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善의 굴레
녀석은 여름 내내 나를 고민에 빠트렸다. 내가 제일 아끼는 꿩의다리꽃 봉오리를 녀석의 몸에서 짜낸 실로 꽁꽁 싸매 꽃을 피우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날이 갈수록 더 많은 꽃봉오리가 녀석의 실뭉치에 묶여 숨을 쉬지 못했다. 하얀 실뭉치에 싸인 꽃봉오리들은 원래 색인 보랏빛을 잃고 하얗게 질려 창백한 모습이 되었다. 녀석은 지나가는 작은 벌레들이 걸려들기를 바래 꿩의다리 연약한 꽃봉오리와 가느다란 줄기를 묶어 둥근 망을 쳐놓고는 하루에도 여러 번 망 수리를 했다. 내가 가끔 망을 건드리면 쏜살같이 어디론가 숨어버리고는 했다.
정원에는 여러 가지 야생 꽃들이 있지만 내가 제일 아끼고 이뻐하는 꽃은 꿩의다리꽃이다. 귀국 후 북한산 밑에 집을 지으며 가장 먼저 심은 꽃도 그 꽃이다. 꿩의다리꽃은 내 어린 시절 고향의 향기를 풍겨준다. 나는 그 향기에 취해 어린 시절의 기억을 뒤적인다. 달빛이 비치면 보라색의 작은 꽃잎은 사방으로 푸른빛을 내뿜는다. 그 푸른빛은 달빛을 짊어진 채 신비로운 아우라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이렇게 예쁜 꽃이 거미줄에 엉켜 제대로 자라지를 못하고 날로 쇠약해져 가는 것을 보며 잘 버텨달라고 응원하지만, 꽃은 내 응원을 받을 줄 모른다. 잘 견뎌 내년 여름에는 건강하고 멋진 꽃을 피워보자고 나는 꿩의다리꽃과 약속했다. 내년 여름을 기다리기 전에 거미를 내치는 편이 훨씬 간단하지만 나는 그러지를 못한다. 거미의 속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거미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의 속성을 알게 되었던 건 한 유명 미술가의 조각작품 덕분이었다.
나는 퇴직 후 서양화를 공부했다. 그 인연으로 리움 삼성미술관에서 전시작품을 해설해 주는 도슨트docent로 3년 정도 봉사를 한 적이 있다. 리움 미술관 정문 곁에는 미술관의 문지기처럼 10미터 크기의 거대한 거미 모양의 청동조형물이 버티고 서 있었다. 이 형상은 프랑스 태생의 추상표현주의 미술가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의 ‘마망’이란 이름의 유명한 조각작품이었다. 마망은 어머니라는 뜻의 프랑스어 표기다. 자신의 어머니를 생각하며 모성애를 주제로 만든 조각작품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직물에 여러 가지 색실로 그림을 짜 넣는 태피스티리tapestry로 일을 했다. ‘바람난’ 남편이 돌보지 않는 자녀들을 어머니는 그 일을 하며 돌보았다. 어머니의 그런 모습은 자식을 위한 거미의 희생적 모습과 유사하다고 생각하여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을 청동거미로 형상화하였다고 한다.
‘마망’에 대한 관람객들의 많은 관심에 좀 더 깊이 이 작품을 이해하고 해설하기 위하여 조각의 형체인 거미를 공부했다.
놀랍게도 거미는 곤충이 아니고 절지동물로 분류된다. 다리가 8개이기 때문이다. 거미줄은 같은 굵기의 강철보다 강한 천연섬유이다. 우리나라에만 600여 종의 거미가 서식한다. 그중 강한 모성애를 보여주는 거미들도 여러 종이 있다. 특히 무당거미, 벨벳거미, 비탈거미, 염낭거미 등은 모성애가 대단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들은 새끼거미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먹이로 내준다. 그 외에도 거미의 모성애적 행동은 눈물겨울 정도이다. 우리들의 어머니와 그 마음이 닮아 있다.
우리 집 정원에서 내가 제일 아끼는 꽃, 그 꽃의 봉오리를 자신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녀석도 하필이면 강한 모성애로 이름난 무당거미였다. 노란색 바탕에 검은색 줄이 가로 쳐진 통통한 배는 알을 품고 있었고 그 모습이 안쓰러워 녀석을 보살펴 주고도 싶었다. 그러나 거미줄에 묶여 죽어가는 꽃을 바라보는 마음도 편치는 않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인데…’하면서 한숨만 쉬었다. 거미, 그 녀석을 내치면 꽃봉오리가 살아나겠지만 녀석을 내치면 그와 새끼들은 어떡할 것인가. 나는 가끔 의義로움과 이利로움 사이에서 이로움의 유혹에 넘어가든가 타협하곤 했다. 그러나 우리네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수천 개의 알을 품고 있는 녀석을 내치면 생명에 대한 죄의식 같은 미안함으로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죽어가는 꽃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없지 않다. 아니, 미안함보다는 제때 피어난 온전한 꽃을 볼 수 없다는 아쉬운 마음이 더 컸다.
쉽게 처리할 수도 있는 미물과의 일일 수 있겠으나. 어느 쪽을 선택하든 선택에 대하여서는 죄의식을 짊어져야 했다. 내 선택에 대하여 남들은 관심도 없겠지만 나의 양심과 도덕은 분명 죄를 물을 것이 확실했다. 어느 한 편도 선택하지 못하고 하늘만 쳐다보는 자신이 못마땅했다. 못마땅한 자신과 양심이 다퉈도 보았지만, 그때마다 승자가 없었다.
하나의 선善을 ‘선택’하기 위하여 다른 하나의 선을 포기해야 한다. 이러한 도덕적 딜레마 안에서 늘 죄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실존의 한계를 가슴 아프게 실감하며, 나는 ‘선택’ 사이에서 방황하다 올여름을 다 놓쳐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