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환자(癩患者)의 대부 오방(五放) 최흥종(崔興琮) >
민족혼(民族魂) 말살(抹殺) 위해
내선일체(內鮮一體) 내세웠네.
수탈(收奪)에 편리하게
동화(同化)정책 사용했네
황국신민(皇國臣民) 의무라며
언문일치(言文一致) 시행했네
조선말과 글을 금지
민족혼(民族魂)을 억누르고
창씨개명(創氏改名) 주장했네
신사참배(神社參拜) 강요했네
참을 수 없는 울분에
자신을 거세(去勢)한 오방(五放) 선생
방만(放漫)하고 방일(放逸)하고
방종(放縱)하고 방기(放棄)하고
방랑(放浪)하며 낮은 자 섬겼네.
자신의 사망을 신고한 오방(五放) 선생
한 평 남짓 판잣집
수레에 실고서 걸인들과 생활했네
나환자(癩患者)의 대부였네
광주지역 최초 개종자(改宗者), 광주지역 최초 개신교 세례자(洗禮者), 광주지역 최초 개신교 집사(執事), 광주지역 최초 개신교 장로(長老), 북문외교회(광주) 최초 당회장 목사(牧師), 전남노회의 파송 최초 시베리아 선교사(宣敎師), 제중원(광주) 윌슨 원장 조수로 나환자를 치료한 조선인 최초 보조의사, 유산을 기부해 조선 최초 나병원 설립하는데 단초를 제공한 최흥종(崔興琮) 목사의 호는 오방(五放)이다. 1909년 4월, 포사이드 선교사가 나환자를 데리고 와 제중원(광주)에서 나환자를 치료하는 모습을 보고 회심한 최흥종(崔興琮)은 우월순 (Wilson, Robert Manton) 선교사의 조수가 되어 나환자들을 섬기며 구라(救癩)활동을 시작하였다.
1911년에는 광주 봉선동의 땅 1,000평을 광주 선교부에 무상으로 기증해 한국 최초의 나병원(癩病院) 설립(1912년)에 참여하였다. 평향신학교(1914년)에 입학했으나 제때 졸업하지 못하고 기미년(己未年 1919년)을 맞은 최흥종은 남대문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1년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다. 신학교를 졸업(1920년)한 최흥종은 목사 안수를 받고 전남노회 시베리아 선교사로 파송되었으나 소련정부에 의해 추방, 제주도 모슬포교회에서 사역하였다. 광주 나병원(癩病院)이 지역주민들의 항의로 여수반도 끝자락 소록도에 있는 애양병원(愛養病院)으로 옮겨갔다. 애양병원(愛養病院)’에서 치료 받은 나환자들이 생활고로 말할 수 없이 많은 고난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최흥종 목사는 “이후로는 사회 및 정치 사업에 일절 관심을 두지 않고 금일로 나환자들과 함께 하겠다.”며 모슬포교회를 사임하였다.
나환자들의 치료와 재활을 위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고자 윤치호, 조병옥, 송진우, 김병로, 안재홍 등과 「나환자 근절협회」를 만들어(1932년) 경성(京城)에서 모금활동을 벌였으나 성과가 좋지 않았다. 최흥정 목사는 나환자 수용 시설 확보를 위해 ‘나환자 행진’이라는 비상의 수단을 강구, 움직이지 않는 총독부를 압박하였다. 나환자 150명을 이끌고 광주를 출발한 최흥정 목사는 조선총독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열하루 만에 경성(京城)에 도착하였을 때 나환자 시위대는 400명에 이르렀다. 그는 나환자들과 함께 총독부 앞마당까지 들어가 우가끼(宇垣) 조선총독을 면담하였다 ‘전국 나환자 집단수용시설’과 ‘치료시설’을 요청한 최목사는 우가끼(宇垣) 총독에게 소록도 재활시설 확장에 대한 확답을 받았다.
'내(內)'라 함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전, 그들의 해외식민지를 '외지(外地)'라 부른 데 대한 일본 본토를 가리키는 '내지(內地)'의 첫 자이다. '선(鮮)'이란 조선을 가리키는 말로, 일본과 조선이 일체라는 뜻이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 때 일만일체(日滿一體)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1937년 일본이 중국 침공을 개시하자, 당시의 조선총독 미나미지로(南次郞)는 대륙 침공에 조선을 동원하기 위한 강압정책으로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기치를 들고 나섰다. 황국신민(皇國臣民)이라며 일본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구호를 집회 때마다 제창하고,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강요했다. 지원병제도를 이용한 강제징용, 강제출병, 조선어교육 폐지 및 일본어 상용(常用), 창씨개명(創氏改名) 그리고 어용학자들을 동원하여 내선동조동근론(內鮮同祖同根論)을 주장, 일본인의 조상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의 신위를 가정마다 모시게 하는 한민족말살정책을 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양대(兩大) 일간지를 비롯한 언론탄압 끝에 조선어로 된 출판물은 전면 강제 폐간시켰다.
