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인혈 1권 십자성(十字城)
서장
그는 무의 신(武神)으로 추앙받는 남자였다.
그는 남들보다 늦은 마흔여덟의 나이에 처음으로 강호에 출두했다.
처음엔 그 누구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중원 무림, 그는 수많은 사람 중의 한명으로 취급
받았다. 그러나 그가 강호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데 걸린 시간은 삼
일에 불과했다.
그의 첫 상대는 당시 산동 땅에서 혁혁한 무명을 날리던 환영신창(幻
影神槍) 혁무수였다. 창을 쓰면 당할 자가 없다던 혁무수가 그의 손
에 쓰러진 것은 불과 이십여 초만이었다.
그의 첫 번째 비무가 세상에 알려지기도 전에 그는 산동의 악가를 찾
아 당시 가주인 악무외를 단 삼십 초 만에 쓰러트렸다. 이어 그는 숨
쉴 틈도 없이 다른 상대를 찾아 비무를 청했다. 그것이 그가 출도한
지 삼일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단지 삼일 만에 그는 강호에서 가장 유명한 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는 중원 역사상 그 누구도 감히 도전한 적
이 없는 일인대륙횡단을 시작했다.
처음엔 모두가 무모한 도전이라고 비웃음을 던지며 그를 무시했다.
그리고 지켜보았다. 과연 네가 어디까지 가는지 지켜보겠다는 그런
눈빛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비웃음이 감탄으로, 감탄에서 다시
경외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소림의 십팔나한진이 그의 손에 의해 처참하게 부서지고, 무당의 칠
성검진이 불과 한식경이 지나기 전에 무너졌다. 구파는 물론 마도의
문파에서도 그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그는 그야말로 거칠 것
없이 폭풍 같은 행보를 계속했다.
가로막는 모든 것을 파괴하며 계속되는 그의 행보에 사람들의 이목이
점점 집중됐다. 과연 그의 행보가 어디까지 갈 것인지, 그의 걸음 끝
에 무엇이 있을 것인지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났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마광도의 추종자가
되었다.
그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강해졌다. 그의 무공은 점점 더 날카로워졌
고, 더욱 빨라졌다. 또한 더욱 패도적으로 변해갔다.
무림의 십대고수 중 절반이 그의 손에 쓰러졌다. 또한 은거기인 중
상당수가 그에 의해 영원히 속세를 등져야했다. 그동안 그에게 쓰러
진 자의 면면을 꼽아보자면 그야말로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화산의 장문이이자 십대고수의 일원인 소요검선(逍遙劍仙), 개방의
태상장로인 무결개(無結?)등, 이루 손으로 꼽을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그가 대륙을 횡단한지 삼년, 그는 삼년동안 무패의 전설을 쌓
아갔다.
삼년동안 수많은 생사결을 승리로 이끌어낸 그는 최후의 상대로 마도
의 절대자라던 절대마조(絶代魔祖) 혁련광을 선택했다. 그리고 혁련
광을 호북성 무한(逍遙)으로 불러들였다.
한쪽은 이미 오십년 전부터 마도의 절대자로 군림한 남자, 다른 한쪽
은 단지 삼년이란 시간동안 혼자의 힘으로 전설을 만들어낸 신흥강
호. 중원전체가 숨을 죽이고 그들의 대결을 지켜보았다.
그들의 대결은 삼일밤낮을 이어졌다. 일반 무림인들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천외천의 대결, 그들이 대결을 펼치던 야산이 평지로 변
하고 주위의 지형이 완전히 바뀔 정도로 엄청난 격전이었다.
무한의 내공을 바탕으로 펼치는 무적의 무공에 사람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했다. 그들의 눈에는 그것이 사람간의 대결이 아니라 신들의
대결로 보였다. 그리고 신들의 대결이 마침내 끝났을 때 그들은 진정
한 무패의 전설을 자신들의 눈으로 지켜봤음을 깨닫고 눈물을 흘렸
다.
마도의 절대자인 절대마조 혁련광은 차가운 대지에 몸을 누였고, 그
는 두발로 대지를 박차고 있었다. 피투성이에 심각한 부상을 입고 있
었지만 최후의 승자는 그였다.
이 믿을 수 없는 결과에 그의 추앙자들은 그를 떠받들며 그 자리에
거대한 성을 세워 그에게 바쳤다.
그것이 바로 십자성(十字城)이라는 거대세력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를 추앙하던 자들은 십자성의 가신으로, 가병으로 들어가 그를 떠
받들었다.
무신(武神) 마광도.
삼백예순두번의 결전을 모두 승리로 이끌어낸 절대의 승부사, 그는
그렇게 강호인들의 지지 속에 십자성의 초대성주가 되었다.
마광도의 출현을 계기로 정파는 십자성을 중심으로 뭉치게 되었다.
그리고 절대마조라는 구심점을 잃은 마도육문(魔道六門)은 천왕성(天
王城)이라는 성을 만들어 십자성에 대항했다.
그것이 무림의 절대세이자 이성(二城)이라고 불리는 십자성과 천왕성
의 시작이었다.
무신 마광도, 그의 나이 올해로 여든 둘이었다.
마흔여덟에 세상에 나왔으니 십자성을 세운지도 벌써 삼십년이 넘었
다. 그동안 그는 여전히 불패의 신화를 자랑했으며, 십자성을 강호제
일의 세력으로 만들어놓았다. 또한 뒤늦은 나이에 결혼을 해 자식을
보았다. 그의 자식은 그의 진전을 이어받아 강호의 절대자가 되었다.
때문에 마광도는 그의 자식에게 십자성의 모든 권한을 넘겨주고 일선
에서 물러났다.
마광도는 십자성이 환히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서서 눈앞에 펼쳐진 붉
은 노을을 바라보았다. 그의 뒤에는 이제까지 그의 그림자로 살아온
남자가 조용히 서있었다.
그는 조용히 자신의 주군의 단단한 등을 바라보았다. 그가 살아온 인
생만큼이나 거대해 보이는 그의 등, 단지 뒷모습뿐이었지만 그의 등
이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충분히 보여주고 있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문득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들어가시지요. 주군!”
그러나 마광도는 어떤 대답도 없이 저무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그에
남자는 다시입을 다물었다.
다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광도가 입을 열었다.
“정말 부끄러운 짓을 했어.”
뜬금없이 나온 말, 그에 남자가 고개를 들어 다시 마광도를 바라보았
다. 그러자 어느새 몸을 돌린 마광도의 모습이 들어왔다.
도저히 팔순이 넘은 나이라고 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마치 사자 같
은 인상에 검은 머리가 바람에 흩날리는 중년의 남자, 왼쪽 이마를
따라서 뺨과 턱을 가로지르는 끔찍한 흉터가 그를 더욱 인상 깊게 만
들었다. 사자의 얼굴을 가진 남자, 그가 바로 당금 무림의 절대자인
마광도였다.
남자는 말없이 자신의 주군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마광도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 나이 여든하고도 둘, 남아대장부로 태어나 해볼 수 있는 것은
모두 해보고 이를 수 있는 것은 모두 이루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나이가 드니 부끄러워지는구먼.”
“무슨 말씀이십니까? 주군께서는 이 땅의 절대자이십니다. 주군이
부끄러우실 일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니야. 그게 아니야.”
남자의 말에 마광도는 자신의 얼굴 한쪽에 깊게 나있는 자상을 어루
만졌다.
상처가 아파왔다. 이미 삼십년이 지난 상처이다. 그러나 상처를 만질
때마다 마광도는 지독한 통증을 느꼈다. 그것이 상처의 통증 때문인
지, 아니면 죄책감 때문인지 이젠 마광도 조차 알 수 없었다.
마광도의 얼굴을 보며 남자가 말을 이었다.
“당신께서는 삼백예순두 번의 비무행을 모두 승리로 이끄신 이 시대
최고의 무인이십니다. 설혹 약간의 실수가 있다 하셨더라도 그것이
부끄러울 수는 없습니다. 주군이시여.....”
“후후.....! 세상은 그렇게 알고 있지. 무패의 남자라고......”
마광도는 말끝을 흐렸다.
붉디붉은 하늘을 보니 마음이 답답해져왔다. 붉은 하늘 속에 그 남자
의 얼굴이 보이는 듯 했다.
마광도가 입을 열었다.
“왠지 오늘은 말하고 싶군. 그냥 한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게나. 그
저 넋두리를 하고 싶어 하는 말이니.”
“......주군.”
“삼십년 전, 그러니까 절대마조와 싸우기 전에 난 한 남자와 싸운
적이 있었다네. 그는 이름 없는 무인이었네. 그러나 그는 중원에 이
름난 그 어떤 무인보다 강했다네. 난 그와의 싸움에서 난생처음 목숨
의 위협을 느꼈다네. 절대마조 혁련광과 싸울 때는 순수한 무인의 투
지였다면 그와 싸울 때는 그야말로 죽을힘을 다해서 싸웠지. 내 인생
에 그때만큼 겁났던 적이 있었던가 물어보면 절대 아니라네.”
그것은 남자도 모르고 있던 사실이다. 그는 마광도가 대륙횡단을 시
작했을 때부터 그를 따라다녔다. 그런 그가 모르는 대결이라니. 남자
는 조용히 마광도의 말에 빠져 들었다.
“허허~! 정말 그는 대단한 남자였다네. 내가 어떤 초식을 펼치건,
내가 어떤 신공을 펼치건 그는 한 자루의 도로 그 모든 초식을 하나
하나 철저하게 깨부셨다네. 그는 마치 악마 같았네. 도를 휘두르기
위해 태어난...... 그와 난 오백초를 넘게 싸웠고, 난 마침내 풍전등
화의 지경에 이르렀지. 그때 난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말았네. 정
말 부끄러운 짓이야.”
“그게 무슨?”
“그의 아내를 인질로 잡았다네. 허허.....!”
“그...런!”
“그의 아내를 인질로 잡고 위협했지. 그래서 겨우 그의 도를 부러트
릴 수 있었지. 그 여파로 그의 아내는 목숨을 잃었고, 그 또한 치명
상을 입었다네. 나의 얼굴에 나있는 상처는 그때 입은 것이네. 지금
도 그때 일을 생각한다면 걷잡을 수 없이 쑤셔온다네. 그야말로 내
인생의 낙인이지.”
“.....”
순간 남자의 눈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무패의 남자로 알려진 무신 마광도가 그렇게 비겁한 짓을 저질렀다
니. 만약 이 사실이 밖에 알려진다면 마광도의 위명에 크게 타격을
입을 것이다. 그러나 마광도는 남자의 반응에 상관없이 말을 이었다.
“그는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네. 부러진 도가 다시 회복되면 돌아온
다고 했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 그의 몸도, 그의 도도 두 번
다시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망가졌다네. 그와 그의 도를 부러트리기
위해 내 혼신의 진기를 사용했으니까. 그러나 그때는 나 역시 운신하
기 힘들 정도로 중상을 입어 그를 보낼 수밖에 없었네. 그렇지 않았
다면 난 결코 후환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네.”
마광도의 눈은 회한에 잠겨 있었다.
남아로 태어나 대륙을 횡단하며 전설을 만들어냈지만 정작 그 자신은
후회를 하고 있었다. 일생일대의 오점, 만약 이 사실이 밖으로 세어
나간다면 그의 명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말 것이다.
“이것이 내가 이제까지 가슴속 깊이 묻어두었던 비밀이네. 그동안
갑갑했다네. 그래서 한번쯤은 누군가에게는 말하고 싶었다네.”
“......주군.”
남자의 얼굴에 감격의 빛이 떠올랐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말해주었다는 것, 그것은 마광도가 그만큼 자
신을 신뢰하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더욱 깊이 고개를 숙여
마광도에 대한 존경을 표시했다.
그 순간 마광도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그와 함께 그의 오른손이 붉
은 빛을 띠었다. 그러나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그런 마광도
의 변화를 눈치 채지 못했다.
순간 마광도의 오른손이 남자의 목덜미에 내리 꽂혔다.
퍽-!
“크헉! 무...슨?”
남자의 얼굴에 불신의 빛이 떠올랐다. 그러나 마광도의 얼굴에는 전
혀 변화가 없었다. 그는 남자를 보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나의 실수네. 붉은 하늘을 보니 나도 모르게 그날의 일이 생각나서
절대 하지 말았어야 할 이야기를 하고 말았네. 무덤까지 가지고 갈
비밀인데.....”
“......그런?”
“자넨 절대 들어서는 안 될 이야기를 들은 것이네. 그저 늙은이의
변덕 때문이라고 편하게 생각하게나.”
“주......군!”
남자의 입에서 검붉은 선혈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그의 눈이 회백색
으로 변해갔다. 그러나 그를 바라보는 마광도의 시선은 놀라울 정도
로 담담했다.
“고마우이! 누군가에게는 한번쯤은 이야기해보고 싶었네. 너무나 가
슴속 깊은 곳에 묻어놨기에 정말 참을 수가 없었네. 이제 자네 덕분
에 그 소원을 풀었네. 자네의 가족은 내가 잘 돌봐줄 테니 너무 걱정
하지 말게나.”
“지...독한!”
남자는 이를 갈았지만 이미 그의 몸에 남아 있는 힘 따위는 없었다.
털썩!
남자의 몸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의 눈에는 이미 생기가 사라
지고 없었다. 삼십년 세월을 충성으로 따랐는데 돌아온 것은 그야말
로 허무한 죽음이었다.
마광도는 담담히 남자의 시신을 바라보다 다시 붉은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만약 그의 도가 부러지지 않았다면 나는 십자성을 세우는 대신 평
생 동안 그와 싸워야했을 것이다. 이제부터 나의 남은 생은 그의 도
법을 꺾기 위한 무공을 만들기 위한 시간이다. 반드시 나의 삶을 바
쳐 반드시 그를 능가할 무공을 만들 것이다.”
그것이 마광도의 의지였다.
그날 이후 공식석상에서 마광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날 이후
그에 대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았다.
-십자성 비사총록(秘事叢錄)중에서-
“삼백년 전에 이런 일이 있었던가? 재미있군! 지옥의 도법이라니.
하지만 삼백년이 지나도록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면 이미 절전이 되었
다고 보는 게 옳겠군.”
탁!
남자가 읽던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에 거대하게 펼쳐진 대지가 들어왔다.
십자성.
그 거대한 신의 대지가......
1장. 그의 이름은 적무강
1
십자성(十字城).
삼백년 이래 무림의 제일세(第一勢)로 고고하게 버텨온 신의 대지.
십자성의 성주는 대대로 천하제일인이었다. 그들이 무공을 펼쳐 보이
던 그렇지 않던 간에 사람들은 항상 천하제일인으로 십자성주를 꼽았
다.
십자성주가 그렇듯 십자성의 규모 또한 천하제일이었다. 호북성 무한
에 자리 잡은 십자성은 외성과 내성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외성의
크기만으로도 일반 성도의 규모를 훨씬 뛰어넘었다. 십자성의 외성에
는 내성무사들의 가족과 십자성에 필요한 각계의 사람들이 상주를 했
다. 그들은 일반 백성들이 그렇듯 생업에 종사하며 십자성의 외성에
서 생활했다. 때문에 외성은 또 하나의 세상이나 마찬가지였다.
십자성의 내성은 엄격하게 출입이 제한된 곳이었다. 그곳은 오로지
십자성에 등록된 정식인원만이 출입할 수 있기에 외성에 거주하고 있
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내성의 허락이 없는 한 출입할 수 없었다. 때
문에 외성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내성이 어떤 조직으
로 구성돼 있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단지 외부에 알려져 있
는 것은 십자성주 밑에 문상과 무상이 있고, 그들이 모든 조직을 아
우른다는 것이었다. 또한 참호대(斬虎隊)라는 외부조직이 있어 십자
성의 외부 일을 모두 도맡아 처리한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십자성
에 참호대라는 조직 하나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십자성은 그 규모만큼이나 비밀에 쌓여있는 곳이었다.
십자성 외성과 내성 사이에는 철혈로(鐵血路)라는 대로가 있었다. 그
리고 이 철혈로를 중심으로 좌우에 커다란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곳이 바로 외성의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이곳을 일컬어 만통가(萬統街)라 일컬었다. 세상에 존재하
는 모든 것이 이곳에 모여 있다는 의미에서였다. 천하에 존재라는 모
든 것이 이곳에 있고, 이곳에 없다면 천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다. 그것이 만통가 사람들의 자존심이었다.
만통가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상인들은 물건을 팔고, 일반인들은
생업에 종사했다. 이곳엔 상가도 있고, 기루도 있었다. 때문에 내성
의 사람들은 필요할 때 외성에 나와 필요한 모든 것을 구했다. 고된
수련을 받은 무인들은 기루에 들러 객고를 풀었고, 재무를 책임지는
자들은 이곳에서 필요한 만큼의 수입을 거둬들였다.
