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순간을 살아라 2-2편] 현재를 탄다 | 존재와 하나되는 자연스러운 상태(3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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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합(契合)하는 방법, 진리하고 하나되는 방법.
이걸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신과 하나가 되는 방법,
불교로 말하면 부처와 하나되는 방법은 일어서면 안 돼.
엉덩이 깔고 앉는 것이 신이고, 부처고, 본질이고, 바탕이고
그러니까 엉덩이 붙이고 앉는 것이 이게 계합하는 방법입니다.
한 인간이 말이에요, 계합이 일어날 때 정말 좋거든요.
그 천하를 다 얻은 듯한 느낌이에요.
계합이 될 때 본질하고 하나가 될 때.
항상 우리 마음은 들떠 있어요.
그래서 본질과 하나가 되려면 들떠 있기 때문에
엉덩이를 이렇게 엉덩이를 붙여야 본질과 하나가 되지,
머리로 해가지고는 100배 1000배가 떠나기만 하지,
멀어지기만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머리에 속지 마세요.
머리에 속지 말고 그냥 그 자리에 깔아뭉갠다.
어떤 느낌이냐면 본질이, 사람들은 본질을 추구해요.
앞에 있지 않아요. 절대로 앞에 있지 않아요.
나랑 같이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 같이 있는 것과 하나 되려면
이걸 이렇게 해가지고 절대 하나가 안 된다.
이렇게 방향이 뒤로 물러서면 철커덕해요. 철커덕.
계합한다는 말은, 그 정말 어디에 계합하는지를 알아야
그러면 쉽게 딱 맞아 들어가는데
그걸 모르면 아무리 계합하려고 해도 안 돼요.
우리 공부는 현상으로서의 '나'가 본질로서의 '나'하고 하나되는 거거든요.
그래서 계합한다 이 말은 하나 된다 이 말이에요.
하나되는 방법은 방법은 뭐냐면
딱 소켓트 끼리 맞아야 된다 이거예요.
그럼 그 소켓트가 어디냐 이거예요. 엉덩이다, 엉덩이.
엉덩이 아래, 이 비유가 너무 좋아.
거지가 평생 동냥하는데 어디에 앉아서 하느냐?
이 황금 덩어리가 든 상자를 걸쳐 앉고 한다 이거예요.
그러면 계속 엉덩이를 들썩들썩 해가지고는 영원히 하나가 안된다.
엉덩이를 붙여야 한다.
좀 엉덩이 붙이는 곳이 뭐냐 하는 그거지요.
그래서 이 공부의 느낌이 참선도 마찬가지예요.
참선도 익어지면 앉아서 뭘 하면 안 돼.
뭘 구하면 치구심(馳求心)이에요.
어리석게 구하는 마음이거든요.
번역을 하면 말 달리는 것처럼 어리석게 밖으로 구하는 마음이에요.
밖으로 구하는 마음입니다. 이 뜻이.
밖으로 구하는 마음이 제일 치명적인 오류예요, 마음공부에서는.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가?
밖으로 구하지 말고 그 자리에 그냥 엉덩이를 깔고 앉아야 한다.
이거를 참선할 때 의식이 나가면 안 된다는 거죠.
그래서 돌이킨다.
돌이켜서 의식이 자기 집에서 나가서 떠돌다가 돌이켜서 와서...
그러니까 자 보세요. 의식이 자기 집이에요.
그럼 이 의식이 나가서 떠돌다가
자기 집을 향하여 이렇게 들어오는게 아니고
(두 손바닥이 마주보고 포개진 상태 ⓵)
떠돌다가 이렇게 들어오는 거야(한 손바닥과 한 손등이 포개진 상태 ⓶).
지금 우리 참선의 느낌이, 자기랑 하나 된다는 느낌이,
이거(한쪽 손바닥)를 향해서 오는게 아니고(⓵)
뒷걸음질해서 온다는 거예요(⓶).
하 이것 참...
우리는 본질이에요.
본질이 집을 나가서 헤매다가 자기가 본질임을 까먹고
의식이 자기가 의식이란 걸 까먹고 현상계에 나가서 떠돌다가
다시 의식으로 돌아오는 것이 요렇게 돌아오는게(⓵) 아니다 이거예요.
