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14:1-15
찬송가 382장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역대하 14장부터 16장은 유다 왕 아사 이야기입니다. 아사는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뉜 뒤 남왕국에서 세 번째로 왕좌에 앉은 인물입니다. 역대기보다 앞서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한 열왕기는 그를 선한 왕으로 평가합니다. 이때 같은 판단을 내리는 역대기는 그의 삶을 세 배 분량으로 기록해 첫 독자들과 우리에게 보다 풍성한 가르침을 줍니다. 오늘 본문은 아사 통치 전반부입니다.
아사의 종교개혁과 평안(1-8절)
(1) 아비야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우매 다윗 성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아사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 그의 시대에 그의 땅이 십 년 동안 평안하니라
솔로몬의 손자이자 르호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죽었습니다. 이에 왕위는 그의 아들 아사에게 돌아갔습니다. 성경은 앞서 역대하 13장 끝에 아비야에게 아내가 열넷이고, 아들은 스물둘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렇다면 아사는 스물한 명의 왕자를 제치고 왕이 된 셈입니다. 열세 계모의 따가운 눈총은 덤이고 말입니다.
이는 언뜻 들어도 참 살 떨리는 모양새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역대기가 생략했지만 분명 다윗 통치 말에 벌어진 왕자들의 난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사의 때를 마주한 이에게 이런 염려가 생길 틈을 허락하지 않고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의 시대에 그의 땅이 십 년 동안 평안하니라.” 나라가 평안을 누렸습니다. 전쟁이나 각종 시끄러운 일 없이 조용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를 이어지는 말씀이 설명합니다.
(2) 아사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여
아사가 하나님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했습니다. 여기서 ‘보시기에’는 직역하면 ‘두 눈으로’입니다. 아사는 하나님이 두 눈으로 확인할 만큼 명징하게 선과 정의를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영이셔서 우리처럼 눈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아사의 행동이 하나님 앞에 서기에 옳고 바랐다는 뜻입니다.
오래전, 이스라엘 민족이 아직 가나안에 입성하기 전에, 이들은 광야에서 자기 눈에 보기 좋은 대로 행했습니다(신 12:8). 이들은 자기 자신을 삶의 주인이자 기준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그들은 광야에서 40년을 보내고 죽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습성은 사사시대에도 변치 않고 이어졌습니다(삿 21:25). 또한 오늘날 현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를 답습한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사는 달랐습니다. 그는 왕이면서도 하나님을 자기보다 더 큰 왕, 진정한 주인으로 인정하고 모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준 삼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았습니다. 즉, 하나님 말씀을 삶의 지침으로 삼은 것입니다. 이때 성경은 아사가 행한 일들을 구체적으로 소개합니다.
(3-5)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애고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찍고 유다 사람에게 명하여 그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하며 그의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고 또 유다 모든 성읍에서 산당과 태양상을 없애매 나라가 그 앞에서 평안함을 누리니라
아사는 무엇보다 먼저 나라에 만연해진 우상숭배를 근절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우상을 위한 제단과 산당을 없앴습니다. 또 주상으로 번역된 각종 석상을 깨뜨렸고 풍요와 다산의 여신 아세라 상을 찍어 없앴습니다. 그리고 태양상까지도 없앴습니다.
어찌 보면 아사의 행동은 하나님을 믿는 이라면 마땅히 할 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당연한 걸 했는데 굳이 칭찬하는 건 사치로 보입니다. 하지만, 속사정을 헤아리면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아사의 행동은 단순한 종교 행위가 아니라 백성의 생존 방식을 송두리째 뒤엎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땅에 정착해 생소한 농경 기술을 하나둘 익혀 가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미 농경문화를 상당히 축적한 가나안은 매력적인 걸 넘어 생명줄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생존을 위해 가나안을 배척하지 않았고, 그들의 모든 걸 따랐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숱한 왕들도 이러한 시류를 좌시했습니다. 그들은 백성 안에 자리 잡은 가나안 문화를 근절하지 않았습니다. 긁어 부스럼 만들게 없다고 여기며, 그게 왕권 강화와 나라 안정에 도움이 된다고 믿고 적당히 타협했습니다.
하지만 아사는 진정한 생명이 어디서 오는지 알았습니다. 바로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에서입니다. 그래서 그는 백성과의 불화를 각오하며 일찍이 모세가 전한 율법대로 가나안 문화를 없앴습니다. 왕권이 불안해져 형제와 계모들에게 목숨을 잃을 수 있더라도 이를 강행했고 백성에게 율법과 명령을 행하라 선포했습니다.
이처럼 아사는 우상을 방치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나라를 차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자기 자리를 내어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진정한 왕으로 모셨습니다. 그러자 이런 아사를 통해 유다는 평안을 누렸습니다. 성경은 누구도 이 결론에 토 달지 못하게 이렇게 못 박습니다.
