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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하느님 신앙
1. 하느님 신앙의 발생
하느님 또는 하나님하면 의례히 기독교를 생각하기 쉽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하나님이고, 엄청난 신학적 연구가 그를 중심으로 축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 신앙은 기독교에 한한 것만은 아니다. 여러 민족의 고대사회에 하느님 신앙은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종교현상이다. 이집트-중동-인도-중국 극동에 걸친 모든 고대사회에 예외 없이 하느님 신앙이 발견된다.
고대 사회에 이렇게 하느님 신앙이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까닭은 무엇일까?
20세기 초, 종교의 기원에 대한 연구는 그 문제 해명에 다각적인 검토를 행하고 있지만 그 요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첫째로, 고대에 올라갈수록 인간은 자연의 지배를 많이 받는다. 토착생활의 경제적 기반이 되는 것은 농업과 목축인데, 그것이 당시에는 전적으로 자연조건에 좌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배를 받는다는 위치에 있게 되고, 인간과 자연 사이에는 주종(主從) 관계가 성립된다.
자연과 인간 사이의 이런 주종관계는, 그것에 인간의 영육관(靈肉觀)이 반영되면 자연의 지배력에도 영혼이 있다는 관념이 발생하게 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 존재는 정신과 육체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수긍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육체를 지배하는 것은 정신이며 의지가 있는 곳도 정신이고 생명성 또한 정신에 있다고 생각될 것은 물론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삶과 죽음은 정신과 육체의 결합과 분리라는 현상으로 보게 된다. 이런 영육이원론(靈肉二元論)적인 생각이 자연과 인간 사이의 주종 관계에 반영되면 인간을 지배하는 자연에도 정신이 있다는 생각이 나게 된다는 것이다. 지배력이란 곧 의지(정신)의 작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지배력에 이렇게 정신이 있다고 보게 되면 그러한 자연은 이제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다. 정신적인 신성(神性)을 띠게 된다. 이것을 종교학에서는 자연현상의 신격화라고 부르고, 그렇게 신격화된 자연을 ‘자연신(自然神)’이라고 한다.
인류의 원시 종교는 모두가 이런 자연신을 중심으로 삼고 있다. 천계(天界)의 일월성신(日月星辰), 공계(空界)의 풍운뇌우(風雲雷雨), 지계(地界)의 산하맹수(山河猛獸)등이 신격화된 자연신이 원시사회에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자연신관(自然神觀)에 다시 인간사회의 지배윤리가 투영되면 어떻게 될까? 인간사회에는 반드시 사회를 이끌어갈 지배자가 있고 지배자는 사회의 안녕과 발전을 위해 율법에 따라 다스리게 된다. 법을 어긴 자는 벌하고 공을 세운 자에게는 상을 준다. 이런 지배원리가 자연신에 반영되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이다. 그곳에도 위계가 설정될 것이고, 그럴 경우 최고신의 위치에 오를 것은 태양신(太陽神)일 것이다. 천(天)-공(空) -지(地) 삼계(三界)에서 최상위에 있는 것은 천계(天界)이고 다시 그곳의 천체 중에서 최강 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태양이기 때문이다. 고대사회에 태양신 숭배가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최고신의 위치에 오른 태양신은 이제 천(天)-공(空) -지(地) 삼계(三界)를 다스리는 지배자요, 주(主. 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뜻을 나타낼 새로운 개념이 필요해진다. 고대 종교에 두루 나타나는 ‘하늘ㅡ임’이라는 개념은 그런 요구를 충족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의 천제(天帝), 인도의 인드라(Indra), 아스라엘 민족의 여호와(Jehovah) 등은 모두 ‘제천신(諸天神)의 주(主. 임)’라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하늘임’또는 ‘하느님’ㅡ‘하나님’이라는 개념은 대개 이상과 같은 과정을 거쳐 형성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러한 신 관념이 일단 성립하면, 인간은 그를 우러러 열렬한 신앙을 바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모든 일은 궁극적으로는 오직 하느님만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될 것이기 때문이다. 풍작을 위해 파종과 추수 때에 하늘에 제사하고, 전쟁의 승패를 하늘에 묻고, 정치 또한 하늘의 뜻을 살펴 행했던 것은 모두가 그런 신앙을 나타내고 있다. 인간사회의 모든 길흉이 하느님의 상벌로 헤아려지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 또한 그가 다스리는 세계에서 특히 인간에게 깊은 관심을 갖는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우러러 따르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늘의 인간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인간들이 갈 길을 못 찾고 방황하거나 스스로 하늘의 뜻을 어겨 타락과 멸망의 길을 더듬을 때, 그것을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떻게라도 이끌고 구원해 주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생각에서 발생한 것이 소위 이스라엘 민족의 메시아(Messiah) 신앙이 아닐까 한다. 하느님이 직접 아들을 내려 보내 인간을 구원해 준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메시아사상도 이스라엘 민족에만 한한 것이 아니다.
