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고향을 그리워하며]
쪽지편지
예안초등 제63회 김지욱
1975년 겨울이었다. 낙동강의 차가운 강바람이 저녁 노을빛을 싣고서 다래 마을의 서쪽 산모롱이를 돌아 신작로 옆 우리 담뱃가게를 휘감고 있었다. 추위를 피해, 아니 긴박하게 진행되고 있는 뉴스속보를 듣기 위해 우리가족 모두는 이 가게의 툇마루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모두가 한결같이 귀를 쫑긋하게 세우고서 KBS안동방송국의 오후 다섯 시 라디오뉴스속보를 청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어서, 방금 들어온 안동여자고등학교 합격자 명단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수험번호 순서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3번, 5번, 6번, 8번, 11번, 12번, 17번, 19번, 20번······.”
라디오 뉴스를 진행하던 여자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트랜지스터라디오의 스피커를 타고 또렷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안동의 제일명문이라는 안동여고에 입학시험을 치고 온 누나의 수험번호는 127번이었다.
“······121번, 124번, 126번, 127번······.”
뉴스속보가 시작된 지 수십 초가 지나고 126번에 이어 127번이라는 누나의 수험번호가 전파를 타는 순간 담뱃가게 안은 일제히 ‘야호’라는 환호성과 함께 기뻐 날뛰고 있었다.
누나가 그렇게나 어렵다는 안동여고 입학시험에서 3.7 대 1이란 경쟁률을 뚫고서 당당히 합격을 한 것이었다. 겨울날씨만큼이나 긴장되고 움츠려있던 분위기가 일순간에 밝아지고, 샛노란 서녘 햇살마저 온가족의 얼굴에 반사되어 환희를 더욱 고조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기쁨도 한 순간, 누나의 갑작스런 한 마디에 분위기는 다시 정적으로 되돌아가 버렸다.
“가만, 가만, 쉿, 조용! 지금 내 친구 양소희 발표할 차례야. 173번이야!”
정적은 다시 10여 초간 계속되었고 171번 발표 다음 173번을 건너뛰고 175번으로 넘어가자 가게 안은 다시 한 번 우리 가족의 함성으로 가득차고 말았다. 173번 양소희는 떨어진 것이었다. 나는 별안간 어찌된 일인지 어안이 벙벙해졌다. 친구가 떨어졌는데 이렇게 환호성을 올리다니······.
“왜 그래? 양소희는 떨어졌다며? 방금 173번 안 불렀단 말이야!”
“모르면 가만히 있어, 바보야! 걔는 우리집안 원수의 딸이란 말이야!”
방금까지도 눈물까지 흘리며 감격해 하던 누나의 입에서 원수의 딸이란 의외의 말이 나오는 바람에 내 눈은 더욱 휘둥그레져 버렸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자세히 말 좀 해 봐. 응?”
우리집안의 내력에 대해 나만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는 듯 했다. 옆에서 같이 얼싸안고 기뻐하던 둘째형이 그동안 뭔가 억울한 게 있었다는 듯 얘기를 시작했다. 둘째 형은 현재 안동 교대 1학년에 재학 중이다. 겨울방학이라 집으로 돌아와 집안일을 돕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말이야. 지금부터 200여 년 전, 우리부터 7대조 이야기인데······.”
태양은 어느덧 마을의 서풍을 가로막아 주는 남지봉 밑으로 사라지고 날은 이미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둘째형은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향해 아버지는 할아버지한테서 듣고, 형은 다시 아버지한테서 들은 집안 내력을 얘기하고 있었다.
얘기인 즉, 7대조의 할아버지께서 아들을 못 낳아 첩을 들였는데, 그 첩의 집안이 역동 양 씨였다는 것이다. 당시에 우리집안 또한 안동 예안에서는 대대로 알아주는 경주 김 씨 가문이었지만, 그 첩의 집안 또한 대단한 집안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양가 집안 간에 위토 문제로 재판이 붙었다고 한다. 하지만 첩으로 들어온 그 역동 양 씨가 결정적으로 우리집안에 불리한 진술을 하는 바람에 우리 가문이 재판에서 패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200여 호나 되던 우리 경주 김 씨 집성촌은 땅도 빼앗기고, 세력도 잃게 되어 뿔뿔이 흩어지는 바람에 지금은 겨우 20여 호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우리 집도 맏집이 아닌 관계로 고향에서 밀려난 후 이렇게 횡성 조 씨 집성촌인 다래 마을에서 살게끔 되었고······.
“그래서 우리가 역동 양 씨 가문을 미워하는 거야?”
“그렇지. 그리고 우리 경주 김 씨 가문은 그 이후 대를 이어 조상들의 유언으로 전승시켜 온 것이, 본처는 물론이고 비록 첩이라 할지라도 절대로 들여서는 안 된다는 거야.”
둘째형의 얘기가 끝나자마자 내 심장은 갑자기 콩닥콩닥 뛰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조그만 두 주먹마저 야무지게 움켜쥐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양소희가 안동여고 입학시험에서 떨어진 것이 고소하다 이 말이야! 호호호!”
