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남주와 안치환, 어두운 시대 불꽃처럼 살다 갔거나 살아가고 있는 이들”
일시 : 2000년 12월 14일, 오후 7시
장소 : 스튜디오 참꽃
대담 : 안치환 VS 박준흠
정리, 글 : 박준흠
안치환 6.5집 [Remember -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2000/신나라뮤직)
어두운 시대 불꽃처럼 살다 가신 김남주 시인께
음악적 영감과 노래의 바른 길을 깨우쳐 주신 그 분께
어른의 눈빛이 그렇게 맑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신 그 분께
이 음반을 바칩니다.
(안치환/ 2000. 3)
박준흠(사운드네트워크 대표)
"정말 김남주에 대한 애정이 있고, 더불어 나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만이 찾는 음반이 되었으면 한다."
박준흠 : 2000년 활동을 정리한다면?
안치환 : 작년하고 올해가 제일 바빴다. 무대에 올라간 회수도 가장 많았다. 하지만 대중들이 많이 볼 수 있는 방송활동은 많이 줄였다. 새로운 세기라고 해서 나에게는 새로울 것도 없고, 해 왔던 일들을 열심히 했던 한 해였다.
박준흠 : 이번 6.5집 [Remember]는 흔히 하는 방송홍보를 별로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유는?
안치환 : 방송홍보를 할만한 음반이 아니었다. 그런 식으로 상업적인 메카니즘에 귀속시켜서 음반을 홍보할 생각이 없었다. 그 음반은 나 자신과의 약속을 실행한 음반이고, 정규 앨범의 성격보다 한 시인에 대한 헌정의 성격이 강했다. 공연을 하면서 대중들에게 약속한 부분을 지킨 것이다. 이면에는 상업적인 홍보(방송홍보)를 하려면 많은 돈이 들어가는데, 그런 식으로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정말 김남주에 대한 애정이 있고, 더불어 나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만이 찾는 음반이 되었으면 한다.
박준흠 : 헌정 대상이 김남주 시인이기 때문에 그런가?
안치환 : 그 분의 이름이나 살아왔던 것들이 상업적인 메카니즘과 연루되면 내 자신도 떳떳하지 못할 것 같고, 사람들이 보기에도 "그것 가지고 장사해 먹는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니까, 아예 음반의 판매에 대해서 처음부터 생각을 접었다.
박준흠 : 그러나 헌정음반을 만드는 목적 중에 하나는, 결국에는 헌정 대상을 대중들에게 많이 알리는 것도 있지 않나? 그런 점에서는 미진한 것이 아닌지.
안치환 : 그런 점에서는 미진하다. 그 음반이 대중들에게 판매가 되면 로얄티 중의 일부가 유가족들에게 가고, 그게 좀 많이 갔으면 한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음악이라는 것은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져야겠지만, 그렇게 안 했던 이유는 '김남주'라는 이름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상업적인 메카니즘과 연결되면 내가 마음 앓이를 할 것이다.
※ 6.5집에는 신곡으로 풍자곡 <똥파리와 인간>, 이지상, 송봉주가 함께 참여한 <지는 잎새 쌓이거든>, 김남주 시인의 서정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산국화> 등 3곡을 새로 담았다. 그리고 기존곡으로는 김남주 시인의 육성 낭독으로 시작되는 <자유>, 안치환의 1집 음반에서 발표했던 <저 창살에 햇살이>, <물 따라 나도 가면서>, <3.8선은 3.8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등을 실었다.
"나 하나만 법을 어기지 않고 올바르게 사는 것이 가장 큰 가치라고 생각하는 이 시대에 김남주가 있었다면, 그보다 더 훌륭한 가치를 얘기하고 우리를 끌어줄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준흠 : 이번 음반의 수록곡 <자유>는 김남주 시인의 육성이 먼저 나오고 곡이 진행된다.
안치환 : 원래 그 분의 시 낭송 음반이 있었다. 밋밋하게 나의 목소리로만 하기보다 그 분의 육성을 오버랩 시킴으로서 그 분의 존재에 대해서 밀도 있게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박준흠 : 김남주 시인은 어떤 사람인가?
