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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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회. 방황과 독서 편력
중편 세 편으로 구성된 1981년 장편소설 『젊은날의 초상』을 나는 ‘자연산’이라고 부른다. 절반을 넘지는 않겠지만, 내 직접 체험이 가장 많이 녹아 있는 작품 중 하나여서다.
이 소설의 3부 ‘그해 겨울’에서 작중 화자는 10년 전 경상북도 어느 산촌의 술집에 ‘방우’로 있던 시절을 회상한다. 방우는 당시 불목하니, 즉 땔나무를 베고 물을 긷는 허드레 일꾼을 뜻하는 보통명사였다.
소설가 이문열씨의 밀양국민학교 6학년 시절. 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작가다. 사진 왼쪽 윗편에 '희망이 크다 우리는'이라는 문구가 보인다. 사진 이재유
나는 실제로 방우 노릇을 한 적이 있다. 시기나 처한 상황도 소설과 비슷했다. 소설의 ‘나’는 도시와 학교를 떠나 강원도로 향한다. 광부가 될 작정이었다. 하지만 개인 탄광의 갱에 들어간 첫날 막장이 내려앉아 두 사람이 묻히는 장면을 목격하고 광부 노릇을 단념한다. 그다음 찾아간 동해안의 작은 어촌에서 고기잡이배를 타려 하지만 해적 같은 외모의 선주가 화자의 흰 얼굴과 매끈한 손을 살피더니 귀한 집 도련님은 돌아가 책이나 보라며 박대한다. 그래서 이르게 된 곳이 산촌, 그곳에서 방우로 일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색시 나오는 술집에서 ‘방우’ 노릇
실제의 나는 방우 노릇을 산촌이 아니라 고향 석보(경북 영양군 석보면)의 장터에서 했다. 당시 큰 형님이 여인숙 겸 술집을 차렸다. 소설에서처럼 색시가 있었다. 나는 술병 하나, 석유병 하나씩 꿰차고 아홉 개 방을 돌며 군불을 때곤 했다. 86년 교통사고로 숨진 큰 형님은 수완가였다. 실전에서 태권도보다 세다는 당수(唐手) 2단이었고, 깡패들과 어울렸다. 게다가 여론조사소 조사원증까지 갖고 있었다. 당시 여론조사소들은 업체들로부터 돈을 뜯거나 조사원증을 팔다 적발돼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하곤 했다. 사이비 사회단체로 지목돼 지탄받으며 70년대 초반까지 극성을 부렸을 것이다. 깡패 기질에 여론조사원증까지 갖췄으니 형님이 뜨면 시골 경찰서 지서 정도는 벌벌 떨었다. 경찰서 지서에 들어서면 순경이 일어나 경례를 올려붙였다.
탄광 이야기 역시 있었던 일이다. 영화에서처럼 다이너마이트에 불붙이고 급하게 빠져나오는 방식으로 폭파하는 일을 하면 신뻬이(초짜)에게도 돈을 많이 준다고 해서 친척이 있는 강원도의 탄광을 찾아갔는데 이미 전기를 이용한 뇌관 기폭으로 바뀐 지 오래라고 했다. 공교롭게 내가 찾아간 날 막장이 무너져 매몰된 광부의 아내가 우는 장면은 목격했지만 다행히도 그 광부가 죽지는 않았다. 나는 고기잡이배 일자리도 알아봤다. 뱃멀미 안 하느냐고 묻길래 심하다고 했더니 “치아라~” 해서 돌아왔다.
소설에서처럼 언제든 결단할 수 있게 치사량의 화공 약품을 가방에 넣고 다니지는 않았다. 청산가리는 흔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작은 연못 같은 곳에 풀어 고기 잡을 때 썼다. 그렇게 잡은 고기 먹고 탈 났다는 얘기는 못 들었다. 신경 써서 고기를 손질해서였을 것이다.
당시 나는 어렵사리 들어간 대학(서울사대 국어과)에서 한 학기도 버티지 못하고 귀향한 참이었다. 이듬해 봄, 다시 학교로 돌아갈 때까지, 집 나가 떠돌며 68년 가을에 겪었던 일들을 소설에 써먹은 것이다. 81년 8월 출간한 『젊은날의 초상』 작가 후기에 나는 이런 문장을 썼다.
비록 턱없는 감상과 애정 때문에 극적인 과장과 미화(美化)의 폐해를 입고 있긴 해도 이 갈피갈피에는 무슨 열병처럼 지나온 내 젊은날들이 영원한 그리움과 회한으로 숨 쉬고 있다. 앞으로 내가 문학적으로는 이보다 얼마나 더 완벽한 글을 쓰게 되든, 그리고 어떤 평자(評者)가 어떻게 평을 하든, 내 가장 큰 애착은 항상 이 책 위에 머무를 것이다.
