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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의 역사
*B.C(서기전)1900년경에 헤브라이(Hebrai)족의 추장이 죄인을 처벌할 때 두발을 삭발했고 그 두발이 자랄 때까지 범인 자신이 죄를 뉘우치며 속죄하던 유래로부터 이용에 관한 역사는 시작되었다.그 후 여러 세기 동안에 인류문화가 발달되고 이에 따라 부족간의 상호 협조로 생활의 향상도 있었지만,투쟁도 많아 그 당시 머리에 부상을 입은 사람들의 두발을 삭발하고 치료를 해주어 그때는 이용사와 의사의 직분을 겸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서기 1804년에 프랑스의 나폴레옹의 제1제정 당시에 수많은 인구의 증가와 사회 구조가 점차 복잡해 지자 이용원과 병원을 겸할 수 없다고 인식한 나폴레옹 정부의 위정자들은 프랑스 최초의 이용사 쟝바버(Jean Barber)를 통하여 병원과 이용원이 분리되어 비로소 이용이 역사상으로 독립하게 되었다.따라서 프랑스의 유명 기계제작회사 바리캉.미르(Barigancl.mer)에서도 이용기구를 바리캉이란 명칭으로 세계적으로 통용하게 되었다.그리고 지금까지 이용원 입구마다 설치되어 있는 청,홍,백색의 싸인 보드(Sign board)는 그 당시의 병원 표시였던 것으로 정맥,동맥,붕대를 의미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용 문화의 급진적인 발달과 더불어 싸인보드는 이용원이 차지하게 되었고 이것 역시 전세계에 보급되어 공통 사용하고 있고 병원은 적십자 표시를 공통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세계 최초의 이용사는 역시 프랑스의 쟌-바버를 꼽을 수 있으며 그는 30년간에 전쟁 당시도 조국을 위한 공훈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한국 이용의 발달
*옛날 우리나라 남자들은 총각 시절에는 머리를 땋아 내렸고 결혼한 사람은 상투를 틀어 올렸다.그러나 일본과 서양문물이 밀어 들어와서 개화의 물결이 거세지자 드디어 서기1895년 11월 17일 전 국민에게 삭발하라는 준엄한 단발령이 공포됐다.
*김홍집 내각은 을미사변 이후 내정개혁에 주력하였는데 조선개국 504년11월17일을 건양원년 1월1일자로 음력을 약력으로 개정하는 동시에 전국에 단발령을 내렸다.
*고종은 단발령에 솔선수범하여 가위를 든 안종호에게 세자와 함께 머리를 깎았으며 내부대신 유길준은 고시를 내려 관리들이 우선적으로 머리를 깎게 했다.우리나라에는 옛적부터 머리를 소중히 여기는 전통이 있었는데 이것은 신체발부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는 유교의 가르침에서 유래된 것으로,많은 선비들은 <손발을 자를지언정 두발을 자를 수는 없다>고 분개하여 정부가 강행하려는 단발령에 완강하게 반대했다.그러나 오랜진통 끝에 구미문명을 흡수하려는 개화사상을 받아 들여 한국 이용의 역사를 창조하게 되었다.당시 고종과 세자의 머리를 깎았던 안종호는 일찍 등과하여 18세에 전라도 완주 군수를 역임했고 왕족 자제들만을 가르치는 대강원에서 정삼품독의 강사로 국정을 보필했다.안종호는 봉건정책을 타파하는 순회공연도 했고 방역회를 조직했고,그 첫사업으로 서울 종로에서 이용원을 개설했다고 한다.
근래의 이용
1)시험제도
*우리나라의 이용사 시험제도는 1923년 당시 일제시대이니 만치 야마모도라는 일본인이,주동이 되어 최초의 강습회를 시작하여 그해 가을에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국가가 시행하는 이용사 자격 시험을 실시하게 되었다.그 당시의 시험출제는 주로 당시 의학 박사인 주방주씨의 저서인 "위생독본"이란 책에서 출제되었으며 생리해부학, 소독법,전염병학 면접시험,실기시험 등을 실시했다고 한다.해방 이후 서울특별시의 이용사 시험 실시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부터였고 부산직할시의 시험은 1954연도 부터 실시되었으며 그후 내무부산하 각시 도에서 이.미용사법에 따라서 한국직업 인력관이공단이 보사부에서 제정한 공궁위생법에 의거하여 실시하고 있다.