누나는 원수 집안의 딸과의 경쟁에서 이겨 뭔가 뿌듯함을 느끼는지 자랑스럽게 한 마디 보태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니 마치 자기가 합격한 것보다 양소희란 친구가 떨어진 것이 더 기쁜 듯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서 내 결심도 굳어져 가고 있었다. ‘앞으로 역동 양 씨네와는 경쟁에서 이길 것이며, 그 집안과는 절대로 결혼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 자식들한테도 이런 집안의 내력을 반드시 대물림해 줄 것이다.’
그러던 중 옆에서 나보다 더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고 있던 초등학교 6학년인 여동생이 끼어들었다.
“그런데 중학교 1학년인 욱이 오빠야도 옆 반에 양 씨 집안 친구 있잖아. 걔보다 공부 더 잘 해야겠네?”
“누구 말이고?”
나는 이야기가 갑자기 나한테로 쏠리자 반사적으로 그만 쏘아 붙이고 말았다.
“4반 반장 말이야. 먼저 번에 오빠가 걔 얘기를 했잖아. 양필희라고······. 예쁘고, 똑똑하고, 인기도 많다며?”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양필희가 정녕 우리 원수 집안의 딸이란 말인가? 최근 1년 동안 나는 남자반인 1, 2반 중 1반의 반장, 걔는 여자반인 3, 4반 중 4반의 반장을 해 왔다. 그래서 학교 행사나 회의 시간에 우린 자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걔는 매일 이른 아침에 우리 가게 앞 신작로를 지나서 학교를 가고 있지 않은가.
걔 집은 우리 집에서 5리 정도 떨어진 강 건너 역동 마을에 있었다. 걔 사는 마을이나 내가 사는 마을은 행정상으로는 같은 부포동이였지만 마을 이름은 서로 달랐다. 강을 하나 사이에 두고 우리 마을 이름은 다래라고 불렸고, 걔네 마을 이름은 역동이라고 불렸다. 옛날 건물인 역동서당을 배경으로 지어진 걔의 집은 정말 으리으리할 정도로 크고 넓었다. 가끔씩 마을 뒷산에 올라 동쪽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 강 건너 바로 맞은편에 걔네 집이 뚜렷하게 보였다. 나는 어릴 적부터 그 집을 내려다보면서 나중에 나도 저런 집에 살아야지 하는 꿈을 꾸던 그런 집이었다.
그런데 그 집이 바로 우리 집안을 쫄딱 망하게 한 집안이라니 내겐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욱아, 맞나? 너희 학년 4반 반장 맞나? 그러면 초등학교 때부터 매일 같이 우리 가게 앞을 지나다니던 예쁘장한 걔 말이네?”
약간 흥분한 누나가 불현듯 생각이 났다는 듯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그런가 봐. 걔네 집이 역동서당 집 맞아.”
“그러면 너 앞으로 절대로 걔하고 사귀지 마라. 그리고 4반 반장이면 공부도 잘 하겠네? 앞으로 걔하고의 경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 알았지?”
누나는 내게 아주 다짐을 받아 놓으려고 윽박지르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양필희 걔하고는 말을 많이 해보거나 사귄 적은 없었다. 다만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비록 같은 반은 아닐지라도, 나는 반장, 걔는 부반장을 하면서 피치 못하게 여러 번 만난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아니, 걔하고의 관계를 굳이 꼭 집어 찾아낸다면 있기는 있었다. 우리 집이 걔네 집과 학교 중간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등하교 시에는 반드시 우리 집을 거쳐야 한다. 그러다 보니 매일 만나는 인연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만나는 인연은 좀 희한했다. 걔네 집이 있는 역동은 우리 집에서는 비록 5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학교까지 계산하면 거의 15리 정도나 되었다. 왜냐하면 우리 집에서 학교까지의 거리가 거의 10리나 되기 때문이었다. 그 길을 여학생인 양필희는 매일 같이 걸어 다녔는데 남들보다 더 모범생인 관계로 한 시간이나 일찍 등교를 하고 있었다.
자전거로 통학을 하느라 상대적으로 느긋한 나는 그 시간에 일어나서 하는 일이라곤 마당을 쓰는 것이었다. 우리 집은 신작로 가에서 담뱃가게를 운영하고 있었으므로 마당이라고 해 봐야 그건 곧 신작로를 뜻했다. 매일 아침 이슬에 촉촉이 젖어 있어 먼지 하나 나지 않는 신작로를 커다란 싸리비로 쓸고 있으면, 저 멀리 고개 너머에서 자욱하게 낀 안개를 뚫고 사뿐사뿐 걸어오는 실루엣이 보였다. 쓱싹쓱싹 거리는 나의 싸리비 소리에 맞춰 걔도 토닥토닥 가벼웁게 발걸음을 떼고 있는 것 같았다. 드디어 희미하고 조그맣던 그림자가 점점 선명해지고 커지면서 내 눈앞에 나타나면, 나는 얼른 길을 내주고서 고개를 살짝 돌리곤 했다. 그리고는 깨끗하게 쓸려진 황토길 신작로 위에 일정한 보폭으로 찍힌 그녀의 발자국을 보면서 발도 참 귀엽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이렇게 수년간에 걸쳐서 나는 그의 모습을 곁눈질로 살피고 있었고, 그럴 때마다 걔도 부끄러운 듯 그 순간을 벗어나곤 해 왔다.
