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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김씨(金海金氏) | ||
1> 시조 : 김수로[金首露] | ||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 ||
김해(金海)는 경남 위치하는 고장으로 6가야 중 금관가야의 중심지였으나 680년(문무왕 )에 김해로 개칭하였다. . 일찍이 가락국 역사와 함께 문호를 개방한 김해김씨는 김해김씨는 신라김씨의 알지계와 함께 우리나라 김씨의 양대산맥을 이루어 명문거족으로 번성하여 왔다. 김해 김씨의 연원은 [삼국유사]와 [가락 국기]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군왕이 된 수로왕은 나라이름을 대가락으로 정하고 남천축(고대 인도)에서 바다를 건너온 허(許)여인을 왕비로 맞아 10명의 왕자와 2명의 공주를 두었다. 구형왕의 증손 유신(庾信)은 신라 무열왕과 함께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명장으로 무열왕의 딸 지소부인과 혼인하여 김해 김씨의 세계(世系)를 이었다. 김해 김씨는 중시조 유신(庾信) 의 후대에서 가세가 크게 번창해짐에 따라 148여개 파(派)로 분파되었으며, 그 중에서 경파(京派)와 사군파(四君派)·삼현파(三賢派)·문경공파(文敬公派)의 후손들이 가장 많다. 각 파별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경파(京派)의 파조인 목경(牧卿)이 고려 충정왕 때 조적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세워 김녕군에 봉해졌으며, 목경의 맏아들 보(普)의 6세손 영견(永堅),·영서(永瑞),·영정(永貞),·영순(永純) 4형제가 빼어났다. 사군파(四君派)에서는 파조인 익경(益卿)의 손자 진문(振門)이 고려말에 예의판서 를 거쳐 대제학에 올랐으나 조선이 개국하자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여 절의를 지켰으며, 그의 둘째 아들 추(錘)는 도총관을, 넷째 아들 석(錫)은 찬성사를 지냈다. 삼현파(三賢派 : 판도판서공파)의 1일세조인 관(管)은 고려에서 판도판서를 역임하고 학교를 건설하여 유학을 진흥시키는 등 나라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그의 현손 극일(克一)은 효행으로 이름을 떨쳤다. 삼현(三賢)의 한 사람인 대유(大有)는 일손의 조카이며 준손(駿孫)의 아들이다. 무오사화에 숙부 일손이 참수당하자 부자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중종 때 풀려나와 청도의 운문산 속 삼족당(三足堂)에서 73세로 일생을 마쳤다. 일손의 증손 언유(彦諭)는 고양에 살면서 지극한 효행으로 명망이 높았고, 시(詩)와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송설체(松雪體)에 능하여 비(碑)와 병풍·족자의 글씨를 많이 썼다. |
1)김해김씨(金海金氏)-4,124,934
김해김씨는 우리나라에서 인구가 가장 많다. 시조는 가락국의 김수로왕이다. 가락국은 가야 혹은 6가야라고 하며 오늘날 김해 일대에 해당된다. 김해김씨는 13세조 김유신을 중시조로 하여 그 뒤에 148파로 갈라진다. 그중에서 고려 때의 김목경(金牧卿)을 1세조로 하는 경파(京派=김녕군파)와 그의 아우 김익경(金益卿)을 1세조로 하는 사군파 그리고 김관(金管)을 1세조로 하는 삼현파(三賢派)가 주종을 이룬다.
경파의 파조인 김목경은 고려 때 조적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김녕군(金寧君)에 봉해졌다. 당시 혼란한 국정을 개탄하여 왕에게 상소했으나 듣지 않자 속리산으로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 그 뒤 후손들이 김녕군파(金寧君派) 혹은 경파로 삼았다. 시조의 존함을 빌어 목경파라 칭하기도 했다. 김목경의 네 아들이 파를 이루어 횡성공파, 안경공파, 참판공파, 석성공파 등 현재 11개 파로 나뉘었다. 안경공파의 파조는 김영정이다. 그는 조선조 초에 안경(安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따라서 안경공파는 김녕군파(=경파)의 지파다.
