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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계의 반석위에 자리잡은 옥산서원의 전경
정문을 들어서면 누. 강당. 사당, 등의 건물이 일직선사에 배치되어 있다.
무학산을 뒤로 하고있는 옥산서원의 앞 부문이다.
고요히 스스로 수학한다는 뜻을 가진 서재(西齋) 암수재(闇修齋) 전경인다. 둘레담을 높지않게 쌓아 친근감을 더하였다.
외삼문인 역락문(亦樂門) 안에 옥계수(玉溪水)를 끌어 들여 작은 시냇물을 흐르게 만들었다. 이름하여 '명당수(明堂水)'이다.
누 마루로 오르는 나무계단을올라 계자난간이 둘러쳐진 건물이 '무변루(無邊樓)'요 나무계단 오른쪽 온돌방에 군 불을 지피는 아궁이가 보인다. 대청마루는 '구인당(求仁堂)'의 대층마루이며 기둥사이로 민수재(敏修齋)가 보인다.
암수재의 온돌방에서 내다본 강학공간 민구재(敏求齋)는 인(仁)을 구함에 민첩해야한 구인당(求仁堂)옥산서원의 현판이보인다 ▲ 다는 뜻을 담고 있다.▲
역락문을 들어서면 바로 무변루가 위치하고 있다. 위층은 누마루이며, 아래는 강당과 통하는 문역할을 한다. 풍월무변(風月無邊)에서 따온 무면루(無邊樓)의현판은 석봉 한호의 글씨이다.
멀리 있는 벗이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의 뜻이 담긴 역락문(亦樂門)입니다.
계자난간넘으로'玉山書院'의 현판이 내려다 보이는 다섯 칸 건물이 '구인당(求仁堂)'대청은 '무변루(無邊樓)'이며 무변루 기둥사이로 보이는 왼쪽 건물이' 암수재(闇修齋)' 이다
옥산서원(玉山書院)▲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글씨 .
무변루와 암수재 사이로 보이는 공간 처마가 맞닿아 아 무변루 누마루로 오르는 나무계단▲ 기자기 정겨웁다.▲
구인당의 편액들 구인당(求仁堂)은 석봉 한호의 글씨이다.
해립재(偕立齋)편액▲ 위의 玉山書院편액은 사액받은 편액으로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의 글씨▲
보물 제 413호 독락당(獨樂堂) ▼ '독락이라함은 성리학을 가우하며 천진(天眞) 본체(本體)를 홀로 즐긴다는 뜨으로 이곳에서 자연을 관조하며 학문을 한 회재가 인지(仁智)의 낙에 유연했음을 알 수 있다.
이언적이 성리학 연구에 골몰하든 옥산정사 독락당(상랑채에 해당한다)
이 언적이 정계에서 물러나(1532) 6년간 성리학 영구에만 열중하던 정자 이름하여 계정(溪亭)
둘레담으로 쌓여 있는 회재 이언적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 체인묘 옆에 보이는 건물은 전사청이며 '體仁/체인'이란 어질고 착한 일을 몸소 실천한다.라는 뜻이다.
정덕계유사마방목 ▲
보물 제524호 정덕계유사마방목(正德癸酉司馬榜目) 1513실시한 사마시의 합격자 명단으로, 합격 당사자인 이언적의 인장이 찍힌 수택본(手澤本)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크고 또 조선시대의 과거제도 및 주요인물의 전기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다.