안치환 : 해남에서 태어났다. 70년대 '남민전 사건'이란 것이 있었다. 남조선 민주주의 혁명전선인가... 그것이 하나의 국가 전복 사건으로 취급되었는데, 그 활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분이다. 감옥에서 계속 시를 쓰셨는데, 그 시들은 내 대학시절에 읽었던 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유독 그 때 운동을 했던 사람들에게 굉장히 강한 정신적인 용기와 '운동의 이유'에 대한 어떤 정신적인 기둥 역할을 했다. 그 전에 김지하가 했던 것만큼이나 강렬하고 '전사적인 이미지'로 다가왔다. 그 분이 감옥에 있을 때의 상황이 그렇기도 했다. 감옥에서 은박지에 써서 몰래 유출되던 시들 <조국은 하나다>, <38선은 38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학살> 등등. 그 때 당시 그분의 시를 읽으면서 노래하는 평범한 학생으로 살아가다가, 고학년이 돼가면서 한참 '양심수'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될 때, 그들을 자유롭게 하자는 여러 가지 공연이 있었다. 처음으로 기억되는 것은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추최 했던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이후 민가협에서 매년 진행)에 참여한 것이고, 그 때가 90년 정도로 기억한다. 그 때 기존에 만든 노래보다는 양심수의 노래를 부르고 싶어서 김남주의 시들 중에 <저 창살에 햇살이>를 가지고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그 분의 이미지가 전사적이라서 강렬한 시들만 쓰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의 시 세계를 전체적으로 보면 그에 못지 않게 서정성을 가진 시 세계가 또 하나있다. 바로 <저 창살에 햇살이>는 늦가을에 양심수가 독방에서 세상과 통하는 유일한 통로인 '창살'로 들어오는 가을 햇살을 받으면서 느끼는 애상을 표현한다. 그 행사 말고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는 김남주 석방을 위한 행사를 여러 번 했다. 거기 계속 참여했는데, 몇 년이 지나서 그 분이 석방이 되었다. 석방된 후 처음 공연이 있었는데, 거기서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그 때 당시만 해도 나는 까마득한 후배였고, 이름으로만 알고 있었던 명망 있는 선배들을 대할 때는 다가가기가 어려워서 경외만 하는 상태였다. 그런데 행사장에 김남주 시인의 눈을 아주 가까이에서 볼 기회가 있었는데, 얼굴은 창백하기는 했지만 눈빛이 굉장히 순진하고 순하였다. 내가 예상한 이미지와 너무 달랐다.
박준흠 : 김남주 시인도 안치환 씨의 노래를 좋아했는가?
안치환 : 그 이후에 민중문화운동연합에서 대규모 전국 순회 공연을 했는데, 거기에 바로 김남주 선생님이 참여를 했었다. 그 분은 시 낭송자였다. 그 때 <자유>라는 시를 낭송했는데 너무 좋다고 생각했다. 그 분의 시 낭송 억양을 몇 번 들으면서 다 외웠다. 나중에 3집 음반 [Confession]을 1993년에 낼 때, 제도권에 들어가는 음반을 만들 때인데, 그 전에 <자유>라는 곡을 만들었다. 이 곡은 일반 운동권 가요와는 판이하게 다른 음악적인 풍을 갖고 있었는데, 그 음악적인 풍이 바로 감남주 시인의 시 낭송 인토네이션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나중에 그 분에게 음반을 들려드렸는데, <저 창살에 햇살이>는 그저 그렇다고 하였지만 <자유>는 마음에 든다고 하였다. 그러한 인연으로 계속 만나게 되었다.
박준흠 : 김남주 시인의 어떤 점을 좋아했는가?
