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즈칸의 몽골 고원 통일 이후, 그 후손들은 몽골의 기마병들을 이끌고 전세계로 뻗어 나갔고, 몽골의 말발굽은 서쪽으로는 동유럽과 팔레스타인 지역, 남쪽으로는 북인도와 인도네시아, 동쪽으로는 사할린과 일본 규슈 북부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당연히 몽골이 침공을 하고 정복을 완료한 지역들은 자신들의 지배체제를 확립하였고, 이 지배체제는 - 각 지역마다 차이는 있으나 - 약 100여년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몽골의 지배를 받던 그 지역 정주민들이 지배체제에 순응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결국에는 전 세계 각지에서 몽골의 지배체제를 거부하는 저항들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결국 칭기즈칸 후손 세력들의 지배체제는 종언을 맞이하게 됩니다.
몽골이 지배하던 동방지역 - 중원지역과 한반도 - 또한 그러한 지역 중의 하나였습니다.
툴루이의 아들인 쿠빌라이가 원나라를 세우고 남송을 정복하여 화북과 강남을 직접지배하고, 한반도의 고려왕실을 복종시켜 간접지배하는 형식으로 동방대륙은 명백히 몽골의 지배체제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중원과 한반도 모두 수십년간 몽골의 왕조인 원나라의 지배체제하에서 순응하며 살고 있었지만, 지속적인 원황실의 황위계승경쟁으로 인한 정치 혼란 및 홍수 가뭄 전염병등으로 인하여 수십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서서히 잃어가더니 홍건적의 난과 강남 지역에서 발호한 군웅들로 말미암아 결국에는 강남의 통치권은 완전히 상실하였고, 강남의 군웅 중 하나였던 주원장이 강남 지역을 완전히 통일하고 명 왕조를 개창한 뒤 북상, 원나라는 고비사막 너머로 쫓겨가게 됩니다.
보통 우리가 원나라의 쇠망을 이야기 할 때 저도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원황실의 정치혼란" 이나, 역병(천연두를 이야기 하더군요), 자연재해 등 내부적 요인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런데 이에 반해 우리는 원의 지배권에 대항한 세력들 홍건적, 강남군웅들, 그리고 고려 등이 어떻게 원의 군대에 맞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까에 대해서는 그다지 주목을 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원나라 말기에 이르러 군대가 약해졌다"고 퉁치고 넘어가는 사람들 까지 있을 정도죠.
그렇다면 원의 군대는 정말 초기에 비해 약해졌을까?
진나라 말기에 장한이 진승 오광의 난을 진압한 것도 그렇고, 부자가 망해도 삼년은 간다는 말이 있듯이 원나라 군대가 그렇게 약한 것 만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원나라 승상 탈탈이 강남의 반란을 진압하려고 대군(80만이라 적혀있지만 과장일 듯)을 동원하여 내려갔을때 어느정도 성과를 거두기도 했었죠. 다만 정치 분쟁에 휘말려 지휘권을 잃어 결국 실패로 끝이 나지만, 중요한 건 원나라 군대의 전투력이 어느정도 제 기능은 하고 있던 상태였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원에 대항하던 세력들은 어떻게 원의 군대를 격파할 수 있었을까?
원의 통치하에서 몽골의 전법에 익숙해지고 그걸 배우거나, 혹은 파훼법을 익혔기 때문이라 봅니다. 다른 사례는 제가 지식이 짧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고려사"에는 이를 알려주는 사례가 있습니다. 바로 "목호의 난"과 "함관령 전투"
원 간섭기 시절 제주도에 정착했던 몽골계통의 목호가 명에 말을 바치라는 고려조정의 명령에 반란을 일으키자 공민왕은 최영을 총 지휘관으로 하는 군대를 출격시켜 반란을 진압합니다. 이때 목호들은 "야전"에서 전형적인 몽골군의 전법(유인 후 협격)으로 그들에 대항하려고 시도합니다.
"장수들이 한라산(漢拏山) 아래에 진을 치고 군사들을 쉬게 하였는데, 당시 적의 말을 많이 노획하여 모든 병사들이 기병 역할을 하게 되었다. 적의 괴수 세 명이 와서 싸움을 걸다가 짐짓 패주하는 척하면서 아군을 효성(曉星)·오음(五音)들판으로 유인한 후 기병으로 덮치려 하였다. 최영이 그 작전을 알아차리고 정예군으로 하여금 급히 뒤쫓게 하니 적의 괴수가 한라산의 남쪽에 있는 호도(虎島)로 도망쳐 들어갔다."