뒷걸음질 해가지고 들어와서 철커덕 해버린다는 거예요(⓶).
계합의 느낌이 그렇게 일어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참선할 때도 뭔가를 구하면 안 돼, 하여튼.
구하면 안 돼!
'밖으로 향하여 구하지 말라.' 이 말이 그렇게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뒷걸음질 혹은 엉덩이 깔고 앉는다. 그래서 철커덕한다.
여러분, 지금 저 문에 문 하나하나들 문 있죠 지금?
우리 출입문 우리 여기 선방의 출입문 보세요.
문 열지요? 그러면 보세요.
쇠문이 문짝이 어디에 걸쳐져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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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짝이 문짝이 이렇게 있잖아요.
그러면 요 두 개가 문짝 두 개가 요렇게 고리가 이렇게 돼 있어요.
그리고 요 벽에는 동그란 거 두 개가 이렇게 있어요.
문짝 고리 두 개가 딱 꽂혀서 수없이 열고 닫는데
그 수없이 열고 닫는 현상들이 본질이 어디에 걸쳐 있느냐면
고리에, 경첩이라 그러잖아요, 경첩이라고 하는 거기에 딱 꽂혀있다는 거예요.
이 현상계가 수없이 들락날락 열고 닫고 열고 닫고 하는데
어디에 이렇게 딱 꽂혀 있는가? 본질에 지금 꽂혀 있거든요.
이 현상 전체가 다 하나가 되고, 모든 것이 자기 분신이 되고
하나가 된다 이 말은 모든 현상이 본질이 된다.
그래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하는 최종적인 진리에요.
우리 진리의 최종적인 모습은 현상이 본질이고 본질이 현상이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 하나 된다.
어디서 하나 되는가? 경첩에서.
지금 옛날 분들은 경첩을 '돌쩌귀'라고 했어요.
제주도 가면 가끔 이게 나와요.
여러분 제주도에 문짝 있잖아요, 제주도 문짝이 나와요.
여기가 나무가 패였는데, 요 두 개에 이렇게 문짝이 항상 요렇게 만들어져 있어요.
그래서 이런걸 어디서 구하느냐면 다탁(茶卓)으로 차를 마실 때
차 놓는 다탁으로 제일 인기 있는 게 제주도 이게 무슨 나무예요.
제주도 나무로 만든 요 문짝이 오래된 문짝이 굉장히 멋스러워요.
근데 여기 꼭 이렇게 꼭지가 있어요.
이게 뭐냐면 문에 홈이 파진 돌이 아래 위로 해가지고
요 벽을 이루고 있어요.
그래서 거기에 이렇게 딱 맞는다 이거예요.
옛날에는 경첩이 아니라 아예 그 돌을 파가지고
돌을 파 가지고 요 아래 위로 딱 맞춰 가지고 문을 계속 열고 닫는데
여기가 축이다 이거예요. 축.
그래서 요거를 한자로는 '추기(樞機)'라고 부릅니다.
가톨릭에서 추기경(樞機卿) 그러죠.
추기, '추기'라는 것은 모든 것이 일어나는 그 구멍이란 뜻이에요.
모든 현상이 일어나는 본질의 구멍 그것이 어디에 있는가?
다시 말하니까 또 요 '추기'라고 하건 '경첩'이라고 하건
'돌쩌귀'라고 하건 요게 지금 존재의 급소다 이거예요.
존재의 급소, 모든 현상이 일어나는 곳.
모든 현상이 일어나는 곳, 수없이 이 문짝이 열고 닫고 열고 닫고 하는데
요거는 움직인 적이 없다, 이 말도 이해되세요?
모든 세상이 다 수시로 움직이는데 모든 현상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인데
그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딱 끼어 있는 그 축은 움직이지 않는다.
'추기'라고도 하는 축. 경첩, 돌쩌귀.
* 제행무상 [諸行無常]
1. 우주 만물은 항상 생사와 인과가 끊임없이 윤회하므로
한 모양으로 머물러 있지 않음.