▲ 해동명적
보물 제526-1호 해동명적(海東名跡) 이 책은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인 신공제(1469∼1536) 선생이 우리나라 역대 명필의 글씨가 돌에 새겨 있는 것을 탁본하여 상하 2책으로 묶은 것이다. 상권에는 조선시대 문종과 성종의 어필을 앞에 따로 놓고 다음에 신라시대 최치원, 김생, 영업의 3인과 고려시대 탄연, 이암, 신덕린 등의 3인을 합한 6인의 글씨를 모아 놓았다. 하권에는 이강, 승려 혜근, 성석린, 박초, 권근, 이첨, 정도전, 정총, 민자복, 신색 등 12인의 글씨가 실려 있다.보물 제526 1호. 상·하 2책. 비석의 글씨를 탁본하여 성책한 것이다. 개인 소장. 서문과 발문이 없어 정확한 간행연도와 필자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 稗官雜記〉에 신공제가 최치원을 포함한 동국명인(東國名人)의 필적을 모아 〈해동명적〉의 제목으로 간행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 말한 〈해동명적〉이 이 책으로 생각된다. 또 간행연대는 중종대의 서예가 박경(朴耕)이 죽은 지 10여 년 후라고 한 점에서 대략 1520년경으로 생각된다. 상책에는 첫머리에 조선 문종과 성종의 어필을 두고, 신라의 최치원·김생(金生)·영업(靈業), 고려의 탄연(坦然)·이암(李嵒)·신덕린(申德隣) 등 8명, 하책에는 이강(李岡)·혜근(慧勤)·성석린(成石璘)·박초(朴礎)·권근(權近)·이첨(李詹)·정도전(鄭道傳)·정총(鄭摠)·민자복(閔子復) 등 12명의 글씨를 수록했다. 탁본의 상태가 깨끗하고, 현재 비가 전해지지 않는 필적이 많아 고대의 서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삼국사기 ▲ 보물제525호 삼국사기(三國史記) 는 고려 인종 23년(1145)경 김부식이 신라·고구려·백제 3국의 정치적인 흥망과 변천을 중심으로 편찬한 역사서이다. 인종의 명에 따라 김부식의 주도하에 11명이 참여하여 편찬되었다. 이 책이 만들어진 12세기 전반의 상황은 고려 건국 후 200여년이 흘렀고 문벌귀족문화가 절정기에 이르렀으며, 유교와 불교가 서로 어우러져 고려 왕조가 안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자기 역사의 확인 작업으로 전 시대의 역사정리가 필요하였다. 조정에서는 거란을 물리친 후 자신감에 차 있었고 여진의 위협에 대한 강렬한 국가의식이 고조되어 있었다. 또 한편 문벌귀족간의 갈등과 대립이 심각했는데, 분열과 갈등을 국가가 망할 수 있는 원인으로 강조함으로써 현실비판의 뜻과 역사의 교훈을 후세에 알리려 하였다 .
옥산 서원은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7에 있는 서원으로 1967년 사적 제154호로 지정되었다. 1572년(선조5)에 경주부윤(慶州府尹)인 서간(西澗) 이제민(李齊閔, 1528-1608)과 유림의 공의로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의 덕행과 학문을 기릴 서원 자리가 정해지고 다음해인 1573년(선조 6)에 경주의 서악(西岳) 향현사(鄕賢祠)에 있던 위패를 모셔 와 창건되었다. 서원은 1574년(선조 7)에 ‘옥산(玉山)’ 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임진왜란 때에 병화를 면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 훼철도지 않은 서원중의 하나이다. 회재는 중중 때의 성리학자며 문신으로 본래 이름은 적(迪)이었는데, 후에 중종의 명으로 언(彦)자를 더 붙여 언적(彦迪)으로 되었다고 한다. 그는 설서(設書), 이조정랑(吏曹正郞),홍무관 교리, 직제학(直提學), 전주부윤, 이조. 예조. 형조 판서, 경상도 관찰사, 좌찬성(左贊成) 등을 역임했으며, 1547년(명종 2) 이른바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江界)에 유배된 후 그곳에서 삶을 마감한다. 양재역은 당시 한양에서 남쪽으로 나가는 첫 번째 역이었다. 