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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초희(허난설헌)
하늘거리는 창가의 난초 가지와 잎 그리도 향그럽더니,
(盈盈窓下蘭 枝葉何芬芳)
가을 바람 잎새에 한번 스치고 가자 슬프게도 찬 서리에 다 시들었네.
(西風一被拂 零落悲秋霜)
빼어난 그 모습은 이울어져도 맑은 향기만은 끝내 죽지 않아,
(秀色縱凋悴 淸香終不死)
그 모습 보면서 내 마음이 아파져 눈물이 흘러 옷소매를 적시네.
(感物傷我心 涕淚沾衣袂)
-감우(感遇)] 허난설헌
조선중기 천재 여류시인
위는 조선중기 대표적인 여류시인 허난설헌(1563~1589)의 시 [감우]이다. ‘감우’란 느낀 대로 노래한다는 의미이다. 허난설헌은 시 속에 나오는 난초같이 살다간 시인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당호가 난설헌(蘭雪軒)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조선은 여성에 대해 그다지 우호적인 나라는 아니었다. 고려시대 비교적 분방하던 여성들의 삶은 가부장 중심의 가족관계를 중시하는 성리학적 이념체계 안에서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점차로 위축되었다. 여성들의 사회활동은 극히 제한적이었으며 대부분의 여성들은 집안을 지키고 후세를 낳아 기르는 역할만을 맡아 이것에 순응하며 살아야 했다. 그러한 속에서 여성이 자기 이름으로 시를 쓰고 이를 세상에 알린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러기에 남성 중심의 가치체계가 확고해지던 조선중기, 허난설헌이라는 여류시인의 등장과 그 삶의 궤적은 그녀의 천재성과 함께 당시 여성들의 고통을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허난설헌의 존재가 독특한 것은 그녀가 사대부가의 여인이었으며, 그녀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것이 당시 강조되던 현모양처로서의 부덕을 갖추었다거나 성공한 자식을 두었기 때문이 아니라, 올곧게 그녀가 창작한 시의 탁월함 때문이었다는 데 있다. 허난설헌은 왜곡된 형태이긴 하나 제한적으로 사회활동이 자유로워 문재를 뽐내는 것이 가능하던 황진이 같은 기생도 아니었고, 화가로서 탁월한 재능이 있었지만 율곡 이이 같은 훌륭한 자식을 길러낸 것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는 신사임당처럼 부덕을 상징하는 여인도 아니었다. 그녀는 오로지 자신의 시로서 그 이름을 남겼고 훗날 그녀의 시는 중국과 일본으로 건너가 많은 지식인 문인들에게 격찬을 받으며 오랫동안 애송되었다.
비교적 자유로운 가풍 속에서 성장
허난설헌은 조선중기 문신으로 동과 서로 사림들이 붕당된 후 동인의 영수가 된 허엽의 딸로 태어났다. 양천 허씨이며 어렸을 때 이름은 초희였다. 당시 여성들이 거의 제대로 된 이름을 가지지 못하였던 데 비해 허난설헌이 초희라는 어엿한 이름을 가진 것으로 볼 때 그녀의 집안은 당대 여타 사대부 가문에 비해 여성에게 관대하였던 것 같다. 허엽은 동인 중에서도 북인계에 가까운 인물로 북인들은 대개 그 사상적 기저가 성리학 이념 하나에만 고착되지 않고 여러 분야에 비교적 열려 있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허엽 가문의 학문에 대한 열린 가풍은 딸 허난설헌에게 남자와 똑같은 교육기회를 주었으며, 아들들에게는 자유로운 사상을 가질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당대 뛰어난 문인으로 평가받은 허성, 허봉이 허난설헌의 오빠이며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허균이 허난설헌의 남동생이다.
