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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종로문인협회 예산 문학기행 자료
- 2018. 4. 21. -
1. 해미읍성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해미읍성은 1414년(태종 14)에 덕산으로부터 충청도병마절도사 영채를 옮겨오면서부터 성을 굳건히 쌓기 시작했다. 서해안 방어를 목적으로 1491년(성종 22)에 완성했다.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전한 1651년(효종 2)까지 군사적 거점 역할을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성의 둘레가 3,172척, 높이가 15척, 성 안에는 3개의 유물과 군창이 설치되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 의하면 성의 둘레가 6,630척으로 보로 계산하면 2,219보가 되고 높이는 13척, 치성은 382첩으로 되어 있으며, 사방에 문이 있다고 했다. 이 기록을 통하여 볼 때 해미읍성의 규모가 지금보다 훨씬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미읍성이 자리한 서산시 해미면과 운산면 일대는 원래 고려~조선 전기까지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余美縣)이 각각 자리했던 곳이다. 그런데 왜구의 피해로 황폐화한 곳이 많아 두 고을을 합치고, 각 현의 명칭에서 한 글자씩을 따 해미현(海美縣)이라 이름 지었다.
해미는 그 이름처럼 바다를 끼고 있는 아름다운 고을이었다. 물론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모두 농지가 되어 바다와 멀어졌지만, 수십 년 전만 해도 서산 해미읍성에 오르면 멀리 서해가 보였다. 해미는 해안을 조망하며 내륙으로 들어가는 관문으로서 적합한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해미읍성을 침입한 왜구와 관련한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전한다. 임진왜란 직전인 1578년(선조 12) 충무공 이순신이 병사영의 군관으로 부임하여 10개월간 근무하기도 했다.
해미읍성은 이 일대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있을 때마다 주요 거점으로 활용하였다. 동학농민혁명 때에는 내포지방에서 봉기한 동학군이 집결한 장소였으며, 패퇴하면서 관군과 접전을 벌였던 장소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내포지역의 한말 의병들의 자취가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일대 해변에 서양 배가 자주 출몰한 것이나 천주교의 초기 전파지로 활용하는 등 다양한 역사적 경험들이 해미읍성에서 이루어졌다. 한편 해미현감 겸 영장을 토포사라 했는데 주변 속읍의 도적과 중죄인을 잡아들이는 직책이었다. 체포한 죄인들을 처결하는 장소였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그런가하면 동학농민군과 한말 의병들은 해미읍성을 전략적으로 유리한 거점으로 확보하고 지휘부로서 활용하였다.
1960년에 이 성을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읍성의 표본으로 삼아 사적 제116호로 지정했다. 대대적으로 보수공사를 하는 한편, 성 안팎에 무질서하게 자리잡은 민가를 철거·이전하고 종합적인 보존계획을 세웠다. 1974년에 동문·서문을 복원했으며 1981년에는 성 안의 일부를 발굴한 결과 관아터가 확인되었다.
2. 천년 고찰 수덕사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19)
서해를 향한 차령산맥의 낙맥(落脈)이 만들어 낸 덕숭산(德崇山)은 북으로는 가야산(伽倻山), 서로는 오서산, 동남간에는 용봉산(龍鳳山)이 병풍처럼 둘러싼 중심부에 있다. 이 덕숭산 자락에 많은 고승들을 배출한 한국불교의 선지종찰(禪之宗刹) 수덕사가 자리하고 있다.
백제사찰인 수덕사의 창건에 관한 정확한 문헌 기록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나,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백제 위덕왕(威德王, 554~597) 재위 시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수덕사 경내 옛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와당이 그 시대의 창건설을 증명한다.
