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義兵抗戰
상소를 통한 조약폐기운동과 자결로써 주권 수호를 기도한 殉國抗爭이 소극적이었던 데 반하여 직접 日帝와 싸워 주권을 되찾으려는 적극적인 항쟁이 광범위하게 대두되었다. 즉 지방 도처에서 儒生과 農民으로 구성된 義兵이 일어나 日本軍과 직접적인 항전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義兵 활동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閔宗植·崔益鉉·鄭焕直·林炳瓚 등이 인솔한 義兵으로서 이 시기 義兵運動을 지도한 대표적 인물이었다.
전에 吏曹參判을 지냈던 閔宗植은 乙巳條約이 체결됨을 알고 三南 각지로 돌아 다니며, 의병을 일으킬 준비를 서둘렀다. 1906년 李世永·蔡光默·安炳瓚 등과 같이 定山의 天庄里를 근거로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3월 17일 合川에서 日本 헌병대의 습격을 받아 패전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閔宗植은 남은 의병을 이끌고 保寧郡 靑羅로 이동하여 군세를 재정비하고 각 지방의 의병을 규합하여 洪州城(지금의 洪城) 공격을 기도하였다. 이 때의 의병의 총병력은 1,100여명에 달하였다.
5월 19일 의병은 대포 6문을 앞세우고 供州城공격을 감행하여 치열한 사격전 끝에 城을 점령하고는 성내의 무기와 탄약을 수습하여 日軍의 재공격에 대비하였다.
5월 20일부터 수차례에 걸친 日本軍의 공격을 잘 막아 내었다. 日本軍司令部는 大韓帝國政府에 대하여 日本軍 대부대의 출병을 신청하였으나, 정부에서는 日本軍 대부대의 출병을 원치 않아 이를 거절하고 公州鎭衛隊의 병력을 洪州城으로 급파하였다.
이 鎭衛隊 병사들도 의병의 기세를 꺾지 못하자 統監 伊藤은 곧 日本軍司令官에게 출병을 명령하였다.
거의 韓國 내에 주둔하고 있는 日本軍 전부가 洪州城으로 출병하였다. 5월 30일 마침내 日本軍과의 대격전이 벌어졌다. 의병들은 사면을 포위공격하여 오는 日本軍을 맞아 용전 분투하였다. 日本의 주력부대가 東門과 北門을 파괴하여 성이 위태로워졌을 때 崔益鉉 의병부대의 先鋒인 郭漢一이 洪州城의 위급을 듣고 4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洪州城으로 달려옴으로써 이 날 日本軍의 공격을 무사히 저지시킬 수 있게 되었다.
31일 다시 日本軍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義兵들은 사력을 다하여 日本軍의 공격을 저지하였으나, 장비가 불충분한 의병들은 끝내 日本軍의 공격에 패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洪州城 전투에서 의병은 83명이 전사하였으며, 145명이 日軍에게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대장 閔宗植도 公州에 피신 중 日本 헌병들에 의하여 체포되어 1907년 絞首刑에 언도되었으나, 高宗皇帝가 減刑하여 珍島로 유배시켰다가 12월에 特赦를 내렸다.
閔宗植이 이와 같이 湖西지방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고 있을 즈음 湖南方面에서는 賛政 崔益鉉이 林炳瓚과 손잡고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고 있었다.
1906年 6월 4일 崔益鉉은 泰仁에서 의병의 기치를 들고 高宗 皇帝에게 의병을 일으킨 동기와 乙巳條約 폐기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상소문을 올렸으며, 각 지방에 격문을 돌려 의병부대에 호응할 것을 호소하였다. 또 日本公使館에 日本의 欺滿的 행위를 16개 조목에 들어 규탄하는 서한을 보내어 日本의 죄악상을 폭로 공격하였다. 그가 들은 16개의 日帝의 죄악상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竹添進一郞이 甲申政變을 일으켜 皇帝를 위협하고 대신들을 殺戮한 것.