2)교육제도
*해방전인 일제시대에는 전혀 뚜렷한 교육기관이 없었고, 이용사들에게 사사해서 기술을 익히고 "위생독본"으로 독학을 해서 자격을 취득하거나 보조원 생활을 했다고 볼 수 있다.해방후도 혼란기라 역시 교육기관이 없었으나 6.25사변후 사회가 급전함에 따라 몇군데의 학원이 생겨났지만 체계적인 교육기관이 전혀 없었다.1년제 고등기술 학교에 이용과를 신설 상당수의 이용사를 배출했다.그후 한때 장발이 유행해서 학생수가 감소되었으나 1990연대에 들어와서 두발형이 변모되어 가면서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3)최근의 이용
*일제식민지 시대의 두발은 대개의 사람들이 양옆과 뒤를 치켜 깎고 윗머리가 10~15cm 정도의 길이인 하이 칼라 스타일이 보편적으로 계속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는 일본군국 당국에 의해서 또한 삭발령이 공포되어 모두 박박머리를 하고 있었다.1970년 당시에는 대부분의 어린남자들은 박박머리를 하고 다녔으며 소녀들은 단발컷트가 주류를 이루었다.
理容(이용)
머리카락이나 수염을 정돈하는 일. 1986년 제정된 공중위생법(2 ① Ⅰ)에서는 이용업을 <손님의 머리카락 및 수염을 깎거나 다듬는 등의 방법으로 손님의 용모를 단정하게 하는 영업>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서양에서의 이용(이발)의 역사는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왕(재위 BC 1728∼BC 1686)이 제정했던 함무라비법전에 <이용을 업으로 하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이보다 좀더 오래 되었으리라 추측되고 있다.
이 법전에는 의사의 보조자로서 외과수술이나 이〔齒〕의 치료 따위도 직접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으며, 중세에는 상처의 치료나 피를 뽑는 일 등의 일반적인 외과 업무도 겸하였다. 이를 이발의사(理髮醫師)라고 하였다.
그 후 르네상스 때에는 의학 분야에서도 라틴어 독해력이 중시되고 라틴어 어학실력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구별이 생겼다. 고대 문헌을 이해하는 능력의 중요성이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라틴어 실력을 갖춘 사람은 의학을 중심으로 의사이발,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이발을 중심으로 이발의사라고 부르는 등, 사회적 지위에 차별을 두는 관습이 생겼다.
이용업무와 의사업무가 별도의 전문직으로 확실히 구분되기 시작한 것은 루이 14세(재위 1643∼1715) 시대부터이다. 현재 이발소에서 볼 수 있는 빨강·파랑·하양의 줄무늬가 들어있는 표지(사인폴)는 동맥·정맥·붕대를 상징하던 당시 관습의 흔적이다.
그리고 이발사란 뜻의 바버(barber)는 라틴어의 턱수염(barba)에서 유래된 말이다. 한편 한국에서는 1895년(고종 32년) 11월 단발령이 내려지면서부터 이발이 시작되었으며, 최초의 이발사는 왕실이발사 안종호라고 전해진다.
이발 기능을 습득하려면 고등기술학교나 사설학원에서 6개월에서 1년 정도의 훈련을 거쳐 자격면허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시험은 필기·실기가 있으며 1년에 2회 실시한다. 이발사는 노동 수요와 공급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는 편이므로 비교적 안정된 직종이라 할 수 있다. 이용업은 단순히 머리카락을 자르고, 감기고, 수염을 면도하는 실용적 측면의 이용에서, 점차로 헤어패션을 중시하는 헤어스타일리스트 살롱이나, 머리카락의 건강을 관리하는 헤어클리닉 살롱으로 발전해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현재의 이용방법을 크게 나누면, 정발기술(整髮技術)로는 커팅(자르기)·세팅(가다듬기)·샴푸·트리트먼트·염색·가발·드라이·퍼머넌트 등이 있고, 안면기술(顔面技術)로는 면도·페이셜마사지(美顔術)·콧수염정리 등이 있다.
이들 기술은 패션적·정서적·의료적 요소 이외에 약품·화장품이나 면도칼·전기기구 등을 사용하므로 과학적 지식과 위생적 배려도 요구된다.
현재 이용과 미용이 법률상 하나인 나라와 한국의 경우처럼 따로 구별된 나라가 있는데, 세계적으로는 이 두 분야가 하나로 통일되어가는 추세이다.
理髮師(이발소)
모발(毛髮)을 자르고 다듬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사람. 중세 서양의 이발사는 대개 외과의사나 욕탕업을 부업으로 하였다. 한국에서는1895년(고종 32) 김홍집내각(金弘集內閣)에 의하여 단발령이 시행된 뒤, 안종호라는 사람이 왕실 최초의 이발사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발사는 소정의 자격면허를 취득하여야 하는데, 고객의 머리형태를 고객의 요청과 얼굴형에 맞게 선택하여 자르거나 다듬고 염색·세발·머리손질 등을 한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만큼 고객의 위생관리에 힘써야 하며 고객을 상대하는 사교술 및 머리형을 창조하는 기술과 감각이 중요하다.