안치환 : 일반적으로 선배들은 기존의 식상한 권위적인 모습을 보여주거나, 운동가로서의 자신의 권위를 훼손하는 발언은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는데, 오히려 나중에는 무한히 실망스런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런데 김남주 선생님은 그냥 편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했다. 그 때 당시는 시대가 변화하는 시기였고(90년대 초반), 가치에 대한 붕괴가 많았었는데, 그 분도 그것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다. 기억에 남는 것은 환경을 생각하는 자그마한 공연에 간 적이 있고, 선생님은 아는 후배 때문에 거기에 가서 시 낭송을 한 적이 있다. 공연이 끝나고 나서 내가 선생님을 모시고 서울에 올라오게 되었다. 그 때 하시는 말씀이 "요새 노래 잘 써지냐? 나는 시도 잘 안 써지고, 시집도 잘 안나가고..."였다.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는 자신의 시집이 얼마나 나가는지에 대해서 신경을 쓸 분은 아닐 것 같은데,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내게 마음을 여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어린 후배지만 나에게 어떤 동지감을 주는 게 좋았다. 인간적인 면에 많이 끌렸다.
이후 곡 작업을 하면서 어떤 노래를 써야 좋을지 모를 때 많은 시집들을 뒤척였지만 김남주의 시집이 가장 정확하게 "무엇을 노래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고 있었다. 그 시대에도 뚜렷하게 무엇을 노래해야 하는지를 시로 얘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시들을 놓치지 않고 계속 노래로 만드는 작업을 해왔다. 그리고 나서 선생님이 세상을 뜨고서 보니 9곡 정도의 노래가 만들어져 있었다. 이후 공연 중에 지나가는 말로 언젠가는 헌정 음반을 만들고 싶다라고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 얘기 이후 1년 정도 지나고 나서 음반이 나왔다.
박준흠 : 김남주 시인을 모르거나, 알더라도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비쳐지기를 원했나?
안치환 : 정말 어두운 시대에 불꽃처럼 살다간 전사 김남주를 기억하라! 모든 세상의 가치가 변했다고는 하지만, 우리들은 많은 것을 쉽게 잊고 살아 왔지만, 또 내가 기억하라고 해서 기억할 세상도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그는 정말 아까운 사람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2000년 이 시대에는 무엇이 가장 소중한 가치인가를 생각할 수 없고, 나 하나만 법을 어기지 않고 올바르게 사는 것이 가장 큰 가치라고 생각하는 이 시대에 김남주가 있었다면, 그보다 더 훌륭한 가치를 얘기하고 우리를 끌어줄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쉽고 가슴이 아프다. 이 시대 역사 속에는 인간답게 살기 위해 투쟁하다 먼저 세상을 뜬 사람이 많이 있지만, 그 사람들과 함께 김남주의 이름이 기억되었으면 한다. 그 분의 시를 읽으면서 나의 생각이 변했다. 그 분의 시는 투쟁일변도의 시가 아니다. 칼과 같은 시뿐만 아니라 부드러운 솜털 같은 시도 많이 있었다. 격정과 서정의, 극과 극의 확연한 어울림이 그 분의 시에 있었다. 서정 시인으로서의 김남주도 우리는 너무 모르고 있다.
※ 안치환이 김남주 시인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90년대 초, 옥중시 "저 창살에 햇살이"를 노래로 만들면서부터 이다. 이후 "자유"를 담은 3집 앨범은 민중시에 록을 접목시킨 90년대 대표 음반으로 평가받고 있다.
"형 트리뷰트 공연하면 내가 저녁 살께"
박준흠 : 이번에 발표된 김광석의 트리뷰트 앨범은, 고인이 된 냇킹 콜의 목소리에 그의 딸 나탈리 콜이 노래를 덧씌워 만든 [Unforgetable] 앨범의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김광석 트리뷰트 앨범에서 <그날들>을 불렀는데.
안치환 : 솔직히 녹음 할 때 제작자한테 그렇게(김광석의 목소리를 더빙하는 방식)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탈리 콜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한다. 아버지와 딸이니까. 그런데 전체적으로 다 그렇게 만들면 너무 "싸 보이지 않냐"고 했다. 그 방법이 서로간의 우정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에서 했다고 하는데, 나는 무슨 의도가 들어갔는지 잘 모르겠다. 솔직히 내가 그 음반에 참여한 것은 학기형(박학기) 때문이다. 미안한 얘기지만 음반에 참여하면서도 별 감정이 없었다. 광석형은 이해할 것이다.
박준흠 : <그날들>을 부른 특별한 이유는?