둘째, 大鳥圭介가 甲午年에 궁궐을 불태우고 재물을 약탈한 점.
셋째, 三浦梧樓가 閔妃를 弑害한 점.
넷째, 林權助와 長谷川好道가 위협하여 經濟를 약탈한 점.
다섯째, 군사상의 이유를 들어 우리의 토지를 강점하고 백성을 침해 학대한 점.
여섯째, 철도와 토지를 用兵의 목적으로 강점하고는 그것을 돌려 주지 않는 점.
일곱째, 李址鎔을 유혹하여 韓日議定書를 勒結한 점.
여덟째, 우리의 애국지사를 살룩·체포·감금한 점.
아홉째, 一進會와 같은 賣國團體를 敎唆하고 保安會·儒約所 등 애국단체를 치안 방해라는 이유로 박해한 점.
열째, 백성들을 勞役에 혹사하고 이를 속여 몰래 「멕시코」같은 곳으로 팔아 버린 점.
열한번째, 우리의 통신기관을 탈취한 점.
열두째, 顧問政治를 실시한 점.
열셋째, 재정 정리라는 이름으로 우리 정부에게 借款을 주어 국가 재정을 파탄 시킨 점.
열넷째, 乙巳條約을 강제 체결한 것.
열다섯째, 외교권을 탈취한 점.
열여섯째, 移民條例를 강제 체결케 한 점.
崔益鉉의 湖南 義兵은 淳昌·泰仁·谷城 등지를 근거로 하여 軍資金 모집과 무기 수집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는 한편 각지에서 官衙를 습격하고 日本軍警과 교전을 벌렸다. 당시 의병의 군세는 450명으로서 求禮⌒福·潭陽 등지에서 日本軍과 싸워 수십명을 사살하였던 것이다.
9월 11일 日本軍의 명을 받은 南原과 全州의 鎭衛隊가 의병을 공격하여 왔다. 처음 義兵들은 日本軍이 습격하는 줄 알고 임전태세를 갖추었으나, 이것이 鎭衛隊 병사들인 줄 알자 퇴각을 권유하는 글을 보냈다. 그러나 鎭衛隊 병사들은 의병들의 권유를 묵살하고 일제히 공격을 감행하였다. 의병들은 차마 鎭衛隊 병사들에게 발포할 수 없어 주저하는 사이에 대오가 무너져 버렸다.
그리하여 崔益鉉·林炳瓚·高石鎭 등 막료들을 비롯하여 많은 義兵들이 日帝官憲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당하였다. 이들은 日本憲兵司令部에서 갖은 고초를 겪다가 崔益鉉은 對馬島監禁 3년, 林炳瓚은 2년, 崔濟學·高石鎭은 4個月 刑을 선고 받았다.
崔益鉉은 對馬島 嚴原에서 囚禁 중 단식항쟁을 계속하다가 12월 30일에 殉國하였다.
이와 같이 湖南 의병부대가 패전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前平海郡守 姜在天은 곧 任實郡 下雲面에서 의병을 일으켜 求禮⌒福·淳昌 등지에서 鎭衛隊 및 日本軍과 교전하였으며, 그후에 長城郡을 야습하여 대승을 거둠으로써 군세가 크게 떨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일부 의병이 민가를 약탈하자 姜在天은 「日本軍과 逆臣들을 誅殺하고 국권을 회복하는 것이 본래의 뜻인데 병졸들이 도둑질을 감행하니 슬프다」하고는 의병을 해산하여 버렸다.
湖西와 湖南에서 의병활동이 활발할 때 嶺南에서도 의병활동이 왕성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三南都觀察使 鄭焕直이 高宗이 내린 密旨를 받고 아들 鄭鏞基 및 李韓久와 더불어 각 지방에 격문을 보내어 600여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1906년 봄에 의병을 일으켰다.