고려시대 유물로는 충렬왕 34년(1308)에 건축된 대웅전과 통일신라 말기 양식을 모방한 삼층석탑이 있고, 고려자기, 와당 등을 출토했다. 임진왜란으로 대부분의 가람이 소실되었으나 수덕사 대웅전은 다행히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1937~40년 보수 당시 발견한 대웅전 동측 내부 전면의 기록 〈단청개칠기(丹靑改漆記)〉에 따르면 중종 23년(1528)에 대웅전 색채보수, 영조 27년(1751), 영조 46년(1770)에 대웅전 보수, 순조 3년(1803)에 대웅전 후면의 부연보수와 풍판의 개수 등 4차례 대웅전 보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673년 조성된 수덕사 괘불과 18세기 제작된 수덕사 소종(小鐘)은 조선 후기 수덕사의 꾸준한 불사활동을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수덕사대웅전(국보 제49호)
수덕사삼층석탑(지방유형문화재 103호)
수덕사칠층석탑
육괴정, 근역성보관, 사리탑 외
3. 수덕사 창건유래
백제시대에 창건된 수덕사가 통일신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람은 극히 퇴락이 심해 중창 불사를 준비했다. 당시의 스님들은 불사금을 조달하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묘령의 여인이 찾아와서 불사를 돕기 위해 공양주를 하겠다고 자청하였다. 이 여인의 미모가 어찌나 빼어났던지 수덕각시라는 이름으로 먼 곳까지 소문이 퍼졌다. 그녀를 구경하려고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중 신라의 대부호요 재상의 아들인 ‘정혜(定慧)’라는 사람이 청혼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불사가 원만 성취되면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여인의 말을 듣고 이 청년은 가산을 보태어 10년 걸릴 불사를 3년만에 끝내고 낙성식을 보게 되었다.
낙성식에 공덕주로서 참석한 청년이 수덕각시에게 같이 신라로 떠날 것을 독촉하자
“구정물 묻은 옷을 갈아입을 말미를 주소서.”
하고 옆방으로 들어간 뒤 기척이 없었다. 이에 청년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하자 여인은 급히 다른 방으로 피하려고 했다. 그 모습에 당황한 청년이 여인을 잡으려하는 순간 옆에 있던 바위가 갈라지며 여인은 버선 한 짝만 남기고 사라졌다. 갑자기 사람도 방문도 보이지 않고 크게 틈이 벌어진 바위 하나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후 그 바위가 갈라진 사이에서는 봄이면 기이하게 버선 모양의 꽃이 피더니 지금까지 피고 지기를 계속하고 있다.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던 그 여인의 이름이 수덕이었으므로 절 이름을 수덕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여인을 사랑한 정혜라는 청년은 인생무상을 느끼고 산마루에 올라가 절을 짓고 그 이름을 정혜사라 하였다.
이 절의 산내암자로는 정혜사(定慧寺)를 비롯하여 견성암(見性庵)‧금선대(金仙臺)‧환희대(歡喜臺) 등이 있다. 현재 이 절의 말사는 66개나 된다.
정혜사에는 비구 선원인 능인선원(能仁禪院)이 있고, 견성암에는 비구니 선원인 제일선원(第一禪院)이 있다. 또 금선대에는 진영각(眞影閣)이 있으며, 진영각 안에는 만공선사의 영정과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환희대는 수필집 《청춘을 불사르고》를 지은 김일엽(金一葉)이 기거하다 열반한 곳이다. 견성암 또한 김일엽 스님이 기거했던 곳이다. 바로 수필문학과 관계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밖에 이 절에서 소장하고 있는 문화재로는 노사나불괘불탱(蘆舍那佛掛佛幀, 보물 제1263호), 만공탑(滿空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81호), 칠층석탑(예산군 문화재자료 제181호), 근역성보관(槿域聖寶館)에 소장된 거문고(예산군 문화재자료 제192호) 등이 있다. 만공탑은 만공선사를 추모하기 위하여 제자들이 세운 탑으로서 구형(球形)의 둥근 돌을 올린 특이한 부도이다.