2. 항상 생사와 인과가 끊임없이 윤회하므로
한 모양으로 머물러 있지 않다. (다음 백과)
그게 어디냐?
지금 우리가 깔고 앉아있고
우리가 진리하고 하나가 되려면
이 방향(밖으로 밀어내는 방향)으로는 영원히 안아줄 수 없어요.
진리하고 하나 되려면 이 방향(안으로 당기는 방향), 이 방향.
그러면 지금 이 돌쩌귀가 어디 있냐 이게 중요하지요.
그렇지 않나요, 중요하지 않나요?
모든 것이 일어나는 곳, 현재다 이거예요.
이 돌쩌귀가 현재다 이거예요.
모든 존재는 현재에서만 일어납니다.
그리고 현재가 바로 존재로 들어가는 문이에요.
현상과 본질이 만나는 곳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현상과 본질이 만나는 곳, 중도의 자리, 현재다 이거예요,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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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모든 것이 현재에서만 일어나요.
다시 음미하세요. 모든 것이 현재에서만 일어난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이 어디에 가 있어야 하는가?
현재에 가 있어야 한다.
제일 좋은 것은 현재하고 하나 되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현재하고 하나 되는가?
현재를 잡으려고 하면 영원히 둘이 돼버려요.
잡는 순간 해변의 모래알처럼 현재는 빠져나가잖아요.
어떻게 잡는가? 걸터 앉아야 돼요.
그러려면 손에 힘을 빼야 돼요.
보세요, 여러분.
제가 손이..., 손이 뭘 잡으려면 비어 있어야 잡아요,
아니면 뭘 쥐고 있으면서 또 이걸 쥘 수 있어요?
못 쥐죠, 비어 있어야 되죠? 요게 포인트다 이거예요.
우리가 비어 있어야 현재를 탈 수 있어요.
아 이거 참, 좀 말해놓고 나니까 오묘하네요.
손이 비어 있어야 무엇을 잡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 마음이 비어 있어야 현재를 탈 수 있어요.
그래서 뭘 하려고 하면 안 돼요.
그래서 우리 마음이 비어 있다는 말을 무위라고 불러요. 무위 (無爲).
의도하는 바가 없다. 무위(無爲).
그래서 무위를 해야지 돌쩌귀를 잡을 수 있는 거예요
돌쩌귀 하고 하나 될 수 있는 방법이 무위예요.
그러면 힘을 빼야 돼, 뭘 하려고 하면.
골프나 테니스 쳐보셨나요?
어깨 힘 빼는데 3년이죠. 어깨 힘을 뺀다 이 말이에요.
무위라는 말은 의도를 놓는다. 의도를 가지면 어떻게 돼요?
의도를 가지면 치구심(馳求心)이 돼요.
그래서 도(道)는 힘 빼기다. 힘 빼기다.
힘 빼기를 생력(省力)이라고 불러요. '생'은 '힘 뺄 생'자에요.
'생'은 두 가지 뜻이 있어요.
반성 (反省)한다고 할 때는 '성'이 돼요
그래서 삼성출판사 있죠? 1일, 하루에 세 번 반성한다.
거기서 나왔어요
삼성(三 省), 하루에 세 번 반성하자. 삼성 출판사.
그러니까 반성할 때는 '성'이라고 발음하는데
힘을 뺀다고 할 때는 '생'이라고. 생략(省略) 한다고 그러잖아요. 생.
생력이에요. 생력, 힘빼기.
생력이 득력(得力)이다. 힘을 얻는 것이다.
여러분 따라해 보세요.
생력이 득력이다.
우리의 욕망이나 의도를 줄이면 줄일수록 존재는 깨어나온다.
우리의 본질은 깨어 나온다. 그래서 결국 하나가 된다.
신하고 만날 때 어떻게 만나야 되는가.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 뜻대로 이루어지소서' 해야 된다 이거예요.
내 뜻이 위(爲), 유위(有爲)다.
무위(無爲)라는 말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 뜻대로.
그러니까 정말로 우리가 힘 뺀다 이 말은 우리의 본질을 믿고 맡긴다는 거예요.