“자...자, 이곳에서 제일 질 좋은 비단을 싸게 팝니다. 지금 시간을
놓치면 두 번 다시 이런 값에 이런 물건을 구할 수 없을 겁니다. 그
러니 어서 어서 오세요.”
“이쪽에 오십시오. 저 멀리 천축국에서 들여온 진귀한 향료를 팝니
다.”
“하하하~! 저의 집에서는......”
만통가는 활기에 차 있었다. 상인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하
나라도 더 물건을 팔기 위해 흥정을 하고 있었다.
깡깡깡!
만통가의 가장 외진 곳, 사람들의 시선에서 한참 벗어난 곳에 대장간
이 있었다. 대장간에서는 힘찬 망치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가철방(河家鐵房).
만통가에서 가장 오래된 철방 중 하나였다.
하가철방에서는 후끈한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한여름인데다
가 화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에 사람들의 얼굴은 벌겋게 익었고,
끊임없이 굵은 땀방울을 흘리고 있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한 치라도
화로에서 멀리 떨어지기 위해 그쪽으로는 다가가지도 않았다.
땅 땅!
쉬지 않고 이어지는 망치질을 하는 남자가 있었다. 구릿빛 피부에 다
부진 근육을 가진 남자, 덩치가 큰 것은 아니었지만 대장간의 고된
일로 단련된 그의 몸은 묘한 박력을 풍기고 있었다.
그는 남들이 모두 피하는 화로의 곁에서 쉴 새 없이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그의 왼쪽 손에는 강철집게가 들려있었고, 오른쪽 손에는 망
치가 들려 있었다. 그가 망치를 내리칠 때마다 붉은 쇳덩이가 형체를
찾아갔다.
남자가 다루고 있는 쇠는 정철(精鐵)이라는 것으로 강도가 뛰어나고
탄성이 좋아 검이나 도, 도끼 등의 날이 되는 부분이었다. 정철을 다
를 수 있을 정도의 장인은 철방에서도 흔치 않았다. 왜냐하면 정철의
성질은 다루기도 힘들거니와 그 하나만으로 만들기보다 다른 쇠들과
같이 섞어 쓸 일이 많기 때문이다. 같은 쇠라도 성질이 판이하게 다
른 종류의 것을 혼합할 수 있다는 것은 장인으로써 능력이 이미 독보
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였다.
땅땅땅!
남자가 한참동안 망치를 두들기자 한 덩어리의 쇠에 불과 했던 물건
이 형체를 잡았다.
곧은 직선으로 뻗어나간 물체, 그것은 칼날이었다. 칼날이 완성되자
남자는 미리 만들어두었던 도신을 작업대 위에 올렸다. 도신의 날이
있을 자리에는 홈이 파여져 있을 뿐 날이 존재하지 않았다. 남자는
방금 만든 칼날을 도의 홈에 끼워 넣었다. 그러자 미리 마치기라도
한 듯 딱 맞아 떨어지며 완벽한 형태를 잡았다.
“훗!”
처음으로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러나 작업은 이게 끝이 아
니었다. 아니 오히려 이제 시작이었다.
땅땅땅!
다시 남자는 망치질을 시작했다.
같은 종류의 쇠로 칼날과 몸체를 만드는 것보다 이렇게 다른 성질을
가진 쇠를 합금해 만드는 방식이 수명도 오래가고 강도도 뛰어나다.
바다건너 왜국에는 접쇠라는 방식이 있어 쇠를 얇게 펴서 한 겹씩 접
으며 도를 만드는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남자가 도를 만드는
방식으로 만든다면 접쇠 방식보다 뒤지지 않으면서도 뛰어난 도를 얻
을 수 있었다. 물론 장인의 능력이 뒷받침된다는 전제하의 말이다.
남자의 망치질은 한참이나 계속됐다. 그는 화로와 작업대를 번갈아
가며 칼을 만들었다.
이곳 하가철방의 화로는 매우 특이한 것으로 이정도의 화력을 낼 수
있는 화로는 천하에 오직 이곳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강력한 화력을 뿜어내는 화로인 것이다.
보통 두세 명이 달라붙어야 할 작업을 남자는 홀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안색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는 두시진이 넘게 망
치질을 하면서도 전혀 지친기색이 없었다.
일렁이는 화로의 불길도 남자에게는 그리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남자의 움직임에 동조해 일렁이는 것 같았다.
남자의 망치질 소리가 거세질수록 화로의 불길도 거세졌다. 반대로
남자의 망치소리가 잦아들면 불길도 가라앉았다. 그것은 매우 신기한
광경이었지만 철방에 있는 그 누구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에게는 늘상 보아오던 광경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남자의 망치질이 끝났다. 그는 벌겋게 달아오른 칼을 옆에 있
는 수통에 집어넣었다.
치-이-익!
시뻘겋게 달아오른 칼날이 들어가자 수통의 물이 격렬하게 끓어올랐
다.
얼마나 수통에 담그고 있었을까? 남자가 수통에서 칼을 꺼냈다. 그러
자 윤기가 흐르는 칼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 됐군!”
남자의 입에서 기분 좋은 소리가 나오자, 그제야 그의 주위로 누군가
다가왔다.
“다 되었는가?”
“예! 이제 아저씨의 차례입니다.”
남자는 마치 장비처럼 고슴도치 수염이 난 중년의 남자에게 칼을 넘
겼다. 그러자 중년의 남자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오......! 역시 자네군. 정말 제대로 칼이 만들어졌어. 이제부터는
내 차례군.”
중년의 남자 역할은 마조장(磨造匠)이었다.
마조장은 숫돌에 날을 갈아서 세우는 작업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
이다. 중년의 남자는 이곳 하가철방에서 마조장의 역할과 함께 칼에
광을 주는 마광(磨光)작업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의 이
름은 하성문, 이곳 하가철방의 소주인이었다.
하성문은 연신 웃음을 터트리며 칼을 가지고 숫돌로 갔다. 남자의 솜
씨는 그야말로 완벽해 그가 할 작업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남자는 하성문에게 칼을 넘긴 후 밖으로 나갔다.
햇볕이 쏟아지는 철방 밖으로 나오자 남자의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
다. 그는 이제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이었다. 대장간에서 험한
일을 하는 사람답게 그의 피부는 구릿빛으로 그을려 있었고, 근육 또
한 균형이 잘 잡혀 있었다. 약간은 순박한 얼굴이지만 그의 입술은
굳게 다물려 있어 매우 고집스러운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유난히도 짙은 눈썹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시장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평범한 얼굴이
었다.
“오~! 무강이 일을 모두 끝냈나 보군.”
“예! 좀 쉬어도 될 것 같습니다.”
남자가 밖으로 나오자 철방의 식구들이 한마디씩 건넸다. 그에 남자
는 미소를 지으며 일일이 대답했다.
그의 이름은 적무강(赤武强)이었다.
그가 이곳 하가철방에 들어온 것은 오 년 전, 불과 오년의 세월동안
그는 하가철방의 어떤 사람들보다도 쇠의 성질을 월등히 이해하고 최
고의 실력을 갖춘 장인으로 자라났다. 지금 그보다 쇠를 더 잘 다루
는 사람은 이제 늙어서 철방에 거의 나오지 않는 하노인 밖에 없었
다. 하노인은 하성문의 아버지로 이곳 하가철방의 주인이었다. 적무
강은 하노인의 기술을 모두 물려받은 수제자인 것이다.
그토록 고된 일을 했건만 적무강은 전혀 지친 기색이 없었다. 아침부
터 지금까지 혼자서 단조에 담금질까지 했건만 그의 다갈색 근육에는
흔한 땀방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대장간의 사람들은 그런 사
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적무강의 모습이 워낙 자
연스러웠기 때문이다.
적무강은 문가에 앉아서 뜨거운 햇살을 즐겼다. 한여름의 햇살은 무
척이나 따사로웠지만 적무강에게는 무척이나 감미롭게 느껴졌다.
“좋구나!”
그의 입가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어렸다.
벽에 기대서 뜨거운 한여름의 햇살을 받는 그의 모습에 철방의 사람
들이 미소를 지었다. 늘 일이 끝난 후에 이런 모습으로 앉아있는 적
무강의 모습을 봐왔기 때문이었다.
“어~이! 너 또 밖에 나와 있냐? 영감님이 보면 잘릴지도 모른다.”
그때 굉장히 짓궂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굳이 얼굴을 보지 않더라도
단지 목소리만으로 무척이나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적무강이 흐릿하게 미소를 지으며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옮겼
다. 그러자 굵은 선이 인상적인 남자가 보였다. 그의 팔다리는 한눈
에 보기에도 무척이나 튼튼해보였으며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 떠올
라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무척이나 쾌활한 성격을 가진것 같은 남
자였다.
적무강은 일어서며 대답했다.
“어쩐 일이냐? 이시간이면 훈련을 해야 할 때 아니냐?”
“하하~! 뭐 나도 그러고 싶었지만 말이야 검이 이렇게 되서 말이
야.”
적무강의 말에 남자가 고개를 으쓱해 보이며 자신의 손에 있는 검을
들어보였다.
그의 검은 이가 여기저기 나가 한눈에 보기에도 무척이나 험하게 썼
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눈에 남자가 왜 이곳에 왔는지 적무강은 알아차렸다. 그의 얼굴에
어쩔 수 없다는 빛이 어렸다.
“또 험하게 검을 다뤘구나. 검을 네 몸처럼 아끼라니까.”
“그건 알지만 나도 어쩔 수 없다구. 너야 이곳에서 대장장이 일을
하면서 검을 만드는 입장이니까 그렇지만 난 다르다구. 난 참호대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어. 지금 열심히 하지 않으면 뒤쳐진단 말
이야. 그러니까 검을 험하게 쓸 수밖에.”
남자가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적무강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이 고개를 흔들었다.
남자의 이름은 철홍(鐵紅), 이곳 십자성에서 유일한 적무강의 친구였
다.
철홍은 적무강과 함께 대장간에서 일을 배우던 사이였다. 그러나 그
는 늘 강호를 질타하는 꿈을 꾸었고, 그 덕에 대장간 일에 몰두하지
못했다. 그의 꿈은 내성의 참호대에 들어가서 강호를 질타하는 것이
었다. 그리고 그것은 외성의 만통가에 사는 모든 젊은이들의 꿈이기
도 했다.
철홍에게 기회는 매우 우연히 찾아왔다. 참호대의 대주가 우연히 이
곳 하가철방으로 자신의 검을 고치러왔고, 그 와중에 철홍의 자질을
알아본 것이다. 대장간 일을 하면서 매우 잘 단련된 그의 몸과 자질
은 참호대의 대주 눈에 들었다.
그는 철홍 뿐 아니라 적무강에게도 참호대에 들어올 것을 제의하였으
나 적무강은 거절하였다. 그에 철홍 또한 같이 들어가자고 적무강을
유혹했으나 그는 단호히 거절하고 철방에 남았다. 참호대주는 적무강
을 매우 아까워했으나 적무강의 의지에는 변함이 없었다. 매우 순해
보이는 얼굴이지만 적무강의 고집은 무척이나 셌다. 그는 아직까지
자신의 결정을 번복한 적이 한 번도 없는 것으로 철방에서 유명했다.
참호대의 말단 대원으로 들어간 이후에도 철홍은 틈을 내 꼬박꼬박
철방으로 놀러왔다. 물론 그 대부분이 적무강에게 자신의 검을 손질
을 부탁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가 적무강의 가장 절친한 친구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적무강은 철홍의 검을 받아들고 말했다.
“네 검은 워낙 질이 안 좋은 쇠로 만들어져서 수리해도 며칠 못가서
또 이렇게 될 거야. 그러니까 이 검의 날을 다시 세워도 아마 소용없
을 거야.”
“그럼 어떡하지?”
철홍의 얼굴이 금세 울상이 되었다. 그러자 적무강이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마침 내가 좀 시간이 남으니 네 검을 하나 새로 만들어줄게. 그러
니 내일까지는 이검을 그대로 써.”
“정말? 정말 새 검을 만들어줄 거야?”
적무강의 말에 철홍이 뛸 듯이 기뻐했다. 그에 적무강이 웃음을 지었
다.
철홍은 적무강의 두 손을 잡으며 말했다.
“역시 너는 유일한 내 친구야. 네가 만든 검이라면 아무리 검끼리
부딪쳐도 상하지 않을 거야. 좋아! 그 보답으로 오늘은 내가 술을 산
다.”
“안돌아가도 되냐?”
“흐흐~! 괜찮아. 오늘 같은 날 술 한잔 하지 않으면 언제 술을 하
냐?”
“그럼 들어가기 전에 네 손을 본뜨자.”
“알았어! 흐흐!”
적무강은 철방에 가서 기다란 진흙덩어리를 들고 나왔다. 그것은 꼭
검의 손잡이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적무강이 내밀자 철홍은 말
없이 손으로 그것을 잡았다. 그가 손을 떼자 진흙에는 철홍의 손모양
이 고스란히 찍혀 있었다.
“됐다. 이정도면 네 손에 맞는 검을 만들 수 있을 거야.”
“그럼, 네 솜씨야 내가 알지. 내성의 얼간이들보다 네가 백배는 낫
지.”
철홍의 얼굴에는 뿌듯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내성에도 철방은 있었다. 그들은 철홍이 소속돼 있는 참호대 뿐 아니
라 다른 조직에도 무기를 지급한다. 그러나 그곳 어디에도 적무강 정
도의 실력을 가진 자는 없었다. 때문에 검을 손질할 때면 철홍은 반
드시 시간을 내서 적무강에게 왔다.
하노인의 실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적무강은 내성 누구에게도 결코
뒤지지 않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자
는 그리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철홍이나 참호대의 대주인 광도수 정
도였다.
적무강의 스승인 하노인은 그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그 누구도 무강이처럼 불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한 그
는 쇠를 자신의 수족처럼 다를 수 있는 능력을 타고 태어났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적무강이 쇠를 다루는 솜씨는 매우 뛰어났다. 불
과 오년 전에 십자성에 들어와 하가철방에 들어온 이후 그는 미친 사
람처럼 오직 쇠를 다루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철홍이
무공을 익히기 위해 수련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노력했다. 그런 그
의 노력은 지독할 정도여서 하가철방의 사람들은 적무강이 망치를 들
면 오한이 들 정도였다.
언젠가 하노인이 이유를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적무강이 한 대답은
매우 간단했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어서입니다.
그의 말에 하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야 할 일이 있는 자는 최고
의 노력을 기울일 수 있다.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의 의
지를 믿고 하노인은 적무강에게 모든 기술을 전수해줬다. 덕분에 오
늘의 적무강이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적무강은 아직도 멀었다고 생
각했다. 아직 자신의 실력으로는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
다.
철홍이 적무강의 어깨를 쳤다.
“가자! 오늘은 주루에서 거하게 한잔하자.”
그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적무강의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들은 철방을 나와 걸음을 옮겼다.
2
적무강과 철홍은 하성문에게 허락을 구하고 밖으로 나왔다. 어차피
이제 적무강도 할일도 없는지라 하성문은 흔쾌히 허락했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걸었다. 주로 이야기하는 쪽은 철홍
이었고, 적무강은 주로 듣는 쪽이었다.
철홍은 한시도 쉬지 않고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는 주로 자신이 들
어간 참호대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덕분에 적무강 조차 한 번도 보
지 못한 참호대의 인원구성이나 대주인 광도수의 성격을 환하게 파악
했을 정도였다.
“정말 광대주님은 열혈의 성정을 조금만 죽였으면 지금쯤 더 좋은
곳으로 승진할 수 있었을 텐데. 하여간 그놈의 급한 성정 때문에 참
호대처럼 일선부대의 대주로 있으니. 정말 아까워.”
“후후......! 넌 어떠냐? 무공은 익힐 만하냐?”
“말도 마라. 난 무공이라고 해서 대장간에 있을 때처럼 팔다리만 휘
두르면 되는 줄 알았는데 머리도 좋아야 하더라. 그래서 지금 머리가
아파 죽겠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그렇게 머리가 좋은 것은 아니잖
냐. 요즘은 참호대들이 수련하는 진법까지 같이 병행하는데 덕분에
머리카락이 한 뭉텅이는 빠진 것 같아. 내 머리숱이 좀 줄어든 것 같
지 않냐?”
“그러고 보니 조금 줄어든 것 같기도 하다.”
“그치?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아~! 정말 허무한 청춘이어라.”
적무강의 말에 철홍이 엄살을 떨었다.
친구의 엄살에 적무강은 그저 희미한 웃음만 지었다. 말은 그렇게 해
도 철홍이 얼마나 노력을 기울이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철홍은 너무나 늦은 나이에 무공을 시작했다. 비록 그의 자질이 뛰어
나다고 할지라도 절정무인이 되기에는 많이 늦었다고 봐야했다. 철홍
역시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남들의 배는 수련에 투자
했다. 그러나 아직 그가 햇병아리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떠들다 보니 어느새 주루가 있는 골목에 도착했다. 골목길의 양옆에
쭉 늘어서 있는 주루들, 이곳이 바로 십자성의 유일한 환락의 공간이
었다.
