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 순교성지 - 박해시대 쉼 없이 몰아친 서해의 찬 바람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274-10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성지1로 13
지역 방어 임무가 천주교 박해로
속칭 해뫼라 일컬어지기도 한 해미현(海美縣)은 1407년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縣)을 합쳐서 설치한 데서 따온 이름이다. 이 지역은 고려시대 때부터 충남 서해안 연안 해로를 지키고 관리하기 위한 중요한 요충지였다. 왜구의 침입이 빈번했던 조선초에는 충청병영과 충청수영이 모두 이곳에 있었다. 조선 중기 이후 충청병영은 청주로, 충청수영은 보령으로 이전하였다.
그 이후 해미현은 축소, 격하되었지만 지역 방위의 중요성은 그대로 지니고 있어서 해미수령은 종6품 현감이었지만 무관을 임명하여 해미 영장토포사(營將討捕使)를 겸하게 하여 주변 12고을의 군사적인 업무를 총괄하였다. 따라서 해미 현감은 1,5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내포 일원의 해안 수비를 명목으로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해미 관아는 지역 방위의 중요한 임무를 띠고 있었으나, 조선 말기 천주교 박해시대에는 내포지역의 천주교도를 색출하여 처형하는 순교지로서 악명이 높았다. 1790년 신해박해로부터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의 병인박해의 여파가 사라진 1880년대에 이르는 100여 년의 기간 동안 여러 차례의 잔혹한 박해는 한 번도 해미 진영을 비켜가지 않았다. 이는 전국의 순교지 중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경우였다.
잔인한 형벌의 백화점
해미진영에서 이루어진 천주교도의 박해가 그만큼 악명이 높은 것은 그 행형 수법이 너무나 잔혹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해미진영은 관찰사가 있었던 공주 감영, 홍주 진영과 더불어 박해 중 충청도에서 순교자를 가장 많이 배출했던 관아였다.
이 중에서도 특히 홍주와 해미는 공주 감영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탓에 한국 행형사(行刑史)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남형(濫刑)이 자행되었다. 공식적인 교수형, 참수형은 물론 몰매질, 석형(石刑), 백지사형(白紙死刑), 동사형(凍死刑) 등으로 죽였다. 심지어 사람의 머리를 쇠도리깨로 치거나 큰 돌 위에 메어쳐서 죽이는 자리개질이 있었고, 사람의 머리를 누인 뒤에 큰 나무 나무둥치로 내리쳐 한꺼번에 여러 사람을 죽인 대들보 형틀도 사용했다. 혹시라도 숨이 끊어지지 않아 꿈틀거리는 몸뚱이를 발견하면 횃불로 눈을 지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가장 혹독한 것은 해미와 홍주에서 있었던 생매장이었다.1866년 병인년에서 1868년 무진년에 이르는 대박해 시에는 한 명씩 처형하는 데 지친 관헌은, 특히 시체 처리를 간편하게 하기 위해 생매장을 택한 것이다. 해미 진영의 서녘 들판에 수십 명씩 끌고 가 아무 데나 땅을 파고 구덩이에 산 채로 집어넣고 흙과 자갈로 덮어 버리는 참혹한 행위가 수없이 되풀이 됐다.
실제 1935년 4월 1일 해미읍성에서 조금 떨어진 조산리(造山里) 숲 속에서 여러 노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조사가 진행되어 10명 가까운 생매장 치명자의 유해가 발굴되어 생매장이 실제 사실로 증명이 되었다.
이렇게 스러져 간 순교자들은 그 수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누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 길이 없다. 다만 수천 명으로 추정되는 순교자들 중 132명만이 이름과 출신지를 남기고 있으나 그나마도 불확실하고 나머지는 대부분 이름 석 자 하나 남기지 못한 무명 순교자들이다.
성지 조성
1975년 10월 24일 대전교구에서는 생매장터인 진둠벙 부근에 순교탑을 건립하였으며, 1983년 12월에는 생매장지를 확보하여 본격적으로 사적지 조성 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1995년 9월에는, 1935년 서산 상홍리 공소 뒷산에 안장되어 있던 생매장 순교자들의 유해를 공소로부터 다시 해미성지 순교탑 아래로 옮겨 안치하였다.