▶우리 동이족(東夷族)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고구려를 개국한 주몽(朱蒙)은 하늘의 정기(精氣)가 하신(河神)의 딸에 잉태하여 난생(卵生)하고 스스로 ‘태양의 아들(日子)’, ‘하늘임의 아들(天帝子)’임을 자처하고 있다. 신라의 박혁거세(朴赫居世) 또한 “광명으로 세상을 다스리라(光明理世)"는 천명(天命)을 받고 인간세상에 난생하였으며, 가락의 김수로(金首露)도 ‘유신가방(維新家邦)’하라는 천명을 받고 난생한 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단군설화에서는 더욱 발달된 형태로 나타난다. 환인(桓因)이 아들 환웅(桓雄)에게 “인간 세상을 크게 이롭게 하라(弘益人間)”는 명을 주니 환웅은 그것(天符印)을 받고 내려와 웅녀(熊女)와 결혼하여 단군왕검(檀君王儉)을 낳았다는 것이다. 하느님(桓因)이 아들을 내려 보내 인간을 이끌어 새로운 역사를 창조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주몽ㅡ박혁거세ㅡ김수로ㅡ단군 등은 모두 새로운 역사를 참조한 동이족의 메시아라고 불러도 좋다.
하느님 신앙은 이상과 같이 기독교에 한한 것이 아니라 고대 종교에 두루 나타나는 보편적인 종교현상이다. 그리고 그와 관련된 메시아사상도 적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2. 하느님 관념의 개혁
그러나 이러한 고대종교의 하느님 신앙과 오늘의 기독교 신앙이 전적으로 동일하다고는 볼 수 없다. 그리스도 예수는 이스라엘 민족의 전통적인 하느님 관념을 계승하여 그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부여가 어떤 내용의 것인지는 신학 전공자가 아닌 필자로서는 자세히 헤아릴 수가 없다. 다만 필자의 상식적인 느낌을 말한다면, 구약에 나오는 여호와 신은 이스라엘 민족의 수호신이요, 인간의 죄를 가차 없이 징벌하는 냉혹한 율법의 신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신약에 비치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 그치지 않고 전 인류의 죄악을 용서하고 구제하려는 사랑과 도덕의 신이요, 단체적인 종교 의례보다는 개인적인 기도 속에서 아들과 만나는 아버지와 같은 인상을 준다.
불교는 인도의 전통적인 종교 관념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신 중심적인 신앙의 맹목성을 비판하고 새로운 인간 중심의 진리를 제시한 종교이다. 따라서 불교는 처음부터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불교는 이렇게 전통적인 종교 관념을 비판하는 데에서 출발하였지만, 그러나 종래의 하느님 관념을 전적으로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입장에 서 그것을 다시 폭넓게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 관념의 형성은 애초에 인간과 자연으로 구성된 세계에서 그들 사이에 주종관계가 있다는 관념에서 형성된 것임은 상술한 바와 같다. 그러나 그런 전제가 과연 정당성을 띤 것일까?
우리는 이제 이 점부터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왜 그러냐면 인간에게는 분명히 자유의지가 있어 업(業)을 일으키지만, 자연들은 의지가 없어 업의 작용을 받으면 단지 필연적인 반응을 보일 따름이다. 따라서 주종관계로 말한다면 인간이 오히려 자연을 지배하는 위치에 있다고 봐야 한다.