십자성은 기본적으로 남자들을 주축으로 이루어진 공간이었다. 수많
은 남자들이 모여 있는 공간이다 보니 그들의 욕망을 풀어줄 필요성
이 있었다. 때문에 십자성에서는 예전부터 이곳을 만들어 남자들의
욕구를 풀어주는 공간으로 활용했다.
그러나 적무강과 철홍이 들어간 곳은 청루나 홍루가 아니었다. 그들
은 이곳 주루들 중에서도 가장 구석에 위치한 허름한 곳으로 들어갔
다. 이곳은 적무강과 철홍이 술을 입에 대기 시작할 무렵부터 찾았던
단골술집으로 이름이 월하루(月下樓)였다. 그러나 이름만큼 풍취를
기대한다면 어리석은 일이다. 이곳은 단지 이름만 멋있는 곳이기 때
문이다.
“어서들 와. 정말 오랜만이네.”
그들이 들어서자 오십대의 넉넉한 인상의 아주머니가 그들을 맞았다.
그녀가 바로 월하루의 주인인 철낭낭이었다. 철낭낭은 외모에서 보이
듯 무척이나 푸근한 성격의 소유자로 적무강과 철홍을 마치 자신의
친자식처럼 아껴 주었다.
철홍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여전히 월하루는 파리만 날리는군요. 그러게 다른 홍루나 청루처럼
기녀들을 들이지요. 맨날 이게 뭡니까? 난 도대체 철낭낭이 뭘 먹고
살아가는지 모르겠다니까. 매일 이렇게 파리만 날리는데.”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자리에나 앉아. 그렇게 계속 수다만 떨다
가 이곳에 있는 파리가 네놈 입안에 들어가겠다.”
“하하하!”
“이층으로 올라갈 거지?”
“두말하면 잔소리지요. 이층으로 늘 먹던 것 갖다주세요.”
“알았다. 올라가서 기다리고 있어.”
매일같이 파리를 날려도 월하루의 이층은 무척이나 경치가 좋았다.
월하루는 매우 절묘한 위치에 자리를 잡고 있어 이곳 환락가가 한눈
에 들어왔다. 때문에 월하루의 이층에 있으면 많은 구경을 할 수 있
었다.
그들은 밖의 전경이 잘 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곳은
월하루를 오면 늘 그들이 앉는 자리였다.
수많은 남자들이 오늘도 하룻밤의 쾌락을 찾아 환락가에 몰려들었다.
적무강과 철홍은 월하루의 이층에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문득 철홍이 말했다.
“근데 넌 언제까지 철방에 있을 거야? 이젠 너도 무공을 익혀야 되
지 않아?”
“훗! 네 걱정이나 해.
“하여간 너의 속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남자의 꿈은 뭐니 뭐니
해도 검 한 자루를 들고 중원을 누비는 것 아니냐. 그러려면 십자성
의 참호대 만큼 좋은 곳이 어디 있냐? 하여간 굴러들어온 복을 제 발
로 걷어차다니.”
철홍의 눈은 어느새 몽롱해져 있었다.
고아로 자란 그의 꿈은 무림의 협객들이 그러하듯 검 한 자루에 의지
해 중원을 누비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참호대의 말단에 불과한 그
가 독립을 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요원한 일이었다. 참호대가 비록 십
자성의 얼굴이긴 하지만 그들에게는 영약이나 신병이기가 지급되지는
않았다. 참호대는 어디까지나 얼굴일 뿐 실질적인 주력은 아니기 때
문이다.
그것은 이곳 십자성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원래 중요한 것은 결코 밖으로 내보이지 않는 법이니까.
갑자기 철홍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적무강은 철홍의 시선을 따라 고개
를 돌렸다.
철홍의 시선이 닿은 곳, 그곳에는 사남일녀가 길을 걷고 있었다.
기품 있는 모습과 고급스런 의복이 한눈에 보기에도 그들이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적무강은 그들을 바라보다 철홍에게 물었다.
“누구야?”
“아······! 넌 저들을 모르겠구나. 저들이 바로 이번에 십자
성에서 새로 발족한 웅풍대(雄風隊)의 부대주들이야. 하나같이 천하
에서 알아주는 기재들이지. 정말 저들에 비하면 난 새 발의 피밖에
안된다니까.”
“음!
철홍의 말에 적무강이 안력을 돋워서 다시 그들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들의 모습이 눈에 또렷이 들어왔다.
“저들 중 가장 가운데 있는 풍채 좋고 인상 좋은 남자가 바로 백씨
세가의 차남인 백만우야. 그야말로 검의 귀재라고 알려져 있지. 그리
고 그의 왼쪽에 있는 남자가 제갈호, 듣기로는 웅풍대의 지낭이라고
알려져 있어. 그 이외의 사람은 그리 알려진 바가 없어. 아! 제일 뒤
에 있는 여자 보이지? 그 여자가 바로 강소성 양주서가의 장녀인 서
문아야. 이미 몰락했다고 알려진 양주서가가 저 여인으로 인해 부활
할 거란 이야기가 돌만큼 대단한 재녀지. 또 저 미모 좀 봐. 정말 대
단하지 않냐? 여기까지 빛이 나는 것 같아.”
웅풍대는 요 근래 다시 준동하고 있는 천왕성에 맞서기 위해 십자성
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조직이었다. 천하를 뒤져 절세의 기재 백
명을 뽑아 그들에게 온갖 영약과 신병이기를 지급했다.
십자성에서는 그들을 정예조직으로 키우길 원했다. 때문에 그들에 대
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크하~! 나도 웅풍대에 들어갔으면 소원이 없겠다. 저들은 기본적으
로 일갑자의 내공을 지원받는다고 하더라구. 하긴 온갖 영약을 복용
하는데 그 정도도 안 된다면 말도 안 되지.”
철홍은 몽롱한 눈으로 웅풍대의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에게 있어 웅
풍대는 감히 넘볼 수 없는 거대한 벽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에
겐 숭배의 대상이었다.
적무강의 시선은 웅풍대의 부대주들을 훑어 보다 서문아의 얼굴에 머
물렀다. 순간 그의 얼굴에 이채가 떠올랐다.
아름다운 얼굴, 무척이나 고아한 분위기, 그러나 그와는 어울리지 않
는 그녀의 차가운 눈동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분명히 동료들과 웃고
떠들지만 그녀의 눈은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때문에 그녀는 매우 독
특한 매력을 뿌리고 있었다.
적무강이 그녀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저들이 웅풍대의 부대주들이라면 대주는 누구지?”
“대주? 이건 비밀인데 특별히 너니까 알려줄게. 웅풍대의 대주는 바
로 이곳 십자성의 소성주인 마정옥 대공자야. 마정옥 대공자가 십자
성의 후계자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니까 그의 직속 부대인 웅풍대
역시 차기 권력의 핵심에 가장 근접해 있다고 보는 게 옳을 거야.”
“마정옥이라······.”
적무강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마정옥은 이제 이십대 초반의 남자로 현 십자성주인 마영백의 뒤를
이을 강력한 후계자로 떠오르고 있었다. 아직까지 외성은 물론 내성
에서조차 그를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본 사람들
은 한 결 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천하에서 그보다 더 완벽한 사람은
없을 거라고.
문무겸전은 물론 외모까지 천하제일이라고 불리는 남자, 그가 바로
대공자 마정옥이었다. 천하가 뒤집어 지는 일이 없는 한 그가 십자성
주에 오른다는 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음!”
그때 적무강이 나직하게 신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철홍이 물었다.
“왜 그러는데?”
“아무것도 아냐!”
적무강은 가볍게 손을 흔들며 별일 아니라는 듯이 웃었다. 그러나 그
는 무척이나 놀란 상태였다.
‘분명히 나의 시선을 느꼈다. 그 거리에서......
조금 전에 서문아는 적무강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것은 분명히 그녀
가 적무강의 시선을 느꼈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녀와의 거리는 이십
여 장, 그 정도의 거리에서 시선을 느꼈다면 그녀의 수준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곧 시선을 돌리기는 했지만 서문아는 적무강이 있는 곳을 정확하게
바라봤다. 순간 적무강은 아찔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무어라 형용
할 수 없는 종류의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내 서문아 고개를 돌렸기에
그 이상은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서문아를 비롯한 웅풍대의 부대주들은 월하루 근처의 주루로 들어갔
다. 때문에 더 이상 그들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때 철
낭낭이 술과 안주를 들고 나왔다. 그녀가 탁자위에 음식을 차려놓고
내려간 후 두 사람은 술잔을 기울였다.
철홍이 푸념을 했다.
“세상은 너무 불공평해. 누구는 선택을 받아 저렇게 온갖 혜택을 모
두 받고, 누구는 죽을 둥 살 둥 무공을 익혀도 그들의 발끝에도 미치
지 못하니.”
“후후~! 또 신세타령이냐?”
“그래! 신세타령이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가겠냐?
우리 같은 사람이야 아무리 노력해도 한계가 있는 걸. 나도 좋은 집
자식으로 태어났으면 저들 못지않게 잘할 자신이 있다.”
사실 이 시대에 신분의 상승을 꿈꾸는 것은 그야말로 한낱 꿈에 불과
하다. 일반 무인이 제아무리 무공에 대한 재질이 뛰어나다 할지라도
온갖 혜택을 받고 수련을 하는 명문가의 자제들을 뛰어넘는 것은 거
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철홍은 무척이나 아까운
사람이었다.
비록 자질은 뛰어나지만 그가 익힐 수 있는 무공은 한계가 있었고,
또한 내공 또한 한계가 있었다. 더구나 무공을 익히기 시작한 나이가
너무 늦어 절정에 오르기는 힘이 들 것이다. 그에 반해 웅풍대의 대
원들은 모두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수많은 혜택을 받았
고, 훌륭한 무공을 일찍부터 배웠다. 거기에 십자성에 발탁되어 체계
적인 수련과 함께 수많은 영약과 절세 비급을 지원받으니 어찌 철홍
이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겠는가? 이미 그가 웅풍대를 따라잡을 수
있는 가능성 따위는 추호도 없는 것이다.
“조금 있으면 마정옥 공자의 스물두 번째 생일이다. 아마 성주께서
는 이번 기회를 빌려 대공자를 후계자로 선포할 거야. 그렇게 되면
이 거대한 성이 대공자의 것이 되는 거지.”
“음!”
“정말 선택받은 사람이야.”
“후후~! 넋두리는 그만하고 술이나 마시자.”
“아! 내가 너무 신세타령만 했나? 그래 술이나 마시자. 건배!”
창!
두 사람은 술잔을 부딪쳤다.
술이 들어가자 금세 목구멍이 화끈해졌다.
“크으~! 좋다. 정말 철낭낭의 술은 정말 최고라니까.
지금 그들이 마시는 것은 철낭낭이 비전의 솜씨로 만든 죽엽청주로
이곳 월하루의 손님이 아니면 절대 마실 수 없는 것이었다. 때문에
적무강과 철홍은 우연히 이곳에서 죽엽청주를 마신 후 술을 마실 때
는 반드시 이곳으로 왔다.
본래 죽엽청주는 산서성 특산의 술이기에 적무강은 철낭낭이 산서 사
람이 아닌가 짐작을 했다.
“그런데 영감님은 이제 철방에 나오지 않는 거냐? 요즘 통 안보이시
던데.”
“음! 이제 늙으셔서 기력이 많이 떨어지셨으니까. 하지만 가끔 나와
서 작업하시는 것을 지켜보시기는 해.”
“그래! 이제는 편히 쉬실 때도 되었는데. 하아저씨도 있고, 너도 있
으니 이제 철방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잖아.”
“아직 나는 멀었어. 그분과 나의 실력은 아직 비교조차 할 수 없으
니까.”
“헤~! 그래도 내가 보기에는 네 실력이 천하제일이야.”
그들이 말하는 사람은 하가철방의 주인인 하노인이었다. 적무강의 실
력은 모두 하노인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그러나 아직 적무강의 실
력은 하노인에게 못 미쳤다. 분명 외적인 실력으로는 하노인과 대등
했으나 아직 적무강은 한 가지를 갖추지 못했다. 그것은 바로 연륜이
었다.
오랜 세월 쇠와 함께 호흡을 해온 하노인의 실력은 쇠를 구분하지 않
는다. 어떤 쇠라도 그의 손에 들어온다면 그는 그 성질 그대로를 살
려서 필요한 물건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일상적인 물품을 주로 만
들었지 검이나 도 같은 살상무기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만약
그가 검이나 도를 만들었다면 내성에 있는 철방은 모두 문들 닫아야
했을 것이다.
하노인은 그야말로 십자성의 숨겨진 명장이었다.
적무강은 다시 술잔을 들이켰다. 아직 그가 원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
기에는 실력이 모자랐다. 철방의 사람들이나 철홍은 그의 실력을 추
켜세우지만 적무강 본인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후~! 어차피 평생을 걸어도 모자랄 길,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적무강의 상념이 계속되는 가운데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3
밤이 늦은 시각 적무강은 철홍과 헤어져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의 집은 철방의 한쪽에 있었다.
철방의 모든 사람들이 집을 비운 시간 오로지 그만이 철방에 홀로 있
었다. 오년 전에 그가 이곳 십자성에 처음 들어왔을 때 그는 이곳에
서 일하기를 원했고, 하노인은 갈 곳 없는 그를 위해 흔쾌히 철방에
남는 방을 그에게 내줬다. 때문에 적무강은 일할 때나 쉴 때나 모두
이곳 철방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아무도 없는 철방, 적무강은 화로 앞으로 다가갔다. 하루 열두 시진
절대 불이 꺼지지 않는 하가철방의 화로. 그 화력은 그야말로 천하제
일이었다.
적무강은 잠시 화로를 바라보다 철방의 안쪽에 있는 마당으로 나왔
다. 마당은 불빛 하나 없어 무척이나 어두웠다.
“후~!”
그가 숨을 들이켰다. 그러자 몸에 남아있던 취기가 모두 밖으로 빠져
나갔다.
적무강은 잠시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상처투성이의 거친
손이 눈에 들어왔다. 불에 데인 상처를 비롯해 각종 흉터가 거칠게
그의 손바닥과 등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모두가 철방의 기술을 익히
기 위해 얻은 상처이다.
적무강은 눈을 감았다. 그러자 세상의 모든 빛이 사라졌다.
오직 어둠만 남은 공간, 그러나 적무강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분
명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은 손이었지만 적무강은 마치 무기라도 든
것처럼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심상대법(心像大法)!’
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심상(心像)이란 말 그대로 마음의 형태를 말한다. 이를테면 마음의
거울과도 같은 것이다.
마음속에 원하는 것을 떠올려 형태를 갖추는 것, 그것이 바로 심상대
법이다. 심상대법의 가장 큰 효능은 떠올린 상대의 모든 것을 마음속
에 고스란히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대의 무공수위는 물론 세세
한 버릇까지도 말이다. 물론 그렇게 되려면 심상대법을 시전 하는 자
가 구현할 상대의 모든 것을 세세하게 알아야한다는 전제조건이 붙는
다. 그렇지 않고 대략적인 모습을 떠올린다면 아무런 효능도 없는 것
이다.
심상대법은 적무강의 집안에서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기법중의 하
나이다. 대를 이어 보완해온 심상대법은 이제 거의 완벽해졌다.
적무강은 마음속으로 자신의 상대를 떠올렸다. 그러자 거친 수염과
함께 야수 같은 눈빛을 한 중년의 남자가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환
도가 들려 있었다. 그는 적무강을 향해 거친 살기를 토해냈다.
부르르~!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은 적무강의 손이 떨렸다. 이어 그의 눈앞에 하
나의 도가 형상을 갖췄다. 그러나 완벽한 형상을 갖추지 못해 그 모
습이 무척이나 희미했다.
적무강의 눈앞에 나타난 남자가 기친 살기를 뿜어내며 달려들었다.
고오오~!
적무강을 향해 밀려오는 가공할만한 도기의 폭풍, 적무강의 눈이 찌
푸려졌다. 그러나 그는 이내 입술을 질근 깨물고 몸을 움직였다.
파파팍!
그의 도에서도 도기가 뻗어나갔다.
도기와 도기가 부딪치고 공간이 가공할만한 압력이 가해졌다.
“크으~!”
적무강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터져 나왔다.
분명 그의 몸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는 공전
절후의 결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심상대법의 효능이었다. 넓은 공간도 필요 없다. 오로지
두발로 서있을 공간만 있으면 언제든 심상대법을 펼칠 수 있다. 그리
고 가상의 존재를 상대로 자신의 무공을 겨를 수 있다.