이런 사건도 한 번 있었다. 중학교 1학년 가을 어느 날 걔가 방과 후 집에 오는 길이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왔으므로 일찌감치 집에 와 있었고, 그날따라 내겐 기분 좋은 일이 생겼다. 멀리 도회지에 나가 계셨던 큰삼촌이 우리 집에 들르셔서 용돈과 귀한 제주산 감귤을 주셨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용돈과 밀감을 한 움큼 들고는 기분이 좋아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우리 집 가게 문을 뛰쳐나갔다. 순간 바로 가게 앞 신작로를 지나던 걔하고 가슴을 부딪치고 말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걔의 가슴이 뭉클 거렸다는 느낌을 받았고, 곧바로 부끄러워서 그 자리에서 도망을 치고 말았다. 물론 깜짝 놀란 걔도 황급히 피하느라 걔의 가방은 저 멀리 내동댕이쳐졌고, 나의 감귤 또한 어디로 날아가 버렸는지 알 수도 없었다.
그 날 이후로는 아침에 마당을 쓸다가도 저 멀리 안개 속에서 꼼지락 거리며 고개를 넘어오는 걔가 보이면 곧장 나는 자리를 피하곤 했다. 이것 또한 걔하고 깊은 인연이라면 인연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누나의 입학시험합격자 발표가 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드디어 겨울 방학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겨울 방학에도 매일 같이 학교를 가야 했다. 우리 학교가 고전읽기시범학교로 지정이 되어서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하여 독서를 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한 반에 두세 명씩 선발해서 모두 10명이었다. 우리는 교실 하나를 개조하여 만든 조그마한 도서관에 모두 모여 장작불 난로를 피우며 단체로 책을 읽고 있었다. 다가오는 봄이면 누가 독서를 더 잘, 더 많이 했는지를 가리는 시험이 있다고도 했다. 우리는 지정된 도서 중에서 학교에서 준비해 준 도서랑, 각자 집에서 가져온 도서를 가지고 서로 돌려가며 책을 읽고 있었다. 물론 각자 집에서 가져온 책은 본인의 이름을 책표지에 적어 놓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도서관 한 구석에 모여 있던 여학생 몇 명이서 키득키득 거리며 웃고 있었다.
“잉? 지우개? 지우개? 아! 지우개! 키득키득키득!”
나는 직감적으로 내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왜냐하면 방학하기 얼마 전에 내 별명이 지우개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우리 담임선생님은 국어 선생님이신데 고향이 충청도였다. 그래서 악센트가 우리 경상도와는 약간 달랐다. 그런 담임선생님이 평소에 나를 부를 때에는 ‘김지욱’ 이름 석 자를 생략한 채 그냥 ‘반장’이라고만 해 왔다. 그런데 어느 하루는 ‘지욱이!’ 하며 내 이름을 부르면서 ‘지’자에 악센트를 두지 않고 ‘욱’자에 악센트를 두는 바람에 ‘지욱이’가 ‘지우개’로 들려 버렸다. 그래서 교실 안은 학생들의 박장대소로 웃음이 끊이질 않았고, 그날부로 나는 그만 ‘지우개 반장’이 되어 버렸다.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도서관 한 편에서 ‘지우개’ 하면서 키득거리고 있는 여학생들의 반응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계속해서 웃는 소리에 너무나 궁금해서 은근슬쩍 여학생들 옆으로 다가가 봤다. 그랬더니 3반 반장이란 여학생이 내 앞으로 책 한 권을 살며시 내 밀었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조지 워싱턴. 책 주인 : 지우개”
아닌 게 아니라 이 책은 내 책이었다. 고전읽기 책 중에는 위인전기도 있었는데 내가 제출한 책이 조지 워싱턴이란 위인전기였다. 그런데 그 책 꺼풀에다가 아름답고 예쁜 책 포장지를 덮어씌우고는 윗부분에는 ‘조지 워싱턴’이란 책 제목을 커다랗게 적고, 아랫부분에는 그보단 작은 글씨로 ‘책 주인 : 지우개’라고 예쁜 글씨로, 그것도 노랑, 파랑, 녹색을 섞어서 적어 놓았던 것이다.
나는 글씨도 글씨였지만 이렇게나 예쁜 책 포장지를 어디서 어떻게 구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솟아나면서 내 얼굴은 순식간에 홍당무가 되고 말았다. 누눈가가 나를 위해 이렇게 한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책을 제출하면서 책표지에다 내 책이란 증거만 드러나게 아무렇게나 이름을 적어 놓았을 뿐이었는데······.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나의 표정을 읽었는지 여학생들은 더욱 깔깔거리고 있었다.
“이것 누가 이렇게 장난쳤어?”
나는 도저히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어 생뚱맞은 말 한 마디만 던지고는 얼른 그 자리를 뜨고 말았다.
그때부터 나는 마음을 다잡지 못 하고 있었다. 도서관에 앉아 책을 펼쳐도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밖에 나가서 찬바람을 쐬고 들어와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자전거를 타고 하교하는 길에도, 집에서 잠자리에 들어서도 그 생각으로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누가 무슨 의미로 내 책에다 그렇게 고운 표지를 감싸고 글자를 새겨 넣었을까. 내게 관심이 있어서 그랬을까? 그렇다면 누구인지 알아야 보답이라도 할 텐데······.
