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희의 입장] 이제는 고교야구 정상화 시대 [3] 일본 야구명문, PL학원고를 가다 (1편)
PL학원고 주장 요시카와 다이케. 요시카와는 PL학원고의 과거와 미래를 대변하는 선수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프로야구의 젖줄은 고교야구다. 그러나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이후 젖줄은 메말랐다. 프로야구가 흥행 가도를 달리는 사이 고교야구 인기는 끝을 모르고 떨어졌으며, 고교야구팀은 갈수록 줄었다. 이제 전국 고교야구팀은 53개교만 남았다. 언제부터인가 ‘이대로 가다간 아마추어 야구도, 프로야구도 공멸하고 말 것’이란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고 있다.
바로 이때. 고교야구가 조용한 변혁에 들어갔다. 아마추어 야구를 관장하는 대한야구협회가 내년부터 학기 중 평일에 개최하는 전국 규모대회를 폐지하고, 토·일요일, 공휴일, 방학기간에 경기를 치르는 ‘주말 리그제’로 전면 전환을 선언한 것이다. 학생 선수에게 학습권을 보장하고 동시에 경기력도 향상시켜 학원 스포츠를 정상화하고 야구를 ‘즐기는 스포츠’로 정착하겠다는 협회의 비전은 이제 한국야구의 거대한 목표가 됐다.
<스포츠춘추>에서 1년여 기획 취재로 ‘어째서 고교야구 정상화가 야구계의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화두’인지 집중조명했다. <이제는 고교야구 정상화 시대>시리즈는 [1] 프로 진출이 진로의 끝은 아니다. [2] 선수만 있고, 학생은 없다 [3] 일본 고교야구 명문 PL학원고를 가다 [4] 그라운드보다 사회에서 더 빛난 이들 [5] Thinking Baseball로 이뤄질 예정이다.
오사카 기시역. PL학원고는 이곳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오사카의 자랑, ‘야구 명문’ PL학원고
오사카는 일본에선 ‘제2의 도시’로 불린다. 수도인 도쿄 다음으로 중요한 곳이다. 한국으로 치면 부산에 가깝다. 예로부터 상업과 산업의 중심이었던 오사카는 전통과 첨단이 공존하는 도시다. 오사카 아베노바시역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기시역은 전자에 가까웠다. 허허벌판에 자리 잡은 역 주변은 옛 일본의 향취가 커피 향만큼이나 진하게 풍겼다.
택시기사는 기시역을 ‘오사카의 자랑’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목적지가 ‘PL학원고’란 걸 알게 되자 오사카의 자랑은 금세 다른 대상으로 바뀌었다.
“PL학원고야말로 오사카의 자랑이자 긍지다. 일본야구를 대표하는 선수들을 수없이 배출했고, 고시엔 대회에서도 우승을 밥 먹듯이 했다. 도쿄에 없는 게 없다지만, PL학원고같은 야구 명문고는 오사카에만 있다.”
은근히 지역자랑을 늘어놓은 기사는 PL학원고 정문 앞에 차를 세우더니 수위에게 뭔가를 열심히 물었다.
“PL학원고가 하도 커서 야구장이 어딘지 묻지 않으면 길을 헤매기 십상”이란 게 차로 돌아온 기사의 말이었다. 사실이었다.
기시역에서 15분 거리에 떨어진 PL학원고는 300만 평의 광활한 대지에 세워졌다. 웬만한 대학캠퍼스를 능가한다. 기사는 “정확히 말하면 PL학원고가 아니라 PL학원 부지가 300만 평”이라며 “이 안에 유치원, 소학교(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전문학교가 모두 들어서 있다”고 설명했다. 덧붙여 “과거에는 유원지와 단기대학, 골프장도 함께 있었다”며 “전체 부지의 절반은 PL 교단이 사용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정문을 통과하고 10분 정도 갔을까. 드디어 PL학원고 전용 야구장이 눈앞에 나타났다. 일행 가운데 한 명은 “만화 'H2'의 실제무대를 밟게 됐다”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걸작만화 ‘H2'의 실제무대를 가다 야구만화 'H2'의 한 장면
아다치 미쓰루의 대표작 ‘H2’는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야구만화다. 1992년부터 1999년까지 ‘주간 소년 선데이’에서 연재된 ‘H2’는 전 34권으로 이뤄진 단행본이 총 5천만 부나 팔릴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한국에서도 ‘H2'의 인기는 대단해 해적본으로만 50만 부 이상이 인쇄됐다.