1985년 4월에 해미 본당이 설립되었고, 이어 해미 순교선열현양회를 발족하였고, 순교성지 확보운동을 전국 신자들에게 홍보하여 꾸준히 모금한 결과 1998년 말에 생매장 순교터 부지 약 7천여 평을 확보하였고, 이어서 1999년 5월부터 3천 명의 회원들로부터 성전 건립 기금을 모아 2000년 8월 성전 기공식을 가졌다. 2003년 6월 17일 마침내 3,000여 명의 무명 순교자들의 숭고한 희생과 신심을 기리기 위해 무명 순교자 기념 성당을 건립하여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셔놓고 있다.
소성당과 대성당은 무명 순교자들의 생매장 구덩이를 상징하는 원형구조로 건립되었고, 실내 장식과 외부 건물 또한 죽음을 통해 영원한 안식에 이른 순교자들을 기념하여 쉼터의 이미지를 갖도록 했다. 성당 뒤편에는 묘지 형태의 유해참배실을 건립하였다.
2008년 충청남도 문화재로 지정 고시된 해미 성지는 2015년까지 지자체와 함께 역사를 간직한 순례지로 개발계획을 수립했다. 이를 위해 우선 순교자들이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장으로 끌려가 순교한 뒤 매장되는 과정을 복원한 십자가의 길 14처를 읍성 곳곳에 세웠다. 이어서 성지 인근의 사유지를 매입해 순례자의 숲, 연못, 청소년 수련관 등을 세우고 성지 주변 해미천도 순차적으로 정비할 계획도 수립했다.
2009년 유해 참배실을 해미순교성지 기념관으로 새롭게 단장해 축복식을 가졌다.
2014년 8월 17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 참가를 위해 해미 성지를 방문하여 아시아 주교들과의 만남을 갖고 해미읍성에서 폐막미사를 집전하였다. 같은 날 프란치스코 교황은 해미 순교성지 기념관 앞에서 전날 광화문 광장에서 복자품에 올린 해미 순교자 3위(인언민 마르티노, 이보현 프란치스코, 김진후 비오) 시복 기념비 제막식도 가졌다.
생매장터인 진둠벙 주위로 십자가의 길 14처와 노천 성당이 조성되었다.
오후 3시가 넘어 해미 성지에 도착. 어제 계획 같았으면 해미 성지를 떠날 시간이다. 순례에 1-2시간 정도는 소요될 것이라 생각하면 오늘도 일찍 돌아가기는 글렀다는 생각이다.
해미 성지의 상징인 대성당 앞에 이르자 해미 순교자 국제성지라는 문이 나타난다.
국제성지라면 좀 생소하게 들린다. 성지를 셋으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교구장이 승인하는 교구 성지
둘째, 주교회의가 승인하는 국가 성지
셋째, 교황청이 승인하는 국제 성지
대전교구의 해미성지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탄생 200주년 희년 개막일인 2020년 11월 29일자로 교황청 승인 국제 성지로 선포되었다. 당시 대전 교구장 유흥식 주교는 특히 사목서한을 통해 “교황청의 이번 발표는 ‘무명 순교자’를 하느님 앞에 가장 큰 이름으로 세우고, 교회의 기억 안에 영원히 살아 숨 쉬는 그들의 삶을 밝혀준다”며 “선교사 없이 신앙을 받아들이고 섬김과 나눔을 실천하는 삶으로 신앙을 증거한 해미성지, 나아가 세계 교회가 주목하는 신앙의 못자리인 내포 교우촌의 삶과 영성을 우리 삶으로 기억하고 되살리며 우리 옆에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만나자”고 당부했다.
현재 국제성지 지정 현황을 보면 역사적 장소로 예루살렘과 로마, 그리고 산티아고가 있고,성모발현지가 루르드 등 20곳이 있다. 또 성인 관련 순례지가 아씨시 등 5곳이 있다.
이로 볼 때 사실 해미성지가 성모 발현지나 특별한 기적이 이루어진 역사적인 장소도 아니면서 국제 성지로 자리매김하기에는 외적으로 부족해 보인다. 단지 이름이나 세례명을 남기고 순교한 132명의 신자 이외에 이곳에는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순교한 천여 명이 넘는 하층 무명 순교자들이 있을 뿐이다. 이들은 가난했지만, 기쁘게 살다가 영광스런 죽음을 맞이하고 묻힌 곳이 해미 성지이다.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비참하게 생매장까지 당했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그 누구보다 빛나는 이름을 받았을 무명 순교자들을 가톨릭교회가 신앙의 모범으로 인정하고, 자랑스럽게 전 세계에 알린 영광스러운 하나의 사건이 해미 국제 성지 선포인 것이다.