그런 날들이 한 1주일 정도 흐른 어느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먹다가 우리 반 부반장이 농담반 진담반 말을 흘렸다.
“야, 지우개 반장! 양필희 반장이 너 좋아하나 봐?”
“이게? 죽을래?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양필희가 나를 좋아하다니?”
양필희란 말에 나는 그만 흥분하고 말았다. 우리집안 원수의 딸이자 나의 경쟁자가 아닌가. 그런데 나를 좋아하다니······.
“3반 반장이 그러는데, 너 책표지 양필희 반장이 포장했다던데?”
“정말이야? 그렇다고 나를 좋아한다고 소문을 내면 어떻게 해, 인마? 앞으로 말조심해!”
나는 이 짧은 몇 마디를 친구로부터 듣는 순간 너무나 놀란 나머지 그만 가슴이 덜컹하고 내려앉는 듯했다. 하지만 잠시 후 한편으로는 걔가 왜 하필이면 나를 마음에 두었을까 하고 걱정되기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우리 학교 최고의 모범생이 나를 좋아한다는 생각에 그만 가슴이 울컥해지기도 했다.
나는 또다시 갈등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간에는 누가 이런 행동을 했을까 하고 매우 궁금해 했는데, 이제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지금 내가 열심히 읽고 있는 책이 양필희가 가지고 온 ‘탈무드’란 책이었다. 이 책을 어떻게 돌려준다? 책을 다 읽고 나서 그냥 모른 척하고 제 자리에 갖다 놓아? 아니면 모두가 내가 읽고 있는 책이 누구 것인지 알고 있으므로 최소한의 반응을 보여?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 보니 탈무드의 내용은 머리에 전혀 들어오질 않았다. 단지 책을 반납할 때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만이 내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책을 돌려줄 시간은 이제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모두가 돌려봐야 하는 것이므로 지정된 날짜에 반납을 해야 했다. 그때 우리 집 방 저쪽 한 구석에 여동생의 조그마한 사물함이 보였다. 그 사물함 뚜껑 위에는 여동생이 항상 갖고 놀던 종이 인형이 쌓여 있었다. 바로 저거다 싶었다. 그 중에 제일 예쁜 종이 인형 하나를 골랐다. 그 종이 인형은 이름이 ‘나나’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벽에 걸린 대형 달력을 벗겨 내렸다. 그 중에서 제일 깨끗해 보이는 달력 한 장를 뜯었다. 가위로 책표지를 싸기에 적당한 크기로 잘랐다. 그러고 나서 탈무드란 책에 달력의 하얀 뒷면이 밖으로 나오도록 정성껏 포장을 했다. 또한 책표지 위에는 컬러로 된 나나 인형을 조심스럽게 풀로 붙였다. 아주 그럴싸했다.
이젠 책표지에 글씨만 쓰면 그만이었다. 나는 자를 대고 미술시간에 배운 대로, 또한 그림자가 비치는 모양의 글씨체로 하나하나 그리듯 써 나갔다. 양필희가 내게 했던 똑 같은 양식으로 글씨를 완성했다.
“탈무드. 책 주인 : 연필”
연필이라고 쓴 것은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쳐가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양필희, 양필희 하다 보니 순간적으로 발음이 비슷한 ‘연필이’가 생각났던 것이다. 다 만들고 나니 내 가슴은 뿌듯했다. 그림인형과 글씨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책표지가 제법 그럴 듯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은 어떻게 잤는지도 모르게 지나갔다. 아침이 되자 차가운 강바람이 세차게 불어왔음에도 불구하고 학교로 가는 자전거는 씽씽 잘도 나갔다. 그리고는 탈무드란 책을 도서관 책 반납 장소에 사뿐히 얹어 놓았다.
그 날은 하루 종일 또 흥분되어 있었다. 양필희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고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러면서도 또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건 아닌데 하는 걱정이 몰려오기도 했다. 이러다 정말 사귀기라도 한다면 나는 우리집안의 배신자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도 그랬고, 할아버지도 그랬고, 아버지도 그랬고, 형들과 누나들고 다 그래 왔는데······. 내가 들어 그 집안을 용서하고 친하게 지내게 된다면 모든 게 허사가 되어 버리지 않겠는가. 이건 안 될 일이었다.
나는 밖으로 나가 운동장에 깔린 눈을 한 줌 모아 쥐고는 얼굴에다 빡빡 문질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는 도서관으로 통하는 복도를 들어서려는데 양필희가 바로 내 눈앞에 떡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없이 내 손에다 쪽지를 쑤셔 넣고는 화장실로 도망쳐 버렸다. 나는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당황한 나머지 주위에 누가 있는지만 살피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는 들어오던 길을 잽싸게 되돌아 밖으로 나갔다. 저 멀리 있는 체육관 건물 뒤편으로 숨어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쪽지를 펼쳤다. 펼쳐진 쪽지는 난생 처음 보는 편지지였다. 그 동안에는 그저 가로선만이 쭉쭉 그어진 편지지만 봐 왔다. 그런데 이 편지지는 알록달록한 꽃무늬에다 하트 무늬가 여기저기에 박혀 있고, 편지지 가장자리로는 영어 이탤릭체로 ‘I love you!’라는 글자가 빼곡히 인쇄되어 있었다. 그리고 짤막하게 몇 자 적혀 있었다.
