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같은 6.25한국전쟁 마16:26 롬9:1-3
6.25한국전쟁이 발발한지도 거의 70여년이 가까이 오고 있다. 세월은 흘러 전쟁을 한 사람들은 대부분 이 세상을 떠났고 이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날의 참담함을 모르고 그저 남의 나라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더구나 문재인정부들어 몇개의 사단이 해체되고 휴전선 GP초소가 철거되고 휴전선 둘레길이 개방되면서 마치 통일이 곧 올 것처럼 착각을 하는데 내가 생각하는 한 통일이란 우리 식으로서 통일이 아니라 북한식으로 통일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70년간 이루어놓은 대한민국의 역사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며 그저 아찔한 생각만 든다. 이런 현실앞에 신앙인들은 국가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기도해야 하고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제2의 6.25는 언제고 다시 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6.25전쟁을 터트렸을 때 김일성 나이가 38세인데 그의 손자 김정은의 나이가 현재 36세이니 뭔가 일이 벌어질 같기도 하다. 나이야 비슷하더라도 더욱 확실한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지도자의 거짓말과 안보불감증이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으며 국민들은 통일이라는 말에 또 한번 속고 있다. 그 때도 전쟁이 일어나면 점심은 해주 저녁은 평양에서 할 것처럼 공공연히 떠들었는데 전쟁난지 삼일만에 서울이 북한에 점령당함으로서 세계전쟁사중 유례없는 전쟁사를 기록하였는데 이나라는 핵무기도 없고 미사일도 별로고 땅굴을 부인하는 상황에서 다시 6.25전쟁이 터진다면 그때의 상황이 다시 재현되지 않을까 두려움이 밀려온다.
문재인정부의 통일은 우리 자유대한민국식대로 통일이 아닌데도 국민들은 안보불감증에 통일이라는 환상에 우리 선혈들이 피흘려 세운 이 나라가 쓰러져가는 것도 걱정하지 않는 것 같다. 나라를 잃고 나서 아무리 후회를 해봐도 다 소용없는 일이다. 과연 한국교회는 입다물고 있을 것인가? 교회가 국가의 위기에 기도하고 국민들을 깨우쳐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인데도 위기가 닥치기 까지는 안보불감증에 입다물고 있는 것 같다. 만약 지금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면 과거와는 비교 되지 않을 정도로 훨씬 더 무자비하고 더 혹독한 피해가 오리라고 생각한다. 전쟁에 대한 경각심을 알리고자 다시 한번 과거 그 시절로 되돌아 가 보자.
1. 전쟁이 일어난 배경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과 소련이 새로운 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념대결과 패권다툼이 벌어졌는데 그 현장이 바로 한국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임박한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흑해 연안 소련의 휴양도시 얄타에서 연합군(영국, 미국, 소련)의 수뇌부가 모여 2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논의한 회담인데 사실은 루스벨트와 스탈린의 담판 회담이었다. 1945년 2월 시점에서 영국은 더이상 초강대국이 아니었고, 미국과 소련의 흥정에 따라 거의 모든 것이 확립되었기 때문에 얄타 회담은 초강대국이었던 대영제국 몰락의 마지막 방점을 찍은 사건이었던 것이다. 이 회담결과로 한반도가 38선을 경계로 미소 양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는 계기를 마련한 회담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1945년 8월15일 우리나라는 일본 식민지로부터 해방을 맞이하였지만 기쁨도 잠시였고 얄타회담에 의해 남한은 1948년 8월 15일에 북한은 1948년 9월 9일에 정부가 수립 되어 남과 북은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었고 1950년 결국 전쟁이 터졌다.
직접적 원인은 김일성이 가진 공산주의에 의한 적화야욕 이었고 또한 그 빌미를 제공한 것은 우리 남한정부와 미국이다. 일제에서 해방된 후 이승만 정권은 좌익과 우익세력의 불안한 정세가 지속되는 중에 이승만 정권에 대한 군부의 반란과 민중들의 저항이 한층 치열했으며, 이 진압된 반란군들이 산악지대로 들어가 유격전을 펼치는 등 극심한 정치적 불안의 형국이었다. 이와는 달리 북한은 통치체제를 빠르게 안정시키고, 남한 해방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6·25전쟁 도발 석 달 전인 1950년 3월 말 김일성은 부수상이자 외무상을 겸하고 있던 박헌영과 함께 모스크바로 가서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게 남침 계획을 제시하면서 전쟁을 위해 군수물자를 지원받기 위해 다음과 같은 확신을 주었다고 한다.
“공화국 남반부 인민들은 나를 신뢰하고 우리 무장력에 기대하고 있다. 남조선 해방을 위한 공격에 소련 측의 지시와 허가가 필요하다”고 통보한 터였다. “사흘이면 전쟁이 결판날 것”이라며 간청하는 김일성을 박헌영이 거들어 나섰다. “전쟁이 시작되면 남조선에 있는 20여만 명의 남로당원들이 대규모 폭동을 일으켜 우리를 도울 것”이란 얘기였다.
이 말은 이미 1946년 11월 23, 24일 박헌영 계열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남조선노동당 즉 남노당이 남한에서 실제로 행동으로 옮겼다. 총선전인 9월 4일 발표한 남로당은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무상몰수·무상분배의 토지개혁, 주요산업의 국유화를 강령으로 내세우면서 '9월 총파업'과 '10월대구폭동사건'을 주도해 나갔다. 실제로 남조선노동당 지시로 1946년 9월 총파업 기간에 대구지역의 좌익세력들은 노동자와 일반시민들의 쌀획득투쟁을 중심으로 대중시위를 전개했다.
전쟁나기 까지 정치는 좌·우 이념대결로 국론 분열되었고 사회는 극도로 혼란스러웠으며 국방은 무방비 상태였다. 미국 또한 1949년 미군을 철수시켰고 곧이어 한국과 대만을 미국의 방어선에서 제외시킨 세칭 [에치슨 라인]을 선포함으로서 미국이 한국에 대한 적극적 방어의사가 없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는 결정적 빌미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해방 후 1950년 6월 25일 전쟁 날 때 까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불안하였는가를 다음 사건들을 통해 알 수 있다.