성지입구에는 꽃 화단에 안내도가 서 있고 마당 왼쪽에는 생명의 나무가, 오른쪽에는 생명의 책이 있다. 생명의 나무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2014.8.14.~18.)을 기념하는 조형물로 교황 방문기간 동안 프란치스코 교황이 남긴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나무에 새겼다. 기단석은 서산시의 지형을 형상화 시켰으며, 기단석의 띠는 바티칸 방향을 나타내고 있다. 생명의 나무 열매는 교황의 메시지인 사랑, 희망, 소통, 형력, 존중, 평등을 종으로 제작하여 메시지의 울림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그리고 생명의 책은 당시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이곳 해미순교성지에서 아시아 주교님들과의 만남에서 말씀하신 사랑의 메세지를 남기기 위한 조형물로, 작품의 책장 가운데 심겨진 호야나무는 과거 천주교 박해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것을 넘어 미래의 가능성을 담고 있다고 한다
사무실이나 성당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아래층으로 내려가야 한다. 거기는 또 하나의 안내도가 있다. 대체로 이 안내도를 따라 동선을 잡는다. 대성당, 소성당, 기념관 등 실내를 먼저 순례하고 야외 시설을 둘러보기로 순서를 정한다.
1층 사무실과 소성당, 대성당 로비에는 많은 성화, 게시물이 전시되어 있다.
프라하의 아기 예수는 스페인 남부 콰달키비르 지역에 이슬람의 침입으로 허물어져 가는 황폐한 수도원에 요셉이라는 수사가 있었다. 그가 청소를 하는데 아이가 나타나서 성모송 기도를 부탁했다. 그래서 성모송을 바치는데 “태중의 아들 또안 복되시도다”에 이르자 그 아이는 “그가 바로 나다”고 하였다. 그렇게 만난 아기 예수를 그후 수사는 잊지 못해 밀랍으로 인형을 만들었다. 나중 수사가 죽자 수도원에 보관되었다. 이 밀랍 인형이 많은 기적을 보이면서 이곳저곳으로 다니다가 지금은 체코 프라하의 한 성당에 있다. 3살 정도의 아이의 모습이며 밀랍 인형의 크기가 약 60cm이며 값비싼 대관식용 외투를 걸치고 보석왕관을 쓰고 있다.
마르첼리노의 기적에 얽힌 이야기다. 스페인의 한 수도원에 남자 아이 하나가 버려져 수사들이 이 애를 키운다. 아이는 조금 자라자 다른 아이들과 달리 엄마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엄마를 그리워한다. 어느날 2층 다락방에 어떤 아저씨가 십자가에 못이 박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빵과 포도주를 주방에서 몰래 가지고 가서 위로를 한다. 아저씨는 고맙다면서 소원을 하나 말하면 들어주겠다고 한다. 아이는 엄마가 보고싶다고 했다. 그 아저씨는 아이를 품에 안고 잠을 재웠는데 아이는 꿈속에서 엄마를 만난다. 수사들이 이를 보고 기적이라면서 감동한다. 예수님은 다시 십자가로 돌아가고 아이는 엄마를 만나러 하늘나라로 가면서 죽음을 맞이한다. (산체스 시르바의 소설)
대성당
대성당은 생매장 구덩이를 상징하는 원형이며 또한 순교자들이 생매장을 당하시어 천국복락을 누리시게 됨을 나타내기 위해, 편히 쉼의 가장 좋은 장소를 나타내기 위해 2층 고가 형태로 내부 설계를 하였다.
제대 뒷벽은 불에 구운 도자기 조각으로 모자이크를 하여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을 나타내고 있다. 1층 벽에는 유리화가 있고, 2층 벽에도 길다랗게 붉은 색과 푸른 색의 팔마 잎이 유리화로 그려져 있고 순교성화도 있다, 1층과 2층 사이에는 띠와 같은 공간에는 십자가의 길 14처가 둘려져 있다.
