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心으로 혼연일체…꿈은 이루어졌다 |
청량사는 1992년 가장 감명 깊은 부처님오신날을 보냈다. 이날 부처님오신날 법회는 탑전에 앉힐 향로를 강에서 산 위로 끌어올리는 운력이었다. 스님들의 목탁과 독송 소리가 청량산을 울리는 가운데 신도 200여명은 무게 600kg에 이르는 향로를 끌어올렸다. 오전 법회를 마치고 부처님오신날 종일 열린 이날 운력을 통해 신도들의 신앙심과 청량사에 대한 애정은 더 커졌다. 지현스님은 “그 어느 부처님오신날 보다 더 큰 환희심이 청량산을 가득 메웠다”고 말했다. 이 일을 계기로 청량사를 찾는 신도가 크게 늘어났다.
<20여년에 걸친 오랜 불사를 마치고 청량사는 이제 전국적으로 유명한 사찰이 됐다. 가을이면 1만여 명이 청량사 산사음악회에 참석한다.>
불가능한 일이 현실 속에 펼쳐지자 청량사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봉화군 등 관(官) 에서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신도들은 더 열심히 사찰을 찾았고 불사 동참자도 늘어났다. 스님도 자신감이 생겼다. 드디어 그동안 미뤄왔던 또 다른 난간 하나를 깨트리는 일을 벌였다. 그 일은 강에서 청량사에 이르는 길을 놓고 축대를 쌓는, 그 이전 불사가 오히려 우습게 보일 정도로 험난한 공사였다. 법당 발아래가 직각에 가까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청량사는 공간이 협소하다. 더 이상 전각이 들어설 자리도 없다. 공간 문제와 불편한 접근성을 해결할 길은 축대를 쌓아 공터를 확보하고 계곡을 따라 길을 확장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청량사는 창건당시부터 축대가 있었다. 그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 유리보전 앞 석축과 범종루 뒷편 석축이 그것이다. 석축을 쌓는 일은 창건 당시의 불사를 계승하는 셈이다. 하지만 그 일은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이상이었다. 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은 먼데다 너무 가팔랐다. 무엇보다 산 주인이 따로 있었다. 청량산은 대부분 퇴계 이황을 배출한, 진성이씨 종중 소유였다. 퇴계는 어릴 적 청량산에서 공부했으며 ‘백운암 중수기도’남겼다. 그의 고향 청량산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다.
92년 축대쌓기 착수…난공사 끝에 공간 확장 지현스님 주지 부임 14년만에 현재 모습 갖춰 가을 산사음악회 1만명 발길…전국 사찰 명성
스님은 길을 내고 공간을 넓히기 위해 진성 이씨 가문을 수도 없이 찾아 설득한 끝에 겨우 승낙을 받을 수 있었다. 우선 축대를 쌓는 일이 시작됐다. 마침 1992년부터 봉화군에서 청량사 아래 강 위에 다리를 세우고 청량에서 남면으로 넘어가는 길을 닦는 공사가 진행됐다. 청량사 토목공사 여건이 마련된 셈이다. 스님은 길 닦을 때 나온 돌로 축대를 쌓기로 했다. 문제는 이번에도 산 위까지 운반 방법이었다. 운송 수단은 경운기 밖에 없었다. 하지만 경사가 워낙 급하다 보니 경운기가 전복하는 사고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멀리 영주까지 나가 어렵게 구한 인부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보고는 모두 혼비백산 도망을 갔다. 결국 청량산과 더불어 살아 이곳 지형에 익숙한 인근 남면 사람들이 팔을 걷고 나섰다. 스님도 침목을 지게로 날라 가파르고 미끄러운 자갈길을 대신해 나무계단 길을 놓으며 길을 닦기 위한 토대를 마련해갔다. 길을 낼 때는 많은 고초를 겪었다. 공원으로 지정돼 함부로 길을 낼 수 없어 밤에만 살짝 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마저 신고가 들어가 수차례 조사를 받기도 했으며 이를 묵인해준 공무원이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처럼 축대를 쌓고 사찰까지 길을 내는 과정은 스님 신도 마을 주민.관이 혼연일체가 된 대불사였다. 어려운 여건이었지만 스님은 대충하지 않았다. 전각 하나라도 산세와 맞추기 위해 청량산을 40~50회 오르내렸다. 산과 어울리도록 법당과 같은 방향으로 축대를 쌓았다. 집을 지을 때도 시선이 불편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관심을 기울였다. 문화재 보수비로 지은 심검당과 심우당을 지을 때는 법당과 나란히 세울 것을 주장한 문화재 전문가들과 달리 다른 방향을 고집했다. 수없이 산위에 올라 고민한, 현장 경험에서 나온 판단이었다. 심우당은 스님의 의지대로 ㄱ자 형으로 꺾었다. 짓고 나자 스님의 생각이 옳았음이 드러났다.
