釜山 갈맷길

[鏡文]

갈맷길 이야기 속을 걷다 <1> 홍티와 아트팩토리의 만남
포구에 문화가 정박하면 '스토리텔링'이 시작된다

	공장으로 둘러싸인 홍티포구의 콘크리트 제방을 김수우(왼쪽) 시인과 이지훈 박사가 걷고 있다. 전문가들은 50곳이 넘는 부산의 포구에 문화와 예술 조형물을 설치하면 갈맷길(부산 해안길) 그린웨이의 훌륭한 거점이 될 수 있다고 조언한다.
	관련기사 부산의 명품 `갈맷길` 이야기속을 걷는다

포구(浦口)는 강·바다와 인간의 첫 교감이다. 부산 해안선 갈맷길(306.2㎞)의 어귀이기도 하다. 그 옛날, 뱃머리의 짐꾼 '가대기'가 퍼뜨린 민초들의 삶은, 오늘도 포구와 갈맷길에 전설처럼 흐른다. 사연없는 길이 있을까. 근대사의 질곡이 묻어나지 않는 길은 잊혀진다. 길에 녹아든 역사와 문화도 죽는다.

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은 "포구는 삶 그 자체다. 스토리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제주올레 13코스는 모두 포구를 관통한다. 갈맷길의 관문인 포구에 신화와 현대사를 아우르는 '양념'을 쳐야 하는 이유다.

지난 10일 부산 700리 바닷길에 이야기의 혼을 불어 넣는 첫 여행을 떠났다. 학계에서 한국해양대 구모룡(동아시아학) 교수와 이지훈(철학) 박사가, 문화계에선 김수우·권정일 시인이 아름다운 동행에 나섰다.

 

 

 

 

■존재감 잃은 콘크리트 포구

부산 사하구 하단포에서 길을 잡는다. 기묘하다. 낙동강 하굿둑에서 강변대로를 타고 달리는 괴정2호교가 바다로 나아가는 유일한 통로. 나머지 3면은 아파트다. 도심 포구의 비애다. 어부들은 안개 낀 날 가락타운의 불빛을 보고 포구를 찾는다. 장림·보덕포 역시 공장과 아파트에 둘러 쌓였다. 배를 대는 콘크리트 제방에는 나무 한 그루 없다.

인문학 카페 '백년어'의 주인장 김수우 시인이 혀를 찬다. "부산항 개항 시기부터 구한말까지 명지에서 생산된 소금을 전국으로 실어나르던 영화의 자취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요. 문화는 고사하고 사람 냄새도 맡기 힘드니…."

포구는 막혔지만 바다는 도도하다. 을숙도 갈대 습지에서 뻗은 삼각주가 맹금머리~ 백합등~ 도요등 순서로 가지를 친다.

	몰운대 산책로를 걷고 있는 권정일·김수우 시인, 이지훈 박사, 한국해양대 구모룡 교수(왼쪽부터).

갈맷길이 제주올레가 될 순 없을까. 올레 13코스를 들여다보니 공통점이 하나 있다. 1코스(시흥초등학교~광치기 해변)부터 13코스(무릉2리~용수포구)까지 모두 포구를 지나친다는 점이다. 여행자들은 포구에서 쉬면서 '올레메뉴'를 즐기고 이야기를 듣는다.

반면 부산 포구는 삭막하다. 콘크리트 속에 파묻혀 존재감조차 잃었다. 풀리지 않는 고민을 안고 '놀멍 쉬멍' 걸었더니 어느덧 홍티다. 김권철 어촌계장이 "무지개(虹)꼴 마을"이라고 일러준다.

달걀형이던 홍티 세 마을 가운데 두 마을은 철거되고 지금은 윗동네만 남았다. 이육사의 시 '절정' 마지막 구절이 떠오른다. '겨울은/강철로 된/무지갠가/보다.' 공교롭게 홍티 포구는 무지개공단의 강철공장으로 둘러 쌓였다.


■홍티를 그린웨이 문화 거점으로

	홍티와 무지개 공단 기계단지 사이에 있는 아트팩토리 인 다대포 전경.

홍티 포구에서 몇 걸음 떼니 복합예술공간인 '아트팩토리 인 다대포'가 나온다. 무지개공단을 거점으로 한 창작 스튜디오다. 고철덩어리와 금속음이 지배하는 황량한 공간에 예술촌이라니…. 역설의 공간이다. '놈놈놈'이란 제목의 전시회에 강철로 제작된 로봇 작품이 눈길을 끈다.

청년 작가 3인의 작품을 둘러보던 이지훈 박사가 갑자기 무릎을 친다. "바로 이거예요. 홍티 선착장을 공공 미술프로젝트 전시장으로 바꾸는 겁니다. 조형 예술품을 갖다 놓으면 공단이라는 특성도 자연스레 살릴 수 있어요. 버려진 포구에 현대예술이 결합된 스토리텔링이 탄생하는 거지요. 도심에 쫓겨난 '주변화의 상징'이 걷기의 문화거점으로 변신하는 겁니다." 바닷길과 예술의 통섭(通涉)을 통해 '그린워킹-문화혁명'의 가능성을 모색하자는 뜻이다.

'아트 팩토리 인 다대포' 진영섭 대표의 반응이 궁금했다. "감천2동 달동네를 '꿈을 꾸는 부산의 마추픽추'로 만들자는 제안이 문화체육관광부의 '2009 마을미술 프로젝트'에 선정됐어요. 오는 9월까지 조형예술작품 10점을 설치해 걷고 싶고 머물고 싶은 동네를 만들 겁니다. 만약 부산시가 포구를 조형예술의 거리로 만드는데 나선다면 문화계에선 대환영이지요. 어민들과 걷기 마니아들이 동시에 윈윈할 수 있는 전략입니다. 지금부터 심도 깊은 논의를 해야 합니다."

재개발은 꿈도 못꾸는 감천2동과 포구의 처지는 비슷하다. 부산 50여 곳의 포구를 '갈맷길 그린웨이' 거점으로 리모델링할 순 없을까.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구모룡 교수는 "낡은 섬유 방적공장을 예술가들에게 내놓아 문화예술도시로 거듭난 일본의 가나자와는 대표적 모델이다. 포구라고 못할 게 무엇이냐"고 되물었다.


■갈맷길에 인문학의 상상력을

다대포 해수욕장이 붐빈다. 최고 55m까지 물줄기를 쏘아올리는 음악분수의 영향이다. 16세기까지 섬이었던 몰운대(沒雲臺)는 낙동강에서 내려온 흙과 모래가 쌓이면서 육지와 연결됐다. 정상에 오르니 '구름에 빠진 섬'이라는 이름이 딱 들어맞는다. 동호섬~쥐섬~동섬~모자섬(경도)~팔봉섬~솔섬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몰운대에서 바닷길을 따라 2㎞쯤 걸으면 다대포항이다. 3시간 남짓 걸었더니 갈증이 밀려온다. 조개구이를 파는 음식점에 자리를 잡았다. 막걸리가 몇 순배 돌았다. 이지훈 박사가 "문화는 상징이다. 포구에는 부산의 역사가 살아 숨쉰다. 갈맷길의 성공은 스토리텔링에 있을 것"이라고 말을 꺼냈다.

이에 대해 김 시인은 인문학의 역할을 꼽았다. "문화예술가들이 그린웨이의 그랜드 디자인 개념을 제시하면 밑그림은 도시계획가와 설계사들이 맡는 시스템이 필요해요. 제주올레나 지리산 숲길이 민간 자원봉사자들의 손에서 일궈진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권정일 시인은 자신의 첫 산문집 '치유의 음악-시인이 읽어주는 음악 스캔들'(북인)을 들려준다. "불세출의 영웅 오디세우스를 울린 것은 괴물 같이 버티고 선 공포의 적군도 우뢰처럼 쏟아지는 적의 화살이 아니라 '음유시인의 노래'였다고 해요. 문학과 이야기가 깃든 그린웨이는, 좋은 음악처럼, 치유의 능력이 있어요."

불타는 화로에서 열심히 조개를 굽던 구 교수가 화룡점정을 찍는다. "길이 돈을 버는 세상이다. 잘 다듬어진 갈맷길에 이야기만 곁들이면 관광객이 넘쳐 날 거다. 그들의 지갑을 열게 만드는 것은 포구를 기반으로 한 스토리텔링과 문화일 것이다." 하단포에서 다대포까지 13㎞. 밋밋할 것 같던 구간이 갑자기 생기가 돌았다.


◆낙동강 하구의 자연 상징

- 화명동~몰운대까지 학의 전설이 흐른다

낙동강 하구는 자연 상징의 집합처다. 학이 뛰놀고 거북이가 헤엄쳤다는 전설이 유난히 많다. 부산의 학 상징을 연구하고 있는 이지훈(철학) 박사는 "갈맷길의 1차 스토리텔링은 풍부한 토속신앙과 신화의 발굴에서 출발해야 한다. 여기다 문화예술을 결합하면 훌륭한 상품이 된다"고 제안했다.

우선 부산 북구 대천천 계곡을 경계로 남쪽으로 뻗은 상학산(上鶴山·상계봉)은 학이 양 날개를 펴고 비상하는 듯한 형상이다. 화산(華山) 암봉과 마애석불(磨崖石佛)로 유명한 병품암 능선이 늠름한 날개 역할을 한다. 화명동 수정마을에는 학사대(學士臺)가 있다. 토박이들은 상학산을 상계봉이라고도 부른다. 산 정상의 바위가 닭의 볏을 닮아 새벽이 가장 먼저 찾아온다는 뜻이다.

사상구 덕포동에도 학과 신선의 전설이 흐른다. 사상초등학교 뒤편의 하강선대(할매당산)와 부산지하철 덕포역 주변의 상강선대(할배당산)는 매년 음력 12월1일 신선이 내려와 목욕을 하고 돌아간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신선의 상징은 학이다. 학장동이란 지명도 낙동강변의 모래펄에 학처럼 귀한 새들이 찾아온다 하여 붙여졌다.