1층 좌우의 아랫벽에는 성화가 걸렸는데 모두 성모자상이다. 왼쪽은 바르토멜레오 에스토반 무릴요의 묵주기도의 어머니이고, 오른쪽은 로베르토 페루치의 거리의 성모자이다. 페루치는 지극히 평화스러운 성모님을 그리고 싶어하던 중 한 여인이 아기를 안고 가면서 하늘을 보는 모습으로 보고 이집트로 피난을 가는 성모자의 처지가 떠올라 이 그림을 그렸는데 이 그림은 그후 많은 기적을 일으켰고 독일 쉔수타드 수도원의 주보가 되었다. 지금도 이 성화는 환자가 있는 등 어려운 가정에 많이 모셔진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하나 자비의 예수님 상도 있다.
나올 무렵에 대성당 한쪽에 팔각 전망대에 오르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성지에 들어서서 대성당 옆에 있는 높은 망루에 오르리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안내가 되어 올라보기로 했다.
팔각 전망대
이 탑은 종탑이 아니다. 세상 끝나는 날까지 교회와 함께 하시면서 지켜주고 계시는 주님, 진복팔단을 말씀하신 주님을 상징하는 팔각 모양의 탑으로 성지를 지켜주는 파수대 내지 파수꾼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오르기 위해서는 대성전에서 연결되는 다리(브리지)를 건너야 한다.
브리지를 건너가니 탑 입구에 如主同行(여주동행)이라는 구절이 걸렸다. 주님과 함께 간다는 뜻이다. 비록 높은 곳이라 하더라도 주님과 함께하는데 무슨 두려움이 있으랴?
층층마다 공간을 확보하여 아래와 같은 비슷한 구조의 순교 조각상을 조성했다.
다시 가파른 계단으로 내려와서 브리지를 건너 이번에는 소성당으로 간다.
소성당
소성당은 대성당의 축소판이다. 대성당과 거의 구조를 같이한다. 원형이고 모자이크제대 뒷벽도 같다. 그리고 대성당 2층 벽에 걸린 것과 같은 해미성지 순교화가 여기서는 1층 벽에 걸렸다. 제대에는 좌우로 유해 안치대가 있다. 벽 좌우 문창살에는 순교화가 그려져 있다.
소성당의 벽면은 전통 한옥의 창호인데 그 문살 위에 십자가의 길 14처가 지나간다.
대성당 소성당을 나와서 이제 성당 바로 뒤의 해미성지 기념관으로 간다. 기념관은 외형이 왕릉처럼 생겼다.
해미 순교성지 기념관(유해참배실)
왕릉의 호석 같은 기념관 외부 둘레에도 순교조각상이 새겨져 있다. 내부에는 순교 기록화와 순교 관련 전시물이 설치되어 있으며 특히 유해 참배실은 2009년 새롭게 단장하여 개관하였다. 몇몇 전시물을 소개한다.
▲순교자 유해 이장
1935년 서산 동문동 본당 6대 주임 발오(Barraux, 범 베드로) 신부와 상홍리 본당(회장 백낙선) 신자들은 이곳에서 순교자들의 유해들을 발굴 수습한 뒤 그해 4월1일 대곡리 공소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 4월2일 만장을 앞세운 유해 상여를 해미읍성-음암면 유계리-일곱거리를 거쳐 음암면 상홍리의 가잿골 백씨 문중 묘역의 최상단에 안장하였다. 60년 만인 1995년9월20일 순교자 대축일에 경감룡(요셉)주교 주례로 이곳 여숫골 무명순교자 묘역에 다시 이장하였다.
▲발오 범베드로 신부
발오 신부는 1930년 6월 29일 프랑스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고 1932년 8월 5일 서산 본당 신부로 부임하여 1935년 해미 순교자의 유해를 상홍동 공소로 이장하였으며1937년에는 서산 성당을 신축하였다. 사목 활동에도 열심이었던 바로 신부는 어느 날 봉성체 중에, 장티푸스 환자가 교우가 영하지 못한 성체를 넘기지 못하자 대신 자신이 그 성체를 영하고 결국 감염되어 선종하였다.
▲내포지역과 조선후기 해미현 지도
내포지역을 구체적으로 지정한 지도로, 서쪽으로 태안에서 서산, 당진, 홍성, 예산, 남쪽으로는 보령, 동쪽으로는 아산, 북쪽으로는 평택에 이르는 지역이 내포지역이다.