적무강이 싸우고 있는 상대는 그가 제일 잘 아는 사람이었다. 이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적무강은 그의 생김새, 버릇, 무공까지 아직
까지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죽어서까지 적무강의
상대가 되어주고 있었다.
“아......버지.”
적무강이 남자를 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러나 남자는 아무것도 들
리지 않는 듯 적무강을 향해 미친 듯이 무공을 펼쳤다.
콰콰콰!
적무강이 있던 공간이 일그러지고 도기의 폭풍이 몰아쳤다. 마치 산
정상에서 늑대가 포효하듯 그렇게 도기의 영향이 사방으로 퍼져나갔
다. 그러나 그에 상관없이 적무강은 자신의 도를 휘둘렀다. 그에 따
라 그의 몸에서도 눈앞의 남자와 똑같은 초식이 펼쳐졌다.
콰콰콰-쾅!
도기와 도기가 부딪치며 적무강의 몸이 뒤로 밀렸다. 똑같은 초식이
었지만 그의 내공이 남자보다 딸리는 것이다. 그러나 적무강은 이내
입가에 흘러내린 피를 닦아내고 다시 덤벼들었다.
그렇게 그들은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쩌-저-적!
그러던 어느 순간 그들의 손에 들린 도가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마치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잔금, 이어 그들의 도가 먼지
처럼 부서져 내렸다.
적무강이 손잡이만 남은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남자 역시 적무강
과 똑같은 눈으로 자신의 검을 바라봤다.
슬픈 눈, 그것은 커다란 업보를 짊어진 자의 눈이었다. 잠시 슬픈 눈
으로 적무강을 바라보던 남자의 모습이 스르륵 사라졌다. 그제야 적
무강이 심상대법을 해제하고 눈을 떴다.
그의 눈에 여전히 빈손이 보였다.
“역시 맨손으로는 안 되는가?”
그가 허무하게 중얼거렸다.
심상대법은 상대를 완벽하게 구현해낼 수 있다. 때문에 마음속의 공
간에서 상대와 얼마든지 싸울 수 있다. 그러나 심상대법을 펼치기 위
해서는 자신의 능력 또한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했다. 그래야만
객관적인 대결을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무강은 아직 자신
의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에게 가장 중요
한 무기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조급하게 마음먹지 않기로 하지 않았는가? 더 조급해해서 무엇을
하겠다는 말인가? 냉정해지자. 적무강!”
적무강은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리고 화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순백의 불길이 모든 것을 태울 듯 일렁였다.
어차피 제대로 잠을 자기는 글렀다. 적무강은 철방의 한쪽에 있는 쇳
덩어리를 집어 들었다.
그가 만일을 대비해 쓰지 않고 놓아두었던 신철(薪鐵)이었다. 이 신
철을 두드려 정련하면 정철을 얻을 수 있었다.
적무강은 신철을 순백색의 불길이 올라오는 화로에 넣었다. 그러자
얼마 안 있어 신철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에 적무강은 신철을 꺼내
두드리기 시작했다.
따-당-당-땅!
그의 망치는 마치 악공의 음률처럼 일정한 운율을 띠고 움직였다. 그
의 망치 소리는 무척이나 맑고 깨끗해 무척이나 듣기 좋았다.
자세히 보면 그의 어깨가 일정한 법칙에 의해 쇠를 두드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정한 힘으로 일정한 부위를 두드리는 적무강의 솜씨는
무공을 익힌 자들이 보더라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쾌속하면서 은밀
했다.
적무강의 망치가 신철에 닿을 때마다 조금씩 형체가 잡혀갔다.
땅땅땅!
그의 망치질에 따라 바로 옆에 있는 화로의 불길이 거세게 일렁였다.
적무강은 의식하지 않고 있었으나 화로의 불길은 적무강의 호흡에 따
라 움직였다. 그것은 적무강의 심법이 양강의 것이기 때문이다.
작업이 새벽까지 진행되어도 적무강은 두발을 대지에서 한 번도 떼지
않았다. 그는 화로에 쇠를 집어넣을 때만 허리를 비틀었을 뿐 밤새
한발작도 떼지 않았다.
완벽한 부동의 모습, 그의 다리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그만큼 많은
부하가 걸린 것이다. 그러나 적무강은 자신의 신체에는 신경을 분산
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오직 검의 형체를 갖춰가는 쇳덩이만 보였
다. 놀라운 집중력이었다.
적무강에게는 그야말로 생활의 모든 것이 무공의 수련이었다.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 것은 역설적으로 보법을 수련하기 위한 것
이고, 망치를 두드리는 것 역시 무공을 수련하는 방법이었다. 꼭 무
공을 연무장에서 하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적무강의 이런 무공수련은 벌써 오 년째 이어지고 있었다. 그가 하가
철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주위의
그 누구도 적무강이 무공을 익히는 것을 몰랐다. 심지어는 그의 가장
절친한 친구인 철홍 마저도 말이다.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장인으로써의 능력과 천하제일의 화력을 갖춘
화로, 그래서 그는 하가철방을 택했다. 그러나 아직 그의 능력은 원
하는 바를 이루기에는 많이 모자랐다.
깡깡깡!
적무강은 밤새도록 쇠를 두드렸다.
시끄러운 망치소리에 인근 상가의 사람들이 무어라 말을 할 법도 했
지만 이미 그들은 모두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간 후였다. 때문에 적
무강이 하는 일에 항의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적무강은 자신의 친구인 철홍을 위해 밤새도록 쇠를 두드리고 또 두
드렸다.
해가 뜨고 날이 밝아 철방의 사람들이 하나둘 출근했을 때 그들은 화
로의 곁에 놓인 한 자루의 검을 볼 수 있었다. 손잡이도 없이 오직
잘 뻗은 검신이 사람들의 눈앞에 늘씬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 이것은 웬 검이냐?”
하성문이 뜻밖의 모습에 적무강에 물었다.
“철홍이 것입니다. 이제 녀석도 제대로 된 검이 필요할 듯해서요.”
“그래! 신경을 쓴 것이 표가 나는구나. 제대로 만들었어. 철홍이 녀
석이 친구를 잘 만나서 호강을 하는구나.”
하성문이 감탄을 터트렸다.
그는 검신을 들고 손가락으로 튕겨보았다.
따-앙!
맑은 쇳소리가 오래도록 여운을 남기며 울려 퍼졌다. 하성문의 입가
에 절로 미소가 어렸다. 검신에서 나는 소리만으로도 적무강이 얼마
나 신경을 써서 만들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성문이 말했다.
“마광은 내가 낼 테니, 네가 손잡이를 만들 거라.”
“하지만 아저씨까지 이일에 매달렸다가는 오늘 일에 지장이 있을 텐
데요.”
“괜찮아! 철홍이도 이곳에서 일을 했던 아이, 비록 검이나 휘두르는
참호대에 들어간 것은 탐탁지 않으나 그래도 무언가는 해주고 싶었
다. 마침 네가 이런 물건을 만들었으니 나도 생색을 한번 내보자꾸
나.”
“그렇다면 저야 고맙지요.”
“그럼 시작하자.”
“예!”
적무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성문은 검신을 들고 자신의 작업대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쇠똥가루를 숯과 수은에 섞어 연마제를 만들어 기름 묻힌 삼베
조각에 묻혔다. 그가 만든 연마제는 하가철방의 비법에 의한 것으로
그 비율을 아는 자는 하노인과 그밖에 없었다. 적무강도 아직 전수받
지 못한 비법인 것이다.
하성문은 연마제를 묻힌 삼베조각으로 정성스럽게 검신을 문질렀다.
그의 손길이 계속될수록 검의 표면이 마치 유리처럼 빛나기 시작했
다.
하성문이 마광을 내는 사이 적무강은 검의 손잡이를 만들기 시작했
다. 적무강이 선택한 재료는 오동나무였다.
적무강은 오동나무를 진흙 봉에 찍힌 철홍의 손자국을 바탕으로 세밀
하게 깎아냈다.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오동나무가 점점 형태를 갖
춰갔다. 그는 온종일 오동나무를 가지고 신경을 집중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마침내 손잡이가 모양을 갖추자 적무강은 철
방의 한쪽에있는 교어피(蛟魚皮)를 가지고 나왔다. 교어피는 다름 아
닌 상어의 가죽으로 등쪽 부분의 가죽이었다. 상어의 등 쪽에는 수많
은 돌기가 있어 손으로 잡았을 때 미끄러짐을 방지해 주기 때문에 주
로 손잡이에 칭칭 감아 썼다.
그때 하성문이 검신을 들고 왔다.
“마광은 물론 날까지 완벽하게 세웠다. 검신이 균형이 잘 잡혀있는
것이 훌륭한 놈이 나올 것 같구나.”
“그렇습니까? 잘되었네요.”
“어서 손잡이를 끼어 보거라.”
“예!”
적무강은 하성문에게서 검신을 받아 손잡이와 결합을 시켰다. 이어
손에 든 교어피를 정성스럽게 감았다. 그러자 얼마 안가 훌륭한 검이
자태를 드러냈다.
하성문이 감탄사를 터트렸다.
“훌륭하구나. 화려하지 않으면서 나름대로 기품도 있고, 철홍이에게
이보다 좋은 검은 구해줄 수 없을 것이다.”
“참호대에서 너무 화려한 검을 쓰면 눈에 띌 것 같아 일부러 수수하
게 만들어 보았습니다.”
“그래! 잘했다. 이제 참호대의 말단에 불과한 놈이 너무 눈에 띄는
검을 가지고 있으면 질시를 받기 마련이다. 철홍이의 손에 잘 맞으면
그게 명검이지, 달리 무엇이 있겠느냐? 잘했다. 내 마음에도 쏙 드는
구나.”
하성문이 연신 감탄사를 터트렸다.
쇠를 다루는 적무강의 감각은 평생을 철방에서 살아온 하성문 조차도
감탄하게 만들었다.
“검신은 다되었고, 그럼 검집이 필요하구나. 검집은 몇 개 만들어 놓은 것이 있는
데 어디보자......”
하성문은 철방의 한쪽에 있는 창고를 뒤졌다. 그렇게 얼마나 뒤졌을
까? 그가 수수한 검집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예전에 만들어 두었던 것인데 너무 모양이 수수해서 손님들에게 거
절을 당했는데, 오히려 이것이 철홍이의 검에는 잘 어울릴 것 같구
나.”
“그러네요! 정말 잘 어울리는군요.”
적무강은 하성문이 들고 나온 검집이 마음에 들었다. 어차피 화려한
장식이나 문양 따위는 어울리지 않는 검이었다. 자신이 만든 검에는
하성문이 들고 있는 검집이 제일 잘 어울렸다.
스릉~!
검을 검집에 꽂자 마치 처음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딱 맞아 떨어졌
다.
적무강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이제부터 이것은 오직 철홍을 위
한 단 한 자루의 검이었다. 그는 잠시 검을 바라보다 창고 안에 들여
놓았다. 다시 철홍이 오면 넘겨줄 생각이었다.
“자 이제 우리 일을 하자. 오늘도 주문 들어온 것이 꽤 많으니 부지
런히 움직여야 될 거야.”
“예!”
[전8권]
천인혈 1권 십자성(十字城)
서장
그는 무의 신(武神)으로 추앙받는 남자였다.
그는 남들보다 늦은 마흔여덟의 나이에 처음으로 강호에 출두했다.
처음엔 그 누구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중원 무림, 그는 수많은 사람 중의 한명으로 취급
받았다. 그러나 그가 강호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데 걸린 시간은 삼
일에 불과했다.
그의 첫 상대는 당시 산동 땅에서 혁혁한 무명을 날리던 환영신창(幻
影神槍) 혁무수였다. 창을 쓰면 당할 자가 없다던 혁무수가 그의 손
에 쓰러진 것은 불과 이십여 초만이었다.
그의 첫 번째 비무가 세상에 알려지기도 전에 그는 산동의 악가를 찾
아 당시 가주인 악무외를 단 삼십 초 만에 쓰러트렸다. 이어 그는 숨
쉴 틈도 없이 다른 상대를 찾아 비무를 청했다. 그것이 그가 출도한
지 삼일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단지 삼일 만에 그는 강호에서 가장 유명한 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는 중원 역사상 그 누구도 감히 도전한 적
이 없는 일인대륙횡단을 시작했다.
처음엔 모두가 무모한 도전이라고 비웃음을 던지며 그를 무시했다.
그리고 지켜보았다. 과연 네가 어디까지 가는지 지켜보겠다는 그런
눈빛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비웃음이 감탄으로, 감탄에서 다시
경외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소림의 십팔나한진이 그의 손에 의해 처참하게 부서지고, 무당의 칠
성검진이 불과 한식경이 지나기 전에 무너졌다. 구파는 물론 마도의
문파에서도 그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그는 그야말로 거칠 것
없이 폭풍 같은 행보를 계속했다.
가로막는 모든 것을 파괴하며 계속되는 그의 행보에 사람들의 이목이
점점 집중됐다. 과연 그의 행보가 어디까지 갈 것인지, 그의 걸음 끝
에 무엇이 있을 것인지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났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마광도의 추종자가
되었다.
그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강해졌다. 그의 무공은 점점 더 날카로워졌
고, 더욱 빨라졌다. 또한 더욱 패도적으로 변해갔다.
무림의 십대고수 중 절반이 그의 손에 쓰러졌다. 또한 은거기인 중
상당수가 그에 의해 영원히 속세를 등져야했다. 그동안 그에게 쓰러
진 자의 면면을 꼽아보자면 그야말로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화산의 장문이이자 십대고수의 일원인 소요검선(逍遙劍仙), 개방의
태상장로인 무결개(無結?)등, 이루 손으로 꼽을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그가 대륙을 횡단한지 삼년, 그는 삼년동안 무패의 전설을 쌓
아갔다.
삼년동안 수많은 생사결을 승리로 이끌어낸 그는 최후의 상대로 마도
의 절대자라던 절대마조(絶代魔祖) 혁련광을 선택했다. 그리고 혁련
광을 호북성 무한(逍遙)으로 불러들였다.
한쪽은 이미 오십년 전부터 마도의 절대자로 군림한 남자, 다른 한쪽
은 단지 삼년이란 시간동안 혼자의 힘으로 전설을 만들어낸 신흥강
호. 중원전체가 숨을 죽이고 그들의 대결을 지켜보았다.
그들의 대결은 삼일밤낮을 이어졌다. 일반 무림인들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천외천의 대결, 그들이 대결을 펼치던 야산이 평지로 변
하고 주위의 지형이 완전히 바뀔 정도로 엄청난 격전이었다.
무한의 내공을 바탕으로 펼치는 무적의 무공에 사람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했다. 그들의 눈에는 그것이 사람간의 대결이 아니라 신들의
대결로 보였다. 그리고 신들의 대결이 마침내 끝났을 때 그들은 진정
한 무패의 전설을 자신들의 눈으로 지켜봤음을 깨닫고 눈물을 흘렸
다.
마도의 절대자인 절대마조 혁련광은 차가운 대지에 몸을 누였고, 그
는 두발로 대지를 박차고 있었다. 피투성이에 심각한 부상을 입고 있
었지만 최후의 승자는 그였다.
이 믿을 수 없는 결과에 그의 추앙자들은 그를 떠받들며 그 자리에
거대한 성을 세워 그에게 바쳤다.
그것이 바로 십자성(十字城)이라는 거대세력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를 추앙하던 자들은 십자성의 가신으로, 가병으로 들어가 그를 떠
받들었다.
무신(武神) 마광도.
삼백예순두번의 결전을 모두 승리로 이끌어낸 절대의 승부사, 그는
그렇게 강호인들의 지지 속에 십자성의 초대성주가 되었다.
마광도의 출현을 계기로 정파는 십자성을 중심으로 뭉치게 되었다.
그리고 절대마조라는 구심점을 잃은 마도육문(魔道六門)은 천왕성(天
王城)이라는 성을 만들어 십자성에 대항했다.
그것이 무림의 절대세이자 이성(二城)이라고 불리는 십자성과 천왕성
의 시작이었다.
무신 마광도, 그의 나이 올해로 여든 둘이었다.
마흔여덟에 세상에 나왔으니 십자성을 세운지도 벌써 삼십년이 넘었
다. 그동안 그는 여전히 불패의 신화를 자랑했으며, 십자성을 강호제
일의 세력으로 만들어놓았다. 또한 뒤늦은 나이에 결혼을 해 자식을
보았다. 그의 자식은 그의 진전을 이어받아 강호의 절대자가 되었다.
때문에 마광도는 그의 자식에게 십자성의 모든 권한을 넘겨주고 일선
에서 물러났다.
마광도는 십자성이 환히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서서 눈앞에 펼쳐진 붉
은 노을을 바라보았다. 그의 뒤에는 이제까지 그의 그림자로 살아온
남자가 조용히 서있었다.