“연필이 지우개에게~! 너 참 귀엽다. 남자가 여자처럼 섬세하게 책표지도 포장하고, 나나 그림인형도 붙이고, 그리고 글자도 자로 잰 듯이 반듯하고 예쁘게 쓰고······. 책 열심히 읽을게. 감기 조심해! 호호호.”
몇 줄 안 되는 글이었지만 내 가슴은 또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선 채로 읽었던 글을 읽고 또 읽고를 반복했다. 글씨 또한 왜 그렇게도 예쁘고 깔끔하게 썼는지 마치 그림을 보는 듯 했다. ‘연필이 지우개에게’라는 문구도 내가 붙여준 별명이 마음에 든다는 뜻으로 해석되어 내 가슴속 깊은 곳까지 감동이 밀려오고 있었다. ‘너 참 귀엽다.’ 이건 또 뭣인가. 동기 여학생한테서 그런 소리를 들으니 이것 또한 가슴이 울먹거리고, ‘남자가 여자처럼’이란 글귀도 나를 남자로 보고 있다는 생각이므로 이 또한 눈물 나도록 정겹다. 그리고 이것뿐만 아니라 뒤에 나와 있는 짧은 글귀도 모두 나를 칭찬하고 있었으므로 좀처럼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식의 쪽지는 여학생으로부터 지금껏 한 번도 받아 보지 못 했던 터라 머리가 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아, 이를 어찌한다? 사귀면 안 되는 4반 반장이 내게 접근을 해 온다. 그런데 이 원수의 딸은 너무나 똑똑하다. 예쁘다. 착하다. 학교에서도 보배로 생각한다. 친구들도 너무나 좋아한다. 아, 난 어쩌란 말이냐?’
이렇게 머리를 흔들며 갈등을 하고 있는데 얼마 전 누나가 한 말이 내 귓전을 때렸다. 그것도 누나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너 앞으로 절대로 걔하고 사귀지 마라. 앞으로 걔하고의 경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 알았지? 알았지? 알았지? 알았지?’
나는 도저히 마음이 잡히질 않아 그 길로 바로 도서관으로 향하지 않고 집으로 와 버렸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책을 읽기는 이제 다 틀렸다. 머릿속은 온갖 번민으로 가득차서 정리가 되지를 않았다. 결국에는 연필을 잡았다. 하지만 한참 시간이 지나고서야 겨우 한 줄을 적을 수가 있었다.
“지우개가 연필에게.”
하지만 그 다음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단도직입적으로 ‘앞으로 내게 쪽지 같은 편지 보내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렇게 적을까. 아니지. 그러면 어린 나이에 너무 충격을 받을 거야. 그러면 어떻게 한다? 차라리 답장을 적지 말어? 아냐, 아냐, 그것도 아니야. 나는 이렇게도 생각해 보고 저렇게도 생각해 보다가 몇 자 또 쓰기 시작했다.
“너 참 예쁘다. 글씨도 예쁘고······. 그런데 네가 쓴 편지지는 어디서 난 거니? 내겐 그런 건 없어. 앞으로 우리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하자. 너도 감기 조심!”
이게 다였다. 그리고 다음날 도서관의 양필희 좌석 위에 놓여 있는 책 사이에다 퍼뜩 꽂아 넣었다. 그리고는 책을 읽는 척하며 눈을 이리저리 돌리며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날은 또 이렇게 눈치만 살피다 시간이 다 지나가 버렸다. 그리고 독서를 마치고 교문을 나서는 길에 독서읽기를 같이 하는 남자친구 다섯 명과 함께 교문 앞 사진관에 들러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올 여름이면 안동 댐이 완성될 예정이다. 그러면 우리가 살고 있는 면단위 대부분이 수몰이 되고 우리 학교도 마침내 폐교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반장, 부반장이 대부분인 우리가 헤어지기 전에 마지막 우정을 독서로 불사르는 기념으로 흑백사진이나 남기자고 했던 것이다.
사진을 찍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우리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새촌모티, 용바위, 청고개, 석빙고, 엔댐, 솔골 및 뱀쥐골 등 일곱 개나 되는 꼬부랑 신작로를 지나야 한다. 그런데 그 꼬부랑 길 중 석빙고 가까이 올 무렵이었다. 저 앞에 양필희와 또 다른 독서친구가 같이 가고 있었다. 그 중 양필희는 뭔가를 살피는지 계속 뒤를 힐끔힐끔 돌아보다가, 내가 가까이 접근하자 나와 눈을 한 번 맞추고는 석빙고의 돌담벼락 사이에다 뭔가를 꽂아 넣었다. 동작도 참 빨랐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옆에서 같이 가고 있던 친구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난 그게 무슨 신호인지 육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자전거를 천천히 돌려 세웠다가 그 친구들이 저 만치 떠나고 난 뒤 돌담벼락 틈새에 끼여 있는 쪽지를 끄집어냈다.
