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배기 지역의 전설
조선 중기 사도세자가 부왕에 의해 뒤주 속에 갇혀 비통하게 죽은 뒤
그의 아들 정조가 1777년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 사도세자를 한시도 잊지 못했다.
그래서 정조는 화산(지금의 수원)에 있는 아버지의 묘소,
곧 현륭원에 참배 다니는 것을 잊지 않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추우나 더우나 찾아가 아버지 무덤 앞에 무릎 꿇고
그 애통한 한을 달래며 명복을 빌었다.
지금은 현대식 건물과 주택들이 들어서 있지만 당시 장승배기 일대는 낮에도
맹수가 나타날 것만 같은 울창한 나무숲이었다.
현륭원으로 가는 정조의 어가는 이곳에서 한번쯤 쉬어가야 했으나
아름드리 나무숲이 우거진 이 지점에서 쉬기란 적적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비라도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면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인가가 없고
통행인마저 시오리 가야 한두 사람 만날까 말까 할 정도로 한적한 곳이었다.
이에 정조는 "이곳에 장승을 만들어 세워라.
하나는 장사 모양을 한 남상 장승을 세워 천하대장군이라 이름을 붙이고
또 하나는 여상을 한 지하여장군으로 하여라." 하고 명하였다.
어명으로 장승배기에는 곧 두 개의 높다란 장승이 세워지게 되었다.
이는 왕이 안심하고 행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이때부터 이곳은 '장승배기'라는 지명이 붙게 되었고
정조는 아버지의 묘소를 참배하러 가는 길 오는 길에 이 장승 앞에서
어가를 멈추고 쉬었다는 것이다.
한편 장승을 소재로 문학작품 판소리와 서도창에 보면 이곳 장승의 이름이
팔도장승의 최고 우두머리인 대방 장승이었고
또 이와 관련된 내용이 나타나고 있다.
변강쇠가 엄동설한에 땔것이 없어 나무를 하러 첩첩산중에 갔는데,
눈 속에 땔나무할 것이 없어 길가에 세워 놓은 장승을 패가지고 오는 것을
풍자적으로 엮은 것으로, 변강쇠한테 도끼로 찍혀 부서진 장승이 자기 신세를
한탄하는 것이 멋스럽다.
본래 장승이란 마을로 들어오는 동구 밖에서 병액의 귀신을 물리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촌락공동체의 수호신이요 경계표지였다.
이제 장승의 신앙적 의미는 미약해졌으나
다만 한국을 상징하는 대표적 풍물로 부활되어 명맥을 잇고 있다.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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