그는 조용히 자신의 주군의 단단한 등을 바라보았다. 그가 살아온 인
생만큼이나 거대해 보이는 그의 등, 단지 뒷모습뿐이었지만 그의 등
이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충분히 보여주고 있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문득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들어가시지요. 주군!”
그러나 마광도는 어떤 대답도 없이 저무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그에
남자는 다시입을 다물었다.
다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광도가 입을 열었다.
“정말 부끄러운 짓을 했어.”
뜬금없이 나온 말, 그에 남자가 고개를 들어 다시 마광도를 바라보았
다. 그러자 어느새 몸을 돌린 마광도의 모습이 들어왔다.
도저히 팔순이 넘은 나이라고 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마치 사자 같
은 인상에 검은 머리가 바람에 흩날리는 중년의 남자, 왼쪽 이마를
따라서 뺨과 턱을 가로지르는 끔찍한 흉터가 그를 더욱 인상 깊게 만
들었다. 사자의 얼굴을 가진 남자, 그가 바로 당금 무림의 절대자인
마광도였다.
남자는 말없이 자신의 주군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마광도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 나이 여든하고도 둘, 남아대장부로 태어나 해볼 수 있는 것은
모두 해보고 이를 수 있는 것은 모두 이루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나이가 드니 부끄러워지는구먼.”
“무슨 말씀이십니까? 주군께서는 이 땅의 절대자이십니다. 주군이
부끄러우실 일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니야. 그게 아니야.”
남자의 말에 마광도는 자신의 얼굴 한쪽에 깊게 나있는 자상을 어루
만졌다.
상처가 아파왔다. 이미 삼십년이 지난 상처이다. 그러나 상처를 만질
때마다 마광도는 지독한 통증을 느꼈다. 그것이 상처의 통증 때문인
지, 아니면 죄책감 때문인지 이젠 마광도 조차 알 수 없었다.
마광도의 얼굴을 보며 남자가 말을 이었다.
“당신께서는 삼백예순두 번의 비무행을 모두 승리로 이끄신 이 시대
최고의 무인이십니다. 설혹 약간의 실수가 있다 하셨더라도 그것이
부끄러울 수는 없습니다. 주군이시여.....”
“후후.....! 세상은 그렇게 알고 있지. 무패의 남자라고......”
마광도는 말끝을 흐렸다.
붉디붉은 하늘을 보니 마음이 답답해져왔다. 붉은 하늘 속에 그 남자
의 얼굴이 보이는 듯 했다.
마광도가 입을 열었다.
“왠지 오늘은 말하고 싶군. 그냥 한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게나. 그
저 넋두리를 하고 싶어 하는 말이니.”
“......주군.”
“삼십년 전, 그러니까 절대마조와 싸우기 전에 난 한 남자와 싸운
적이 있었다네. 그는 이름 없는 무인이었네. 그러나 그는 중원에 이
름난 그 어떤 무인보다 강했다네. 난 그와의 싸움에서 난생처음 목숨
의 위협을 느꼈다네. 절대마조 혁련광과 싸울 때는 순수한 무인의 투
지였다면 그와 싸울 때는 그야말로 죽을힘을 다해서 싸웠지. 내 인생
에 그때만큼 겁났던 적이 있었던가 물어보면 절대 아니라네.”
그것은 남자도 모르고 있던 사실이다. 그는 마광도가 대륙횡단을 시
작했을 때부터 그를 따라다녔다. 그런 그가 모르는 대결이라니. 남자
는 조용히 마광도의 말에 빠져 들었다.
“허허~! 정말 그는 대단한 남자였다네. 내가 어떤 초식을 펼치건,
내가 어떤 신공을 펼치건 그는 한 자루의 도로 그 모든 초식을 하나
하나 철저하게 깨부셨다네. 그는 마치 악마 같았네. 도를 휘두르기
위해 태어난...... 그와 난 오백초를 넘게 싸웠고, 난 마침내 풍전등
화의 지경에 이르렀지. 그때 난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말았네. 정
말 부끄러운 짓이야.”
“그게 무슨?”
“그의 아내를 인질로 잡았다네. 허허.....!”
“그...런!”
“그의 아내를 인질로 잡고 위협했지. 그래서 겨우 그의 도를 부러트
릴 수 있었지. 그 여파로 그의 아내는 목숨을 잃었고, 그 또한 치명
상을 입었다네. 나의 얼굴에 나있는 상처는 그때 입은 것이네. 지금
도 그때 일을 생각한다면 걷잡을 수 없이 쑤셔온다네. 그야말로 내
인생의 낙인이지.”
“.....”
순간 남자의 눈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무패의 남자로 알려진 무신 마광도가 그렇게 비겁한 짓을 저질렀다
니. 만약 이 사실이 밖에 알려진다면 마광도의 위명에 크게 타격을
입을 것이다. 그러나 마광도는 남자의 반응에 상관없이 말을 이었다.
“그는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네. 부러진 도가 다시 회복되면 돌아온
다고 했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 그의 몸도, 그의 도도 두 번
다시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망가졌다네. 그와 그의 도를 부러트리기
위해 내 혼신의 진기를 사용했으니까. 그러나 그때는 나 역시 운신하
기 힘들 정도로 중상을 입어 그를 보낼 수밖에 없었네. 그렇지 않았
다면 난 결코 후환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네.”
마광도의 눈은 회한에 잠겨 있었다.
남아로 태어나 대륙을 횡단하며 전설을 만들어냈지만 정작 그 자신은
후회를 하고 있었다. 일생일대의 오점, 만약 이 사실이 밖으로 세어
나간다면 그의 명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말 것이다.
“이것이 내가 이제까지 가슴속 깊이 묻어두었던 비밀이네. 그동안
갑갑했다네. 그래서 한번쯤은 누군가에게는 말하고 싶었다네.”
“......주군.”
남자의 얼굴에 감격의 빛이 떠올랐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말해주었다는 것, 그것은 마광도가 그만큼 자
신을 신뢰하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더욱 깊이 고개를 숙여
마광도에 대한 존경을 표시했다.
그 순간 마광도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그와 함께 그의 오른손이 붉
은 빛을 띠었다. 그러나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그런 마광도
의 변화를 눈치 채지 못했다.
순간 마광도의 오른손이 남자의 목덜미에 내리 꽂혔다.
퍽-!
“크헉! 무...슨?”
남자의 얼굴에 불신의 빛이 떠올랐다. 그러나 마광도의 얼굴에는 전
혀 변화가 없었다. 그는 남자를 보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나의 실수네. 붉은 하늘을 보니 나도 모르게 그날의 일이 생각나서
절대 하지 말았어야 할 이야기를 하고 말았네. 무덤까지 가지고 갈
비밀인데.....”
“......그런?”
“자넨 절대 들어서는 안 될 이야기를 들은 것이네. 그저 늙은이의
변덕 때문이라고 편하게 생각하게나.”
“주......군!”
남자의 입에서 검붉은 선혈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그의 눈이 회백색
으로 변해갔다. 그러나 그를 바라보는 마광도의 시선은 놀라울 정도
로 담담했다.
“고마우이! 누군가에게는 한번쯤은 이야기해보고 싶었네. 너무나 가
슴속 깊은 곳에 묻어놨기에 정말 참을 수가 없었네. 이제 자네 덕분
에 그 소원을 풀었네. 자네의 가족은 내가 잘 돌봐줄 테니 너무 걱정
하지 말게나.”
“지...독한!”
남자는 이를 갈았지만 이미 그의 몸에 남아 있는 힘 따위는 없었다.
털썩!
남자의 몸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의 눈에는 이미 생기가 사라
지고 없었다. 삼십년 세월을 충성으로 따랐는데 돌아온 것은 그야말
로 허무한 죽음이었다.
마광도는 담담히 남자의 시신을 바라보다 다시 붉은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만약 그의 도가 부러지지 않았다면 나는 십자성을 세우는 대신 평
생 동안 그와 싸워야했을 것이다. 이제부터 나의 남은 생은 그의 도
법을 꺾기 위한 무공을 만들기 위한 시간이다. 반드시 나의 삶을 바
쳐 반드시 그를 능가할 무공을 만들 것이다.”
그것이 마광도의 의지였다.
그날 이후 공식석상에서 마광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날 이후
그에 대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았다.
-십자성 비사총록(秘事叢錄)중에서-
“삼백년 전에 이런 일이 있었던가? 재미있군! 지옥의 도법이라니.
하지만 삼백년이 지나도록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면 이미 절전이 되었
다고 보는 게 옳겠군.”
탁!
남자가 읽던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에 거대하게 펼쳐진 대지가 들어왔다.
십자성.
그 거대한 신의 대지가......
1장. 그의 이름은 적무강
1
십자성(十字城).
삼백년 이래 무림의 제일세(第一勢)로 고고하게 버텨온 신의 대지.
십자성의 성주는 대대로 천하제일인이었다. 그들이 무공을 펼쳐 보이
던 그렇지 않던 간에 사람들은 항상 천하제일인으로 십자성주를 꼽았
다.
십자성주가 그렇듯 십자성의 규모 또한 천하제일이었다. 호북성 무한
에 자리 잡은 십자성은 외성과 내성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외성의
크기만으로도 일반 성도의 규모를 훨씬 뛰어넘었다. 십자성의 외성에
는 내성무사들의 가족과 십자성에 필요한 각계의 사람들이 상주를 했
다. 그들은 일반 백성들이 그렇듯 생업에 종사하며 십자성의 외성에
서 생활했다. 때문에 외성은 또 하나의 세상이나 마찬가지였다.
십자성의 내성은 엄격하게 출입이 제한된 곳이었다. 그곳은 오로지
십자성에 등록된 정식인원만이 출입할 수 있기에 외성에 거주하고 있
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내성의 허락이 없는 한 출입할 수 없었다. 때
문에 외성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내성이 어떤 조직으
로 구성돼 있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단지 외부에 알려져 있
는 것은 십자성주 밑에 문상과 무상이 있고, 그들이 모든 조직을 아
우른다는 것이었다. 또한 참호대(斬虎隊)라는 외부조직이 있어 십자
성의 외부 일을 모두 도맡아 처리한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십자성
에 참호대라는 조직 하나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십자성은 그 규모만큼이나 비밀에 쌓여있는 곳이었다.
십자성 외성과 내성 사이에는 철혈로(鐵血路)라는 대로가 있었다. 그
리고 이 철혈로를 중심으로 좌우에 커다란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곳이 바로 외성의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이곳을 일컬어 만통가(萬統街)라 일컬었다. 세상에 존재하
는 모든 것이 이곳에 모여 있다는 의미에서였다. 천하에 존재라는 모
든 것이 이곳에 있고, 이곳에 없다면 천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다. 그것이 만통가 사람들의 자존심이었다.
만통가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상인들은 물건을 팔고, 일반인들은
생업에 종사했다. 이곳엔 상가도 있고, 기루도 있었다. 때문에 내성
의 사람들은 필요할 때 외성에 나와 필요한 모든 것을 구했다. 고된
수련을 받은 무인들은 기루에 들러 객고를 풀었고, 재무를 책임지는
자들은 이곳에서 필요한 만큼의 수입을 거둬들였다.
“자...자, 이곳에서 제일 질 좋은 비단을 싸게 팝니다. 지금 시간을
놓치면 두 번 다시 이런 값에 이런 물건을 구할 수 없을 겁니다. 그
러니 어서 어서 오세요.”
“이쪽에 오십시오. 저 멀리 천축국에서 들여온 진귀한 향료를 팝니
다.”
“하하하~! 저의 집에서는......”
만통가는 활기에 차 있었다. 상인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하
나라도 더 물건을 팔기 위해 흥정을 하고 있었다.
깡깡깡!
만통가의 가장 외진 곳, 사람들의 시선에서 한참 벗어난 곳에 대장간
이 있었다. 대장간에서는 힘찬 망치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가철방(河家鐵房).
만통가에서 가장 오래된 철방 중 하나였다.
하가철방에서는 후끈한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한여름인데다
가 화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에 사람들의 얼굴은 벌겋게 익었고,
끊임없이 굵은 땀방울을 흘리고 있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한 치라도
화로에서 멀리 떨어지기 위해 그쪽으로는 다가가지도 않았다.
땅 땅!
쉬지 않고 이어지는 망치질을 하는 남자가 있었다. 구릿빛 피부에 다
부진 근육을 가진 남자, 덩치가 큰 것은 아니었지만 대장간의 고된
일로 단련된 그의 몸은 묘한 박력을 풍기고 있었다.
그는 남들이 모두 피하는 화로의 곁에서 쉴 새 없이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그의 왼쪽 손에는 강철집게가 들려있었고, 오른쪽 손에는 망
치가 들려 있었다. 그가 망치를 내리칠 때마다 붉은 쇳덩이가 형체를
찾아갔다.
남자가 다루고 있는 쇠는 정철(精鐵)이라는 것으로 강도가 뛰어나고
탄성이 좋아 검이나 도, 도끼 등의 날이 되는 부분이었다. 정철을 다
를 수 있을 정도의 장인은 철방에서도 흔치 않았다. 왜냐하면 정철의
성질은 다루기도 힘들거니와 그 하나만으로 만들기보다 다른 쇠들과
같이 섞어 쓸 일이 많기 때문이다. 같은 쇠라도 성질이 판이하게 다
른 종류의 것을 혼합할 수 있다는 것은 장인으로써 능력이 이미 독보
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였다.
땅땅땅!
남자가 한참동안 망치를 두들기자 한 덩어리의 쇠에 불과 했던 물건
이 형체를 잡았다.
곧은 직선으로 뻗어나간 물체, 그것은 칼날이었다. 칼날이 완성되자
남자는 미리 만들어두었던 도신을 작업대 위에 올렸다. 도신의 날이
있을 자리에는 홈이 파여져 있을 뿐 날이 존재하지 않았다. 남자는
방금 만든 칼날을 도의 홈에 끼워 넣었다. 그러자 미리 마치기라도
한 듯 딱 맞아 떨어지며 완벽한 형태를 잡았다.
“훗!”
처음으로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러나 작업은 이게 끝이 아
니었다. 아니 오히려 이제 시작이었다.
땅땅땅!
다시 남자는 망치질을 시작했다.
같은 종류의 쇠로 칼날과 몸체를 만드는 것보다 이렇게 다른 성질을
가진 쇠를 합금해 만드는 방식이 수명도 오래가고 강도도 뛰어나다.
바다건너 왜국에는 접쇠라는 방식이 있어 쇠를 얇게 펴서 한 겹씩 접
으며 도를 만드는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남자가 도를 만드는
방식으로 만든다면 접쇠 방식보다 뒤지지 않으면서도 뛰어난 도를 얻
을 수 있었다. 물론 장인의 능력이 뒷받침된다는 전제하의 말이다.
남자의 망치질은 한참이나 계속됐다. 그는 화로와 작업대를 번갈아
가며 칼을 만들었다.
이곳 하가철방의 화로는 매우 특이한 것으로 이정도의 화력을 낼 수
있는 화로는 천하에 오직 이곳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강력한 화력을 뿜어내는 화로인 것이다.
보통 두세 명이 달라붙어야 할 작업을 남자는 홀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안색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는 두시진이 넘게 망
치질을 하면서도 전혀 지친기색이 없었다.
일렁이는 화로의 불길도 남자에게는 그리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남자의 움직임에 동조해 일렁이는 것 같았다.
남자의 망치질 소리가 거세질수록 화로의 불길도 거세졌다. 반대로
남자의 망치소리가 잦아들면 불길도 가라앉았다. 그것은 매우 신기한
광경이었지만 철방에 있는 그 누구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에게는 늘상 보아오던 광경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남자의 망치질이 끝났다. 그는 벌겋게 달아오른 칼을 옆에 있
는 수통에 집어넣었다.
치-이-익!
시뻘겋게 달아오른 칼날이 들어가자 수통의 물이 격렬하게 끓어올랐
다.
얼마나 수통에 담그고 있었을까? 남자가 수통에서 칼을 꺼냈다. 그러
자 윤기가 흐르는 칼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 됐군!”
남자의 입에서 기분 좋은 소리가 나오자, 그제야 그의 주위로 누군가
다가왔다.
“다 되었는가?”
“예! 이제 아저씨의 차례입니다.”
남자는 마치 장비처럼 고슴도치 수염이 난 중년의 남자에게 칼을 넘
겼다. 그러자 중년의 남자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오......! 역시 자네군. 정말 제대로 칼이 만들어졌어. 이제부터는
내 차례군.”
중년의 남자 역할은 마조장(磨造匠)이었다.
마조장은 숫돌에 날을 갈아서 세우는 작업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
이다. 중년의 남자는 이곳 하가철방에서 마조장의 역할과 함께 칼에
광을 주는 마광(磨光)작업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의 이
름은 하성문, 이곳 하가철방의 소주인이었다.