꿈을 좇는 10대들의 심리를 야구라는 매개체를 통해 그려낸 이 만화의 주인공은 ‘천재 투수’ 구니미 히로와 ‘특급 타자’ 다치바나 히데오다. ‘H2'라는 제목도 주인공 히로와 히데오의 머리글자에서 땄다.
고시엔 대회 우승을 향해 뜨거운 우정과 경쟁을 벌이는 고교생 히로와 히데오는 가상의 인물이지만, 일본인 대다수는 유명 야구선수 구와타 마쓰미와 기요하라 가즈히로를 실제 모델로 보고 있다. 원작자인 아다치도 일본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두 선수의 고교시절 활약상이 아이디어로 작용한 게 사실”이라고 고백한 바 있다.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구와타와 기요하라는 PL학원고 동기동창생이다. 만화 상에서 히로와 히데오가 'H2'로 불린다면 구와타와 기요하라는 현실상에서 ‘KㆍK 콤비’로 불렸다.
두 이는 고 1때부터 야구부의 에이스와 4번 타자를 도맡았다. 처음 두각을 나타낸 건 히데오처럼 몸집이 크고 힘이 센 기요하라였다. 중학시절 에이스와 4번 타자를 겸했던 기요하라는 특유의 파워와 집중력으로 PL학원고에 진학하자마자 중심타자가 됐다.
대개 1학년생들이 후보에 그친다는 걸 고려하면 기요하라는 고속 승격을 한 셈이었다. 이에 반해 히로처럼 몸집이 작고 가냘픈 구와타는 감독으로부터 “투수로는 ‘영’ 가능성이 없다”는 소릴 들을 만큼 그저 그런 선수였다.
하지만, 구와타는 특유의 잡초 근성과 노력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1학년 신분으로 팀의 에이스가 됐다. 되레 투수를 욕심냈던 기요하라는 구와타 때문에 타자에만 전념해야 했다.
PL학원고 시절의 기요하라(사진 왼쪽부터)와 구와타. 두 선수는 프로에 입문한 뒤 각자의 길에서 대선수로 성장한다 |
두 이는 1983년부터 1985년까지 3년 동안 봄, 여름 고시엔 대회에 다섯 번이나 출전했다. 이 가운데 우승 2회, 준우승 2회를 경험했다. 일본 야구소년들이 고시엔 대회 본선무대만 밟아도 가문의 영광이라 칠 때 구와타와 기요하라는 천운을 타고난 이들이었다.
구와타는 3년 동안 전후(戰後) 고시엔 대회 본선 최다승인 20승을 거뒀다. 기요하라는 고시엔 대회 통산 13홈런을 치며 역시 고시엔 대회 사상 역대 최다 홈런을 기록했다. 두 선수는 졸업 뒤 각각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세이부 라이온스에 입단해 일본프로야구 최고의 투수와 타자로 성장했다.
고시엔 대회 사상 가장 강력한 투수와 타자를 한꺼번에 보유했던 PL학원고는 이때부터 오사카의 강팀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야구 명문고로 우뚝 섰다.
PL학원고 출신의 대선수는 구와타, 기요하라를 제외하고도 수도 없이 많다.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의 감독 오바나 다카오를 시작으로 주니치 드래건스의 프랜차이즈 스타 다쓰나미 가즈요시, 요코하마의 에이스였던 노무라 히로키, 일본선수협 회장 미야모토 신야(야쿠르트), 센트럴리그 최고 3루수로 꼽혔던 이마오카 마코토(지바롯데), 메이저리그를 섭렵했던 ‘리틀 마쓰이’ 마쓰이 가즈오(라쿠텐), 시카고 컵스와 4년간 연봉 총액 4천800만 달러(약 445억 원)의 초대형 계약에 성공했던 후쿠도메 고스케, 2010 일본시리즈 MVP 이마에 도시아키(지바롯데) 등이 모두 PL학원고 출신의 대선수들이다.