(6a) 여호와께서 아사에게 평안을 주셨으므로 그 땅이 평안하여 여러 해 싸움이 없은지라
하나님이 아사의 행동을 보고 그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라엔 평화가 임했습니다. 이 일련의 흐름은 역대기 기자가 자기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모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에서 돌아온 귀향민이 다시금 나라를 세우고 회복하려면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샘플이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이 모습은 오늘 우리에게도 귀감이 됩니다. 우리는 다 세상에서 평안하기를 원합니다. 이때 이런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일은 바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일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대신 의지하는 모든 걸 제거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남 보기에 착한 일도 한다고 해도, 다른 한 편에선 하나님 아닌 다른 걸 의지하고 거기 편승한다면 그건 우리 마음에 평안 아닌 불안만 남깁니다. 만족 없는 공허함만 만듭니다. 그러니 우상을 통해 얻는 거짓된 안정감을 배격해야 합니다. 그 우상들을 깨고, 하나님만 주인 삼아야 합니다. 이것이 평안을 누리는 지름길입니다. 한편, 이 평안의 때에 아사는 그저 쉬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6b) 그가 견고한 성읍들을 유다에 건축하니라
역대기는 건축 활동을 신실한 왕의 업적으로 돌립니다. 남유다 첫 선왕이자, 이후로도 좋은 샘플로 남은 아사도 그의 조부 르호보암때 애굽에 의해 무너진 나라 곳곳을 보수했습니다. 또한 8절을 보면 아사는 군대도 재편했는데, 잘 훈련된 큰 용사, 정예병의 수가 총 58만이었습니다.
이렇게 아사가 나라를 방비한 걸 두고 일견 그가 교만해졌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제 좀 살만하니 자기 배를 불린다고, 하나님 없이도 살 방책을 교묘히 만든다고 말입니다. 아니면, 훗날 자신이 걸려 넘어질 걸 구태여 만든는거 아니냐며 우려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본문이 이를 증명하기도 하지만, 더 읽지 않더라도 아사의 행동은 이 땅 왕으로 선 그의 책무였습니다. 왕은 국방을 튼튼히 하고 백성의 평안을 도모하는 존재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아사는 마땅히 두 나라 왕국에 발 딛고 사는 신실한 종으로서 자기 일을 성실하게 감당했습니다. 한편, 아사는 이 일들을 혼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백성과 함께 일하려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7) 아사가 일찍이 유다 사람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이 땅이 아직 우리 앞에 있나니 우리가 이 성읍들을 건축하고 그 주위에 성곽과 망대와 문과 빗장을 만들자 우리가 주를 찾았으므로 주께서 우리 사방에 평안을 주셨느니라 하고 이에 그들이 성읍을 형통하게 건축하였더라
아사의 이 연설은 깊이 살펴볼 만합니다. 아사는 백성에게 하나님이 평안을 주셨다고 밝혔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평안을 주신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찾았기 때문’이라고 짚습니다. 이 말이 특별합니다.
분명 성경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한 주체가 아사라고 했습니다. 또, 백성에게 하나님 율법과 명령을 지키라고 한 것도 아사였고, 우상과 관련된 각종 기물을 없앤 것도 아사라고 합니다. 즉, 유다에서 하나님을 찾은 건 아사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아사로 말미암아 나라에 평안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아사는 연설에서 자기 선행과 그 결과를 백성에게 돌립니다. 자신을 백성과 동일시 하며, 우리가 하나님을 찾았다고 고백합니다. 왕이 백성에게 자기 눈높이를 맞춘 것이고, 자기 손과 발을 백성에게 얹은 것입니다. 아사의 이 모습은 한 위대한 선지자의 기념비적 기도를 떠오르게 합니다.
(다니엘 9:3)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
다니엘이 선지자 예레미야의 글을 읽다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이때 그는 지금 이스라엘이 바빌론에서 노예로 사는 건 ‘죄’ 때문이라고 고백하며 자복했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에서 다니엘은 옛 이스라엘 백성의 범죄를 그저 ‘조상들의 죄’로 두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로 끌어와 안았습니다.
다니엘은 어려서부터 우상의 소굴에서 하나님만을 독야청청 가리켰던 이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해 항상 창문을 열고 우상 숭배자마저 하나님을 증언하게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니엘을 노아, 욥과 함께 의인으로 인정하기까지 하셨습니다(겔 14:14). 그런데 이런 그가 나도 조상들의 범죄에 동참했다, 우리가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다니엘은 포로민에게 하나님을 가리켜 보이는 선한 왕 같은 존재였습니다. 이런 다니엘이 죄로 인해 포로가 된 민족과 자신을 동일시했고, 그들을 대표해 회개하며 민족이 그토록 바란 귀향길을 닦았습니다. 그러자 시간이 흘러 포로민 중 일부는 고토로 돌아가 황폐해진 땅을 일구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아사와 다니엘의 모습을 톺아보면 자연스레 생각나는 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도 아사와 다니엘 같이 당시 백성만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해 오늘날 우리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자신이 얻은 구원과 생명을 기꺼이 나누셨습니다.
실제로 더 큰 아사이자 더 위대한 다니엘이신 예수님도 이 땅에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 왕은 자신을 우리와 동일시한 걸 넘어 우리 대신 모든 율법에 순종하셨고, 우리 죄를 다 가져가 우리보다 더 비참한 존재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두를 통해 얻은 성취를 우리에게 기꺼이 나눠주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이렇습니다.