(1) 제주 4.3사건
정부가 수립되기 직전인 1948년 4월에는 제주도에서 이른바 4·3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1947년 3·1절 기념 제주도대회에 시가행진을 구경하던 군중들에게 경찰이 총을 발사함으로써 민간인 6명이 숨지는 발포사건은 민심을 더욱 악화시킨 것을 이용해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적인 반경찰 활동을 전개했고,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참여한 대규모 민·관 총파업을 유도했다. 대규모 파업 주모자 검거작전을 벌여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되면서 제주사회는 금방 폭발할 것 같은 위기상황으로 변해갔다. 이런 민심을 대변하듯이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총성과 함께 한라산 중허리의 봉화가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의 신호탄이 올랐다. 350명의 무장대는 이날 새벽 12개의 경찰지서와 시청 등 우익단체 요인들의 집을 습격했다. 무장대는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 등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5월 10일,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제주도가 유일하게 5·10 선거를 거부한 지역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귀순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사면정책을 발표한다. 이때 많은 주민들이 하산했고,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리에 치러졌다. 1949년 6월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가 사살됨으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되면서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4·3사건은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리게 된다. 결론적으로 제주4.3사건을 일으킨 남로당 제주도당이 4.3을 지령하고 남로당전남도당과 남로당중앙당이 지원한 사건이다. 그리고 무장반격전에 직접 참가하거나 적극 동조한 세력은 3,000여 명이고 희생자수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대략 20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2) 여순반란사건
1948년 정부수립 직후인 10월에는 전남 여수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좌익계 장병들이 지역민 일부의 지지를 받아 봉기한 사건으로 이들은 갓 출범한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정면으로 부정하면서 1948년 10월 19일 밤 여수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의 좌익계 장병들이 주동한 사건이다. 이들은 제주도출동을 거부하고서 무장폭동을 일으켜 전남 동부지역을 순식간에 장악하였다. 그후 이들은 지리산과 백운산 등 험준한 산악지대를 근거지로 삼아 한반도 남부지역의 이른바 빨치산투쟁을 선도하였다.
이럼 일련의 사건에 이어서 민족의 최대 비극으로 알려진 6.25전쟁이 일어났는데 이는 1948.4·3제주사건을 시작으로 1948.10.19여순사건, 그리고 1950. 6·25전쟁은 징검다리와 같은 연결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3) 정치적, 경제적 극심한 불안
1949년의 경우 통화량 팽창으로 물가가 2배로 뛰면서 경제적 상황이 불안한 가운데 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 제1대 국회의원 선거가 최초로 치러졌다. 국회의원 임기는 2년 이었지만 이때 헌법을 제정하였기에 제헌국회의원이라고 한다. 제1대 총선으로 뽑힌 의원은 200명이 간접적으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8월15일 대한민국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했다.
제2대 국회의원선거는 50년 5월 30일에 치러졌는데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선거였다고 하는데 국회의원 210명중 무소속이 126명이고 이승만 지지세력은 총 30여 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이런 상황에서 국회 개원 1주일 만에 6.25한국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승만정권은 이런 취약한 지지기반과 심각한 경제위기를 만나면서 실제로 전쟁발발 1년 전부터 38선에서는 남북간의 소규모 무력충돌이 계속 발생하고 있었다. 미국은 한반도를 태평양 지역의 방위선에서 제외한다는 이른바 <에치슨 라인(Acheson Line)>을 발표하는가 하는 등 한반도정책의 불확실성을 드러냈다.
2. 6.25 한국전쟁 발발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오전 7시. 국방부 정훈국은 국영 중앙방송국을 접수하고 임시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새벽 북한 공산군은 38선 전역에서 전면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안심하십시오. 우리 국군이 건재합니다라고 하면서 임시뉴스로 남침 사실을 발표했다. 전쟁의 발발하였다는 뉴스임에도 민심은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전쟁 발발 이튿날도 대대적인 피란 행렬은 없었고 예정대로 서울운동장에서는 야구경기가 진행되었다. 전쟁일어나기 1949년 내내 38선 인근에서 남북한의 충돌이 계속됐기 때문에 그날의 남침도 그 연장선으로 여겼을 뿐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3일만에 6월28일 수도 서울을 인민군에게 점령당하고 그해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는 3개월 동안은 사상초유의 공산치하에서 일상생활을 경험한 시간이었다.
(1) 전쟁 초기 3일 (6월25-27일)
6월 25일 일요일 오후, 을지로 6가 라디오 가게 앞은 뉴스를 들으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이튿날 26일에는 호외"괴뢰군의 38전선에 불법남침."가 두 번 돌았고 대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흘째인 27일 새벽 라디오에서 신성모 국무총리 서리가 수도를 수원으로 옮긴다는 내용의 특별방송을 했으나 민심이 불안해지자 천도 소식은 취소됐고, 오전 10시 국방부는 국군이 의정부를 탈환하고 반격에 나섰다는 특별발표를 보도했으나 이는 사실과 달랐다.
당시 북한군은 이미 서울 미아리고개에 접근해 있었다. 사흘째에는 자꾸만 가까워져 오는 포탄 소리의 현실과 보도는 달랐으므로 불안한 분위기가 도시에 팽배했다. 서울 주요 신문들은 27일까지는 급박한 전시 상황을 보도하고 호외도 발행했지만 28일 북한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면서 신문 발행은 중단됐다.
1) 3일만에 서울이 점령당하다. (6월 28일)
전쟁 발발된지 삼일만에 수도 서울이 적에게 점령당했다는 것은 전쟁 역사상 있을 수 없는 일이 실제로 발생했다. 이것은 나쁜면에서 보더라도 기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서울을 점령한 6월 28일부터 방송국부터 접수되었고 오후 9시 북한 혁명가 '김일성 장군의 노래'와 김일성의 서울 해방 축하문이 방송됐다. 평양중앙방송국 프로그램도 중계됐다. 이어서 북한 정부의 기관지 '조선인민보'와 북한 조선로동당 기관지 해방일보 등이 창간했고 평양에서 발행하는 로동신문, 조선인민군도 서울에서 배포됐다. 신문은 각 동과 직장에서 학교에서 동원행사에서 배포되어 교양 강좌 교재로 사용됐다고 했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던 당시 서울에는 약 3만대의 라디오 수신기가 있었다. 라디오가 전쟁 초기 서울 주민들이 가진 가장 중요한 접촉 수단이었다. 사람들은 라디오를 듣다가 발각되면 공산당원에 끌려가 다시 돌아오지 못했고, 단파수신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총살당한 학생들도 있었지만 몰래 들은 라디오에서 얻은 전황 소식은 입에서 입으로 일파만파 퍼졌다.