하성문은 연신 웃음을 터트리며 칼을 가지고 숫돌로 갔다. 남자의 솜
씨는 그야말로 완벽해 그가 할 작업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남자는 하성문에게 칼을 넘긴 후 밖으로 나갔다.
햇볕이 쏟아지는 철방 밖으로 나오자 남자의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
다. 그는 이제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이었다. 대장간에서 험한
일을 하는 사람답게 그의 피부는 구릿빛으로 그을려 있었고, 근육 또
한 균형이 잘 잡혀 있었다. 약간은 순박한 얼굴이지만 그의 입술은
굳게 다물려 있어 매우 고집스러운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유난히도 짙은 눈썹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시장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평범한 얼굴이
었다.
“오~! 무강이 일을 모두 끝냈나 보군.”
“예! 좀 쉬어도 될 것 같습니다.”
남자가 밖으로 나오자 철방의 식구들이 한마디씩 건넸다. 그에 남자
는 미소를 지으며 일일이 대답했다.
그의 이름은 적무강(赤武强)이었다.
그가 이곳 하가철방에 들어온 것은 오 년 전, 불과 오년의 세월동안
그는 하가철방의 어떤 사람들보다도 쇠의 성질을 월등히 이해하고 최
고의 실력을 갖춘 장인으로 자라났다. 지금 그보다 쇠를 더 잘 다루
는 사람은 이제 늙어서 철방에 거의 나오지 않는 하노인 밖에 없었
다. 하노인은 하성문의 아버지로 이곳 하가철방의 주인이었다. 적무
강은 하노인의 기술을 모두 물려받은 수제자인 것이다.
그토록 고된 일을 했건만 적무강은 전혀 지친 기색이 없었다. 아침부
터 지금까지 혼자서 단조에 담금질까지 했건만 그의 다갈색 근육에는
흔한 땀방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대장간의 사람들은 그런 사
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적무강의 모습이 워낙 자
연스러웠기 때문이다.
적무강은 문가에 앉아서 뜨거운 햇살을 즐겼다. 한여름의 햇살은 무
척이나 따사로웠지만 적무강에게는 무척이나 감미롭게 느껴졌다.
“좋구나!”
그의 입가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어렸다.
벽에 기대서 뜨거운 한여름의 햇살을 받는 그의 모습에 철방의 사람
들이 미소를 지었다. 늘 일이 끝난 후에 이런 모습으로 앉아있는 적
무강의 모습을 봐왔기 때문이었다.
“어~이! 너 또 밖에 나와 있냐? 영감님이 보면 잘릴지도 모른다.”
그때 굉장히 짓궂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굳이 얼굴을 보지 않더라도
단지 목소리만으로 무척이나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적무강이 흐릿하게 미소를 지으며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옮겼
다. 그러자 굵은 선이 인상적인 남자가 보였다. 그의 팔다리는 한눈
에 보기에도 무척이나 튼튼해보였으며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 떠올
라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무척이나 쾌활한 성격을 가진것 같은 남
자였다.
적무강은 일어서며 대답했다.
“어쩐 일이냐? 이시간이면 훈련을 해야 할 때 아니냐?”
“하하~! 뭐 나도 그러고 싶었지만 말이야 검이 이렇게 되서 말이
야.”
적무강의 말에 남자가 고개를 으쓱해 보이며 자신의 손에 있는 검을
들어보였다.
그의 검은 이가 여기저기 나가 한눈에 보기에도 무척이나 험하게 썼
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눈에 남자가 왜 이곳에 왔는지 적무강은 알아차렸다. 그의 얼굴에
어쩔 수 없다는 빛이 어렸다.
“또 험하게 검을 다뤘구나. 검을 네 몸처럼 아끼라니까.”
“그건 알지만 나도 어쩔 수 없다구. 너야 이곳에서 대장장이 일을
하면서 검을 만드는 입장이니까 그렇지만 난 다르다구. 난 참호대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어. 지금 열심히 하지 않으면 뒤쳐진단 말
이야. 그러니까 검을 험하게 쓸 수밖에.”
남자가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적무강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이 고개를 흔들었다.
남자의 이름은 철홍(鐵紅), 이곳 십자성에서 유일한 적무강의 친구였
다.
철홍은 적무강과 함께 대장간에서 일을 배우던 사이였다. 그러나 그
는 늘 강호를 질타하는 꿈을 꾸었고, 그 덕에 대장간 일에 몰두하지
못했다. 그의 꿈은 내성의 참호대에 들어가서 강호를 질타하는 것이
었다. 그리고 그것은 외성의 만통가에 사는 모든 젊은이들의 꿈이기
도 했다.
철홍에게 기회는 매우 우연히 찾아왔다. 참호대의 대주가 우연히 이
곳 하가철방으로 자신의 검을 고치러왔고, 그 와중에 철홍의 자질을
알아본 것이다. 대장간 일을 하면서 매우 잘 단련된 그의 몸과 자질
은 참호대의 대주 눈에 들었다.
그는 철홍 뿐 아니라 적무강에게도 참호대에 들어올 것을 제의하였으
나 적무강은 거절하였다. 그에 철홍 또한 같이 들어가자고 적무강을
유혹했으나 그는 단호히 거절하고 철방에 남았다. 참호대주는 적무강
을 매우 아까워했으나 적무강의 의지에는 변함이 없었다. 매우 순해
보이는 얼굴이지만 적무강의 고집은 무척이나 셌다. 그는 아직까지
자신의 결정을 번복한 적이 한 번도 없는 것으로 철방에서 유명했다.
참호대의 말단 대원으로 들어간 이후에도 철홍은 틈을 내 꼬박꼬박
철방으로 놀러왔다. 물론 그 대부분이 적무강에게 자신의 검을 손질
을 부탁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가 적무강의 가장 절친한 친구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적무강은 철홍의 검을 받아들고 말했다.
“네 검은 워낙 질이 안 좋은 쇠로 만들어져서 수리해도 며칠 못가서
또 이렇게 될 거야. 그러니까 이 검의 날을 다시 세워도 아마 소용없
을 거야.”
“그럼 어떡하지?”
철홍의 얼굴이 금세 울상이 되었다. 그러자 적무강이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마침 내가 좀 시간이 남으니 네 검을 하나 새로 만들어줄게. 그러
니 내일까지는 이검을 그대로 써.”
“정말? 정말 새 검을 만들어줄 거야?”
적무강의 말에 철홍이 뛸 듯이 기뻐했다. 그에 적무강이 웃음을 지었
다.
철홍은 적무강의 두 손을 잡으며 말했다.
“역시 너는 유일한 내 친구야. 네가 만든 검이라면 아무리 검끼리
부딪쳐도 상하지 않을 거야. 좋아! 그 보답으로 오늘은 내가 술을 산
다.”
“안돌아가도 되냐?”
“흐흐~! 괜찮아. 오늘 같은 날 술 한잔 하지 않으면 언제 술을 하
냐?”
“그럼 들어가기 전에 네 손을 본뜨자.”
“알았어! 흐흐!”
적무강은 철방에 가서 기다란 진흙덩어리를 들고 나왔다. 그것은 꼭
검의 손잡이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적무강이 내밀자 철홍은 말
없이 손으로 그것을 잡았다. 그가 손을 떼자 진흙에는 철홍의 손모양
이 고스란히 찍혀 있었다.
“됐다. 이정도면 네 손에 맞는 검을 만들 수 있을 거야.”
“그럼, 네 솜씨야 내가 알지. 내성의 얼간이들보다 네가 백배는 낫
지.”
철홍의 얼굴에는 뿌듯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내성에도 철방은 있었다. 그들은 철홍이 소속돼 있는 참호대 뿐 아니
라 다른 조직에도 무기를 지급한다. 그러나 그곳 어디에도 적무강 정
도의 실력을 가진 자는 없었다. 때문에 검을 손질할 때면 철홍은 반
드시 시간을 내서 적무강에게 왔다.
하노인의 실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적무강은 내성 누구에게도 결코
뒤지지 않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자
는 그리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철홍이나 참호대의 대주인 광도수 정
도였다.
적무강의 스승인 하노인은 그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그 누구도 무강이처럼 불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한 그
는 쇠를 자신의 수족처럼 다를 수 있는 능력을 타고 태어났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적무강이 쇠를 다루는 솜씨는 매우 뛰어났다. 불
과 오년 전에 십자성에 들어와 하가철방에 들어온 이후 그는 미친 사
람처럼 오직 쇠를 다루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철홍이
무공을 익히기 위해 수련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노력했다. 그런 그
의 노력은 지독할 정도여서 하가철방의 사람들은 적무강이 망치를 들
면 오한이 들 정도였다.
언젠가 하노인이 이유를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적무강이 한 대답은
매우 간단했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어서입니다.
그의 말에 하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야 할 일이 있는 자는 최고
의 노력을 기울일 수 있다.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의 의
지를 믿고 하노인은 적무강에게 모든 기술을 전수해줬다. 덕분에 오
늘의 적무강이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적무강은 아직도 멀었다고 생
각했다. 아직 자신의 실력으로는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
다.
철홍이 적무강의 어깨를 쳤다.
“가자! 오늘은 주루에서 거하게 한잔하자.”
그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적무강의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들은 철방을 나와 걸음을 옮겼다.
2
적무강과 철홍은 하성문에게 허락을 구하고 밖으로 나왔다. 어차피
이제 적무강도 할일도 없는지라 하성문은 흔쾌히 허락했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걸었다. 주로 이야기하는 쪽은 철홍
이었고, 적무강은 주로 듣는 쪽이었다.
철홍은 한시도 쉬지 않고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는 주로 자신이 들
어간 참호대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덕분에 적무강 조차 한 번도 보
지 못한 참호대의 인원구성이나 대주인 광도수의 성격을 환하게 파악
했을 정도였다.
“정말 광대주님은 열혈의 성정을 조금만 죽였으면 지금쯤 더 좋은
곳으로 승진할 수 있었을 텐데. 하여간 그놈의 급한 성정 때문에 참
호대처럼 일선부대의 대주로 있으니. 정말 아까워.”
“후후......! 넌 어떠냐? 무공은 익힐 만하냐?”
“말도 마라. 난 무공이라고 해서 대장간에 있을 때처럼 팔다리만 휘
두르면 되는 줄 알았는데 머리도 좋아야 하더라. 그래서 지금 머리가
아파 죽겠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그렇게 머리가 좋은 것은 아니잖
냐. 요즘은 참호대들이 수련하는 진법까지 같이 병행하는데 덕분에
머리카락이 한 뭉텅이는 빠진 것 같아. 내 머리숱이 좀 줄어든 것 같
지 않냐?”
“그러고 보니 조금 줄어든 것 같기도 하다.”
“그치?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아~! 정말 허무한 청춘이어라.”
적무강의 말에 철홍이 엄살을 떨었다.
친구의 엄살에 적무강은 그저 희미한 웃음만 지었다. 말은 그렇게 해
도 철홍이 얼마나 노력을 기울이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철홍은 너무나 늦은 나이에 무공을 시작했다. 비록 그의 자질이 뛰어
나다고 할지라도 절정무인이 되기에는 많이 늦었다고 봐야했다. 철홍
역시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남들의 배는 수련에 투자
했다. 그러나 아직 그가 햇병아리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떠들다 보니 어느새 주루가 있는 골목에 도착했다. 골목길의 양옆에
쭉 늘어서 있는 주루들, 이곳이 바로 십자성의 유일한 환락의 공간이
었다.
십자성은 기본적으로 남자들을 주축으로 이루어진 공간이었다. 수많
은 남자들이 모여 있는 공간이다 보니 그들의 욕망을 풀어줄 필요성
이 있었다. 때문에 십자성에서는 예전부터 이곳을 만들어 남자들의
욕구를 풀어주는 공간으로 활용했다.
그러나 적무강과 철홍이 들어간 곳은 청루나 홍루가 아니었다. 그들
은 이곳 주루들 중에서도 가장 구석에 위치한 허름한 곳으로 들어갔
다. 이곳은 적무강과 철홍이 술을 입에 대기 시작할 무렵부터 찾았던
단골술집으로 이름이 월하루(月下樓)였다. 그러나 이름만큼 풍취를
기대한다면 어리석은 일이다. 이곳은 단지 이름만 멋있는 곳이기 때
문이다.
“어서들 와. 정말 오랜만이네.”
그들이 들어서자 오십대의 넉넉한 인상의 아주머니가 그들을 맞았다.
그녀가 바로 월하루의 주인인 철낭낭이었다. 철낭낭은 외모에서 보이
듯 무척이나 푸근한 성격의 소유자로 적무강과 철홍을 마치 자신의
친자식처럼 아껴 주었다.
철홍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여전히 월하루는 파리만 날리는군요. 그러게 다른 홍루나 청루처럼
기녀들을 들이지요. 맨날 이게 뭡니까? 난 도대체 철낭낭이 뭘 먹고
살아가는지 모르겠다니까. 매일 이렇게 파리만 날리는데.”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자리에나 앉아. 그렇게 계속 수다만 떨다
가 이곳에 있는 파리가 네놈 입안에 들어가겠다.”
“하하하!”
“이층으로 올라갈 거지?”
“두말하면 잔소리지요. 이층으로 늘 먹던 것 갖다주세요.”
“알았다. 올라가서 기다리고 있어.”
매일같이 파리를 날려도 월하루의 이층은 무척이나 경치가 좋았다.
월하루는 매우 절묘한 위치에 자리를 잡고 있어 이곳 환락가가 한눈
에 들어왔다. 때문에 월하루의 이층에 있으면 많은 구경을 할 수 있
었다.
그들은 밖의 전경이 잘 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곳은
월하루를 오면 늘 그들이 앉는 자리였다.
수많은 남자들이 오늘도 하룻밤의 쾌락을 찾아 환락가에 몰려들었다.
적무강과 철홍은 월하루의 이층에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문득 철홍이 말했다.
“근데 넌 언제까지 철방에 있을 거야? 이젠 너도 무공을 익혀야 되
지 않아?”
“훗! 네 걱정이나 해.
“하여간 너의 속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남자의 꿈은 뭐니 뭐니
해도 검 한 자루를 들고 중원을 누비는 것 아니냐. 그러려면 십자성
의 참호대 만큼 좋은 곳이 어디 있냐? 하여간 굴러들어온 복을 제 발
로 걷어차다니.”
철홍의 눈은 어느새 몽롱해져 있었다.
고아로 자란 그의 꿈은 무림의 협객들이 그러하듯 검 한 자루에 의지
해 중원을 누비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참호대의 말단에 불과한 그
가 독립을 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요원한 일이었다. 참호대가 비록 십
자성의 얼굴이긴 하지만 그들에게는 영약이나 신병이기가 지급되지는
않았다. 참호대는 어디까지나 얼굴일 뿐 실질적인 주력은 아니기 때
문이다.
그것은 이곳 십자성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원래 중요한 것은 결코 밖으로 내보이지 않는 법이니까.
갑자기 철홍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적무강은 철홍의 시선을 따라 고개
를 돌렸다.
철홍의 시선이 닿은 곳, 그곳에는 사남일녀가 길을 걷고 있었다.
기품 있는 모습과 고급스런 의복이 한눈에 보기에도 그들이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적무강은 그들을 바라보다 철홍에게 물었다.
“누구야?”
“아······! 넌 저들을 모르겠구나. 저들이 바로 이번에 십자
성에서 새로 발족한 웅풍대(雄風隊)의 부대주들이야. 하나같이 천하
에서 알아주는 기재들이지. 정말 저들에 비하면 난 새 발의 피밖에
안된다니까.”
“음!
철홍의 말에 적무강이 안력을 돋워서 다시 그들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들의 모습이 눈에 또렷이 들어왔다.
“저들 중 가장 가운데 있는 풍채 좋고 인상 좋은 남자가 바로 백씨
세가의 차남인 백만우야. 그야말로 검의 귀재라고 알려져 있지. 그리
고 그의 왼쪽에 있는 남자가 제갈호, 듣기로는 웅풍대의 지낭이라고
알려져 있어. 그 이외의 사람은 그리 알려진 바가 없어. 아! 제일 뒤
에 있는 여자 보이지? 그 여자가 바로 강소성 양주서가의 장녀인 서
문아야. 이미 몰락했다고 알려진 양주서가가 저 여인으로 인해 부활
할 거란 이야기가 돌만큼 대단한 재녀지. 또 저 미모 좀 봐. 정말 대
단하지 않냐? 여기까지 빛이 나는 것 같아.”
웅풍대는 요 근래 다시 준동하고 있는 천왕성에 맞서기 위해 십자성
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조직이었다. 천하를 뒤져 절세의 기재 백
명을 뽑아 그들에게 온갖 영약과 신병이기를 지급했다.
