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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수행시작하는데 도움이 될것입니다(참선기초)
참선은 깨달음을 가르치는 공부이기 때문에,
사상, 철학, 종교 등에 상관없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해야 하는 공부입니다.
1) 앉기
참선은 앉는 게 다가 아닙니다.
앉으면 몸이 안정되고
건강에 좋기 때문에 앉는 것입니다.
머릿속에 복잡한 생각을 가지고 앉으면,
힘만 듭니다. 얻으려고 하면, 반드시 고통이 옵니다.
그냥 ‘쉰다’ 혹은 ‘논다’는
생각으로 앉으면 편합니다.
제가 1970년경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공부했는데,
그때 서옹 스님이 어른으로 계셨습니다.
매우 더운 여름이라 새벽 참선 후 방선 시간에
지대방에서 눕곤 했는데,
일어나면 꼭 컨디션이 안 좋았습니다.
몸이 피곤할 때는 누워서 자면 피곤이 풀리지만,
한 번 잠에서 깬 뒤 그렇게 피곤하지도 않는데도
다시 누우면 참 좋지 않습니다.
그렇게 두 번째 눕는 것은 마치 병(몸)이 엎어져,
물(氣)이 쏟아지는 것과 같습니다. 앉아있어야,
병 안의 물이 안정되게 잘 고이지요.
그래서 앉아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2) 허리 펴기
앉은 다음에는 척추를 곧게 하여 허리를 쭉 펴야,
오장육부가 편합니다. 배에는 신장(智, 북),
간장(仁 , 동), 비장(信, 중), 폐(義. 서),
심장(禮, 남)이 있는데,
이 오장이 편해야 몸도 편하고,
몸이 편해야 공부가 됩니다.
인의예지신의 덕을 갖추게 되어야,
중용지도(中庸之道)가 되고,
그래야 호연지기(浩然之氣)가 길러집니다.
3) 다리
가부좌가 좋지만, 잘 안되는
사람은 반가부좌를 해도 무방합니다.
4) 손
손은 합쳐주어야 좋습니다. 해보니까,
그래야 음양이 만나서 기가 통하고,
그래야 단전에 기가 모이게 됩니다.
5) 마음이 돌아가는 곳
이렇게 앉아 자세를 취했으면, 다음에는
마음이 돌아가는 데가 필요합니다.
여기서부터 체계적으로 제대로 배워야 합니다.
참선 공부는 스승 없이 공부하면 반드시 실패합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마음이 일어나는데,
그 중에서 어떤 마음이
진짜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실전에서 부닥쳐야지,
책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짐작으로는 알 수가 없는 길입니다.
실참에서는 참선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화두와 스승이 필요한 것입니다.
6) 화두의 성질
동서남북의 각 계곡에서
물이 내려와 호수에 모이면,
원래 어느 계곡 출신인지를
잊고 모두 하나가 됩니다.
마음의 물도 불성(佛性)의 호수에 들어가면,
현상과 시간과 상(相)이 없어집니다.
불법의 큰 바다에는 너, 나가 없습니다.
결국 모든 공부는 불법의 바다에서 모입니다.
부처님 회상에 모인 우리도 법 앞에서는
출신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또한 다양한 화두도 모두 불법의
바다에서 만나게 되어있습니다.
법은 하나입니다.
따라서 어떤 화두를 들어도 무방하나,
여기서는 ‘이!뭣고?’ 화두를 가르칩니다.
7) 관(觀)
화두공부가 힘들고 어렵게 되는 문제는
잘못 시작해서 그렇습니다. 기본이 중요합니다.
‘간화선(看話禪)’이라고 할 때,
‘말을 본다(간화)’가 무슨 뜻입니까?
말(話)은 듣는 것인데 그 안에는 뜻이 있으니까,
말하는 사람이 나타내고자 하는
의중을 본다(看)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영어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영어에서 ‘보다’는 뜻을 가진 단어는
look, see, watch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미국에서 노래를 배워보니까,
50년대 노래에 「With song in my heart」가 있는데,
그 가사에
‘I behold your adorable face'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스님이 직접 노래를 부르신다.)
