)이 맞닿아 있었으나 이 또한 일제시기에 잘려나가 현재는 동십자각만 도로 가운데에 떨어져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 8년(1426) 10월 집현전으로 하여금 문의 이름을 짓게하여 지금의 건춘문으로 이름을 확정했다고 한다. 건춘문은 고종 2년(1865)에 중건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고 현재 경복궁 궁장과 떨어져 있고 그 사이에 삼청동과 청와대로 이어지는 길이 나있다.
한일 병합 이후 경복궁 궁장 안쪽의 동십자각(東十字閣)모습. 모서리의 동십자각에서 경복궁 정문인 남쪽의 광화문 방향과 동쪽의 건춘문 방향으로 궁장이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십자각을 오르는 계단은 아직 남아 있지만 계단끝 앞까지 궁장이 잘려진 상태며 헐려진 곳에 철창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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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의 동쪽. 1926년 건축문 북측에 옮겨진 광화문. 다리 밑에 빨래하는 아낙들 모습.
동쪽으로 옮겨진 광화문의 석축을 보면 원래의 자리에 있을 때와 돌의 색이 다른것을 볼 수 있다.
정석으로 이건(移建) 했다면 이런 모습일까?... 중학천에서 빨래하는 아낙 모습도
1926년 일제가 경복궁 안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시야를 가린다는 이유로 강제로 이전한 뒤의 광화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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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동쪽으로 옮겨진 광화문은 1929년 조선 박람회 당시의 사진으로 육측 앞에 기둥이 세워지고 윗부분에 차양이 가설된 기괴한 모습으로 관람객을 맞았다.
경복궁 동쪽에 옮겨간 광화문. 좌측에 원래의 광화문이 있었던 곳 뒤의 총독부건물이 보인다
옮겨진 이후에도 경복궁 내에서 여러차례 이벤트 장소로 사용되면서 광화문은 장식을 붙인채로 입장객을 맞았다.
이렇게 남았던 광화문도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문루가 소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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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경복궁의 동, 서, 남, 북의 문 들...
경복궁의 동쪽문인 건춘문(建春門)과 중학천
건춘문(建春門)은 조선 태조가 한양천도와 함께 처음으로 세웠던 궁궐인 경복궁에 딸린 문으로, 문 안에 왕세자가 거처하던 춘궁(春宮)이 있었으며, 왕족·척신(戚臣)·상궁들만이 드나들었다. 또한 대궐에 열병(閱兵)을 위한 비상의 첩종(疊鐘)이 울리면, 왕을 직접 모시고 있던 시신(侍臣)들이 모여 명령을 기다리던 곳이기도 하였다. 이 문은 임진왜란 때에 경복궁과 함께 타버렸으며, 현재의 건춘문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집정하면서 경복궁과 함께 1865년(고종 2) 12월에 상량(上樑)한 것이다.
? 경복궁의 동문(東門)으로 조선 고종 2년(1865)에 중건되었다. 이 명칭은 동쪽이 봄을 의미한다는 뜻에서 건춘문이라 하였다 한다. 이 문은 종신(宗臣) 즉 왕족의 친척과 궁 안에서 일하는 상궁들만 드나들던 통용문이었다. 건춘문 안쪽 모습
없었던 전봇대도 보이고....
경복궁 동쪽의 옮겨진 광화문 문루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촬영한 사진이고, 아마도 총독부 청사가 들어선 이후 이전 복원한 광화문의 누각 위에서 촬영된 모습이다. 그리고 옮겨진 광화문 사진 중, 중학천 석교 아래에서 빨래하는 모습이나 각도를 볼 때 촬영시기는 1927년 이후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궁장 앞에는 동문인 건춘문과 끝부분에 동측 파수각인 동십자각이 궁장과 연결되어 있는모습이 보이고 좌측으로는 중학천이 흐른다. 궁장 앞에 중학천의 물은 광교 아래 청계천으로 이어졌다.
경복궁(景福宮)의 서문(西門)인 영추문(迎秋門)과 1926년 전차의 진동으로 추정되는 원인으로 인해 궁장이 무너진 모습.
경복궁의 궁장 바로 옆에 전차 궤도와 집전 장치가 맞닿을 전선은 식별되진 않지만 전봇대의 가로로 나온 것이 전차의 전선이 가설된 것이다. 궁장 옆으로 이어지는 전봇대와 무너진 담장에 막혀 서있는 전차모습이 이를 대변해 주는 듯 하다.
영추문(迎秋門) 또는 연추문(延秋門)이라고 하는데 조선시대 문무백관들이 주로 출입했던 문이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고종 때 경복궁이 재건되면서 다시 건립하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인 1926년 석축이 무너지면서 철거되었다. 당시 영추문 앞에 전차의 종점이 있었는데 전차가 오가면서 발생한 진동 때문에 무너진 것으로 추정되었다. (네이버)
경복궁의 정문인 남문 광화문은 순서대로 라면 여기에 배열을 해야 하지만 위에 있으니 글로 대신 합니다.