하굿둑 건설 전 국제적인 두루미 월동지였던 을숙도 습지나 승학산에도 학의 전설이 서려 있다. 조선 선조시대 동래부사인 이춘원은 한시 '몰운대'에서 이렇게 적는다. '호탕한 바람과 파도 천리요 만리/ 하늘가 몰운대는 흰구름에 묻혔네/ 새벽바다 돋는 해는 붉은 수레바퀴/ 언제나 학을 타고 신선이 온다'.


※ 특별후원 : 부산은행, 부산농협, 화승그룹

이노성 기자 nsl@kookje.co.kr

  입력: 2009.07.15 21:28

ⓒ 국제신문(www.kookje.co.kr)

갈맷길 이야기 속을 걷다 <2> 송도 해녀와 붕장어회
갯내음이 늙은 해녀의 그리움과 버무려지다

	부산 공동어시장 뒤편 해안길에 서면 연근해어업 전진기지인 남항과 남항대교가 한 눈에 들어온다. 그린워킹 답사에 동행한 이지훈 박사, 김수우 시인, 구모룡 교수(왼쪽부터).

시인 천상병(1930~1993)에 얽힌 일화 하나. 1960년대 부산 송도 암남포구와 자갈치를 왕복하던 도선은 천상병의 '호화 요트'였다. 막걸리 한잔에 갈매기를 벗삼아 하루 종일 신선놀음 해도 누구 하나 말리지 않았다. 내리고 다시 타지 않는 이상 뱃삯은 한번만 주면 됐기 때문. 가난이 '직업'인 천재 시인은 뱃머리에선 황제가 되기를 꿈꿨다. 나폴레옹처럼, 바다를 향해 손을 뻗어 '진격' 신호를 내렸다. 선주가 "애도 아니고 왜 이러십니까"라며 말렸다는 '증언'은 지금도 전설로 남아 있다. 서울 살던 천상병은 틈만 나면 부산에 내려와 죽치곤 할만큼 부산과 인연이 남다르다.

천상병이 즐겨다녔다는 부산 다대포~송도해수욕장~자갈치 해안길을 찾았다. 한국해양대 구모룡(동아시아학) 교수는 "경상도 사투리가 비릿한 포구의 내음과 뒤범벅되고 등대와 해녀와 갈매기가 뒤섞여 마치 아름다운 세상에서 소풍을 가는 듯한, 그래서 갈맷길(부산 해안길 306.2㎞)에 스토리의 생명력을 불어넣는 코스"라고 소개했다.


■부산해녀, 제주해녀

갯가에 오른 해녀가 칼을 잡는다. 갓 잡은 담치가 금세 황금빛 속살을 드러낸다. 문어가 수족관 탈출을 감행하지만 어림없다. 갈고리에서 버둥대다가 펄펄 끓는 솥단지로 직행. 갓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새 색시가 "신랑 몸보신 할 거 없능교?" 하며 기웃댄다. 전복 세 마리와 소라 한 마리가 2만 원에 팔렸다. 구 교수가 해녀들 사이에 슬그머니 자리를 잡는다.

"할매, 언제부터 물질 했능교?"

"세상에 공짜는 없데이." 부산 서구 송도해수욕장에서 52년간 물질을 했다는 홍태육(72·암남어촌계 소속) 씨가 눙을 친다. 암남어촌계가 운영하는 포장마차에서 담치 한 접시를 먹는 조건으로 '계약'이 성사됐다. "내사 열아홉부터 물에 안 들어갔나. 한창 나이에 이쁘게도 못하고, 그때는 많이 울었다 아이가. 지금 생각하면 잘 배웠능기라. 이 나이에 돈도 벌고 운동도 할 수 있는 일이 어데 흔하나." 지당하신 말씀이다. 일흔에 돈을 버는 평생직업은, 청년 실업자들에게 언감생심이다.

그린워킹에 동행한 이지훈(철학) 박사는 "제주해녀들의 부산 이주는 단발령과 연관이 있다"고 귀띔한다. 일제시대 단발령이 시행되면서 제주 말총으로 갓을 만들던 해녀들이 생활고 때문에 고향을 등졌다는 것이다. 홍 씨가 맞장구를 친다. "부모님도 제주를 떠나 부산으로 왔다 아이가. 부산 해녀들의 고향은 대부분 제주가 맞다."

현재 부산의 해녀는 1057명. 대부분 60~70대의 고령들이다. 50대는 손으로 꼽을 정도. 부산시 김종범 수산정책과장은 "신규 진입이 거의 없다. 곧 해녀들의 대가 끊길 수도 있다"고 걱정했다. 그런데도 부산 해녀사를 정리한 기록은 드물다. 이대로 잊혀지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 이 박사는 "단발령이 국가 인구이동의 촉매가 됐다. 부산해녀는 제주해녀와는 또 다른 근대사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며 "암남공원 산책로를 걷고 포구에 당도한 갈맷꾼들이 해녀들의 물질을 보고 그네들이 갓 잡은 싱싱한 해산물을 즐기며, 포구의 역사를 듣는 풍경을 한번 상상해 보라"고 했다. 다행히 부산시는 연말까지 7억 원을 투입해 기장군 동백·어촌계에 해녀 탈의장을 만든다고 한다.


■국내 1호, 최초, 그리고 등대

	부산 서구 암남공원과 모지포 앞바다에서 물질을 끝내고나오는 암남어촌계 해녀들.

문: 국내 최초 공설 해수욕장은?

답: 송도해수욕장

문: 붕장어(아나고) 회의 원조는?

답: 송도라는 설이 있다

용두산은 부산의 개항기(1876~1910) 일본인 전관거류지였다. '자갈이 많은 갯가'인 자갈치는 일본인이 해수욕을 즐기던 장소. 1913년 부산거류 일본인들은 포화상태인 자갈치 대신 송도에 국내 1호 공설해수욕장을 개장한다. 송도 해녀들은 "우리가 아나고 회를 처음 만든 원조"라고 주장했다. 사실일까. 생선회 박사인 부경대 조영제(식품공학전공) 교수에게 물었다. "붕장어를 회로 즐기는 국가는 우리나라 밖에 없어요. 그런데 언제, 어디서 처음으로 먹었는지에 대한 연구는 전무해요."

향토사학자 최해군(82) 선생은 "갈맷길에 녹아든 역사의 발굴이 곧 스토리텔링이다. 해녀들의 대가 끊기기 전에 그네들의 삶과 역정을 되볼아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송도 앞바다에서 52년간 물질 했다는 해녀 홍태육 씨.

송도해수욕장을 벗어나려는데 2층짜리 흰색 여관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1940년대 건축된 덕성관(德成館)이다. 1960년 부산군수기지사령부 초대 사령관으로 부임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즐겨찾던 곳이다. 바다를 보니 검정·노랑·검정으로 구분이 된 등대가 서 있다. 공식 이름은 '거북섬 동방위 표지'. 등대를 기준으로 동쪽 바다는 항해할 수 있지만 서쪽인 육지 방향은 장애물이 많아 항해를 금지한다는 뜻이다. 동방위 표지 또한 암석 위에 설치됐다.

횟집촌과 송도아랫길을 따라 부산 공동어시장 옆 남부민포구에 닿았다. 연근해 어업전진기지답게 등대가 유독 많다. 다대포항에서도 빨간등대와 하얀등대가 즐비했다. 바다에서 항구 방면으로 볼 때 오른쪽에 설치된 빨간등대는 선박이 표지의 왼쪽으로 항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좌현표지인 하얀등대는 반대의 의미.


■먹고 마시고 웃고…진한 사람내음

	그물을 손보는 다대어촌계 어민들.

남부민 포구~자갈치는 수산물의 메카. 전국 최대의 연근해 수산물 위판장인 부산공동어시장에서 위판된 싱싱한 해산물 음식점도 즐비하다. 걷기 마니아라면, 이른 새벽 조업을 마치고 입항하는 어선들과, 경매사들의 마술같은 손놀림을 놓쳐서는 안된다. 냉동창고와 바다 사이에 난 선착장 길을 걷는 즐거움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 충무동 재래시장과 자갈치~남부민동까지 형성된 포장마차도 입을 즐겁게 한다.

해양문학가이자 원양어선 선장인 이윤길(50) 씨의 시 '유산이 없는 바다'가 떠오른다. '물고기 살점으로 신용카드 메우려고/ 무섭게 몰아치는 바람 속에 그물 내리다가/파도 속에서 힘주어 조타륜을 돌리다가/ 후드득 후드득 선교 유리창 우박 쏟아지는 소리에/ 나는 유산이 없다고 중얼거리네/ 따뜻한 유산이 없는 바다…'

전쟁터같은 망망대해에서 생사의 기로에 선 순간, 아이들에게 물려줄 자갈논 하나없는 신세를 한탄한 내용이다. 오늘도 그들이 목숨걸고 잡아올린 생선이 우리 식탁에 오른다.

거리에 내걸린 간판 이름들이 토속적이다. 도심을 점령한 영어 이름은 드물다. 이곳 간판은 김수우 시인의 '큰길'에도 등장한다.

	송도해수욕장의 동방위 표지 등대.

'대동반점 등대다방 선원모집 부민전당포 항구양행 만물상회 대림냉동 박씨철물 명성슈퍼 운명상담 한마음분식 둥지수산 어촌실비 매일낚시 신풍소개소 백만불양복 부광꽃집 진양천막 광영사진관 신미세탁….

비린내 얼룩덜룩한 간판들/ 나도 당신도 잘 어울릴 것 같은 그 이름들 따라// 유난히 많은 신호등을 건너/ 선창과 공동어시장이 종일 쏟아내는 비늘을 신고// 하루에 한번 하는 반성처럼 기도처럼/ 송도 아랫길을 지나갑니다/얼룩덜룩한 내가/ 세상에서 제일 깊은 바다를 지나갑니다.

등대, 해녀, 시, 바다, 재래시장…. 송도 암남공원에서 자갈치까지는 불과 2시간 남짓한 걷기코스지만 실로 없는 게 없다. 넘쳐나는 이야기 구슬을 갈맷길이란 목걸이에 꿰야 할 차례다.