이런 견지에서 하느님을 되돌아 볼 때, 그가 만일 세계를 지배하는 의지를 갖고 있다면 그 또한 인간(중생)의 일종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세계를 지배할 위치에 올랐다면 그것은 그가 그럴만한 업을 쌓았기 때문이라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부처님은 인도 바라문교의 전통적인 하느님 곧 ‘인드라(Indra)’신을 인간의 업에 따라 나타난 과보의 일종으로 설하고 계신다. 뿐만 아니라 그가 인간으로 있을 때 그 집안의 성은 ‘코시카(Kosika)(橋尸迦)’였고, 그가 닦은 업은 ‘하기 어려운 보시를 능히 하는 것 능시(能施)’이었으므로 그의 현재 이름은 ‘사카(Sakka)능(能) 하늘임(deva nam indra)’이라 부른다고 설하고 계신다. 한자로 석제환인(釋帝桓因) 또는 줄여서 제석(帝釋) 등으로 번역되고 있다. 당시의 바라문들이 부처님의 이 말씀에 적이 당황하고 있음을 보면 그것은 그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가 이스라엘 민족의 전통적인 하느님 관념을 ‘사랑의 신’으로 지양하였듯이, 고타마 붓다 또한 인도 아리안 족의 전통적인 인드라(하늘임)신을 ‘능히 베풀어 주는 신’으로 지양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인도의 바라문 신학은 인드라와 같은 지배 신 관념에서 다시 세계를 창조하는 창조신의 개념으로 발전하여 그것을 ‘브라만(Brahman 梵)’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고타마 붓다는 그러한 브라만에 대해서도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우파니샤드 철학에서 설하는 바와 같이 브라만 신이 욕심을 일으켜 세계를 발생하였다면 브라만도 인간(중생)의 일종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현 신분 또한 업보의 일종으로 봐야 하고 그런 업보를 가져온 전생의 업이 문제된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당시의 바라문들을 향해 “브라만에 이르는 길은 자비희사(慈悲喜捨)의 네 가지 무량한 마음(四無量心)을 닦는 것”이라고 설하고 계신다.
고타마 붓다의 이러한 선언은 당시의 전통적 바라문 신학에 커다란 도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왜 그러냐면 브라만 신은 바라문계급의 수호신과 같은 성격을 띤 것이었고, 피비린내 나는 희생의 제물을 받는 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편협한 브라만 신을 부처님은 사성(四姓)을 모두 평등하게 사랑하고 생명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무한한 사랑[慈悲喜捨]의 신으로 개혁하신 것이다.
이상과 같이 예수 크리스트가 전통적인 하느님 관념을 율법과 징벌의 신에서 사랑의 신으로 개혁하였듯이, 고타마 붓다 또한 인도 아리안 족의 하느님을 능히 베풀어 주는 신(인드라), 무한한 사랑의 신(브라만)으로 개혁하고 계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타마 붓다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브라만과 인드라는 한결같이 불교의 홍통과 수호를 약속하는 신으로 설하고 있다. 부처님이 처음 붓다가야 네란자라 강가 보리수 아래서 성도하신 뒤 깨달은 법이 너무나 미묘하여 세상에 나가 설할까 말까 망설이고 계셨을 때, 부처님께 전법을 권청한 것은 브라만 신이었다고 한다. <初轉法輸經>
브라만 신이 하늘에서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은 절대 불변의 영원한 곳이라고 생각하였을 때 부처님이 그를 찾아가 그 생각의 오류를 지적하자, 브라만은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었다는 경전도 보인다.
<中阿含 卷17 梵天請佛經>
불교 수호를 다짐한 신으로는 의례히 인드라 신이 등장한다. 특히 대승반야경에서의 인드라 신은 그 비중이 대단하다. 반야경 중에서 가장 성립이 빠르다는 소품반야경을 예로 들면, 제1초 품에서 대승반야의 기본 입장이 설해진 다음, 제2품에서 6품까지가 모두 석제환인(인드라)을 중심으로 설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세계를 지배하고 악신(아수라)과 싸워 이기는 정의와 승리의 신은 브라만이 아니라 인드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브라만과 인드라가 이렇게 불교 경전에서 교법의 홍통과 수호를 다짐하는 것으로 설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바라문교가 지배하는 당시의 사회에서 신흥 불교가 퍼져 나가기 위해 짐짓 그런 방편을 쓴 것일까?