‘나는 당신의 우아한 얼굴을 본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adorable face'는 단순히
아름다운 얼굴이 아니라,
속의 오장육부가 잘 정돈되어 내부의
인의예지신의 덕과 품위와 예절과 교양과
향기와 위의(威儀)가 조화되어 얼굴로 드러나는,
그런 우아한 얼굴입니다.
그런 우아한 얼굴과 자태를 보면,
누구나 아찔하지 않습니까?
보이지 않는 덕이 얼굴을 통해 나타나는 바로
그 우아함을 본다고 할 때는
look, see, watch가 아니라,
고어인 behold라는 말을 씁니다.
우아함은 본래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얼굴을 통해 나타납니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대상을 통해 본다고 할 때,
불교에서는 ‘관(觀)’이라는 글자를 씁니다.
달마가 ‘관심일법(觀心一法)’이라고 할 때의
‘관’입니다. 잘 들으세요!
이 말을 못 알아들으면 참선할 수가 없습니다.
얼굴을 통해, 보이지는 않지만 살아있는
그것을 보는 것입니다. 마음을 보려면,
이 ‘관’을 통해 보는 것입니다.
불성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작용을 통해 나타납니다.
배고픈 것을 통해서(via)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있으니까, 없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작용을 통해서 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 되면, 화두가 안 됩니다.
석가세존께서 깨달은 것은 누구나 불성
즉 깨달음의 씨앗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씨앗은 모래땅에 심으면 싹이 나오지 않지만,
촉촉하고 습기가 있는 땅에
심으면 여지없이 싹이 나옵니다.
바깥으로 찾아다니는 것은 마치 모래땅에
씨앗을 심은 것과 같습니다.
반면에 배고픈 것을 아는 작용을 통해
내 안에서 작용하는 그것을 ‘관’하면,
분명히 싹이 나옵니다.
공을 들이고 정성을 들이면 싹이 틔어 자랍니다.
경제가 어려우니까, 한강에서 자살하는 높은
사람들이 많은데, 그것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지혜를 잃어버려서 그렇습니다.
자기 마음을 가두어버리니까,
죽음의 충동을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 땅의 어려운 형편에,
앞이 막힌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마음이 어두워지면, 절망에서
헤어 나오기가 어렵습니다.
마음을 바로 보는 소견이
더욱 절실히 필요한 시국입니다.
8) 화두법
배고픈 줄 아는 자가 있는데,
이 배고픈 것은 누구한테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것도 아닙니다.
또한 사람만 배고픈 줄 아는 게 아니라,
개나 모기도 압니다.
이것은 스스로 아는 것입니다.
‘스스로 아는 성질’이라고 해서
‘자성(自性)’이라고 합니다.
스스로 있는 성품입니다.
자성이란 깨달음의 씨입니다.
이 정도 하면, 이제 자성이 증명되었겠지요?
이 기초를 단단히 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 안에 자성이 이미 있는데,
그 사실을 우리는 석가 때문에 알게 된 것입니다.
그 분이 가장 먼저 이것을 깨닫고 알려주셨지요.
깨달음의 지혜 덕성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의 스승이 되신 거고,
그 뒤로 무수한 도인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번뇌 망상에 끌려 다니는 우리를 보고,
‘너 안에 이미 불성이 들어있으니까
한 마음 돌이켜 깨치기만 하면 된다’
고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참선은 간단한 것입니다.
어렵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가 잘못 시작했기
때문에 어려워진 것입니다.
어려워진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배고픈 줄 아는 것은 처소가 없습니다.
형상이 없습니다. 있다 없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마음을 돌아보면, 언제든지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은 부르기만 하면
언제든지 와서 도와주신다’는
말의 뜻도 이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은 바로 자성인데,
자성이 자비로운 모습으로 드러나면
그때 관세음보살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자성의 작용이 관세음보살입니다.
자성은 자기 속에 있으니까,
찾기만 하면 언제든지 나옵니다.
자성은 항상 내 안에 있지만,
중생은 스스로 자성을 등진 것입니다.
등져서 가려있던 그 자성을
깨닫는 것이 참선법입니다.
