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미학 세미나(1. 11.) 자료입니다.
가상의 위기
조화 개념에서 해방된다는 것은 가상에 대한 반역임이 드러난다. 즉 구성이 그것과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표현에 동어반복적으로 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벤야민도 생각했을 테지만, 유희를 위해 가상에 반역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허구적 전개들을 대신하는 순열들의 유희적 성격을 간과할 수 없다고 해도 그 점은 마찬가지다. 전체적으로 가상의 위기는 유희도 자체 내에 끌어들일 것이다. 즉 가상을 통해 이루어지는 조화에 적합한 것은 유희의 천진한 성격에도 적합하기 때문이다. 유희를 통해 가상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예술은 스포츠로 되고 만다.
그러나 가상의 위기가 얼마나 강력한지는 언뜻 보아 환상적 요인을 꺼리는 음악도 그러한 위기를 겪고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음악에서는 실존하지 않는 감정들의 표현만 아니라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간파된 어떤 총체성 따위와 같은 구조적 허구도, 승화가 이루어진 형태에서조차, 소멸하고 있다. 베토벤의 음악과 같이 위대한 음악에서는 물론이지만, 어쩌면 시간예술을 넘어서, 작품을 분석할 때 부딪치는 이른바 근본계기들은 여러 모로 보아 대체로 공허하다.(154) 그러한 것들은 단지 무에 점근하는 한에서만 순수한 형성과정으로서 전체에 융합된다. 하지만 그것들은 부분적 형태로서 구분되면 이미 어떤 것, 즉 모티프나 테마가 되는 경향을 띤다. 그 기본규정들의 내재적 공허함은 통합적 예술을 무정형 상태로 끌어내린다. 특히 예술이 고도로 조직화될수록 그처럼 무정형 상태로 되는 힘은 커진다. 예술작품은 무정형 상태를 통해서만 통합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이 완성됨에 따라, 즉 작품이 형식화되지 않은 자연으로부터 멀어짐에 따라 자연적 계기, 즉 아직 형식화되지 않고 명료하게 표현되지 않은 요인들이 다시 회귀한다. 아무리 객관화가 잘 이루어진 작품도 극히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보면 어떤 요소들의 덩어리로 변한다. 예를 들어 텍스트들이 그 단어들로 변하는 것이다. 예술작품의 세부 요인들을 손에 움켜쥐고 있다고 여기면, 그것들은 불확정적이고 구분되지 않은 것 속으로 달아나 버린다. 그만큼 그것들은 매개되어 있다. 그것은 예술작품들의 구조 내 미적 가상이 드러나는 것이다. 예술작품들의 생명요소인 특수한 것이 사라지며, 미시론적 시선 아래서는 그것의 구체화는 증발해 버린다. 모든 예술작품에서 어떤 대상적인 것으로 굳어진 과정은, ‘여기 이것(Dies da)’으로 고정되는 데에 저항하며 다시 본래의 상태로 녹아 없어진다. 예술작품들을 객관화해야 한다는 요구는 예술작품들 자체로 인해 실패한다. 이처럼 환영(Illusion)은 무엇을 모사하지 않는 예술작품들 속에도 깊이 파고들어가 있다.
예술작품들의 진리는 개념과 동일하지 않은 것, 개념에 비추어볼 때 우연적인 것을 예술작품들이 자체의 내재적 필연성 속에 흡수해 들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예술작품들의 합목적성에는 비합목적적인 것이 필요하다. 이로써 예술작품들 자체의 일관성 속에는 환영적 요인이 파고든다. 그래서 가상은 여전히 예술작품들의 논리인 것이다.
예술작품들의 합목적성은, 존속하기 위해, 그 타자를 통해 유보될 수밖에 없다. 니체는 이 점을 물론 문제가 있는 명제, 즉 예술작품 속에서는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다는 명제로 건드렸다. 그의 이 명제는 아마 어떤 변역을 보장하는 ‘양식(Stil)’이나 확정된 관용어 내부에서만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작품들의 내재적 완결성이라는 말을 엄격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작품들이 가상의 영향을 가장 덜 받는다고 여겨지는 경우에도 가상은 그러한 작품들에 따라다닌다. 작품들은 스스로 만들어 놓는 객관성을 파손함으로써 그러한 완결성이 허위임을 드러낸다. 작품들이 일깨우는 환영보다는 작품들 자체가 미적 가상이다.