(2) 6.25전쟁 상황
6.25한국전쟁은 북한의 공산군이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탱크로 기습하여 38선을 쳐부수고 남으로 진격해서 1950년 6월 28일에 발발한지 불과 사흘 만에 서울은 점령당하고 전쟁발생한지 40일만인 7월말에는 북한은 낙동강을 제외한 전 지역을 손아귀에 넣었다. 김일성은 적화통일을 눈앞에 두었는데 미군과 우리 국군은 낙동강 방어전투에서 승리하고 인천상륙작전과 그 여세로 9.28서울수복을 한 기적같은 전쟁이었다. 서울이 수복한 후에는 계속되는 반격으로 우리는 압록강을 접수하면 통일을 눈앞에 두었지만 110만명의 엄청난 중공군이 개입되어 후퇴하고 말았다. 이렇게 일어난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을 서명함으로써 지금까지 휴전한 상태로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1)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적에게 점령되는 기적
북한군은 치밀한 사전 계획에 의거 /총병력 20만명 /탱크 242대 /해군함정 약30척 /대포 2천500문,/ 120밀리 포 56문, /82밀리 포 1천 503문의 강력한 무력으로 남침을 감행했는데 북한군은 장단반도, 문산, 동두천, 춘천 그리고 강릉의 5개 방향으로 38선을 일거에 돌파하여 남으로 내려왔다. 2개 군단으로 구성된 20만의 북한군 선두에는 잘 훈련되고 준비도 완벽하게 마친 7개 사단과 더불어 제105전차여단 예하의 전차부대와 이들 바로 뒤에는 후속 진군할 6개 사단(서에서 동으로 제7,10,13,9,15,8사단)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와 맞서는 우리 국군은 8개 사단(수도경비사령부 포함) 그리고 1개 독립연대로 구성된 총10만이었는데, 이중 4개 사단과 1개연대가 38선 일대를 경계하고 있었고 나머지 사단들은 후방에서 공비 토벌 등의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이러한 전력차이 중에서도 가장 위협을 주었던 것은 242대의 소련제 T-34전차였다. 소련이 북한에게 공급한 T-34는 85밀리미터 포를 장착하여 화력이 강화된 최신형인데 이를 막기 위해 국군이 보유했던 장비는 전무했다. 이런 막강한 북한군에 의해 의정부를 지키던 제7사단은 허무하게 개전 하루 만에 무너지고 서울의 관문인 의정부가 북한군에 점령당하였다. 그런데 북한군은 무슨 이유인지 의정부에서 이틀을 지체하고 개전 3일째인 28일날 서울에 입성하였다. 이는 정말 미스터리한 일로 갈팡질팡하는 군에 다소 후퇴할 시간여유를 주었다. 개전 3일 만인 6월 28일 오전 11시 30분 서울 시내전역이 북한군 수중에 들어가는 치욕을 맛보게 되었다. 전쟁역사상 3일 만에 수도가 적에게 점령당하였다는 것은 기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말이 전쟁이지 북한군의 전력앞에는 우리나라 군은 싸울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로 미 지상군과 유엔군 일부가 참전했지만 전세는 쉽게 만회되지 않았고 북한군에 여전히 밀리는 형국이었다. 정말 1945년 10월 24일 50개국이 모여서 UN이 창립되어 처음으로 유엔군을 한국으로 파견하는 것이 처음이었으리라. 마치 우리 한국을 살리기 위해 UN이 창립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런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국군과 유엔군은 전력의 열세로 전쟁 40일후에는 낙동강 일대를 제외하고는 전 영토를 내주고 말았다.
3. 6.25전쟁의 경과
1950년 6월 25일 부터 1953년 7월 27일 까지 3년 1개월간 지속된 6.25전쟁의 과정은 크게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1) 제 1단계 북한의 승세 기간
북한 인민군이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전쟁 40일후에는 낙동강 일대를 제외하고는 전 영토를 내주고 말았다. 북한 인민군은 3개월동안 점령지역에서 토지개혁 등의 개혁조치를 단행했다. 미국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열어 국제 연합군이 한국전쟁 참전을 결의하므로써 전쟁은 국제전이 되었다.
(2) 제 2단계 인천상륙작전
미군을 주로 한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 (1950년 9월 15일)해, 13일 만에 서울을 탈환 (9월 28일)수복하고 38도선을 넘어 평양을 점령(10월 13일), 한국군 일부가 압록강 근처 초산까지 진격 (10월 26일)을 한 시기입니다.
(3) 제 3단계 중공군의 개입
유엔군의 북진에 위협을 느낀 중공군의 개입(10월 25일)으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한국군이 오산 부근까지 후퇴했다가 다시 38도선을 넘어서 (1951년 3월 24일) 철원, 금화 알대까지 진출(6월 11일)하고, 중공군 개입으로 전쟁이 새 국면에 접어들자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만주를 폭격하고 중화민국의 장개석 군을 동원해 중국 남부지방에 제 2전선을 설정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맥아더 장군의 전쟁확대론은 세계대전으로의 확대로 이어질 수 있어서 미국정부에 의해 저지되었고 맥아더 장군은 해임(4월 11일) 되었다.
(4) 제 4단계 휴전협정 성립기
휴전회담 진행과 휴전협정의 성립기로 소련 유엔대표의 휴전제의를 미국이 받아들여 개성에서 본회의가 열렸다(7월 10일). 주요문제는 비무장지대 설치를 위한 군사경계선 설정, 휴전 감시기관 구성, 포로교환 등이었다.
이승만은 휴전반대운동을 전개하는 것에 미국은 한미상호 안전보장조약 체결·
경제원조· 한국군 증강 등을 조건으로 이승만을 무마시키켜서 53년 7월 27일 유엔군과 북한 인민군 사이에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마침내 우리 민족의 염원과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는 가운데 전쟁은 휴전상태에 들어갔다.