◆ 장엄한 항만 풍경이 눈아래…숨은 명품길 두송반도

	두송반도에 서면 다대포항과 감천항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김수우 시인이 다대포항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갈맷길(부산 해안길)의 가장 큰 적은 항만이다. 컨테이너가 해안길을 독점하거나 보안구역으로 지정된 탓이다. 부산 사하구 두송반도는 '접근 불허'의 항만을 비교적 가까이서 볼 수 있는 명품 그린웨이 코스로 꼽힌다.

다대활어위판장에서 길을 잡는다.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다대포구 끝자락에서 나즈막한 야망대를 넘어서면 다대여객부두가 나온다. 부산아시안게임을 기념해 만든 통일아시아드공원과 등대도 볼거리. 도시두송아파트 201동과 202동을 끼고 돌면 두송반도 초입을 알리는 간판이 보인다. (주)대우건설의 사유지라고 적혀 있다. 숲길을 벗어나면 오른쪽으로 다대포항이 한 눈에 들어온다. 바다와 맞닿은 두송반도의 끝자락까지는 1시간30분 정도 걸린다. 해안까지 내려가는 계단도 잘 정비된 상태.

되돌아오는 길에는 감천항이 눈을 즐겁게 한다. '구평 도로'라는 팻말을 따라 걸으면 구평동사무소를 지나 감천항으로 가는 길이 나타난다. 인문학카페 '백년어' 주인장 김수우 시인이 씨알 함석헌(19011~1989)의 이야기를 꺼낸다. "함석헌 선생은 추론은 '하는 생각'이고 영감은 '나는 생각'이라고 했어요. 두송반도에 서니 나는 생각들이 걷잡을 수 없이 번뜩거려요."

두송반도에서 내리면 원양어업의 기지인 감천항. 예전에는 감천본동을 '불미골'이라 불렀다. 지금은 근처에 화력발전소가 있다. 조상들의 선견지명이 놀랍다. 여기서 암남공원을 오르면 송도해수욕장까지 탁 트인 절경이 나타난다. 다대포에서 자갈치까지 5~6시간이면 넉넉하다.

※ 특별후원 : 부산은행, 부산농협, 화승그룹

글·사진=이노성 기자 nsl@kookje.co.kr

  입력: 2009.07.23 18:52 / 수정: 2009.07.23 19:11

ⓒ 국제신문(www.kookje.co.kr)

갈맷길 이야기 속을 걷다 <3> 제주 올레에서 배우다(상)
풍경만으론 밋밋…투박한 제주 사투리도 명품길에 한몫

	제주 올레길을 걷다 보면 제주 3보(식물·해산물·언어)의 매력을 만나게 된다. 3보는 제주사람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스토리텔링으로 연결된다. 올레 7코스 외돌개 해안길(돔베낭길)을 올레꾼들이 유유자적 걷고 있다.

- 올들어 관광객 8만 명 밟아… 걷기열풍 진원지

- 풍경에 스토리텔링 접목 화산섬 전체 상품화

- 편하되 지루하지 않게 …마을주민 숨은 공신

'탐라국'이 걷는 재미에 푹 빠졌다. 올레? 올래? 하고 우습게 봤던 길이 '탐나는' 명품으로 거듭나고 있다. 제주는 올레를 못 보여줘 안달이고, 육지는 그곳을 못 걸어봐서 안달이다.

태풍급 걷기 바람이다. 올레꾼·올레지기가 생겨났고 올레병·올레폐인이란 신조어가 만들어졌다. 제주의 관광패턴도 걷기 중심으로 빠르게 바뀌고 있다. 굴지의 기업인 KT는 아예 회사 CI를 'Olleh KT'로 변경해 '올레 경영'을 선언했다. Olleh는 'Hello'를 거꾸로 읽은 것으로 '미래가 온다' '올來' '좋은길·작은길' 따위의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다. 제주 올레길에서 힌트를 얻었음은 물론이다.

올레꾼(올레길을 걷는 사람들)도 각계각층이다. 유명하다는 인물들은 한다리라도 걸치려 한다. 지난해 약 3만 명이 다녀갔고, 올 들어 지금까지 8만 명 넘게 올레를 걸었다고 한다. 각 지자체와 시민단체 등에서는 앞다퉈 유사 올레길을 내고 있다. 경기도 강화, 일산, 나아가 춘천 대전 대구에서 올레를 열었다. 올레가 전국의 걷기지도를 바꿔놓고 있다.


■제주로 달려간 사연

걷기좋은 길은 부산에도 많다. 장장 300㎞가 넘는 해안선을 꿰차게 될 '갈맷길'이 그 중하나다. 갈맷길은 본지와 부산시, 부산 길걷기 시민모임이 공모를 통해 선정한 길 이름. 무한한 잠재력을 품고 있지만 아직 무정형의 길이다. 영도절영산책로, 남구 이기대길, 해운대 달맞이길, 송도 해안길 등은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길이지만 명품으로는 2% 부족하다. 길과 길의 네트워킹이 안되고, 이야기가 달리는 게 흠이다.

반면 제주 올레길은 꼬닥꼬닥(뚜벅뚜벅보다 조금 더 느린 속도) 내용을 채워가고 있었다. 제주의 자연환경을 십분 살려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욕심없이 길을 냈고, 그 길에서 자연을 맛보고 평화를 얻도록 한 것이다. 지금까지 제주 관광이 보여주지 못한 속살을 보게 한 것은 순전히 올레의 공이다.

지난 주 제주 서귀포 일원에서 2박3일간 두 발로 발도장을 찍듯 올레길을 걸었다. 제주가 가까이 다가와 귀엣말로 속삭였다. '갈맷길, 너의 이야기를 해봐. 해양도시가 감춘 항·포구, 시장, 꼬닥꼬닥 살아가는 사람들의 얘기말야!'


■제주 3보

	제주 올레 7코스 풍림리조트 인근의 나무다리길. 큰 물이 들면 쓸려갈 것 같다.

제주의 삼다는 돌·바람·여자다. 외딴 화산섬의 삶의 조건과 특징이 반영돼 있다. 그런데 제주 3보(寶)가 있다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다리쉼을 겸해 우연히 들른 서귀포 강정동의 한 농수산물 직판장. 이곳 주인 윤성돈(47) 씨는 길을 묻는 일행에게 묻지도 않은 3보 얘기를 늘어놨다.

"흔히 제주 3다만 얘기하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3가지 자랑거리가 있어요. 식물과 해산물, 말(언어)이 그것이죠. 이 세 가지가 버무려져야 비로소 제주가 문화·생태·신화의 보고로 탄생합니다. 이걸 알아야 제주가 제대로 보여요."

알고보니 그는 7코스 올레지기였다. 얼마 전 KBS다큐에도 잠깐 나왔다는 그는 걷기예찬까지 곁들였다. "걷는 것은 치유지요. 걸으면 못고치는 병이 없다잖아요. 서울대 의대가 따로 필요 없어. 어쩌면 서울대병원에서 고치지 못하는 병을 올레가 고쳐요. 실제 그런 사람이 많아요."

윤 씨는 하루에도 40~50통씩 올레꾼들의 전화를 받는다고 했다. 올레지기를 자청한 대가다. 마음을 활짝 열고 외지인을 살갑게 맞는 그도 짜증스러울 때가 있는 모양이다. "휴대전화 번호를 공개해 놨더니 새벽 5시에도 전화가 걸려와요. 솔직히 짜증 나죠. 하지만 그것도 제가 선택한 일인걸요. 7코스 일강정 바당(바다) 올레 걸어 봤나요? 그곳의 2.4㎞ 구간은 제가 손수 뚫은 거예요."

'아하, 이 자로구나!' 싶었다. 스스로 나서 길을 뚫고 고치고 안내하는 윤 씨같은 이들이 제주 올레에는 수십 명이라고 한다. 올레의 믿음이자 저력이다.


■다채로운 제주 언어

	제주 올레 15개 코스(총연장 240㎞)

육지인들에게 제주 토박이 말은 낯설다. 올레길을 걷다보면 심심찮게 제주말과 마주친다. 할망(할머니) 하르방(할아버지)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다보면 동남아 어디에 온 것같은 착각에 빠진다. 무사마씸(왜요), 무싱거(무엇), 불란디야(반딧불), 겅허민(그러면), 알아수광(알겠지요) 같은 말은 눈썰미가 있다해도 알아듣기 힘들다. 하지만 말 속에 흐르는 다정한 어감과 정서는 낯설음을 이내 지운다.

제주말은 바닷바람에 곰삭아 씻긴 탓인지 ㄴ·ㄹ·ㅁ·ㅇ같은 유성음이 많다. 어멍(어머니) 아방(아버지) 놀멍(놀면서) 쉬멍(쉬면서) 걸으멍(걸으면서)…. 각지고 날선 것들이 제주에 오면 둥글어진다. 바위가 깎여 '엉'이 되고, 나무들은 나긋해져 '낭'이 된다. 한여름의 이글거리는 땡볕은 '와랑와랑한' 햇살로 바뀌고, 바다는 '바랑'으로, 파도는 '놀'로 변한다. 그러다 유성음들이 해안가에 닿으면 가끔씩 '깍-' 쇳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갯깍, 쇠소깍이 그러한 예다.

제주어는 압축적이다. 마치 음악 같다. 바삐 살면서도 리듬과 여유를 잃지 않으려는 삶의 자세가 반영된 듯하다.

올레길에서 만난 제주 사람들은 말한다. 올레의 매력은 '재기재기'(빨리빨리)가 아닌 '느릿느릿 걷기'에 있다고. (사)제주올레의 서명숙 이사장은 '간세다리'(게으름뱅이) 얘기를 무슨 자랑처럼 늘어놓는다. 게으른 게 자랑은 아니지만 게으르게 걷는 것은 미덕이란다. "게으르게 걸어야 걷는 맛이 나고, 걷는 게 맛있다고 느껴지면 당신은 올레꾼입니다." 그의 말은 일상의 숨가쁜 속도전을 되돌아보게 한다.

