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경계, 이편과 저편
누가복음 16:19-31
하나님의 은혜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창조절 제5주일이다. 일 년 중 가장 좋은 계절이다. 연일 맑은 하늘은 마음을 들뜨게 한다. 곧 거리마다 국화화분이 놓이고, 산마다 단풍놀이가 한창일 것이다. 절로 마음이 설렌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던 일본 여행이 뚝 끊기면서 고립된 사람들이 있다. 재일동포인데, 일본에 사는 사람 중에 ‘해방 이전에 일본에 온 사람과 그 자손’을 말한다. 현재 59만 여명이다.
11년 전, 재일대한기독교회 100주년 기념식에 초대받아 참석한 일이 있다. 엊그제 같은데 너무 빨리 잊는 것 같아 송구하다. 교토조선제일초급학교를 방문한 기억은 오래 남았다. 그 때만해도 미리 정부에 사전신고를 하였다. 젊은 교장 선생님은 그 동안 일본우익들에게 받은 봉변과 수난을 담담하게 말해주었다. 예를 들어 학교는 시청의 허락을 받고 정문 앞 고가도로 밑의 작은 공원에서 체육수업을 했는데, 왜 동네 공원을 학교가 사용하느냐는 문제로 시비를 걸어왔다. 멀쩡한 대낮에 10여명의 일본인이 학교 앞에서 확성기로 비난하고, 행패를 부렸다. 전국에서 시위대를 조직해 학교 앞으로 행진을 하였다.
놀라운 일은 그런 현실이 지속되는 중에도, 먼 통학거리와 비싼 사립학교 수업비를 감수하면서까지, 조선학교를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단지 모국어와 문화 등 민족정체성을 지키려는 노력만으로 보기에는 커다란 희생이었다. 조선학교에 대한 차별이 시정되기는커녕 아베 정권들어 더욱 악화되었다. 이 가을에 우리가 기도하며 마음을 두어야 한다.
오사카에는 코리아기독교회관(KCC)이 있다. 재일대한기독교회 연합회는 50년 전에 회관을 세우고, 그동안 재일동포의 인권, 생활개선, 연대 활동을 도왔다. 이젠 그 역할을 일본 사회 속에서 외국인들과 소수자들을 돕는 일로 확대하고 있다. 그 모토가 ‘아픔을 가지고 나눈다’이다. 자신들이 아픔을 겪어 왔기에 남의 아픔에 대해 공감하는 것이다.
1)
오늘 본문에는 ‘천국과 지옥’이 등장한다. 지옥은 공감과 연민을 못 느끼는 냉정한 사람이 가는 곳이다. 적어도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우리 현실에서 천국과 지옥을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나, 그럼에도 천국과 지옥은 사람들의 관심사이다. 드라마로 만들어진 만화 ‘미생’에서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회사가 전쟁터라고? 밀어낼 때까지 그만두지 마라. 밖은 지옥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본문의 주제는 천국과 지옥이 아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이 하신 비유에는 ‘정직하지 않은 청지기, 불의한 재물, 하나님 보다 돈을 더 좋아하는 바리새인’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부자와 거지’로 분류된 나사로 이야기가 나온다.
천국과 지옥은 나사로의 운명에 대해 말할 때 소재로 등장한다.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니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한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천국과 지옥 이전에, 사람이라면 먼저 관심을 두어야 할 ‘인생의 가치’, ‘더 좋은 삶의 선택’에 대해 말씀하신다.
한 마디로 네가 지금이든, 장래든, 믿을 수 없는 죽음 이후든 더 나은 삶을 위해서라면 자비를 베풀어라, 연민을 가져라, 궁극적으로 네 삶이 지향하는 가치를 사랑으로 바꾸라는 것이다.
주인공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이다. 부자는 남들이 모두 부러워할 만큼 잘 살았다. 그의 삶을 이렇게 요약한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19).
아마 그 부자는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마 6:20)을 실천한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 집 대문 앞에 버려진 거지 나사로에게 조금의 자비를 베풀지 않은 것이 그 증거이다.
나사로는 거지이다. 그의 처지가 참 비참하다. 부자의 밥상에서 떨어질 부스러기에 의존했지만, 도리어 그의 몸에 난 헌데와 부스럼이 부잣집 개들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나사로의 이름은 ‘하나님이 도우신다’란 뜻이다. 이름에서 보듯 그는 한 개인이 아닌 모든 가난한 사람을 대표하고 있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난한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께만 도움을 기대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가난한 사람의 경건’에 대해 말한다.
