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깡패입니다"… '동카포네' 이정재의 최후>
내일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4.18 고려대생 피습사건'이 일어난지 60년이 되는 날이다.
1960년 4월 18일, 고려대 학생 3000여 명은 "민주역적 몰아내자"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당시 광화문에 있던 국회의사당(현재 서울시의회 건물) 앞까지 행진해 연좌농성을 벌였다.
고려대생 습격한 정치 깡패들
고대생들은 국회의사당 앞 시위를 평화롭게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던 중 종로4가 천일백화점 앞에서 고바우와 돼지, 망치, 김삼수, 권상사 등 동대문사단 소속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았다.
100여명의 깡패들은 쇠망치, 몽둥이, 부삽, 벽돌 등 각종 흉기로 학생들을 기습 공격했고 24명의 학생이 크게 다쳤다.
깡패들이 학생들을 무차별 폭행했다는 기사와 폭행당해 처참하게 쓰러진 학생들 모습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신문에 실리면서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이 사건을 지휘한 깡패는 임화수였고, 임화수의 보스는 동대문의 알카포네라고 불린 '동카포네' 이정재다.
김두한 추천으로 경찰이 되다
'정치깡패' 이정재는 어떤 인물일까?
경기도 이천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이정재는 인근 지역에서 알아주는 '씨름왕'이었다.
전국 규모 여러 씨름대회에 출전, 상금으로 나온 황소 10마리를 모조리 차지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힘이 장사였다.
이정재는 중앙고보를 거쳐 휘문고보를 졸업한 후 신흥대학교(경희대학교의 전신)에 진학할 만큼 당시로서는 엘리트였다.
그는 태평양전쟁 발발 후 징용을 받고 반도의용정신대로 피신하는데 이때 '협객' 김두한과 인연을 맺는다. 야당의 경호대장을 자처했던 김두한과는 후에 정치적으로 번번이 대립한다.
이정재를 눈여겨 본 김두한의 추천으로 그는 경찰관이 된다. 이정재는 일제강점기 경찰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혀가던 중 해방을 맞는다.
시라소니의 은혜를 원수로 갚다
이정재는 해방이 되자 경찰을 그만두고 동대문 '광장시장'에서 포목점을 경영하는 장사꾼이 된다.
이 무렵 6.25 전쟁이 터진다. 전쟁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북한군이 서울까지 단숨에 밀고 내려와 도시 전체를 장악했다. 이정재는 미처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북한군에 체포된 그는 과거 경찰관 경력이 문제가 되어 죽음의 위기를 맞는다.
이정재는 우역곡질 끝에 간신히 목숨을 건진 뒤 부산으로 내려간다. 그는 지역 깡패들과 시비가 붙어 집단 린치당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때 당대의 유명한 주먹으로 1인 싸움의 최강자였던 '시라소니'(본명 이성순)의 도움을 받아 살아남는다. 이때 두 사람은 의형제를 맺는다. 그리고 서울로 복귀한다. 후에 이정재의 동대문사단은 시라소니를 린치해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
서울 동대문의 '주먹 보스'
동대문 시장으로 돌아온 이정재는 고민 끝에 '주먹'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1953년 동대문 상인연합회를 조직해 회장에 취임한다.
종전의 주먹들은 구역 내 상인들에게 다양한 명목으로 '삥'을 뜯고 폭력을 일삼았다. 그러나 이정재는 다른 방식으로 구역과 조직을 관리했다.
동대문사단 깡패들은 양복을 입었다. 그들은 상인들에게 폭력을 일삼기는커녕 되려 상인들의 애로사항을 바로바로 접수했다. 그리고 깔끔하게 애로를 해결해주는 것으로 상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물론 이면에는 시장 형성 당시 ‘광장 주식회사’로부터 헐값에 사들인 땅을 상인들에게 높은 값에 판매해 취한 폭리 등 이권이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이정재와 동대문파는 그 세력을 더욱 확장해 나갔다. 이정재는 '동대문시장의 황제'로 불렸다.
자유당 정권의 '정치 깡패'
이정재는 거칠것이 없었다. 그에게는 동대문사단 깡패 조직을 비롯해 문화예술계를 접수한 '영화계 황제' 임화수, 호형호제하던 경무대 경찰서장 곽영주가 있었다.
이러한 인연을 바탕으로 그는 자연스럽게 자유당에 입당해 감찰부 차장이 된다.
그리고 정권의 2인자 이기붕과 인연을 맺는다. 그를 '아버지'라 부르며 모든 지시와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동시에 정치권에서 자신의 세력을 구축해 나갔다.
사사오입 개헌 당시 국회 방청객 난동, 자유당 창당동지회 방해, 단성사 저격사건 등 정치테러의 배후에는 늘 이정재가 있었다.
이기붕에 뺏긴 이천 지역구
부(富)와 권력을 쥔 이정재는 정치를 하고 싶었다. 그는 고향인 이천에서 국회의원 출마를 계획했다.
이정재는 부하들에게 "길가다가 이천 사람이 곤란을 겪고 있으면 발 벗고 도와줘라"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서울 내 지지율이 바닥이었던 이기붕이 수도권이면서 만만한 지역구를 물색하던 도중 하필 이천을 선택하게 된다.
이정재는 이런 이기붕에게 이천 지역구를 반강제적으로 빼앗기면서 양보를 하게 된다.
이때 이기붕과의 마찰로 말미암아 그는 이기붕의 아내 박마리아의 미움을 사게 된다. 권력자의 버림을 받게 된것이다. 그러면서 치솟던 이정재의 권력도 이때를 기점으로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정치깡패' 이정재의 굴욕
이정재는 4·19혁명 당시 정치테러에 자신의 수하들이 가담한 탓에 스스로 검찰에 출두해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그러나 이듬해 5.16 군사정변 세력에 다시 체포되었다. 5.16 군사정변은 하루아침에 권력의 방향 추를 확 뒤집어 놓았다.
자유당 정권 당시 나는 새도 떨어트렸다던 이정재는 군부에 구속 된 지 나흘 만에 시민들의 구경거리로 전락했다. 혁명재판을 앞두고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군인들의 감시를 받으며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습니다"라고 적힌 플래카드와 함께 조리돌림 당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당시 박정희 군사정부는 시라소니 린치 사건, 단성사 저격 사건, 고려대생 습격 사건 등 이정재가 관여한 수많은 범죄를 재수사해서 혁명재판에 넘겼다.
유지광의 의리, 임화수의 배신
이정재는 결국 1961년 5월 21일, 혁명재판부에 기소되어 범죄단체 수괴로 인정받고 사형 판결을 받는다. 재판 도중 임화수는 그를 배신했고, 유지광은 의리를 지켰다.
이정재는 “나도 잘못은 있기에 억울하단 말은 안 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긴 임화수 등을 겨냥한 말이었다.
그리고 10월 19일, 서울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그의 나이 44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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