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전재산 기부한 위안부 할머니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자꾸 생각하고 이를 악물고 기억했지. 다 얘기해 줄라꼬."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순악(1928~2010) 할머니는 고통스러운 과거를 구술해 책 '내 속은 아무도 모른다카이'를 2년 전 펴낸 역사의 증인이었다. 지난 1월 암으로 타계한 김 할머니가 어렵게 모은 전재산 1억826만원을 소년소녀가장 돕기와 위안부 역사관 건립에 내놓았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경북 경산의 소작농 집안에 태어난 할머니는 열여섯 살 때 방직공장에 취직시켜 준다는 말에 속아 집을 나섰다가 중국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꽃다운 시절을 짓밟혔다. "방문에 뚫어놓은 작은 구멍으로 주인이 요만한 주먹밥 서너 개 넣어준다. 그럼 그걸 먹고 하루 종일 상대한다 말이다. 일본 놈들한테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다. 사람으로 알면 그렇게 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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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광복 후 식모살이 등을 하면서 힘들게 살았다. 딸을 애타게 기다리던 아버지 임종도 못 봤다. 1997년에 고향에 돌아온 할머니는 2000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돼 매달 80여만원의 생활지원금을 받아왔다. 할머니는 작년 말 암수술을 앞두고 외아들을 불러 "장례를 치르고 남은 재산은 기부하라"는 유언을 미리 남겼다. 할머니는 평소 "전쟁이 모든 고통을 만들었고, 전쟁이 없어야 아이들이 행복하다"고 했었다.
▶노벨문학상 수상 일본작가 오에 겐자부로는 "위안부 문제는 일본 정부가 진정으로 사과하고 보상해야만 해결된다"며 "일본 민간기금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진정한 사과를 요구하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보고 감명받았다"고 말해왔다. 할머니들은 1992년부터 매주 수요일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수요집회를 열고 있다. 지난 1월 13일 수요집회는 900회를 돌파했지만 그 사이 살아 계신 할머니는 85명으로 줄었다.
▶김순악 할머니의 기부는 '20세기 최대 인신매매죄'를 공식 사죄와 법적 보상 없이 민간 기금으로만 청산하려는 일본 정부에게 무언(無言)의 메시지를 남겼다. 할머니는 자신을 암흑의 길로 내몰았던 가난이 사무쳐 재산 절반은 소년소녀가장 돕기에 내놓았다. 나머지는 아직도 사과하지 않는 일본의 잘못을 죽어서도 증언하려고 위안부 역사관 건립에 기부했다. 일본은 할머니 유언에 담긴 무언(無言)의 꾸짖음에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
조선일보 201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