제주말에는 '느리게 걷는다'는 뜻의 부사(의태어)가 다채롭다. 가족들과 걸을 땐 늘짝늘짝(느릿느릿) 걷고, 나이든 어른들과는 속도를 더 낮춰 느랏느랏 걷는다. 제주 조랑말처럼 꼬닥꼬닥 걸어도 재미있다. 느그적느그적 감칠맛나게 걸으면 시나브로 바다같은 평화가 찾아온단다.

부산의 해안길은 어떻게 걷는 게 제맛일까. 걷는 맛을 맛깔진 부산사투리로 표현할 수는 없을까. 국어학자나 향토사학자, 시인들이 나서서 이 답답한 질문에 답해줘야 한다.


■잠녀노래와 용왕난드르

	서귀포시 대평포구의 해녀들은 매주 올레꾼을 위해 해상공연을 한다.

지난 18일 저녁 제주 서귀포시 대평포구(올레 8코스 종점 9코스 출발지)에서는 이색적인 무대가 마련됐다. 이 지역 해녀(잠녀) 할망들이 올레꾼들을 위해 해녀노래 공연을 펼친 것이다. 둥그런 포구에 객석이 마련되고 바닷물 위에 테우(뗏목으로 만든 배)같은 간이 무대가 설치됐다. 울렁출렁 흔들리는 무대위로 해녀 10여 명이 올라섰다. 뚜당~ 장구장단이 떨어지자 노래가 흘러나왔다.

'이엿사나 이여도 사나…/ 이어 이어 이어도하라/ 이어 하멘 나 눈물난다….' 4·4조의 구슬프고 구성진 가락이었다. 제주해녀들만 부른다는 '이어도타령'이다. 파도가 쏴아 ~하고 밀려들었고 박수가 쏟아졌다. 노래는 짧았으나 여운은 길었다.

김창수 대평리 이장은 "어촌의 울타리를 벗어나려면 뱃심이 있어야 하고, 소득을 올리려면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면서 이날 공연이 어촌의 소득증대 사업임을 분명히 했다. 더 많은 올레꾼을 불러모으기 위한 작전인 셈이다. 그 때문인지 도지사, 도의원, 도 교육위원, 시장, 면장 등 지역인사들이 총출동했다.

	서귀포 인근 바당(바다) 올레길에서 어민들이 미역을 손질하고 있다.

대평리의 향토음식도 얘깃거리다. 주민들은 마을의 전통적인 이름을 따서 '용왕난드르'(너른들)라는 향토음식점을 열어 올레꾼들을 맞고 있었다. 소문을 듣고 찾아갔다가 아삭아삭 씹히는 강된장비빔밥과 바다향이 싱그런 보말칼국수 맛에 반하고 말았다. 비빔밥 6000원, 보말수제비 5000원. 가격 대비 만족도가 아주 높았다. 주민들이 공동운영하는 음식점에서 어떻게 이런 맛이 나온단 말인가. 주방의 한 아즈망이 궁금증을 풀어주듯 말했다.

"공부해서 배운 거예요. 강된장비빔밥은 버섯과 해초, 나물에 우리 대평에서 만든 강된장을 얹어 비벼요. 해초는 깊은 바다 속 용왕님 냉장고에서 금방 꺼낸 거구요. 보말도 싱싱한 것만 써요. 참기름 넣고 볶아서 조물조물 만지다보면 내장이 톡 터져요. 그걸로 국물을 우려내니 자연의 맛이 살아날 수밖에 없지."

용왕을 섬기는 주민들이 마음을 모아 향토음식을 만들어 올레꾼을 맞는 마을. 용왕난드르야말로 올레의 살아있는 스토리텔링이었다. 난드르란 말이 좀처럼 귓전을 떠나지 않는다.

※ 특별후원 : 부산은행, 부산농협, 화승그룹

제주=글·사진 박창희 기자 chpark@kookje.co.kr

  입력: 2009.07.30 20:22 / 수정: 2009.07.30 21:25

ⓒ 국제신문(www.kookje.co.kr

갈맷길 이야기 속을 걷다 <4> 제주 올레에서 배우다 (하)
스토리로 엮은 240㎞ , 전국 수만 올레꾼과 교감
길 뚫는 과정, 만든 사람, 걷는 이, 사후관리 등 모두가 이야깃거리로
곳곳 친절한 화장실도 감동
쉼터 찾은 전국 방문객들 아름다운 방명록 빼곡

	제주 올레 8코스 중간의 해병대길을 올레꾼들이 조심조심 걷고 있다. 해녀들만 엉금엉금 다니던 곳이었으나 제주의 해병대가 평탄화 작업을 통해 맛깔스러운 산책로를 만들었다.

서귀포 70리 해안 남서쪽에는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선 바위가 있다. 외돌개다. 약 150만년 전 화산 폭발 때 용암이 치솟다 굳은 모습이라고 한다. 별명이 할망바위다. 어느날 바다에 나간 하르방이 거센 풍랑을 만나 돌아오지 못하자 기다리던 할망이 통곡하다 바위가 되었다는, 망부석류의 전설이 어려 있다.

외돌개는 지금까지 점(點) 관광지 정도로 과소평가돼 왔다. 차에서 내려 외돌개만 보고 사진 한 장 찍고 떠나버리는 곳이었기 때문. 그런데 올레가 외돌개의 가치를 한껏 높여놓았다. 이곳 해안산책로에 올레꾼이 선을 그리면서 너도나도 외돌개를 '읊기' 시작한 것. 외돌개에 전문 사진사가 등장했고 감귤을 파는 할망들이 신이 났다.


■산티나고 씨의 올레 올인

외돌개 인근의 '솔빛바다'(6코스 종점)는 외돌개가 뜨면서 함께 뜬 올레 쉼터. 올레 가이드북에는 '미모의 여주인이 그 조카와 운영하는 착한 찻집. 차맛이 일품, 올레꾼들이 반드시 들러봐야 할 필수코스'라고 소개해 놓았다. 과객(過客)의 호기심을 잔뜩 자극하는 문구다.

발길 가는대로 걷다가 문득 찾아든 '솔빛바다'는 소문대로였다. 솔숲 속 야외데크하며 감미로운 음악, 아늑한 분위기는 쉬어가지 않고는 못배기게 한다. 차값도 비교적 착한 편이었다. '미모의 여주인'을 찾던 중 스스로 올레지기라고 소개한 송동훈(38) 씨를 만났다. 주섬주섬 늘어놓는 얘기에 귀가 번쩍 뜨였다.

"지난 주 전국 8도 올레꾼들이 번개(긴급 모임)를 했어요. 10여 명이 모여 강화도 올레 약 13㎞를 빗속에서 걸었죠. 어찌나 시원하던지…. 올레가 전국을 통하게 해요."

인터넷에선 '산티나고'라는 닉네임을 쓴다고 밝힌 송 씨는 제주올레 홈피에 당시의 '번개 올레' 얘기를 올려놨다고 귀띔한다. "얘깃거리를 찾는다면 수봉로와 해병대길을 가 보세요. 얼마전 저하고 수봉로를 뚫은 김수봉 씨, 올레 사무국장(서동성)이 내기를 했어요. 지는 사람이 4코스를 완주하고 문제점을 점검하는 내기였죠."

결혼 했느냐는 질문에 송 씨는 "아직 안 했어요. 찾다가 안되면 올레에 올인하죠 뭐"라며 사람좋게 웃었다.


■올레꾼들의 여행 기록

	올레지기 김수봉 씨가 손수 삽과 곡괭이로 뚫었다는 수봉로. 자연미를 최대한 살려냈다.

언제 나타났는지 '솔빛바다'의 주인 김미선(52) 씨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미모의 여주인'은 소문대로 온화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사)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과는 고추친구란다. 올레꾼들의 얘기를 듣고 싶어하자 김 씨는 가게로 들어가 두툼한 방명록을 꺼내온다. 대학노트 2권 분량에 올레꾼들이 쉬면서 남긴 메모와 감상을 적은 글들이 빼곡하다.

'반갑게 맞는 솔빛가족들이 제주의 정감을 느끼게 만드네요. 뜨끈한 군고구마가 마음을 더욱 따스하게 합니다.' '수호천사같은 화살표, 정말 고맙네요. 두고두고 아끼며 걷겠습니다.' '제주올레가 계속 이어져 북한땅까지 걸어갔으면 합니다.' '나의 예쁘니, 항상 건강하게 내 옆에 있어다오. 내년에도 또 걷자.' '사랑하는 딸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평화로운 길을 상상해보렴. 지금 엄마 아빠가 걷고 있는 이 길일게다. 네게서 빌려온 MP3가 무용지물이 됐다.'

전국의 올레꾼들이 남긴 방명록은 한 권의 올레 시집이었다. 방명록은 길에서 만난 이들과 만나지 못한 이들을 서로 엮어주는 교감의 끈이었다. 올레의 소중한 스토리텔링이 아닐 수 없다.

올레 코스를 처음 낼때 탐사대원으로 참가한 적이 있다는 김 씨는 "제주에 살면서도 이런 길이 있는 줄 몰랐는데, 친구(서명숙) 덕에 길을 알고 장사도 너무 잘 하고 있다"고 말했다.


■수봉로와 해병대길

	올레지기 송동훈(왼쪽) 씨와 '솔빛바다' 주인 김미선 씨가 올레 이야기를 들려주며 밝게 웃고 있다.

올레 이야기는 길에서도 만들어진다. 길을 뚫는 과정, 뚫는 사람, 뚫은 뒤의 네이밍(작명), 걷는 사람, 사후 관리가 모두 이야깃거리다.