PL학원고를 가리켜 ‘일본 고교야구를 대표하는 야구 명문고’라고 하는 것도 과장은 아닌 셈이다.
PL학원고가 야구 명문고로 성장한 배경
PL학원고 출신의 '리틀 마쓰이' 마쓰이 가즈오. 마쓰이는 PL학원고 재학시절 한국에서 열린 봉황대기 대회에 재일동포 야구단의 멤버로 출전할 뻔 했다. 그러나 PL학원고가 고시엔 본선 무대에 오르는 바람에 참가하지 못했다(사진=ML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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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학원고는 1955년 설립된 사립고다. 재단은 ‘퍼팩트 리버티(Perfect Liberty)’라는 종교단체. PL은 ‘퍼팩트 리버티(Perfect Liberty)’의 약자다. 퍼팩트 리버티는 1946년 ‘인생은 예술이다’라는 교의를 내걸고 포교활동을 시작한 신흥종교로 ‘각자의 개성이 곧 세상이므로, 자신의 개성을 다른 사람을 위해 최대한 발휘할 때 세계 평화와 복지가 이뤄진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학교가 설립된 지 1년 후, 야구부가 생긴 것도 교의의 영향이 컸다. 일본야구전문가 하세가와 쇼이치 씨는 “자기표현을 중시하고, 이를 장려하는 PL 교단은 야구를 통해 학생들의 개성이 자유롭게 표출되길 바랐다”며 “PL학원고에 야구뿐만 아니라 다양한 운동부가 생긴 것도 그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PL학원고는 야구(경식·연식), 농구, 축구, 배구, 검도 등 10개의 운동부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일본 고교의 운동부 운영은 PL학원고만의 특징은 아니다. 일본 고교는 최소 3개 이상의 운동부를 운영한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스포츠 인프라가 충분히 갖춰졌고, 체육을 매우 중시하기 때문이다.
PL학원고 전용 야구장. PL학원엔 이 같은 야구장이 4개나 된다. 그 가운데 2개는 연식 야구장과 소프트볼 구장이다. 야구장의 잔디와 내야 흙 상태는 프로구장과 비교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다. 사진에 보이는 백스크린 뒤에 하얀 건물이 과거 야구부 전용 기숙사였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PL학원고 취재 중 일본 문부과학성의 관리를 만났다. 그가 내보인 자료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 자료에는 일본 고교의 체육시설물 현황이 적혀 있었다. 놀랍게도 일본 고교엔 모두 체육관이 세워져 있었다. 99%가 아니라 100%였다. 운동장 부지가 좁아 체육관이 세워졌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았다. 운동장은 운동장대로, 체육관은 체육관대로 있었다. 비가 와도 학생들이 체육 활동을 하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여기다 더 놀란 건 체육이 선택과목이 아니라 의무과목이라는 사실이었다. 일본은 고3 수험생이라도 반드시 1주일에 3시간은 체육 수업을 받아야 한다. 이유는 간명하다. 정부, 학교, 학부모 모두 ‘건강한 몸에서 건강한 정신이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PL학원고 야구부장 구사노 유키(59)씨는 야구부가 생긴 배경이 반드시 교의에 충실했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했다.
“초대 교장이 내건 구호가 있다. ‘학력은 도쿄대! 야구는 고시엔!’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운동에도 매진하자는 뜻이었다. 다른 일본 고교도 마찬가지겠지만, 일본에선 공부만 교육이 아니다. 운동도 교육의 일환이라는 의식이 강하다. 공부 잘하는 학생이 운동도 열심히 한다는 건 상식이다.”
그러나 운동을 열심히 하는 것과 고교야구대회에서 성적이 좋은 건 별개의 문제다. PL학원고 야구부는 창단 6년 만인 1962년 고시엔 대회 본선무대를 밟았다. 그리고 1970년대 후반부터는 고시엔 무대의 단골손님이 됐다. 1981년엔 드디어 봄 고시엔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PL학원고는 봄 고시엔 대회에서 3회, 여름 고시엔 대회에서 4회나 우승을 차지하며 통산 7회 우승의 위업을 달성했다.