근역성보관(槿域聖寶館)에 소장되어 있는 거문고는 만공이 고종의 둘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으로부터 받은 귀물이다. 이 거문고에는 이조묵(李祖默)이 새긴 ‘공민왕금(恭愍王琴)’이라는 글씨와 함께 만공의 시가 새겨져 있다.
4. 수덕사 禪미술관
덕숭총림 수덕사 앞에 옛 수덕여관이 있다. 한국미술계의 거장 고암 이응로(1904~1989) 화백이 나이 마흔 살에 수덕사 앞에 터를 잡아 둥지를 틀었다. 바로 수덕여관이다. 이 화백은 1944년에 수덕여관을 열고 이후 15년간 수덕사 일대 자연과 풍광을 화폭에 담았다.
이름대로 여관 구실도 했다. 195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수학여행차 수덕사를 참배한 고교생들은 으레 수덕여관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현대문화예술의 산실이자 숱한 사람들의 인연의 때가 묻은 수덕여관은 반백 년만에 ‘수덕사 선(禪)미술관’이라는 새 문패를 달고 관람객을 맞는다.
‘수덕사 禪미술관’이라고 쓴 큰 바위를 세워 간판 구실을 한다. ‘수덕여관’이라고 쓴 현판 글씨가 예사롭지 않다. 고암 선생의 친필이다. ‘ㄷ’자형 초가집 대문에는 고암 선생의 등신 사진이 걸려 있어 마치 고암 선생이 반기는 듯하다. 눈에 띄는 작품은 단연 고암의 습작들이다. 수덕여관 다락방에서 발견한 희귀본으로 수덕사 전경을 편안하고 넉넉한 붓질로 보여준 수묵담채는 당시 수덕사의 고즈넉함이 담겨있다.
해강 김규진의 문하에서 수업한 고암은 1935년 일본 유학을 통해 남화의 대가인 마츠바야시 게이게츠(松林 桂月)에게 사사받았다. 또 근대적 교육기관인 도쿄 가와바타(川端)미술학교와 혼고회화연구소(本鄕繪畫硏究所)에서 동.서양화를 수학했다.
그는 전통적인 관념적 동양화로 출발했지만 1930년대 말부터 정확한 데생과 현대적 감성에 기초한 특유의 진경산수화를 선보였다. 해방 후부터는 과감한 생략과 강조의 화풍으로 변화했는데 이는 1950년대 후반의 반추상 회화의 전초적 양식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수덕사를 풍경삼아 그린 편편의 작품 역시 이같은 양식이 가미되었다.
건물 옆 커다란 바위에 그린 암각화는 1969년 동백림 사건 당시 이곳에 잠시 머물면서 남긴 역사적인 작품이다. 안내문을 펼치면
동백림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난 후 지친 몸과 마음을 다독이며 이 곳 수덕여관에 쉬면서 암각화를 제작할 때 작고한 박귀희 여사께서
“여보, 너무나 고생하셨고 이제 나이도 있으니 좀 쉬지 않고 왜 그 어려운 돌에 글자를 새긴다고 그러세요? 좀 쉬세요.”
라고 하자 고암 선생께서는
“당신은 모를꺼야. 삼라만상의 성쇠(盛衰)를 만들고 있다네.”
암각화 주변을 서성이다 보면 끊임없이 성하고 쇠하는 세상살이를 읊조렸던 고암의 마음을 새삼 읽을 수 있다. 고암은 프랑스와 인연이 깊다. 1959년 프랑스로 가서 1989년 숨을 거두기까지 30여년간 수십 차례 세계유명 전시회에 출품, 왕성한 작품활동을 했다. 특히 1963년 프랑스 살롱도톤느전에 작품을 출품하면서 유럽 화단에 알려졌고 1968년 상파울로 비엔날레전에서 명예대상을 수상하면서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2년여 옥고를 치르고 난 1969년부터는 파리에 정착하여 동양의 서예와 문인화를 바탕으로 서양의 콜라주기법을 활용한 독특한 화풍을 일구어 냈다.