이 양재역의 벽에 문정왕후(文定王后)와 권신 이기(李芑, 1476-1552) 등을 비난하는 글이 발견되어 윤임(尹任, 1487-1545) 등 이에 연루된 인물들이 극형을 받거나 처벌을 받았는데, 이 사건은 반대파인 윤원형(윤원형, ?-1565) 일당이 꾸며낸 사건이었던 것으로 역사가들은 해석한다. 여하튼 회재는 주희의 주이론적(主理論的) 입장을 성리학의 정통으로 밝힘으로써 조선시대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정립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호를 ‘회재(晦齋)’라 한 것은 주희의 호인 회암(晦巖)의 학문을 따른다는 견해를 보여주는 것으로 회재의 성리학은 퇴계에게 이어져 영남학파의 선구가 되었다. 회재의 시호인 ‘문원(文元)’은 그가 조선조 도학의 선구자임을 적절하게 나나낸다. 회재는 1610년(광해군 2 )9월, 조선조 도학의 학문과 실천의 모범으로서 우뚝 선봉우리였다고 평가받는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황 등과 함께 문묘에 종사되었다. 이들을 동방오현(東方五賢)이라 한다. 옥산서원은 서향을 했는데. 동. 서. 북쪽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으로는 트여 있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자계(紫溪)를 끼고 올려다보면 동구(洞口)가 열리는 곳에 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서원에서 서쪽 앞으로 마주 보이는 산은 무학산(舞鶴山)으로 북쪽의 자옥산(紫玉山)에서 갈자져 나온 맥이다. 서원 뒤 동북쪽에는 화개산(華蓋山)이 있고 서원 북쪽에는 도덕산(道德山)이 위치한다. 서원은 화개산을 주산으로 하여 앞으로 흐르는 청결한 자계와 주변의 울창한 수목이 빼어난 경관을 이룬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계곡물은 용추(龍湫/龍沼)를 이루는 상. 중. 하 폭포가 계곡 바위에 부딪혀 높은 소리를 내며 서원 오른쪽인 북쪽에서 남쪽으로 감돌아 흘러 나간다. 서원은 이 일대의 세심대(洗心臺) 위에 위치한다. 세심대는 너럭바위로서 용추에서 떨어지는 물로 마음을 씻고 자연을 벗 삼아 학문을 구하는 곳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서원 경내의 건물로는 체인묘(體仁廟), 구인당(求仁堂), 민구재(敏求齋), 암수재(闇修齋), 무변루(無邊樓), 역락문(亦樂門), 신도비각(神道碑閣), 경각(經閣, 문집판각(文集版閣), 제기실(祭器室), 청분각(淸芬閣), 포사(庖舍), 체인문(體仁門), 세심문(洗心門), 감생문(監牲門) 등이 있다. 건물들은 전면에 강학공간을 후면에 제향공간을 형성하여 전형적인 전학휴묘(前學後廟)의 배치를 취하고 있다. 서원의 외삼문인 역란문을 들어서면 앞으로 작은 내가 흐르고 이곳을 건너면 무변루에 이르게 된다. 역락문과 무변루 사이의 작은 내는 계류를 끌어들여 흐르게 한 서원의 명당수다. 역락문은 [논어] [학이]편에 나오는“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하냐(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에서 취한 것이다. 무변루는 본래 납청루(納淸樓)라 하였다가, 훗날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이 주돈이(周敦頥, 1017-1073)의 ‘풍월무변(風月無邊)에서 취하여 ’무변루‘라고 고쳤다고 한다. 무변루는 정면 일곱 칸, 측면 두 칸에 맞배지붕을 한 건물인데, 가운데 세 칸은 대청이고 그 양측은 각각 정면 한 칸, 측면 두 칸의 온돌방이며, 그 밖으로 좌우의 각 한 칸에는 보첨(補櫼) 형식을 하여 툇간처럼 덧붙인 누마루가 조성되어 계자난간이 둘러 있다. 가운데 대청은 외부 쪽으로는 벽체와 판문을 달아 공간을 제한한 반면, 강당 쪽으로는 트이게 하여 내부 지향적인 공간 구성을 했다. 한편 양 끝 의 누마루에 서면 서원 쪽으로는 강당 앞마당이 처마 사이로 보이고 서원 밖으로는 계곡과 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무변루 아래층의 가운데 칸에는 문을 달았고 양쪽에는 위층 온돌방의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다. 