외돌개~월평포구를 잇는 7코스(15.1㎞) 중간쯤에 있는 '수봉로'는 한 시민의 휴먼드라마다. 원래 이 길은 해안가 야산 비탈에 있는듯 없는 듯 해서 흑염소들이나 풀 뜯으며 오가던 길이었다. 7코스 개척 시기인 2007년 말 올레지기인 김수봉(46) 씨는 손수 삽과 곡괭이를 들고 이곳에 계단식 길을 만들었다. 만들고 보니 자연생태적 분위기가 한껏 살아났다. 올레 사무국은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 보고 길 이름을 '수봉로'라 지었다. 올레길 전체에서 유일하게 사람이름이 들어간 길이다. 수봉로를 지나는 올레꾼들은 "흑염소 길이네, 수봉 씨는 어디 있지? 맴~엠~"하고 한마디씩 던지곤 한다.

전형적인 바당(바다)올레인 8코스의 해병대길도 재미 있다. 하얏트 리젠시 호텔 산책로를 지나 바닷가로 내려가면 조그만 모래사장(조른모살)이 나오고 이내 울퉁불퉁한 갯바위길을 만난다. 길이 나기 전엔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었고, 지리를 잘 아는 해녀들만 엉금엉금 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뚫어야 당위성이 있었다. 난코스만 지나면 갯깍(해안가)을 배경으로 선사시대 혈거유적지인 들렁궤를 볼 수 있고, 알보석이 박힌 듯 천장이 아름다운 다람쥐궤(일종의 해안터널)가 기다리고 있었다.

올레 개척팀은 꾀를 냈다. '제주의 무적 해병대를 이용하자!' 지인의 소개로 지역방어사령관을 만난 서명숙 이사장은 무거운 갯바위들을 움직여 길을 내달라고 요청했다. 사령관은 "평탄화 작업이라 어렵지 않다"며 요청을 수락했다. 해병과 해군 90여 명이 투입돼 사흘간 작업이 진행됐다. 땀 흘리는 장병들에게 서 이사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제대하면 애인을 데리고 와서 걸으세요. 그리고 말하세요. '당신을 위해 이 길을 닦았어'라고."

올레 개척팀은 무적 해병대의 전설을 생각해 갯깍에 '해병대길' 비석을 세웠다.


■올레 화장실

	올레길 요소 요소에 세워진 화장실 안내판.

요소요소에 화장실을 만든 것도 올레의 빼놓을 수 없는 자랑이다. 새로 만든 것도 있지만, 대부분 기존 관공서 등의 화장실을 공공으로 끌어낸 것이다. 화장실 안내판은 청색바탕에 노란색 글씨로 디자인의 통일을 기했고, 거리 정보를 가미했다. 고속도로 휴게소처럼 '다음 화장실 ○㎞'라는 문구는 올레꾼들을 감동시키는 알짜 정보다.

이같은 배려는 올레정신에서 비롯됐다. 올레는 단순히 길을 내는 데서 나아가, 자연사랑·향토사랑·인간사랑의 정신을 길에 심고 있다. 제주올레 홈페이지에 올려진 올레 에티켓은 이를 위한 구체적인 행동지침이다.

'나뭇가지는 부러뜨리지 않는다/ 꽃을 꺾지 않는다/ 동물을 쫓거나 괴롭히지 않는다/ 눈에 띄는 쓰레기는 줍는다/ 치울 수 없느 쓰레기는 홈피 '클린방'에 위치를 적어놓는다'.

제주의 환경미화원들이 올레를 좋아하는 이유도 이런 데 있다. 제주올레 서동성 사무국장은 "중요한 것은 길을 닦는 사람이 아니라 걷는 이들의 눈높이"라면서, "아마 관에서 예산을 투입해 보여주기식으로 길을 냈다면 올레꾼들이 바라는 길이 만들어지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올레에 과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서 국장은 "올해 길 축제를 열려고 했으나 게스트 하우스(여행숙소)가 해결안돼 내년으로 미뤘다. 올레꾼들을 위한 다양한 문화공연 등 콘텐츠를 채우는 것도 우리의 숙제"라고 토로했다.


■비싼 길- 값싼 길

제주 올레길은 '비싼' 길이다. 부산에서 갈 경우, 항공료 숙식비 등을 합해 2박3일 기준 최소 30만 원이 뚝딱 먹힌다. 가족 서너명이 갈 경우 100만 원이 후딱 날아간다. 그럼에도 육지인들이 올레를 찾는 것은 그만한 값어치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값어치는 올레꾼 각자가 매기는 것이지만,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착한 여행'을 올레가 제공하고 있다는 데엔 큰 이견이 없다.

서 이사장은 "아무리 올레길이 아름다워도 매번 제주를 찾을 수는 없다. 그러니 당신들의 까미노(올레)를 만들어서 즐기라"고 조언한다. 이는 그가 산티아고 길에서 얻은 교훈이기도 하다.

올레로 향하는 발길들을 부산에 잡아둘 수 없을까.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올레길에 버금가는, 그 이상의 명작을 만들면 된다. 부산에는 갈맷길(해안길), 강길, 숲길, 골목길 등 명작의 텃밭이 널려 있다. 제주 올레가 연간 몇 만명씩을 끌어들인다고 하지만, 부산 인구 10%만 끌어들여도 36만 명이다. 내수(內需)가 충분하다는 얘기다. 쉽게 보이는 이 길을 누가 마다하겠는가.


※ 특별후원 : 부산은행, 부산농협, 화승그룹

제주=글·사진 박창희 기자 chpark@kookje.co.kr

  입력: 2009.08.06 19:59 / 수정: 2009.08.06 20:22

ⓒ 국제신문(www.kookje.co.kr)

갈맷길 이야기 속을 걷다 <5> 기장 해안길(상)
윤선도, 최치원, 갈매기회… 풍경도 소재도 서말인데 보석 꿴 스토리는 전무
기장 팔경 가운데 한 곳 시랑대, 풀숲에 안내팻말 가려지는 등 방치 상태
기장 명물 갈매기회도 사실상 명맥 끊겨
곳곳에 향토유적 널린 두호마을
윤선도 유적지는 옥수수밭으로 변해

	그린워킹 답사단이 기장 최고의 해안 절경으로 꼽히는 시랑대를 걷고 있다. 저 멀리 용궁사에서 세운 돌탑 근처에 '시랑대'라고 적힌 비석이 숨어 있다.

점(點)과 선(線). 점은 길에서 선이 된다. 스토리텔링은 상징을 입히는 감초. 몇 해 전까지 제주 서귀포시의 소정방폭포나 돔베낭길은 사진 한 두장 찍고 떠나는 점이었다. 렌트카를 타고 잠시 들러 바닷가 음식점에서 회 한접시 먹으면 관광 끝~. 올레가 어정쩡한 관광의 점에 선을 그었다. 올레 7코스(외돌개~월평포구) 15.1㎞의 경우 '산티아고 가는 길' 뺨치는 매력을 발산한다. 회색에 멍든 산업문명의 피신지로 거듭난 것이다.

지리산 둘레길도 마찬가지. 따로따로 살던 산골 자연마을이 둘레길을 매개로 손을 잡았다. 점이 이어지자 거대한 생명의 선이 탄생했다. 길이 지리산의 감춰진 역사와 인정을 들춰낸 것이다.

부산 기장군의 갈맷길(해안길)은 얼기설기 찍힌 점이다. 고산 윤선도(1587~1677)의 유배지는 잡초만 무성하고 포구는 고립된 섬 마냥 따로 논다. 대변항의 명물 '갈매기회'는 십 수년만에 자취를 감췄다. 흥선대원군 척화비와 시랑대 가는 길은 미로찾기 수준. 인도없는 해안길은 사막처럼 휑하다. '아침이 좋은 도시'라지만 일출을 보면서 걸을 수 있는 길이 없다. 누구나 회 한접시 뚝딱 먹고 일어선다. 하얀 도화지에 드로잉을 해야 하는 이유다. 기장문화원 황구 향토사연구실장과 한국문화원 부산시연합회 황원준 사무처장이 길잡이로 동행했다.


■시랑대와 최치원의 흔적

	고산 윤선도의 유배지인 부산 기장군 죽성리 두호마을 전경.

갑화양곡(甲火良谷). 삼국시대 이두식으로 표기한 기장의 지명이다. 갑은 10간(艮)의 수(首)나 시(始)를 뜻한다. 부산민학회 홍성권 편집위원은 '바다에서 육지로 돌아오면 보이는 첫 마을'로 뜻풀이를 했다. 그런 탓인지 부산 전체의 30%인 17개의 포구가 해안선을 따라 늘어섰다. 송정에서 500m 남짓 걸으면 가장 먼저 공수포가 마중을 나온다. 황구 연구실장이 "과거 오리과의 철새인 비오리가 많아서 '비오개'라고 불렸다"고 일러준다.

포구는 해를 닮아 U자형으로 둥글다. 방파제는 낚시꾼들이 점령했다. 현대식 펜션과 호리병 모양의 대형 콘크리트 수조가 눈에 띈다. 어촌체험 관광객의 수요를 겨냥한 듯 했다. 이귀자 기장 문화해설사는 "해안에 그물을 설치해 육지에서 잡아당기는 후릿그물(재래식 고기잡이 어법)이나 해녀들이 건진 해조류를 말리는 체험을 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미역을 말리던 70대 노인은 "올해는 어촌체험관광객이 별로야"라고 말한다. 여름이 실종된 탓이다.

공수포에서 바다를 보고 왼쪽은 시랑대~용궁사 가는 길. 시랑산 입구에 모래사장과 접한 건물 한 채가 버티고 섰다. 1970년대 세워진 LG그룹 별장이라고 하는데 인기척은 없다. 별장 뒤쪽의 언덕을 올라선다. 깎아지른 벼랑에 부딪히는 파도소리가 풀벌레 소리를 지운다. 240도 이상 확보되는 시야. 오륙도부터 고리원자력발전소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맑은 날에는 대마도까지 보인단다.

	기장문화원 황구 향토사연구실장이 윤선도의 유배처소로 추정되는 옥수수밭을 가리키고 있다.

