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박정희(朴正熙)대통령 시절, 장배미(긴뱀)의 신화를 아시나요? 자료제공...거제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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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일 거제시 연초면 대금산로
339-7 거제민속박물관에서 만난 옥미조 전 연초초등학교 교장선생님. | 70년대 계몽실화 '낙도의
메아리' 주무대 통영 한산면 '장사도(長蛇島)분교' "새마을운동 진짜 발상지는 장사도가 틀림 없는데...?" 그때 그 주인공인
"영원한 섬마을 선생님" 옥미조 전(前)거제 연초초등 교장선생님 "장배미의 신화를
아시나요...?" '장배미'란 긴 뱀을 뜻하는 거제 사투리다. 거제시 남부면 대포(大浦港)항에서 남쪽으로 바라다 보면 눈앞에 뱀이
누워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는 길다란 섬 하나가 쪽빛 바다위에 아름다운 수반처럼 떠 있다.
대포항에서 유람선을 타고 푸른 물결을
가누며 10여분만 달려가면 도착할 수 있는 동백숲과 후박나무,모밀잣밤나무 등 원시림이 아직도 천연의 세월을 버텨오며 고스란히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섬이 바로 장사도다.
지금은 관광지로 개발돼 전국 유명세를 타고 있으나 70년대 말 까지만 해도 이곳은 그야말로
우리나라에서 최고 낙후된 낙도(落島)중의 낙도였다. 그러나, 정작 이 섬에 묻혀있는 전설같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70년대 까지만 해도 헐벗고 굶주려 그야말로 ‘보릿고개’가 가시지 않았던 어려운 시절 장사도 주민들은 섬 주변에 있는
미역을 따다 파는 것이 유일한 소득원 이어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다.
당시 장사도 주민들은 "자신들이 처해 있는 현실이 주변
환경으로 인해 가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어쩔수 없는 상황"이라며 스스로를 격려하며 '빈곤의 악순환' 속에서 어려운 삶을 영위해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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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새마을운동 당시 국민 계몽영화로 제작돼 전국으로 상영된 '낙도의 메아리'의 주무대인 통영시
한산면 매죽리 장사도 분교 전경 | 13가구에 주민수를 모두 합쳐도 83명에 불과 했으며 초등학교
학생수는 고작 23명이 전부였다.
이런 작은 섬에서 대통령을 놀라게 하고 전 국민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일대 사건 아닌 사건이
벌어진다. 장사도가 전국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박정희대통령 시절인 70년대 새마을운동 당시 국민계도 영화로 제작된 '낙도의 메아리'가
전국에서 상영되면서 부터다.
이 영화가 제작된 배경에는 지난 98년 연초초등학교 교장직을 수행하다 후배들을 위해 정년 9년을
남겨두고 명예퇴직을 한 옥미조(玉米造)(73) 선생님이 있다.
옥(玉) 전 교장은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72년 3월, 31세의 젊은
나이로 통영에서 뱃길로 1시간 30여분이 걸리는 한산면 매죽리 장사도내 죽도초등학교 장사도분교에 부임하면서 '인간승리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다.
"그곳에 가서보니 주민들은 미역을 캐서 팔아다 겨우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고 나머지 소득원은 아예 없었습니다" "더더욱 안타까웠던 것은 미역 중간 거래상들에게 고리채 까지 빌려쓰는 사례가 많아 힘든
생활이 반복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었습니다" 여기에다 뱀(巳)섬을 뜻하는 장사도란 이름이 '기(氣)가 센
섬'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어 가축을 키울 수 없다는 토테이즘을 바탕으로 한 미신이 널이 유포돼 있었다. 이같은 미신으로 인해 당시 장사도에는
아예 가축사육을 할 생각 조차 하지않고 있었다.
이 내용을 알게된 옥선생은 주민들의 정신부터 개조하기로 마음먹고 설득에
들어갔다.