4. 6.25전쟁의 결과
6·25전쟁사료에 따르면 3년1개월 동안의 전쟁 피해 상황은 단군이래 일어난 전쟁중 수많은 희생을 낸 전쟁이었다. 들어서 알듯이 20만명 미망인과 10만명 고아 그리고 1000만 이산가족이 발생했고 미군 사망자만도 5만 4246명(지금까지 이라크전 미군 사망자가 약4천 여명), /한국군을 포함한 유엔군 사망자가 모두 62만 8833명, /부상자는 미군만 10만 380명, /유엔군 전체는 106만 4453명, /미군 실종자만 8177명, /유엔군 실종자는 47만 267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남북한 군인사상자가 모두 약 300만 명, 민간인 사상자도 모두 약 300만 명. 합계 약600만 명이 죽고 다친 전쟁이 6.25전쟁이다. 그리고 수많은 가옥이 파괴 되었으니 전쟁댓가는 5000년 역사상 대재앙임에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남북의 적대감이 극도로 심화되어 민족분단 체제가 더욱 굳어졌으며 남한의 경우 반공 사상이 전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동서냉전을 격화시키는 고비가 되었고, 미·일 안전보장체제를 재촉 일본의 재군비강화와 전쟁경기를 통한 고도성장의 기초를 마련해 주었다.
(1) 6.25 한국전쟁 미스터리
1950년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서울시청에 김일성-스탈린 초상화를 내걸고 인공기를 게양했다. 방송국부터 접수했다. 오후 9시 북한 혁명가 '김일성 장군의 노래'와 김일성의 서울 해방 축하문이 방송됐다.
6.25한국전쟁의 최대 미스테리는 막강한 북한군에 서울의 관문인 의정부를 지키던 제7사단은 개전 하루 만에 무너지고 점령당하였는데 북한군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의정부에서 이틀을 지체하고 개전 3일 만인 6월 28일 오전 11시 30분 서울 시내전역이 북한군 수중에 들어가는 치욕을 맛보게 되었는데 6월 28일 서울에 입성한 인민군이 왜 3일 동안이나 진격을 멈추었는가? 라는 의문점이 참으로 미스터리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는 정말 미스터리한 일로 갈팡질팡하는 군에 다소 후퇴할 시간여유를 주었던 것은 분명하다.
당시 인민군 6사단 13연대 정치장교로 6.25전쟁에 참전했던 최태환씨의 주장은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국회 간선으로 당선이 됐으니 서울을 점령한 후에 가장 주력한 것이 바로 제2대 국회의원을 찾아내어 야성이 강한 2대 국회의원을 조종하면 이승만 대통령을 퇴진 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실제로 인민군은 서울을 점령한 후에 곧 제2대 국회의원 소집을 공고 하였지만 이곳에 찾아오는 의원이 거의 없었다. 결국 인민군은 3일동안 국회의원 색출 작업을 하였지만 개원에 필요한 과반수 이상의 의원을 찾을 수 없어 남한을 통합할 수 없다고 보고 7월2일 결국 군사력으로 전 한반도를 석권한다며 한강 이남으로 공격을 결정한 것이라고 했다. 이는 3일 만에 전쟁을 끝낼려고 작전을 짰다는 것이지만 결과는 3년이라는 기나긴 전쟁을 보낸 것이다. 결국 인민군은 3일을 제외한 전 기간은 예상에도 없던 전쟁을 치룬 것 이라는 것이다.
또한 미군이 6.25전쟁의 발발 소식을 듣고 한국으로 달려온 부대가 최초로 전투를 벌인 날은 7월 5일 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민군이 서울에 입성했을 당시 지체하지 않고 계속해서 국군을 밀어붙였다면 7월 5일쯤엔 인민군이 낙동강 부근까지 충분히 도달하였을 것이며, 사실상 한반도 전역을 석권했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었다면 미국은 지상군 파병을 포기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인민군이 의정부에서 이틀을 지체한 것이나 서울을 점령한 이후 3일간 지체한 것이 6.25전쟁의 최대의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2) 6·25 당시 안보불감증이 되풀이 되다
벌써 6·25 전쟁 발발 69주년이고 이제 남북의 체제 경쟁은 끝났다고 할 정도로 모든 상황이 바뀌었지만 ‘안보’에 관한 한 그 본질은 변함이 없다. 특히 김일성의 남침 야욕을 부채질한 이면에 심각한 안보불감증도 있었다는 교훈은 여전히 유효하다. 당시 북한이 전쟁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음에도 정부와 군 그리고 정치권은 “아침은 해주, 점심은 평양 저녁은 신의주” 등 큰소리만 치며 제대로 대비하지 않았다.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6월 남침’보고서를 올렸지만 되레 6월 24일 비상경계령을 해제했다. 그해 5·30총선에서 이승만 지지세력은 총 210석 중 30여 석을 차지하는 데 그쳐서 여소야대가 형성되고 개헌 논의가 불붙는 등 정국도 어수선했다. 남로당의 준동이 이어졌지만 국민도 ‘설마’하고 있었다.
6.25한국전쟁이 난지 거의 70년이 지났지만 상황은 그 때나 지금이나 나아진게 없다. 북한은 국제 제재에도 불구하고 핵과 미사일 개발을 계속하고 있다. 북한의 미사일은 남한 전역이 사정권안에 들어있다. 북한의 핵무기 목표는 괌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잊어선 안된다. 북한의 핵미사일 기술에 중대 진전이 이뤄졌지만 한국은 전 과정을 감지할 능력도 없다. 이런 북한의 비대칭 전력은 이미 레드라인을 넘었다. 그런데 정치권은 물론 국민도 안보불감증이 여전하다.
지난달 5월4일과 9일 북한이 두 차례 발사한 단거리탄도미사일(SRBM)은 한국 내 목표를 핵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는 분석 결과를 제프리 루이스 미국 미들버리 국제학연구소 비확산연구센터 소장이 6월5일(현지시간) 발표했다. 루이스 소장은 지난달 4일 북한 원산에서 있었던 첫 번째 발사 때의 위성 영상을 분석한 뒤 해당 발사체가 단거리탄도미사일이라고 밝힌 핵ㆍ미사일 전문가다.
그럼에도 문재인대통령은 단도미사일이라고 하니 그저 분노가 치밀어올 뿐이다.
루이스 소장은 시뮬레이션을 돌려본 결과 이 미사일은 500㎏ 무게의 탄두를 싣고 최대 450㎞까지 날아갈 수 있다고 분석했는데 이는 "평택의 미군 기지를 포함한 남한 대부분 목표지점에 재래식 또는 핵 탑재물을 보내기에 충분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6·25전쟁이 재래식 무기로 싸운 마지막 전쟁이라 한다면 현재 남·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화력을 6·25 당시와 비교한다면 무기는 27배, 위력은 45배, 파괴력은 381배에 달할 것으로 전망되고, 특히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 화학무기 등 비대칭 살상무기를 포함시키면 수천 배의 파괴력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국민의 안보불감증은 그 때보다 더하다는 것이다.
