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대사의 〈향로봉에 올라登香爐峯〉
만국의 도성은 개미집과 같고 / 萬國都城如垤蟻
천가의 호걸은 초파리와 같아라 / 千家豪傑若醯鷄
창에 가득 밝은 달빛을 베고 누우니 / 一窓明月淸虛枕
무한한 솔바람 소리 곡조도 많아라 / 無限松風韻不齊
-한국고전db 이상하역
〈향로봉에 올라서(登香爐峰)〉 휴정(休靜)
萬國都城如垤蟻 모든 나라의 도읍들은 모두 개미의 둑과 같고,
만국도성여질의
千家豪傑若醯鷄 여러 집안의 영웅호걸들 다 초파리 같구나.
천가호걸약혜계
一窓明月淸虛枕 온 창문에 달 비치는데 허심하게 누워있으니,
일창명월청허침
無限松風韻不齊 한 없이 불어오는 소나무 바람,
무한송풍운부제 그 운치 가지가지로 구나.
-졸역
*등향로봉(登香爐峰): 각운 鷄, 齊 상평성 제(齊) 운. 향로봉은 금강산과 설악산 사이에 있는 태백산맥에 속하는 높이 1,296m의 산 이름.
* 휴정(休靜 1520 - 1604): 이름 있는 승려이며, 임진왜란 때 승려들을 모아 왜군에 대항한 승군장이기도 함. 속성은 최씨, 이름은 여신(汝信), 호는 청허(淸虛)인데, 법명이 휴정, 별호는 서산대사(西山大師). 평안도 안주(安州) 출신으로 10세에 고아가 되고, 서울에 올라와서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승려가 되었다. 임진란 때 노구를 이끌고 전국의 승려들을 동원하여 의병을 조직하였고, 평양 탈환에 공로가 컸다. 선조는 그에게 팔도선교도총섭(八道禪敎都摠攝)이라는 직함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원적암에 돌아가서 85세로 입적하였다. 역시 승군장으로 이름이 높았던 사명대사 유정(惟政) 같은 사람을 제자로 두었으며, 우리나라 임제종(臨濟宗)의 시조인 보우(普愚)의 7대손이 된다. 저서로 《청허당집(淸虛堂集)》 4권 2책 등이 있음. -《한백》 25 -715.
*향로봉香爐峰: 이 시에서는 금강산에 있는 향로봉을 말하지만, 같은 봉우리 이름이 중국이나 우리나라에 많이 보임. 향로봉을 소재로 읊은 시 중에는 다음에 보는 이태백의 시가 가장 이름이 높다.
이백(李白)이 일찍이 여산 폭포를 바라보고 “향로봉에 해가 비춰 붉은 노을이 생겼는데, 멀리 폭포를 보니 냇물이 거꾸로 걸린 듯. 나는 물줄기 곧장 삼천 자를 쏟아져 내리니, 아마도 은하수가 하늘에서 떨어진 듯.〔日照香爐生紫煙, 遙看瀑布掛前川. 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落九天.〕”이라고 읊어 천고 시인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고전db 각주정보에서 인용.