예술작품의 환영적 요인은 작품이 하나의 전체적인 것이라는 주장으로 수렴되었다.(155) 예술작품이 심각하게 본질적이고자 하는 한, 미학적 유명론은 가상의 위기로 귀착될 것이다. 가상에 대한 민감한 거부감은 실제 사태에 자리 잡고 있다. 미적 가상의 모든 계기는 오늘날 언제나 미적 비일관성을 수반한다. 즉 예술작품 자체와 그것이 등장하는 모습 사이의 모순을 수반한다. 작품이 등장하게 되면 본질적인 것 같은 형태를 취하지만 작품은 단지 부정적으로만 본질적일 수 있다. 그러나 작품 자체가 등장한다는 실증성(Positivität) 속에는 언제나 어떤 초월성의 제스처가 들어 있다. 즉 격정(Pathos)을 극단적으로 배격하는 작품조차 버릴 수 없는 어떤 격정이 들어 있는 것이다.
예술의 미래에 대한 물음이 무용한 것이 아니거나 테크노크라시로 의심받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아마 예술이 가상의 소멸 이후에도 잔존할 수 있느냐 하는 물음으로 집약될 것이다. 햄릿이 프록코트를 입고 등장하거나 로엔그린(Lohengrin)이 백조를 데리고 다니지 않는 등 연극에서 의상을 거부했던 40년 전의 사소한 일들이야말로 가상의 위기를 말해 주는 대표 사례다. 이러한 것은 그 당시 주도적이었던 리얼리즘적 입장에 대한 예술작품들의 위반에 대한 반발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예술작품들이 이제는 더 이상 지닐 수 없는 작품의 내재적 형상(imagerie)에 대한 반발이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 부분은 가상적 성격을 교묘히 넘어서려는 노력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그것은 무리하게 작품형식의 내재성을 설정하지 않으면서 은밀히 예술작품이라는 단자 속으로 독자를 안내하고, 또 어디에나 존재하는 전지적 화자를 만들어내지 않으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어떻게 시작하고 끝을 맺느냐 하는 문제는 어떤 포괄적이고 실제적인 미적 형식이론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러한 이론은 계속⋅대비⋅이행⋅발전⋅‘매듭점’ 등의 범주들도 다루어야 할 것이며, 무엇보다 오늘날 모든 것이 다 똑같이 중심부와 가까이 있어야 하느냐 아니면 서로 상이한 밀도를 지녀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다루어야 할 것이다.
미적 가상은 19세기에 이르면 환각(Phantasmagorie)으로까지 된다. 예술작품들은 이제 그 생산의 흔적을 지워버렸다. 이는 아마 예술이 사실이어야 하고 또 그 긴밀한 직접성이 매개되어 있다는 점을 드러내 놓는 요인들을 예술이 수치로 여기는 한에서, 예술의 실증주의 정신이 확장된 데에 기인할 것이다. 현대예술의 깊숙한 곳에 이르기까지 작품들은 그러한 정신에 순응했다.(156)
작품들의 가상적 성격은 작품들의 절대성으로 강조되기도 했다. 그것은 쇼펜하우어 학도인 바그너의 작품이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예술종교라는 헤겔의 용어 뒤에도 감추어져 있다. 그후 현대예술은 가상을 가상이 아니라고 보는 가상의 가상에 반대했다. 작품의 밀폐적인 내재적 연관관계에 노골적으로 개입하여 구멍을 내놓고 작품의 제작과정을 작품 속에서 보여 주고, 극단적으로는 작품을 그 생산과정으로 대체하는 등의 일련의 작업들이 그와 같은 사실을 의미한다. 이는 관념론 시대의 주요 대표자들에게도 그다지 낯설지 않았던 생각이다. 작품을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만든 예술작품들의 환각적 측면은 이른바 신즉물주의 조류들이나 기능주의에서만 예술작품들에서 의심쩍어진 것이 아니다. 그에 못지않게 그것은 장편소설처럼 친숙한 형식들에서도 의심스러웠다. 이 형식들에서는 구카스텐식 환영(Guckkastenillusion)이나 화자의 허구적 편재성이, 현실적인 듯이 제시되지만 어디까지나 허구인 점에서 비현실적인 것들에 대한 요구와 결합한다.
서로 대립적인 입장을 취했던 게오르게와 칼 크라우스는 그러한 화자를 거부했다. 그러나 프루스트나 지드의 경우처럼 소설가가 주석을 가함으로써 소설의 순수한 형식적 내재성을 파괴하는 일도 결코 낭만주의에 반대하는 일반적 시대 분위기보다는 오히려 앞의 경우와 동일한 불만을 증명해 준다. 오히려 작품들을 즉자존재로 여기는 환영을 테크놀로지적으로 강화시키는 환각적 관점은 오히려 반어를 통해 미리부터 환각적 관점을 거부하는 낭만주의 예술작품과 반대된다고 할 수 있다.
