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령군 지정면
* 지정면 백야마을 옛 시절 이정동면(二正洞面)지역이고 법정 동리로는 이 동네와 다안 마을이 포함된다.
보통 으로는「배애골」로 부르는데
한자로는 학동(學洞)이니 백동(白洞), 백야(白也) 등 여러 가지로 쓰고 있다.
동구 밖 정자에 자연석 비가 있는데 현동삼십리학동(縣東三十里學洞)이라 새겨져 있다.
순흥 안씨의 고총비문에도 정동(貞洞)으로 기록돼 있을 뿐 아니라
옛 문헌에도 백야리고정동리(白也里古正洞)란 구절이 나오는 것을 보면
지명의 변천이 심했던 곳이라 할 것이다.
이 마을은 골안이지만 제법 너른 지대로서 뒷산이 큰 덩치의 성산먼당(산성먼당)이다.
그리고 갓등, 소미꾸지먼데이(먼당), 양지등(양아등)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웃땀(웃말), 중땀(가운데말), 아래땀(아랫말) 등 세뜸으로 이루어져 있고
동구에 숲이 있는 곳을 조산꺼리(조산껄)이라고 한다.
지서초등학교가 있는 곳은 덕껄이고
이십여년전에 옹기그릇을 굽던 가마굴이 발견된 지점은 감골로 부르고 있다.
성터 쪽으로 제법 높은 산고개는 이 동네서는 정골재라 하고
산너머 사람들은 배애골재로 부르고 있다. 중땀 동네 뒷산에는 큰 규모의 고총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그저 고래장터로 부르고 있으며
광복 후 도굴꾼에 의해서 여러 차례 파헤쳐졌다고 한다.
이 동네에서 출가한 분들의 택호는 학동댁과 백동댁으로 부르고
백야댁, 배애골댁으로는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마을 앞 다리옆 술주막이 있었던 논들 이름이 개바구들(게바구로 들리기도 함)이라고 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개모양의 자연석바위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이곳에 맨먼저 들어온 사람은 순흥 안씨이고
이어서 경주 김씨, 진양 강씨 등 여러 성바지가 들어 왔다고 한다.
지금 경주 김씨가 17집이고 김해 김씨 2집, 김녕 김씨, 함안 조씨(咸安趙氏) 담양 전씨,
안악 이씨, 파평 윤씨, 함안 이씨 등은 한두집씩으로 다해야 30가구가 살고 있다,
*지정면 득소마을 옛날 이정동리(二正洞里)에 속한 지역으로 면소재에서는 서북쪽에 위치해 있는 골짝마을이다.
법정동리상으로는 득소와 독대마을이 포함되며
자연마을로는 득소마을과 조금 떨어져 있는 큰임지, 작은임지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보통 부르는 지명은「부소리」라고 하는데 문헌상으로는 이정동면의 화금동으로 돼 있다.
부소리의 유래가 바로 이 화금동(火金洞)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화금의 글자 훈(뜻)을 따면「불쇠」가 되는데 쉽고 편하게 발음하자니
불의 받침소리가 생략되고 쇠의 이모음이 줄여져서 불린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불쇠 부쇠 부소로 변음이 되어 굳어진 토박이 말인 셈이다.
이곳 사람들 얘기로는 화금동(부소리 또는 부소골)을 쓰는 동안
화재가 자주 일어나고 재수가 없는지라
한동안 정반대 되는 뜻을 가진 수어리(水魚里)란 소지명을 쓴 적도 있었다고 한는데
그 뒤 행정구역조정과 지명 정비때 득소라고 정했다고 한다.
산과 물과 볕이 자랑인 득소 골짜기에서는 메신(집신) 메트리(미투리, 승혜)를
잘 삼는 사람이 많아서 이걸 내다 팔아서 가용에 보태는 집이 많았다고 한다.
앵기배미와 돌채배미 등 재미있는 논들 이름이 있는데
흉년이 들자 병중의 부모님 봉양을 위해서 영계(새닭)한마리와 바꾸었다해서
앵기배미논도가리이고 논물을 댈 때 이 논을 거쳐서 아랫논에 물을 대게 되는데
첫도라기를 돌채배미라 고 한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산골짜기가 두곳에 몇집씩이 사는 작은 임지, 큰임지란 동네가 있다.