수덕여관은 고암의 부인 박귀희 여사가 2002년 세상을 떠나면서 방치돼 오다 지난해 수덕사가 인수해서 1년만에 복원했다. 예산군과 충남도가 지원한 4억여 원의 예산으로 미술관으로 새로 태어났다.
덕숭총림 수덕사 주지 옹산 스님은
“수덕여관의 역사와 전통은 물론 고암 선생의 암각화 등이 어우러진 고암예술의 최대 유적지로 만들겠다. 미술애호가와 관광객들의 문화예술 답사코스로 각광을 받을 수 있도록 운영해나갈 계획”이라고 했다. 그리고 상설미술관으로 활용하여 미술작품을 전시하고 문화계인사들의 ‘만남의 장’이나 일반인의 템플스테이 장소로도 활용하는 등 다목적 문화포교 공간의 역할을 할 것이라고 했다.
지난 1996년 충청남도 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되었다.
5. 윤봉길 의사 생가와 충의사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40-1)
충남 예산은 매헌 윤봉길 의사가 태어나 자란 곳이다. 수암산, 덕숭산, 가야산이 에워싼 조용한 곳으로 예산에서 북서쪽 23km 지점에 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독립투사인 매헌 윤봉길 의사가 농촌계몽과 애국정신을 길렀던 역사의 현장이다. 윤의사의 의거와 애국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충의사를 건립했다.
매년 4월 29일에는 윤의사의 애국충정을 기념하는 매헌 문화제가 열린다. 윤의사의 귀중한 유품은 보물 제568호로 지정하여 기념관에 전시하고 있다.
매헌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이곳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부친 윤항공과 모친 김원상 여사 사이에 5남 2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1세 때에는 덕산 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이듬해인 12세 때 일제의 식민지 교육을 받지 않겠다고 스스로 자퇴하였다. 19세 되는 해에 농촌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농촌부흥운동을 일제는 반체제운동이라며 탄압하자 국내에서 활동이 어렵다고 생각한 윤의사는 1930년 23세 되던 해에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그의 나이 25세 때인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개최한 일제의 천장절 겸 전승기념 축하식장을 폭파하는 거사에 성공하고 즉시 체포되었다.
그해 5월 25일 상해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1월 18일 일본 대판 위술형무소에 이감되었다가 한 달 뒤인 12월 19일 금택형무소 교외 삼소우 공병작업장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하였다.
13년이 지난 1945년 해방을 맞았고 이듬해 광복회 회장이었던 이강훈 선생이 일본으로 건너가 윤의사의 유해를 모셔다 서울 효창공원에서 국민장으로 안장하였다.
이곳 충의사는 윤의사의 영정을 모신 본전지역과, 윤의사가 태어나 4세까지 살았던 생가(광현당)지역, 그리고 4세 때 이사하여 23세에 중국으로 망명하기 직전까지 살았던 성장가(저한당)로 나눈다.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는 유물 56점이 전시되어 있고, 25세의 짧은 생애를 복합 영상모형으로 연출하여 충의정신의 학습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6. 백제고찰 향천사(香泉寺)
(예산군 예산읍 주교리)
충남 예산의 향천사는 백제 때 지은 옛절이다. 읍내에서 가까우면서도 산이 제법 깊은 금오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어 예산 사람들에겐 가벼운 산책이나 산행 장소로 낯익은 곳이다. 대도시로 치면 경관 좋은 외곽지역에 속하는 곳이기도 하다. 향천사에는 몇 기의 부도와 9층석탑이 있으며, 작은 절이지만 이름처럼 무척이나 깔끔한 분위기를 가진 절이다.