경복궁(景福宮)의 남문(南門)인 광화문(光化門).
광화문 근처에서 본 ?경복궁 남서쪽 모서리의 서십자각(西十字閣) 모습. 광화문과 궁성이 헐리기 전이다.
영추문 (서문) 근처에서 남쪽을 향해 바라본 서십자각 모습
집옥재 앞을 지나 광임문을 통과하면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이 나온다.
이 신무문을 나가서 쭉 가면 경보궁의 후원으로 완이 친히 농사를 짓고 풍년을 기원하는 뜻으로 세운 경농재와 과거를 시행한 용문당과 용무당 등이 있었다. 일제는 이를 모두철거하고 총독관저를 세우는데 광복 후에도 대통령 관저(경무대)로 사용되었다. 저 문을 나서면 1990년에 신축한 청와대가 바로 보인다.
경복궁(景福宮)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 모습.
여기는 전차길도 없지만... 허물어져 가는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의 행색이 몰락해가는 대한제국의 운명을 닮아있다?.
신무문(神武門)은 경복궁의 북문으로 세종15년(1433년)에 창건되었다. 성종6년(1475년)에 방위를 관장하는 사신(四神) 중 북쪽을 담당하는 현무(玄武)를 뜻하는 신무문(神武門)이라는 이름을 비로서 얻게 된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화재로 전소되면서 함께 소실되었지만, 고종2년(1865년)에 경복궁 중건과 함께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문들과 다르게 이 신무문은 항상 굳게 닫혀있었다. 음기(陰氣)가 궁궐을 어지롭히는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기우제를지낼때와 임금이 신무문 밖 활터로 행차할 때만 문을 개방했다고 한다.
이런 구중궁궐 속 수려하면서도 법궁의 안위를 굳건히 지켜주던 신무문(神武門)은 쇠락해 가는 국운과 함께 외벽이 허물어져도 어느 누구하나 거들떠 보는 이 나라의 백성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일제가 경복궁 내부에있는 전각만 훼손했으랴, 궁을 싸고 있는 행각이며 담장 등 그들의 눈에 거슬리는 존재는 대한제국의 땅을 유린했듯 닥치대로 파괴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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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북쪽 궁장에 홍예문 형태의 계무문(癸武門)이 있다. 1926년 촬영 궁장을 따라 나있는 도로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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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공 당시의 경복궁 조선총독부 청사.
이 사연 많은 총독부 청사는 두 번 공사를 중단했는데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과 1926년 6월 10일 만세운동 때였다.
강행군을 한지 10년 만인 1926년 10월 1일 공사를 끝냈다.
당시 그 규모나 디테일로 이 건축물은 극동지역에서 보기 드문 대건축의 사례가 되였다.
'완공된 조선총독부' - 서을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강점기의 경복궁 앞의 조선총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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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경복궁과 그 일대. 사
진은 1930년대로 표기되었는데, LIFE 지는 1936년 11월 창간된 것과 항공사진인 점을 감안하면 해방 직후의 사진이 아닐까?... 경복궁의 근정전과 경회루와 몇 동의 건물과 궁장만 남아있을 뿐 대부분의 전각이 철거되어 조선의 대표적 법궁인 경복궁이 휑하니 황량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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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LIFE지 사진을 북한산 스카이 라인 위 하늘을 좀 더 넓혀 보았습니다.
경복궁과 마찬가지로 육조거리에 배치된 국가의 정무(政務)를 맞아보던 행정관청들도 사라진지 오래되고, 양식 건물들이 많이 들어선 모습이다.
1945년 9월 9일 일본군이 총독부에서 일장기를 내리고 미군이 접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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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도야 어찌됐던 간에 원본 사진이 기록 자료로 중요하지만 위의 것을 조금 손을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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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본 경복궁과 조선총독부(중앙청) 모습.
동쪽의 광화문 문루가 있는것으로 보아 미군정에 의해 광복직후에 촬영된 사진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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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 11월이라는 표기는 LIFE 지 사진인 점을 가만하면 오류가 있는 듯... 해방 직후가 아닐까 추정 됨
??
1950. 9. 29. 유엔 깃발로 펄럭이는 중앙청(총독부청사)
?? 경복궁 동쪽에 옮겨저 남아 있던 광화문은 이 마져도 1950년 한국전쟁 중 폭격으로 인한 화재로 목조 문루 전체가 소실되고 석축 부분만 남았다. 서울 수복 후의 광화문은 이런 모습이었다.
한국전쟁시 폭격으로 부서진 경복궁 편전인 만춘전(萬春殿) 1951년 서울 재수복후의 경복궁 모습 중
1958년 정부수립 10주년 세종로와 중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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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문화계의 인물들이 이 복원에 대해 반대가 만만치 않았는데 당시 가난했던 한국의 경제상황에 신흥 독립국에서 흔히 나타나는 민족주의에 의한 전통문화에 대한 욕구의 절충점에서 이런 비창조적인 전통의 모방과 합리주의, 권력의 문화인식 부족 등의 결과로 이런 콘크리트 한옥양식을 낳은 것이라 지적한다.