그는 손수 육지에서 들여온 흑돼지를 건강하게 잘 키워 주민들에게 보여줘 가며 자신감을 심어준데 이어 덴마크의 새마을
운동가가 펼쳤던 ‘달가스 운동’을 본따 황무지였던 섬 주변의 야산 4h를 개간해 옥토로 만들자고 호소했다.
주민들은 모든일에 손수
앞장서는 30대 초반의 젊은 선생님 얘기에 감동받아 밤낮으로 땅을 파고 일구어 밭으로 만들어 나갔다.
부임 1년이 되던해 황무지는
어느새 감자와 고구마 등 갖가지 곡물이 심어진 기름진 농장으로 탈바꿈 했다.
주민소득 증대를 위해 병행한 사업은 또 있었다.
육지에서 돼지를 들여와 집집마다 사육토록 한것은 물론, 당시에만 해도 고소득이 보장됐던 양파 식재면적을 늘려 나갔다. 아울러 바다를 이용한
개조개 양식장을 만들어 고소득을 올리게 된다.
이같이 주민소득이 눈에띄게 늘어나자 덩달아 학생들의 저축실적도 놀랄만큼
올라갔다.
당시에는 교육부가 학생들에게 근검절약 정신을 심어주기 위해 전국의 각 학교에 저축 목표액을 내려 보내고 있던 시절
이었다.
그런데, 정말 기적과도 같은 놀랄 일이 일어났다. 낙도중의 낙도로만 알려져 있어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장사도분교가 무려
저축 목표액의 6,000%를 넘기자 교육당국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초.중.고를 합쳐 전국 그 어느 학교도 감히 흉내 조차 내지못할
실적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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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일 거제시 연초면 대금산로 339-7 거제민속박물관에서 만난 옥미조 전 연초초등학교
교장선생님. | 옥선생의 공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부임 2년째인 73년 2월 초순에는 마침내 마을에
배를 접안 할수 있는 선착장이 옥선생과 주민들의 손에 의해 준공됐다. 이날 섬마을 온 주민들은 옥선생을 부여잡고 어린아이 처럼 엉엉
울었다.
이같은 소식은 결국 박정희대통령 에게 까지 전해지게 된다. 박대통령은 직접 그의 계몽정신을 '국민계몽운동'으로 승화시키기로
결정하고 당시 유명 감독이었던 유(劉)현목 감독에게 의뢰해 장사도와 관련된 얘기를 영화로 제작토록 지시한다.
사실상 주인공인 선생을
대신해 이미지가 맞는 당시 유명 배우였던 한인수씨가 주연을 맡았고 23명의 학생들과 마을 주민 모두가 주인공이자 조연 이었다. 52분 동안
방영됐던 영화 ‘낙도의 메아리’는 정부의 방침에 따라 전국에서 상영토록 했다.
이 영화는 새마을운동의 기본 이념인 '개척정신'과
'계몽정신'을 앞세운 '근면,자조,협동'의 실천이 이뤄진 표본으로 전국을 달궜다.
당시 박전대통령은 유현목 감독외에 김연파, 조긍하
감독 등 당대 최고의 영화감독들을 함께 장사도로 내려보내 현지에 머물면서 영화를 제작토록 했다는 후문 또한 감동적이다.
일제
강점기와 6.25사변을 겪은 민족으로 피해의식에 젖어있던 우리 국민들에게 가장 필요한것 중의 하나가 국민계몽 이라고 생각한 대통령의 깊은 뜻이
이 영화를 제작한 배경에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전국에 방영되자 국토 최남단의 외롭고 쓸쓸하기만 했던 작은 섬
장사도는 일약 유명세를 날리게 된다. 이 모든 얘기 뒤에는 옥미조라는 훌륭한 계몽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당시
박정희대통령은 30대 초반이었던 옥선생을 청와대로 초청, 그의 정신을 높이사 "교육부 장관직을 맡아달라"고 했다는 뒷얘기는 그냥 듣고 넘기기에
아까울 정도다.