이 문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모티브는 브라만과 인드라와 같은 전통적인 신 관념에 대한 정확한 성격 규정에서 필연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닐까 느껴진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브라만과 인드라가 인격적인 의지를 갖고 있다면 인간(중생)의 일종 일수밖에 없고, 인간의 일종이라면 생주이멸의 덧없음을 면할 수가 없다. 그리고 생주이멸의 덧없음을 면할 수가 없다면, 생사로부터 진정한 해탈의 길을 제시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정법의 수호를 약속하는 것은 단순한 호 교적인 방편에서가 아니라, 하느님 존재의 본질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서 나온 논리적 필연성의 결과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고타마 붓다가 전통적 하느님 관념을 개혁한 내용은 실로 파격적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바라문교의 받는(受施) 신에서 주는(能施) 신으로, 한정된 사랑의 신에서 무한한 사랑의 신으로,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 권위에 사로잡힌 신에서 진리를 희구하는 신으로 엄청난 개혁을 단행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3. 한국 고대 하느님 관념의 불교화
한국에 불교가 전해지는 것은 A.D. 4세기경, 부족연맹국가에서 고대국가로 발돋움한 고구려-백제-신라 삼국(三國)이 치열한 정복전쟁을 수행하고 있던 때에 해당된다. 이런 상황에서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강력한 왕권의 확립이라고 해야 한다. 전쟁 수행에 필요한 막대한 인력과 물자를 동원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리더십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삼국 정권은 어떠했던가?
무교(巫敎)적 하느님 관념에 사상기반을 둔 귀족세력에 의해 왕권은 심히 제약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앞서 논한 바와 같이 부족 연합국가의 초대 왕위에 오른 주몽ㅡ박혁거세ㅡ김수로 등은 모두 하늘임의 아들임을 자처한 천강성왕(天降聖王)들이었다. 따라서 그들과 그들의 신성한 혈통을 이은 직계 왕들의 종교적 권위는 절대적인 것인 만큼, 삼국의 초기국가 형태는 그들을 중심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가 전래할 무렵, 삼국의 황실은 그런 천강성왕과는 계통이 다른 이계(異系) 왕족이 등장해 있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고구려 왕실은 해(解)씨에서 고(高)씨로, 백제는 해씨에서 부여(夫餘)씨로, 신라는 박(朴)씨에서 석(昔)씨로, 석씨에서 다시 김(金)씨로 왕성(王姓)이 모두 바뀌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계 왕족의 등장은 권력구조의 변천에 따른 것이겠지만, 어떻든 그들의 종교적 권위는 천강성왕과 그 직계 혈통에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것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직계왕족이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니라 왕실에서 물러나 귀족계급을 형성하고 있었다면 종교적 권위는 여전히 그들이 쥐고 있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아닌 게 아니라 제천(祭天)과 사직(社稷)은 여전히 본 계 왕족이 관장하고 있으며, 새로운 왕의 추대와 중요한 국가정책은 귀족세력과의 타협 아래 이뤄지고 있다. 신라 화백(和白) 제도는 그러한 정치적 타협을 시사 하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것이다. 이것은 곧 정치권력의 분산을 의미한다.
따라서 당시 삼국의 왕권은 심히 제약되고 있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왕권의 제약은 무교 적 하느님 신앙이 지배적 관념형태로 존속하고 있는 한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무교 적 하느님 신앙을 바탕으로 발달해 온 고대국가는 이제 전통적 관념의 구각(舊殼)에 싸여 그 발전이 정체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럴 때 삼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왕실의 지지와 귀족 측의 반대라는 날카로운 대립 속에서 행해진다. 신라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는 그런 대립의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불교가 이렇게 왕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까닭은 무엇일까? 왕권강화와 국가발전에 장애적요소로 작용하고 있던 귀족세력의 무교 적 사상기반을 무너뜨릴 만한 사상원리가 불교에서 발견된 것일까?