“이어지는 쪽지편지 세 번째. 연필이가 지우개에게. 독서 잘 되니? 나는 잘 안 돼. 요즘 잠도 잘 못 자. 아마 너 때문인가 봐. 얼마 안 있으면 겨울 방학이 다 지나가는데 아직 숙제도 다 못 했어. 내 숙제 좀 도와줄래? 아, 참. 꽃 편지지의 출처는 비밀······. 호호호.”
이번에도 역시 짧은 쪽지편지였지만 나로 하여금 또 다시 많이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어지는 쪽지편지 세 번째’라면 앞으로 계속 편지를 주고받자는 얘기 아닌가? 또 ‘독서도 안 되고 잠도 잘 못 자’라고 한다면 나와 똑 같은 고민에 빠져있다는 생각 아닌가? 아니, 노골적으로 나 때문이라고 하잖아. 이건 큰일이었다. 나도 양필희 때문에 잠 못 이루는데 걔도 그렇다는 뜻 아닌가? 이건 뭐 어디 상담해 볼 데도 없고 정말 큰 걱정거리였다.
나는 며칠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또 다시 쪽지를 만지작거렸다. 펜도 끄집어내었다. 사색에 잠겼다. 그리고 결국엔 또 걔가 둘러쳐 놓은 튼튼한 울타리 속에 갇히고 말았다.
“이어지는 쪽지편지 네 번째. 지우개가 연필에게. 나의 고민도 너와 마찬가지야. 앞으로 우리 고민거리를 서로 나누어 가지도록 하자. 그리고 남들이 우리 관계를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니 앞으로는 석빙고 돌담벼락 틈새를 우체통으로 삼도록 하자. 방학 숙제는 도와주고 싶은데 도울 방법이 있을까?”
다음날 아침에 신작로 청소를 하며 걔가 우리 집 앞을 지나기를 기다렸다가 가방 사이에 잽싸게 밀어 넣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개학을 하고, 또 2학년 새 학기가 되어서도 우리의 쪽지편지 잇기는 둘만의 비밀로서 계속되고 있었다. 물론 석빙고 돌담벼락의 조그만 틈새가 우리의 사랑스런 우체통이 되어 준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서로 간에 주고받는 내용은 학교 선생님 얘기, 수업 중에 있었던 얘기, 친구들 우정과 질투 얘기, 그리고 멀리서 서로가 말은 못 하고 바라만 봐야 하는 애달픈 심정 같은 것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러던 5월 초순 어느 날 하굣길이었던가. 연필한테서 온 쪽지편지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이어지는 쪽지편지 마흔일곱 번째. 연필이가 지우개에게. 너 혹시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읽어봤어? 혹시 안 읽어 봤으면 한 번 읽어 봐. 우리 같은 나이의 젊은 청소년의 사랑 이야기인데 비극으로 끊이나. 너무 슬퍼. 나는 그걸 다 읽고 나서 밤새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다 통통 부었거든. 꼭 읽어 보고 느낌을 이야기해 줄 거지?”
나는 쪽지편지를 읽기가 무섭게 석빙고 우체통을 뒤로 하고 집으로 향하는 자전거 페달을 세차게 밟았다. 얼마나 슬픈 내용이기에 꼭 읽어보고 느낌을 이야기해 달라고 할까. 집에 도착하자마자 둘째형이 쓰던 방으로 마치 폭격기 공습이라도 하듯 몸을 던져 들어갔다. 그리고 서재를 살폈다. 방 한가득 차 있는 한국문학, 세계문학 전집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 중 삼성출판사 세계문학 전집 네 번째 책에 셰익스피어 책이 꽂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책 안에는 햄릿, 오셀로, 리어왕 및 맥베스 등 셰익스피어의 4대비극과 함께 ‘로미오와 줄리엣’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길로 바로 책을 집어 들고는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글자는 왜 그리도 작은지 깨알 같은 글씨가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빽빽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또 문장도 가로쓰기가 아닌 세로쓰기로 되어 있어서 정말 읽기가 곤란했다. 하지만 한 번 읽기 시작하자 희곡으로 된 문장이라 그런지 너무나 잘들 넘어갔다. 제1장 제1막을 지나고 제2장으로 접어들더니 제3장, 제4장으로 넘어갈수록 숨이 막힐 정도로 내 애간장을 태우고 있었다. 책장을 넘기는 여린 내 마음에 자꾸 우리집안과 역동 양 씨 집안이 겹쳐져서 심장이 너무나 펄떡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제5막에 와서는 결국 두 젊디젊은 연인이 뜻하던 사랑을 이루지 못 하고 죽고 말았다.
‘아, 두 원수 집안의 자식들이 이렇게 힘들게 사랑을 하다가 결국에는 죽고 마는구나. 그럼, 우린 어떻게 되는 거야? 연필이도 우리 집안과 자기네 집안의 관계에 대해서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뜻인가? 그래서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했던 것인가? 그래서 느낌을 꼭 이야기해 달라고 했단 말인가?’
나는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쪽지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쪽지편지 마흔여덟 번째. 지우개가 연필에게. 네가 말한 대로 다 읽었어. 내 가슴이 얼마나 뛰는지 이루 말할 수가 없어. 지금 너무 억울한 생각이 들고 있거든. 비록 마지막에는 로미오와 줄리엣 두 집안이 화해를 하긴 했지만, 나는 두 집안 어른들을 용서할 수가 없단다. 그런데 하나 물어보자. 혹시 너 우리집안과 너희 집안 간의 관계 알고 있었니? 꼭 대답해 줘.”