안치환 : 처음에는 나한테 다른 노래를 요구했었다. <나의 노래는> 같은. 예전에 학전에서 공연을 할 때 <그날들>을 부른 적이 있었다. 김광석을 생각하면서 부르면 딱 맞는 노래다.(안치환은 1991년 9월 학전에서 김광석과 "김광석, 안치환 가을 콘서트"를 가졌었다.)
박준흠 : 현재까지 신중현, 산울림, 김현식, 김광석의 트리뷰트 앨범이 나왔고, 들국화 트리뷰트 앨범이 제작 중에 있다. 향후 트리뷰트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뮤지션이 있다면?
안치환 : 나로서는 당연히 김민기이다. 남들이 안 하면 언젠가는 내가 할 것이다. 김광석의 트리뷰트는 시기로 봤을 때 적절한지는 잘 모르겠다. 영화 "공동 경비 구역 JSA" 붐에 의해서 기획된 음반이 아닌가라고도 생각한다. 다분히 상업적인 요소들이 깔린 기획일텐데, 왜 그렇게 기획했는지도 의아하다. 박준흠씨는 이 음반의 제작 방식(김광석의 목소리를 더빙하는 방식)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박준흠 : 일단 대중적인 흥미는 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중들은 제작에 관련된 자세한 속사정은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김현식 트리뷰트 앨범도 그랬지만, 곡 하나하나의 충실도가 없는 것이다. 신중현 트리뷰트 앨범을 넘어서는 음반이 아직도 없다. 트리뷰트 앨범 얘기를 하나 더 하자면, 1996년 정태춘이 고군분투하여 얻어낸 '가요 사전심의 폐지'의 최대 수혜자는 바로 인디씬의 뮤지션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오버그라운드씬에서 어떤 트리뷰트 앨범이 제작되던 간에 인디씬에서는 정태춘 트리뷰트 앨범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치환 : 정태춘은 김민기 다음이라고 생각한다. 민기형 트리뷰트 공연한다고 작년에 무리하게 기획해서 공연했는데, 민기형한테 미안했다. 차라리 안 하니만 못했다. 트리뷰트 받을 대상자에게 미안하게 해서는 안되지 않는가? 끝나고 다 같이 저녁을 먹는데, 태춘형이 저녁값을 다 냈다. 그래서 "형 트리뷰트 공연하면 내가 저녁 살께"라고 했다. (웃음) 그런데 현재 트리뷰트 앨범이 너무 빠르다고 생각한다. 한국 뮤지션들의 음악적인 생명력이 짧아서 그런가? 좀 더 나이가 들고 그 사람의 인생이 완숙한 단계에 있어서 자리 매김의 이유가 있다든지, 죽었다든지, 은퇴를 했다든지 등의 이유기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럼 점에서 김민기라고 생각하고, 태춘형은 'ING'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인디 뮤지션들이 정태춘의 가치를 알겠는가? 태춘형 때문에 현재 음악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런데 트리뷰트 앨범 헌정 받으면 기분 좋은가? 자기가 완전히 끝난 것 같지 않을까? (웃음) 기분 나쁠 것 같다. "이것들이 뭐 하고 있는 거야? 나를 완전히 (맛) 간 사람으로 알고 있나?"라고 하지 않을까?
"좋은 방법은 진보적이면서 대중적인 노래를, 대중적이면서도 건강한 노래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나의 고민은 끝난다."
박준흠 : 지난번 6집 [I Still Believe]에 대해서 얘기하겠다. 이 음반의 속지에는 "노래 속에 살면서 나는 가벼워지려 애쓴 적이 있었다"라는 얘기를 남겼다. 그 얘기의 진의와 그 때 당시 심경을 얘기하면?
