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공동어시장 뒤편 해안길에 서면 연근해어업 전진기지인 남항과 남항대교가 한 눈에 들어온다. 그린워킹 답사에 동행한 이지훈 박사, 김수우 시인, 구모룡 교수(왼쪽부터). | |
시인 천상병(1930~1993)에 얽힌 일화 하나. 1960년대 부산 송도 암남포구와 자갈치를 왕복하던 도선은 천상병의 '호화 요트'였다. 막걸리 한잔에 갈매기를 벗삼아 하루 종일 신선놀음 해도 누구 하나 말리지 않았다. 내리고 다시 타지 않는 이상 뱃삯은 한번만 주면 됐기 때문. 가난이 '직업'인 천재 시인은 뱃머리에선 황제가 되기를 꿈꿨다. 나폴레옹처럼, 바다를 향해 손을 뻗어 '진격' 신호를 내렸다. 선주가 "애도 아니고 왜 이러십니까"라며 말렸다는 '증언'은 지금도 전설로 남아 있다. 서울 살던 천상병은 틈만 나면 부산에 내려와 죽치곤 할만큼 부산과 인연이 남다르다.
천상병이 즐겨다녔다는 부산 다대포~송도해수욕장~자갈치 해안길을 찾았다. 한국해양대 구모룡(동아시아학) 교수는 "경상도 사투리가 비릿한 포구의 내음과 뒤범벅되고 등대와 해녀와 갈매기가 뒤섞여 마치 아름다운 세상에서 소풍을 가는 듯한, 그래서 갈맷길(부산 해안길 306.2㎞)에 스토리의 생명력을 불어넣는 코스"라고 소개했다.
■부산해녀, 제주해녀
"할매, 언제부터 물질 했능교?"
"세상에 공짜는 없데이." 부산 서구 송도해수욕장에서 52년간 물질을 했다는 홍태육(72·암남어촌계 소속) 씨가 눙을 친다. 암남어촌계가 운영하는 포장마차에서 담치 한 접시를 먹는 조건으로 '계약'이 성사됐다. "내사 열아홉부터 물에 안 들어갔나. 한창 나이에 이쁘게도 못하고, 그때는 많이 울었다 아이가. 지금 생각하면 잘 배웠능기라. 이 나이에 돈도 벌고 운동도 할 수 있는 일이 어데 흔하나." 지당하신 말씀이다. 일흔에 돈을 버는 평생직업은, 청년 실업자들에게 언감생심이다.
현재 부산의 해녀는 1057명. 대부분 60~70대의 고령들이다. 50대는 손으로 꼽을 정도. 부산시 김종범 수산정책과장은 "신규 진입이 거의 없다. 곧 해녀들의 대가 끊길 수도 있다"고 걱정했다. 그런데도 부산 해녀사를 정리한 기록은 드물다. 이대로 잊혀지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 이 박사는 "단발령이 국가 인구이동의 촉매가 됐다. 부산해녀는 제주해녀와는 또 다른 근대사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며 "암남공원 산책로를 걷고 포구에 당도한 갈맷꾼들이 해녀들의 물질을 보고 그네들이 갓 잡은 싱싱한 해산물을 즐기며, 포구의 역사를 듣는 풍경을 한번 상상해 보라"고 했다. 다행히 부산시는 연말까지 7억 원을 투입해 기장군 동백·어촌계에 해녀 탈의장을 만든다고 한다.
■국내 1호, 최초, 그리고 등대
부산 서구 암남공원과 모지포 앞바다에서 물질을 끝내고나오는 암남어촌계 해녀들. | |
답: 송도해수욕장
문: 붕장어(아나고) 회의 원조는?
답: 송도라는 설이 있다
용두산은 부산의 개항기(1876~1910) 일본인 전관거류지였다. '자갈이 많은 갯가'인 자갈치는 일본인이 해수욕을 즐기던 장소. 1913년 부산거류 일본인들은 포화상태인 자갈치 대신 송도에 국내 1호 공설해수욕장을 개장한다. 송도 해녀들은 "우리가 아나고 회를 처음 만든 원조"라고 주장했다. 사실일까. 생선회 박사인 부경대 조영제(식품공학전공) 교수에게 물었다. "붕장어를 회로 즐기는 국가는 우리나라 밖에 없어요. 그런데 언제, 어디서 처음으로 먹었는지에 대한 연구는 전무해요."