여러분이 어려워하는 것은
엉뚱하게 배워서 그렇습니다.
책을 통해 혼자 짐작으로 해서 그렇습니다.
본질은 간단명료합니다.
이미 자기에게 있는 부처를 있는가
없는가 참작해보는 것입니다.
내 안에 씨앗이 있으니까,
정성만 들이면 됩니다.
공부는 정성들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얻으려고 무리하면 병이 옵니다.
다만 이미 있네 하고 확인하는 것으로 족합니다.
밖에서 얻으려고 고시공부 하듯이 파고들면,
망상 속에서 헤매게 됩니다.
화두는 마치 세수하다 코만지는
것처럼 쉬운 것이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얼굴에 코가 있듯이,
내 안에 이미 있는 것을 만지는 것입니다.
죽비를 치면, 가운데가 비어 있기에 소리가 납니다.
우리는 비어있는 이 가운데를 하루에
수백 번 왔다 갔다 합니다.
부처의 동네를 지나가면서도,
번뇌 망상 속에 가려 보지 못합니다.
마음이 쉬어지면 보입니다.
번뇌 망상이 일어나면, 그것을 보십시오.
번뇌 망상을 ‘관’하십시오.
번뇌 망상이 불성과
함께 있다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번뇌 망상은 그 정체를 들키면,
뿌리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자성을 보면 아상이 없어집니다.
자성을 확인하면,
육식에 대한 집착이 없어지기
때문에 육근의 뿌리가 비워버립니다.
이런 점을 여러분에게 자세히 가르쳐드리기
위해서 제가 다음과
같은 글을 쓰서 나누어 드렸습니다.
이것은 근본이니까 잘 새겨두십시오.
번뇌 망상을 잠재우는 방법입니다.
참선 오래한 사람도 헤매는 것은
이것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이게 안 되면 아무리 경전이나
참선 공부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9) 번뇌 망상을 잠재우는 방법
[불성(佛性)을 관(觀)해가는 법]
우리는 우선 참선을 하기 전에
육국의 전란이 평정되어 있어야 한다.
이 육국이란 안이비설신의 육식의 다툼으로 인해서
우리들의 마음이 혼란 속에 있음을 말한다.
이것이 가라앉지 않고는 망상 속에서
화두를 들려고 하기 때문에,
화두를 열심히 들려고 하면 그것이 오히려
혼란을 부추겨 우리들의
몸과 마음에 긴장만 오게 된다.
그래서 첫째로 육식이 평정되어지기 위해서는,
이 육식 또한 불성에 의지하고
있음을 자각하고 믿어야 한다.
보통 우리들은 육식의 혼란에 마음이 가있어
불성을 믿는 마음은 약하여
전란 속에 마음이 빼앗겨져 있다.
그래 이제 다시 육식의 전란에서 생긴
마음을 관하여 이것이
불성하고 같이 있다고 염(念)하여 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되면 번뇌 망상과 같이 일어나는
마음이나 분노한 마음이나 참선을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안 되는 마음이나,
일체 일어난 생각들이 불성하고 같이 있음을
믿어지게 되어 마음의
전란은 서서히 평정을 되찾게 된다.
사람에게 있어서 이런 평정이 안 되어 있으면
자기가 자신을 자학하게 되고
부정적으로 자신을 보게 되고 생각으로
생각을 파헤쳐 들어가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생각이 골똘해져서 이 몸과 마음에는
번뇌 망상으로 가득 차 있는 결과만 남는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우리가 참선을 하려고 하면
참선의 길은 요원하기만 하게 될 뿐이다.
그래서 요즈음 말로 우리는 자기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
자신을 사랑하게 되면 번뇌
망상도 싫어하지 않게 되고,
자신을 쉽게 용서하게 되며 자기
자신을 믿는 힘이 자라난다.
이럴 때는 이미 마음이 평정되어 있어서
화두참구를 하면 어렵지 않게 시작될 수가 있다.
이글은 김홍근참선일기에 수록한것인데
현웅스님말씀이라서 제가 이곳으로 옮겨봅니다
자신을 찾아가는데 도움이 되었으면합니다
광명()()()
육조사 조계사문 玄雄스님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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