고려사 최영
목호들이 상륙한 고려군에 대응하여 싸움을 걸면서 너른 들판으로 유인한 후에 기병으로 덮치려 하였다는 기록을 통해, 원 계열의 군대는 원나라 말기에도 여전히 몽골군 초기의 전법을 알고 있었고, 이를 활용하려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뒤의 최영이 "그 작전을 알아차렸다는 것", "그 작전을 못쓰도록 만들었다는 것"이죠. 이는 1차 대몽항쟁시절 벌어진 안북성 앞 들판에서 고려의 중앙군이 몽골군에게 질질 끌려다니다가 야전에서 패한 것과 명백히 대비되는 일이죠(자세한 이야기는 여기에서 https://cafe.daum.net/shogun/1Db/8290).
수십년 원의 지배하에 살았기 때문에 원의 전법에 익숙해진 탓도 있겠지만, 최영등의 고려장수들 중 일부가 이 전투 이전에 원나라로 파견되어 탈탈의 강남원정군에 합류, 고우성에서 원나라 군대와 연합작전을 벌였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저러한 모습을 보였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외에도 한가지 사례가 더 있습니다. 바로 함관령 전투.
목호의 난 이전, 북원계열 군벌인 "나하추"가 만주지역에서 세력을 확대하며, 고려의 동북면 지역으로 남하하였습니다. 이때 가문 대대로 동북면을 기반으로 하던 이성계가 군을 이끌고 대항하였는데, 이성계가 오히려 몽골의 전법인 "적을 너른 들판으로 유인하여 사방에서 협격"하는 전술로 나하추의 군대를 격퇴합니다.
"(이성계가 함관령에서) 군사를 돌려 정주(定州)에 둔을 치고 수일 동안 군사를 쉬게 한 다음, 먼저 군사를 요충지에 매복시켰는데, 삼군(三軍)으로 나누어, 좌군은 성관(城串)으로 나가고, 우군은 도련포(都連浦)에서 나가며, 태조 자신은 중군을 거느리고 송원(松原)에 이르러 나하추와 함흥평(咸興平 함북 함흥(咸興))에서 마주쳤다. 태조가 단기로 용감하게 돌진하여 적의 형세를 시험하니 날쌘 적장 3명이 함께 달려 앞으로 나왔다. 태조가 거짓 패해 달아나는 체하면서 말고삐를 잡아 당기고 채찍질을 하여 마치 말에 재갈 물리는 모양을 하니, 세 장수가 다투어 쫓아와 거의 다 근접하였다. 태조가 홀연히 말을 빼어 오른쪽으로 나오니, 세 장수가 말을 멈추지 못하고앞으로 나가는데 태조가 뒤에서 활을 쏘니 시위 소리와 함께 모두 거꾸러졌다. 이에 이리저리 옮겨가면서 싸워서 그들을 요충지로 유인하니 좌우에 매복시켰던 군사가 모두 나와 같이 쳐서 크게 이겼다. 나하추가 대적할 수 없음을 알고 흩어진 군사들을 거두어 달아났다.
고려사 절요
사료에 아주 정확하게 이성계의 군대가 "적을 너른 들판으로 유인하여 사방에서 협격"하는 몽골의 전통적인 전법을 활용하여 북원의 나하추를 격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죠. 이성계 가문이 현 함흥일대에서 5대에 걸쳐 원의 지배기구인 쌍성총관부에 속해있었고, 특히 몽골인 여진인과 뒤섞여 살았고, 이성계의 휘하에 북방계열 병력자원이 많았었기 때문에 저러한 전법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을 겁니다.
다른 지역(ex 중국, 중동, 러시아 등)의 사례들은 잘 몰라 아깝긴 하지만, 적어도 위 고려의 두사례는 몽골의 지배하에 있던 지역이 몽골의 전법을 배우고 익혀 몽골의 군대를 격퇴할 수 있었다는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첫댓글 전 지배자이자 적이 사용할만한 선택지를 제대로 공부해서 원나라군을 상대로 이겼다고 볼수있는거네요.
제대로 학습해서 자신의 것으로 소화한거고요.
제가 이에 대해 여기에 글을 올린 적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못 찾겠네요. 골자는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 - 몽골 기병이 할 수 있는 건 다할 수 있는 기병을 양성하돼, 조선은 갑주를 입히고 산에서의 기동도 할 수 있게 했습니다.
당연히 조선 기병과 몽골 기병이 같은 수로 붙고 지휘관도 이성계급이면 몽골 기병이 조선 기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썰리기 시작합니다.
이란 - 화기 도입. 화기를 대거 동원해서 대인용이 아닌 전장 제한용으로 써서 몽골군의 기동 능력을 대거 저하시킨 뒤 중장 기병으로 밟아줌.
몽골 기병과 무장이 똑같은 경기병대를 상시 편성하여 정찰대 섬멸 및 정찰 제한을 걸어버림. 징기스칸 때 같은 지휘부 교란을 허용치 않음.
아울러 공성전을 하지 않고 왠만하면 야전에서 밟아주는 전술을 채택.