힘 빼는 것 중에 생력, 생력(省力)이 힘을 빼는 거잖아요.
이것은 맡기는 것도 힘 뺀다는 말하고 같은 거라면 이해하시겠어요? 맡긴다.
나한테 어려움이 왔을 때 어떻게 하는가.
어려움이 왔을 때. 이때 힘을 뺀다 이거예요.
그러면 어떤 것이 힘을 빼는 건가.
나한테 어려움이 왔을 때, 그 어려움을 본질에 맡기는 겁니다.
어려움을 본질에 맡긴다. 담설진정(擔雪塡井)이라는 말이 있어요.
담설진정은 *선요(禪要)에 나오는 말인데, 담은 지게로 지는 걸 담(擔)이라 그래요.
담당한다 그러죠. 담(擔), 지게를 진다는 뜻이에요.
설(雪)은 눈이에요. 마당에 눈이 가득 왔는데 그 눈을 지게에다가 퍼 담아,
그래서 지게를 져요.
그래서 진은 메울 진(養), 정은 우물 정(井)자.
마당에 눈이 가득 왔는데. 이때 눈이 번뇌에요. 고통이에요.
* [선요(禪要)]
불교 사집(四集)의 하나.
중국의 고봉 대사(高峯大師)가 선법(禪法)의 요의(要議)를 적은 책.
-표준국어대사전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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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 고통, 어려움.
이걸 어떻게 해소하는가?
눈이 막 함박눈이 내리는 것처럼 내가 힘들다 지금.
생각도 많이 나고, 감정도 많이 나고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지금 막 닥쳤다, 어떻게 하는가?
이거를 지게에다 퍼질러 담고 우물에 가서 메꾼다.
눈을 아무리 메꿔도 우물의 수위가 늘어날까요, 줄어들까요?
둘 다 변하지 않죠.
눈을 아무리 퍼질러 넣어도 우물의 수위는 변하지 않잖아요.
우물이 본질이거든요.
현상계의 어려움은 본질에다가 퍼서 본질에다가
본질을 메꿔라. 본질은 아무런 흔적이 없어요.
그래서 지금 당장 어려움이 왔을 때
설(雪)은 이제 번뇌망상 혹은 인생의 괴로움 그것을 쥐고
본질에다가 메꾼다. 우물을 메꾸듯이 한다 이 말은
본질에다가 내가 맡긴다, 돌린다. 여러 가지 표현할 수 있죠.
그러면 본질의 이름 중에 하나가 우리한테 여러분,
원효대사가 가르쳐준 본질의 이름,
원효 대사가 한민족에게 가르쳐준 본질의 이름이
관세음보살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본질 자체가 자각되는 사람한테는 이름이 필요 없지만,
아직 본질의 자각이 아직까지 힘이 약한 사람한테는 괴로울 때
이 괴로움은 관세음보살님 같이 대신 져주세요.
왜냐하면 당신은 우물물 같아가지고 아무리 져도
수위에 변화가 없으니까 당신은 다 감당하시니까
여러분 본질은 현상을 다 감당한다. 이해되세요?
지금 거울에 거울이 본질이에요.
거울에 그 어떤 이미지가 와서 비춰도 거울에는 물듭니까?
영향을 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그거랑 같아요.
본질은 현상에 대해서 영향을 받지 않아요.
왜냐하면 현상은 전부 이미지예요. 본질 입장에서는.
영향을 안 받아요.
그러니까 우리의 괴로움이 있으면 그거를 본질에 돌리는데,
근데 그 힘이 약한 사람은 본질의 이름이 관세음보살이기 때문에
특히 원효 스님이 우리한테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어머니들 전통에서는 관세음보살이 입에 붙어 있어요.
그 불자들 입장에서는.
그러니까 모든 어려움이 날 때마다 관세음보살한테 이거 당신 가지세요.
당신은 아무리 가지셔도 괜찮으니까 대신 져주세요.
당신이 좀 맡아주세요, 하고 돌린다 이거예요.