그러나, 선생은 "영원한 섬마을 선생님으로 남겠다"며 누구나 탐낼수 있었던 대통령이 내려준 일생일대의 기회를 스스로
내려놓고 만다.
출장차 올라갔던 서울에서 내려와 통영항에서 장사도를 향하는 도선을 타고 코흘리게 들이 뛰노는 장사도분교 교정으로
묵묵히 되돌아 온 것이다. 그의 가슴 한켠에는 높은 벼슬과 출세 보다는 훗날 이 나라의 주인이 될 천진난만 하고 깨끗한 아이들의 눈동자가
떠올랐을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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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일 거제시 연초면 대금산로 339-7 거제민속박물관에서 만난 옥미조 전 연초초등학교
교장선생님. | '광제산의 꿈일기' 등 유명한 동화와 동시 28편을 남긴 선생은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고
싶은 마음에 "높은 자리가 부담 스럽다"며 정년 9년을 남겨둔 지난 98년 37년 동안 아이들과 함께했던 정든 교단을 떠나 지금은 고향인 연초면
대금산로 339-7에서 초야에 묻혀 난초같은 아름다운 여생을 보내고 있다.
순리치료의 창시자로 전국에 3,000여명의 제자가 있으며
최근 전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날리고 있는 선생이지만 지금도 지난날 정부로부터 제안 받았던 3차례의 고위직를 거절한 이유에 대해서는 그 답변이
소박하기 그지 없었다.
"박정희 전대통령과 청와대에서 만나 많은 얘기를 나눴는데 그때 그 분은 '가난극복'이 나라의 최고
걱정거리라며 지금까지 보여준 계몽정신을 교육정책에 꼭 반영 시킬수 있도록 도와달라 부탁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러나, 선생은
"30대의 너무 젊은 나이와 고졸출신의 교사라는 직책과 유명 대학과 박사출신들이 즐비한 중앙정부 부서에 최고 책임자가 되는 것은 적절치 않는 것
같아 고위직 권유를 고사한 것이다"라고 솔직한 심정을 털어놨다.
이후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도 그의 정신을 높이사 새마을운동중앙회
본부장직을 권유했으나 이 역시 거절한다.
그렇지만 정부는 "그가 쏟아온 정신이 학교 교육에 크게 기여함은 물론, 국민들에게 많은
감동을 줬다"며 그 공로를 인정해 철탑산업훈장(1973년)과 국민훈장 석류장(1983),교직을 떠나던 해인 98년에는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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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일 거제시 연초면 대금산로 339-7 거제민속박물관에서 만난 옥미조 전 연초초등학교
교장선생님. | 지금까지 10만여 권의 책을 읽었다는 옥 선생은 "우리나라 새마을운동의 진짜 발상지는
바로 장사도가 맞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아동문학 관련 자료와 기독교 관련 자료서적 10만여권을 소장하고 있는 거제시 연초면의 한
폐교를 활용해 만든 거제민속박물관에 순리원연구소와 순리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는 옥 선생은 어느덧 73세의 나이로 접어 들었으나 지금도
'순리치유'에 관한 책을 펴내기 위해 여념이 없다.
"다음달 10일에 방글라데시 빌리지닥터대학에서 순리치유에 대한 강의를
하게된다"는 순리치유법 창안자이자 노학자는 그래도 천진난만한 아이들과 함께 동요를 부르며 바닷가를 달여가는 '영원한 섬마을 선생님'으로
보였다.
교직생활의 절반을 장사도와 수도(水道), 저도(猪島) 등 남해안 낙도에서 생활하며 어린이들의 교육과 주민계도에 헌신 봉사한
그는 우리곁에 '영원한 섬마을 선생님'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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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일 거제시 연초면 대금산로 339-7에 위치한 거제민속박물관 전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