백제 의자왕 16년(650년) 의각(義覺)스님이 창건했다. 의각은 사신을 따라 당나라에 갔다가 귀국하면서 석불을 돌배에 싣고 백제 오산현 북포 해안(지금의 예산읍 신암면 창소리)에 이르러 알맞은 절터를 잡지 못해 몇 달을 머물렀다. 이때 배 안에서 치는 종소리가 강촌을 진동했다고 하여 인근 마을 이름을 종성리(鐘聲里)라고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금오(金烏) 한 쌍이 날아와 배주위를 돌고 사라지기에 뒤를 밟아보니 지금 향천사 자리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이를 기이하게 여겨 주위를 살펴보니 향내가 그윽하더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산 이름을 금오산이라고 이름 짓고 절이름을 향천사(香泉寺)라고 지었다. 부속 암자로는 비구니들이 수행하고 있는 부도암(浮屠庵)이 있다.
천불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73호) 안에는 현재 불상 1,516위가 봉안되어 있다. 토단(土段) 3면에 높이 15cm 이상의 크고 작은 좌불상을 봉안했는데, 소불은 거의가 석고상이고 대불은 석재로 만든 것도 있다. 나한전 앞에는 구층석탑(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74호)이 있다.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 때 도괴되어 완전하지는 않지만, 절의 연혁을 말해 주는 좋은 자료이다.
또 부도 2기가 있는데, 이 중 1기(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79호)는 이 절을 창건한 의각의 부도라고 전한다. 다른 1기는 임진왜란 때 이 절의 승려 50인을 이끌고 계룡산 갑사(岬寺)에 있던 기허(騎虛) 영규(靈圭)대사의 승병과 합세하여 왜적을 무찌른 혜희(惠希)스님의 부도이다.
7. 향천사 천불전과 9층석탑
현 천불전(千佛殿)은 창건 당시 이곳에서 세웠다는 일설과 다른 곳에서 옮겨 왔다는 설이 있다. 당초에는 3,053불을 모셨으나 현재는 1,515불이 보존되어 있다. 방영웅의 소설 《분례기(糞禮記)》의 주인공 똥례가 천불전의 나한상 중에서 미래의 신랑감을 찾는 장면이 나온다. 예부터 미혼자가 천불전을 참배하여 첫 번째 눈에 들어오는 불상과 같은 사람이 자신의 결혼 상대자라는 전설이 있다.
향천사 구층석탑은 나한전(羅漢殿전) 앞에 있다. 백제 의자왕 12년 의각대사가 금당 좌우에 두 기의 석탑을 세었으나 임진왜란 때 건물과 석탑이 전소되었다. 창건 당시의 건물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으나 석탑 하나만은 아직 남아 있다.
8. 예산은 소설 《분례기(糞禮記)》의 무대
(예산읍 시장 일원)
예산과 향천사는 소설 《분례기(糞禮記)》의 무대이기도 하다. 이름도 선(禪)스러운 ‘대휴문(大休門)’ 안쪽의 천불전에 똥례가 신랑점을 치던 불상들이 있다.
장편소설 〈분례기〉는 1967년 ≪創作과批評≫ 여름·가을·겨울호(통권 6·7·8호)에 전3부가 게재되었으며, 1968년 홍익출판사(弘益出版社)에서 같은 제목의 단행본으로 간행하기도 하였다. 지은이의 데뷔작이자 대표작으로 손꼽는 작품이다.
간결한 문장과 빠른 구성, 객관적 묘사와 토속적 사실주의, 대담하고 원색적인 성묘사 등 충청남도 예산 장터와 어느 산골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똥례(糞禮)’라는 여인의 기구한 삶을 그려내어 당대 문단의 큰 주목을 받았다
배경은 충청도 예산의 읍내 시장과 어느 시골 마을이고 토속적인 삶의 세계와 비극적 여인의 삶을 진솔하게 그려냈다. 줄거리를 살펴보면
주인공 똥례는 농촌의 한 룸펜인 석 서방의 맏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이름과 출생의 긴밀성은 전체 구조를 암시해 주면서 이야기를 이끌고 있다. 첫 번째 전환점이 되는 사건은, 가난한 집안을 돕기 위해 용팔이와 나무를 하러 다니다가 겁탈을 당한 것이다. 그로 인해 똥례는 비슷한 처지에서 자살을 선택한 봉순이처럼 자살을 결심하기도 하지만 결국 포기한다.