이때 누나가 화들짝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 쪽지편지를 홱 하고 낚아채더니 순식간에 읽고 말았다. 누나는 정상적으로 학교를 다니면 올해 안동여고 1학년이지만, 우리 집에서 담뱃가게를 지킬 사람이 없어 입학만 해 놓고 1년간 휴학을 한 상태였다. 부모님 두 분은 안동댐이 완성되어 수몰이 되기까지 마지막 농사에 매달려야 한다고 하며 가게를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연필이가 누구야? 그리고 뭐, 로미오와 줄리엣? 용서 못 해? 우리집안과 너희 집안 간의 관계? 아니, 이게 그러고 보니 양 씨네와 사귀고 있잖아!?”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는 도리어 큰소리를 치고는 쪽지편지를 다시 빼앗아 방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그날 저녁은 누나한테 들켰다는 생각에다 연필이의 대답이 궁금해서 또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밤을 새다시피 한 나는 아침에 일어나 신작로를 쓸며 연필이가 등교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걔가 나타나야 할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 보이질 않았다. 그리고 내가 등교해야 할 시간이 지나서까지도 역시 나타나질 않았다. 잘못하다간 내가 학교에 지각할 지경이 되었다.
할 수 없이 나는 서둘러 마흔여덟 번째 쪽지편지를 챙기고는 학교로 줄달음을 쳤다. 그리고 우리 반으로 갈 생각은 않고 연필이 있는 4반 교실부터 기웃거렸다. 아침조회 차 들르시던 훤칠하게 키가 크고 멋쟁이이신 4반 담임 여자선생님이 두리번거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말을 걸어왔다.
“야, 지우개 반장! 아침부터 무슨 일이고? 여학생 반에 다 나타나다니?”
나는 부지불식간에 맞닥뜨린 일이라 어물거리며 인사를 올렸다.
“아, 예, 그, 저······. 혹시 양필희 반장 등교했나 싶어서요.”
“양필희 반장은 왜 찾아? 어제 갑자기 서울로 전학가야 된다면서 오빠하고 같이 찾아와서는 인사 다 끝냈는데. 그래서 오늘부터 학교 안 나올 거야.”
“뭐라고요? 서울로 전학을요?”
나는 잘못 들었는가 싶어 언성을 높이며 되묻고 있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가 버리는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최근 우리 반도 그렇고 옆 반도 그렇고, 전 학교가 어수선한 것은 사실이었다. 한 주일이 지날 때마다 수몰을 피해 서울로, 대구로, 그리고 안동시내로 전학을 가는 바람에 한두 명씩의 빈자리가 계속 생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럴수록 남아 있는 학생들은 불안하기만 하고 공부도 되질 않았다. 어차피 이번 여름 방학까지는 나를 포함한 모두가 전학을 가기는 가야 했다.
나는 그길로 바로 우리 교실로 들어가지도 않고 자전거 보관소로 내달렸다. 그리고는 정신없이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는 누나가 가게를 지키고 있다가 무슨 일인가 싶어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아무 것도 아니야. 잠시 볼일이 있어서.”
나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누나가 쓰던 서랍장을 마구 뒤졌다. 누나가 그간 애지중지하며 사용하던 손거울에 눈독을 들여왔던 것이다. 이 손거울은 누나가 안동여고 합격 기념선물로 친구들한테서 받은 것이었다. 손거울 가장자리에 좁쌀만 한 은색구슬이 촘촘히 박혀 있는 아주 귀한 것이었다. 그래서 누나는 이 손거울을 정말로 아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누나가 갑자기 불벼락 같은 소리를 내다질렀다.
“너 뭐 뒤지는 거야! 이게 내 거울을? 뭐 하려고 그래? 당장 이리 안 줘?”
나는 거울을 손에 넣자마자 볼펜 속 스프링 튕기듯이 밖을 향해 튀어 나가며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자전거는 다시 연필이 집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가고 있었다. 누나가 뒤에서 더욱 큰 톤으로 소리를 질렀다.
“욱아, 너 죽을래? 그 거울 양필희 주려고 그러지? 당장 안 돌아오면 맞아 죽을 줄 알아!”
내겐 누나의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도 않았다. 죽는 문제는 나중의 문제고 지금 당장 연필을 만나야 했기 때문이다.
아, 그런데 강을 건너려면 우리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나룻배를 타야 한다. 그러면 시간이 너무 걸린다. 나는 우리 집에서 가까우면서도 강폭이 가장 좁은 곳에서 그냥 건너기로 했다. 바지를 대충 걷어 올렸다. 자전거는 어깨에 올렸다. 물살이 다소 세고 너무 허둥대는 바람에 강 중간에서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교복이 다 젖었다. 하지만 그러한 것은 아랑곳할 일도 아니었다. 교복 주머니 속의 손거울만 온전히 있으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자전거를 몰아 멀리 우리 마을 뒷산에서만 내려다보던 바로 그 역동서당 솟을대문 앞에 이르렀다. 저쪽 안마당에서 밖으로 지게를 지고 나오던 덩치 큰 머슴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아저씨, 혹시 양필희 학생 집에 있어요?”