용궁사 담벼락을 끼고 절벽으로 내려가니 '시랑대' 세 글자가 보인다. 영조 9년(1733년) 이조참의에서 현감으로 부임한 권적이 새겼다고 전한다. 이조참의는 고려시대의 시랑(차관급)과 같은 벼슬. 부산의 포구를 연구 중인 이지훈(철학) 박사는 흥미로운 가설을 내놓는다.

"시랑대의 별칭인 학사대에 주목해야 합니다. 최치원은 신라시대 한림학사와 병부시랑(국방부 차관)을 했어요. 따라서 최치원이 시랑대에 머물다가 해운대 동백섬으로 거처를 옮겼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또한 권적이 좌천된 자신의 신세를 최치원과 동일시했을 수도 있지요."

시랑대는 기장 8경 가운데 7경이다. 하지만 용궁사가 진입로를 가린데다 안내 팻말도 풀숲에 은신했다. 어렵게 '발견한' 안내 팻말에는 '양산군 동부출장소'라고 적혀 있다. 기장은 1995년 양산에서 부산으로 편입됐다. 그린워킹 답사단은 "무신경한 문화재 행정의 단면을 보는 것 같다. 1985년부터 공수마을 주변 6곳에서는 신석기시대 유물이 발굴됐지만 안내 입간판 하나 찾기 힘들다"며 혀를 찼다.


■대원군과 갈매기회의 흥망

국립수산과학원을 벗어나 대변항으로 길을 잡는다. 물씬한 갯내음에 '갈매기회'가 생각난다. 1997년 K횟집을 운영하던 최영철(50) 씨는 멸치와 갈치를 섞어 초고추장에 버무린 갈매기회를 개발했다. 국내 최초의 수산물 퓨전요리다. 방송국의 '이색음식 코너'에도 자주 소개되며 유명세를 탔다. 당시 최 사장의 인터뷰. "생고등어보다 안동 간고등어가 더 비싸게 팔리잖아요. 갈매기회도 스토리를 입히고 입소문만 타면 대변항의 특산물이 될 겁니다." 13년 지났지만 갈매기회는 기대와 달리 '뜨지' 못했다. 몇몇 횟집에서 갈치회를 판매하고 있지만 명맥만 잇는 수준이다. 최 씨가 2004년 횟집을 넘기고 젓갈사업에 뛰어들면서 갈매기회는 더욱 찾기 힘들어졌다. 기장군 홈페이지와 관광안내도를 훑어봤지만 갈매기회에 대한 소개는 한 줄도 없다.

13년째 기장에서 살고 있는 황원준 사무처장은 "나도 갈매기회 얘기는 처음 들었다"고 했다. 요즘 최 씨는 어떤 생각을 할까. 전화를 걸었더니 "민간 차원의 홍보는 한계가 많았다. 행정적인 지원이 아쉬웠다"고 회고한다. 한 때의 도전으로 끝난 갈매기회는 진한 아쉬움을 남긴다.

대변초등학교에는 흥선대원군의 척화비가 꼿꼿히 서 있다. 일제는 대변항 방파제 안쪽에 세워졌던 척화비를 바다에 던져버렸다. 다행히 해방을 앞둔 1947년 마을청년들이 인양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요즘도 날씨가 흐리면 척화비에는 습기가 낀다. 바닷물의 염분이 아직도 남아있기 때문이리라. 척화비도 달리 보면 이야기거리가 된다. 역사는 말을 시키는 자에게 얘기를 들려준다지 않는가.

대변에서 영화 '친구'의 촬영 장소인 파래정을 지나 죽성리 두호마을까지는 왕복 2차선 도로에 인도가 없다. 황 연구실장은 "기장이 머무는 도시가 되려면 안심하고 바다 비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인도부터 정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회만 먹고 가는 원포인트 관광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일침을 놨다.


■옥수수밭의 윤선도 유배지

두호마을은 문화재의 보고. 작은 포구에 8개의 향토유적들이 옹기종기 모였다. 항일운동가 최상림 목사(1888~1945)가 세운 죽성교회가 골목길 입구에서 이방인을 맞는다. 일제의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최 목사는 49번이나 형무소 생활을 하다가 해방을 앞둔 1945년 5월 6일 새벽 순교했다. 나즈막한 교회 건물이 모나지 않게 어촌과 잘 어울린다.

죽성포구 앞 황학대는 윤선도가 유배의 한을 풀던 곳. '돈을 주고라도 유배에서 벗어날 길을 찾아보자'는 이복동생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며 남긴 '증편소제'는 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너의 뜻을 따르자니 새로운 길 얼마나 많은 산이 막을 것이며/세파를 따르자면 얼굴이 부끄러워짐을 어찌하리오/이별을 당하여 오직 천 갈래 눈물만이/너의 옷 자락에 뿌려져 점점이 아롱지네(중략)'.

윤선도가 7년이나 머문 유배 처소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기장문화원이 마을에서 구전되는 이야기를 토대로 조사한 결과 당제를 지내는 국수당 옆 옥수수밭으로 추정할 뿐이다. 황 연구실장은 "전남 해남군과 보성군은 윤선도의 유적을 관광상품으로 만들었다. 반면 기장은 윤선도의 자취조차 정확히 발굴하지 못했다"고 안타까워 했다.

목재 덱을 따라 죽성리 왜성에 오른다. 300년 넘은 해송 6그루가 국수당을 병풍처럼 감쌌다. 황학대, 어사암, 거북바위, 죽성교회가 한 눈에 펼쳐진다. 이귀자 문화해설사는 "유적들이 두호마을 뒷산에 모인 탓에 찾기가 힘들다"고 했다. 작은 문화지도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다. 황 연구실장은 "부산발전연구원이 5년 전 이곳을 문화재 네트워크로 묶자는 용역을 했는데 아직도 첫삽을 못뜨고 있다"고 한숨을 쉬었다.

너무나 많은 스토리텔링이 묻힌 기장 갈맷길. 태부족한 물적 인프라. 이곳의 점을 어떻게 선으로 연결할 것인가. 그린워킹이 풀어야 할 숙제다.


※ 특별후원 : 부산은행, 부산농협, 화승그룹

글·사진=이노성 기자 nsl@kookje.co.kr

  입력: 2009.08.13 21:00 / 수정: 2009.08.19 15:00

ⓒ 국제신문(www.kookje.co.kr)

갈맷길 이야기 속을 걷다 <6> 기장 해안길(하)
불편한 부산의 랜드마크(기장 고리원전), 피할 수 없다면 즐기자
원자로 콘크리트에 벽화작업…야간에 레이저빔 쏘는 발상도
인도 없는 차도 아슬한 곡예도보…걷기 힘든 신평소공원 전시행정 씁쓸
동호성마을 5㎞ 해안 '동해의 보석'…동해안 별신굿 문화콘텐츠 가치 충분
사유지로 막힌 학리 고갯길 해법 찾아야

	이해웅 부산교대 명예교수(가운데)와 박정애(오른쪽)·황길엽 시인이 부산 기장군 일광면 학리 해변길을 걷고 있다. 학리에서 고산 윤선도의 유배지인 죽성리 두호마을로 가는 길은 군부대와 사유지가 가로막고 있다.

부산 기장 앞바다에 서보라. 수직선이 수평의 바다를 가르고 섰다. 애쓰지 않아도 십중팔구 눈에 띈다. 회색의 거대한 덩치에 눈살을 찌푸리지만 어찌 할 도리가 없다. 10㎞ 밖에서도 볼 수 있는 반갑지 않은 랜드마크. 고리원자력발전소 얘기다. 오는 2019년까지 5·6호기도 들어선단다. 이쯤되면 숙명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 하는 법.

부산 포구사를 연구 중인 이지훈(철학) 박사는 "콘크리트 속살이 드러나는 원자로 건물 외부에 그래피티(graffiti)를 하거나 야간에 레이저빔을 쏘자. 예술 조형물을 설치하는 건 또 어떤가"라고 제안했다. 부정적 이미지의 랜드마크를 긍정적으로 바꾸자는 뜻이다. 물론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대목이다. 길도 마찬가지. 민간의 상상력과 자원봉사의 힘이 제주올레의 '성공신화'를 쓰는 현장을 우리는 보고 있지 않은가. 부산교대 이해웅 명예교수와 박정애·황길엽 시인이 끊기고 막힌 갈맷길(부산 해안길)의 랜드마크를 찾아 그린워킹 답사에 동행했다.


■끝없는 테트라포트의 사열

	기장 동오성 마을을 따라 끝없이 펼쳐친 테트라포트의 행렬.

임랑해수욕장이 끝물이다. 거친 파도에 비까지 추적댄다. 한 해 농사 망친 상인들이 울상이다. 생수를 사러 구멍가게에 들렀더니 60대 객이 홀로 술을 마신다. "뭐 살낀데? 주인은 일 나갔구만. 잔돈없으니 알아서 사소." 5000원을 주고 생수 2병과 초콜릿·양갱 2개를 집었다. 유년시절 고리를 떠난 이해웅 교수는 "원자력발전 건설로 집을 수용당한 이주민들이 울산 서생과 기장읍내로 많이 이주했다. 일부는 고리 옆 월내나 임랑으로 옮겨 고기를 잡는다"고 이주사를 전했다. 임랑의 별칭은 월호다. 가까운 거리의 일광면은 해가 상징이니 기장은 해와 달을 다 가진 셈이다.

백사장을 벗어나 일광면으로 접어든다. 풍경이 바다-횟집-인도없는 도로 순서다. 이 교수가 몇 번이고 횟집 가운데로 난 해안길을 찾아나섰지만 허탕만 친다. 갯바위만 무성할 뿐 통행이 가능한 길은 없다. 대형트럭의 질주에 가슴이 서늘하다. 1㎞쯤 '곡예 도보'를 한 끝에 '동오성' 마을이라고 적힌 입간판을 찾았다. 문동~문중~칠암~신평~동백 5개 마을을 통칭한 이름이다. '하눌타리'라는 찻집 간판을 보고 간신히 해안길로 접어든다. 예가 문동리의 초입이다. 테트라포트의 행렬이 끝 없다. 해초를 줍던 노파가 "이 길을 따라 가면 지긋지긋하게 (테트라포트를)볼 수 있다"고 한다.