사군파의 파조는 김익경이다. 그의 손자 김진문은 고려 말에 대제학에 올랐으나 조선이 개국하자 관직을 버리고 은둔 생활을 했다. 그의 둘째 아들 김추는 도총관, 넷째 아들 김석은 찬성사를 지냈다. 막내 김조는 세종 때 집현전수찬을 거쳐 예조판서에 올랐다. 특히 직제학을 역임할 때 장영실과 함께 간의대, 자격루, 혼천의 등을 만들었다.
삼현파는‘김해김씨 판도판서공 휘관파’의 별칭이다. 김관이 고려 말에 판도판서를 지낸 이후 생겨난 파이다. 김관의 후손 가운데 김극일, 김일손, 김대유 등 3인을 가리켜‘청도삼현(淸道三賢)’이라 칭했다. 한 집안에서 4대에 걸쳐 3현인이 난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그래서 그 후손들을 삼현파라 부른다. 조선조에 김해김씨의 번영을 불러온 사람은 김극일이다. 그는 김관의 5세손이다. 그의 2남 김맹의 세 아들 김준손, 김기손, 김일손은 모두 당대의 문장으로 과거에 올랐다. 이중 김일손이 가장 돋보인다. 김종직의 문인인 김일손은 성종 때 춘추관의 사관으로 있을 때 전라관찰사 이극돈의 비행을 사초(史草)에 기록한다. 연산군 4년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공교롭게도 이극돈이 참여하여 사초를 살피다 김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이 쓴‘조의제문(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글)’이 말썽이 된다. 이극돈, 노사신, 한치형 등이 연산군에게 알려 김종직은 부관참시되고 김일손은 처형된다. 김일손의 형 김준손은 아들 김대유와 함께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 후 풀려난다. 삼현파의 삼현은 바로 김극일과 그의 손자 김일손, 그리고 증손자인 김대유를 가리킨다. 오늘날 삼현파의 선대들이다. 김극일의 6형제로부터 군수공파, 집의공파, 한림공파, 진사공파, 녹사공파, 진의공파 등 6개 지파로 크게 갈라진다. 그 외 군수공 휘익파, 통덕랑공 휘무파가 있다.
김해김씨의 인물로는 수로왕을 비롯한 가야의 10왕이 있다. 이 가운데 구형왕의 아들은 3명이 있었다. 첫째가 김세종, 둘째가 김무득, 셋째가 김무력이다. 그중 김무력은 신라의 각간을 역임했으며 그 아들이 김서현이고, 손자가 김유신이다. 김해김씨의 중시조인 김유신은 태종무열왕, 문무왕과 함께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했다.
김홍도는 도화서 화원이 된 후 왕세손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어진화사(御眞畵師)로 정조를 그렸다. 풍속화를 많이 그렸으며 조선의 3대 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김대건은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부이다. 청나라 선교부와의 통신연락에 필요한 비밀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답사하다가 체포되어 25세 나이로 순교했다. 