안치환 : 나는 아무리 아름다운 노래를 하더라도 사람들은 "저 노래엔 분명 의미가 있을 꺼야"라고 짐작을 한다. 단순히 사랑 노래를 해도 "저 노래에는 더 깊은 의미가 있을 꺼야"라고 생각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었다. 지금은 거기서 자유로워지기는 한다. 안치환하면 희석화된 이미지 때문에, 어떤 운동권 가요, 나와는 상관없는 노래, 빨갱이 등등... 이런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보성과 대중성의 적절한 조화를 4집부터 많이 시도를 했는데, 5집 때는 잘 모르겠고, 6집 때는 그런 것에 신물이 났다. 개인적인 딜레마는 음반을 만들고 나서, "방송에 맞는 노래는 없나? 상업적인 노래는 없나?"라고 회사에서 요구하는 것에 대한 씁쓸함이다. 6집 이후로는 그런 생각을 정리했는데, "아, 이제 그 부분에 대해서는 더 이상 고민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였다. 좋은 방법은 진보적이면서 대중적인 노래를, 대중적이면서도 건강한 노래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나의 고민은 끝난다. (상업적인 고려에서) 끼워 넣기 식의 음반은 만들고 싶지 않다. 그런 시대도 지났다. 왜, 내 노래가 어때서?
박준흠 : 안치환 씨의 음악 활동은 사회적인 활동과 무관하지 않다. 예를 들어, 민가협 주최의 "양심수 석방을 위한 시와 노래의 밤", 범민족대회 공연(1991), "문익환목사 노벨평화상 후원을 위한 공연"(1992), 음반사전심의제 폐지 기념 공연(1998), 문익환목사님 방북 10주년 축하공연(1999) 등. 이런 공연을 가급적 많이 참여하려는 이유는?
안치환 : '가급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 식의 행사에 거의 제의가 들어온다. 왜냐하면 그런 공연에서, 이제는 기획의도와 맞는 뮤지션이 별로 없다. 그들이 요구하는 이름값을 하면서 분위기를 만들 줄 아는 뮤지션 자체가 드물다는 얘기다. 내가 잘났다는 게 아니라, 그래서 내게 요청이 자연스럽게 많이 들어온다. 그런 공연에 대해서 다른 공연보다 비중을 더 두어서 활동을 하지는 않는다. 전체적인 내 스케줄을 고려해서 되도록이면 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이번 민가협의 "양심수 석방을 위한 시와 노래의 밤"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내 콘서트 스케줄과 겹쳐서이다. 그런 것을 별로 의식하지는 않지만. 나는 지금도 그런 공연에 대해서 예전과 다르게 생각하지 않고, 내가 해왔던 일이기 때문에 주제는 다 달라도 큰 줄기는 하나라고 생각한다. 내 활동과 특별히 다르게 생각하지 않는다.
박준흠 : "뮤지션의 사회적인 책무"라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안치환 : 그런 공연에 많이 참여하는 것. (웃음) 나는 가끔 TV를 보면 딴 나라에 살고 있는 것 같다. TV에 나와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도 잘 모르겠고, 내 적성에도 안 맞고. 분명히 한 나라에 살고 있으면서 음악을 같이 하고 있는데, 왜 이렇게 다를까라고 반문한다. 나에게 있어서 그런 것("뮤지션의 사회적인 책무")은 10년 이상의 활동의 영역이기 때문에, 나에게는 자연스럽다. 적어도 "이 세상에서 노래를 해야한다는 것은?"과 같은 '뮤지션의 의미'는 내겐 음악 활동 처음부터 가져야 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출발했다. 그런 것들이 이 시대에 와서 좀 더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 자신의 생각과 건전하고 진보적인 생각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세상인데, 오히려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박준흠 : "TV를 보면 딴 나라에 살고 있는 것 같다"라고 말씀하셔서 하는 얘기인데, 얼마 전 영화잡지 씨네21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컬럼의 고정 필자인 김규항과 신현준은 최근에 연속으로 '이민'에 대한 문제를 심각하게 거론하였다. 개혁의 비전이 보이지 않는 이 땅을 저주하면서 쓴 글이었다. 이에 대한 견해는?