특히나 PL학원고는 1977년부터 2001년까지 25년간 해마다 졸업생을 프로에 진출시켰다. 일본 고교 졸업반 전체 야구부원 가운데 0.07%만이 프로 지명을 받는다는 점을 상기하면 PL학원고 졸업생의 25년 연속 프로 진출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고교시절 구와타는 외야의 워닝 트랙을 끊임없이 달렸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정해진 시간이 되면 트레이닝복을 입고 뛰고 또 뛰었다. PL학원고 후배들은 이 워닝 트랙을 '구와타의 길'이라고 부르며 자신들도 이 길을 따라 뛴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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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학원고에서 30년 동안 윤리교사로 재직 중인 구사노 씨는 이러한 기적이 가능했던 이유를 ‘합숙’에서 찾았다.
“PL학원고는 도심과 떨어져 있어 개교 때부터 기숙사를 운영했다. 야구부가 생긴 이후엔 학생선수들도 모두 기숙사 생활을 했다. 기숙사가 없는 학교의 야구부원들은 야구장에서만 만나다 보니까 연대감이 떨어지는 데 반해 PL학원고 야구부원들은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야구장이 아니어도 자주 보고, 야간에도 함께 모여 훈련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실력도 빨리 늘고, 실전에서도 손발이 척척 맞았다.”
일본프로야구에서 PL학원고 출신은 단체생활에 잘 적응한다는 선입견이 있다. 프로 스카우트들이 PL학원고 출신을 선호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구사노 씨도 부인하지 않았다.
“역시 고교시절의 기숙사 생활이 좋은 쪽으로 작용한 것 같다. 프로야구단은 단체생활이 중심이다. PL학원고 출신 선수들은 이미 기숙사 생활을 통해 단체생활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고교시절에 경험했던 것들이라 쉽게 극복한다. 그래서 프로 스카우트들이 PL학원고 출신을 선호하는 게 아닌가 싶다.”
PL학원고는 1956년 야구부 창단과 동시에 같은 자리에 전용구장과 전용 기숙사를 지었다. 2000년까지 PL학원고 야구부원들은 일반 학생들과 떨어져 전용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구장과 기숙사가 붙어 있어 언제든 훈련할 수 있었고, 이것이 야구부 급성장에 밑거름이 됐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한국 고교야구부 대부분은 전용 기숙사를 운영한다. 야구부원들은 이 기숙사에서 3년 동안 먹고, 자고를 반복한다. 일본도 유독 PL학원고만 전용 기숙사를 운영한 건 아니었을 터. ‘과연 합숙이 강팀으로 성장한 주요 배경이 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드는 찰나. 구사노 씨는 기자의 의문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듯 침착한 목소리로 이렇게 설명했다.
“한국에 어떻게 알려졌는지 모르지만, 일본 학교는 과거에도, 지금도 운동부 전용 기숙사를 운영하지 않는다. 학부모들의 경제적 부담이 큰 데다 자칫 학생선수들과 일반학생들을 분리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합숙을 해도 방학 때 대회를 앞두고 일주일 정도 손발을 맞추는 정도다. 하지만, 과거 PL학원고 야구부는 예외 없이 전용 기숙사에서 생활하도록 했다. 그렇게 3년간 호흡을 맞췄으니 하루하루가 합숙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팀의 단결력과 개인의 실력이 일취월장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구사노 씨는 PL학원고의 최고 전성기였던 1980년대 후반엔 “야구부 규율이 엄해 전용 기숙사 생활에서 크고 작은 사건이 자주 일어났다”며 “학생선수들의 신경이 무척 날카로웠다”고 회상했다.
PL학원고 교실 건물이다. 야구부원들은 일반학생들과 어울려 함께 수업을 받는다. 학생선수라고 열외는 없다. 1교시부터 6교시까지 모든 수업을 받는다. 학생선수들은 학업을 '본분', 야구는 '꿈'이라고 말했다. 학생선수 대부분은 자신들을 특별하다고 생각하기보다 특별한 운동을 즐기는 학생들로 생각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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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숙과 함께 편법수업도 야구부 성장에 큰 몫을 담당했다.