김대중은 경파의 한 갈래인 안경공파의 사람으로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이 되었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남북정상회담, 6·15남북공동선언을 이끌어내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이외에 현대인물은 김종필(국무총리, 자민련총재), 김형오(국회의장), 김기춘(법무부장관), 김성기(법무부장관), 김근수(국가보훈처장, 국회의원), 김상현(국회의원), 김성곤(국회의원, 쌍용그룹창업주), 김영배(국회의원), 김용갑(국회의원), 김무성(국회의원, 한나라당원내총무), 김부겸(국회의원), 김홍신(소설가, 국회의원), 김형욱(중앙정보부장), 김혁규( 국회의원, 경남지사), 김중권(대통령비서실장), 김종곤(해군참모총장, 국회의원), 김정길(행자부장관, 국회의원), 김활란, 김기창(화백), 김준연(법무부장관, 국회의원), 김원근(청주여고-청주대학설립자), 김광수(대한교과서회장), 김규섭(해군참모총장, 향군부회장), 김기두(법학박사, 서울대명예교수), 김기형(과기처장관), 김상문(기아산업회장), 김노성(신성화학사장), 김덕엽(조선비료회장), 김동기(고려대경영대학원장), 김동하(마사회회장), 김두만(공군참모총장), 김두종(숙명여대총장, 서울대명예교수), 김보현(농수산장관), 김복영(매일우유사장), 김사룡(국회의원, 변호사), 김상영(한국은행부총재), 김성은(국방부장관), 김진배(국회의원), 김수학(국세청장), 김순애(음악가, 이화여대교수), 김영관(해군참모총장), 김영구(민정당총재비서실장), 김영균(법제처장, 변호사), 김영생(국회의원), 김영주(서양화가), 김영준(감사원장, 변호사), 김영택(우석대총장), 김완태(국회의원), 김용성(신한제분회장), 김용식(통일원장관, 적십자사총재), 김용태(국회의원), 김일두(서울지검장, 변호사), 김자경(성악가, 오페라 단장), 김장섭(변호사), 김장훈(체신부장관), 김재호(국회의원), 김점곤(법학박사, 경희대교수), 김정남(국회의원)씨 등이다. (무순, 전 현직 구분 안 됨)
집성촌인 전남 완도군 보길면에는 전체 인구 가운데 30.5%인 912명이 있다. 전남 여수시 묘도동에는 전체 인구 가운데 28.2%인 330명이 살고 있다. 충남 논산에는 1995년 현재 논산읍 1,006가구, 연무읍 728가구, 강경읍 494가구, 양촌면 251가구, 광석면 243가구 등 총 3,594가구로 전체 가구 수의 9.69%를 차지한다. 경기도 성남시도 집성촌이다. 수정구 복정동 응달말(음촌=陰村), 중원구 상대원동 사기막골, 수정구 심곡동 양짓말, 수정구 창곡동 창말과 간이골, 분당구 백현동 새말(일명 안궁안), 분당구 판교동, 분당구 금곡동 새터말(신기=新基), 분당구 구미동 앞구미와 오리뜰, 분당구 동원동 샛터 등에 많이 살고 있다. 그밖의 집성촌은 충북 옥천군 청성면 장연리, 충북 충주시 노은면 문성리, 충남 홍성군 홍북면 신경리, 경북 예천군 보문면 미호리, 경남 함안군 칠원면 장암리, 전북 정읍시 정우면 수금리 등이다.
조선시대에 모두 1,289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문과 128명, 무과 536명, 사마시 471명, 역과 59명, 의과 39명, 음양과 15명, 율과 33명, 주학 8명이다. 과거 급제자는 본관이 같고 계통이 다른 본관과 구분이 안 된 것이다.
인구는 2000년 현재 4,124,934명이다. 서울 815,783명, 부산 407,041명, 대구 199,252명, 인천 207,736명, 광주 148,736명, 대전 96,887명, 울산 104,627명, 경기 718,661명, 강원 107,612명, 충북 86,978명, 충남 140,151명, 전북 173,712명, 전남 268,525명, 경북 237,826명, 경남 350,012명, 제주 61,395명이다. 부산과 경남지역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다.