이제 또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면 우리민족 생존자체를 파멸시킬 것이다. 지금같이 국민 대다수가 안보불감증에 빠져 6·25전쟁을 망각하고 전쟁 대비에 소홀이하면 평화도 민족의 미래도 없다는 역사적 교훈을 다시한번 상기해야 할 때이다. 역사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며, 역사를 망각하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했다. 6·25전쟁이 비록 수치스러운 역사라 해도 우리가 그 의미를 되새기고 소중히 간직해야 할 이유는 또다시 못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며 이는 또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의무요 책무이기 때문이다. 안보불감증은 망국참사를 낳을 수 밖에 없다! 국론분열과 안보불감증은 김일성집단이 집어 삼키기에 최고 좋은 먹잇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6.25전쟁이 발생한지 거의 한달이 되어가는데 승세는 북한에 유리하게 가고 있었다. 1950년 7월20일 김일성은 북한군에게 8월15일까지는 반드시 부산을 점령하라고 독촉을 하였다. 북한군은 수안보에 전선사령부를 두고, 미군 정면에 제1군단, 국군 정면에 제2군단을 배치하여 이른바 ‘8월 공세(1950.8.4.∼8.25)’와 ‘9월 공세(1950.9.1∼9.15)’의 두 번에 걸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해왔다.
그리하여 대구방어전투·영천(永川)전투·동해안지구전투 등 많은 공방전이 전개되어 지역에 따라서는 방어선을 돌파당할 뻔한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 처음에 있었던 하동전투와 낙동강 전투 중 가장 치열했던 다부동전투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3) 기억해야 할 전투
1) 하동전투
하동은 서울을 함락하고 남진하면서 섬진강을 건넌 북한군이 진주를 거쳐 한국전쟁 최후의 방어선인 낙동강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하동전투는 한국전쟁 발발 한 달 만인 1950년 7월 25일부터 31일까지 하동군 적량면 동산리 속칭 계동마을 인근에서 국군과 미군이 호남을 거쳐 하동을 공격하는 북한군에 맞서 싸운 전투다. 영남지구 편성 관구 사령부가 미 제24사단의 일부 병력과 협동하여, 호남의 남안선을 거쳐 하동을 우회 침공하는 북한군 제6사단을 요격하는 전투였는데 진주를 잃기까지의 7일간의 지연전을 일컫는다.
하동 전투에서 전 육군 참모총장 채병덕 소장이 전사하고 미군 313명, 국군 100여 명이 순국했지만 이 전투로 인민군 낙동강 진출이 저지되었으며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어 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 다부동전투
6월 25일 기습적인 불법남침을 시작한 공산군은 7월 말에 이르러 낙동강을 도하하여 대구와 부산을 잇는 아군의 대동맥을 끊으려고 압박을 가하여 왔다. 이에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북한군의 공격에 대한 최후의 방어선으로서, 서쪽은 낙동강을 이용한 방어선과 그리고 낙동강 상류를 포함해 동북부의 산악지대를 잇는 천연장애물을 이용한 방어선을 구축하여 이를 사수하기로 하였다.
8월 4일 새벽 1시를 기해 형성된 낙동강방어선은 남북 160km, 동서 80km의 타원형을 이루었는데, 낙동강 일대의 방어는 주로 미군이, 동북부 산악지대의 방어는 국군이 담당하였다. 이 방어선을 워커라인이라고도 부른다. 다부동은 대구 북방과 상주와 안동에서 대구로 통하는 도로가 합쳐지고 왜관에까지 이르는 지방도로의 필수적인 요충지였다. 다부동이 북괴의 수중에 들어갈 경우 다부동에서 25km떨어진 대구가 북한군 공격의 사정권 내에 들어가게 되므로 다부동 방어선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이었다.
북한군도 이를 아는지라 다부동일대에 증강된 3개 사단과 함께 2만2천여명의 병력, 전차 20여대 각종 화기 700여기로 중무장하여 공격을 감행해 왔다.
이곳을 지키는 국군은 북괴군에 비해 전력이 매우 열악했다. 병력은 학도병의 보충을 받았으며 화기는 북한군의 5분의1 수준 밖에 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다부동이 북괴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은 불보듯 뻔한 것이었던 것이다.
그동안 북한군과 대결하였지만 워낙 강력한 북한군에게 계속 밀림으로써 전투다운 전투 제대로 하지 못한채 국군과 유엔군은 8월 초부터 마산-왜관-영덕에 이르는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하여 방어태세에 임하였고 북한군은 마지막 남은 총력을 기울여 낙동강 도하 공격을 개시하여 8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공세 작전을 감행하였다. 한반도의 10%밖에 남지 않은 경상도 일부지역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의 무차별 공세에 힘겹게 맞서면서 북한군의 공격을 결사적으로 저지하였다. 이에 미8군사령관 겸 유엔지상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북한군의 공격에 대해 “더 이상의 후퇴는 없다”며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하라고 지시하였는데 이는 낙동강 전선을 죽음으로 지키라는 명령이었다. 낙동강 전선 이곳저곳에서 다부동전투, 영천전투 등 국가의 운명을 결정지을 만한 결전이 벌어졌다. 낙동강 전투중 가장 치열했던 다부동 전투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을 따라 영덕-청송-의성-낙동리-왜관-남지-마산을
잇는 방어선을 구축하는데 바로 낙동강 1차 방어선이었는데 전력이 부족한 국군으로는 이 방어선을 지킬 수 없었다.
그래서 8월 11일에는 왜관-다부동-신령-기계-포항을 잇는 80km 가량의 선으로 전선을 축소하여 방어했다. 이 2차방어선을 지키지 못하면 더 이상 반격의 희망이 없다 여긴 국군과 유엔군은 배수진의 각오로 싸웠다.
이미 초기에 국군과 유엔군이 밀렸으므로 8월 13일 북괴의 3사단 병력이 328고지를 공격하고 북괴 15사단이 국군 제 12연대보다 앞서 유학산에 진출하였다. 북괴 제 13사단은 도로를 따라 신주막의 국군 제 11연대를 정면으로 접근하면서 아군이 미처 점령하지 못한 674고지를 먼저 점령하였다.