<범종루 모습. 1998년 축대를 쌓아 올린 자리에 신도들의 보시로 만들어졌다. 청량사는 범종루를 완공하며 1만등 연등법회를 개최, 새롭게 탈바꿈한 청량사를 대외에 알렸다.>
드디어 축대가 완성됐다. 허공이 한순간에 넓은 공간으로 변했다. 꿈이 현실이 된 것이다. 스님이 축대를 쌓자 신도들이 범종루를 지어 화답했다. 스님도 신도들에게 다시 답했다. 찻집을 겸비한 휴식처를 만든 것이다.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이라는 이름을 가진 안심당(安心堂)은 사찰에 와서 기도를 한 뒤 마땅히 쉴 곳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한 주지스님의 배려가 묻어있다. 그 해가 1998년. 스님이 부임한지 14년 만이었다. 청량사는 드디어 오늘날과 같은 면모를 갖추었다. 청량사는 범종루 낙성식을 하면서 1만 등 점등 법회를 개최, 불사의 노고를 서로 위로하고 세상에 청량사의 존재를 알렸다. 청량사의 명성은 이제 산을 떠나 전국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청량사를 찾아 전국의 불자 관광객들이 봉화로 밀려들었다. 산을 끼고 흐르는 맑은 계곡과 깊은 산 그리고 허공에 떠 있는 듯한 청량사는 비경을 연출했다. 청량사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경상북도까지 관심을 보였다. 경북도는 진입 도로를 포장하고 관광객들을 위한 편의시설을 설치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2001년부터 시작된 산사음악회는 청량사를 전국적 사찰로 만들었다. 매년 가을 개최하는 청량사 산사음악회를 보기 위해 찾아온 관광버스들로 봉화군 일대는 교통마비를 겪는다. 봉화군과 청량산의 명성이 올라가자 경북도와 봉화군은 청량산과 사찰 주변 정비에 더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게 됐다. 이들 지자체는 앞으로도 청량사 진입로에 일주문 건립, 문화 예술인촌 건립 등을 계획하고 있다. 중앙정부에서도 청량사와 청량산의 역사와 지역 내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반영, 문화재청은 지난 3월13일 청량산을 국가지정문화재인 명승으로 지정했다.
문수보살의 상주처로 알려진 청량산에서 유래한 청량산은 33 암자가 있을 정도로 부처님의 산이었다. 하지만 조선시대 유학이 득세하면서 이름도 유교식으로 강제 개명당하고 사찰은 청량사 한 곳을 빼고는 거의 사라졌다. 현재의 청량사는 청량산이 다시 부처님의 산으로 돌아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중심에는 주지 지현스님과 마을 주민들로 이뤄진 신도들이 있다.
지현스님은 “불사는 신도들과 함께 할 때 진정한 의미가 살아난다. 불사 과정 자체가 바로 신앙심을 키우는 법회의 연장”이라고 말했다. 청량사 신도들은 돈이 아니라 몸으로 불사를 도왔다. 불사가 마무리 된 지금 그들은 사찰을 일으키는데 일조했음을 자랑스러워하며 수행에 몰두한다. ‘함께’ 했던 청량사는 그래서 앞으로 ‘불사 교과서’로 사람들의 가슴에 남을 것이다.
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
# 청량사의 전각들 현재 청량사는 유리보전(법당)을 비롯해 응진전, 심검당, 심우실, 산신각, 선불장(요사채), 사무실, 종각, 5층 석탑, 3층 석탑, 수각, 유리정 등으로 이루어져있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5층 석탑.>
유리보전은 1705년(숙종31), 1974년 두차례 중수하고 1989년과 2000년에 보수했다. 창건연대가 오래되고 짜임새 있는 건축물로 평가받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7호로 지정됐다. ‘부처를 뽑는다’(選佛)는 뜻을 지닌 선불장은 스님들의 참선 수행처다. 종무소가 옆에 있다. 지난 1992년 지은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된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1998년 10월 준공한 범종루는 정면 3칸, 측면 1칸에 겹처마 맞배지붕의 2층 건물이다. 1998년 세운 안심당은 전통 다원(茶園)이다. 신도들의 휴식처이며 등산객들이 잠시 쉬어가는 곳이다. 선불장 옆 심검당은 2002년 개축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가운데 3칸은 강원(講院)이고 좌우 양 협실을 두었다. 템플스테이 등 수련회 공간으로도 이용된다. 심검당과 ㄱ 자 형태로 세운 심우실에 앉으면 청량산과 청량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심검당과 사이에 대청마루를 붙여 한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산신각은 가장 늦은 2003년 개축했다.
원효대사 수도위해 머문 응진전 5층 석탑엔 진신사리 5과 모셔 응진전은 청량사 부속건물로 청량사와 같은 해 생겼다. 원효대사가 수도를 위해 머물렀던 곳이다. 고려말 노국공주가 16나한상을 모시고 기도 정진한 소문난 나한기도도량이다.
탑은 2기가 있다. 지현 스님이 처음 부임했을 때 부처님이 비를 맞고 있었는데 이 비 맞던 불상 안에서 ‘훗날 인연 있는 승려가 제자리에 모시라’는 글귀와 함께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 사리 5과가 나왔다. 그 인연을 따라 유리보전 앞 사자목에 3층 석탑을 세우고 진신사리를 모셨다. 하지만 사람들의 손에 의해 석탑이 조금씩 허물어지자 이 탑은 몇 번 옮겨 다니다 산신각 옆에 최종 안착했다. 대신 1990년 5층 석탑을 현재 자리에 세우고 진신사리를 모셨다. |
첫댓글 '부처님의 산'.... 아~~`~~~ 가고 싶어라.
저두요.....부처님 산~!!!
아........저기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