( 정복규: 언론인, 성씨 전문기자, 통일교육위원
김해(金海) 김씨의 연원은 '삼국유사'와 '가락국기'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서기 42년(중국 후한 건무 18년) 3월 가락국의 아홉 촌장이 구지봉 산정에 모여 나라를 통솔할 군장을 얻기 위해 하늘을 향해 의식을 올리자 하늘에서 한줄기 붉은 빛이 내려와 함게 달려가보니 금합에 여섯 개의 알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튿날 알 속에서 여섯 동자가 나왔는데, 그 중 맨 먼저 나온 동자를 수로라고 이름짓고, 금합에서 태어났다하여 성을 김씨로 하니, 그가 바로 김해김씨의 시조이신 김수로왕(金首露王)입니다. 군왕이 된 수로왕은 나라 이름을 대가락으로 정하고, 남천축(고대 인도의 행정지역)에서 바다를 건너온 허 여인을 왕비로 맞아 10명의 왕자와 2명의 공주를 두었습니다. 그 후, 10세 구형왕이 532년 신라에 항복하고 상등의 작위와 가락을 식읍으로 하사받았으며, 그의 아들 무력이 각간을 역임했습니다. 구형왕의 증손이고 서현공의 아들 유신은 신라 무열왕과 함게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명장으로 흥덕왕 대에 흥무왕으로 추존되었습니다. 김해김씨는 신라김씨의 알지계와 함께 우리나라 김씨의 양대산맥을 이루어 명문거족으로 번성하였으며, 족세가 크게 번창해짐에 따라 148여파로 분파되었고, 그 중에서 금녕군파(경파)와 감무공파(사군파), 판도판서공파(삼현파), 문경공파의 족세가 가장 번창합니다. 각 파별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금녕군파의 중조인 김목경이 고려 충정왕 때 금녕군에 봉해졌습니다. 목경의 맏아들 김보는 공민왕이 세자로 연행할 때, 시종한 공으로 충근량절보리공신, 수시중에 이르렀고, 김목경의 6대손 김영견, 김영서, 김영정, 김영순 4형제가 빼어났으며, 숙종 때 명신 김우항은 영정의 후손으로 1713년 우의정에 올랐습니다. 감무공파에서는 중조인 익경의 손자 김진문이 고려말에 예의판서를 거쳐 대제학에 올랐으나 조선이 개국하자 관직을 버리고 이색, 박자검 등과 함께 은거하여 절의를 지켰습니다. 그의 둘째 아들 김추는 도총관을 넷째 아들 김석은 찬성사를 지냈습니다. 막내 김조는 세종 때 집협전, 수찬을 거쳐 예조판서에 올랐으며, 직제학을 역임할 때 장영실과 함께 간의대, 자격루, 혼천의 등을 만든 것으로 전해집니다. 김진문의 6대손 김완은 역전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임진왜란 때, 남원대첩에 공을 세웠던 그는 1624년 이괄의 난을 평정할 때도 창성, 방어사로 길마재 결전에서 공을 세우고 진무3등 공신에 올라 학성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우 김우는 병자호란 때, 벽동성을 사수했던 명장으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김우의 아들 김여준은 볼모로 잡혀가는 소현세자와 인평대군을 호종한 18장사의 한 사람으로 심양에 갔을 때 옥하관에서 세자를 소리내어 울렸다는 '월명비안'의 노래를 읊어 더욱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용력에 힘을 뽐내며 목숨을 건 결투를 신청해 온 청나라 장수 우거의 코를 문질러 이김으로써 병자호란의 굴욕과 인질로 잡혀가는 세자를 호종하는 비애 등 백성들의 원한을 풀었다고 합니다. 그 후 세자가 돌아와 즉위한 다음에도 이 슬픈 기쁨과 옥하관의 달밤 일을 못 잊어 과거의 시제(詩題)에 <월명비안(月明飛雁)>의 노래를 자주 출제하였다 한다. 판도판서공파(삼현파)의 중조 관은 고려에서 판도판서를 역임하고, 학교를 건립하여 유학을 진흥시키는 등 나라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그의 현손 극일의 효행으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극일의 아들 맹은 세종 때 문과에 올라 집의를 지냈으며, 밤에 용마의 꿈을 꾸고 세 아들을 낳아 준손, 기손, 일손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이들 3형제가 모두 빼어나서 김씨삼주로 일컬어졌습니다. 1486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김일손은 일찍이 당대의 거유 김종직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고 김굉필, 정여창 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춘추관의 사관으로 있을 때 전라감사 이극돈의 비행을 사초에 썼다가 그의 원한을 사게 되었습니다. 