나환자 시위대를 이끌고 경성(京城)에 가서 총독과 담판을 하고 있는 사이에, 광주 양동 주민들의 항의로 양동 장터에 있던 빈민촌 판잣집들이 철거되어 2백여 명의 걸인들이 순식간에 거리로 쫓겨났다. 최흥종은 경양 방죽가에 임시 거처를 만들어 걸인들을 수용하고 북문밖교회 교인들과 YMCA 회원들을 동원하여 구휼하였다. 구제 소식이 퍼져나가자 전남 각지에서 걸인들이 광주로 몰려들어 광주 사람들의 비난이 거세졌다. 노회와 광주 교인들 중에서 그의 ‘빈민 목회’를 비난하는 자들이 늘어났다. 가족들도 더 이상 그에게 가장의 역할을 기대하지 않았다. 신사참배로 몸살을 앓던 제도권 교회들이 최흥종 목사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성서조선」에 ❮교역자의 반성과 평신도의 각성을 재촉함❯를 기고해 목회자들의 타락을 비난하며 평신도들의 각성을 촉구한 최흥종 목사. 당시 천형(天刑)이라 불렀던 한센병 환우들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정관 시술’을 강요하자, 스스로 거세 수술을 받은 후(1935년) 자신의 아호(雅號)를 오방(五放)으로 정했다. 방만(放漫), 방일(放逸), 방종(放縱), 방기(放棄), 방랑(放浪) 등 오방(五放)은 '다섯 가지를 놓아버린다'는 뜻이다. 그가 놓아버린 5가지는 집안의 일, 사회적 체면, 경제적 이익, 정치적 활동, 종파적 활동을 의미했다. 그는 "지상의 집착을 놓아버리고 오직 하나님 일을 하며 자유롭게 살겠다"고 선언했다. 1937년 어수선한 시국 속에서 자신의 사망통지서를 지인들에게 발송한 후(1937년) 죽은 사람으로 살았다. 자칭 ‘유산각’이라 부르는 조선의 가마 모양과 같은 한 평 크기의 판잣집을 수레처럼 만들어 끌고 다니며 걸인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나환자, 걸인, 결핵환자들만 옆에 두고서 모든 것을 버린 나환자의 아버지 최흥종은 1945년 8월 15일 해방되는 날까지 광주 무등산 자락에 위치한 증심사(證心寺)곁의 작은 주택에서 의제(毅齊) 허백련(許百鍊)화백과 같이 생활했다. 최원순(동아일보 편집국장)의 별장이던 이 집을 최원순이 최흥종목사에게 선물했다. 최흥종과 허백련은 년배가 서로 비슷하여 막역한 사이였다.
일본이 패망하자, 1945년 8월 17일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회에서 위원장으로 좌우익 모두로부터 추대되었다. 1945년 9월 6일 건국준비 중앙위원회는 '인민위원회'로 명칭을 변경한, 좌익의 손아래 들어가자, 9월 20일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회도 우익은 건국 준비위원회에서 배제되고, 좌익만의 인민위원회로 바뀌게 된다. 최흥종목사는 1945년 9월 20일 건준위원장자리를 박준규(朴準圭, 광양의 노농운동가)에게 물려주고, 한센병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하였다. 1948년 최흥종목사는 전남 나주(羅州)에 '음성 나환자'(한센병을 앓았다가 치유된 사람)들을 위한 시설인 호혜원(互惠院)을 설립하였다. 1955년에는 최흥종목사는 의제(毅齊) 허백련(許百鍊) 화백과 함께 '청년들에게 농업전문교육을 시키는' '삼애(三愛/하나님, 이웃, 자연 사랑)학원'을 설립하였다. 최흥종목사가 교장을 맡고, 허백련 화백이 부교장을 맡은 이 학교는 그 후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로 명칭이 바뀌었다.
1958년에는 6.25이후 갑자기 많이 늘어난 폐결핵환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시설을 무등산 자락 원효사 부근에 '송등원(松燈院)'과 무등원(無等院)교회를 설립하여 이를 운영하였다. 송등원 운영에는 최흥종 목사의 인격에 감복한 미국인 선교사 Cardington의 재정적 도움이 큰 힘이 되었다 많이 받았다. 1966년 2월 전국 교회에 보내는 경고문을 보낸 후 절필(絶筆)하였다. 삶 속에서 예수의 삶의 방식을 따르지 않으며, 명목만의 기독교인들이 많은 교회의 현실을 개탄한 이 경고문으로 전국 기독교계가 발칵 뒤집혔다. 경고문을 보낸 후 1966년 2월 10일부터 34일간 금식(禁食)을 하자 광주 YMCA등 광주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강제로 최흥종 목사를 무등산에서 광주 시내의 아들 집으로 데려왔다. 1966년 5월 14일 87세 일기로 소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