모든 선한 이름의 대명사처럼 사용되는 ‘가난한 자’는 장차 죽은 후에 영원한 생명의 잔치에서 영예로운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마 8:11). 나사로는 죽어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 이와 반대로 그 부자는 화려한 장례식을 마친 후에 음부, 즉 ‘죽은 자들의 나라’에 들어간다.
살아있을 때 세상의 기준과 달리, 죽은 후 하늘의 기준은 두 사람의 모습을 확 갈라놓았다. 부자는 지옥을 연상시키는 불꽃 가운데 괴로움을 겪는 음부로 가고, 나사로는 천사들에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
아브라함은 부자의 하소연에 대해, 도무지 동의할 수 없는 상반된 처지에 대해, 이렇게 대답한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25).
어떻게 이런 결과를 낳았을까? 부자는 무슨 잘못을 했을까? 과연 인과응보, 자승자박의 문제일까? 이전에 예수님은 ‘한 부자의 비유’(눅 12:13-21)에서 그 부자의 재산이 문제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다만 문제의 본질인 ‘탐심, 무자비, 구제하지 않는 생활’에 대해 주목하신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부자의 탐심이 사람의 영혼에 어떤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말씀하신다. 그 부자처럼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21절) 모든 사람들에게 이 부자와 같은 비극적인 운명이 닥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이 천국과 지옥 이야기의 배경이다.
2)
예수님의 말씀은 죽음 이후가 아닌, 그 이전에 바로 지금의 문제라는 것을 일깨워 준다. 삶의 경계, 이편과 저편, 이승과 저승, 현세와 내세를 따지기 이전에 지금 생명의 가치, 진짜 부요한 삶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과연 죽음 이후는 어떤 것일까? 플로리다 도너 그라우는 이렇게 말하였다. “죽음은 당신의 가장 진실한 친구요, 당신의 가장 믿을 수 있는 충고자이다. 만일 당신이 당신 인생의 행로에 대해 이런 저런 의심을 품고 있다면, 인생의 올바른 방향을 위해 당신의 죽음과 상담하라. 죽음은 절대로 당신을 속이지 않을 것이다.” 죽음 이후를 미리 안다면 생전에 제대로 살 것이란 뜻이다.
평생 ‘쿨’하게 인생을 산 사람이 있었다. 쿨한 인생이 뭔가? 그의 기준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그때그때 제 기분에 따라 좋을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다. 그도 예고 없이 죽어서 베드로 앞으로 갔다. 베드로는 그가 평생 쿨하게 살았기에 천국과 지옥 중 선택하도록 배려하였다. 그는 평소처럼 죽어서도 쿨하게 천국과 지옥을 모두 가 보고 선택하겠다고 했다.
먼저 천국으로 갔다. 모두 밝은 얼굴로 찬양하는데, 참 행복해 보였다. 다만 좀 지루하게 느껴져 금방 싫증이 났다. 이번에는 지옥에 가보았다. 예상 밖에 네온이 반짝거리고, 멀리 카지노 광고판도 보였다. 여자들이 손짓하는 모습도 비쳤다. ‘역시 지옥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 그는 쿨하게 베드로에게 지옥을 가겠다고 말하였다.
이제 천사가 그를 지옥으로 안내하는데, 아까 보던 지옥과 느낌이 달랐다. 어두침침하고, 역겨운 냄새도 나고, 몸부터 거리낌이 들었다. 그가 항의하였다. “왜 아까 보던 지옥과 여기 지옥은 다릅니까?” 그때 천사가 말했다. “아까 본 지옥은 관광 비자로 가는 곳이고, 지금 가는 지옥은 영주권자가 가는 곳이라네.”
미리 알 수만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미 다 알고 있기에 스스로 그런 함정에 빠질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돈 문제만 얽히면 믿음이고, 분별이고 영적 안목이 흐려진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부자는 대개 인색한 사람이고,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이해관계만이 그의 판단기준이 된다. 그는 당장 손에 쥔 현금만을 신처럼 믿기에 보화를 하늘에 쌓아두지 못한다. 오죽하면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마 19:23)라고 하셨을까?
그 부자는 지옥에 가서 고통을 겪으면서야 비로소 자기 처지를 알았다. 그래서 늦었지만 아브라함에게 요청한다. 부자 자신은 생전에 미처 깨닫지 못했어도, 자기 다섯 형제만큼은 ‘내 꼴’이 나지 않도록 나사로를 자기 집으로 보내달라고 하였다. 만일 죽은 자가 그들에게 가면 회개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대답은 단순하다. 율법과 선지자의 말도 듣지 않는데, 하물며 죽은 자가 살아난다고 말을 듣겠느냐는 것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31).