연산군이 등극하여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공교롭게도 이극돈이 당상관으로 참여하여 사초를 살피게되니, 김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한 글)을 실은 것이 발견되어 이극돈이 노사신, 윤필상, 한치여 등과 함께 연산군에게 알려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일손은 권오복, 권경유, 이목 등과 함께 참수 당하였고, 김종직은 부관참시(죽은 뒤에 큰 죄가 드러나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거는 일)되었습니다. 김일손의 강직한 기개와 재능은 후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중종조 영의정 남곤은 말하기를 '세상에 다시 탁영(김일손의 호)같은 이가 또 나올 수 있을까. 그의 문장을 물에다 비하면 탁영은 강하와 같고 나는 계천에 지나지 못하다'라고 김일손의 짧은 생이를 애석하게 여겼습니다. 삼현의 한 사람인 김대유는 김일손의 조카이며, 김준손의 아들입니다. 무오사화에 숙부 김일손이 참수당하자, 부자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중종때 풀려나와 평생을 강개한 지절로 살았으며, 3개월간의 칠원현감을 마지막 벼슬로 사직하고 청도의 운문산 속 삼족당에서 73세의 일생을 마쳤습니다. 김일손의 증손 언유는 고양에 살면서 지극한 효행으로 명망이 높았고,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송설체에 능하여 공사와 비와 병풍, 족자의 글씨를 많이 썼습니다. 언유의 아들 현성은 광해군 때 폐모론에 불참하여 면직되자 청빈학 ㅔ여생을 마쳤으며, 시, 서, 화에 모두 능했습니다.
그 밖의 인물로는 심하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김경서 장군과 소전공 김덕승, 예직 홍도 외 '해동가요'를 남기고 '청규영언'을 편찬한 김천택 등이 명문거족의 김해김씨를 빛냈습니다.
2000년 통계청의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김해김씨는 남한에 총 892,328가구, 4,125,86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판도판서공 휘관파(삼현파) 항렬표 |
저의 아버지는 어렸을 적에 우리 집안 족보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습니다.
저는 '김해김씨 삼현파(金海金氏 三賢派)'의 72대손이니 김수로왕(金首露王)으로부터 이어진 왕손이라는 겁니다. 어린 저는 '그럼 수백만 명의 김해김씨가 다 왕손이냐'고 철없이 아버지에게 따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버님은 우리 씨족의 시조인 김수로왕과, 삼현파의 시조이며 연산군 때 무오사화로 돌아가신 대학자 김일손 할아버지에 대해 대단한 존경과 자부심을 가지고 수시로 저에게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김수로왕의 이미지. 출처 :
특히 김수로왕의 왕비인 허황후(許皇后) 얘기를 해주시면서 '너는 절대 허씨 성을 가진 여성과는 결혼할 수 없다'고 못을 박곤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김수로왕과 허황후에 대해 마치 저의 할아버지나 할머니인 것처럼 친근한 느낌을 가지며 자랐습니다.
김수로왕의 탄생과 결혼은 대부분 알고 계시는 너무도 유명한 설화입니다.
아홉 명의 부족장이 백성을 다스리고 있던 시절, 경상남도 김해에 있는 '구지봉'에 온 나라 사람들이 모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구지가(龜旨歌)>를 합창했습니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내밀지 않으면
구워서 먹을 테다
수백 명이 모여 노래를 하고 춤을 추자 하늘로부터 끈이 내려왔는데, 그 끈에는 붉은 천에 쌓인 황금의 상자가 달려 있었습니다. 상자를 열어 보니 황금알 6개가 담겨 있었습니다.
구지봉 고인돌. 출처 : http:// korean.visitkorea.or.kr/kor/ti/everywhere_sig..
며칠 후에 그 알에서 귀여운 아기들이 나왔는데 제일 먼저 나온 아이가 수로왕이요, 나머지 다섯 명도 각각 왕이 되었으니 이 분들이 6가야의 시조입니다. 수로왕은 키가 9척이요, 8자 눈썹에, 얼굴은 용과 같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한 척의 배가 남해 바다에서 붉은 돛을 달고 붉은 기를 휘날리면서 다가왔습니다.