“10년 전만 해도 학생들의 수업이 일반코스와 체육코스로 나눠 운영됐다. 일반코스는 말 그대로 일반학생들의 수업을, 체육코스는 운동부 학생들의 수업을 뜻했다. 그렇다고 큰 차이가 있는 건 아니었다. 체육코스에 체육수업을 좀 더 배정할 뿐이었다. 예를 들어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 30분까지 6교시를 한다 치면, 체육코스는 마지막 6교시 수업을 체육수업으로 배정하는 정도였다. 보기엔 별 게 아닌 시간이었지만, 이 한 시간이 학생선수들의 실력을 끌어올리는 덴 매우 유효했다.”
구사노 씨는 전성기 때는 선수 수급도 특별했다고 말했다.
“PL학원고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1990년대까지 야구부엔 오사카 출신 학생만큼이나 다른 지방 출신 학생들도 많았다. 좋은 선수를 수급하고자 다른 지역의 중학교 학생선수들을 스카우트했기 때문이었다. 그 영향인지 PL학원고는 늘 선수자원이 풍부했고, 실력도 다른 학교를 압도했다.”
합숙과 편법수업 여기다 치밀한 스카우트가 더해지며 PL학원고는 오랫동안 일본 고교야구의 최강자로 군림했다. 언뜻 PL학원고의 성장 배경이 대단한 것 같지만, 한국 고교야구 입장에선 너무나 친숙한 장면들이다. 과거에도, 지금도 똑같은 방식으로 한국은 고교야구부를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PL학원고는 2000년 들어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이때부터 PL학원고 야구부와 일본야구는 침체기에 접어든다.
PL학원고 야구부의 변혁
PL학원고 야구부장 구사노 유키 씨. 학교에서 윤리교사로 재직 중이다. 그는 다쓰나미와 구와타, 기요하라, 후쿠도메의 학창시절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구와타는 고교시절부터 학업과 운동에 열심이었던 진지한 모범생이었다. 하지만, 기요하라는 "모든 나쁜 짓의 중심에 있던 말썽꾸러기였다"고. 그러나 그런 기요하라도 야구할 때만은 수도승처럼 진지했단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2000년 PL학원고는 체육코스를 폐지했다. 마지막 6교시를 더는 체육수업으로 배정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학생선수도 일반학생들과 같은 교과과정을 밟도록 했다.
PL학원고 관계자는 “야구부가 정상을 향해 달릴수록 ‘야구도 교육의 일환’이라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며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결국 야구부 변화의 배경으로 작용했다”고 밝혔다.
사실이었다. PL학원고는 명실 공히 일본 고교야구를 대표하는 명문고가 됐지만, 야구부원들의 학력수준은 또래 학생들과 비교해 현저히 떨어졌다. 야구부의 엄격한 규율과 전용 기숙사 생활로 인한 개성의 파괴 역시 심각했다. 야구를 통해 학생들의 개성이 최대한 자유롭게 표출되길 바라던 초심과는 반대로 가고 있던 것이었다.
대학의 입시환경이 변한 것도 야구부 변화의 이유로 작용했다. 구사노 씨의 말을 들어보자.
“과거 일본 대학도 야구만 잘하면 내신성적을 보지 않고 고교 선수들을 입학시켰다. 대학에 입학해서도 야구만 잘하면 학점과 상관없이 졸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대학은 ‘아무리 야구를 잘해도 성적이 좋지 않으면 입학을 허가하지 않겠다’는 자세다. 설령 운 좋게 입학해도 ‘공부하지 않으면 졸업은 꿈도 꾸지 마라’고 경고하기 일쑤다. 대학이 요구하는 입학사정과 교육환경이 변했기 때문에 고교도 변화해야 했다. PL학원고 야구부의 변신 역시 이러한 교육환경 변화에 발맞추기 위한 생존책이었다.”
맞는 말이었다. 과거 일본 대학도 한국처럼 체육특기생 제도가 있어 성적이 좋지 않은 학생도 운동실력만 좋으면 입학을 허가했다. 몇몇 대학은 유명 고교선수를 학교의 홍보용으로 활용하려고 장학금을 주는 조건으로 스카우트하기도 했다.
PL학원고의 훈련 장면. 고시엔 대회 지역예선을 맞아 자체 연습경기로 실전감각을 익히고 있다. 동료의 경기를 바라보는 선수들은 취미반, 저학년생들이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그러나 2000년 들어 대학의 체육특기생 제도가 바뀌었다. 선발 기준이 매우 강화돼 과거처럼 운동만 잘한다고 대학문을 밟는 일은 사라졌다. 특히나 대학마다 내신성적의 비중을 높이고, 이를 엄격하게 적용하면서 학생선수들도 학업에 열중하게 됐다.