두 번째 전환점은, 처녀성을 잃은 똥례가 가마도 못 타고 상엿집에서 신부 단장을 한 후에 소문도 없이 남의 집 재취(再娶)로 들어간다. 그러나 그 결혼 역시 성공하지 못한다. 노름에 미친 남편 영철 때문에 숨막히는 생활을 하게 된다.
세 번째 전환은, 노름에서 딴 것을 모두 잃은 영철이가 그 화풀이를 똥례에게 했다. 그래서 똥례는 정절을 지키지 못했다는 누명을 쓰고 쫓겨난다. 똥례는 한 미친 여인의 뒤를 따라가다가 또 겁탈당하게 된다. 그래서 똥례는 정신 이상자가 되어 친정에 돌아온다. 그러나 봉순의 묘지에 들렀다가 다시 도망쳐서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먼 길을 떠난다. 길 떠나는 똥례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순결을 빼앗은 용팔이었다.
<분례기>의 특징은 속담 민요 등을 이용한 표현의 토착성을 들 수 있겠다. 드라마적 원색성, 간결한 문장, 대담한 성(性) 묘사를 통해 작가 특유의 필력을 과시하고 있다.
이 작품은 가난한 농촌의 실상을 리얼하고 객관적인 문체로 표현함과 동시에 토속적인 어휘의 구사와 콩조지·호랑할매·노랑녀·용팔·병춘 등 농촌 사람의 전형이 부각되어 있다. 또한 <물명주 석자>를 부르면서 관계를 하는 등 대담한 성묘사와 노름에 미친 석서방·영철 등의 인물 군을 통하여 무절제한 삶의 파행성을 드러내 보인다.
가난한 농촌민의 실상을 성공적으로 부각시켜 토속성을 가미시킨 이 작품은 그 근본 바탕에 깔려 있는 가난한 농민들의 체념적 운명관과 자연주의적인 사건전개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작가 방영웅(方榮雄)은 충남 예산 출생이며 휘문고를 졸업했다. 1967년 <분례기>를 발표하여 문단에 등단했으며 그의 작품 세계는 허무주의적 경향을 지니고 있다. 객관적인 묘사력과 희화적인 사건 구성을 통해 토속적 삶의 세계를 그렸다. 주요 작품으로는 <달>, <춘분>, <첫눈> 등이 있다.
9. 추사 김정희 고택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서화가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옛 집이다. 건물을 동서로 길게 배치했는데, 안채는 서쪽에 있고 사랑채는 안채보다 낮은 동쪽에 따로 있다. 사랑채는 남자 주인이 머물면서 손님을 맞이하던 생활공간인데, ㄱ자형으로 남향하고 있다. 각방의 앞면에는 툇마루가 있어 통로로 이용한다.
추사 고택은 그의 증조부이자 영조의 부마인 월성위 김한신이 1700년대 중반에 건립한 53칸 규모의 양반 대갓집으로 충청남도기념물 제24호이다. 추사 선생이 태어나서 성장한 곳으로, 주변에는 선생의 묘를 비롯하여, 월성위와 화순옹주의 합장묘, 화순옹주 정려문, 백송, 화암사 등이 있다.
옛 집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 있는 추사의 묘는 2단으로 정지한 후 안치되어 있다. 묘 앞에는 상석이 놓여 있고, 오른쪽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일찍이 북학파인 박제가의 제자가 되어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실사구시에 입각한 학문을 연구했다. 24세 때에는 아버지를 따라 중국 청나라에 가서 금석학과 서체 등을 배웠으며, 순조 16년(1816)에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하여 밝혀냈다.