십자성에서는 그들을 정예조직으로 키우길 원했다. 때문에 그들에 대
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크하~! 나도 웅풍대에 들어갔으면 소원이 없겠다. 저들은 기본적으
로 일갑자의 내공을 지원받는다고 하더라구. 하긴 온갖 영약을 복용
하는데 그 정도도 안 된다면 말도 안 되지.”
철홍은 몽롱한 눈으로 웅풍대의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에게 있어 웅
풍대는 감히 넘볼 수 없는 거대한 벽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에
겐 숭배의 대상이었다.
적무강의 시선은 웅풍대의 부대주들을 훑어 보다 서문아의 얼굴에 머
물렀다. 순간 그의 얼굴에 이채가 떠올랐다.
아름다운 얼굴, 무척이나 고아한 분위기, 그러나 그와는 어울리지 않
는 그녀의 차가운 눈동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분명히 동료들과 웃고
떠들지만 그녀의 눈은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때문에 그녀는 매우 독
특한 매력을 뿌리고 있었다.
적무강이 그녀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저들이 웅풍대의 부대주들이라면 대주는 누구지?”
“대주? 이건 비밀인데 특별히 너니까 알려줄게. 웅풍대의 대주는 바
로 이곳 십자성의 소성주인 마정옥 대공자야. 마정옥 대공자가 십자
성의 후계자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니까 그의 직속 부대인 웅풍대
역시 차기 권력의 핵심에 가장 근접해 있다고 보는 게 옳을 거야.”
“마정옥이라······.”
적무강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마정옥은 이제 이십대 초반의 남자로 현 십자성주인 마영백의 뒤를
이을 강력한 후계자로 떠오르고 있었다. 아직까지 외성은 물론 내성
에서조차 그를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본 사람들
은 한 결 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천하에서 그보다 더 완벽한 사람은
없을 거라고.
문무겸전은 물론 외모까지 천하제일이라고 불리는 남자, 그가 바로
대공자 마정옥이었다. 천하가 뒤집어 지는 일이 없는 한 그가 십자성
주에 오른다는 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음!”
그때 적무강이 나직하게 신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철홍이 물었다.
“왜 그러는데?”
“아무것도 아냐!”
적무강은 가볍게 손을 흔들며 별일 아니라는 듯이 웃었다. 그러나 그
는 무척이나 놀란 상태였다.
‘분명히 나의 시선을 느꼈다. 그 거리에서......
조금 전에 서문아는 적무강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것은 분명히 그녀
가 적무강의 시선을 느꼈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녀와의 거리는 이십
여 장, 그 정도의 거리에서 시선을 느꼈다면 그녀의 수준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곧 시선을 돌리기는 했지만 서문아는 적무강이 있는 곳을 정확하게
바라봤다. 순간 적무강은 아찔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무어라 형용
할 수 없는 종류의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내 서문아 고개를 돌렸기에
그 이상은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서문아를 비롯한 웅풍대의 부대주들은 월하루 근처의 주루로 들어갔
다. 때문에 더 이상 그들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때 철
낭낭이 술과 안주를 들고 나왔다. 그녀가 탁자위에 음식을 차려놓고
내려간 후 두 사람은 술잔을 기울였다.
철홍이 푸념을 했다.
“세상은 너무 불공평해. 누구는 선택을 받아 저렇게 온갖 혜택을 모
두 받고, 누구는 죽을 둥 살 둥 무공을 익혀도 그들의 발끝에도 미치
지 못하니.”
“후후~! 또 신세타령이냐?”
“그래! 신세타령이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가겠냐?
우리 같은 사람이야 아무리 노력해도 한계가 있는 걸. 나도 좋은 집
자식으로 태어났으면 저들 못지않게 잘할 자신이 있다.”
사실 이 시대에 신분의 상승을 꿈꾸는 것은 그야말로 한낱 꿈에 불과
하다. 일반 무인이 제아무리 무공에 대한 재질이 뛰어나다 할지라도
온갖 혜택을 받고 수련을 하는 명문가의 자제들을 뛰어넘는 것은 거
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철홍은 무척이나 아까운
사람이었다.
비록 자질은 뛰어나지만 그가 익힐 수 있는 무공은 한계가 있었고,
또한 내공 또한 한계가 있었다. 더구나 무공을 익히기 시작한 나이가
너무 늦어 절정에 오르기는 힘이 들 것이다. 그에 반해 웅풍대의 대
원들은 모두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수많은 혜택을 받았
고, 훌륭한 무공을 일찍부터 배웠다. 거기에 십자성에 발탁되어 체계
적인 수련과 함께 수많은 영약과 절세 비급을 지원받으니 어찌 철홍
이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겠는가? 이미 그가 웅풍대를 따라잡을 수
있는 가능성 따위는 추호도 없는 것이다.
“조금 있으면 마정옥 공자의 스물두 번째 생일이다. 아마 성주께서
는 이번 기회를 빌려 대공자를 후계자로 선포할 거야. 그렇게 되면
이 거대한 성이 대공자의 것이 되는 거지.”
“음!”
“정말 선택받은 사람이야.”
“후후~! 넋두리는 그만하고 술이나 마시자.”
“아! 내가 너무 신세타령만 했나? 그래 술이나 마시자. 건배!”
창!
두 사람은 술잔을 부딪쳤다.
술이 들어가자 금세 목구멍이 화끈해졌다.
“크으~! 좋다. 정말 철낭낭의 술은 정말 최고라니까.
지금 그들이 마시는 것은 철낭낭이 비전의 솜씨로 만든 죽엽청주로
이곳 월하루의 손님이 아니면 절대 마실 수 없는 것이었다. 때문에
적무강과 철홍은 우연히 이곳에서 죽엽청주를 마신 후 술을 마실 때
는 반드시 이곳으로 왔다.
본래 죽엽청주는 산서성 특산의 술이기에 적무강은 철낭낭이 산서 사
람이 아닌가 짐작을 했다.
“그런데 영감님은 이제 철방에 나오지 않는 거냐? 요즘 통 안보이시
던데.”
“음! 이제 늙으셔서 기력이 많이 떨어지셨으니까. 하지만 가끔 나와
서 작업하시는 것을 지켜보시기는 해.”
“그래! 이제는 편히 쉬실 때도 되었는데. 하아저씨도 있고, 너도 있
으니 이제 철방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잖아.”
“아직 나는 멀었어. 그분과 나의 실력은 아직 비교조차 할 수 없으
니까.”
“헤~! 그래도 내가 보기에는 네 실력이 천하제일이야.”
그들이 말하는 사람은 하가철방의 주인인 하노인이었다. 적무강의 실
력은 모두 하노인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그러나 아직 적무강의 실
력은 하노인에게 못 미쳤다. 분명 외적인 실력으로는 하노인과 대등
했으나 아직 적무강은 한 가지를 갖추지 못했다. 그것은 바로 연륜이
었다.
오랜 세월 쇠와 함께 호흡을 해온 하노인의 실력은 쇠를 구분하지 않
는다. 어떤 쇠라도 그의 손에 들어온다면 그는 그 성질 그대로를 살
려서 필요한 물건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일상적인 물품을 주로 만
들었지 검이나 도 같은 살상무기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만약
그가 검이나 도를 만들었다면 내성에 있는 철방은 모두 문들 닫아야
했을 것이다.
하노인은 그야말로 십자성의 숨겨진 명장이었다.
적무강은 다시 술잔을 들이켰다. 아직 그가 원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
기에는 실력이 모자랐다. 철방의 사람들이나 철홍은 그의 실력을 추
켜세우지만 적무강 본인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후~! 어차피 평생을 걸어도 모자랄 길,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적무강의 상념이 계속되는 가운데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3
밤이 늦은 시각 적무강은 철홍과 헤어져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의 집은 철방의 한쪽에 있었다.
철방의 모든 사람들이 집을 비운 시간 오로지 그만이 철방에 홀로 있
었다. 오년 전에 그가 이곳 십자성에 처음 들어왔을 때 그는 이곳에
서 일하기를 원했고, 하노인은 갈 곳 없는 그를 위해 흔쾌히 철방에
남는 방을 그에게 내줬다. 때문에 적무강은 일할 때나 쉴 때나 모두
이곳 철방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아무도 없는 철방, 적무강은 화로 앞으로 다가갔다. 하루 열두 시진
절대 불이 꺼지지 않는 하가철방의 화로. 그 화력은 그야말로 천하제
일이었다.
적무강은 잠시 화로를 바라보다 철방의 안쪽에 있는 마당으로 나왔
다. 마당은 불빛 하나 없어 무척이나 어두웠다.
“후~!”
그가 숨을 들이켰다. 그러자 몸에 남아있던 취기가 모두 밖으로 빠져
나갔다.
적무강은 잠시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상처투성이의 거친
손이 눈에 들어왔다. 불에 데인 상처를 비롯해 각종 흉터가 거칠게
그의 손바닥과 등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모두가 철방의 기술을 익히
기 위해 얻은 상처이다.
적무강은 눈을 감았다. 그러자 세상의 모든 빛이 사라졌다.
오직 어둠만 남은 공간, 그러나 적무강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분
명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은 손이었지만 적무강은 마치 무기라도 든
것처럼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심상대법(心像大法)!’
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심상(心像)이란 말 그대로 마음의 형태를 말한다. 이를테면 마음의
거울과도 같은 것이다.
마음속에 원하는 것을 떠올려 형태를 갖추는 것, 그것이 바로 심상대
법이다. 심상대법의 가장 큰 효능은 떠올린 상대의 모든 것을 마음속
에 고스란히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대의 무공수위는 물론 세세
한 버릇까지도 말이다. 물론 그렇게 되려면 심상대법을 시전 하는 자
가 구현할 상대의 모든 것을 세세하게 알아야한다는 전제조건이 붙는
다. 그렇지 않고 대략적인 모습을 떠올린다면 아무런 효능도 없는 것
이다.
심상대법은 적무강의 집안에서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기법중의 하
나이다. 대를 이어 보완해온 심상대법은 이제 거의 완벽해졌다.
적무강은 마음속으로 자신의 상대를 떠올렸다. 그러자 거친 수염과
함께 야수 같은 눈빛을 한 중년의 남자가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환
도가 들려 있었다. 그는 적무강을 향해 거친 살기를 토해냈다.
부르르~!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은 적무강의 손이 떨렸다. 이어 그의 눈앞에 하
나의 도가 형상을 갖췄다. 그러나 완벽한 형상을 갖추지 못해 그 모
습이 무척이나 희미했다.
적무강의 눈앞에 나타난 남자가 기친 살기를 뿜어내며 달려들었다.
고오오~!
적무강을 향해 밀려오는 가공할만한 도기의 폭풍, 적무강의 눈이 찌
푸려졌다. 그러나 그는 이내 입술을 질근 깨물고 몸을 움직였다.
파파팍!
그의 도에서도 도기가 뻗어나갔다.
도기와 도기가 부딪치고 공간이 가공할만한 압력이 가해졌다.
“크으~!”
적무강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터져 나왔다.
분명 그의 몸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는 공전
절후의 결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심상대법의 효능이었다. 넓은 공간도 필요 없다. 오로지
두발로 서있을 공간만 있으면 언제든 심상대법을 펼칠 수 있다. 그리
고 가상의 존재를 상대로 자신의 무공을 겨를 수 있다.
적무강이 싸우고 있는 상대는 그가 제일 잘 아는 사람이었다. 이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적무강은 그의 생김새, 버릇, 무공까지 아직
까지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죽어서까지 적무강의
상대가 되어주고 있었다.
“아......버지.”
적무강이 남자를 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러나 남자는 아무것도 들
리지 않는 듯 적무강을 향해 미친 듯이 무공을 펼쳤다.
콰콰콰!
적무강이 있던 공간이 일그러지고 도기의 폭풍이 몰아쳤다. 마치 산
정상에서 늑대가 포효하듯 그렇게 도기의 영향이 사방으로 퍼져나갔
다. 그러나 그에 상관없이 적무강은 자신의 도를 휘둘렀다. 그에 따
라 그의 몸에서도 눈앞의 남자와 똑같은 초식이 펼쳐졌다.
콰콰콰-쾅!
도기와 도기가 부딪치며 적무강의 몸이 뒤로 밀렸다. 똑같은 초식이
었지만 그의 내공이 남자보다 딸리는 것이다. 그러나 적무강은 이내
입가에 흘러내린 피를 닦아내고 다시 덤벼들었다.
그렇게 그들은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쩌-저-적!
그러던 어느 순간 그들의 손에 들린 도가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마치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잔금, 이어 그들의 도가 먼지
처럼 부서져 내렸다.
적무강이 손잡이만 남은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남자 역시 적무강
과 똑같은 눈으로 자신의 검을 바라봤다.
슬픈 눈, 그것은 커다란 업보를 짊어진 자의 눈이었다. 잠시 슬픈 눈
으로 적무강을 바라보던 남자의 모습이 스르륵 사라졌다. 그제야 적
무강이 심상대법을 해제하고 눈을 떴다.
그의 눈에 여전히 빈손이 보였다.
“역시 맨손으로는 안 되는가?”
그가 허무하게 중얼거렸다.
심상대법은 상대를 완벽하게 구현해낼 수 있다. 때문에 마음속의 공
간에서 상대와 얼마든지 싸울 수 있다. 그러나 심상대법을 펼치기 위
해서는 자신의 능력 또한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했다. 그래야만
객관적인 대결을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무강은 아직 자신
의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에게 가장 중요
한 무기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조급하게 마음먹지 않기로 하지 않았는가? 더 조급해해서 무엇을
하겠다는 말인가? 냉정해지자. 적무강!”
적무강은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리고 화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순백의 불길이 모든 것을 태울 듯 일렁였다.
어차피 제대로 잠을 자기는 글렀다. 적무강은 철방의 한쪽에 있는 쇳
덩어리를 집어 들었다.
그가 만일을 대비해 쓰지 않고 놓아두었던 신철(薪鐵)이었다. 이 신
철을 두드려 정련하면 정철을 얻을 수 있었다.
적무강은 신철을 순백색의 불길이 올라오는 화로에 넣었다. 그러자
얼마 안 있어 신철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에 적무강은 신철을 꺼내
두드리기 시작했다.
따-당-당-땅!
그의 망치는 마치 악공의 음률처럼 일정한 운율을 띠고 움직였다. 그
의 망치 소리는 무척이나 맑고 깨끗해 무척이나 듣기 좋았다.
자세히 보면 그의 어깨가 일정한 법칙에 의해 쇠를 두드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정한 힘으로 일정한 부위를 두드리는 적무강의 솜씨는
무공을 익힌 자들이 보더라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쾌속하면서 은밀
했다.
적무강의 망치가 신철에 닿을 때마다 조금씩 형체가 잡혀갔다.
땅땅땅!
그의 망치질에 따라 바로 옆에 있는 화로의 불길이 거세게 일렁였다.
적무강은 의식하지 않고 있었으나 화로의 불길은 적무강의 호흡에 따
라 움직였다. 그것은 적무강의 심법이 양강의 것이기 때문이다.
작업이 새벽까지 진행되어도 적무강은 두발을 대지에서 한 번도 떼지
않았다. 그는 화로에 쇠를 집어넣을 때만 허리를 비틀었을 뿐 밤새
한발작도 떼지 않았다.
완벽한 부동의 모습, 그의 다리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그만큼 많은
부하가 걸린 것이다. 그러나 적무강은 자신의 신체에는 신경을 분산
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오직 검의 형체를 갖춰가는 쇳덩이만 보였
다. 놀라운 집중력이었다.
적무강에게는 그야말로 생활의 모든 것이 무공의 수련이었다.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 것은 역설적으로 보법을 수련하기 위한 것
이고, 망치를 두드리는 것 역시 무공을 수련하는 방법이었다. 꼭 무
공을 연무장에서 하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적무강의 이런 무공수련은 벌써 오 년째 이어지고 있었다. 그가 하가
철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주위의
그 누구도 적무강이 무공을 익히는 것을 몰랐다. 심지어는 그의 가장
절친한 친구인 철홍 마저도 말이다.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장인으로써의 능력과 천하제일의 화력을 갖춘
화로, 그래서 그는 하가철방을 택했다. 그러나 아직 그의 능력은 원
하는 바를 이루기에는 많이 모자랐다.
깡깡깡!
적무강은 밤새도록 쇠를 두드렸다.
시끄러운 망치소리에 인근 상가의 사람들이 무어라 말을 할 법도 했
지만 이미 그들은 모두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간 후였다. 때문에 적
무강이 하는 일에 항의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적무강은 자신의 친구인 철홍을 위해 밤새도록 쇠를 두드리고 또 두
드렸다.
해가 뜨고 날이 밝아 철방의 사람들이 하나둘 출근했을 때 그들은 화
로의 곁에 놓인 한 자루의 검을 볼 수 있었다. 손잡이도 없이 오직
잘 뻗은 검신이 사람들의 눈앞에 늘씬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 이것은 웬 검이냐?”