구사고 씨는 “체육특기생 제도가 있는 대학 대부분이 내신성적과 면접, 작문을 통해 신입생을 뽑는다”고 설명하고서 “여전히 공부를 등한시하는 학생선수와 입학기준이 극단적으로 낮은 대학이 있어 야구실력 하나로 대학에 들어가는 일도 없지 않다”라고 전했다. 하지만, 그런 대학은 야구를 잘하지 않아도 누구나 입학 가능한 하류대학이라, 졸업 후에도 이력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일본 문부과학성 관계자는 “와세다대와 게이오대 등 유명 대학은 체육특기생 선발 기준이 매우 높아 웬만한 내신성적으론 입학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고교야구부 감독들도 학생선수의 내신성적이 좋지 않으면 아예 유명 대학엔 입학원서도 내지 말라고 조언한다고 했다.
왜냐? 대학의 입학기준에 미치지 못해 떨어지면 학생선수의 부담감이 말도 못하게 심하기 때문이다. 여기다 운 좋게 입학해도 유명 대학은 졸업이 어려워 졸업하지 못할 학력의 선수를 억지로 대학에 보냈다간 나중에 대학으로부터 ‘그 고교 출신은 학력이 너무 떨어지니까 앞으로 특정 고교 출신은 입학을 받지 마라’는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부 일본 대학도 한국처럼 전국대회 4강이나 8강에 든 고교선수들에 대학 입학 혜택을 부여한다. 와세다대, 게이오, 쓰쿠바대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 대학들도 내신성적이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고시엔 대회에서 최우수선수상을 받아도 입학을 허가하지 않는다.
구사노 씨는 “일본 고교감독들도 팀이 전국대회 4강 혹은 8강에 들어 학생선수들이 더 많이 좋은 대학으로 진학하길 바라지만, 절대 무리하지 않는다”며 “8강보단 학생선수들이 편하게 야구에 집중하고,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강조했다. 그것이 학생선수들이 대학에 입학하는데 효과적이라고 믿기 때문이란다.
PL학원고의 변혁, 얻은 것과 잃은 것 PL학원고 야구부원들은 오후 3시30분 수업이 끝나면 기숙사에서 바쁘게 유니폼을 갈아입고, 5km 이상 떨어진 구장까지 달려간다. 그래야 오후 4시까지 도착할 수 있다. 학교 관계자는 "훈련시간이 짧기 때문에 뛰는 것이야말로 훈련"이라며 "뛸 때도 사람들을 만나면 예를 차려 인사하는 법을 교육시킨다"고 말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PL학원고를 방문한 6월 말은 여름 고시엔 대회 지역예선을 앞둔 시기였다. 야구부가 가장 바쁠 때였다. 하지만, 여느 날과 특별히 다른 점은 발견할 수 없었다. 학생선수들은 오전 6시 30분에 기상해 8시까지 교실로 들어가고서 오후 3시 30분까지 일반학생들과 함께 정규수업을 모두 받았다.
정규수업이 끝나자 학생선수들은 기숙사에서 야구복으로 갈아입고 5km 정도 떨어진 야구장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한 학생선수는 “오후 4시까지 야구장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에 뛸 수밖에 없다”고 짧게 말하고선 숨을 몰아쉬며 바쁘게 달렸다.
학생선수들은 30분 동안 열심히 구장을 정비하고서 오후 4시30분부터 훈련에 돌입했다. 훈련은 실전위주였다. 두 팀으로 편을 갈라 7회까지 연습경기를 벌였다. 경기에 출전하지 않은 후보들과 저학년생은 경기를 관전하거나 구장 한편에서 스윙연습이나 캐치볼을 했다.
눈길을 끈 건 연습경기에 출전하지 못한 선수들이 상당수지만, 이들의 표정에서 실망감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유가 있었다.