순조 19년(1819)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 등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헌종 2년(1836)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다. 윤상도의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헌종 6년(1840)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9년만에 귀양에서 풀렸다. 제주도에 지내면서 그 동안 연구해 온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철종 2년(1851)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의 일에 연루되어 또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만에 풀려 돌아왔다. 그 뒤 아버지 묘소가 있는 과천에서 지내면서 학문과 예술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저서로는 《완당집》, 《예당금석과안록》, 《실사구시설》, 《완당척독》, 《담연재시고》 등이 있다. 서예작품으로는 묵란도, 묵죽도, 불이선란과 국보로 지정된 세한도 등이 있다.
10. 추사 고택의 백송
옛 선비들은 나무를 많이 심었다. 굳이 그들의 자연주의 철학을 들먹이지 않아도 농경문화권의 민족에게 나무를 심는 일은 일상 다반사였다. 지위가 높은 선비는 물론이고, 농사 짓는 민중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선조들이 나무를 심은 뜻에는 민족이 살아온 살림살이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게 마련이다.
평범한 백성들이 심은 나무에는 백성의 살림살이가, 학자들이 심은 나무에는 그들의 철학이, 종교인이 심은 나무에는 종교적 신앙이, 정치가들이 심은 나무에는 정치의 역사가 담겨 있다. 또 오래 전 국가간의 외교를 담당했던 선비들이 심은 나무에는 어렴풋이나마 외교의 역사가 담겨 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중국의 연경에서 돌아올 때에 가져와 심은 나무가 예산 용궁리의 백송(白松)이다. 그가 살아온 내력은 물론이고, 중국과의 학문적 교류 사정을 그대로 담은 한 그루의 나무가 백송이다. 충남 예산의 추사 고택에 살아있는 천연기념물 제106호 예산 용궁리 백송이다.
이름에서 보듯이 백송(白松)은 소나무의 한 종류인데, 줄기 표면에 하얀 빛이 도는 특별한 나무다. 중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나무가 아니다. 백송 줄기는 하얀 색을 바탕으로 밝은 회색의 얼룩무늬가 아름다운 나무다. 백송의 다른 이름들도 모두 이 하얀 줄기와 얼룩무늬를 보고 지었다. 중국에서는 흰 색 줄기의 특징에 기대어 백피송(白皮松)이라는 이름으로, 또 회색 무늬가 호랑이 가죽을 닮았다고 해서 호피송(虎皮松)이라고 부른다.
줄기의 빛깔을 제외하면 백송은 여느 소나무와 크게 다를 게 없다. 다른 점이 있다면, 잎이 나는 방식이다. 두 개의 잎이 모여 있는 소나무와 달리, 백송은 세 개의 잎이 한데 모여 있다. 그밖에 대부분의 생육 특징은 우리 소나무와 매우 비슷하다.
예산 용궁리에서 태어난 김정희 선생은 어린 시절을 서울에서 보냈다. 지금의 서울 종로 적선동 정부종합청사 부근이다. 당시 이곳에는 영조 임금의 둘째 딸인 화순옹주가 혼사를 치른 뒤 살던 집이었다. 화순옹주는 김정희의 증조부인 김한신(金漢藎, 1720~1758)과 결혼을 했고, 김한신은 임금으로부터 월성위라는 작위를 얻었다. 그리고 그들이 살던 집은 월성위궁(月城尉宮)이라고 불렀다. 어려서부터 천재성을 드러낸 김정희는 이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한양의 월성위궁에는 영조가 그의 딸 부부에게 선물로 내린 나무가 있었다. 영조는 화순옹주가 살 집을 짓고, 자신이 아끼던 나무 한 그루를 옮겨 심도록 했다. 그 나무가 바로 백송이다. 영조의 백송은 긴 세월을 잘 살아오며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난 1990년 7월에 태풍을 맞아 한 순간에 쓰러져 지금은 다시 볼 수 없는 나무가 됐다.