하성문이 뜻밖의 모습에 적무강에 물었다.
“철홍이 것입니다. 이제 녀석도 제대로 된 검이 필요할 듯해서요.”
“그래! 신경을 쓴 것이 표가 나는구나. 제대로 만들었어. 철홍이 녀
석이 친구를 잘 만나서 호강을 하는구나.”
하성문이 감탄을 터트렸다.
그는 검신을 들고 손가락으로 튕겨보았다.
따-앙!
맑은 쇳소리가 오래도록 여운을 남기며 울려 퍼졌다. 하성문의 입가
에 절로 미소가 어렸다. 검신에서 나는 소리만으로도 적무강이 얼마
나 신경을 써서 만들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성문이 말했다.
“마광은 내가 낼 테니, 네가 손잡이를 만들 거라.”
“하지만 아저씨까지 이일에 매달렸다가는 오늘 일에 지장이 있을 텐
데요.”
“괜찮아! 철홍이도 이곳에서 일을 했던 아이, 비록 검이나 휘두르는
참호대에 들어간 것은 탐탁지 않으나 그래도 무언가는 해주고 싶었
다. 마침 네가 이런 물건을 만들었으니 나도 생색을 한번 내보자꾸
나.”
“그렇다면 저야 고맙지요.”
“그럼 시작하자.”
“예!”
적무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성문은 검신을 들고 자신의 작업대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쇠똥가루를 숯과 수은에 섞어 연마제를 만들어 기름 묻힌 삼베
조각에 묻혔다. 그가 만든 연마제는 하가철방의 비법에 의한 것으로
그 비율을 아는 자는 하노인과 그밖에 없었다. 적무강도 아직 전수받
지 못한 비법인 것이다.
하성문은 연마제를 묻힌 삼베조각으로 정성스럽게 검신을 문질렀다.
그의 손길이 계속될수록 검의 표면이 마치 유리처럼 빛나기 시작했
다.
하성문이 마광을 내는 사이 적무강은 검의 손잡이를 만들기 시작했
다. 적무강이 선택한 재료는 오동나무였다.
적무강은 오동나무를 진흙 봉에 찍힌 철홍의 손자국을 바탕으로 세밀
하게 깎아냈다.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오동나무가 점점 형태를 갖
춰갔다. 그는 온종일 오동나무를 가지고 신경을 집중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마침내 손잡이가 모양을 갖추자 적무강은 철
방의 한쪽에있는 교어피(蛟魚皮)를 가지고 나왔다. 교어피는 다름 아
닌 상어의 가죽으로 등쪽 부분의 가죽이었다. 상어의 등 쪽에는 수많
은 돌기가 있어 손으로 잡았을 때 미끄러짐을 방지해 주기 때문에 주
로 손잡이에 칭칭 감아 썼다.
그때 하성문이 검신을 들고 왔다.
“마광은 물론 날까지 완벽하게 세웠다. 검신이 균형이 잘 잡혀있는
것이 훌륭한 놈이 나올 것 같구나.”
“그렇습니까? 잘되었네요.”
“어서 손잡이를 끼어 보거라.”
“예!”
적무강은 하성문에게서 검신을 받아 손잡이와 결합을 시켰다. 이어
손에 든 교어피를 정성스럽게 감았다. 그러자 얼마 안가 훌륭한 검이
자태를 드러냈다.
하성문이 감탄사를 터트렸다.
“훌륭하구나. 화려하지 않으면서 나름대로 기품도 있고, 철홍이에게
이보다 좋은 검은 구해줄 수 없을 것이다.”
“참호대에서 너무 화려한 검을 쓰면 눈에 띌 것 같아 일부러 수수하
게 만들어 보았습니다.”
“그래! 잘했다. 이제 참호대의 말단에 불과한 놈이 너무 눈에 띄는
검을 가지고 있으면 질시를 받기 마련이다. 철홍이의 손에 잘 맞으면
그게 명검이지, 달리 무엇이 있겠느냐? 잘했다. 내 마음에도 쏙 드는
구나.”
하성문이 연신 감탄사를 터트렸다.
쇠를 다루는 적무강의 감각은 평생을 철방에서 살아온 하성문 조차도
감탄하게 만들었다.
“검신은 다되었고, 그럼 검집이 필요하구나. 검집은 몇 개 만들어 놓은 것이 있는
데 어디보자......”
하성문은 철방의 한쪽에 있는 창고를 뒤졌다. 그렇게 얼마나 뒤졌을
까? 그가 수수한 검집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예전에 만들어 두었던 것인데 너무 모양이 수수해서 손님들에게 거
절을 당했는데, 오히려 이것이 철홍이의 검에는 잘 어울릴 것 같구
나.”
“그러네요! 정말 잘 어울리는군요.”
적무강은 하성문이 들고 나온 검집이 마음에 들었다. 어차피 화려한
장식이나 문양 따위는 어울리지 않는 검이었다. 자신이 만든 검에는
하성문이 들고 있는 검집이 제일 잘 어울렸다.
스릉~!
검을 검집에 꽂자 마치 처음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딱 맞아 떨어졌
다.
적무강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이제부터 이것은 오직 철홍을 위
한 단 한 자루의 검이었다. 그는 잠시 검을 바라보다 창고 안에 들여
놓았다. 다시 철홍이 오면 넘겨줄 생각이었다.
“자 이제 우리 일을 하자. 오늘도 주문 들어온 것이 꽤 많으니 부지
런히 움직여야 될 거야.”
“예!”
적무강은 더 이상 자신이 만든 검이 신경을 쓰지 않고 자신의 작업대
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서 오십시오.”
그때 철방의 점원이 인사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지간한 사람이 아
니면 크게 목소리를 내는 법이 없는 사람이 큰 목소리를 내는 것을
보니 필경 범상치 않은 사람인 듯 했다.
적무강의 고개가 자신도 모르게 철방의 입구로 향했다. 그러자 무척
이나 덩치가 커다란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남자의 덩치가 어찌나 큰
지 넓은 철방의 입구가 그의 모습으로 꽉 들어차는 것이 느껴졌다.
적무강은 한눈에 남자를 알아보았다. 제 아무리 십자성이 넓고 수많
은 사람이 존재하지만 저 정도의 덩치를 가진 남자는 오직 한명 뿐이
기 때문이다.
“광......대주님!”
“오랜만이군. 무강이!”
매우 탁한 음성이었다. 그러나 그의 음성에는 묘한 울림이 어려 있었
다.
남자의 이름은 광도수, 철홍이 소속되어 있는 참호대의 대주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철방에 오는 이유야 단 한 가지밖에 없지.”
십자성을 통 털어 서열 이십 위 안에 들어간다는 실력을 가진 남자가
바로 참호대주인 광도수였다. 그만큼 그는 초절정의 강자였다. 그러
나 그의 성격은 무척이나털털해서 체면이나 위신 따위는 따지지 않았
다. 아마 천생무골이라는 말은 그를 위해 존재하는 단어일 것이다.
광도수는 적무강과 하성문을 보며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얼마 안 있으면 마공자의 생일이라네. 때문에 선물
을 하긴 해야겠는데 마땅한 것이 없어서 말이야. 그래서 자네들에게
부탁 좀 하려왔네.
이미 십자성의 다른 요인들은 마정옥의 생일 선물을 구하기 위해 동
분서주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들은 천하의 진귀한 것을 찾기 위해
사람을 풀었다. 그러나 그에 반해 광도수는 마정옥의 생일을 챙기는
것이 무척이나 귀찮았다. 할 수 있다면 무시하고 지나고 싶지만 조직
의 생리라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어서 할 수 없이 무거운 엉
덩이를 움직여 이곳까지 온 것이다.
광도수는 이곳 하가철방의 진짜 실력을 알고 있는 소수의 몇 명 중
한명이었다.
대답을 한건 하성문이었다.
“아니 대공자의 생일 선물을 어찌 저희 같은 외성의 철방에서 구하
십니까? 차라리 내성의 이름난 철방에 부탁하는 것이......”
“아......아! 내 앞에서까지 속이려고 하지 말게. 자네들의 실력이
야 내 이미 알고 있는데 내 넘어갈 것 같은가? 잔말 말고 내 부탁 좀
들어주게.”
“광대주님!”
하성문이 난처한 얼굴을 했다.
하 씨 집안이 원하는 것은 오직 장인의 역할, 마정옥 같은 십자성의
권력자의 눈에 뜨여 좋은 일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때문에 될 수 있으면 그들과 연을 맺지 않고자 하는 것이 하성문의
마음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적무강은 광도수의 얼굴을 바라봤다.
하늘의 천장이 모습을 갖춘다면 아마 이런 모습일 것이다. 그만큼 광
도수의 외모는 박력 그 자체였다. 외모도 외모지만 그를 더욱 유명하
게 만든 것은 그의 무공이었다. 십자성에서 이십 위 안에 든다는 것
은 천하에서 백 위 안에 든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었다. 천하백강 안
에 드는 초강자, 그가 바로 광도수인 것이다.
적무강은 자신의 무공이 드러나지 않기 위해 특히 신경을 썼다. 아직
그의 무공이 드러날 시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가 익힌 무공
은 겉으로는 흔적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기에 광도수의
눈을 속일 수 있었다.
광도수는 품을 뒤지더니 무언가를 꺼내놓았다.
"만년한철이네. 이것으로 도를 한 자루 만들어 주게나. 대공자께서
도법을 익히시고 계시니 아마 마음에 들어 하실 게야. 부탁하겠네."
이쯤이 되면 부탁이 아니라 협박이나 마찬가지다. 하성문의 입장에서
는 광도수의 부탁을 거절할 명분이나 담량이 없기 때문이다. 광도수
의 말 한마디면 외성의 이런 철방 따위 하나 없어지는 것은 일도 아
니다. 평소의 그는 무척이나 털털하고 담백한 성품이지만 한번 화가
나면 그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오죽하면 그의 또 다른 별명이 광도
부(狂屠父)일까!
“대공자의 생일 전날까지는 완성해주게나. 내가 내성의 정문을 지키
는 아이들에게 말을 해놓을 테니 직접 사람을 보내 가져다주게나.”
“휴~!”
하성문은 대답대신 한숨을 토해냈다. 광도수는 그런 하성문을 보며
웃음을 짓다 몸을 돌렸다. 그는 문밖으로 걸음을 나가다 잠시 멈추고
적무강을 바라봤다.
“만약 무공을 배우고 싶다면 언제든 찾아와. 철홍이도 그렇지만 너
의 자질도 꽤 쓸 만한 편이니까. 내 밑에서 몇 년 만 고생한다면 어
딜 가도 쓸 만하다는 소리를 들을 거야. 그러니까 생각이 바뀐다면
언제든 찾아와.”
광도수의 말에 적무강은 대답대신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러자 광도
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의
말은 다분히 요식적이었던 것이다.
적무강은 고개를 돌려 탁자위에 놓인 만년한철을 바라봤다. 이미 그
의 기억에 광도수의 말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의 눈은 장인의
눈으로 바뀌어 있었다. 또다시 그의 집중력이 발휘된 것이다.
적무강은 더 이상 자신이 만든 검이 신경을 쓰지 않고 자신의 작업대
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서 오십시오.”
그때 철방의 점원이 인사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지간한 사람이 아
니면 크게 목소리를 내는 법이 없는 사람이 큰 목소리를 내는 것을
보니 필경 범상치 않은 사람인 듯 했다.
적무강의 고개가 자신도 모르게 철방의 입구로 향했다. 그러자 무척
이나 덩치가 커다란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남자의 덩치가 어찌나 큰
지 넓은 철방의 입구가 그의 모습으로 꽉 들어차는 것이 느껴졌다.
적무강은 한눈에 남자를 알아보았다. 제 아무리 십자성이 넓고 수많
은 사람이 존재하지만 저 정도의 덩치를 가진 남자는 오직 한명 뿐이
기 때문이다.
“광......대주님!”
“오랜만이군. 무강이!”
매우 탁한 음성이었다. 그러나 그의 음성에는 묘한 울림이 어려 있었
다.
남자의 이름은 광도수, 철홍이 소속되어 있는 참호대의 대주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철방에 오는 이유야 단 한 가지밖에 없지.”
십자성을 통 털어 서열 이십 위 안에 들어간다는 실력을 가진 남자가
바로 참호대주인 광도수였다. 그만큼 그는 초절정의 강자였다. 그러
나 그의 성격은 무척이나털털해서 체면이나 위신 따위는 따지지 않았
다. 아마 천생무골이라는 말은 그를 위해 존재하는 단어일 것이다.
광도수는 적무강과 하성문을 보며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얼마 안 있으면 마공자의 생일이라네. 때문에 선물
을 하긴 해야겠는데 마땅한 것이 없어서 말이야. 그래서 자네들에게
부탁 좀 하려왔네.
이미 십자성의 다른 요인들은 마정옥의 생일 선물을 구하기 위해 동
분서주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들은 천하의 진귀한 것을 찾기 위해
사람을 풀었다. 그러나 그에 반해 광도수는 마정옥의 생일을 챙기는
것이 무척이나 귀찮았다. 할 수 있다면 무시하고 지나고 싶지만 조직
의 생리라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어서 할 수 없이 무거운 엉
덩이를 움직여 이곳까지 온 것이다.
광도수는 이곳 하가철방의 진짜 실력을 알고 있는 소수의 몇 명 중
한명이었다.
대답을 한건 하성문이었다.
“아니 대공자의 생일 선물을 어찌 저희 같은 외성의 철방에서 구하
십니까? 차라리 내성의 이름난 철방에 부탁하는 것이......”
“아......아! 내 앞에서까지 속이려고 하지 말게. 자네들의 실력이
야 내 이미 알고 있는데 내 넘어갈 것 같은가? 잔말 말고 내 부탁 좀
들어주게.”
“광대주님!”
하성문이 난처한 얼굴을 했다.
하 씨 집안이 원하는 것은 오직 장인의 역할, 마정옥 같은 십자성의
권력자의 눈에 뜨여 좋은 일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때문에 될 수 있으면 그들과 연을 맺지 않고자 하는 것이 하성문의
마음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적무강은 광도수의 얼굴을 바라봤다.
하늘의 천장이 모습을 갖춘다면 아마 이런 모습일 것이다. 그만큼 광
도수의 외모는 박력 그 자체였다. 외모도 외모지만 그를 더욱 유명하
게 만든 것은 그의 무공이었다. 십자성에서 이십 위 안에 든다는 것
은 천하에서 백 위 안에 든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었다. 천하백강 안
에 드는 초강자, 그가 바로 광도수인 것이다.
적무강은 자신의 무공이 드러나지 않기 위해 특히 신경을 썼다. 아직
그의 무공이 드러날 시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가 익힌 무공
은 겉으로는 흔적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기에 광도수의
눈을 속일 수 있었다.
광도수는 품을 뒤지더니 무언가를 꺼내놓았다.
"만년한철이네. 이것으로 도를 한 자루 만들어 주게나. 대공자께서
도법을 익히시고 계시니 아마 마음에 들어 하실 게야. 부탁하겠네."
이쯤이 되면 부탁이 아니라 협박이나 마찬가지다. 하성문의 입장에서
는 광도수의 부탁을 거절할 명분이나 담량이 없기 때문이다. 광도수
의 말 한마디면 외성의 이런 철방 따위 하나 없어지는 것은 일도 아
니다. 평소의 그는 무척이나 털털하고 담백한 성품이지만 한번 화가
나면 그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오죽하면 그의 또 다른 별명이 광도
부(狂屠父)일까!
“대공자의 생일 전날까지는 완성해주게나. 내가 내성의 정문을 지키
는 아이들에게 말을 해놓을 테니 직접 사람을 보내 가져다주게나.”
“휴~!”
하성문은 대답대신 한숨을 토해냈다. 광도수는 그런 하성문을 보며
웃음을 짓다 몸을 돌렸다. 그는 문밖으로 걸음을 나가다 잠시 멈추고
적무강을 바라봤다.
“만약 무공을 배우고 싶다면 언제든 찾아와. 철홍이도 그렇지만 너
의 자질도 꽤 쓸 만한 편이니까. 내 밑에서 몇 년 만 고생한다면 어
딜 가도 쓸 만하다는 소리를 들을 거야. 그러니까 생각이 바뀐다면
언제든 찾아와.”
광도수의 말에 적무강은 대답대신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러자 광도
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의
말은 다분히 요식적이었던 것이다.
적무강은 고개를 돌려 탁자위에 놓인 만년한철을 바라봤다. 이미 그
의 기억에 광도수의 말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의 눈은 장인의
눈으로 바뀌어 있었다. 또다시 그의 집중력이 발휘된 것이다.
첫댓글 재미있게 잘 봐습니다
즐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