안동고등학교 1학년 때. 맨 오른쪽이 이문열씨다. 사진 오른쪽 아랫편에 '영원한 벗'이라는 문구와 함께 '1965. 8.1'이라는 사진 촬영 날짜가 보인다. 사진 이재유
누군가의 분석처럼, 소설 안에 녹아 있는 작가의 주관적 서정성이 독자들에게 강하게 어필했기 때문일까. 『젊은날의 초상』은 내 대표작 『사람의 아들』이나 『삼국지』 같은 역사소설을 제외하면 내 소설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린 작품이다. 정치적 함의를 품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페미니즘 논란을 빚은 『선택』보다 많이 팔렸다.
절망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치열한 정열이었으며 구원이었다.
평론가 유종호 선생은 이런 문장을 콕 찍어 거론했다. 출발을 위한 출발이라는 순수충동, 단조로운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넘어 평범한 일상을 거부하는 반역, 일상생활의 산문을 비웃는 반역의 꿈으로서 ‘출발의 시(詩)’, 이런 맥락에서 읽혀 소설이 사랑을 받는 것 같다는 진단이었다.
그런 진단 만큼이나 젊은날의 나는 작은 성취일망정 애써 이루어놓은 것들로부터 한사코 떠나려 했다. 사범대라고 하지만 그래도 서울대인데, 70년 초 사법고시에 도전하겠노라며 훌쩍 떠난 뒤 결국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
작가에 도움 되는 전공으로 법학이 최고
사시 준비는 어쩌면 핑계에 불과했다. 장한 결심 끝에 떠나는 새로운 길이 사시라고 말하면서도 내심 사시가 궁극적인 도달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학교를 떠날 무렵 문학은 이미 나의 지상(至上), 종교, 전부라고 생각했고, 사시는 어쩔 수 없어서 문학으로 돌아온 것이라는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합격해야 하는 시험일 뿐이라고 여겼다. 사시 준비는 문학으로 가는 우원(迂遠)한 도정에 불과하다는 생각이었다.
막상 부딪쳐 보니 법학은 며칠의 공부 만에 질려버릴 만큼 방대했다. 더구나 사시를 핑계로 확보한 시간을 잡학과 습작에 유용했으니 합격할 리 만무했다. 법학 공부가 내 문학에 많은 것을 보태기는 했다. 철학과 신학 다음으로 천재를 많이 잡아먹었다는 학문답게 정확한 어휘 사용법과 논리의 중요성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요즘도 나는 문학에 도움 되는 전공을 묻는 사람들에게 법학을 추천하곤 한다.
서울 용두동에 있었던 서울사대 풍경. 1975년 관악캠퍼스로 이전할 때까지 이곳에 있었다. 사진 서울대 기록관
서울대를 떠난 건 학교에 대한 불만이 작용했다. 당시 서울사대는 문리대가 있던 혜화동과 동떨어진 용두동에 위치해 있어서 어딘가 대학 같지 않았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별문제 없이 통과했기 때문에 대학도 그러겠거니 여기셨는지 어머니도 큰 반대가 없으셨다.
반복되는 출분(出奔)의 원인은 보다 근원적인 데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우리 가족의 삶은 돌이켜 보면 거의 구걸에 가까운 적빈(赤貧) 속에 방치되다시피 한 경우가 많았다. 정들만 하면 떠나야 했다. 경찰에 소재 파악만 되면 언제 어떻게 잘못될지 모른다는, 어머니의 병적인 피해의식 때문이었다.
어느새 내 삶의 원형은 떠돌이였고, 존재의 양식은 외로움이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한사코 집이라는 울타리를, 정든 학교를, 틈만 나면 떠나려고 했던 것은. 학교에 돌아가기도 마땅치 않고, 집에 있자니 가족들의 시선이 따가워, 말하자면 해 질 녘에 길 떠났다가 겪은 일들이 『젊은날의 초상』에 나오는 일탈과 방황이었다.
무섭게 마시고 독설 퍼붓거나 훌쩍거려
10대 후반을 보낸 부산 시절도 지금 돌이켜 보면 쓸쓸하다. 박정희 집권 초기 ‘앰프촌 사업’이라는 것이 있었다. 쿠데타로 집권해 효과적인 공보 수단이 절실했던 박정희 정권은 적극적인 라디오 방송정책을 펼쳤다. 라디오를 통해 전국을 거미줄처럼 엮는다는 계획이었다. 문제는 가격이 비싸 라디오가 없는 가구가 주로 농어촌 지역에 수십만 가구가 넘는다는 점이었다. 앰프촌은 라디오가 있는 가정에는 앰프를, 없는 가정에는 스피커를 설치한 다음 유선으로 연결해 여러 가구가 동시에 같은 라디오 방송을 들을 수 있도록 하는 사업이었다.
안동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낭인(浪人)처럼 지내던 나는 우연치 않게 앰프촌 사업에 친구와 함께 끼어들었다. 밀양 중심가에서 40리가량 떨어진 산내(산내면)라는 곳에서 친구 형이 무슨 돈 버는 사업을 한다고 해서 친구 따라 한 몇달 지내다 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앰프촌 사업이었다. 선을 끌어다 앰프로 연결해 주고 한 달에 얼마씩 사용료를 받았다. 그 일을 도우며 돈을 벌지는 못했을 것이다. 밥 먹고 빈둥빈둥 놀며 지냈다. 그러다 때 되면 부산으로 돌아와 검정고시 준비하느라 나름 바빴을 것이다. 친구들이 어디 가자고 하면 정처 없이 따라갔다가 몇 개월 만에 돌아와 세상이 바뀌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하던 세월이었다.