향토사학자 최해군(82) 선생은 "갈맷길에 녹아든 역사의 발굴이 곧 스토리텔링이다. 해녀들의 대가 끊기기 전에 그네들의 삶과 역정을 되볼아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송도 앞바다에서 52년간 물질 했다는 해녀 홍태육 씨. | |
횟집촌과 송도아랫길을 따라 부산 공동어시장 옆 남부민포구에 닿았다. 연근해 어업전진기지답게 등대가 유독 많다. 다대포항에서도 빨간등대와 하얀등대가 즐비했다. 바다에서 항구 방면으로 볼 때 오른쪽에 설치된 빨간등대는 선박이 표지의 왼쪽으로 항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좌현표지인 하얀등대는 반대의 의미.
■먹고 마시고 웃고…진한 사람내음
그물을 손보는 다대어촌계 어민들. | |
해양문학가이자 원양어선 선장인 이윤길(50) 씨의 시 '유산이 없는 바다'가 떠오른다. '물고기 살점으로 신용카드 메우려고/ 무섭게 몰아치는 바람 속에 그물 내리다가/파도 속에서 힘주어 조타륜을 돌리다가/ 후드득 후드득 선교 유리창 우박 쏟아지는 소리에/ 나는 유산이 없다고 중얼거리네/ 따뜻한 유산이 없는 바다…'
전쟁터같은 망망대해에서 생사의 기로에 선 순간, 아이들에게 물려줄 자갈논 하나없는 신세를 한탄한 내용이다. 오늘도 그들이 목숨걸고 잡아올린 생선이 우리 식탁에 오른다.
거리에 내걸린 간판 이름들이 토속적이다. 도심을 점령한 영어 이름은 드물다. 이곳 간판은 김수우 시인의 '큰길'에도 등장한다.
송도해수욕장의 동방위 표지 등대. | |
비린내 얼룩덜룩한 간판들/ 나도 당신도 잘 어울릴 것 같은 그 이름들 따라// 유난히 많은 신호등을 건너/ 선창과 공동어시장이 종일 쏟아내는 비늘을 신고// 하루에 한번 하는 반성처럼 기도처럼/ 송도 아랫길을 지나갑니다/얼룩덜룩한 내가/ 세상에서 제일 깊은 바다를 지나갑니다.
등대, 해녀, 시, 바다, 재래시장…. 송도 암남공원에서 자갈치까지는 불과 2시간 남짓한 걷기코스지만 실로 없는 게 없다. 넘쳐나는 이야기 구슬을 갈맷길이란 목걸이에 꿰야 할 차례다.
◆ 장엄한 항만 풍경이 눈아래…숨은 명품길 두송반도
두송반도에 서면 다대포항과 감천항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김수우 시인이 다대포항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 |
다대활어위판장에서 길을 잡는다.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다대포구 끝자락에서 나즈막한 야망대를 넘어서면 다대여객부두가 나온다. 부산아시안게임을 기념해 만든 통일아시아드공원과 등대도 볼거리. 도시두송아파트 201동과 202동을 끼고 돌면 두송반도 초입을 알리는 간판이 보인다. (주)대우건설의 사유지라고 적혀 있다. 숲길을 벗어나면 오른쪽으로 다대포항이 한 눈에 들어온다. 바다와 맞닿은 두송반도의 끝자락까지는 1시간30분 정도 걸린다. 해안까지 내려가는 계단도 잘 정비된 상태.
되돌아오는 길에는 감천항이 눈을 즐겁게 한다. '구평 도로'라는 팻말을 따라 걸으면 구평동사무소를 지나 감천항으로 가는 길이 나타난다. 인문학카페 '백년어' 주인장 김수우 시인이 씨알 함석헌(19011~1989)의 이야기를 꺼낸다. "함석헌 선생은 추론은 '하는 생각'이고 영감은 '나는 생각'이라고 했어요. 두송반도에 서니 나는 생각들이 걷잡을 수 없이 번뜩거려요."
두송반도에서 내리면 원양어업의 기지인 감천항. 예전에는 감천본동을 '불미골'이라 불렀다. 지금은 근처에 화력발전소가 있다. 조상들의 선견지명이 놀랍다. 여기서 암남공원을 오르면 송도해수욕장까지 탁 트인 절경이 나타난다. 다대포에서 자갈치까지 5~6시간이면 넉넉하다.
※ 특별후원 : 부산은행, 부산농협, 화승그룹
첫댓글 제주 올레길 / 지리산 둘레길
제주 올레 이후 지자체마다 길, 길, 길
기사를 읽고 난 소감이 왜이리 씁쓸한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