이 지명은 동네뒷산을 뒷갓먼당이라 부르는데 산꼭대기에 자연못이 있다고 한다.
보통은 산우못, 천지못 또는 등잔못이라고 하며 30평 남짓한 크기의 천연못이라고 한다.
큰 임지가 웃동네인데 한땐 스무남집이 살았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 두집 뿐이다.
김해 김씨가 14대째 토박이다. 그리고 남서쪽 산모퉁이를 고래장터라 부르고 있는데
이 산밭에서는 오래된 듯 한 토기 등 유물이 발굴 된다고 한다.
작은 임지는 옛날 너댓집이 살았던 곳인데 근래와서 다 떠나버린 채 폐동이 되었다.
득소마을 오른편 높은 산이 산성먼당이고 그 넘어가 백야마을인데
산정상은 평평한 뻔덕(버덩)이라고 하며 돌담부랑(돌담장)이 조금 남아 있는데
이곳이 임진란때 의병들의 진지였다고 한다.
처음 파평 윤씨가 들어오고 그 뒤 김씨, 박씨, 최씨가 같은 시기에 들어 왔다는데 지금은 달성 서씨가 16집 이고 김녕 김씨는 11집, 윤씨 9집,
조씨(趙氏), 김씨, 박씨가 너댓집씩이고 이씨, 곽씨가 두어집씩 모두 60 가구가 살고 있다.
동네에는 함안 조씨(咸安趙氏)문중의 지산재(芝山齋), 달성 서씨의 덕산재(德山齋),
파평 윤씨의 도천재(陶川齋) 등 번듯한 재실이 여러 채 있다.
그리고 동네 앞에는 조종선(趙ㅇ璇)씨의 위생선적비(爲生善蹟碑)가 서 있다.
* 지정면 신암마을 법정 동리로는 태부리에 속하는 마을인데 행정동리로 신암으로 정한 곳이다.
원래「덤밑」으로 불러온 동네지만
뜸 으로는 신징이(신정 新亭), 오척골(烏尺谷), 암하(岩下) 등 세곳으로 나누어져 있다.
신징이란 말은 원래 신씨가 살았던 터라서 그런 지명이 붙었다고 하며
또 동구 밖에 정자나무는 동신제를 모시는 곳이다.
오척골은 동네 뒷산의 생김새가 까마귀가 날개를 편 형국일뿐 아니라
대대로 소자소녀(효자효녀)가 끊이지 않을 솔직한 골짜기라는 뜻에서
오(烏 까마귀), 척(尺 잣대 또는 솔직한 골짜기)으로 불렀다고 한다.
이 마을 뒷산을 넘은 큰 재는 삼산과 두곡으로 통하며
왼편 새골 먼당을 넘어가면 박진과 양동으로 가는 길이라고 한다.
또 작은 재라는 곳은 황토밭 뻔덕인데
옛날에는 소꾼, 풀꾼들이 모여서 소미꾸지 하던 자리라고 한다.
얼른 보기에는 갑갑한 기분이 드는 솔직한 동네지만
양반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동네라고 말한다.
이 동네는 지금 12집이 살고 있는데 김씨4집, 강씨, 오씨, 조씨(趙氏)가 각 2집씩이고
송씨, 이씨가 한집씩이다. 덤밑 동네에는 서재 터가 있는데
옛날 철종때 춘강(春岡)이란 호를 가진
이씨 큰 학자가 서당을 열고 어린이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대부(大夫)라면 아주 높은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고
신암 이라면 새바구란 뜻이라서 자연환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지명이라 할 것이다.
이 마을에는 현풍 곽씨(이곳 분들은 현풍 소리곽시(솔례마을곽씨)가 먼저 살았다고 하며
그 뒤 여러 성바지가 들어 왔다고 한다. 지금은 김씨가 12집, 이씨 10집, 임씨.