무변루는 외삼문에서 보면 이층이지만 강당 쪽에서는 위층만 보인다. 무변루를 통해 계단을 딛고 오르면 구인당의 안마당에 이르게 된다. 구인당 앞 좌우의 동재와 서재는 강당인 구인당과 함께 강학공간을 이룬다. 강당은 전면 다섯 칸, 측면 두 칸의 초익공(初翼工)을한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가운데 새 칸은 대청마루이고, 오른편인 남쪽 방은 양진재(兩進齋)이고 오른편인 북쪽방은 해립재(偕立齋)이다. 구인당의 ‘구인(求仁)’은 성현의 학문이 다만 ‘인(仁)’을 ‘구(求)’하는 데 있다는 회재 성리학의 핵심을 나타내는 사상으로 회재의 저서 구인록(求仁錄)에서 취한 것이다. 구인당의 좌측 협실인 양진재의 ‘양진(兩進)’은 ‘명(明)’ 과 ‘성(誠)’ 둘을 갖추어 전진함을 말하는 것으로 ‘명’은 도덕을 밝힌다는 뜻이고, ‘성’은 의지를 성실하게 한다는 뜻이다. 우측 협실인 해립재의 ‘해립(偕立)’은 ‘경의해립(敬義偕立)’ 즉 경건한 마음가짐과 신의로써 사물에 대처한다는 뜻에서 취한 것이다. 경의(敬義)와 명성(明誠)은 성리학의 으뜸 되는 뜻이다. 강당 앞마당에는 관솔불을 올려놓는 정료대가 설치되어 있다. 강당 전면에 있는 ‘玉山書院’편액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글씨이고 강당 대청 전면에 있는 ‘옥산서원 편액은 창건 당시 사액받은 편액으로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1538-1609)의 글씨이며, ’無邊樓‘와 ’求仁堂‘ 편액은 석봉 한호의 글씨다. 구인당 전면의 동재와 서재는 각각 정면 다섯 칸, 측면 한 칸으로, 손에 닿을 듯 아담한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동재인 민구재의 ’민구(敏求) “인(仁)을 구함에 민첩해야한다(好古敏以求之)”는 뜻에서 취한 것이고 서재인 암수재의 ‘암수(暗修)’는 주자의 “가만히 고요히 자수한다(闇然自修)”는 뜻에서 취한 것이다. 구인당 뒤에는 내삼문인 체안문이 있고, 그 뒤에 담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사당인 채인묘와 전사청이 있다. 사당은 정면 새 칸, 측면 두 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회재 이언적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체인묘위 ‘체인(體仁)’은 어질고 착한 일을 시런에 옮긴다는 말로서, 성리학에서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부문이다. 체인묘 주변에는 옥산서원이 사찰 터에 세워졌음을 보여주는 흔적들이 지금도 남아 있다. 사당 담 밖 남쪽으로는 경각이, 북쪽으로는 신도비각이 있고 서원 영역 남쪽으로는 고직사, 포사. 문집판각 등이 있다. 경각과 문집판각에는 각종 판각(版刻)과 어서(御書)를 보관했다. 1972년 신축한 현대식 장서각인 청분각에는 보물 제525호로 지정된 [삼국사기(三國史記), 활자본인 보물 제524호호 지정된 [해동명적(海東名蹟)]등 옥산서원에 전해 온 서적류와 회재의 유품이 소장되어 있다. 옥산서원을 구성하는 건물들은 정문에서 차례로 문. 누. 강당. 사당 등이 일직선을 이루면서. 중심축 선상의 마당을 중심으로 공간의 켜를 만들며, 각각 고유의 영역을 구성하며 배치되어 있다. 기하학적인 구성을 하면서도 주변경관과 어울리는 배치를 하고 있다. 전체 배치의 구심점이 되는 무변루. 구인당. 체인묘 일대의 공간을 핵으로 하여. 경각. 문집판각. 신도비각. 고직사 등이 지반의 차이를 두며 개별적인 영역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누각urr 사이로 중첩되는 지붕선과 담으로 이어지는 공간의 구성은 한국건축의 특성을 읽게 해주는 부분이다. 옥산서원은 무학산. 자옥산. 회개산. 