안치환 : 내가 요즘 영어 공부를 한다. 학원 아침반에 다니기 때문에 학생들이 대부분 아줌마들이다. 다 자녀들이 있고, 대부분 외국인 학교에 다니거나 외국에서 공부한다.(안치환 씨는 현재 연희동에 산다.) 나도 자식을 키우는 사람이끼 때문에 그런 문제를 생각하는데, "돈 있고 능력이 되면 대부분 그렇게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 사람들이 이해가 간다.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는 않다. 사람들은 내가 영어를 배우는 것에 대해서 이민 갈려고 그러냐고 묻는데, 그렇지는 않다. 이민에 대해서 옛날에 만들다 만 노래가 있다. "나는 알지. 네가 왜 떠나려 하는지..."라는 가사를 갖는다. 우리 나이 정도(30대 중반)가 되면 사회적인 적응기를 지났고,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특히 캐나다 같은 데 가면, "여기서 살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진짜 자신이 조국에 대한 사랑이 있다면(그는 '조국'이라는 말을 쓰면 사람들이 굉장히 생경하게 느낀다고 한다. '빨갱이 용어'라고 생각한다고 하는데, 그는 가슴 절절하고 무거운 단어라고 얘기한다), 달라져야 한다. 해외에 나가서 교민들 앞에서 노래를 할 때, 일례로 미국에서와 일본에서 받는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하나는 X 같고, 하나는 뿌듯하고 기쁘고 슬프다.
박준흠 : 김규항 씨는 글 말미에 "자신과 같은 진보적인 지식인은, 자신의 입장 때문에 생각이 있더라도 어찌할 수 없다"라는 요지의 얘기를 했다. 안치환 씨의 경우에도 같지 않을까?
안치환 : 그런 것은 아니다. 나는 음악 하다 정말 지치면 외국에서 2~3년 살다올 것이다. 음악과 관련된 재충전을 할 생각은 있다. 음악 하는 사람들에게 2년은 아주 짧은 시간이다. 몇 개월 전에 없어진 것 같은데 "2년만에 컴백한다"는 얘기를 종종 듣곤 하지 않는가? 공인으로 그런 소명 의식은 있기는 하지만, 그런 것 때문에 내가 해야할 일을 안 하지는 않을 것이다.
박준흠 : 지난 6월(2000년 6월)의 남북 정상의 만남을 지켜보며, 통일의 꿈을 담은 새 노래 <동행>을 선보였던 "우리의 소원은 통일" 콘서트(7월 1일 ~ 31일)를 하였다. 통일에 대한 생각은?
안치환 : 불확실하고 추상적이고 공허한 하나의 물체가 정상회담 이후에 좀 더 구체적이고 가능한 현실로 생각되고 있다. 올해 국민의식의 변화가 가장 크다. 꿈처럼 다가오는 현실이다. 하지만 시간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은 통일이라는 것이 갑자기 올 수도 있다라고 얘기한다. 동독과 서독처럼. 하지만 남한과 북한의 관계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휴머니즘과 통일은 이뤄야할 가장 큰 가치이고, 음악 하는 사람으로서 많이 애쓰면서 노래하고 싶다. 얼마 전에 조총련의 초청을 받아서 북한에 공연 초대손님으로 갔다 왔다. 나는 담담하게 통일 노래를 부르고 왔다. 다음 주에는 일본에 가서 공연을 한다. 민단과 조총련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데, 그들의 입맛에 맞는 노래를 하기보다 내가 지금 부르고 있는 노래를 하고 올 것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그들에게는 문화적인 충격일 수도 있다. 통일에 대한 전망은 내가 얘기할 문제는 아니고, 그 전망을 밝게 하는 문화적인 이질감을 해소하는 일을 하고 싶다.
※ 안치환씨는 2000년에도 많은 사회적인 활동에 참여했다. "낙선운동", "비전향 장기수, 그들에게 인권의 빛을...", "자유2000", "스크린쿼터연대와 공연", "사죄, 보상 촉구 - 태평양전쟁 희생자 위령제" 등등.
"정체되지 않는 뮤지션의 모습을 이루어 나가고, 발전해 나가는 모습을 갖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노래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박준흠 : 매체 인터뷰를 잘 하지 않는 것으로 안다. 이유는?
안치환 : 별로 하고 싶지가 않다. 피곤하다. 음악이나 제대로 해야지.
박준흠 : 노래평론가 배윤경 씨는 최근에 낸 "노동하는 기타, 천일의 노래"라는 책에서 칠레의 시인이자 가수, 문화운동가였던 빅토르 하라와 '누에바 칸시온(새 노래 운동)'을 소개하였다. 그 책의 5부에서 빅토르 하라를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 한국 시인 김남주 그리고 안치환 씨와 병렬시키고 있다.