해미현은 무관 영장이 현감을 대신하여 다스렸으며 서해안 수비를 명목으로 국사범을 처형할 수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100여년 박해기간 내내 천주교를 탄압했다.
▲시복 · 시성 대상 해미 순교자 3분
△인언민 (印彦敏, 마르티노, 1737-1800)
덕산 주래(삽교읍 용동리) 양반가 사람으로 황사영으로부터 천주교를 접하고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1795년 정사박해 때 체포되어 공주와 청주에서 문초를 받고 해미에서 순교하였다.
△김진후(金震厚, 비오, 1738-1814)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로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종한(안드레아)의 부친이다. 이존창으로부터 천주교를 받아들여 수 차례 투옥을 반복하다가 10여년의 감옥 생활 중 순교하였다.
△이보현(李步玄, 프란치스코, 1773-1800) 예산군 덕산 황매실(예산군 고덕면 호읍리) 사람으로 고향 인근 황심(黃沁) 토마스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의 아내는 황심의 누이였다. 주문모 신부를 자신의 집에 모시기도 했으며 정사박해 때 체포되어 해미에서 인언민 순교자와 함께 순교하였다.
▲순교 조각상들
▲이름이 밝혀진 132위 순교자들 - 132명 이외 무명순교자 47명
▲순교자의 모범을 따라서 우리가 신앙의 증거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님 방문 기념)
유해참배실
발굴된 유해가 상홍리 공소 쪽에 모셔져 있다가 다시 본래의 장소인 해미 생매장 터로 모실 때 진토된 유해는 순교탑 앞 무명 순교자묘지에 모시고 아직 완전히 부식되지 않은 치아와 유골은 눈으로 직접 뵙고 참배할 수 있도록 투명한 아크릴로 진공 포장해서 이처럼 따로 모셨다. 여기서도 왕릉의 형태를 본 따 잔디를 입힌 봉분 형태로 지붕을 만들고 그 안에 모셨다. 말하자면 묘지인 셈이다. 참배실 공간 밖은 생매장 순교를 이해 할 수 있는 약간의 그림 등 소품들로 꾸며져 있다.
기념관을 끝으로 성지의 옥내 시설을 참배하고 이제 옥외 시설을 순례할 차례다. 옥외는 전시관 옆 시복기념비, 프란치스코 교황의 시복 축복비, 그리고 다시 입구 쪽으로 가서 성모동산, 이름없는 집, 자리개 돌을 보고 여숫골 표지석 안쪽지역으로 간다.
시복(諡福) 기념비
복자 인언민 마르티노와 복자 이보현 프란치스코, 그리고 복자 김진후 비오의 시복을 비이다. 이들 복자들은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방한하여 시복되었다.
그리고 그 옆에 해미의 첫 순교자 인언민 마르티노의 말씀 “그렇구 말구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천주님께 바치는 거야”가 새져진 돌도 있다.
성모동산
이름 없는 집
순례자들이 말 그대로 무명 순교자를 기억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되새기기 위해 성경 이어쓰기를 하는 곳이다. 목각 편액이 옛날식으로 글자가 우에서 좌로 되어 있어 거꾸로 읽기가 쉽다.
필사 도구가 마련되어 있고 벽에는 爲主致命(주님을 위해 목슴을 바친다)이라는 행서 액자가 벽에 걸렸다. 그리고 황사영의 백서도 걸렸다.
자리개 돌
천주교 박해 신자들을 처형했던 도구이다. 자리개질이란 큰 돌에 곡식 단을 내리쳐 터는 것이다. 원래는 해미읍성 서문 밖 수구 위에 놓인 돌다리였는데 이를 자리개 돌로 사용했던 것이다. 서문 밖 도로 개설로 인하여 2009년 1월8일 이곳 생매장 터인 여숫골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본 것은 대부분 구멍이 하나였는데 이것은 4개이다. 이 역시 한꺼번에 여러 사람은 죽이기 위한 것으로 한 사람씩 죽이기에는 너무나 시간이 부족했던 것이 아닐까? 부근에 비석군이 있다. 모두가 해미 수령의 선정비이다. 자리개 돌과 선정비, 참 아이러니칼하다.