鬚髥(수염)
남성의 입가·뺨·턱 등에 나는 억센 털. 성긴 코밑수염은 미꾸라지수염, 뺨에서 턱에 걸쳐 생기는 딱딱하고 위엄있게 보이는 수염은 호쾌한 모습이 마치 중국에서 악귀를 쫓아버린다는 신인 종규같다 하여 종규수염이라고 일컫는 등 수염의 명칭은 많다.
수염은 불교가 들어온 이후로는 깎는 것이 관행으로 되어 왔지만, 옛날 전란이 끊일 사이 없던 시대에 무인·귀족 및 고관 대작들은 자신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하여 수염을 길렀다.
특히 한일자형(一字形) 수염은 천신(天神)수염이라고도 일컬었으며, 귀 밑에서 턱까지 난 구레나룻은 중국 삼국시대의 무장 관우(關羽)와도 같은 날래고 씩씩한 모습을 느끼게 하기 때문에 무사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다.
한국 사람들은 옛날에는 수염이 자라는 대로 두었으나, 근대 이후에는 수염을 기르는 사람이 거의 없게 되었다. 독일황제 빌헬름 2세의 수염은 코밑수염 끝을 위로 휘어올린 것으로 카이저수염이라고 한다.
어떤 수염은 비행기의 프로펠러형태를 닮았다 하여 프로펠러 수염이라 하기도 한다. 또 영화배우 R.콜먼에게서 시작된 콜먼수염, C.S.채플린과 같이 코 밑에만 조금 기른 수염도 있다.
메소포타미아 중세 유럽 고대 이집트
〔서양〕
영어에서는 원래 수염을 포괄하여 한마디로 표현하는 <수염>이라는 낱말은 없고, <코밑수염(moustache)> <턱수염(beard)> <구레나룻(whiskers)>의 3종류로 구분되어 있다.
수염이라고 하면 턱수염을 가리키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수염은 예로부터 권위의 상징, 또는 남자다움의 표지로 생각해 왔다. 고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원래 턱수염을 길렀으나 뒤에는 가수염(假鬚髥)을 붙이게 되었는데 심지어는 지위의 높고 낮음을 수염의 길이로 나타내었다
. 특히 메소포타미아에서는 턱수염이 없는 남성은 조소를 받았다. 고대 그리스·로마에서는 철학자나 일반 학자는 수염을 길렀으나, 그 밖의 남성들은 수염을 깎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고, 그런 습관은 근대 이후로도 게속되고 있다.
중세시대에는 대개 교회의 안팎에서 수염을 규제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초기에는 지배계급은 턱수염을 기르는 습관이 있었으며, 남의 수염을 건드리거나 자르는 일은 모욕적인 일로 여겼다.
또 로마교회의 성직자들은 수염을 기르지 않았고, 그리스교회의 성직자들은 수염을 길렀다. 중세 중기에는 수염기르는 풍습은 사라지고 있었으나, 십자군원정 이후 한동안은 턱수염을 기르기도 했다.
12∼13세기의 프랑스에서는 수염이 유행하지는 않았으나, 중세 말기에 이르러서는 수염이 부활하게 되었다. 이런 경향은 16세기에도 계속되어 수염의 여러 형태와 명칭이 생겼다. 포크(fork)수염·각형(角形)수염 등은 그 일례이다.
17세기에는 대체로 자유롭게 수염을 길렀으며, 헨리 8세도 그것을 허가하고 있었으나, 이 시기에는 가발이 유행함에 따라 수염은 차츰 사라지는 경향을 보여 18세기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자 다시 수염을 선호하는 경향이 나타나, 초기에는 구레나룻이 유행했고 중기에는 수염에 관한 논쟁이 있었으며, 말기에는 코밑수염만 남았다. 20세기에는 거의 수염을 기르지 않았으나 70년대 젊은층 사이에 부활되었다.
카이저수염 채플린수염 16세기 에스파냐
콜먼수염
〔생물의 수염〕
동물의 머릿부분, 특히 대부분 입 주위에 나는 털, 또는 털모양 돌기를 말한다. 포유류의 수염은 입 주위에 나며 몸털보다 길고 드문드문 난 털로, 고양이나 개 등의 식육류와 쥐 등의 설치류의 거의 대부분에서 볼 수 있으며 촉각(觸覺)에 관계한다.
어류에서는 메기 또는 미꾸라지와 같이 흙탕물 속에 사는 것은 입 주위에 털 모양의 돌기가 있어 더듬이나 화학감각의 기능을 한다.
그 밖의 동물에서도 기원이 서로 다른 잡다한 것이 그 형태나 기능의 유사성 때문에 <수염>이라고 불린다. 곤충과 환형동물의 구기(口器) 주위의 털 모양 돌기가 수염에 해당된다. 수염고래·수염박새 등 감각기와는 관계가 없으나 형태와 모양이 수염과 비슷한 것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수염이라는 말을 이름 앞에 붙인 동물도 있다.