국군은 이미 빼았긴 328고지를 뺏고 뺏기는 피의 쟁탈전을 펼쳤고, 국군 제 12연대와 11연대는 유학산 837고지와 674고지의 탈환을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
특히 8월 15일 북한군 제 15사단에게 점령된 수암산 탈환을 위해 연대장까지 직접 전투에 참여하여 공격작전을 전개 하였지만 무려 349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낼 만큼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유학산 일대의 싸움은 매우 처절하였으며 말 그대로 돌산 하나를 두고 서로 수류탄을 던져대는 근접 전투가 지속되어 양측은 하루동안에만 3천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런 전투가 지속되면서 대구 정면이 위태롭다고 판단한 미 제8군 사령부는 적의 주력부대를 제압하기 위하여 폭격기 편대의 공격을 퍼부었다. 무려 총 960톤의 폭탄을 쏟아부었으며 북한군의 병력과 장비에 매우 큰 피해를 주었다. 이러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적의 대구 공격은 다부동 축선으로 집중되어 8월 16일 다부동 바로 서쪽을 공격함으로써 방어선이 돌파될 큰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미 27연대장 마이켈리스 대령은 공격작전중에 순식간에 퇴로가 차단될 위험에 빠졌다. 그는 다부동 전투 사령관이었던 워커 장군에게 "한국군 부대는 전의를 잃어 후퇴하게 되었다. 좌측의 한국군 부대가 무단으로 퇴각을 하여 배후에 약 1,000여명의 북한군이 침입했다. 퇴로가 차단될 위기에 있어 이대로의 방어는 불가능하다며 퇴각을 해야할 것 같다"라고 보고하였다.
이에 국군 1사단장은 백선엽 장군은 위기상황임을 인식하고 후퇴하는 장병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장병 여러분, 여기서 물러나면 대구가 점령되고, 대구가 점령되면 부산이 점령되고, 그러면 우리는 전부 죽던지 아니면 포로가 된다. 부산에서 죽을 바에는 여기에서 죽는 것이 낫다. 지금부터 사단장인 내가 선두에 서서 저 산을 돌격할 것이다. 귀관들은 내 뒤를 따르라! 내가 선두에서 물러나면 나를 쏘아라!
그러나 귀관들이 후퇴하면 나는 가차없이 귀관들을 쏠 것이다. 가자!!'라고 하며 백선엽 장군이 앞장을 서자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들이 뒤를 따라 나서 국군은 다시 488고지를 점령하고 방심해 있던 북한군은 국군의 공격을 받고 전투 시작 30분 만에 다시 퇴각하였다.
마침내 8월 23일 새벽2시 야간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유학산 837고지까지 점령하였다. 이렇듯 국군 1사단은 장교 부사관 병사들이 투혼을 발휘하여 방어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아직도 백선엽 장군이 후대에도 많이 거론이 되는 이유이다. 다부동전투는 매우 치열했던 탓에 사장자의 수도 매일 600~700명이 사망하였다. 김일성은 8월15일까지 부산을 함락시키려던 당초 계획을 수정, 8월15일을 ‘대구해방의 날’로 정하고 총공세를 걸었다.
한국전쟁 당시 국군에게 자신감과 힘을 실어주고, '포기하지 않고 싸우면 지켜낼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 다부동전투는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손꼽히는 전투였다. 다부동전투에서 만약 방어선이 뚫렸다면 사실상 대구와 부산이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면 전쟁은 종료되었을 것이며 오늘날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으로 봐야 한다. 만약 단 한 차례만 방어선이 뚫려도 대한민국의 국운 자체가 위태로운 지경이었던 것이 다부동전투였는데 낙동강전투의 총사령관인 워커장군의 한국사랑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과연 존재하였을까? 오늘을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워커장군에 대한 존경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다부동 전투는 부산교두보 방어전의 클라이맥스였고, 8월15일은 위기의 절정이었다. 어떻든 유학산 등을 중심으로 한 다부동의 처절한 고지 쟁탈전이 밤낮없이 벌어졌다. 최대 결전은 최초의 전차 對 전차의 격투로 전개되었다.
18일 밤부터 북한군은 맹렬한 공격준비포격에 이어 T34 전차를 선두로 해서 공격 하였고 이에 대해 미 제27연대는 전차포와 무반동포로써 적 전차를 사격하고, 국군은 파상공격을 되풀이하는 적 보병부대에 대해 양측의 山地(산지)로부터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이러한 전투가 일곱 밤이나 계속되었다.
또 제1선에 전개하고 있던 M26퍼싱 전차는 약 200m의 거리로부터 전차포를 발사해 적 전차를 파괴하고, 3.5인치 로켓포는 적 자주포를 격파했다. 이리하여 개전 이래 최초의 전차 對(대) 전차의 포격전이 전개되어 미군은 적 전차 7대와 자주포 3대, 차량 수대를 파괴했다. 미군들은 좁은 협곡에서 불덩이가 수없이 교차되는 모습에 빗대 이 전투를 ‘볼링장의 격투’라고 명명했다. 다부동전투에서 국군의 사상자 1만여 명, 적군 사상자 1만 7500여 명을 기록했다.