그걸 또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이라고도 하고,
단바라밀(檀波羅蜜)이라고도 하고. 보시의 인도 말이 단이거든요.
그래서 단바라밀(檀波羅蜜), 선에서는 단바라밀(檀波羅蜜)이라고 해요.
진심직설이라고 하는 책에 선어록인데 그 책에는
단바라밀(檀波羅蜜)을 굉장히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힘들 때마다 그거 가지고 혼자
끙끙대지 말고 본질로 돌려라 이거예요.
그러면 여러분 아까 처음에 제가 뭐라 그랬어요?
마음은 물과 같아가지고 흘러 통하게 하면 깨끗하다 그랬잖아요.
그렇잖아요? 어려운 짐을 내가 지고 끙끙대면 고여서 썩는다 이겁니다.
오자마자 통과, 그래서 나는 힘든데 힘이 약하니까
아이고 얼른 관세음보살에게 드린다 이거예요. 통과.
그러면 톨레가 한 말 중에 좋은 말이 도인은 투명 인간 같다.
음미해 보세요. 도인은 투명 인간 같다.
그럼 어떻게 돼요? 투명 인간은 뭐예요?
모든 것이 와도 생각이 와도 생각이 투명하니까 지나가 버리고,
감정이 와도 지나가고, 어떤 괴로움이 와도 지나가는 거예요.
다 지나가는 것, 텅 비어 있는 투명한.
도인은 투명인간 같다는 말 이해되세요?
그러려면 얼른얼른 오자마자 드려라 이거예요. 내가 지고 있지 말고.
그것도 하나의 인생의 요령이다.
자, 그렇게 하고 본문을 좀 읽겠습니다.
27페이지
20:01~25:00
< 깨달음이란 먼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아무리 다가가도 붙잡을 수 없는 초월의 세계가 아닙니다.
깨달음이란 자신의 존재와 하나 됨으로써 느끼는 자연스러운 상태일 뿐입니다.
어떠한 힘 앞에서도 부서지지 않는 그 무엇,
겉가죽의 나보다 훨씬 위대한 그 무엇에 연결된 상태입니다. >
자, < 깨달음은 연결된 상태입니다. > 이 말은 선 어록을, 선의 용어를 쓴다면
깨달음은 계합된 상태입니다. 이 말이에요.
본질하고 계합된 상태가 깨달음이다. 여러분 어떻게 계합한다 그랬죠?
어떻게 계합한다 그랬어요? 본질하고?
앞으로 하는 거 아니다 이거예요. 잡으려고 하면 안 된다.
절대로 손을 내밀면 안 된다. 손을 거둬들이고 깔고 앉아서 하나가 되는 거다.
< 그 무엇에 연결된 상태입니다.
내 이름과 모습 뒤에 숨어있는 본래의 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
이 대목을 한번 봐서
자, 깨달음이란 먼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지금, 엉덩이 감각이 있어요, 없어요?
의자에 앉은 분은 의자에 앉은 대로 감각이 있지요?
지금 바닥에 앉은 분은 좌복의 느낌 있지요? 엉덩이 감각 있지요?
그 감각이 먼 데 있어요, 가까이 있어요?
지금 깔고 앉아 있다 이거예요. 항상 잊지 마세요. 깔고 앉아 있다.
본질을 찾으려면 엉덩이 감각을 찾아야지, 앞에다 대고 찾으면 멀어진다 이거죠.
벌떡 일어나잖아요. 뭔가 찾으면 벌떡 일어나 버리잖아요.
엉덩이 감각을 놓친다 이거예요. 본질을 항상 엉덩이로 깔고 앉아 있다.
< 깨달음은 아무리 다가가도 붙잡을 수 없는 초월의 상태가 아닙니다. >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 톨레 믿읍시다. 아닙니다.
< 깨달음이란
자신의 존재와 하나 됨으로써 느끼는 자연스러운 상태일 뿐입니다. >
자, 여기서 자신의 존재가 뭐냐면,
깨달음은 자신의 존재와 하나 되는 거잖아요.
깨달음은 자신의 존재와 하나되는 거잖아요.
자, 보세요.