PL학원고 야구부 전체인원은 60명. 학년당 20명 선이었다. 이들 가운데 절반은 야구를 취미로 하는 학생들로, 애초부터 체육 특기생으로 대학에 입학하거나 프로에 갈 마음이 없는 이들이었다. 볼 보이 역할을 하던 2학년생은 “그저 유니폼을 입고 훈련하는 것만으로 기뻐서 경기에 출전하지 않아도 실망하지 않는다”며 환하게 웃었다.
구사노 씨는 “다른 고교의 야구부원은 대개 100명을 넘는다”며 “PL학원고는 과거부터 60명을 넘지 않도록 했다”고 강조했다. 그래야 가뜩이나 좁은 구장에서 모두가 훈련할 수 있다는 게 구사노 씨의 설명이었다.
사실 구장도 구장이지만, 훈련시간 탓도 컸다. 오후 4시 30분부터 시작한 연습경기와 훈련은 정확히 6시30분이 되자 끝났다. 학생선수들은 구장을 정비하고, 장비를 챙기고 나서 다시 기숙사를 향해 뛰었다. 학생선수들이 구장에 있던 시간은 3시간이 채 안 됐고, 훈련시간은 ‘딱’ 2시간이었다.
‘과연 이렇게 짧은 훈련으로 선수들이 기량이 좋아질까’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30년 동안 야구부를 지켜본 구사노 씨는 “과거에도 PL학원고 야구부의 훈련시간은 길지 않았다. 길어야 3시간이었다”며 “정규수업을 모두 끝마치고 시작하는 훈련이라, 시간이 길 수 없다”고 설명했다.
오후 6시 훈련이 끝나면 PL학원고 야구부원들은 기숙사까지 다시 뛰어간다. 그들의 발이 닿는 곳은 아스팔트 도로가 아니라 꿈으로 향하는 계단일지 모른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학생선수들은 기숙사로 돌아와 샤워를 끝마치고서 저녁식사를 했다. 혹시나 야간훈련을 할까 싶었지만, 두 학생선수를 제외한 나머지 부원들은 숙제에 열중하거나 같은 반 급우들과 어울려 컴퓨터 게임을 즐겼다. PL학원고 관계자는 “오후 2시간 훈련을 제외하면 나머지 시간은 학생선수들의 개인 시간”이라며 “야간훈련을 하든 놀든 학교와 야구부에서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물론 학생선수들이 집중해 훈련하는 때가 있긴 하다. 주말이다. PL학원고 야구부원들은 “토요일과 일요일처럼 학교 수업이 짧거나 없는 날엔 오랫동안 훈련에 열중한다”고 설명했다. 특히나 학기 중 주말에는 연습경기를 자주 치른다고.
PL학원고 코치는 “고시엔 대회 기간과 11월부터 3월까지 연습경기를 할 수 없기에 학기 중 주말을 최대한 활용해 실전감각을 키우고 있다”라고 했다. 어째서 연습경기도 마음대로 못하는 것일까.
대개 고시엔 대회는 7월부터 지역예선을 시작해 8월부터 본선을 치른다. 본선에 오르면 그 이후부턴 연습경기를 치를 수 없도록 규정돼 있다. 성적 욕심으로 과도하게 연습경기를 치르다 학생선수들이 부상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8월 말 고시엔 대회가 끝나면 9월부터는 추계고교대회가 시작해 역시 연습경기를 할 수 없다. 게다가 11월부터 3월까지는 동계 기간이라, 학생선수들의 부상을 우려한 일본고교야구연맹에선 연습경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PL학원고 야구부원들은 동계기간엔 배팅 연습도 하지 않고, 기초체력 단련위주로 훈련한다.
PL학원고 야구부의 선수 수급도 과거와는 많이 바뀌었다. 예전처럼 오사카 이외 지역의 선수들을 스카우트하는 일은 사라졌다. 구사노 씨는 “PL학원고 야구부의 명성이 높아 스카우트하지 않아도 입학하고 싶은 학생선수들은 제 손으로 응시원서를 낸다”며 “오사카 지역의 시니어 리틀 야구팀이나 중학교 야구부 감독들이 찾아와 ‘이 선수가 어떠냐’는 식으로 추천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PL학원고 야구장의 창고. PL학원고도 한국 대부분의 고교야구부처럼 학교의 지원을 거의 받지 않는다. 동문회나 지역사회의 후원회로부터 운영비를 조달하는 식이다. 하지만, 야구부 예산을 둘러싸고 잡음은 없다. 예산을 무기로 코칭스태프를 함부로 하려거나 뒤흔드는 일은 더욱 없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일본고교야구연맹에서 특별 우대생 제도를 없앤 것도 지역 외 선수의 스카우트가 사라진 계기였다. ‘학교가 야구에 재능이 있는 학생에게 장학금과 훈련비를 지급하는 제도’인 특별 우대생은 전력강화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2008년부터 “학교 야구를 상업주의와 승리지상주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우려가 일본야구계의 공감대를 얻으며 그해부터 특별 우대생 제도는 금지됐다. PL학원고도 이에 따라 3년 전부터 특별 우대생을 받지 않고 있다.