낙동강전투에서 특히 다부동전투에서 우리국군과 유엔군이 북한의 집요한 공격을 막았기 때문에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이 이어지는 것이다. 이 모든 성과는 낙동강전투의 사령관 해리스 워커장군의 수훈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5. 미8군 사령관 월튼 해리스 워커(Walton Harris Walker) 이야기
6.25 전쟁이 발발하자 미8군 사령관 월튼 해리스 워커(Walton Harris Walker 1889년 12월 3일~1950년 12월 23일)는 한국으로 향했다. 그는 2차대전때 유럽에서 명성을 떨치던 장군이었는데 한국전쟁이 발발하니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이 땅에 미8군 사령관으로 사명 받고 왔다. 한국전쟁 시작 후 8월초에는 이미 전 국토의 90%, 경상남북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북한의 수중에 들어 갔던처라 미국 정부는 정말 낙동강 전투가 뚫리면 유엔군의 전면 철수를 주장했다고 한 사실은 비문 내용에 나온다.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병들이 매일 엄청난 숫자가 죽어가다니 미의회와 정부에서 조차 전면 철수가 거론되는 시점이었으니. 당시 파죽지세로 북한군에 거의 모든 지역을 점령당한 상황에 비추어볼 때 한국전에서의 승산이 없어 보였다.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도 New Korea Plan 이런 일련의 상황들을 모를 리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 그것은 무조건 안된다고 버텨보겠다고 말한 사람이 워커 중장이다. 미8군 사령관인 워커 중장은 총사령관인 맥아더에게 남한 사수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맥아더는 일본에 있었고 워커 중장은 한국에 있었다. 최전선에서 직접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는 입장이었던 워커 중장은 한국 장병들을 만나서 이런 말을 전한다.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끝까지 한국을 지키겠다." 그리고 미국 장병들에게 아래와 같은 명령을 내린다. "우리는 절대 물러설 수 없다. 물러설 곳도 없고 물러서서도 안 된다. 낙동강 방어선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후퇴란 있을 수 없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한국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 하나님께서 워커장군에게 한국을 지키겠다는 믿음을 갖도록 역사하셨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사람이 미군 장병들에게 내질렀던 전설적인 명언은 "Stand or die." 사수 혹은 죽음뿐. 이 명령이 낙동강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1) 월튼 워커의 무조건 한국사랑
갑작스런 사고로 순직했기에 자서전 등의 사료가 없기 때문에 사실 워커 중장의 무자비한 한국 사랑에 대한 이유는 알 길이 없다. 어쨌든, 워커 중장은 인상적이고 무자비한 명령을 했다는 이유로 미국 의회에서 미국 국민이 알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사람들을 지켜주기 위해 미국 장병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게 마땅한가? Stand or die."사수 혹은 죽음뿐. 조국도 아닌 전선에서 많은 희생을 내면서 이러는 건 많은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미국 정부도 워커 중장에게 사령관 집어 치우고 집에 가라고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버텨보겠다고 발벗고 나섰다. Stand or die(버티지 못하면 죽어라)란 발언 덕에 본국 의회에서 논란을 일으켜서 한참을 욕 먹어가면서도 한국을 꼭 지켜야 한다고 전쟁을 반쯤 포기한 미국 정부와 사령관을 설득하면서 낙동강 전투를 지휘한 분이 바로 미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이다. 워커 중장은 한국군과 미군 병사들이 모두 미숙한 훈련병들 위주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낙동강 방어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이후에 맥아더의 낙동강 전선 시찰이 이루어진다. 이 시찰 덕분에 맥아더 사령관의 인천 상륙작전 구상이 가능해졌고, 워커 중장은 사령관을 도와서 인천 상륙작전까지 성공시키는 공을 세웠다. 성공 확률 1/5000이라는 전쟁영웅의 업적인 인천 상륙작전도 워커 중장이 낙동강을 지켜내지 않았다면 시작도 해보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결론적으로 말해 맥아더의 선택은 탁월했지만 그 선택이 가능케 만들어 주고 절망적인 병력부족 상황을 오기로 견뎌낸 것은 워커의 공이다. 사실 인천 상륙 전에 방어선이 뚫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상황이 나빴기에 인천 상륙으로 인한 대전환의 공을 따지자면 7 대 3 정도로 워커의 공적이 맥아더의 공적보다 크다 하겠다.
(2) 안타까운 사고
해리스 워커장군은 1950년 12월 23일,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아들인 샘 워커 대위의 은성무공훈장 수상을 축하해주러 가는 도중, 맞은 편에서 한국군 사병이 운전하던 탄약 운반 삼륜차 트럭과 충돌로 즉사하였다.
2차대전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잠시 쉬지도 못하고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망해가는 우리나라를 구원하고 한국에 온지 6개월만에 그리 빨리 가다니 우리는 너무 안타깝고 슬프지만 하나님의 섭리라고 볼 수 밖에 없다.
(마10: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의 허락없이는 그것들 중의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찮은 참새 한마리도 하나님 허락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 인생들이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은 분명히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으리라고 믿는다. 워커 장군이야 말로 너무나 큰 일을 하였다. 다 망하여가는 우리 한국을 살려놓았던 분이다. 무너져 떠내려 가는 낙동강전선을 회복시켜서 오늘날 우리들이 대한민국이라는 이름하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정말로 워커장군이야 말로 그게에 주어진 일을 100% 다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영광을 받으셨다. 이제 나라를 사랑하는 한국인으로서는 그를 정말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쉐라톤 워커힐 본관 정문 산자락에 세워진 비문
"오늘 우리가 장군을 특별히 추모하는 것은 한국전쟁 초기 유엔군의 전면 철수를 주장했던 미국 조야의 지배적인 분위기 속에서 유독 장군만이 홀로 한반도 고수를 주장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공산화를 방지하여 우리의 오늘을 가능케 한 그 공덕을 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6. 애국에 몸바친 신앙인들
성경에는 나라와 민족을 살리기 위해 애쓴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1) 죽으면 죽으리이다 각오한 에스더
에스더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사 나라에서 종살이 하던 시절에 바사나라의 왕후 이었다. 당시 하만이라는 총리가 유난히 이스라엘사람들을 미워하던 중에 이스라엘 사람들 한꺼번에 몰살시킬 계획을 세웠는데 이런 음모를 알게 된 궁궐문지기였던 모르드개는 사촌 여 동생인 에스더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면서 지금 네가 왕후가 된 것은 바로 지금 이 때를 위함이 아니냐고? 유대 민족이 몰살하게 되는 때에 하나님이 너를 통해 우리 민족을 구하기 위함이 아니냐 만약 네가 잠자코 있으면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겠지만 너 혼자만 생명을 유지하려고 생각하지 말라고 경고를 합니다. 모르드개가 이렇게 말했을때 에스더는 말하기를 나도 우리 민족을 살리기 위해 삼일 금식기도를 하겠으니 수산성에 있는 유대인들도 나와 같이 합심하여 금식하면서 이 문제를 풀어보자고 말했다. 높은 신분인 왕비 에스더는 민족을 위해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에4: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에스더의 그런 의로운 희생이 있었기에 이스라엘은 하만의 흉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에8:17). 왕비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의 기도가 유대민족을 구한 것 처럼 때로는 국가가 어려울 때는 극도의 자기 희생이 요구된다.
6.25전쟁때 우리의 선열들은 자기 목숨을 기꺼히 희생하면서 이 나라를 파멸의 위기에서 구했다. 이런 의로운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 민족이 오늘날 세계 속에서 자리잡아 가고 있는 것이다.