조씨(趙氏)가 8집, 곽씨 5집, 박씨 3집, 강씨 2집 등 모두 48집이 살고 있다.
* 지정면 태부마을 지정면소재지에서 동북쪽에 위치해 있는데
돌문이고 재(돌문재)에서 소재지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태부마을이다.
법정동리상 태부리(泰夫里)에는 신암(新岩)마을이 포함된다.
태부마을이 큰 동네로서 옛날에는 궁곡이니 금곡 또는 아예 금골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이 지명은 동네 뒷산이 금굴(금을 캐내는 금광산을 말함)이 있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지산면의 금곡이 영 다른 지명으로 바뀐 것은 동네 뒷산이 태부산(太夫山)이었기 때문에
지명의 정리 때 산이름대로 정했다는 것이다.
태부마을은 옛날 상태부(上太夫)라고 했던 지역인데
웃땀(상촌), 중땀, 아랫땀과 안골(안땀)등 네뜸이다.
상촌은 지금 한집도 없이 폐동이 된 셈이고 서너집 사는 중땀과 아랫땀은 연결되듯 붙어 있고
안골은 여남집이 살고 있는데 산모퉁이를 돌아 들어 앉아 있는 동네다.
태부산으로 부르는 뒷산도 기록에는 나오지만 보통으로는 동네뒷산이라고 부른다.
중땀 건너 산골짜기를 개장골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옛날 아기무덤(보통 깨장이라고 부르는 돌무더기 무덤을 말함)이 많아서
생겨난 지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동네 앞 산자락에 제법 큰 밭뙈기가 있는 보통 점대골이니 점터골이라 부른다.
옛날 도자기를 굽던 도요지이며
지금도 땅을 약간만 긁어도 유백색과 회색빛이 고운 그릇조각이 많이 나오고 있다.
안골을 지나서 깊숙한 산골짜기를 들어가면
큰 너덜산을 넘어가는 잿길이 있는데「한이불재」다.
원래 핫이불이란 말이 쉽게 발음하면서 한이불이 된 것이다.
재를 넘어가자면 핫이불을 둘러 쓴 것처럼 땀이 흐르고 숨이 막힌다는 것이다.
이 재를 넘으면 유곡 세간의 고송골로 빠지게 되는 산길이라
옛날에는 연락부절로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동네건너 갓골 안으로도 산고개가 있는데 보가리재라고 한다.
이 재를 넘으면 정곡면 성황마을이다.
쟁기나 극제이를 메고 소를 몰로 넘어 다니는 산길이라는데서 생겨난 땅이름인 것 같다.
옛날에는 이 동네 주위는 천둥지기 봉천답(奉天畓)이 많았다고 하며
특히 쑤시(수수)가 잘 되어서 지금도 쑤시 빗자리(수수비)가 특산품으로 알려져 있다.
웃땀의 덜티골은 쇠꾼(소먹이는 아이들)과 잘생긴 들돌이 있었고
심자랑(힘자랑)을 하는 곳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아랫땀 동네 뒤에는 해주 오씨 문중의 대양재(大陽齋)가 있고
동구 밖에는 만우거사해주오공표적비(晩雨居士海州吳公表蹟碑)가 서 있는데
한학자로서 여러 곳에서 서당을 열고
후학양성을 위해서 평생을 바친 오일근(吳一根)공의 행적을 기리는 비라고 한다.
그리고 안골(내곡)에 강병기씨댁에는 승정대부행용양위부호군(종1품벼슬) 강수회(姜壽檜)공,
증통훈대부군자감정 강경승(姜慶昇)공, 증통정대부장예원판결사 강신(姜愼)공,
증가선대부공조참판겸오위도총부부총관 강처의(姜處義)공과 통정대부 강인흥(姜仁興)공 등
여러 어른의 교지를 보관하고 있었다.
이 동네 주위에는 옛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소로잿길이 많은데
한이불재를 비롯하여 백산과 양동으로 통하는 배나무골재,
두곡 삼산마을로 통하는 새주골먼당 등의 고개이름이 남아 있다.