이곳 해미성지를 일명 여숫골이라고 하는데 이는 천주교 박해 이후에 생긴 말이다. 원래 이 일대가 생매장터여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갔다. 그때 천주교 신자들이 죽으면서 부르짓던 “예수 마리아!” 라는 기도 소리를 일반인들이 듣기에는 “여수머리”로 들려서 이후 주민들의 입으로 “여숫골”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다.
진둠벙 - 생매장터
1790년대부터 약 100년간 시산혈하(屍山血河)를 이루던 서문 밖 사형 터는 병인 대박해시(1866년 이후)에는 주거 인접지역인 관계로 대량의 사학죄인의 시체를 처리하기에는 협소한 장소였다.
그래서 1천여 명을 단기간 동안에 처형하기 위해 벌판에서 집행하게 되었는데 죽이는 일과 시체 처리하는 일을 한꺼번에 해치우기 위해서 십여 명씩 생매장을 하였다. 생매장 시키러 가는 길에 큰 개울이 있고 개울을 건너는 외나무다리가 있었다. 다리 밑에는 물길에 패인 둠벙이 있었다. 두 팔을 뒤로 묶이어 끌려오는 사학죄인들을 외나무 다리 위에서 둠벙에 밀어 넣어 버리기도 하였다. 묶인 몸으로 곤두박질 당한 죄인은 둠벙 속에 쳐 박혀 죽었다. 이 둠벙에 죄인들이 떨어져 죽었다 하여 동리 사람들 입에 ‘죄인 둠벙’이라 일컬어지다가 오늘날에는 말이 줄어서 진둠벙이라 불리어진다. 2000년 전에 폭군 진사황에 의해 행해졌던 분서갱유가 19세기에 나타난 것이다.
노천성당 - 대형 십자가과 돌 제대 앞에 수많은 자연석 교우석들이 배치되어 있다.
십자가의 길
해미성지 십자가의 길 각처의 조형물은 재료는 화강석이며 죄수의 목에 채우던 족쇄형 큰 칼의 모형을 본떴다. 큰 칼 구멍에 원형의 돌을 깎아서 끼워 넣고 그 표면에 판화 그림을 조각하였다. 그림의 내용은 순교자들의 죽음의 행진을 묘사하였다. 그리고 해미 성지의 특성을 14처 기도문에 넣었다.
■해미성지만의 독특한 십자가의 길 기도문
제1처: 감옥에서 의연한 순교자
순교자들의 왕이신 예수님!
저희도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을 바라보며 살게 하소서.
제2처: 사형언도를 받는 순교자
순교자들의 왕이신 예수님!
저희도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부활의 영광만을 희망하게 하소서.
제3처: 호야나무에 달린 순교자
순교자들의 왕이신 예수님!
저희도 주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게 하소서.
제4처: 가족의 울음 듣는 순교자
순교자들의 왕이신 예수님!
저희가 세속의 소리보다는 주님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제5처: 사형길 함께 가는 순교자
순교자들의 왕이신 예수님!
저희도 서로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며
사랑의 삶을 살도록 도와주소서.
제6처: 저주를 달게 받는 순교자
순교자들의 왕이신 예수님!
저희도 세상에서 받는 냉대를 극복하고
당신의 사랑만을 전하게 하소서.
제7처: 죽음의 문턱 넘는 순교자
순교자들의 왕이신 예수님!
저희도 세속의 유혹을 이기며
주님 증거에 힘쓰게 하소서.
제8처: 하수구에 내쳐진 순교자
순교자들의 왕이신 예수님!
저희도 신앙 때문에 받는 불이익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게 하소서.
제9처: 자리개질 당하는 순교자
순교자들의 왕이신 예수님!
저희도 세상의 어떠한 고통과 아픔이
오더라도 주님께 항구하게 하소서.
제10처: 생매장 길로 가는 순교자
순교자들의 왕이신 예수님!
저희도 주님께서 주실 영광을 바라면서
현세의 슬픔을 서로 나누며 위로하게 하소서.
제11처: 진둠벙에 내쳐진 순교자
순교자들의 왕이신 예수님!
인간의 잔인성을 용서하시고 늘 이웃에 대한
배려와 관심 속에서 살 수 있게 하소서.
제12처: 산채로 묻히기 전 순교자
순교자들의 왕이신 예수님!
저희도 언제 올지 모르는 죽음의 순간에
초연하게 삶을 마감할 수 있게 하소서.