수로왕은 신하들을 보내어 배에 탄 사람들을 모셔오게 했습니다. 그러나 배 안에 타고 있던 아름다운 공주는 “나는 너희들을 모르기 때문에 경솔히 따라 갈 수 없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수로왕은 대궐 아래에 장막을 치고 공주를 기다렸습니다. 공주도 별포 나룻터에 배를 대고 육지로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입고 있던 비단바지를 벗어서 산신에게 바친 후 수로왕이 있는 곳으로 왔습니다.
허황후가 가지고 왔다는 파사석탑. 출처 : http://kr.blog.yahoo.com/isi
공주가 여러 사람들과 보화를 가지고 다가오니 왕은 그녀를 맞이하여 장막으로 들어갔습니다. 공주가 자신이 가락국에 오게 된 사연을 수로왕에게 이야기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인 허황옥이라고 합니다.
본국에 있을 때 부모님들께서 꿈에서 상제님을 보았는데 상제께서 ‘가락국왕 수로는 하늘에서 내려보내 왕위에 오르게 했으나,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공주를 보내라’ 라고 하셔서 저를 가락국으로 떠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배를 따고 떠났는데, 수신(水神)이 노해 갈 수 없게 되어 다시 돌아가 석탑을 배에 싣고 무사히 여기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왕과 공주는 장막에서 두 밤 한나절을 지낸 후 대궐로 돌아왔습니다. 이후 허황후는 1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수로왕과 다정한 사랑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허황후 영존 출처 : http:// kr.ks.yahoo.com/service/ques_reply/ques_view...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이 이야기는 저에게 너무도 많은 의문을 던져
-<구지가>를 부른 때가 후한 건무 18년이고, 신라 유리왕 19년이라고 하는데 그때 과연 알에서 사람이 태어날 수 있었단 말인가?
-어떻게 아유타국 왕의 꿈에 김수로왕이 나타날 수 있었을까?
-아유타국 왕은 어떻게 자신의 꿈만 믿고 가보지도 못한 가락국에 공주를 보낼 수 있었단 말인가?
-뱃사공들은 과연 가락국을 어떻게 알고 항해를 했을까?
-아유타국 공주의 이름이 왜 허황옥일까?
-공주와 처음 만난 수로왕은 가락국말로 대화를 했을까, 아니면 아유타국말로 했을까, 아니면 통역이 있었을까?
-공주가 살았다는 아유타국은 과연 어디였을까? 일본에 있던 가락국의 분국이라는 설도 있고, 기원전 1세기 무렵 인도에 있었던 '아요디아' 왕국이라는 설도 있고, 태국의 '아유티야' 또는 '아요디아'에서 중국 사천성 보주 지역으로 집단 이주해 살던 허씨족이 이주해 온 것이라는 설도 있고, 낙랑지역에서 내려 온 유이민 혹은 상인이었다는 설도 있는데 과연 어느 것이 사실일까?
이 많은 의문을 시원하게 풀어 줄 해답은 아직까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김수로왕과 허황후의 만남과 사랑이야기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이 바다 건너 이민족들과 활발한 교류를 했다는 흔적을 알려주는 신화라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의 시조할머니인 허황후는 얼굴이 가무잡잡하고 눈이 흑진주처럼 빛나고 얼굴에 비단 너울을 쓴 태국의 공주일 거라고 상상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나도 태국에 가서 나의 할머니가 살았던 아유디아란 나라의 흔적을 찾아 보리라 꿈을 꾸기도 했습니다.
그 꿈은 아직 이루지 못했지만 저는 우리나라에 시집와서 사는 수많은 필리핀 여성이나 태국 여성들의 모습 속에서 허황후 할머니의 그림자를 보곤 합니다. 그 그림자는 바로 이 마지막 의문에서 출발한 겁니다.
만약 허황후가 인도나 태국쪽의 여인이었다면, 우리 김해김씨는 바로 '다문화 씨족' 이며 나는 그 후손 아닌가?
국립무용단 춤극 <가야> 중 허황후 장면.
우제선원☎055-285-6888
☎010-2488-0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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