순수한 예술작품이 추구하는 완전무결한 즉자존재는 예술작품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따라서 또한 아프리오리하게 사물의 세계와 섞여있다는 사실과 결합될 수 없다. 이로 인해 그러한 환각적 관점은 난처한 것이 되었다. 현대예술의 변증법은 상당정도 예술이 마치 다 자란 뿔을 떼어 버리는 짐승들처럼 가상적 성격을 떨쳐 버리려고 한다는 점이기도 하다. 예술의 역사적 운동 속의 이러한 난관들은 예술의 가능성 전체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진다. 표현주의처럼 리얼리즘에 반대하는 조류들도 가상에 대한 반역에 가담했다. 그러나 표현주의는 외적인 것을 모사하는 데에 반대했지만, 실제의 심적 사실들을 왜곡되지 않게 알리고자 했으며 그 결과 심리기술(Psychogramm)에 접근했다. 그러나 그러한 반역의 결과로 예술작품들은, 스스로를 예술 이상의 것이라고 여기는 오만에 대한 처벌인 듯이, 단순한 사물 상태로 되돌아가는 경향이 있다.(157)
대체로 유치하고 어리석게 과학과 유사한 모습을 취하는 근래의 작품들은 그러한 퇴화의 가장 명백한 징후이다. 적지 않은 현대음악과 회화작품들이 비록 비대상적이고 표현과 거리가 멀기는 해도 이차적 자연주의라는 개념으로 총괄될 수 있을 것이다.
재료 상의 조잡한 물리적 처리, 변수들 사이의 계산 가능한 관계들 따위가 미적 가상을 대책 없이 몰아내는데, 미적 가상은 그러한 것들이 어떤 정립된 것이라는 점의 진실이다. 그와 같은 변수들의 자율적 연관관계 속의 미적 가상이 사라지면서, 그것은 그 속에서 객관화되는 인간적 요소의 반사로서 아우라를 남겨 놓았다. 오늘날 어떠한 예술도 피할 수 없는 아우라에 대한 거부반응은 분출하는 비인간성과 구분되지 않는다.
근래의 그와 같은 사물화 과정과, 즉 예술작품들이 미적 사실을 야만스럽게 문자 그대로의 상태로 받아들이는 일로 퇴행하는 것과, 환각의 책임은 서로 불가분의 상태로 얽혀 있다. 예술작품이 아주 광신적으로 자체의 순수성을 걱정하고, 이 순수성과 관련해 혼란을 일으켜, 예술이 될 수 없는 것들, 예를 들어 캔버스나 단순한 음 따위를 작품이라고 내놓는다면, 작품은 자체의 적수로 된다. 즉 목적을 위한 합리성을 직접 거짓되게 계승하는 것이 된다. 실제로 그러한 경향은 해프닝(Happening)으로 귀착되고 말았다.
그러나 환영으로서의 가상에 대한 반역이 지니는 정당한 면과 그러한 반역의 환영적인 면, 즉 미적 가상이 스스로의 힘으로 늪을 빠져나올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서로 결합되어 있다. 작품들에 내재하는 가상적 성격은, 설혹 잠재적일지라도, 분명코 현실 모방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고, 따라서 환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술작품들에 담긴 형식이나 재료들 혹은 정신이나 소재 등은 모두 현실로부터 예술작품들 속에 옮겨져 그 속에서 현실성을 잃은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언제나 또한 현실의 잔상이 된다.
가장 순수한 미학적 규정이라고 할 수 있는 현현(das Erscheinen)도 현실에 대한 확정적 부정으로서 현실과 매개되어 있다. 경험세계와 예술작품들의 차이 혹은 예술작품들의 가상적 성격은 경험세계에 근거해서, 또 그것에 반대하는 경향 속에서 구성된다. 예술작품들이 자체의 개념을 위해 그와 같은 재귀관계를 제거하려고 할 경우, 그것은 자체의 전제조건을 제거하게 될 것이다.(158)
예술은 자체의 개념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체의 개념을 초월해야 한다는 점에서, 또 이 경우 예술이 현실 세계와 유사해진다면 자신이 저항하는 사물화에 순응하게 된다는 점에서 무한히 까다롭다. 예컨대 오늘날 앙가주망은 불가피하게 미학적 양보가 된다. 절대적 현상이라는 개념을 통해 미적 가상의 이율배반을 해소하기는 어렵다. 이는 환영에 포함되어 있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das ineffabile) 때문이다. 그러나 가상을 통해 그런 것이 나타난다고 해서 예술작품이 문자 그대로 신체현현(Epiphanie)이 되지는 않는다. 물론 진정한 예술작품들을 진정 미적으로 체험할 때에는, 예술작품들 속에 절대자가 현존한다고 기대하지 않기도 어렵기는 해도 그 점은 마찬가지다. 또 예술작품의 위대성 속에는 이러한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내재한다.