제13처: 구덩이에 들어간 순교자
순교자들의 왕이신 예수님!
저희가 항상 "예수님, 마리아님"을
찾고 의지하며 살게 하소서.
제14처: 산 채로 묻혀 버린 순교자
순교자들의 왕이신 예수님!
세속에 대한 집착을 모두 버리고 오직 주님 안에
머물며 살다가 영원한 삶을 맞게 하소서.
해미 순교탑 · 무명순교자묘
1935년 서산 성당의 범 베드로 신부가 병인박해 시 해미 생매장 순교 현장을 목격하였던 이주필, 임인필, 박승익 등의 증언에 따라 생매장지 일부를 발굴하여 순교자들의 유해 및 묵주, 십자가를 수습하여 서산군 음암면 상홍리 공소 뒷산에 안장하였다. 1995년 9월20일 순교자 대축일에 이를 다시 해미 성지로 이장하여 본래의 순교터(현 순교자 기념탑 앞)에 모셨다. 이때 형체가 분명한 약 50여 개의 뼈와 형체가 불분명한 50여 개의 뼈를 추려 낼 수 있었고, 약 200여 개의 치아를 따로 모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본래 순교하셨던 곳으로 다시 모시게 되었다.
상홍리 파묘 장소에는 여러 부장품을 넣은 50cm 높이의 보통 옹기 그릇 하나와 진토를 담은 자기 항아리 하나를 모셨다. 부장품은 대형 나무 묵주 하나, 25cm 높이의 성모상 하나, 10cm 정도의 예수 그리스도상 하나, 그리고 ‘상홍리 순교자 묘역 조성까지의 내력’이란 제하의 글을 붓글씨로 쓴 전지 규격의 창호지를 담은 비닐 주머니 등이었다.
해미 순교복자상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방한하여 시복된 복자 인언민 마르티노와 복자 이보현 프란치스코, 그리고 복자 김진후 비오의 동상이다.
야외제대
성지 맨 안쪽에 있는 잔디밭 광장에 있다. 둘레에는 십자가의 길이 지나가고 광장 가운데는 복사상이 있다.
이제 남은 한 곳 해미 박해와 순교의 현장 해미읍성의 해미관아로 가야한다.
해미 읍성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해미읍성(사적 제116호)사적) 안에 있는 해미현(海美縣) 관아이다. 해미현은 1407년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縣)을 합쳐서 설치하였다. 이 지역은 충남 서해안 연안 해로를 지키고 관리하기 위한 중요한 요충지이다. 왜구의 침입이 빈번했던 조선초에는 충청병영과 충청수영이 모두 이곳에 있었다. 이후 충청병영은 청주로, 충청수영은 보령으로 이전하였다. 해미현 수령은 총6품 현감으로 무관을 임명하여 영장토포사(營將討捕使)를 겸하게 하여 주변 12고을의 군사적인 업무를 총괄하였다.
그러나 이렇다 할 국토 수비의 전공을 기록한 바 없는 해미 진영은 1790년대부터 1880년대에 이르는 100여 년간,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대량 처형한 오명만을 남기고 있다. 이 기간 동안 한국 천주교회사에 있어서 대박해의 때로 기록된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조정이 천주교 탄압을 공식화 할 때 외에도 해미 진영은 지속적으로 내포 지방의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들여 죽였다.
1800년에는 인언민(마르티노), 이보현(프란치스코)가 해미에서 순교함을 시작으로 1814년에는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비오)가 해미에서 옥사로 순교했으며, 1811년∼1839년의 중기 박해 기간 동안 민 베드로 첨지 등 9명이 해미에서 신앙을 굳게 증거한 뒤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1866년 이후로 진행된 병인박해 때에는 모두 122명에 이르는 순교자가 해미에서 탄생하였다. 이처럼 모든 기록을 통해 성명이나 세례명 중 적어도 하나를 확인할 수 있는 해미의 순교자는 132명에 이르고 있다.
병인박해 때만 해도 조정에 보고된 해미 진영의 천주교 신자 처결의 숫자가 1천여 명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그 이전 80여 년 간에 걸친 해미 진영의 지속적인 천주교 신자 처결의 숫자는 수천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진남문(鎭南門)을 통해 성 안에 이르니 옛날 이상으로 연휴를 즐기려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시간이 없어 돌아볼 만한 곳은 많으나 순교와 관련하여 죄수를 가두고 고문하던 감옥터와 호야나무, 죄인을 재판하던 동헌과 사형 집행 장소였던 서문(지성문) 밖 주변만 돌아보기로 한다.