횟집도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자연산을 강조하는 '원조'에서 '진짜 원조' 간판이 호객행위를 한다. '나무 몇 그루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려는데 박정애 시인이 입을 연다. "어촌에는 나무가 안 어울려. 폭풍이 수시로 들이닥치는데 견디기나 하겠어? 그 대신 어촌마을 뒷편에는 항상 나무가 있다니까." 황길엽 시인도 거든다. "도로나 제방·물양장이 모두 콘크리트여서 거슬리긴 하지만 해안을 걷는 자체가 행복 아닌가." 하긴 5분 전까지 아슬아슬한 차도를 걷지 않았는가. 사람 마음 참 간사하다. "콘크리트도 부산 포구의 매력"이라 생각하고 말을 삼켰다.


■동오성 마을 5㎞의 가능성

	기장군이 신평마을의 해안길을 따라 소공원과 산책로를 조성하고 있는 현장. 바닥이 딱딱하고 미끄러운 소재여서 발이 불편하고 걷기에 불안하다.

장어로 유명한 칠암을 지나 신평으로 접어든다. 시끄러운 소리를 따라가보니 '신평 소공원 조성사업'이라는 간판이 섰다. 현장인부가 "바닷쪽 3566㎡ 공간에 해안산책로를 만든다"고 귀띔한다. 눈이 번쩍 뜨인다. 드디어 제주올레와 같은 해안길이 부산에도 생기는가. 공사가 30%쯤 진행된 목재 덱를 걸어봤다. 안개에 숨은 갯바위가 일품이다. '아~'하고 감탄사가 나오려는 찰나, 몸이 휘청한다. 비에 젖은 바닥이 너무 미끄러운 탓이다. 자세히 보니 보도블럭보다 훨씬 단단하면서 이음새도 별로 없는 돌블럭 소재다. 이 교수가 한숨을 쉰다. "걷기는 바닥이 생명인데 이게 뭡니까. 흙길이 안되면 우레탄이라도 해야 할텐데, 돌덩이처럼 딱딱하고 미끄러운 재질을 바닥에 깔다니…." 황길엽 시인이 '잘 하려 하다가 욕먹는' 경우라고 일침을 놓는다. '길 걷기 전문가의 자문을 구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내내 떠나지 않는다.

동오성 마을의 끝자락인 동백리(冬柏里)에는 동백나무가 없다. 제방으로 막아 농지를 개량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따라서 겨울 동(冬) 대신 저수지 막을 동(垌)을 쓰는게 옳다. 그렇지만 동네 이름을 '백리(柏里)를 막는다'고 쓸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겨울 동(冬)자를 빌려왔다고 일광면 홈페이지는 적고 있다. 이런 마을을 동막골로 부른다. 전국에는 동막골이 수 없이 많다. 영화 '웰컴투 동막골' 역시 동백리와 비슷한 사연을 가진 마을이다. 이지훈 박사는 "생태친화적 이미지를 강조하려면 동막골로 고쳐 부르는 것도 고려할 만 하다"고 제안한다.

유독 끊김이 많은 기장에서 동오성마을 5㎞는 해안을 오롯이 간직할 수 있는 보석이다. 가능성을 읽는다.


■온정마을 횟집주인의 소망

	해안길에서도 빤히 보이는 고리원자력발전소.

동백리에서 부경대 수산과학연구소를 지나면 온정마을. 숨겨진 해돋이 명소다. 갑자기 내린 폭우를 피해 '해마수산 직영횟집'으로 피신했다. 여주인 김귀옥(53)씨가 인심좋게 커피를 내준다. 해안길을 걷는다고 했더니 "저도 지난 5월 제주올레 다녀왔어예"라고 한다. 부산과 제주 해안길의 차이를 물었다.

-제주올레를 다녀온 느낌은.

▶길을 사이에 둔 바다와 육지 모두 자연이 살아있었다.

-부산 해안길은 어떻게 해야 하나.

▶해안선이 매립되거나 방파제로 사용되는 탓에 길 없는 곳이 많다. 바꿔야 한다. 볼 게 없으니 관광객들도 회만 먹고 간다. 머물고 싶은 공간으로 변신할 수는 없을까.

-좋은 길을 만들려면 상인들의 노력도 필요한데.

▶1월1일 해맞이 관광객을 위해 광어미역국 300인분을 끓여서 무료로 대접했다. 장사만 잘된다면 상인들은 뭐든 도울거다. 도보꾼들이 걷다가 배 고프면 와서 음식먹고, 하룻밤 자고 가고…. 부러운 풍경이다.

문동에서 시작된 해안길은 온정마을 끝에서 끊긴다. 이천리까지 인도없는 도로를, 다시 공포감을 느끼며 걷는다. 문득 기장문화원 황구 향토사연구실장이 들려준 일화가 생각난다. "동오성 마을의 해창(곡물을 저장하는 바닷가 창고)에서 임금님 진상품을 싣고 출발한 배가 죽성리 두호마을 앞바다에서 좌초된거야. 그걸 배고픈 백성들이 모두 주워 먹었지. 그랬더니 암행어사가 온 거야. 할 수 없이 '월매'라는 기생이 암행어사에게 술을 대접하며 궁핍한 사정을 설명했더니 없었던 일이 됐어." 아직도 고산 윤선도가 유배를 살았던 죽성리 두호마을에는 어사암이 있다.


■'갯마을'과 별신굿의 소통을 위해

일광해수욕장에서 오영수(1909~1979) 문학비가 일행을 맞는다. '아낙네들은 해순이를 앞세우고 후리막으로 달려갔다. 맨발에 식은 모래가 해순이는 오장육부에 간지럽도록 시원했다. 달음산 마루에 초아흐레 달이 걸렸다. 달그림자를 따라 멸치떼가 들었다.' 소설 '갯마을'의 무대 학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안개가 잔뜩 낀 포구에 고깃배들이 어깨를 마주하고 정박했다. 저 멀리 달음산이 엄마 젖꼭지처럼 솟았다. 황길엽 시인이 "해무에 수감된 어촌마을"이라고 표현한다. 포구 17개가 밀집한 기장군은 동해안 별신굿(중요무형문화제 제82호-가호)의 거점. 매년 6개 어촌계(공수·대변·두호·학리·이천·칠암)가 번갈아가며 굿판을 벌인다. 지난 2월에는 칠암어촌계가 주관한 별신굿이 5박6일간 펼쳐졌다. 굿을 활용해 성공적인 문화콘텐츠로 만든 사례는 많다. 강릉 단오제(단오굿)는 지난 2005년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등록됐다. 과천한마당축제도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연희인 굿을 독창적으로 수용해 꾸미는 공연예술제다. 연출가 이윤택 씨의 출세작 '오구-죽음의 형식' 역시 굿을 연극화해 성공한 사례다.

학리등대에서 해안길이 또 막힌다. 군부대 철책이 놓인 탓이다. 산길로 가려니 '한일합섬 사유지'라는 출입금지 간판이 붙였다. 어디로도 갈 수 없다. 다시 해안길을 만나려면 일광해수욕장으로 되돌아가 기장군청을 거쳐 죽성리 두호마을로 가는 수밖에. 해안으로 가면 걸어서 20분 남짓인 길을 빙빙 돌아 1시간 넘게 에둘러야 하는 것이다.

박정애 시인이 한마디 한다. "사유지라도 걷는 공간은 양보하자. 행정기관이 중재자로 나서 사회적 합의를 봐야 한다. 누구도 이토록 눈부신 해안길을 독점할 권리는 없다." 제주올레도 사유지인 목장 한 가운데를 관통한다. 목장주가 관광 활성화라는 대승적 차원에서 양보한 결과다. 부산이라고 못하란 법은 없지 않은가.


※ 특별후원 : 부산은행, 부산농협, 화승그룹

글·사진=이노성 기자 nsl@kookje.co.kr

  입력: 2009.08.20 19:32 / 수정: 2009.08.20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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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맷길 이야기 속을 걷다 <7> 지리산 둘레길에서 배우다
오르려고만 한 지리산 누리고, 나누는 삶의 길을 보았다
빠름에서 느림으로, 채움에서 비움으로 …
사람냄새 가득한 길 성찰의 이야기 풀어내
"걷는 이도 禮 지켜야"

1. 지리산과 길

	숲에 취하고 길에 취해 무아지경 속에서 걷게 되는 전남 남원시 중군마을 인근의 지리산 둘레길. 이곳을 걸으면 쉽게 자연주의자가 된다.

산과 길을 잇는 매개는 사람이다. 오가는 사람이 있어 마을이 말을 한다. 그 말들이 모아져 이야기가 되고 때론 역사가 된다. 지리산길을 자박자박 걸으며 이 단순한 사실을 새삼스레 확인했다. 산길과 마을들은 그동안 외로웠던지, 만나는 길손의 소맷자락을 부여잡고 못다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사람을 만나자 외로움이 북받쳐 울컥 그리움으로 바뀐 것이다.

그땐 그랬다. 산따로 길따로였다. 지리산길은 단순 등산로를 뜻했다. 마을과 사람이 보일 리 없었다. 산꾼들은 오르려고만 할 뿐,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모두 바쁘다는 핑계로.

어느 날 지리산에 둘레길이 생겼다. 오르지 않고 누리는 길이다. 수직과 정복이 아닌, 수평과 나눔을 속삭이는 길이다. 길 하나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둘레길이 보여주고 있다.

지리산 저 산너울의 바람을 타고, 지난 주 둘레길 개통 구간 70㎞중 절반가량을 걸었다. 제주 올레길, 부산의 갈맷길(해안길 총 306.2㎞)과 호형호제라 말하게 하면서, 때론 길 품평을 해가면서.

2. "부산 해안길 보고 싶다!"

소박하게 걷겠다고 나선 길이 마을과 그곳 사람살이의 결을 확인하면서 순례 아닌 순례가 돼 버렸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친구였고 이웃이었다. 만나는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 인사하고 덕담을 건넸다. 때론 통성명을 하고 인연의 끈을 이어가려는 이들도 있었다. 길 위에서도 꽃이 핀다는 것을 알았다.