지금 우리 생각이, 생각, 생각의 생김새는 생각인데,
생각의 재질은 의식이에요. 이해되세요?
생각의 질, 질료, 생각의 모습은 생각인데
그 생각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느냐 할 때, 생각은 의식으로 만들어졌어요.
제 말 맞지요? 자, 그러면 보세요.
생각이 지금 존재와 하나 되는 거잖아요. 깨달음은..
그러면 생각이 밖으로 나가는게 아니라
자기의 본래 자기의 재료인 의식하고 하나 되는거다.
생각이 밖으로 나가는게 아니라 깔고 앉아서 엉덩이를 붙여,
생각이 엉덩이를 붙여 가지고 본래 자기가 나온 곳.
여러분, 생각이 나온 곳, 생각이 나온 곳이 순수 의식이에요.
그래서 생각이 밖으로만 헤매던 것이 뒷걸음질 쳐 가지고
자기 자리에 돌아가서 앉는 것, 자기가 나온 자리에 돌아가서 앉는 것,
앞으로 저벅저벅 가서 앉는 게 아니라 뒤걸음질 쳐 가지고 가서
결국 엉덩이 붙여 가지고 자기 자리에 앉는 것, 그게 깨달음이다 이거예요.
지금 생각은 의식이에요, 사실은.
의식이에요, 생각은.
의식이 밖으로 나가는게 아니라 자기 자리로 돌아와서
자기 집에 앉는 것, 자기 집에 앉는 것. 제가 노상 쓰잖아요.
자기 집에, 집 가(家)자에 다리 족(足)자, 집 가(家)자에 다리 족(足)자.
우리의 의식이 밖에 나가 떠돌다가 돌아와서
자기 자리에 와서 딱 앉는 것, 자기 집에 와서 앉는 것,
이게 지금 깨달음이다 이거에요.
그럴려면 자기를 돌아봐서 또 집 나가네. 이해되세요?
또 집 나가네, 이러면 내가 집 나간 거지 되지.
그래서 뒷걸음치셔서 엉덩이 깔고 앉는다.
그것을 자꾸 하다 보면 어느 날 찰카닥! 이런 느낌이 와요. 찰카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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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여러분 카메라 찍어 본 사람,
예를 들어 봅시다. 카메라 있잖아요.
카메라가 좋은 카메라들은 바디가 있고, 렌즈가 따로 돼 있어서
사진가들 보면 바디에다가 렌즈 여러 개 가지고 있다가
막 이렇게 바꿔 끼어서 멀리 찍을 것,
가까이 찍을 것, 넓게 찍을 것, 이렇게 렌즈가 다 달라요. 프로들은,
그러면 그 바디에 바꿔 끼울 때 렌즈를, 이걸 탁 누르는 게 있어요.
누르고 돌리면 착 나와. 렌즈가,
그럼 다른 렌즈를 넣을 때 어떻게 하느냐 하면
누르고 그 방향으로 탁 이렇게 표시돼 있어.
렌즈에도 딱 '일'자가 있고 바디에도 '일'자가 있어요.
그래서 그리로 탁 넣어요. 그리고 돌리면 찰카닥 소리가 나요.
그럼 절대 안 빠져요. 렌즈라고 하는 거 하고,
몸체, 바디, 카메라 바디가 프로들이 쓰는 거는
이게 다 따로따로 놀아요. 바꿔 끼우기 위해서.
근데 이거를 붙일 때 딱 그 일자하고 일자를 만나게 해 가지고
딱 돌리면 찰카닥 해 가지고 딱 붙어가지고 절대 안 떨어져요.
빛도 안 들어갈 정도로 완벽하게 봉합이 딱 돼버려요.
하나가 된다 이거예요. 그 찰카닥이 있다.
우리 인생에는 여러분, 인생의 축복에는 그 찰카닥이 있다.
그래서 의식이 집 나가 돌다가 뒷걸음질 쳐서 엉덩이 깔고 앉아 있다 보면
어느 순간에 찰카닥 일어나는 걸 자기가 느껴요.
그때부터는 이 세계가 한 덩어리야.