가족 중에서 허난설헌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친 사람은 둘째 오빠 하곡 허봉으로, 허봉은 여동생의 문재를 일찍이 알아보고 이를 독려하였다. 그는 자신의 친구이자 당대의 가장 뛰어난 시인 이달에게 여동생의 교육을 부탁하였다. 이달은 뛰어난 문학성을 가졌으나 양반가의 서자로 태어나 벼슬길이 막힌 불운한 시인이었다. 그는 당시풍(唐詩風)의 시를 잘 지어 선조 때의 삼당파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는데 허난설헌과 허균 남매를 가르쳐 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어렸을 때부터 천재성을 드러낸 허난설헌은 나이 8세 때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이라는 한시를 지어 주변의 어른들을 놀라게 하였다. 시는 신선세계에 있는 상상의 궁궐인 광한전 백옥루의 상량식에 자신이 초대받아 그 상량문을 지은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이 시에서 어린 허난설헌은 현실의 어린이의 한계와 여성의 굴레를 모두 벗어버리고 가상의 신선세계에서 주인공이 되는 자신을 과감히 표현하여 신동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이렇듯 허난설헌은 훗날 조선후기 문인 서포 김만중이 논하였듯이 가문과 스승의 격려 속에서 조선시대 규중의 유일한 여류 시인으로 성장하여 갔다.
불행한 결혼생활
허난설헌은 15세에 김성립과 결혼했다. 김성립은 안동 김씨로 그녀보다 한 살이 많았다. 김성립은 5대가 계속 문과에 급제한 명문 가문의 자제였다. 당시 사림들이 동인과 서인으로 붕당된 상황에서 동인은 또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분리되기 시작하였는데 김성립은 남인계에 속한 인물이었다. 당시 남인은 북인보다 사상적으로 성리학에 더 고착되어 있었고 보수적이었다. 자유로운 가풍을 가진 친정에서 가부장적인 가문으로 시집 온 허난설헌은 시집살이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양반가의 여성에게조차 글을 가르치지 않았던 당시의 분위기 속에서 시를 쓰는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허난설헌의 시어머니는 지식인 며느리를 이해하지 못했고 갈등의 골은 깊어갔다. 남편 김성립은 그런 그녀를 보듬어주기보다는 과거공부를 핑계 삼아 바깥으로 돌며 가정을 등한시하였다. 뛰어난 오빠와 남동생을 보고 성장한 허난설헌에게 평범한 김성립은 성에 차지 않는 인물이었을지도 모른다. 8세 때 이미 신동이라고 소문난 아내를 김성립은 버거워했다. 허난설헌의 남동생 허균은 훗날 자신의 매형인 김성립에 대해 “문리(文理)는 모자라도 능히 글을 짓는 자. 글을 읽으라고 하면 제대로 혀도 놀리지 못한다”고 평하였는데, 이 평에서 알 수 있듯이 김성립은 무뚝뚝하고 별다른 재기는 없는, 고집 세고 고지식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허난설헌은 결혼 초기에 바깥으로 도는 남편을 그리는 연문의 시를 짓기도 하였으나, 어느 순간 김성립과의 결혼에 회의를 느끼고 남성 중심 사회에 파문을 던지는 시를 짓기도 하였고, 때로는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신선의 세계를 동경하며 현실의 불행을 잊으려 하였다. 그러는 사이, 허난설헌의 친정은 아버지 허엽과 따르던 오빠 허봉의 잇따른 객사로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허난설헌은 두 명의 아이를 돌림병으로 잇달아 잃고 뱃속의 아이를 유산하는 불행을 당한다. 이때의 슬픔을 그녀는 [곡자]라는 시로 남겨놓았다.
여성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는 시어머니의 학대와 무능하고 통이 좁은 남편, 몰락하는 친정에 대한 안타까움, 잃어버린 아이들에 대한 슬픔 등으로 허난설헌은 건강을 잃고 점차 쇠약해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시로서 자신의 죽음을 예언했다.
碧海浸瑤海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靑鸞倚彩鸞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芙蓉三九朶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紅墮月霜寒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그 예언은 적중해 허난설헌은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지듯이 27세의 나이로 목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남편 김성립은 허난설헌 사후 남양 홍씨와 재혼하였지만 곧이어 터진 임진왜란에서 의병으로 싸우다 전사하였다.
중국과 일본까지 알려진 허난설헌의 시
허난설헌은 죽을 때 유언으로 자신이 쓴 시를 모두 태우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녀가 남긴 시는 족히 방 한 칸 분량이 되었다고 한다. 허난설헌의 시집은 그녀의 유언에 따라 유작들을 모두 태웠다. 그러나 허난설헌의 동생 허균은 찬란한 천재성을 가진 누이의 작품들이 불꽃 속에 스러지는 것이 안타까워 그녀가 친정 집에 남겨놓고 간 시와 자신이 암송하는 시들을 모아 [난설헌집]을 펴냈다.