여기에서 우리는 초전기 불교의 교리내용이 업 설(業說)이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업 설은 민도에서 바라문계급의 종성론(種姓論)을 부정한 불교의 대표적인 이론이다. 따라서 그것은 삼국에서도 귀족세력의 무교 적 사상기반을 해소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으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브라만의 혈통을 이었다는 바라문 계급의 종성과 하늘임 아들의 혈통을 이었다는 본 계 왕족의 골품(骨品)은 동일한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불교 업 설에는 다시 무교 적 천강성왕에 대응할 만한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는 것이 함께 설해지고 있다. 정법으로 선정(善政)을 베푸는 전륜성왕이 출현하면 전쟁 없이 천하가 통일되고, 미륵과 같은 부처님도 그런 왕이 다스리는 세계에 출현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업 설은 당시의 무교 적 하느님 신앙에 입각한 정치이념을 대치할 만한 충분한 사상원리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삼국의 왕실이 적극적으로 불교를 수입하고 홍통한 것은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는 단순한 추측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현존사료 또한 그런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는 것이다. 삼국 중에서 비교적 많은 자료를 남기고 있는 것은 신라인데, 그 최초의 국영 가람인 흥륜사(興輪寺)에 봉안된 부처는 미륵이었으며, 진흥왕은 만년에 삭발 염 의하여 전륜성왕을 본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두 아들에게도 동륜(銅輪)과 쇠륜(鐵輪)이라는 전륜왕적인 이름을 붙여 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삼국의 불교 수입과 홍통은 왕권강화와 국가발전을 꾀했던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데, 그러는 과정에서 전통적 무교의 종교 관념과 의례는 점차로 불교적인 것으로 대치되어 간다. 이에 대한 자세한 고찰은 할애하지만, 특히 우리들이 관심할 바는 무교 적 하느님 관념이 어떻게 불교적인 것으로 대치되느냐 하는 점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현존 사료를 살펴볼 때,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천사옥대(天賜玉帶)』조에, 제26대 진평왕은 하늘임(天皇)으로부터 옥대를 받았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그가 내제석궁(內帝釋宮)을 지었다는 데서 그 하늘임은 제석이라고 봐야 하는데, 그것은 곧 전통적 하느님이 불교의 제석으로 수용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왕이 제석으로부터 옥대와 같은 부명(符命)을 받는다는 관념을 불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런 생각은 주(周)에 대항한 동이족의 서언왕(徐偃王)이 붉은활과 화살을 얻고, 또 단군설화에서 환웅(桓雄)이 환인(桓因)으로부터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았다는 것과 같이 무교 적 천명(天命)사상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진평왕이 옥대를 받았다는 것도 불교적인 것이 아니라 무교적인 요소라 하겠고, 동시에 그것은 불교를 흥륭시킨 신라 김 씨 왕실이 정통적 본 계 왕족에 미칠 수 없었던 종교적 권위를 새로운 불교적 하느님 신앙에 결부시켜 이를 확립코자 함을 보여 준다고 할 것이다.
전통적 하느님을 제석(祭席)에 수용하려는 이러한 작업은 진평왕을 이은 후계 왕들에 의해서도 줄기차게 추진되고 있다. 제 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은 제석이 있는 삼십삼천(三十三天. 欲界 제2천 도리천)에 묻어 달라는 유촉에 따라 경주 낭산(狼山)의 남쪽에 장(葬)하게 되는데, 그 밑에 다시 명랑(明朗)에 의해 사천왕사(四天王寺)가 조영(造營)된다. 사천왕(四天王. 欲界 제1천)은 삼십삼천의 바로 아래 위치하여 제석을 받들고 있는 천신이다.
그리고 제 30대 문무왕(文武王)은 사후 동해 호국용(護國龍)이 되겠다는 발원에 따라 동해 대왕암에 수장(水葬)된다. 용은 사천왕 아래 속한 부중(部衆)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제석→사천왕→용왕에 이르는 불교적 하느님 조직이 차례로 신라 김 씨 왕실과 결부되면서 신라 땅에 뿌리 내리는 것을 본다.