그래서 저 소리가 따로 있지 않고, 꽃이 따로 피지 않고,
구름이 따로 흐르지 않고, 전체가 다 한 덩어리가 움직이는
고 감각이 완전히 확립이 돼버리는 거, 그게 깨달음이다 이거예요.
이게 존재가 하나 되는 자연스러운 상태, 그게 원래 자연스러운 건데,
우리는 지금 집 나가서 의식이 자기 집에 딱 앉아서 찰카닥 해야 될 걸
나와서 지금 헤매고 있다 이거죠. 거지 아이처럼,
지금 상황이 이해되시죠?
깨달은 사람은 이것이 전혀 엉뚱한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래서 톨레 같은 사람은 쉽다 그러는 거예요. 근데 우리들은 어렵죠.
근데 깨달은 사람한테는 쉬워요. 이게,
이미 깨달은 사람한테는 쉬워. 이해되세요?
길이 나 있어. 이 찰카닥이 길이 나 있다. 이해되세요?
그러면 그 사람한테는 쉬워요.
그래서 지금 톨레가 쉽다고 표현한 거예요.
근데 우리한테는 어려워요. 그런데 그 방법을 알면 쉬워요.
이해되세요? 그 방법이 뭐냐? 핵심은 이거다 이거예요.
의식이 자기가 의식이라는 걸 까먹고, 의식이 집에서 나가서,
천하 사방의 욕망 따라다니면서 가서 붙어 가지고
집에 돌아올 줄을 모르고 있다, 이거 지금.
이거 집에 돌아와서 자기 집에 앉는 것이 깨달음이라는 거예요,
그 과정에서 마음 치유도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면 돌아와서 앉는데 포인트가 지금 경첩, 돌쩌귀, 추기, 추,
온갖 표현으로 한 그 포인트가 어디냐 이거예요. 그 포인트가.
지금 이걸 현재라고 표현하던 여러분,
현재하고 그러니까, 지금하고 여기하고 의식이 항상 하나예요.
인간이 분리하는 거지. 실제로는 이게 언제나 하나예요.
지금, 여기, 의식이 언제나 하나예요. 이게 집이야.
지금 여기 의식이 하나인 것이 자기 집이에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체크할 때 제일 쉽게 체크할 수 있는 것 중에 하나가
지금이라는 거야. 지금이 의식이라는 거야.
그러니까 지금을 느낄 때 반드시 의식이,
지금을 느끼는 그것이 의식인 거예요. 그때 의식이 온전해져.
다시 말하면, 지금을 느낄 때 의식이 집으로 돌아와요. 여러분 한번 해보세요.
지금을 느낄 때 의식이 집 나갈 수가 없어.
지금을 느끼자마자 의식은 집에 돌아와 있는 거예요.
그래서 계속 이 지금을 내가 자각하면서
그리고 지금을 자각하는 것을 이을려면 지금을 타야 돼.
이걸 잡으려고 하면 어긋나 버려요. 이해되세요?
30:01~35:50
지금을 어떻게 잡는가?
지금하고 어떻게 하나 되는가? 탄다 이거예요.
아 계속 탄다 소리를 계속 지금 하고 있는 거예요.
관세음보살이 지금 용 타고 있어요.
지금이 용처럼 빨라요. 지금이 용처럼 빨라요.
힘 빼면 지금도 지금이예요, 힘 빼면 지금도 지금이예요.
그러니까 힘 빼는 게 공부다.
그래서 이 현재에 타고 있다 보면 찰카닥이 온다예요, 온다, 온다.
그때는 항상 지금 여기 의식하고 붙어서 산다.
그러면 삼라만상은 지금 여기 의식이 드러나는 거다.
그러니까 완전히 하나가 된다는 거예요.
색즉시공 (色卽是空 ), 공즉시색 (空卽是色).
자, 그래서 지금
< 깨달음이란 자신의 존재와 하나됨으로써 느끼는 자연스러운 상태이다.
어떠한 힘 앞에서도 부서지지 않는 무엇 >
여러분, 현재가 변합니까?
제가 변하지 않아서 '늘'이라고 표현하지요.