안치환 : 나로서는 창피한 일이다. 빅토르 하라 같은 경우는 시대적인 분위기가 영웅을 만든 경우 같다. 물론 그는 뛰어난 뮤지션이고 사상가이고 시인이지만. 그는 적들에게 난자 당하여 죽었다. 압제의 정도와 긴장의 정도가 다른 시대 배경이라서 그와 비교하기가 힘들다. 현재 우리 시대는 긴장감을 갖고 사는 시대가 아니다. 자발적으로 갖기 전에는 누구도 긴장감을 요구하지 않는다. 80년대와는 다르다. 비교를 한다면 송구스러운 일이다. 파블로 네루다는 김남주 시인도 좋아하였다.
박준흠 : 밴드인 '안치환과 자유'를 소개하면?
안치환 : 콘서트를 자주 하다 보니까 밴드가 필요해서 4년 전에 오디션을 통해서 멤버를 뽑았다. 지금은 성향도 잘 맞고, 분위기도 좋다. 앞으로는 '안치환과 자유'라는 팀 이름으로 음반을 내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경제적인 부분을 해결해야 하는 부담이 있다. 나로서는 개인의 욕심을 버려야 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박준흠 : 7집 준비는? (2001년에 7집 [Good Luck!]이 발표되었다.)
안치환 : 노래는 많이 녹음했다. 앞으로는 집중적로 해야할 것 같다. 현재까지 컨셉 앨범까지 치면 거의 1년에 한 장씩 발표했는데, 너무 자주 낸 느낌도 있다.
박준흠 : 7집에서 다루는 얘기는?
안치환 : 다루게 될 얘기는 크게 다를 것 같지 않다. 확연히 드러날 노래는 통일에 대한 노래이다. 그리고 박종화 씨라는 광주에서 활동하는 시인이자 음악 하는 선배가 있는데, 그 형의 <우물안 개구리>라는 노래가 너무 좋다. 가치에 대한 불명확성 때문에 갖고 있는 슬럼프를 겪으면서 만들었던 <슬럼프>라는 노래도 있다.
박준흠 : 6집 앨범 속지에 "나는 왜 노래를 하는가? 식상하지 않은 물음표 다시 한번!"이라고 써 있어서 묻는데, 왜 노래를 하는가? 그리고 무엇을 얼마나 고민하는가?
안치환 : 속 편하게 우스개 소리로 얘기하면 나는 노래밖에 할 게 없는 사람이고, 노래는 가장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일이다. 지금까지 노래 때문에 힘들어한 경우는 있었지만 후회를 해 본적은 없다. 노래를 한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살아가는 의미이자 행복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멈출 수 없는 일이다. 나의 노래로 인해서 가장 먼저 위로 받는 사람은 나이지만, 나 이외에 나의 노래로 인해서 위로 받고 힘을 얻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자체도 큰 용기가 된다. 요즘에 고민하고 있는 것은 "정체되어 있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이는 나에게는 굉장히 치명적인 일이다. 정체되지 않는 뮤지션의 모습을 이루어 나가고, 발전해 나가는 모습을 갖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노래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그리고 그 고민들을 속 시원하게 해결하는 방법은 역시 좋은 노래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에 대한 긴장감을 갖는 것이 일상적인 고민이다.
※ 1973년 9월 13일, 칠레의 산티아고에서 한 시인이 파시스트 반란군에게 살해됐다. 시인이기에 앞서 가수였고 문화운동가이기도 했던 그의 이름은 빅토르 하라다. 하라는 자신이 지지하던 아옌데의 인민연합 정부가 미국 CIA의 사주를 받은 칠레 군부의 반란으로 무너지게 되자, 그에 항의하다가 체포돼 살해됐다. 하라의 노래들은 60, 70년대 라틴아메리카를 풍미하던 노래 운동의 한 정점에 있다. 그 노래 운동은 흔히 '누에바 칸시온(새로운 노래)' 운동이라고 불린다.
※ 배윤경 씨의 책 "노동하는 기타, 천일의 노래"에서 '천일'이란 1970년 9월부터 1973년 9월까지 아옌데의 인민연합 정부가 존속했던 3년간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