鄭鏞基는 대장에 추대되어 山南義陣의 기치를 높이 들고 東大山으로 진격하였으나 慶州鎭衛隊에게 체포되었다. 그러나 山南義陣은 그의 아버지 鄭焕直에 의하여 계속 항전할 수 있었다.
鄭換直은 일단 해산되었던 의병을 다시 모아 1907년 4월부터 4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日帝와 항전하였다. 淸河·靑松·永川 등지에서 적을 맞아 연승을 거두었으며, 永川의 紫陽戰鬪에서는 日軍 分派所長 외 3명을 잡아 이를 梟首한 뒤에 그 肝을 꺼내어 鍊兵將 禹在龍과 中軍將 李韓久가 이를 씹으면서 「매국 5적과 이또오도 이와 같이 하여야 한다」하고 비장한 결의를 표명하였다.
10월 6일 募雀嶺 전투에서 대규모의 적병의 공격을 받아 치열한 싸움 끝에 격퇴시켰으나, 이 날 밤 재차 적의 공격을 받아 鄭鏞基·李韓久·孫逎叔·權奎燮이 戰死하고 말았다.
이 비보를 들은 鄭焕直은 곧 달려와 敗散된 義兵을 다시 규합하여 진영을 재정비하고 부대를 4개 부대로 편성하였다. 第1哨長 曺在述은 80명의 의병을 이끌고 興海를 습격하여 郵便局 分派所 등을 소각하고 취급소장 이하 3명을 사살하였으며, 11월 3일에는 新寧을 공격하여 分派所에 보관된 무기 60여梃을 노획하였다. 또 4일에는 義興을 공략하여 역시 分派所를 불태우고 무기 49梃을 압수하였다.
8일에는 靑松郡 楡田에서 日本軍과 교전하였으며, 16일에 재차 興海를 공략하였다. 그 동안 義兵들의 손실도 역시 막대하였다. 第 1哨長 曺在述이 총상을 입고, 第 2哨長 南敬叔이 전사하는 불행도 있었다.
12월 9일 義兵 83명이 盈德을 기습하여 日本軍 20여명을 사살하고 28梃의 무기를 빼앗는 전승을 거두었으나, 그 후 靑松·淸河·杞北의 3면으로부터 日軍의 포위 공격을 받아 대부분의 의병을 잃고 말았다.
이에 鄭焕直은 의병을 일단 해산시키고, 東大山에 은신하였다. 12월 11일 다시 하산하여 활동하려다가 高川에서 日軍에게 被逮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는 永川에서 총살당하여 순국하였다.
이상의 山南義陣의 항전과 때를 맞추어 平海에서도 일단의 의병이 항전의 횃불을 들었다. 즉 申乭石이 1906년 3월 300여명의 義兵을 모아 항전의 기치를 든 것이다. 이 申乭石 義兵은 平海·寧海 등지를 근거로 하여 놀라운 전략과 과감한 공격으로 嶺南 일대의 의병 중에 가장 큰 전과를 올렸다. 따라서 日本軍의 집중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申乭石 義陣은 日月山·白岩山·大遯山∇大山 등 험한 산악을 근거로 하여 활발한 유격전을 감행하여 豊基·順興·三陟 지방에도 출동하였으며, 멀리 淸州도 공략 하여 日本軍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이 외에 崔聖執도 興海를 근거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상 三南지방에서의 의병활동 이외에 北部지방에서도 의병활동이 왕성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黃海道 文化에서는 禹東鮮이 征東義旅大將의 기치를 들고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趙允奉·李振台 등의 우수한 참모를 얻어 수년 동안 關西지방을 석권하면서 의병활동을 계속하였다.
이 밖에 李鎭龍·朴正彬·趙孟善·申俊彬 등 우수한 義兵大將들이 각기 의병을 규합하여 맹렬히 싸웠으며, 전국 각지에 유명·무명의 의병들이 봉기하였다. 이들 의병들은 빈약한 무기와 훈련되지 않은 병사들로 구성되었으나 막강한 日本軍에 위축되지 않고 항전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이 義兵들은 오직 싸워 이기는 것만이 이 나라를 구하는 지름길임과 민족을 살리는 최선의 행동이라 믿었기 때문에 日本軍의 야만적 탄압과 살륙을 당하면서도 항전을 늦추지 않고 계속하였던 것이다.