이런 과정에서 신라는 마침내 삼국을 통일하게 되는데, 그런 통일대업이 성취된 시기의 제31대 신문왕(神文王)은 삼십삼천의 하나로 돌아간 김유신(金庾信)과 동해 호국용이 된 문무왕(文武王)으로부터 검은 옥대(玉帶)와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만들 대를 받고 있다. 검은 옥대는 통일대업의 성취(黑色)를 의미하고, 피리는 새 시대를 성음(聲音)으로 다스리라는 천명을 상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신라불교는 전통적 하느님 관념을 완벽한 제석천 체계로 불교 화 하고, 그로써 김 씨 왕실의 종교적 권위를 확립하고 있다. 고구려와 백제 2국의 자료는 영세하여 자세한 것을 알 수 없지만, 그곳에서도 비슷한 제석 신앙이 토착화되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불교 전래로 우리 고대의 하늘임은 불교의 제석천으로 수용되었다고 결론할 수 있는데, 이때 브라만보다 인드라가 선택된 것은 그것이 더 우리의 하늘임 관념에 가까웠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고대의 무교적 하늘임은 창조신이라기보다는 지배신이라는 성격이 강함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신라 초전기(初傳期) 불교의 불교적 하느님 신앙은 신라 통일기의 화엄사상(華嚴思想)에 의해 더욱 민중 깊이 토착화되어 갔음에 틀림없다.
<화엄경>에는 무수한 천신이 등장하는데, 거기서도 <반야경>에서와 같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제석인 것이다. 이것은 다시 고려 5백년의 불교를 통해 완전히 한국의 하느님 신앙으로 정착했다고 보아도 좋다. 고려대장경은 그런 불교적 하느님 신앙에 입각해 새겨진 것이다. 2차에 걸친 대장경 판각이 모두 거란과 몽고의 침입이라는 국난 속에서 국가수호를 천신께 발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삼국유사『기이(紀異)편』
첫머리에 실린 단군설화는 그러한 불교적 하느님 신앙이 마침내 한민족의 정신사적 원천의 위치에 오른 것을 보여 주고 있다. 환인(桓因)은 석제환인(釋帝桓因)을 줄인 말이고, 따라서 일연(一然)은 그것을 제석(帝釋)이라고 주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뒤에 나온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記)에는 제석이라는 말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 민족의 고대 하늘임 신앙을 수용한 불교적 하느님(帝釋) 신앙은 한민족의 마음깊이 토착화되었다고 단언해도 좋다. 그러나 그러한 한국적 하느님 관념은 순전히 불교적인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역사창조와 정신적 원천으로서의 신성한 천명(天命) 사상은 그대로 계승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4. 기독교와의 만남
19세기 경 서세동점의 물결을 타고 우리나라에는 다시 서양의 기독교가 전래하기 시작한다. 폐쇄적인 봉건사회는 이 새로운 서구 종교에 의해 근대화 작업을 촉진케 되는데,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여호와 신이다. 그런데 이 여호와 신을 ‘하나님’이라고 번역함으로써 무불(巫佛) 습합의 전통적 하느님 관념은 다시 기독교적인 하나님과 부딪치게 된 것이다.
더구나 오늘날 한국 교회는 기독교의 토착화 작업을 서두르고 있다. 그런 토착화 작업이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애써 다른 점을 찾는 것보다는 오히려 같은 점을 찾는 방향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럴 경우 기독교의 하나님은 무불습합의 전통적 하느님과 만나지 않을 수가 없다.
만일 이런 교섭이 이루어질 수만 있다면, 이것은 세계 종교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고타마 붓다와 예수 크리스트라는 두 대표적인 성인에 의해 개혁된 하느님 사상이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 땅에서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불교적인 지혜와 기독교적인 신앙이 융화된 그런 한국적 하느님 사상은 종교 간의 아집과 대립을 멀리 초월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는 기독교의 열렬한 신앙적 자세를 받아들일 수 있고, 기독교는 불교의 구도적 자세를 존경할 수 있어, 한국적 하느님 신앙은 그 폭을 무한히 확대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하느님 신앙에서 새로운 민족사를 창조할 신성한 정신이 어찌 용솟음치지 않겠는가. 우리 민족을 지킬 애국가 속의 ‘하느님’은 바로 이러한 하느님을 뜻하는 것으로 보고 싶다.
출처 :병고 고익진 <불교의 체계적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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