식물에서도 덩굴의 앞끝 등을 덩굴수염이라 하고, 외떡잎류의 뿌리를 수염뿌리라 한다.
面刀(면도)
얼굴에 난 잔털이나 수염을 깎는 칼, 또는 면도질하는 일. 면도칼은 석기시대부터 사용되었으며 돌·뼈·뿔 등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고대 이집트시대에 들어와서는 청동면도칼이 사용되었다.
현재에는 머리털을 자르는 데에도 사용되며 독일의 졸링겐에서 만들어지는 면도칼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날을 갈아 끼우는 안전면도기는, 1903년 미국의 K.질레트에 의하여 발명된 이후 개량이 계속되어 스테인리스강 날도 출현하였다.
〔면도칼로 인한 모창(毛瘡)〕
모창은 남성의 수염, 드물게는 눈썹이나 겨드랑이털 등의 경모(硬毛)에 화농균이나 진균(곰팡이) 등이 감염되어 모낭염을 일으킨 것을 말한다. 심상성 모창은 주로 표피포도상구균, 때로는 황색포도상구균에 의해 일어난다.
남성의 콧수염·턱수염 부분에 먼저 홍색 구진(丘疹)이 발생하고, 이것이 농포(膿疱)로 된 뒤 결국 터져서 부스럼딱지가 형성되는데, 치료에는 항생물질을 사용한다.
scissors(가위)
2개의 날〔刃〕을 엇걸어서 옷감·종이·머리털 등을 자르는 기구. 교도(交刀)·전도(剪刀)·협도(鋏刀)라고도 한다.
지레의 원리를 응용한 것으로 지점(支點)의 위치에 따라 원지점형(元支點型)·중간지점형(中間支點型)·선지점형(先支點型)으로 나눌 수 있다. 원지점형은 U자형으로 구부러진 용수철이 있는 곳이 지점이며 쥐는 가위와 자수용 가위 등이 있다.
일반적으로 재단가위라든가 의료가위 등은 중간지점형에 속하며, 지점의 위치를 용도에 따라 바꿀 수 있어 날을 길게 하면 한번에 길게 자를 수 있고 짧게 하면 한번에 자를 수 있는 힘이 커진다.
선지점형에는 시거절단용 가위, 채과(採果)용 가위, 작두 등 특수한 것이 있다.
당나라 때의 청동가위
〔가위역사〕
가장 오래된 유물은 BC1000년경 그리스에서 만들어진 철제 가위이다. 원지점형의 쥐는 가위와 같은 모양의 것으로 양털을 깎는데 주로 사용되었다.
로마시대 BC27년경의 철제 가위는 중간지점형으로, 서양 가위의 전형적인 모양이다. 중국의 가위는 뤄양〔洛陽〕 부근의 전한시대(前漢時代)의 무덤에서 출토된 것이 최초의 것이다.
그리스 가위와 모양이 같은 것은 쓰촨성〔四川省〕의 6조시대(3세기초∼6세기말) 전반의 무덤에서 출토된 예가 하나 알려져 있을 뿐이다.
당대(唐代;618∼707)에 들어서면서 중간지점형의 가위가 등장하였다.
한국의 가위는 분황사(芬皇寺) 석탑에서 나온 신라시대의 원시형 가위가 최초의 것이다. 형태는 ∝형으로 손잡이는 없고 날을 엇갈리게 하기 위해 밑부분을 가늘게 둥글렸다. 이것은 양날 부분에 옷감을 넣고 가위의 등을 누르는 방법을 사용하였다고 짐작된다.
고려시대의 유물은 철제와 동제(銅製) 등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신라의 것과 같은 ∝형과 현재의 X형과 같은 가위로 손잡이가 매우 다양하다. ∝형의 하나인 동제 가위는 길이 12.7㎝의 작은 것인데 날 부분이 약간 긴 세모꼴이고 그 위에 누금세공(鏤金細工)과 같은 기법으로 당초문이 새겨져 있으며 손잡이는 없다.
다른 하나는 길이 29㎝의 철제 가위로 날부분이 긴 네모꼴이다. X형은 같은 모양의 고리형 손잡이가 달린 2개의 날을 서로 마주보게 엇갈려 놓고 교차점에 나사를 끼워 만들었다. 날은 끝이 뾰족하고 긴 세모꼴, 또는 끝이 둥근 모양이고 날과 등의 중앙에 능선이 있는 것도 있다.
손잡이는 고리형으로 그 크기는 다양하여 길이는 대개 19∼24㎝이다. 조선시대의 가위는 고려의 것과 비슷한 X형이 대부분인데 | | |
첫댓글 가위도 나와있구나... ^^
^^ 수고 하셨어요 .자료 감사~~~~
좋은 내용 좋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