*만국도성萬國都城: 여러 제후나라의 수도들. 《오호 십육국의 역사十六國春秋》: “혁련발발[大夏의 무열황제]이 삭방에다 바야흐로 큰 성을 건축하였는데, 다 완성하자 다음과 같이 글을 내렸다: ‘짐이 바야흐로 천하를 통일하고서 천하에 군림하게 되었다. 이 도성을 통만統萬이라고 이름 짓는 것이 마땅하리라’赫連勃勃, 於朔方築大城. 既成, 下書曰: ‘今都城已建, 宜立美名. 朕方統一天下, 君臨萬國都城, 宜以統萬為名”
*질의垤蟻: 개미 둑. 보통 “의질”이라고 하나 여기서는 위아래 글자를 바꾸어 사용하였음. 비슷한 뜻으로 의봉, 의루, 의혈 같은 말도 있음. 《주자어류(朱子語類)》 권105 경재잠의 문답에… 의봉에 대해서 질문을 받고는 “즉 개미 둑으로 북방에서는 의루라고도 하는데, 작은 언덕 모양을 하고 있다. 말하자면 개미굴 입구에 흙이 불룩 솟아 나와서 둔덕처럼 되어 있는데, 그 사이의 길이 구불구불하여 마치 좁은 골목길처럼 되어 있다. 말을 타고서 의봉 사이를 절선한다는 옛말이 있는데, 이것은 의봉 사이의 통로가 구불구불하고 협소한데도 말을 타고 그 속을 제대로 꺾어 돌면서 말 달리는 절도를 잃지 않는 것이니 이렇게 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蟻垤也, 北方謂之蟻樓, 如小山子, 乃蟻穴地. 其泥墳起如丘垤, 中間屈曲如小巷道. 古語云: 乘馬折旋於蟻封之間, 言蟻封之間, 巷路屈曲狹小, 而能乘馬折旋於其間, 不失其馳驟之節, 所以爲難也〕”라고 하였고, 또 《시경》 빈풍(豳風) 동산(東山)의 ‘관명우질(鸛鳴于垤)’이라는 시구에 대해서, 왕안석(王安石)이 처음에는 질(垤)을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언덕으로 해석하고는 의봉(蟻封)이라는 해설을 믿지 않다가 뒤에 북방에 가서 직접 눈으로 확인한 뒤에 자기의 설을 고쳤다는 이야기도 소개하고 있다.-고전db 각주정보
*호걸豪傑: 《사기·효문제본기史記孝文帝紀》: “무릇 진나라가 그 정권을 잃음에 옛 제후의 후손들과 각지의 호걸들이 아울러 떨치고 일어나서 사람 사람들마다 스스로 천하를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일만 명이나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끝내 천자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것은 유씨 였다.夫秦失其政, 諸侯豪傑竝起, 人人自以為得之者, 以萬數. 然卒踐天子之位者, 劉氏也”
*혜계醯雞: 술독 속에서 생겨나 술독 안을 날아다니는 날벌레로, 소견이 아주 좁은 사람을 비유한 말이다. 공자가 일찍이 노담(老聃 노자)을 만나보고 나와서 안회(顔回)에게 이르기를 “나는 도에 대해서 마치 항아리 속의 초파리와 같았구나. 부자(노자)께서 그 항아리의 덮개를 열어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천지의 위대한 참된 모습을 모를 뻔하였구나.〔丘之於道也 其猶醯雞與 微夫子之發吾覆也 吾不知天地之大全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莊子 田子方》-고전db 각주정보
*운부제韻不齊: 송나라 송기宋祈 〈망선정에서 본대로 적음望僊亭書所見〉. “신령스러운 북 소리 끊어지지 않고, 나무꾼들의 노래 운취 똑 같지 않네神鼓聲無歇, 樵歌韻不齊”
[해설]
서산대사의 명성과 더불어 이 시가 더러 사람들이 입에서 회자된 것 같으나, 몇 년 전에 동국대학교 출판부에서 나온 국역 《청허당집》에서는 위와 같은 제목으로 된 이 시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혹시 이 시가 서산대사의 시가 아닌 게 아닌가하고 의심하여 보기도 하였으나, 서애 유성룡 선생의 글[승인 능시]이나, 월사 이정구 선생의 글[휴정선사 비문]. 성호 이익선생이나, 허균 선생의 저술에, 모두 이 시에 대한 언급이 있음으로, 서산대사의 작품이 맞는 것으로 보고자 한다.
월사선생은 이 시를 대사가 30세 이후 양교판사兩敎判事라는 나라에서 주는 고승 직첩을 버리고서 금강산 향로봉에 올라가서 지은 것으로 적고 있으나, 서애선생은 묘향산에서 적은 것이라고 해서 저작 장소는 일치하지 않는다. 묘향산에도 향로봉이라는 봉우리가 있기 때문이다.