그러나 예술작품들을 진리의 전개과정으로 만드는 요인은 또한 동시에 예술작품들의 죽을죄이기도 하다. 예술이 스스로 그러한 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예술은 마치 사면이라도 받은 듯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그러한 죄악을 끌고 다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상을 통해 하늘의 잔재를 담아야 하는 점이 괴롭게도 남아 있다. 그런데 이는 가상을 거부하는 예술조차, 다다이즘의 경우처럼 원래 그러한 구상을 고무한, 실제 정치효과와 단절되어 있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밀폐적 작품들은 미메시스적 반응방식을 통해 시민사회의 대타존재에 맞선다. 그러나 이 미메시스적 반응방식조차 순수한 즉자라는 가상으로 인해 공범관계에 빠지며, 또 그 다음에는 이 가상을 깨어버리지만, 그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관념론적 오해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면, 작품이 결코 예술가의 이상이 아닌 그 자체의 객관적 이상과 유사해지는 것을 모든 작품의 법칙이라고 칭할 수 있으며, 이로써 또 미적 법칙성에 상당히 접근하게 될 것이다.
예술작품들의 미메시스는 자체와의 유사성이다. 일의적이든 다의적이든 이러한 법칙은 모든 작품 각각의 단초에 의해 설정된다. 즉 각각의 작품은 그 본질구성을 통해 그와 같은 것을 이룩할 의무를 지닌다. 이로써 미적 형상들은 예배적 형상들과 구분된다.
예술작품들은 그 형태의 자율성을 통해, 상징의 경우처럼 절대적인 것이 자체 속에 들어오는 것을 금한다. 미적 형상들은 우상 금지령에 따르는 것이다. 그런 한에서 미적 가상과, 밀폐적인 작품에서 보는 그 극단적 귀결은 바로 진리이다. 밀폐적 작품들은 자체를 초월하는 요인을 어떤 더 높은 영역 속의 존재라고 주장하지 않는다.(159) 오히려 경험세계 속에서 그것이 무기력하고 불필요하다는 점을 통해, 그 사상내용에 포함된 덧없는 계기를 강조한다.
민주주의 국가들의 기만당한 대중이나 전체주의 국가들의 지도자들은 상아탑을 추방하려는 점에서 서로 동의한다. 그러나 이 상아탑은 자신과의 동일성으로서의 미메시스적 충동을 확고부동하게 고수하는 점에서 매우 계몽적이다. 그러한 태도의 괴팍함은 참여 예술작품이나 교육적 예술작품이라는 강령들보다 더 올바른 의식이다. 이 강령들의 퇴행적 성격은 그것들이 전달했다고 하는 지혜라는 것이 사소하고 어리석기까지 하다는 점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그 때문에 극단적 현대예술은 정치적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도처에서 그것에 대해 내리는 일괄적 판결과는 달리, 그 속에서 발달한 기술들에 비춰볼 때만 아니라 진리내용의 측면에서도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예술작품들로 하여금 현존재 이상의 것이 되게 만드는 것은 다시 현존재 자체가 아니라 예술작품들의 언어다. 진정한 예술작품들은 환각적 환영에서 최후의 아우라적 입김에 이르기까지의 가상을 모두 거부하는 경우에조차 무엇인가를 말한다. 단지 우연적인 주관성이 예술작품들을 통해 말하는 바를 예술작품들에서 정화하려는 노력은, 원하지 않아도 예술작품들 자체의 언어를 그만큼 더 두드러지게 부각시킨다.
예술작품들 속의 표현이라는 용어는 바로 그러한 언어를 뜻한다. 이러한 용어는 음악 연주 부호로서 가장 오래 전부터 또 가장 엄격하게 기술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여기서는 그것이 특별히 어떤 표현된 것이나 특수한 정신내용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에스프레시보(espressivo)라는 용어는 그때그때 분명히 표현해야 할 것들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작곡가 아르투어 슈나벨(Arthur Schnabel)이 그러한 일을 시도했지만 물론 실현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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