감옥 터
동헌 동남쪽 1,800평의 대지 위에 있는데 내옥 · 외옥으로 구분되어 옥사가 두 채이다.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그 안에 있고 바닥에 멍석을 깔아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말할 수 없이 더워 한여름 매 맞은 상처는 곪기 일쑤였다고 한다. 고문과 굶주림, 갈증과 질병으로 순교자들의 몸이 스러져 갔던 감옥은 발굴 작업 및 남아 있는 기록을 토대로 복원 재현되었다.
호야나무(회화나무, 충청남도 기념물 제172호)
호야나무는 신자들을 묶어 매달고 몽둥이로 치면서 고문하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즉 오늘도 이 호야나무의 묵은 가지는 녹슨 철사 줄에 움푹 패도록 순교자들의 아픔을 살갗에 두르고 있다.
동헌(東軒)
해미 현령이 집무를 보던 정청이다. 여기서 많은 순교자들이 혹독한 고문과 재판을 받았다. 여기에 들어오려면 호서좌영(湖西左營)이라는 아문을 통과해야 한다.
원래 충청병마절도사 본영이 해미에 있었는데 나중 청주로 옮겨가면서 해미를 호서좌영으로 삼았다. 이처럼 해미에는 좌영(左營), 홍성에는 전영(前營), 충주에는 후영(後營), 청주에는 본영(本營), 공주에 우영(右營)을 두어 편제를 완성하였다.
서문 밖 순교터
해미읍성의 서문을 지성루(枳城樓)라고 하는데 원래 해미읍성에 탱자나무(枳) 울타리가 있었다는 뜻이다. 이 문밖에서 해미에서의 처형이 주로 이루어졌다. 당시 형리들은 잡아들일 때 빼앗았던 십자가의 묵주 등을 이 문의 난간에 넣어놓고, 지나가며 밟게 하여 천주학을 버리고 목숨을 살려보라 하였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성물에 머리 숙여 절을 하고, 문턱을 넘어 가서 목숨을 기꺼이 내놓았다.
서문 밖 순교지에서 순교자들의 목숨을 빼앗는 방법은 가지가지였다. 돌로 쳐 죽이기도 하고, 돌구멍에 줄을 꿰어 목에 옭아 지렛대로 조여 죽이기도 하고, 묶어서 눕혀 놓은 여러 명을 돌기둥으로 내리 눌러 죽이기로 하였으며, 얼굴에 백지를 덮고 물을 뿌려 질식시켜 죽이기도 하고, 나무에 매어 달고 몽둥이로 죽이기도 하였다.
지성루란 본래 탱자나무로 둘러쳐진 해미 진영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지만 순교자에게 이 서문이란 탱자 가시보다 더한 고통의 이 세상을 떠나가던 마지막 관문이었다. 이 문을 나가면 순교자들을 밀어 넣고 돌로 찧던 하수구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하수구를 가로 질러 놓여 있던 돌다리는 그야말로 사람 도마였고, 여기저기 시체가 쌓여 썩고 피가 땅에 젖어 남아 흐르는 곳이 서문 밖이었으니 여기서 죽은 목숨이 몇 천이나 되었는지 헤아릴 수 없어 그저 "시산혈하(屍山血河)를 이루던 곳이었다.”라는 말만 남아 있다.
그 돌다리가 자리개 돌이라는 이름으로 서문 밖 순교성지 일부를 확보하여 보존하다가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 개설로 인해 2009년 1월 8일 해미 생매장 순교성지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시간이 좀 있었으면 객사, 내아, 청허정 등 볼만한 곳을 하나하나 찾아보았을 텐데 아쉽다. 우리나라에도 여러 곳의 읍성이 있지만 해미읍성만큼 살아있는 읍성은 없다. 옛 자취가 오늘에 살아나 활용되어 많은 사람이 찾는 것이 가장 좋은 보존 방법인 것이다.
이제 5시가 넘었으니 아무래도 밥 9시는 넘어야 집에 갈 것 같다. (김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