그러나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역사적 사료에 의한 복원을 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어쨌거나 논란은 많았었지만 광화문은 전문가 입장이 아닌 평민으로 볼때 일제에 의해 없어진 것을 41년만에 비슷한 자리에 복원 했던 것은 칭송할 만한 일이 아니었겠는가?...
상층부가 콘크리이트 구조물로 복원되었던 광화문의 모습.
이때까지 조선총독부 건물이 건재한데 오랜기간 과거의 육조거리였던 세종로의 상징적인 건축물로 많은 사람들이 총독부와 겹쳐진 광화문을 기억하게 되었고 이곳에는 많은 현대의 사건들과 여러사람의 추억이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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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 의해 경복궁에 세워졌던 총독부 건물은 김영삼 정부 때인 1995년 역시 권력에 의해 철거되고 20년에 걸친 경복궁 복원사업으로 인해 경복궁 중심축에 있는 부분들은 대부분 복원되었고 뒤의 산과 경복궁 앞의 중심대로와 연결되는 경관의 축은 회복되었지만 광화문 역시 불완전한 복원이었기 때문에 2007년 완전히 해체하고 원래의 광화문 모습대로 재복원 하게 된다.?
조선을 대표하는 법궁 앞에 총독부 청사가 있었던 것 때문에 보존이라는 명분은 어떠한 논리로도 설득력이 없겠지만, 없에 버린다고 지난 역사의 아픔이 치유 될까...!
독립기념관 뜰에 전시된 총독부 건물 부재.
옳바른 역사 인식과 교훈을 주기위해 조선총독부 철거 부재는 독립기념과 뜰에 전시 되어 있다.
독립기념관 야외에 전시되어 있는 조선총독부 철거 부재. 바로 앞은 중앙 돔 랜턴, 기둥 상부와 하부 모습도...
총독부 건물이 철거되고 나니 막혔던 체증이 뚫리고 가슴이 트인것 같아 좋아 보이긴 하다.
조선 태조 4년(1395년)에 축조된 광화문(光化門 '왕의 큰 덕이 온나라를 비춘다' 라는 뜻)은 임진왜란 때 방화로 소실되고 조선후기에 중건 되었으나 또 다시 일제에 의해서 원래의 위치에서 이동되어 그 원형이 훼손되고 이마저도 6.25 동란의 와중에 화재로 전소 되고 말았다.
?그 후 1968년 문화재 복원이란 일환으로 복원되기는 했지만 문화재에 대한 몰이해로 철근과 콘크리트로 중건되었다가 2006년 들어, 경복궁 복원공사의 일환으로, 철거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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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해체 후의 콘크리트 부재
역사박물관 한켠에 역사의 흔적을 쓸쓸하게 보전되어 있는 전 광화문의 잔해들, 조선의 역사와 대한민국 격동의 근현대사를 지켜보았던 광화문! 왜 문화적 가치가 없는 콘크리이트 덩어리를 굳이 보전해 놓은 것일까?... 억지로 의미를 부여해 본다면 이를 통해 지난 역사의 아픔을 잊지 말자는 교훈을 남기기 위함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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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은 원래모습에 가깝게 목조로 재복원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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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광화문 모습
모진 시련을 겪었던 광화문은 2007년 새정부가 들어서고 옛 원형으로 복원 했으나 2010년 광복절에 맞춰 완공하기 위해 무리한 공기 단축으로 현판이 갈라지고 목재간의 틈이 벌어지는 등 많은 문제점들이 노정(路程) 되기도 했다.
2010년 8월15일 현판공개로 광화문은 다시 제자리에 선다. 이로 인해 경복궁의 중심축은 거의 완성이 되었고 앞으로도 경복궁의 복원은 진행될 것이다. 광화문이 제자리를 찾기까지는 오랜 기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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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건국 이후 조선과 한국의 정치, 사회, 문화 등 역사적 사건의 중심무대였으며 100년 이전부터 한국의 모든 도로는 광화문앞에서 시작 되듯이 대한민국의 중심이며 상징이다. 다시 세워진 광화문은 이전에 그랬듯이 오랫동안 다시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쌓일 것이다.?
1차 복원 정비 사업의 목표는 조선 정궁의 기본 궁제를 완비하여 뼈대를 갖추는 것인데 궁의 중심축은 대부분 복원되었고, 2차 복원은 임금의 수라간과 궐내각사(闕內各司) 등 많은 부속건물을 지어 살을 붙이는 과정이다.
문화재청은 단기 복원 사업이 마무리된 해인 2011년부터 약 20년에 걸쳐 경복궁 전각을 75%까지 복원하는 2차 복원정비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