(누가복음 24: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가 말씀하셨습니다. “샬롬! 너희에게 평화를 준다!” 그 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잡수셨고 말씀을 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예수님의 증인으로, 충성된 일꾼으로 세우셨습니다. 자기 일을 함께 할 동역자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이 자비로운 왕의 행동이 2천 년 전 제자들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된다는 걸 잘 압니다. 그렇다면 사실 우리는 선과 정의를 실천하기 전부터 이미 평안을 가득히 거저 받은, 큰 은총 받은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중심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기꺼이 주님 일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진정한 왕으로 믿고, 이 땅에서 나에게 맡겨진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며 거룩한 성도로 사는 일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와 자신을 동일시하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기뻐하며 기꺼이 순종의 삶을 살고 평안을 가득히 누리시는 교우님 되시길 축원합니다. 한편, 이 아사에게 어느 날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아사의 전쟁과 승리(9-15절)
(9) 구스 사람 세라가 그들을 치려 하여 군사 백만 명과 병거 삼백 대를 거느리고 마레사에 이르매
평화로웠던 10년이 지나고 어느 해, 구스 사람 세라가 백만 대군과 병거 삼백 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침공했습니다. 구스는 성경에서 보통 에티오피아를 가리키는데, 이곳 출신 세라는 애굽 왕조가 고용한 용병 이거나 군대 장관으로 추정합니다. 이 거대한 병력이 출몰하자 아사도 움직였습니다. 그는 그간 훈련한 군사를 이끌고 와 전선을 형성했습니다. 이때 아사가 한 행동을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11) 아사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힘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하건대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아사는 칼 잡은 손을 번쩍 들고 “돌격 앞으로”를 외치지 않았습니다. 병력을 둘로 나눠 한 대는 적의 정면을 한 대는 빙 돌아 후미를 치자는 전략을 세우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가장 먼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적 수의 절반밖에 안 되는 자신들을 약자로 고백하며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더불어 자신들은 여호와 하나님 이름을 의지한다고 하며, 이 전쟁이 아사 대 세라, 유다 대 애굽이 아닌 하나님 대 사람 구도로 치환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기도에 이렇게 반응하셨습니다.
(12) 여호와께서 구스 사람들을 아사와 유다 사람들 앞에서 치시니 구스 사람들이 도망하는지라
하나님이 직접 적군을 치셨습니다. 이때 구체적으로 어떻게 무찌르셨는지는 역대기 기자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이 기도에 신실하게 응답하신 걸 주목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눈으론 결코 이길 수 없어 보이는 전쟁에서 아사가 큰 승리와 더불어 많은 전리품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후 아사는 계속 평안을 누렸습니다. 이때 아사가 만난 시험은 그의 믿음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했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 얼마나 깊은지, 얼마나 큰 파도도 삼켜 잠잠히 재우고 남을만한지 경험하는 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습은 앞으로 또 어떤 시련을 맞을지 모를 귀향민에게도 위로와 용기를 주었을 것입니다.
한편, 앞서 살폈듯 우리에게는 아사보다 더 큰 예수 그리스도라는 온 우주의 통치자가 계심을 잊어선 안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를 기억할 때 우리도 삶 속 어떤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그분 안에서, 그분이 담보하신 평안의 넓이와 높이와 깊이를 체험하며 넉넉히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도 이렇게 증언합니다.
(히브리서 7:24-25)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아사보다 더 큰 왕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친히 간구하십니다.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어 우리를 구하라고 요청하십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님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릴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지 않으십니까(롬 8:26).
그러니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는 이 평안을 놓치지 마십시다. 이 평안을 풍성히 누리며 기꺼이 신실한 성도로 사는 영예를 누리십시다. 그때 죄로 허물어지고 무너져 버린 이 세상은 우리를 통해 다시금 아름답고 거룩한 주님의 전, 주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 속 아사를 통해 하나님을 찾는 자가 누리는 평안을 봤습니다. 우리는 죄 가득한 세상에 살며 하나님보다 다른 것들이 우릴 구원할만하다며 갈팡질팡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평안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자신을 찾는 자에게 그 평안을 넉넉히 주심을 알려줍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나아가, 우릴 대신해 하나님을 찾아 평안을 얻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 평안을 불가역적으로 선물하셨음을 믿고, 예수님 안에서 신실하게 사는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아사가 제거한 우상숭배 도구들은 오늘날 어떤 모습으로 우리 곁에 있습니까?
2. 아사는 두 왕국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신실하고 세상에서도 성실했습니다. 이에 비춰 오늘 내가 허투루 하지 않아야 할 과업은 무엇입니까?
3. 아사는 자신을 백성과 동일시 했고 자신의 선행 결과를 백성에게 돌렸습니다. 오늘 내가 누리는 것은 무엇이고 그것을 나눌 대상은 누구입니까?
4. 아사가 만난 시련은 하나님이 주신 평안의 깊이를 확인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이 겪은 시련에 비춰볼 때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평안의 깊이는 어떠합니까? 그리고 이 평안을 값없이 누리는 우리가 보일 반응은 무엇입니까?
(작성: 이종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