주석에서 밝힌 바와 같이 중국의 여산 향로봉에서 이태백이 쓴 향로봉 시가 워낙 유명하고, 또 향로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봉우리들도 중국이나, 우리나라에 여러 곳에 있었기 때문에 “향로봉에 올라서”라는 제목 쓴 시도 더러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지 간에 이 시는 매우 잘 된 시로 보인다.
처음에 나오는 “만국도성”이라는 말의 출전을 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중국역사에서도 가장 혼란스러웠던 “오호 16국” 시대에 다섯 외래 민족이 세웠던 여러 단명한 왕조 중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등장하였던, 흉노족으로 나라를 세웠으나 겨우 20여년밖에 지탱하지 못하고 말았던 대하라는 나라의 혁련발발[무열황제]이라는 자가, 일만 제후 국가들의 도읍지[萬國都城]를 스스로 모두 통괄[統萬]하여야 한다는 뜻으로 자기가 이룩한 황성은 “통만”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우쭐거렸다던 옛 일이…
이렇게 높은 산 위에 올라서서 생각하여 보니, 온 세계 처처에 세워진 수많은 나라들의 도읍이라는 것도, 한갓 개미들이 열심히 쌓아 올린 둑이나 비슷하게 가소롭고, 보잘 것 없는 것 같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 다음 구에 보이는 “천가 호걸”이라는 전고가 어디 있는가 찾아보니, 꼭 “천”이라는 숫자를 호걸이란 말 앞에 놓은 말은 쉽게 찾아낼 수 없으나, 오히려 여기서도 “만”이라는 숫자를 놓을 만한 전고는 하나 찾아서 앞의 주석에서 소개하였다. 진나라가 무너지고 한나라가 들어서려고 할 때 온 천하 사방에서 스스로 황제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궐기한 사람[호걸]들이 무려 만 명이 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수천, 수만을 헤아리는 영웅호걸들이 별 식견도 없이 권력을 향하여 우글거리는 꼴이 마치 술 단지나 초 병에 자생하여 우굴거리는 초 파리 떼나 다를 바가 없이, 보잘 것 없고 한심하게만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울을 떠나 이 높은 산위에 올라와서, 조그마한 암자에서 온 창에 비치는 밝은 달을 맞아들여 놓고서, 맑고 허심한 마음으로 모든 긴장을 풀고 한가롭게 누어있으니 소나무 밭에서 일어나는 바람 소리가 끝없이 들려오는데, 거기서 일어나는 높고 낮고, 길고 짧은 여러 가지 음향이 온 밤을 두고 가지가지로 달라지며 마치 천상에서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는 것 같이 감미롭고 신비하고, 유쾌하게 들리고 있다.
이러니 개비 둑 같은 것을 지키려고 아우성치는 왕후장상들 이라는 자들이나, 술 냄새 같은 권력 냄새를 맡고 몰려드는 영웅호걸이라는 자들이 얼마나 한심하고 가련한가?
이 시는 4구가 모두 4(2/2)//3 조로 흘러가는 자수율字數律을 잘 지키고 있으며, 제 3구의 앞 부분 ‘일창명월’은 시간이나 장소를 나타내는 부사어로 사용되었으나, 나머지 3 구는 모두 앞의 4자는 주어, 뒤의 3자는 술어로 사용되었고, 다시 1, 2구는 서로 대구對句가 되고 있지만 3, 4구 중 앞의 구는 … 때문에, 다음 구에 가서 …하게 된다는 식으로 연결되어, 의미상으로 연결되는 연면구連綿句가 되고 있다.
다만 첫 구에 개미 둑이라는 뜻으로 흔히 사용하는 의질이라는 말을 여기서는 ‘질의’라고 앞뒤를 바꾸어 썼는데, 이 경우에는 그 다음에 나오는 ‘혜계’와 대를 정확하게 맞추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전달하려고 하는 의미도 매우 분명하지만, 시어의 구사나 작법도 매우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좋은 시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선생님!
건강하십시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