명나라 - 몽골 기병과 아주 똑같은 전술을 구사하는 기병을 양성하는데 물론 1:1로는 조선 기병과는 달리 좀 딸립니다만 중국 특유의 물량빨로 밀어붙여 버립니다.
후기에 가선 이게 안 통하지만 이때는 전차와 화포를 운용해서 제압.
@마법의활 자신의 것으로 제대로 소화하고나서 대응방법이 처한 환경과 상황에 따라 달라진거네요.
자신의 것으로 온전하게 흡수했으니 자신이 할수있는 좋은 선택지를 고른거여서요.
@마법의활 다른 건 잘 모르는데, 명나라 선덕제의 사례는 좀 예외적이더군요, 3000으로 몽골 기병 10000을 발라버리니 ㅎㄷㄷ(참고로 이때도 유인후 협격)
@배달의 민족 몽골인한테서 기병운용의 노하우를 제대로 익힌거 같습니다.
정예기병3천명 이었다지만 몽골기병1만명을 상대로 완승을 한걸 보면요.
@노스아스터 몽골 부족 자체를 통짜로 명군으로 편성한 사례가 더 많습니다. 물론 자체 기병 양성도 했지만요.
@마법의활 조선이 전기에 이 악물고 기병 비율을 높게 유지한 이유기도 하지요.
애당초 한반도의 전통적인 산성중심 방어체계는 연계해서 돌릴 기동군 없이는 각개격파 엔딩이라서 정주민 치고는 수준 높은 기병을 굴리는 편이죠.
이런 기조가 약화된 조선후기 조차 청도 조선군은 보병은 사격전은 굉장히 잘하고 기병도 우리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딴에는 수준급이다. 라고 평가했었고.
@마법의활 Ps.근데 이란의 대인전이 아닌 전장제한용 화기라는건 어떤 종류의 무기를 말하는 검미카?
@▦무장공비 공성용 견인포 같은 것들입니다. 성능은 조잡했지만 전장제한용으로는 그만한게 없었죠.
@마법의활 아 성을 인질 삼아서 상대에게 불리한 전장에서도 단기결전을 강요하는 그런식이었나 보군요.
@▦무장공비 그건 아닙니다. 평지 전장에서 기동 제한용으로 썼습니다. 척계광도 화기를 일부러 적의 후열에 쐈는데 비슷한 경우로 생각됩니다.
@마법의활 ?????????
아직 머스켓도 유목민 호드를 제압하긴 무리인 시대인데 이동타겟에 명중률을 기대하는게 무리인 공성용 견인포로 그게 된다굽쇼....?
띠용?
@▦무장공비 포인트는 이동하는 대상을 맞추는 게 아니라, '전장 제한' '기동 제한'에 있기 때문입니다. 대상을 제압하는 건 구성된 화망으로 들어가는 걸 머뭇거리는 경기병에게 돌격하는 이란 중기병의 몫입니다.
@▦무장공비 앞서 척계광도 공성포보다 훨씬 명중률은 좋은 신기전류 무기는 썼습니다만 대인용으로는 기대도 안했으나 효과는 좋았습니다. 경기병이 경쾌한 기동을 못하고 버벅대야 하는 자체에서 이미 반쯤 지고 들어가는거죠.
@마법의활 오...아...
하긴 충분한 공간을 가지고 전개되지 못한체 근접전을 강요 받은 경기병들이 망한 사례는 많지요.
차라리 신기전이면 이해가 쉬운데(로켓류가 태생부터 많이 쏴서 지역제압 하는 무기다 보니) 이걸 구식 공성포로 한다니 이건 또 의외네요.
일종의 상향평준화 인가요 ㅎㄷㄷ.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만 조선 중기이후부터는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지 않게되자 저런 면모가 차차 사라지게 되죠 ㅜㅜ
이성계였다면 1592년 탄금대에서의 결과가 달랐을까요
이성계의 함관령 전투 양상을 보면 초기에는 함관령을 넘어온 나하추군 선봉대를 야습해서 격퇴 한다던지, 소수의 분견대를 이끌고 함관령을 넘어 본대를 기습하는 등, 소수 정예 기병을 이끌고 적을 기습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줍니다. 그러고 나서 군을 물려 본대를 이끌고 위에서 언급한 함흥평원에서의 결전을 치르죠(심지어 함흥평원 뒤쪽에는 얕은 강도 흐릅니다).
신립의 탄금대 전투가 있기 전까지는 조선군이 수동적인 모습이었던 반면, 이성계는 함흥평원전투 전까지 이성계군이 주동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아마 이성계가 이끌었다면 좀 다른 양상으로 흐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다만 신립이 그런 작전을 구상 안 했던 건 아닌데 휘하 조선군이 그걸 할 능력이 없어서 못한 건지, 아니면 그런 전략을 생각지도 못한 것인지는 신립만이 알겠지요……(개인적으로는 전자쪽에 가깝지 않았나 싶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