이 동네는 처음 신안 주씨가 들어왔다고 하며 그 뒤 김씨, 오씨가 들어왔다는데
지금은 해주 오씨가 15집, 진양 강씨가 10집, 김해 김씨 9집, 송씨, 이씨,
조씨(趙氏)등은 서너집씩 모두 48집이 살고 있다.
* 지정면 성산마을 지정면소재지에서는 동남쪽에 위치한 마을인데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되는 지역이다.
임난때 의병이 왜적을 무찌른 전승지로 유명한 거름강나리(기강나루, 岐江津)가 있는 마을이라
성산이란 지명보다는 기강나루가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동네 어귀의 나직한 산고개가 남재(南峴)고개이고 남재너머가 성산마을이다.
이 마을의 지명유래는 간단하다.
산성산(山城山) 밑에 있다해서 앞의 산(山)자만을 빼고 성산으로 정했다고 한다.
어른들의 얘기로는
회정(槐亭 보통 발음은 해정으로 들림) 즉 아주 오래된 홰나무가 동신목이면서
동네 사랑방 구실을 하여 회정말(회정마을)로 불렀다고 한다.
또 화동(花洞)이라 불렀던 적도 있다고 하는데
이 역시 괴화(槐花)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되었다.
홰나무의 꽃(회화꽃이라고도 함) 때문에 그런 아름다운 지명을 쓴 것 같다.
성산마을은 남재를 넘어 왼편 산밑에 있는 듬이
안땀(안동네) 또는 본동이고 들가운데 있는 뜸이 하동(아랫동네, 들가운데)이며
꼬까실이란 뜸은 단 두집만 살고 있다.
옛날 강둑이 없던 시절에는 안땀 바로 앞으로 강물이 흘렀다고 하며
지금 넓직한 들판은 무듬이땅이라서 제대로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고 한다.
성산마을은 특히 농악(매구치기 또는 풍물)이 유명하며
제1공화국시설 1948년 전국농악경연대회때 1등을 수상하였다.
상매구쟁이(상쇠)는 성도 연씨였고 성산매구는
「쌍쌍여덟 버꾸놀음」(버꾸란 자루가 길게 달린 작은 북인데
소구(작은북)와 비슷하지만 약간 큰 규격임)이 장기였다.
보통 상쇠1명, 중쇠 1명, 징 2개, 북 2개, 장고 2개 등 8명으로 패를 이루지만
특별한 놀음에서는 행모 8명, 진사 1명, 테포시(포수) 1명, 새각씨 2명, 깃대잡이(기수) 1명,
피리 1명 등 21명으로 이루어져야 옳은 매구놀음이 된다고 한다.
동구 저만치 남재에는 창효각(彰孝閣)이 있다.
청주 이씨로 자는 경언(景彦) 함자는 경일(景一)공인데
영조(1737년)때 출생하셨고 평소 부모님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순조때 왕명으로 정문을 세웠다고 한다.
그래서 남재먼당 소자각(효자각)이란 말이 지명과 함께 쓰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상여행차가 이 남재를 넘으려 하면
난데없이 큰 뚜끼비(두꺼비)가 나와서는 길을 막았고
상두꾼들의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온다.
그래서 하마현(下馬峴)이니 두끼비고개란 별명도 있었다고 한다.
산모퉁이를 돌아나오면 임란때 나라안에서는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무찌른 거룩한 충적을 기리는 충익공 곽재우 장군의 보덕각이 서 있다.
유명조선국 (有名朝鮮國) 홍의장군충익공곽선생(紅衣將軍忠翼公郭先生)
보덕불망비(報德不忘碑)가 근엄하게 서 있다.
그 옆에는 역시 부자가 나라를 위해서 순절하게 된 후지당(後知堂) 손인갑(孫仁甲)장군과
손약허(孫若虛 또는 若海)공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가 서 있으니 쌍절각이다.
이곳 언덕 바로 밑은 남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거름강나루터다.
본동이 45 세대, 하동이 65 세대, 꼬까실 2 집 등 모두 112 집이라 큰 동네이다.
처음 밀양 박씨가 들어왔다고 하며 지금은 박씨 28 집, 손씨, 안씨가 15 집, 하씨.
