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과형인 내 친구의 말,
"내 인생은 모든 것이 철저하게 내가 계획한 대로 되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인생은 거의 대부분 계획적으로 흘러가지 않더라."라며 한탄을 한다. 아파트 아래층으로 물이 새는데 어디서 새는지 세 번이나 수리를 해줬는데도 여전히 물이 새서 아예 집안의 수도관을 다 파헤쳐야 되는 상황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결국 집을 한 달가량 비워야 하니 넋두리를 해대는 것이다.
문과형인 나는,
분석하는 일에서는 맥을 추지 못한다. 친구들이든 직장에서든 눈치든 코치든 대체적으로 잘 알아차릴 수가 없다. 매사 즉흥적이고 일처리도 그때그때마다 다르다. 그래서 이과형들에게 늘 성토의 대상이 된다. 내가 생각해도 눈썰미가 없기도 하다. 변화를 몰라서 분위기 파악도 잘 못한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족집게 같이 알아차릴 때가 있다. 정답을 찾아내고 알맞은 처방을 곧잘 한다. 내보기에 그건 육감이다. 다행히도 육감이 유달리 발달되어 있는 모양이다.
죽으라는 법은 없다. 모자라면 상대적으로 뛰어난 부분도 분명히 있다고 본다. 그런 빈구석을 인간은 대체적으로 상대에게서 찾게 된다. 그리고 합을 이룬다. 그렇다고 톱니바퀴처럼 아귀가 딱딱 맞아 들게 맞는 것은 아니다. 서로 어설프고 부족하지만 양보하고 격려하며 맞춤을 만들어간다. 그래서 이과형과 문과형이 함께 살 수도 있는 것이다. 꼭 부부가 아니라도 사업 파트너이든 연구자이든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진 사람과 합을 이루기가 더 쉬울지도 모른다. 실제로 세상은 그렇게 맞춰지고 있지 않은가.
우리 회사만 하더라도 그렇다. 나는 즉흥적인 문과형인데 회사를 책임지고 있는 파트너는 지독한 이과형이다. 그러니 의견이나 방향이 맞을 리가 있겠는가. 모든 것이 맞지 않는다. 그런들 어쩌겠나. 이 조합은 절대적으로 맞춰가야 되는 조합이니 어거지라도 서로 맞춰야 한다. 처음엔 골치가 많이 아팠다. 시간이 지날수록 누군가가 양보를 해야 하고 이해를 더 많이 해야 한다. 결국 문과형이 이해와 양보의 책임을 맡는다. 기준을 세우고 회사를 운영하는 일은 이과가 맡고 직원을 도닥이고 힘을 주는 일은 문과가 맡는다. 나름 꽤 괜찮은 조직이 만들어진다.
세상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말이 안 통해서라니 그 말에 동감이다. 정형화된 그 말 말고 그 이면을 헤아리는 말이 중요한 것 같다. 이과형이 하는 말의 뜻을 알아차리고 문과형이 하는 말의 의미를 서로가 헤아리며 살아야 한다. 자기의 주장만 내 세우다 보면 결국은 터지게 된다.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상대가 원하는 방향으로 다 들어주기도, 그렇다고 안 들어주기도 애매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문과형인 나는 가만히 지켜보는 쪽을 선택한다. 내가 이과형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과, 문과 구분이 뭐가 필요할까. 그 상태에서 알맞게 자기의 위치에 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전쟁은 중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