동강~수철리 구간의 한 쉼터에서 만난 김경준(38·회사원) 씨. 서울에서 혼자 왔다는 그는 "제주올레 걷고 와서 둘레길을 찾았다"면서 "다음은 어디가 좋을까요"하고 물어왔다. 부산에 머잖아 갈맷길(해안길)이 뚫릴 예정이라고 했더니, "그래요? 항구도시의 해안길, 서울사람들이 무지 좋아할 겁니다. 언제쯤 가면 될까요. 정보는 어떻게 얻죠?"라며 잔뜩 기대감을 내비쳤다.

가족과 함께 걸으러 왔다는 윤미숙(여·42) 씨는 부산사람이었다. 그는 "부산의 이기대길과 송도 해안길을 자주 걷는다"면서 "올레길이 수려한 미모의 해변 처녀 같다면, 둘레길은 화장기 없이 해맑은 산골 처녀같다"고 평했다. 그는 "부산의 해안길이 연결된다면 올레 못지않은 명품 길이 될 것으로 믿는다"고도 했다.

남은 것은 포장이다. 올레길과 둘레길은 포장을 잘 해 물건을 사게 만들고 있다면, 부산 해안길은 아직 투박한 맨얼굴이다. 안내판과 지도를 만드는 등 기초화장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3. 마을과 나무들

지리산 길의 씨앗이 되었다는 인월(전북 남원시)~금계(경남 함양군) 구간은 걷기꾼들이 가장 많이 찾는 코스다. 전체 길이가 총 19.3㎞. 하루 코스로 잡고 일찌감치 행장을 꾸려 해동갑하며 걸었다.

인월에서 장항마을 가는 길목. 수성대(守城臺)라는 계곡을 지나 고즈넉한 산길을 접어들자 길 중간에 개서어나무가 수문장인양 길손을 제지한다. 200년은 넘겼음직한 고목이다. 둥치 일부가 썩어가는 데도 가지와 잎은 정정하다. 누군가 '왕'자를 크게 적어 '왕개서어나무'라는 명찰을 달아놓았다. 나무가 우쭐할만도 하다.

곧이어 배넘이 고개다. 이런 첩첩산중에 배가 넘어간 보개라니! 남원 중군마을의 한 주민에게 사연을 캐물었다. "멀고 먼 옛날에 운봉(전북 남원시)이 호수였을 때 이곳으로 배가 넘어갔다고들 하더만. 전설이제. 믿어도 안믿어도 그만이고…."

장항마을(남원시 산내면)로 접어들자 신기한 소나무 한 그루가 발목을 붙잡는다. 윗당산의 신목이다. 사방으로 부챗살처럼 가지를 늘어뜨린 모습이 기이하다. 1600년대 입향조인 장성 이씨가 정착할 무렵 심어졌다고 하니 장항마을과 나이가 같다. 이 마을엔 중당산, 하당산도 있다.

마을 입구 중당산 앞에 이르자 막걸리를 파는 쉼터가 반긴다. 주모의 인상이 좋다. 잔술을 시키니, 고추와 양파가 그냥 따라나온다. 주모는 장항마을 주민 허영순(71) 할머니. 중당산의 귀목나무가 넓은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다. 주모가 이야기 보따리를 푼다. "저 귀목나무가 시집올 때 날 반겼어. 보라구, 지금도 살랑살랑 좋아하잖여."

할머니는 6·25 직후 반란군과 토벌대가 마을에 닥친 일 등을 어젯일처럼 들려주며 혀를 끌끌 찬다. "어찌 살았는지 몰라. 그때 산내 사람들 다 죽고 우리 영감만 제주도에 군대 가 있다가 살아났어, 천운이지."

새벽 5시에 일어나 밭일, 논일을 하고 오전 9시부터 전을 편다는 할머니는 "장사라고 해야 하루 막걸리 열통 정도 팔아. 이게 사는 재미 아니고 뭐여" 하다가도, 3년 전 막내아들이 필리핀 여자와 결혼했다고 이야기할 때는 기운이 처졌다.

두 잔을 마셨는데도, 주모는 한잔 값(2000원)만 받겠단다. 내놓은 토종꿀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한종지를 떠 맛뵈기를 시켜준다. 산골 인정에 발길이 쉬 떨어지지 않는다.

4. 등구재와 농심

	남원시 장항마을 입구에서 막걸리를 파는 허영순 할머니가 길손과 대화하고 있다.

매동·중황·상황 마을을 차례로 지나 가파른 오르막을 잠깐 잡아채니 등구재(해발 650m)다. 전남과 경남의 경계지만 고갯마루 어디에도 그런 구분은 없다. 하긴 옛날 그 마을총각과 이 마을처녀가 만나고, 장꾼들이 허위허위 넘는 고개에 무슨 경계가 있겠는가.

"산 아래 엄천강 따라 60번 지방도가 닦이기 전 전라도와 경상도 사람들은 거북이 등을 닮아서 '등구(登龜)'라 불린 이 고개를 넘어 다녔어. 인월장(남원시)을 보려면 이 고개를 넘어야제. 그 뒤엔 트럭이 다녔어. 40~50명씩 실어 날랐지. 그 트럭 돈 제법 벌었을거야. 30년도 더 된 얘기야."

등구재 너머 창원마을 들머리에서 쉼터를 운영하던 김봉귀(70) 씨의 말이다. 아직도 자신의 손으로 농사 스물댓 마지기를 짓는다는 그는 "목마른 길손들을 위해 샘을 팠어. 샘을 파놓으니 막걸리를 갖다놓으라고 하네"라며 쉼터를 연 배경을 들려준다. 김 씨는 세상인심을 나무랐다. "생각이 다 같진 않은가봐. 아직도 내 땅, 내 길 하며 텃새를 부리는 사람이 있으니. 쯧쯧."

씁쓸한 얘기를 뒤로 하고 자리를 뜨려는데 뒤에서 소리친다. "물맛 보고 가. 딴데선 이런 물맛 절대 못봐!" 발길을 돌려 목을 축인다. 농심이 끈질기고 단단하다. 순간 부산사람들의 기질을 떠올렸다. '한다면 하고, 무대포라도 좋고, 정 많고, 진짜 가슴을 열 줄도 아는….' 이러한 기질을 부산 해안길에 풀어놓으면 어떤 사람살이의 무늬가 그려질까.

5. 길에 대한 예의

	함양군 창원마을에서 쉼터를 운영하는 김봉귀 씨.

"못갑니다. 돌아가세요."

함양군 마천면 벽송사에서 빨치산 루트로 이어지는 길. 호젓한 산길에 '폐쇄구간'이라 적힌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마천면 송대마을 주민들이 외지인들의 몰지각에 맞서 길을 막은 구간이다. 이 때문에 금계~동강(15.2㎞) 구간의 벽송사~송대마을간 6㎞가 잠정 폐쇄돼 있다. 걷기꾼들은 벽송사에서 칠선계곡 입구 추성마을로 내려가 버스를 타거나 코스를 바꾸고 있다. 거의 매일 혼란이 벌어진다.

송대마을 주민들은 "길을 내줬으면 고이 이용할 것이지, 차떼기로 몰려들어 농작물을 결딴내지 않나, 집안에 들어와 곶감을 빼먹고, 똥 싸고 오줌 누고…. 에잇, 그걸 어떻게 참고 견뎌?"하며 목청을 돋웠다. 성난 주민들은 둘레길 이정표를 아예 뽑아버렸다. 송대마을은 늙은이 4가구가 사는 산촌이다.

이번 폐쇄 소동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사)숲길 양윤화 팀장은 "주민들의 삶을 존중하고 이해하지 못할 경우 길은 열리기 어렵고, 시민의식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운다"고 전했다.

말하자면 길에 대한 예의다. 당연히 그 길에서 평생을 사신 분들에 대한 예의다. 세상만사를 다 품어줄 듯한 어머니같은 지리산도 때론 화를 내고 길을 막을 수 있다는 것. 어쩌면 이 상식적인 이치를 일부 인간들만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올레길, 갈맷길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어느 길이고, 길 걷는 자는 예의가 필요하다. 송대마을 주민들은 걷기꾼들에게 지금 그걸 가르치고 있다.


■ 지리산 둘레길이란

'지리산 길'(www.trail.or.kr)은 지리산 둘레 3개도(전북, 전남, 경남), 5개시군(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 16개 읍면 80여개 마을을 잇는 총 300여km의 장거리 도보길이다. 2011년까지 각종 자원 조사와 정비를 통해 지리산 곳곳에 걸쳐 있는 옛길 고갯길 숲길 강변길 논둑길 마을길 등을 환(環)형으로 연결할 예정이다. 전체 예산 100억 원은 산림청 산하 녹색복권기금에서 지원한다.

이 길을 처음 구상한 곳은 지리산 생태보전운동을 펼쳐온 '지리산생명연대'다. 이들이 2007년 1월 '사단법인 숲길'을 창립, 사업 골격을 잡았다. 그후 2008년 3월 길 안내센터(남원시 인월면)를 준공했고 4월엔 지리산길 시범구간을 개통했다. 올해부터 사업 주체가 (사)숲길에서 지자체로 이관됐다. 예산도 2007년 20억 원에서 2008년 15억 원, 2009년 10억 원으로 대폭 줄었다. (사)숲길은 설계만 관여하고 길 조성과 사업은 각 지자체에서 추진한다.


※ 특별후원 : 부산은행, 부산농협, 화승그룹

글·사진= 박창희 기자 chpark@kookje.co.kr

  입력: 2009.08.27 20:04 / 수정: 2009.08.27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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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갈맷길 이야기 속을 걷다 |작성자 시부저기

[鏡文]

제주 올레길 / 지리산 둘레길

[반야]

제주 올레 이후 지자체마다 길, 길, 길

기사를 읽고 난 소감이 왜이리 씁쓸한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