구사노 씨는 과거 PL학원고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합숙’도 옛말이 됐다고 강조했다. 현재 PL학원고 야구부 전용기숙사는 사라졌다. 학생선수들은 일반 기숙사에서 또래 학생들과 함께 생활한다. 기숙사가 아니라 집에서 통학할 수도 있다. 예전처럼 강요는 없다.
PL학원고 야구부의 병폐였던 폭력에 의한 선후배 간의 엄격한 규율도 전용 기숙사와 함께조금씩 자취를 감췄다. 무엇보다 일반학생들과 어울리면서 학생선수들의 품성과 성적이 크게 좋아졌다.
하지만, 동전의 이면처럼 PL학원고 야구부의 변신은 성적 하락으로 이어졌다. 1999년 추계고교대회 우승과 봄 고시엔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던 PL학원고는 2000년부터 2005년까지 봄 고시엔 대회 지역예선에서 모두 떨어졌다. 여름 고시엔 대회는 2000년부터 올해까지 본선 무대에 진출해도 3회전 이상을 통과하지 못했다.
오사카 최고 야구 명문고 자리도 오사카 토인고에게 넘긴 지 오래다. 상황이 이 정도면 PL학원고 이사진들과 동문, 지역사회에서 분발을 요구할 법도 하다. 하지만, 불만은 없었다. 되레 학교 측과 동문은 지금의 변화를 환영하고 있다.
PL학원 고위 관계자는 “야구부의 우승은 덤일 뿐, 본질은 아니다”라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일본 경제는 불확실성의 연속이다. 이제 고졸은 설 자리가 없다. 최소한 대학에라도 입학해야 취업할 수 있다. 하지만, 대학도 입학만 한다고 취업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하려면 기본 지식이 있어야 한다. 체육 특기생으로 대학에 입학한 야구선수가 ‘공부냐, 프로냐’를 고민하다가 공부를 선택할 즈음이 되면 고교 때 익힌 기본 지식이 얼마나 귀중한지 깨닫게 된다. 가뜩이나 요즘은 영재교육으로 학생들의 수준이 높아서 야구에만 집중한 학생은 대학의 치열한 경쟁에서 쳐져 기회를 잡을 수 없다.
야구부의 우승보다 중요한 건 바로 학생선수들의 미래다. 우리가 장식장 속에 진열된 우승기를 보며 흐뭇해하는 사이 아이들은 사회에 낙오돼 불행한 인생을 살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차라리 우승기가 줄어도 아이들의 인생이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면 그편을 선택하는 게 옳다. 여기는 학교지, 야구 기계를 생산하는 공장이 아니니까.”
PL학원고 본관 로비 한편에는 그간 운동부들이 수상한 우승컵과 우승기가 빼곡히 정리돼 있다. 특히나 야구는 고시엔 대회에서 통산 7회나 우승하며 다른 고교야구부들로부터 부러움을 사고 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이 관계자는 “한국에서 온 분들께 건방지지만, 제 생각을 감히 말씀드리자면”이라는 단서를 달고서 밝게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PL학원고 야구부의 변신은 대단한 게 아니다. 우리는 그동안 학생선수들에게 ‘1루부터 2루, 3루를 돌아 홈을 밟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정작 학교와 야구부는 학생선수들을 지도한 것과는 달리 3루에서 1루로 뛰었다. 우리는 그저 다시 1루에서 2루, 3루를 돌아 홈까지 뛰는 정상적인 길로 돌아온 것뿐이다.”
일본 고교야구 명문 PL학원고를 가다 (2편)이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