1606년 허균은 그 시집을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들에게 일람하게 하였다. 당시 명나라 사신 주지번은 허난설헌의 시를 보고 매우 경탄하였다. 그리고 이를 중국에 가져가 중국에서 [허난설헌집]을 발간하였다. 그녀의 시는 일약 중국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되고 중국의 문인들이 앞을 다투어 그녀의 시를 격찬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애송되던 허난설헌의 시는 18세기에 가서 동래에 무역차 나온 일본인의 손에 의해 일본으로 전해졌다. 그녀의 시는 1711년 일본의 분다이야 지로[文台屋次郞]에 의해 간행되어 크게 인기를 끌었다.
난설헌의 시는 조선후기 사대부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재평가되어 그녀를 규방의 유일한 시인이자 뛰어난 천재로 인정하였다. 다만, 중국에서 발간된 그녀의 시들 속에 중국의 당시를 참고한 듯한 부분이 일부 발견되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허난설헌의 작품인가 하는 논란이 있기도 하였다. 그녀의 시집이 동생 허균에 의해 간행된 만큼 편집에 있어서 일부는 허균의 생각이 반영되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조선중기, 여성에게 가장 혹독했던 시기에 주옥같은 시를 남기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그녀의 뛰어남을 가릴 수는 없을 것이다.
글 김정미/시나리오 작가, 역사 저술가
글쓴이 김정미씨는 대학원에서 역사를 전공,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관심이 많다. 역사 속 인물들의 면면에서 영화적 캐릭터를 발견하고 시나리오를 옮기는 작업을 하는 한편 역사관련 글쓰기도 병행하고 있다. [역사를 이끈 아름다운 여인들], [천추태후-잔혹하고 은밀한 왕실 불륜사], [어린이 역사 인물사전] 등의 책을 썼다.
추한(秋恨 가을의 정한)
絳紗遙隔夜燈紅(강사요격야등홍) : 붉은 깁창 저 넘어 밤등불 붉은데
夢覺羅衾一半空(몽각나금일반공) : 비단 이부자리에서 잠 깨니 옅자리가 비었구나
霜冷玉籠鸚鵡語(상냉옥롱앵무어) : 서리기운 차가웁고 새장에는 앵무새 울고
滿階梧葉落西風(만계오엽락서풍) : 뜰에 가득한 오동나무 서풍에 잎이 지는구나
추야곡2秋夜曲2 (가을밤의 노래)
玉漏微微燈耿耿(옥루미미등경경) : 물시계 소리 희미하고 등잔불은 반짝거리는데
罹幃寒逼秋宵永(이위한핍추소영) : 휘장 안으로 추위 스며들고 가을밤은 길기만 하다
邊衣裁罷剪刀冷(변의재파전도냉) : 변방으로 보내는 옷 다 짓으니 가위는 차갑고
滿窓風動芭蕉影(만창풍동파초영) : 창에 가득 바람 불어오니 파초 그림자 어른거린다
추야곡1秋夜曲1 (가을밤의 노래)
蟪蛄切切風瀟瀟(혜고절절풍소소) : 쓰러라미 절절하고 바람은 소소한데
芙蓉香褪永輪高(부용향퇴영륜고) : 연꽃 향기 바래고 가을달은 높기만 하다
佳人手把金錯刀(가인수파금착도) : 가인이 금가위 손에 잡고
挑燈永夜縫征袍(도등영야봉정포) : 등불 돋운 기나긴 밤에 길 떠날 옷깁는다
송하곡적갑산(送荷谷謫甲山 하곡 오빠가 갑산에 귀양가기에)
遠謫甲山客(원적갑산객) : 멀리 갑산으로 귀양가는 나그네
咸原行色忙(함원행색망) : 함경도로 가는 행색 황망하기만 하다