4) 賣國五賊 暗殺企圖
乙巳條約을 강제 勒結케 만든 日本이나 이 조약에 찬성 서명한 賣國 大臣이나 韓國民에게는 똑같은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상소를 통한 항쟁에서 乙巳條約의 폐기와 동시에 賣國奴의 처단이 주장되었던 것이다.
우리 민족이면서 국가를 日本에게 팔아먹은 매국 대신들의 행위는 오히려 日本보다 더 可憎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皇帝에게 매국 5대신의 誅殺을 상소하였던 것이나, 이것이 아무런 효력을 발하지 못하자 직접 이들 매국노를 응징키 위한 암살 기도가 일어났다.
이 첫번 기도는 羅寅永에 의하여 계획되었다. 羅寅永은 吳基鎬와 함께 乙巳條約 이전에 渡日하여 日本정부와 日本 요로에 진정하여 日本의 韓國侵略政策의 중단과 韓國의 독립 보장을 요구하는 운동을 맹렬히 전개하였다. 그러나 乙巳條約이 勒結되고 우리의 주권을 약탈당하자 매국 대신을 誅殺하여 먼저 국정부터 바로 잡아야겠다고 결심하고 短刀 2개를 사가지고 귀국하였다.
羅寅永은 먼저 參政大臣 朴齊純과 內務大臣 李址鎔이 정권 싸움을 하여 내정을 혼란시키는 것을 보고 우선 이 두 대신부터 誅殺하기로 계획하였다.
羅寅永·吳基鎬·金寅植은 1907년 2월 28일 폭탄장치를 한 상자를 선물상자로 가장하여 두 대신의 집에 보냈다. 그러나 이 기도는 상자가 폭발하지 않아 실패하고 말았다.
제1차 거사가 실패하자 羅寅永은 일시에 다섯 매국 대신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동지 포섭공작을 벌려 金東弼·朴大夏·李鴻來 등을 규합하고 자금과 무기를 준비 하였다.
3월 25일을 거사일로 확정한 羅寅永은 동지를 6개조의 결사대로 편성하였다.
羅寅永·吳基鎬는 朴齊純 암살을 담당한 제1대를 이끌고 光化門의 해태석 옆에서 거사키로 하였다. 그러나 이 날 8시 日本軍 7-8인의 호위 하에 四人轎를 타고 가는 朴齊純을 목격하였으나 대원들이 우물쭈물하여 기회를 놓쳐 버렸다.
그리고 李完用 암살을 담당한 결사대는 敦義門 안을 거사 장소로 정하고 새벽부터 李完用이 지나가기를 기다렸으나 오지 않아 잠시 시장기를 면하고자 인근 주막에 간 사이에 李完用이 지나가 버려 이것 역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또한 法部大臣 李夏榮의 암살을 담당한 결사대도 李夏榮이 日本軍의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지나감으로써 거사를 실천못하고 말았다.
다만 寺洞 어구에서 軍部大臣 權重顯을 기다리던 決死隊만이 거사를 실천에 옮겼다. 日本軍 6-7인의 경호를 받으며 인력거를 탄 權重顯이 다가오자 李鴻來가 그 앞을 가로 막으며 「역적 놈아 네 죄를 아느냐」고 꾸짖으면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이 때 日本軍이 달려 들어 李鴻來를 잡아 재치자 옆에 있던 康元相이 권총을 뽑아 權重顯을 저격하였다. 그러나 총탄이 權을 명중치 못하였고 놀란 權이 민가로 도망하니 다시 康元相이 1 발을 쏘았으나 이 역시 명중시키지 못하였다.