나의 당돌한 질문에 눈살을 찌푸리더니 의외로 친절한 말투로 대답을 해 주었다.
“아, 필희 아씨? 필희 아씨는 방금 서울 간다고 나갔어. 안동에서 택시 하는 오빠가 데리러 왔거든. 아마 지금 강 건너는 나룻배 타려고 배나들에 있을 거야.”
“아, 그래요? 고맙습니다.”
나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허겁지겁 배나들로 줄달음쳤다. 저 멀리 강물 위에 나룻배 한 척이 떠 있는 것이 보였다. 저 배가 이쪽으로 오는 배였으면 좋겠다고 기도를 하면서 자전거에 속도를 붙였다.
아, 그런데 강폭이 2백여 미터나 되는 배나들에 당도하고 보니 그 배는 이미 저 쪽 강 언덕에 도착을 다 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강 위쪽 신작로에는 택시 한 대가 깜박이를 넣고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급한 마음에 소리를 질렀다.
“야, 양필희! 연필이! 가는 거야? 그냥 가는 거야? 아무 인사도 없이 가는 거야?”
내 목소리가 들렸는지 뱃머리에 앉아 있던 연필이가 일어서더니 손짓을 하며 무슨 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뭐라고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내 쪽에서 한 말이나 저쪽에서 한 말 모두 우리 마을 뒷산에 부딪혀 산란되더니 넓은 강폭의 수면위로 스르르 사라지고만 있었다.
나는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야, 연필! 로미오와 줄리엣, 나 다 읽었어. 우리 집안과 너희 집안의 관계 알고 있었어? 대답해 보란 말이야!”
역시 상대방은 뭐라고 하는 것 같기는 한데 이해 못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저 강 저쪽의 애달프고도 슬퍼 보이는 손만이 한들거릴 뿐이었다.
너무나 허탈했다.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 아무렇게나 내팽겨진 자전거와 강물에 흠뻑 젖은 교복이 자신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는 듯했다. 너무나 슬펐다. 너무나 비통했다. 애절한 슬픔이 목젖을 통해 분출되기 시작했다. 눈물이 마구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지면으로 떨어지는 낙하산의 날개 접히듯이 온몸이 바닥에 털썩 내려앉고 말았다. 서서히 목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눈동자는 풀어지고 얼은 빠진 채로 강 저쪽만 멍하니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왜 급하게 그렇게 가는 거야? 이어지는 쪽지편지는 그럼 어떻게 되고······. 이 거울이라도 가지고 갈 것이지······. ”
택시는 신작로를 타고 희뿌연 먼지를 뿌리며 한 치도 머뭇거려 주지도 않고 내 시야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연필도, 아니 줄리엣도 그렇게 떠나고 말았다.
새 주인을 찾지 못 한 가련한 손거울과 쪽지편지도 같이 울었는지 흠뻑 젖어 있었다.(끝)
첫댓글 이 소설은 2012년도 예안초등학교 총동창회 회지(수필집)에 실린 내용입니다. 히히.
황순원의 단편소설 "소나기" 속편같은 내용 재미있게 읽었네
다래마을 이야기는 역사가 있고, 사연이 있고, 가슴뭉클한 정감이 있지
또 다른 베ㅡ스트를 기대하네
앞으로 다래 얘기 많이 올리겠습니다. 히히.
다래 마을엔 문인들만 태어나는 곳 같군요. 아마도 월천 할배님의 학맥을 잇게하려는 공덕인가 봅니다.
잘 읽었구요. 박수를 보냅니다
부끄럽사옵니다. 제 얘기를 적어 놓아서리... 그런데 어릴 적 있었던 추억이라... 양해 바랍니다. 히히.
지고지순한 사랑애기가 지욱이 너를 모델로 한것이냐 ?.
아 너무 감동적이네
이글을 읽고 너 초등학교 시절 정자에서 공부할때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계속 질문 던지든 너의 모습이 눈에 선 하구만...부산 덕이.
여름날에 어릴 적 우리의 꿈을 키워 주시던 선생님... 히히.
멋진욱! 쪽지글 읽어 볼려고 로그인 했지롱~원수는 잘 뒤돌아보면 모든것이 은혜라네.[욱이 초,동창임]
황순원 선생님의 "소나기" 같은 애틋한 얘기입니다. TV문학관으로 제작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아름다운 추억이 있는 후배님이 부럽습니다.성장통이 있었기에 아름다운 글이 나오지요.저는 청고개 살던 62회 우두하입니다.참고로 석빙고는 우리들의 화장실이었습니다.그렇게 귀한 문화재를 우리들은 화장실로 사용했습니다.잠시나마 행복했습니다.고마워요~~~~
역동은 우리 가문하고도 악연이 많았습니다.역동서원은 우리 할배(우탁 할배)께서 후학을 위해 안동에서 첫 서원입니다.
역동서원에 있던 할배비석들을 영천 이씨들이 훼손시키고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 해서 아버지께서 약주만 드시면 영천이씨...영천이씨 원수라고 했습니다.그곳에 양씨들이 살았군요.저는 영천이씨로 알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