臣同賈太傅(신동고태부) : 신하의 심정은 고태부나
主豈楚懷王(주기초회왕) : 임금은 어찌 초회왕이리오
河水平秋岸(하수평추안) : 강물은 가을 언덕에 평평히 흐르고
關雲欲夕陽(관운욕석양) : 변방의 구름에 석양이 물들려한다
霜風吹雁去(상풍취안거) : 서릿바람 불어와 기러기 날아가니
中斷不成行(중단불성행) : 마음이 아파서 더 이상 못쓰겠구나
감우2(感愚2 어리석었어)
古宅晝無人(고택주무인) : 고택에는 낮에도 사람이 없어
桑樹鳴鵂鶹(상수명휴류) : 뽕나무에는 부엉이와 올빼미만 운다
寒苔蔓玉砌(한태만옥체) : 옥돌 섬돌엔 차가운 이끼와 넝쿨만 무성하고
鳥雀棲空樓(조작서공루) : 빈 누각엔 새들만 깃들어 있구나
向來車馬地(향래거마지) : 지난 날 수레와 마차 오가던 곳
今成孤兎丘(금성고토구) : 지금은 토끼 언국이 되었구나
乃知達人言(내지달인언) : 이제야 알겠구나, 선인의 하신 말씀
富貴非吾求(부귀비오구) : 부귀는 내가 구할 바가 아니라
상봉행2(相逢行2 만남의 노래)
相逢靑樓下(상봉청루하) : 청루에서 서로 만나서
繫馬垂楊柳(계마수양류) : 수양버들 아래서 말 매놓고
笑脫錦貂裘(소탈금초구) : 웃으며 비단옷과 갓옷 벋어
留當新豊酒(유당신풍주) : 신풍주를 사서 같이 마셨다네
상봉행1(相逢行1 만남의 노래)
相逢長安陌(상봉장안맥) : 장안의 거리서 서로 만나
相向花間語(상향화간어) : 꽃밭 속 찾아가 속삭인다
遺却黃金鞭(유각황금편) : 황금 말채찍 흘려두고서
回鞍走馬去(회안주마거) : 안장에 앉혀 말 달려 돌아갔도다
감우(感愚 어리석었어)
盈盈窓下蘭(영영창하란) : 하늘하늘 창 아래 난초잎
枝葉何芬芬(지엽하분분) : 가지와 잎이 어찌 그리도 향기로운가
西風一披拂(서풍일피불) : 하뉘바람이 한번 스치면
零落悲秋霜(영락비추상) : 시들어버리니 가을서리처럼 서글퍼라
秀色縱凋悴(수색종조췌) : 빼어난 고운 빛 시들어 버려도
淸香終不斃(청향종불폐) : 맑은 향기는 끝내 없어지니 않는구나
感物傷我心(감물상아심) : 느끼는 풍물마다 마음 아파서
涕淚沾衣袂(체루첨의몌) : 눈물을 흘러 옷깃을 적시는구나
추한(秋恨 가을날의 한)
縫紗遙隔夜燈紅(봉사요격야등홍) : 비단 창문 저 멀리 등잔 불 밝은 밤
夢覺羅衾一半空(몽각나금일반공) : 꿈에서 깨어보니 비단 이불 한 곳이 텅비어있네
霜冷玉籠鸚鵡語(상냉옥롱앵무어) : 서릿발을 차고 옥초롱에는 앵무새 소리
滿階梧葉落西風(만계오엽락서풍) : 불어오는 서풍에 섬돌 가득 오동잎 떨어지네
기하곡(寄何谷 오빠 하곡에게)
暗窓銀燭低(암창은촉저) : 어두운 창에 은촛불 나직하고
流螢度高閣(유형탁고각) : 반딧불은 높은 누각을 날아다닌다
悄悄深夜寒(초초심야한) : 근심스런 깊은 밤은 차가워지고
蕭蕭秋落葉(소소추낙엽) : 쓸쓸한 가을은 낙엽만 지는구나
關河音信稀(관하음신희) : 오라버니 계신 변방에서 소식 없어
端憂不可釋(단우불가석) : 근심스런 이 마음 풀 수가 없어요
遙想靑運宮(요상청운궁) : 아득히 오빠 계신 청운궁을 생각하니
山空蘿月白(산공나월백) : 산은 비어있고 담쟁이 덩굴에 달빛만 밝다
고객사(賈客詞 바다 상인의 노래)
掛席隨風去(괘석수풍거) : 돛을 올리고 바람 따라 가다가
逢灘郞滯留(봉탄랑체류) : 여울 만나면 그곳에 머문다네
西江波浪惡(서강파랑오) : 서강의 풍량이 거세어지니
幾日到荊州(기일도형주) : 몇 일이 지나야 형주 땅에 닿을까
貧女吟(빈녀음 가난한 처녀의 노래)
手把金剪刀(수파금전도) : 손에 바늘을 잡고
夜寒十指直(야한십지직) : 밤이 차가워 열 손가락 곧아온다
爲人作嫁衣(위인작가의) : 남을 위해 혼수 옷 지을 뿐
年年還獨宿(연년환독숙) : 해마다 독수공방 신세라네.