지금은 제가 '늘'이라고 표현을 해요. 왜냐? '늘'이라서.
여기는 항상 여기죠.
여러분, 신기하지 않아요. 신기하지 않아요?
항상 지금이고, 항상 여기고, 그리고 항상 의식이예요.
신기해요, 신기해!
그럼 언제 지금 여기 의식하고 하나 되는가.
힘 빼면 뺄수록 하나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힘 빼는게 공부다.
힘 빼는 것을 제가 엉덩이 깔고 앉는다고 표현하는 거예요.
힘 빼는 것을 엉덩이 깔고 앉는다. 또, 오직 존재하는 일에 힘쓴다.
그럼 보세요.
오직 존재하는 일에 힘쓴다.
어떻게 해야지 오직 존재하는 일에 힘쓰느냐.
여러분, 여러분이 노력해야지 존재해요, 아니면 이미 존재하고 있어요?
이미 존재하고 있죠. 힘 뺄수록 오직 존재하는 일에 힘쓸 수 있어요.
제 말 이해되세요?
이미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죠?
존재할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지요.
그런데 이걸 놓치고
노력하면 벌써 거꾸로 가버린다 이거예요.
존재하려고 노력하면 벌써 어긋나 버린다 이 말이예요.
노력하자마자 자기 존재랑은 등지고 집을 나가버린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힘 뺀다. 오직 존재하는데 힘쓰려면
힘 빼고 가만히 있으면 존재하고 있잖아요.
존재하고 있다는 걸 자각하는 것,
이게 오직 존재하는데 힘쓰는 거예요.
여러분,
연결된 상태를 어떻게 하면 만드는가 보세요.
의식이 본질이잖아요.
의식과 연결된 상태를 어떻게 하면 만드는가, 일기를 쓰는 거예요.
내가 자각을 해야지 일기 쓸거리가 나오죠.
자, 그럼 자각한다는 건 뭐예요? 관찰한다는 말은 뭐예요?
관찰한다는 말은 몸의 상태, 또 생각 감정의 상태를 관찰하는 거잖아요. 오케이?
그러면 관찰하는 몸과,
그러니까 생각 감정과 몸을 관찰하면 관찰하는 놈이 의식인 거예요.
그래서 의식을 자각하려면 관찰하면 돼요.
그 관찰하면 관찰 대상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이고,
관찰하는 것은 항상 여여부동 (如如不動) 한 진여 (眞如 )의 본질인 거예요.
그래서 관찰의 목적은 관찰을 통해서 ,대상을 통해서
저장하는 의식자체를 자각하자는 뜻이에요.
그러면 일기를 쓸려면 관찰을 해야 되고,
관찰을 하면 아, 터득이 되는 거예요.
아, 생각 감정은 계속 생겼다가 변하는구나 , 사라지는구나.
근데 그걸 바라보고 있는 나는 의식은 변하지 않네, 그런데 의식이 어디 있나,
전체가 의식이네, 의식 속에서 모든 것이 벌어지고 있네,
이 자각이 계속 생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관찰일기를 쓰세요'라는 말은
하다 보면 자꾸 익어지면 의식 쪽으로 돌아온다 이거예요.
관찰이 의식으로 돌아온다. 이해되세요?
관찰하다가 보세요. 관찰, 저기 카메라가 앞에 있네.
카메라를 관찰하다가 관찰하는 나를 의식한다 이 말은
관찰하다가 엉덩이 깔고 앉은 곳으로 돌아온다.
엉덩이 깔고 앉은 곳이 관찰하는 의식이다 이거예요.
요거랑 하나가 딱 되는 거.
그러니까 관찰을 통해서 이것이 드러난다, 자각된다.
그래서 결국에는 하다보면 여기랑 하나가 딱 되는 날이 온다.
찰카닥이 온다. 그때 아하~, 한다. 아하~, 하고 온다고요.
그래서 하나가 되어서 돌아가는 세계가 도인들의 삶이고 ,
그거는 정말 우리가 열반이라고 하는,
하나 된 세계가 분열이 없기 때문에 에덴동산을 회복하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