추사가 중국의 연경에 갔을 때 드러났다.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특별한 나무를 만났다. 낯선 타국에서 고향의 그리운 가족을 향한 향수를 달래는데 백송만한 것이 있었을까.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백송 씨앗을 가지고 왔다. 그 씨앗을 고향 집 뒷동산, 그의 고조부 김흥경의 묘지 앞에 심었다. 짬 날 때마다 돌아보며 애지중지 키운 것은 물론이다. 지금의 예산 용궁리 백송이 바로 그 나무다.
용궁리 백송의 밑동 부분에는 예전에 부러진 두 줄기의 흔적이 남아있다. 청년 김정희의 나이 스물 다섯, 서기 1810년 전후의 일이다. 그러니까 이 백송은 올해로 2백 살을 갓 넘긴 셈이다. 나무가 서 있는 김흥경의 묘지는 추사 고택에서 북서쪽으로 난 조붓한 도로를 따라 약 600 미터 떨어진 곳에 있고 나무는 바로 그 묘지 앞에 있다.
말없이 200년을 살아온 나무에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선비가 살아온 내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셈이다.
11. 추사 김정희 가문의 원찰 화암사(華巖寺)
오서산 중턱에 있는 화암사의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백제시대 고찰(古刹)임은 분명하다. 화순옹주의 부군이자 영의정 김홍경의 아들 월성위 김한신이 재건하고 중수한 절이다. 대대로 추사 가문과 인연이 깊은 절이다.
추사 김정희 선생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이 조선 영조의 부마가 되었을 때 별사전(別賜田)으로 받은 일대의 전토(田土)에 포함되어 추사 가문에 세습되었다. 영조 28년(1752) 월성위가 중건하였으나 그후 대웅전은 소실(燒失)되었고 요사채만 남아있다. 추사 선생은 이곳 오석산(烏石山) 화암사에서 불교학에 심취하기도 했다. 현종 12년(1846) 제주도 적소에서 문중에 서한을 보내어 화암사 중건(重建)을 지시한 사실도 있다.
화암사(花巖寺)는 추사 불교의 원천이다. 추사고택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작은 절이다. 증조부인 월성위 때부터 추사 집안의 원찰(願刹)이었다. 추사는 유학자이면서도 ‘해동유마거사(海東維摩居士)’라는 칭호를 들을 정도로 석학(釋學)에 조예가 깊었다.
조선시대 승려는 기생, 백정, 광대와 함께 팔천(八賤)에 들어가는 천민이었다. 그런데 추사 같은 사대부가 불교를 좋아하고 불교에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추사는 구암사의 백파선사(白坡禪師)와 삼종선(三種禪)에 관한 논쟁을 통하여 조사선(祖師禪)에 대해 비판을 가할 정도로 선의 세계에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금강경을 호신용으로 휴대하고 다닐 정도였다. 차로 유명한 전남 대흥사의 초의선사(草衣禪師)와도 차와 불교를 매개로 특별한 우정을 맺었다. 추사는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화암사를 출입하면서 불교 분위기에 접했고 여러 불경을 보고 선(禪)도 익혔던 것 같다.
12. 추사체의 음각 각자
화암사 대웅전 뒤편의 암벽에 추사가 쓴 ‘천축고선생댁(天竺古先生宅)’과 ‘시경(詩境)’이라는 글자는 추사 가문과의 특별한 인연을 말해주는 자료이다. 천축(天竺)은 서역의 인도를 말하고 고선생(古先生)은 부처를 유교식으로 표현한 말이다. 불교 사찰을 유교식으로 번역하면 바로 ‘인도의 부처님 집(天竺故先生宅)’이 된다. 불교와 유교가 어우러진 집이라는 뜻이다.
‘시경(詩境)’이란 ‘아름다운 경관’이라는 뜻이다. 추사체의 활달한 필체가 바위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글씨가 새겨진 병풍암은 가로가 30m 세로는 3∼4m 정도의 크기다. 절에서도 이 바위를 병풍암이라 부른다.
‘천축고선생댁(天竺古先生宅)’ 글씨가 있는 병풍바위는 충청남도 지정 기념물 제151호로 보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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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귀중한자료 많이 공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