送荷谷謫甲山(송하곡적갑산 갑산으로 귀양가는 오빠 하곡에게)
遠謫甲山客(원적갑산객) : 멀리 갑산으로 귀양가는 나그네 우리 오빠
咸原行色忙(함원행색망) : 함경도 고원 길에 행차가 바쁘리라
臣同賈太傅(신동고태부) : 귀양가는 신하는 충신 가태부와 같다지만
主豈楚懷王(주기초회왕) : 귀양보내는 입금이야 어찌 어리석은 초회왕이랴
河水平秋岸(하수평추안) : 강물은 가을 강 언덕에 잔잔하고
關雲欲夕陽(관운욕석양) : 변방 함경도의 산 구름 석양에 물들겠지
霜楓吹雁去(상풍취안거) : 서릿발 찬 바람에 기러기 나는데
中斷不成行(중단불성행) : 중간에서 못가고 돌아 왔으면
閨情(규정 여자의 정)
妾有黃金釵(첩유황금채) : 제에게 황금 비녀 하나 있는데
嫁時爲首飾(가시위수식) : 시집 올 때 머리에 꽂았던 것입니다
今日贈君行(금일증군행) : 오늘 그대의 행차에 드리오니
千里長相憶(천리장상억) : 천리 먼 길에 오래도록 기억해 주소서
채연곡(采蓮曲 연꽃을 따며 부르는 노래)
秋淨長湖碧玉流(추정장호벽옥류) : 가을은 맑고 긴 호수엔 벽옥 같은 물 흐르고
荷花深處繫蘭舟(하화심처계난주) : 연꽃 우거진 곳에 아름다운 목련배 매여 있어요
逢郞隔水投蓮子(봉랑격수투연자) : 임을 만나 물 사이로 연밥을 던지다가
遙被人知半日羞(요피인지반일수) : 멀리 사람들이 알아보아서 반나절이 부끄러웠소
야야곡(夜夜曲 갚은 밤의 노래)
玉淚微微燈耿耿(옥루미미등경경) : 옥 같은 눈물 찌금찌금 , 등잔불 깜박깜박
羅瑋寒幅秋宵永(라위한폭추소영) : 비단 휘장 싸늘하고 가을밤은 길기도 하다
邊衣裁罷剪刀冷(변의재파전도냉) : 변방에 보낼 옷 다 짓고 나니, 싸늘해진 가위
滿窓風動芭蕉影(만창풍동파초영) : 바람 따라 움직이는 파초 그림자만이 창을 채우네
규원( 閨怨 여자의 원망)
月樓秋盡玉屛空(월루추진옥병공): 달 밝은 누각에 가을이 다 가는데 나 홀로 빈 방에 있고
霜打廬洲下暮鴻(상타여주하모홍): 서리 내린 갈대섬에는 저녁 기러기가 찾아듭니다
瑤琴一彈人不見(요금일탄인부견) : 예쁜 거문고 타보아도 임은 보이지 않고
藕花零落野塘中(우화영락야당중) : 연꽃은 들판 못으로 다 떨어지는구나
강남곡(江南曲 강남에서)
人言江南樂(인언강남낙) : 사람들 강남을 즐거운 곳이라 하지만
我見江南愁(아견강남수) : 나는 강남의 근심을 보았습니다
年年沙浦口(년년사포구) : 해마다 모래벌 포구에서
腸斷望歸舟(장단망귀주) : 단장의 이별하고 고향 가는 배를 보았답니다
[출처] 허초희(허난설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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