한편 좀 늦게 집을 나오려던 李根澤은 權重顯이 저격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겁을 먹고 나오지 않으므로 李根澤을 암살코자 기다리던 決死隊는 허탕치고 말았다.
이 5賊 暗殺을 기도하였던 인사들은 그 후에 모두 被逮되어 平理院에서 5년 이상 死刑까지의 형을 받았다.
이와 같은 羅寅永에 의한 매국 5적의 암살 기도보다 조금 빨리 또 하나의 거사가 있었으니, 이것은 長城 사람 奇山度에 의하여 실천에 옮겨졌다.
1906년 2월 16일 매국 5대신 중 日本軍司令官 하세가와(長谷川好道)와 義형제를 맺고 이또오(伊藤博文)의 義아들이라고 자칭하면서 매국 행위를 서슴치 않았던 교활 간교한 李根澤을 죽이기로 하였다.
이날 밤 奇山度는 李根哲 외 1명과 같이 변장을 한 후 李根澤의 집에 숨어 들어가 잠자리에 들었던 李根澤을 短刀로 10여 차례 찔렀다. 그러 나 끝내 李根澤이 목숨을 건짐으로써 실패하고 이들은 체포당하고 말았다.
이상과 같은 5賊 암살 기도는 매국 대신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고, 일반 시민들은 이들의 거사가 성공치 못한 것을 끝내 분하게 생각하였다.
이로부터 賣國 逆臣들의 집은 日本軍에 의하여 삼엄하게 경비되었으며, 逆臣들은 겁을 먹고 출입을 삼갔다.
5) 一般民衆의 抗爭
1905년의 亡國 조약의 勒結은 고관대작들로부터 아래로는 한낱 이름없는 車夫와 婢妾에 이르기까지 日本의 침략에 항거하여 목숨을 끊거나 기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항거하였다. 商人들은 撤市로써, 學生들은 동맹 휴학을 통한 무언의 항쟁으로써, 儒生들은 상소운동을 통해서 日帝에 항거하여 많은 志士·烈士 들이 속출하였다.
金河苑·李基範·車炳修 등은 기독교인으로서 「死守國權」의 뜻을 쓴 경고문을 鍾路 네거리에 게시하여 놓고 모여든 시민들에게 격렬한 구국 연설을 전개하여 애국심을 고취하고 분발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 때 日本의 헌병순사들 수십명이 총칼을 휘두르며 달려 들어 운집한 군중들을 함부로 유린하였다. 이 광경을 目覩한 金河苑 등이 칼날을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가 「우리들은 국가 독립을 위하여 죽어도 또한 영광이니 속히 죽이라」고 소리치며 달려 들어 가슴을 치받자 日本軍들은 총칼을 휘둘러 마구 찌 르므로 여러 사람들이 많이 쓸어졌다. 이 광경을 目覩한 시민들이 분노하여 기와쪽과 돌로서 日本軍에 대항을 하자 日軍들은 발포하였다. 日軍의 총탄이 빗발치는 데도 불구하고 시민들이 헤어지지 않자 증파된 헌병들이 달려 들어 상점을 부수고 시민들을 마구 체포하여 수백명을 日本軍司令部로 끌고 갔다.
平壤에 살고 있는 靑年會員 崔在學·金仁濈·申相敏·李始榮·田錫俊 등 다섯명은 조약 폐기의 격문을 인쇄하여 서울에 살포하였으며, 11월 27일 大安門 앞에서 상소문을 올리고 끓어 엎드려 기다리던 중 출동한 日軍 1개 소대에 의하여 포박당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日兵을 꾸짖으면서 大韓獨立萬歲를 고창하였다. 이에 日軍은 이들의 입을 수건으로 틀어막고 칼로 등을 치면서 끌고 가 警務廳에 구금하였다.