(2) 민족을 위한 기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생명의 길임을 확신하면서 그토록 복음을 대적하고 그리스도를 거역하는 유대민족이 예수님께 돌아올 수만 있다면 자기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좋다고 하였습니다(롬9:3). 우리는 흔히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라고 하지만 그가 얼마나 자기 민족을 사랑하였는가를 이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성도의 진정한 애국심은 우리 민족을 주님께 돌리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는 것, 우리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노력하려는 자세가 참된 애국심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롬9:1-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롬10: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이것이 얼마나 절실한 바울의 기도 제목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자기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데 그것은 내 자신이 버림을 받고서라도 내 민족이 구원받는 것을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민족에게 영적 구원의 부흥이 없이는 민족의 내일을 결코 낙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6.25는 비극이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민족의 새로운 희망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1907년 평양 대 부흥 이후 한국 교회가 본격적으로 부흥을 경험하게 된 것이 6.25직후였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말할 수 있습니다. 6.25한국전쟁의 기적같은 전쟁이었다고 1950.6.25. 새벽 북한군은 탱크로 중무장하여 38선을 기습남침하여 서울은 3일만에 점령되었고 한달만에 낙동강동쪽을 제외한 전 국토가 북한손아귀에 들어 갔었는데 절대로 불리했던 낙동강전투에서 승리하였고 뒤이어 인천상류작전과 서울 수복으로 이어지는 한국전쟁은 하나님의 도움심으로 정말 기적같은 전쟁이었다.
그토록 위태했던 낙동강 전선은 기도의 힘으로 지켜졌습니다. 300명의 목사님이 부산 대신초등학교에 모여서 일주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시고 쾌청한 날씨를 허락하심으로 B29가 낙동강을 3일 동안 폭격하여 인민군들이 낙동강 전선을 넘는 것을 막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 후에는 맥아더 장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북한군의 허리를 끊을 수 있었고, 빼앗긴 서울을 3개월 만인 1950년 9월 28일에 서울을 탈환했습니다. 우리 민족은 6.25의 불행 속에서 다시 일어섰고 교회는 부흥되었고 민족은 재건되었습니다. 할렐루야!
(3) 자유와 평화는 공짜가 아니다
6.25전쟁이 발발한 지 69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최근 북한은 핵무기와 미사일 의 무기로 만약 한반도에서 핵전쟁이 일어난다면 우리 민족이 당하게 될 환란은 가히 상상하기 어려운 처지가 될 것이다. 북한의 핵보유는 우리 민족 전체의 운명을 위협하는 일이다. 전쟁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6.25 전쟁이 발발한지 69주년이 된 오늘 자유와 번영이 주어진 것은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고귀한 희생의 대가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공산주의의 잔학상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오늘이 있기까지는 수많은 순국 선열들의 희생과 살신성인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생명을 바치면서 조국을 위기에서 건져낸 그분들에 먼저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과연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에스더와 같이 느헤미야와 같이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믿음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 또 지금까지 국가가 위기를 겪었을 때마다 목숨을 바치면서 싸우다가 죽은 선혈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이나라가 존재하고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분들과 그리고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마음에 생각하면서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라고 나 같은 죄인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말입니까?
이 말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생활이 목숨을 바칠 만큼 가장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정말 말씀대로 살려면 교회를 위해 죽도록 충성해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내 생명을 살려주신 은혜가 감사하다면 목숨까지는 바치지 못하더라도 시간이나 물질쯤은 아니면 몸으로 땀 흘려 충성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어요? 우리가 일생동안 살아갈 때 내 목숨을 내 놓을 수 있을 만큼 값진 일이 무엇이겠냐고 묻는다면 저는 오직 예수님을 믿는 신앙생활뿐이라고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살고자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는 말씀대로 사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죽는 길뿐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말입니다. 진정으로 가정 사회 국가 교회를 사랑한다면 내가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죽어야 합니다. 바울처럼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주님을 본받는 사람의 생활은 내가 바르게 죽어야 합니다. 생각이나 말로 그치지 말고 실제로 내가 죽어야 합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심각한 영적침체에 빠져있다. 무엇보다 교회가 영적 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 교회나오는 사람들조차도 현대문화에 영합함으로 생명력을 잃어 버렸다. 그래서 지금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신령한 영적능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6.25전쟁이 남긴 인류사적 교훈이 많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핵심이 있다면 그것은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자유는 좋은 것이지만 평화와 번영은 결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고귀한 희생의 대가가 지불되어야만 온다는 뜻입니다.
남북한이 정상회담을 하고, ‘평화’를 이야기한다. 일견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70여년동안 대적 관계가 하루아침에 풀릴 수는 없다. 분란의 원인인 북한의 핵과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는 그대로 있다. 아니, 지금도 평화통일을 지향한다면서도 지하 무기공장에서 성능 개량과 추가 생산을 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이러한 남북대치상태 속에서 언제든지 목숨을 필요로 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사실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무엇을 얻고자할 때 값을 계산해서 돈으로 사기도 하고 또 비슷한 것끼리는 맞바꾸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목숨이란 돈으로 계산할 수도 없고 무엇과도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마16:26하-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단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도 없고 돈 주고 살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귀중한 목숨을 조국의 안위를 위해 받쳤던 것을 기념하는 그날을 우리는 현충일이라고 하면서 현충일은 나라를 위해 단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쳤던 젊은이들을 잊지 않기 위해 기념하는 날입니다. 우리 앞서간 선열들이 목숨을 바쳤기 때문에 이 나라가 있고 우리가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현충일을 신앙과 비교하면 더 의미가 새로워 집니다. 나는 누굽니까?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라고 나 같은 죄인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말입니까?.
이 말은 에수님을 믿는 신앙생활이 목숨을 바칠 만큼 가장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정말 말씀대로 살려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죽도록 충성해야 되지 않습니까? 내 생명을 살려주신 은혜가 감사하다면 목숨까지는 바치지 못하더라도 시간이나 물질쯤은 아니면 몸으로 땀 흘려 충성을 해야 당연하지 않겠어요? 하나님께서는 이시대 우리의 목숨이나 우리 삶의 전체를 요구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주어진 환경속에서 최선을 다하여 주 예수님을 섬기며 살아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분명히 남북 대치 상황은 계속될 것이고 북핵 문제로 한반도를 둘러싼 정황은 늘 긴장의 연속인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는 것이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