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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원나라가 몽골고원으로 쫓겨 간 것은 단순히 원나라 황실의 혼란 때문이었을까?
배달의 민족 추천 2 조회 383 24.03.30 14:58 댓글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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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4.03.30 15:02

    첫댓글 전 지배자이자 적이 사용할만한 선택지를 제대로 공부해서 원나라군을 상대로 이겼다고 볼수있는거네요.
    제대로 학습해서 자신의 것으로 소화한거고요.

  • 24.03.30 15:31

    제가 이에 대해 여기에 글을 올린 적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못 찾겠네요. 골자는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 - 몽골 기병이 할 수 있는 건 다할 수 있는 기병을 양성하돼, 조선은 갑주를 입히고 산에서의 기동도 할 수 있게 했습니다.
    당연히 조선 기병과 몽골 기병이 같은 수로 붙고 지휘관도 이성계급이면 몽골 기병이 조선 기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썰리기 시작합니다.

    이란 - 화기 도입. 화기를 대거 동원해서 대인용이 아닌 전장 제한용으로 써서 몽골군의 기동 능력을 대거 저하시킨 뒤 중장 기병으로 밟아줌.
    몽골 기병과 무장이 똑같은 경기병대를 상시 편성하여 정찰대 섬멸 및 정찰 제한을 걸어버림. 징기스칸 때 같은 지휘부 교란을 허용치 않음.
    아울러 공성전을 하지 않고 왠만하면 야전에서 밟아주는 전술을 채택.

    명나라 - 몽골 기병과 아주 똑같은 전술을 구사하는 기병을 양성하는데 물론 1:1로는 조선 기병과는 달리 좀 딸립니다만 중국 특유의 물량빨로 밀어붙여 버립니다.
    후기에 가선 이게 안 통하지만 이때는 전차와 화포를 운용해서 제압.

  • 24.03.30 15:39

    @마법의활 자신의 것으로 제대로 소화하고나서 대응방법이 처한 환경과 상황에 따라 달라진거네요.
    자신의 것으로 온전하게 흡수했으니 자신이 할수있는 좋은 선택지를 고른거여서요.

  • 작성자 24.03.30 15:47

    @마법의활 다른 건 잘 모르는데, 명나라 선덕제의 사례는 좀 예외적이더군요, 3000으로 몽골 기병 10000을 발라버리니 ㅎㄷㄷ(참고로 이때도 유인후 협격)

  • 24.03.30 15:57

    @배달의 민족 몽골인한테서 기병운용의 노하우를 제대로 익힌거 같습니다.
    정예기병3천명 이었다지만 몽골기병1만명을 상대로 완승을 한걸 보면요.

  • 24.03.30 16:28

    @노스아스터 몽골 부족 자체를 통짜로 명군으로 편성한 사례가 더 많습니다. 물론 자체 기병 양성도 했지만요.

  • 24.03.31 01:44

    @마법의활 조선이 전기에 이 악물고 기병 비율을 높게 유지한 이유기도 하지요.

    애당초 한반도의 전통적인 산성중심 방어체계는 연계해서 돌릴 기동군 없이는 각개격파 엔딩이라서 정주민 치고는 수준 높은 기병을 굴리는 편이죠.

    이런 기조가 약화된 조선후기 조차 청도 조선군은 보병은 사격전은 굉장히 잘하고 기병도 우리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딴에는 수준급이다. 라고 평가했었고.

  • 24.03.31 01:46

    @마법의활 Ps.근데 이란의 대인전이 아닌 전장제한용 화기라는건 어떤 종류의 무기를 말하는 검미카?

  • 24.03.31 10:15

    @▦무장공비 공성용 견인포 같은 것들입니다. 성능은 조잡했지만 전장제한용으로는 그만한게 없었죠.

  • 24.03.31 15:23

    @마법의활 아 성을 인질 삼아서 상대에게 불리한 전장에서도 단기결전을 강요하는 그런식이었나 보군요.

  • 24.03.31 18:18

    @▦무장공비 그건 아닙니다. 평지 전장에서 기동 제한용으로 썼습니다. 척계광도 화기를 일부러 적의 후열에 쐈는데 비슷한 경우로 생각됩니다.

  • 24.03.31 23:28

    @마법의활 ?????????

    아직 머스켓도 유목민 호드를 제압하긴 무리인 시대인데 이동타겟에 명중률을 기대하는게 무리인 공성용 견인포로 그게 된다굽쇼....?

    띠용?

  • 24.04.01 07:34

    @▦무장공비 포인트는 이동하는 대상을 맞추는 게 아니라, '전장 제한' '기동 제한'에 있기 때문입니다. 대상을 제압하는 건 구성된 화망으로 들어가는 걸 머뭇거리는 경기병에게 돌격하는 이란 중기병의 몫입니다.

  • 24.04.01 07:39

    @▦무장공비 앞서 척계광도 공성포보다 훨씬 명중률은 좋은 신기전류 무기는 썼습니다만 대인용으로는 기대도 안했으나 효과는 좋았습니다. 경기병이 경쾌한 기동을 못하고 버벅대야 하는 자체에서 이미 반쯤 지고 들어가는거죠.

  • 24.04.01 08:11

    @마법의활 오...아...

    하긴 충분한 공간을 가지고 전개되지 못한체 근접전을 강요 받은 경기병들이 망한 사례는 많지요.

    차라리 신기전이면 이해가 쉬운데(로켓류가 태생부터 많이 쏴서 지역제압 하는 무기다 보니) 이걸 구식 공성포로 한다니 이건 또 의외네요.

  • 24.03.30 15:13

    일종의 상향평준화 인가요 ㅎㄷㄷ.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 24.03.30 16:00

    다만 조선 중기이후부터는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지 않게되자 저런 면모가 차차 사라지게 되죠 ㅜㅜ

  • 24.03.30 16:35

    이성계였다면 1592년 탄금대에서의 결과가 달랐을까요

  • 작성자 24.03.30 19:48

    이성계의 함관령 전투 양상을 보면 초기에는 함관령을 넘어온 나하추군 선봉대를 야습해서 격퇴 한다던지, 소수의 분견대를 이끌고 함관령을 넘어 본대를 기습하는 등, 소수 정예 기병을 이끌고 적을 기습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줍니다. 그러고 나서 군을 물려 본대를 이끌고 위에서 언급한 함흥평원에서의 결전을 치르죠(심지어 함흥평원 뒤쪽에는 얕은 강도 흐릅니다).

    신립의 탄금대 전투가 있기 전까지는 조선군이 수동적인 모습이었던 반면, 이성계는 함흥평원전투 전까지 이성계군이 주동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아마 이성계가 이끌었다면 좀 다른 양상으로 흐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다만 신립이 그런 작전을 구상 안 했던 건 아닌데 휘하 조선군이 그걸 할 능력이 없어서 못한 건지, 아니면 그런 전략을 생각지도 못한 것인지는 신립만이 알겠지요……(개인적으로는 전자쪽에 가깝지 않았나 싶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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