乙巳條約 체결에 앞장을 섰던 軍部大臣 李根澤이 조약 체결 후 집에 돌아와 자기 가족에게 체결 당시의 궁중 광경을 서명하면서 자기는 조약에 찬성하였기 때문에 이후로는 평생 권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랑하였다. 이 때 이 집의 饌碑가 이 말을 듣고 식칼을 내던지면서 「나는 네가 凶逆한 일을 저지를 놈인 줄 여태 몰랐다. 여러 해 이 집에서 일해 주고 밥을 얻어 먹었으니 분하고 원통하며, 이 치욕을 씻을 길 없다」고 외치며 밖으로 나갔다. 분이 머리 끝까지 오른 李根澤과 그 가족이 饌婢를 붙잡으러 달려 나오자 饌婢는 문 밖에서 큰소리 로 「동네 사람들! 들어 보시요. 소위 집 주인이라는 놈이 凶逆한 일을 하여 내가 바른 말로 야단을 쳤더니 나를 때리려 한답니다」라고 소리치고는 다른 집으로 피신하였다. 이 때 이 집에서 오래 전부터 일하여 오던 針母도 饌婢의 의기에 감동하여 그 집을 나가 버렸다.
水原의 이름없는 한 농부 元泰根(金台根이라고도 기록되어 있음)은 조약이 勒結된 소식을 듣자 분함을 참지 못하여 조약 체결의 원흉 이또오를 죽이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12월 22일 오후 6시 安養驛 부근에서 이또오가 탄 열차에 투석하여 이또오의 얼굴에 찰과상만을 입히고 체포되 었다.
당시 사회의 천인계급인 妓生들도 통분함은 같았다. 晋州 기생 山紅은 자기를 첩으로 심고자 하는 매국 대신 李址鎔에게 「세상에서 대감을 5적의 우두머리라 하는데 내 비록 천한 기생이나 어찌 역적의 첩이 될 것이냐」 하고 듣지 않자 李址鎔이 그녀를 구타하였다 한다.
이상의 救國抗爭은 몇 가지 예를 든 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官僚나 儒生들이 소극적인 上疏·殉國鬪爭을 감행한 데 반하여 民衆들의 항쟁은 더욱 과감한 것이었다. 도시에서는 주로 賣國 逆臣들의 암살이란 무력투쟁 및 국민의 자각과 실력 양성을 부르짖는 救國啓蒙運動이 항쟁의 주류를 이루었고, 농촌과 산악지대에서는 총과 칼을 들고 日本軍과 직접적으로 항전한 義兵抗戰이 중요한 투쟁 방법이었다.
5賊暗殺鬪爭과 義兵抗戰은 전술한 바와 같고, 여기에서는 국민의 자각과 실력양성운동을 부르짖은 救國啓蒙運動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이 시기에 있어 抗日運動의 한 특징은 서울을 중심으로 한 基督敎徒에 의한 조직적인 抗日運動과 西北道의 基督敎를 기반으로 한 抗日運動의 대두였다.
특히 平壤은 이미 당시에 基督致 都市化하고 있었던 곳으로 여기에는 民會·自强會·靑年會·西友會·商業會議所 등 기독교도들에 의하여 조직된 단체가 많이 설립되고 있었는데, 이것은 모두 抗日愛國運動의 성격을 띤 조직체였다. 더우기 安昌浩의 애국계몽운동에 자극받아 平安道를 중심으로 한 抗日運動은 매우 고조되어 있어 日本商品 不賣運動을 비롯하여 日本人 거류민과의 직접적인 격투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의 抗日運動이 왕성하였다.
또한 서울은 抗日運動의 震源地로서 각 지방과 연락을 하면서 抗日運動을 주도하여 나갔다.
당시 서울에는 전국적인 조직망을 가진 抗日結社가 다수 조직되어 있었다. 基督敎靑年會·憲政硏究會·自新會·自强會·開進敎育會·西友會 등으로서 이 들 단체는 표면상 文化運動을 표방하면서 국민의 계몽을 위해 노력하는 반면에 그 산하에 비밀결사대를 두어 抗日運動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즉 5적 암살을 기도하였던 羅寅永·吳基鎬 등도 自新會를 조직 활동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