도덕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적인 조건과 전망 때문에 서향을 하고 있지만, 건물들 사이사이의 영역으로 이어지며 확대되어 나가는 공간으로 절대향이 갖는 중요성을 뛰어넘는 배치를 하고 있다. 서원에서 서북쪽으로 약 칠백 미터 되는 곳에는, 회재가 1531년 사간(司諫)에 있으면서 김안로(金安老, 1481-1537)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파직된 후. 이곳 자옥산에 들어와 1532년부터 육 년간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며 학문적으로 완숙한 경지에 들게 한 서재겸 사랑채인 독락당(獨樂堂)과 휴식하던 계정(溪亭)이 있고 그 옆에 살림집이 있다. 독락당은 극히 개인적이고 숨겨져 있는 듯하면서도. 자연 속에 스며들어간 듯 땅에 낮게 깔려 자연과 함께 하는 배치와 구성을 하고 있어. 신비가 계곡에 묻혀 학문을 하며 은자의 생활을 한 면모를 잘 보여준다. 건물은 선비의 처소답게 단아하고, 편안한 마음을 갖게 한다. ‘독락’이라 함은 성리학을 강구하며 천진(天眞) 본체(本體)를 홀로 즐긴다는 뜻으로 이곳에서 자연을 관망하며 학문을 한 회재가 인지(仁智)의 낙(樂)에 유연했음을 알 수 있다. 독락당은 보물 제413호로 지정되었다. 독락당 북쪽 개울을 끼고 자리 잡고 있는 계정은 독락당과는 또 다른 담백한 풍모를 하고 있다. 일어서면 머리가 닿을 듯한 낮은 천장과 낮은 처마를 한 건물의 작은 형세는 만만하게 보이면 서도 그 작은 규묘에 오히려 굴복하게 만드는 건물이다. 건물의 구성이 보여주는 절박한 활달함과 여유가 사람을 압도하고 대청에 앉으면 앞으로 다가오는 활짝 열린 계곡의 전경이 그 모든 것을 잊게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흘러 내려가는 물을 무심하게 보고 있으면 왜 자연으로 눈을 돌려야 하고 세상 욕심을 버려야 하는 삶의 가치l가 어디에 있는가를 곱씹게 만든다.
부윤(府尹) ~ 조선 시대의 지방 관아인 부(府)의 우두머리. 종이품 문관의 외관직으로 영흥부와 평양부, 의주부, 전주부, 경주부의 다섯 곳에 두었다. 설서(設書) ~ 조선 시대에, 세자시강원에서 경사(經史)와 도의(道義)를 가르치는 일을 맡아보던 정칠품 벼슬. 정랑(正郞) ~ 조선 시대에, 육조에 둔 정오품 벼슬. 교리(校理) ~ 조선 시대에, 집현전, 홍문관, 교서관, 승문원 따위에 속하여 문한(文翰) 의 일을 맡아보던 문관 벼슬. 정오품 또는 종오품이었다. 직제학(直提學) ~ 조선 시대에 둔, 예문관과 홍문관의 정삼품 벼슬. 관찰사(觀察使) ~ 조선 시대에 둔, 각 도의 으뜸 벼슬. 그 지방의 경찰권·사법권·징세권 따위의 행정상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 종이품 벼슬로, 도관찰출척사를 세조 12년 (1446) 에 바꾼 것이다.(도지사)찬성(贊成) ~ 조선 시대에, 의정부에 속한 종일품 벼슬. 좌찬성과 우찬성이 한 명씩 있었다. 벽서사건 ~ 전제 군주 체제에서 민간에 통용되었던 지하신문 형식의 글. 중국의 대자보 와같은 형식이다. 양재역벽서사건(丁未士禍) ~ 조선 명종 2년(1547) 정미년에, 문정 왕후에게 정언각·정 순붕 등이 무고(誣告)하여 송인수(宋麟壽)·이약수(李若水) 등이 사약을 받아 죽고, 이언적·노수신·백인걸 등이 유배되었던 일. 이후 사림(士林)은 침체되고 윤원형 무 리의 세력이 강화되었다.
출처 ; 문화재청, 경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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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다양한 역사공부 많이 하고 갑니다, 민구제가 인(仁)을 강조하는 민첩성과 역락문 , 그리고 체인(體仁)등은 옛부터 어짐을 강조하였나 봅니다, 감사합니다.
문화유적인 옥산서원 등 다양한 게시물을 올려주신 민석님 감사하게 보고갑니다.감사합니다.
민석님 옥산서원 게시물 크게 만들어 오셨습니다.수고하신 덕분으로 구경 잘 했습니다.감사합니다.
역사속 인물을 재조명해 보는 좋은 게시물 감사합니다. 수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