1972년 김해의 배향고등공민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할 무렵. 왼쪽이 이문열 작가다. 사진 이재유
1972년은 내 인생의 가장 쓰라린 시기 중의 하나로 기억에 남아 있다. 사시마저 작파한 나는 김해에 있는 배향고등공민학교에서 잠시 선생 노릇을 하다 고향에 돌아와 있었다. 당시 내 생활은 건달이 따로 없었다. 술로 세월을 보냈다. 당시 외과의사 레지던트 엄종수씨와 자주 어울렸는데, 그는 무의촌이었던 고향에 공의(公醫)로 와 있었다. 유배지나 다름없는 산골이다 보니 그 역시 제대로 된 말벗이 있을 리 없었다. 나는 느지막이 일어나 나이든 마담이 커피를 타주는 다방에서 그를 만나 하루 일정을 짜곤 했다. 주로 천렵으로 결정됐다. 그렇게 잡은 물고기에 술을 곁들여 얼큰해진 그가 오후 진료를 위해 돌아간 진료소까지 따라가 그가 진료하는 모습을 구경한 적도 있다.
스물다섯의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아니었다. 군대 입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와 술 마시는 날이면 무섭게 마셨다. 원인 모를 분노에 떨며 세상을 향해 독설을 퍼붓거나 절망에 빠져 훌쩍거리기도 했을 것이다. 한번은 엄종수씨가 나를 이렇게 달랬다.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파초의 푸른 꿈이 있지 않아요?
당시 가수 문정선의 ‘파초의 꿈’이라는 노래가 유행하고 있었다. “파초의 푸른 꿈은 이뤄지겠지”라는 노래 가사가 나온다. 엄종수씨는 그 가사에 빗대 나를 위로한 것이다. 그와는 그 10년 후쯤 만난 적이 있다. 서울 영등포인가에서 개업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80년대 초반은 나도 작가로 데뷔해 한창 바쁠 때였다.
밀양에서의 고아원 체험도 잊히지 않는 한 장면이다. 밀양국민학교를 졸업할 무렵 큰 형님과 어머니는 귀향을 결심했다. 하지만 고향 석보에는 중학교가 없었다. 여동생과 함께 밀양에 남아 밀양중학교를 다니며 고아원에서 지냈다. 서너 달 머물렀을 것이다. 끼니를 해결하며 공부할 수 있었지만 어린 마음에 죽을 지경이었다. 어머니를 졸라 중학교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당시 고아원 체험을 바탕으로 얽은 작품이 77년 대구의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인 단편 ‘나자레를 아십니까’이다.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다
고아원이 교회 계통인 건 맞지만 나자레가 아니라 베다니 고아원이었다. 소설에서처럼 원생들 사이의 위계는 엄격했고 학대도 심했지만, 어머니가 교회 집사였던 나와 여동생은 그런 질서에서 예외였다. 교회 계통이라고 하지만 쏟아져 들어오는 구호품을 정직하게 원생들에게 나눠줬던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순기능은 분명했다. 정량은 아니었을지언정 강냉이죽이나 밀가루 수제비를 거르지 않고 먹을 수 있었다. 양면적이라고 할까. 세상이 그렇게 막 가지는 않는구나, 그런 신념이 생길 만 했다. 군대의 기합이 비합리적이긴 하지만 군대라는 조직이 원활하게 돌아가려면 어느 정도 그런 부분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내가 맞닥뜨려야 했던 제도 교육에서의 이탈도 내게는 그런 경험이었다. 괴로웠지만 얻는 것도 있었던. 학교를 다니지 않아 생긴 여가에서 문학과의 친화(親和) 과정이 비롯됐다는 점은 확실하다. 국민학교 2학년 때 읽은 학원사 문고판 『걸리버 여행기』로 시작한 나의 독서 편력은 오래잖아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같은 세계문학으로 이어졌다. 거대한 산맥 도스토옙스키를 거쳐 현란한 만연체의 토마스 울프를 섭렵한 다음 부산에서 보낸 낭인 시절 막바지에 니체와 사르트르에 이르렀다. 이른바 ‘데칸쇼(데카르트와 칸트, 쇼펜하우어)’에 도전했다가 무참하게 깨진 게 그 무렵이다. 서울사대에 입학할 때는 누구에게도 쳐지지 않는 독서인이 돼 있었다.
에디터
관심
작가
1948년 서울 출생.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 ‘새하곡’, 제3회 오늘의작가상 중편 ‘사람의 아들’로 등단. 『사람의 아들』 『젊은 날의 초상』 『황제를 위하여』 『변경』 등 3000만 부 이상 판매. 동인문학상·이상문학상·동리문학상, 은관문화훈장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