이씨가 9 집씩이고 김씨가 5집, 그리고 강씨, 조씨(趙氏), 배씨 등이 한두집씩이라고 한다.
* 지정면 두곡마을 지정면 소재지에서는 동북방향에 위치해 있는 마을로
옛날 지산면에 속했던 듬실이 고유지명인데
뒷날 한자로 바꾸면서 두곡으로 했으니 뿌리를 가진 지명인 셈이다.
「듬」은 깊숙한 산골에 있는 땅 즉 도회나 읍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산간지역을 뜻하는 두메(두메산골)의 토박이 말이다.
면소재지에서도 한참 가야하는 산골짜기 동네일 뿐 아니라
두루 산줄기가 성벽처럼 둘러싸 있는 지역이다.
마을 주위로 매봉산, 두목산, 말덤이산, 절골, 탑골, 점 뒤, 서재골, 골안 등
산과 골짜기 지명이 엄청 많다.
골안을 따라 산비탈길을 한참 올라가면 삼걸재라는 산고개가 있다.
양동, 박진으로 갈라지는 길목이라 삼거리를 이루는 재라는 말이다.
거기서 내려오면 삼산(三山)마을이 있고
그 다음 상두(上杜:듬실 웃땀), 중두(中杜:듬실 중땀), 하두(下杜:듬실 아랫땀)로
나누어서 부르고 있다. 웃땀이 고촌이라고 하며 옛날에는 구분없이 지산면의 듬실로 불렀고
지형을 보면 산줄기와 평지가 톱날처럼 계속 이어지고 있어
한자로 보면 들 입(入)자의 연속인 것 같아서 입곡(入谷)이란 별명을 쓰기도 했다고 한다.
매봉산에는 신선이 놀다간 큰 바위가 있어 신선덤이고
말 발자국같은 확이 있는 큰덤이 말덤이산,
옛날 작은 암자가 있었던 골이라 불당골, 탑이 있었다해서 탑골,
점뒤란 지명은 옹기와 토기 부스러기가 발굴된다고 하니 점터란 뜻인 것 같다.
부채를 편 것 같은 산모양이라는 광등산 서재(서당)가 있어서 서잿골로 부른다고 한다.
그리고 산골짜기 작은 논도가리지만 송곳처럼 뾰족하다 해서 송곳배미,
장구모양으로 생긴 장구배미, 북처럼 둥글게 생겨서 북배미 등
재미있는 지명이 많이 남아 쓰이고 있었다.
세갈래 길이 있는 삼걸재 태부오척골로 통하는 오초골재(오척골재의 변음)가 있지만
삼걸재만 남아 있다.
삼산마을에 10가구, 웃땀이 22가구 가운데 땀이 20가구, 아랫땀이 20가구 등
모두 70여가구가 살고 있는 골안마을이다. 일찍이 김녕 김씨와 창녕 성씨가 살았다고 하는데
전의 이씨가 들어온지 10대가 넘었으니 300년이 더 된 세월인 셈이다.
지금도 전의 이씨가 65세대로 대성이고
정씨, 강씨, 김씨 등 타성바지는 겨우 한두집씩 살고 있다.
구한말에 생겼다는 일신학숙은 뒷날 지산 강습회로 변했다가
다시 두곡간이학교를 거쳐 지산초등학교로 발전했다.
1893년에 출생하신 고루 이극로(李克魯) 선생이 이곳 듬실 가운데 뜸에서 태어나셨다.
두남재(斗南齋) 지금은 경사재(敬思齋)로 바뀜)서당에서
주경야독으로 공부를 계속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동네에는 전의 이씨문중의 경사재(敬思齋), 모원재(慕源齋), 석천재(石川齋),
영모재(永慕齋), 첨모재(瞻慕齋), 춘강재(春岡齋) 등
여러 채의 재실이 있는 유서깊은 고촌이다. --------------------------------------------------------------------------------------- * 구한말의 학자 학동선생 함안조공 휘 한규(瀚奎)께서 학문을 강(講)하신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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