나사로가 한 일은 별로 없다. 나사로가 구원을 받은 것은 단순이 이 세상에서 천대받던 소외 계층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그의 이름 ‘나사로’처럼 ‘하나님의 도우심’과 그 은총의 힘을 의지하였기 때문이다. 나사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다.
거지 나사로는 훗날 교회에서 ‘성 나사로’라고 불린다. 러시아정교회는 자신의 십자가를 가리켜 나사로 십자가라고 부른다. 그들은 자신을 나사로의 교회라고 자임하였다. 가난과 아픔도 하나님 앞에서 명예롭게 되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는 이 땅에서가 아닌 하늘의 평가를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다.
사람들은 어떻게 살까 이전에 천국과 지옥에 대해 관심이 많다. 예수님은 이미 말씀하셨는데 그 핵심인 달(삶의 가치)이 아닌 그 수단인 손가락(천국과 지옥)만 보려고 한다. 만약 우리가 죽음 이후에 대한 계획을 할 수 있다면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할지 그 의미를 정하는데 분명한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교양’을 자처하는 오늘의 교회는 더 이상 천국과 지옥을 가르치지 않는다. 현대인들에게 설득력이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신학자 리차드 니버는 그런 교회현상에 대해 이렇게 비판한다. “진노가 없는 하나님이,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죄가 없는 사람들을, 심판이 없는 천국으로 인도하였다.”
3)
사실 삶과 죽음의 경계의 문턱은 생각보다 아주 낮다. 흔히 사람들은 누구나 노후를 염려한다. 본문은 한걸음 더 나아가 은퇴 후의 계획이 아닌 ‘죽음 이후의 계획’에 대해 질문한다. 잘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여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거듭거듭 사람의 탐욕에 대해 경계하신다. 그것이 너를 심판한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24-25장을 보라. 세상의 심판 때에 임할 재난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 가지 말며”(마 24:17)라는 말씀이 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 재난의 때를 만나면 집 안의 귀중품이 무슨 소용이 있냐는 것이다. 거기에 미련을 두지 말고 급히 피난처를 찾으라는 의미이다.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진정으로 무엇이 더 소중한 지 깊이 깨달으라는 말씀이다.
사람들은 아무리 말해도 귀 담아 듣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입으로 하신 말씀, 즉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군가 살아나는 경우’(31)에도 그렇다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의 부활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부활 소식과 부활하신 분에 대해 무관심하다. 그 분의 말씀, 곧 새로운 삶, 삶의 방향전환, 회개에 대한 요구를 무심히 듣거나, 거부한다.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고, 섬기는 사람들은 올바른 인생길을 발견한다. 그러기에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보물은 창고나 은행구좌가 아닌, 하나님 나라임을 믿는다.
예수님은 부자와 거지의 비유를 통해 강조하신다. 아일랜드 어느 시인의 말처럼 “다른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이 사라지는 순간 인간은 무슨 짓이든 다 할 수가 있고, 따라서 세상은 지옥이 될 것이다”(브렌던 커넬리)라는 경고이다.
그러기에 내 인생을 더 나은 방향으로 고치라고 하신다. 함께 아픔을 나누는 곳에서부터 천국은 시작된다. 불행한 이웃에 대하여 소통, 공감, 연민할 때 천국은 시작된다.
천국의 길을 아는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약속한다. 우리의 육체는 시들어 없어질 들의 꽃과 같으나 영원히 시들지 않는 영광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썩을 몸에서 해방되어 영광의 자유에 이른다고 하신다(롬 8:21).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도서(12:1, 7)는 이렇게 말한다. 공동번역으로 읽는다.
“그러니 좋은 날이 다 지나고 ‘사는 재미가 하나도 없구나!’하는 탄식소리가 입에서 새어 나오기 전, 아직 젊었을 때에 너를 지으신 이를 기억하여라. ... 그렇게 되면 티끌로 된 몸은 땅에서 왔으니 땅으로 돌아가고 숨은 하느님께 받은 것이니 하느님께로 돌아가리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늘 개입하시고 간섭하셔서 이 땅에 사는 동안 날마다 부요한 생명과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첫댓글 최고의 상담자 죽음, 천국이 시작되는 지점, 경이감이 없는 세상, 하나님의 개입. 주님께 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