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렘베티카 》그리스 민중의 노래
산토리니 섬의 풍경/ 사진출처: 네이버 이미지 자료사진
잘 알려진 대로 '신이 선택한 나라' 그리스는 2,500년 서양 역사의 발원지이자 민주주의의 발상국이다. 지금은 유럽에서 손꼽히는 휴양지가 된 크레타 섬은 기원전 160년경에 서양 문명의 원조인 미노아 문명이 시작된 곳이며 펠로폰네소스, 미케네, 아테네, 스파르타 등 서양사 교과서에 나오는 고대 문명의 중심지들이 모두 그리스에 모여 있다.
그리스는 B.C.146년에는 로마의 속주였으며, AD.330년부터 1453년까지는 동로마 제국의 속주였고, 그 뒤 1821년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호족豪族이 독립 전쟁의 횃불을 올리기까지 로마, 슬라브, 프랑크, 베네치아, 터키 등 끊임없이 이민족의 지배를 받았다. 독립 이후에도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간접 지배를 받았고, 제2차 세계대전 전후에는 이탈리아, 알바니아, 나치 독일의 침략을 받았다. 특히 1453년 술탄 마호메트2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에 의해 비잔틴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서 1458년 그리스를 포함한 발칸 반도 전체가 터키 지배하에 들어가 1821년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배는 약 400년 간 지속되었다. 이른바 터키의 명에 라고 불리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기는 너무나도 길고 가혹한 것이었다.
1700년까지 그리스의 인구가 4분의 1 이나 감소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오스만 제국의 압정이 얼마나 가혹한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래서인지 현대 그리스인은 일찍이 지중해 일대를 제패하여 네아폴리스(나폴리), 마살리아(마르세유), 스미르나(이즈미르) 등지에 식민 도시를 형성했을 당시의 그리스인과는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현대 그리스인은 중세 이후 그땅에 침입해 온 슬라브인과 터키인 등 과의 혼혈 민족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같이 그리스정교의 신앙과 같은 언어, 같은 민족의식으로 결속되어 있으며, 생활습관에서도 옛 농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터키라는 이름에서 소(小)아시아 반도를 차지하고 있는 공화국을 머리에 떠올리지만, 그리스인이나 터키인들에게는 그 같은 지리적 개념이 없다. 그들은 소아시아의 땅을 터키라고 부르는 대신 '소아시아' 혹은 '아나톨리아' 라고 부른다. 터키란 그들 자신이 일찍이 속해 있던 하나의 문화적 개념인 것이다. 국경선을 절대시하는 우리는 특히 그리스라든가 터키의 영토적 범위가 시대에 따라 대폭적으로 신축을 거듭하고 역사적으로 상당한 중복 부분을 갖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한다.
이처럼 그리스는 유럽과 아시아의 문화적 교차로에 서서 양 대륙으로부터 창조적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 결정적 근거가 그리스 음악의 아시아적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 음악의 동방적인 요소는 음색, 음계, 멜리스마, 리듬, 그리고 악기 등 여러 가지 면에 잘 나타난다. 음계에는 아랍계의 선법(터키에서는 마캄)을 포함하고 있고, 리듬에서도 아랍계로 보이는 3+2+2의 7박자, 4+5의 9박자 등의 부가 附加 리듬이 넓게 사용되고있다. 그리스의 악기도 대부분 중근동기원( 中近東起源) 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악기인 부주키(Bouzouki)는 터키의 사즈(Saz)로부터 유래되었다. 또 소형의 부주키를 바글라마(Baglama) 라고 부르는데 이것도 터키의 발라마가 그 원형이다. 이처럼 악기에 동방계가 많으면 당연히 사운드도 아시아다워지는 것은 물론이다. 그래서 그리스의 보컬은 서구풍의 아름다운 소리보다. 아시아적인 잡음 성분이 많은 소리가 사랑을 받으며 이른바 멜리스마가 붙은 가창법을 쓰는 것도 분명히 아시아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 대중 음악의 가장 개성적인 양식으로서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것은《렘베티카(Rembetika)》인데 이 음악은 대단히 복잡한 문화적 혈통을 가지고있다. 그러나 《렘베티카》가 누구에 의해 혹은 어느 지방에서 기원하였는가에 대해 서는 논란이 분분하다. 다만 지금은 터키 영토가 된 스미르나가 《렘베티카》의 발전에 끼친 공헌도에 대한 이의는 없다고 할 수 있다 《렘베티카》를 발전시킨 요소 중의 하나로 소아시아의 에게해 연안에 있는 항구 도시 스미르나(현재 이름은 이즈미르)를 들 수 있다. 소아시아의 서해안 각지에는 고대로부터 그리스인들이 살고 있었고 이들은 터키인의 자유분방하고 향락적인 삶의 스타일에 익숙해져 있었다.
1919년 터키에서 무스타파 케말을 중심으로 한민족 혁명이 일어나 술탄 정부가 타파되고 터키 공화국이 성립되자 터키의 스미르나 지방에 군대를 파견하고 있던 그리스는 이 지방을 고수하기 위해 케말 정권과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전쟁에서 그리스를 지지하고 나선 것은 영국뿐이었으나 전세가 터키군의 우세로 기울자 영국은 그리스에 대한 지원을 중단해 버리고 결국 그리스는 패전의 아픔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전쟁의 결과로 그리스와 터키 사이에 맺어진 로잔조약(1923년)에 따라 동부 트라키아와 스미르나 지방은 터키의 영토가 되고, 터키 영토에 살고 있는 그리스인과 그리스 국내에 살고 있는 터키인과의 강제 교환이 이루어졌다. 1922년에서 1923년 사이에 고대로부터 소아시아에 정주해 있던 그리스인 약 150만 명이 난민 신세가되어 조국으로 돌아갔다. 이들은 주로 아테네와 항구 도시 피레우스로 흘러 들어가 도시 빈민가의 순환 속에 동화되면서 그리스의 사회, 경제적 위기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런데 이들 난민들 중에는 적지 않은 수의 음악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원래 항구 도시 피레우스에는 항구다운 특유의 자유분방하고 외설스런 생활 양식이 있었고 거기에는 지나가는 배들의 선원, 창녀, 손쉽게 연애 상대를 구하려는 놈팡이들과 깡패들이 세기말적인 기분으로 인생을 즐기고 있었다. 특히 하시시(인도대마초)를 흡입할 수 있는 타케데스는 렘베티스라고 불리는 밑바닥 인생들이 단골로 모여드는 장소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토착 선율 및 터키 선율, 악기의 조형적 혼합에 의하여 수십 년의 짧은 시기만에 발칸반도에서 가장 뛰어난 문화적 창조물인 《렘베티카》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렘베티카》라는 이름이 '밑바닥 인생(from the gutter)'을 가리키는 터키의 고어인 '렘베트(rembet)' 로부터 유래되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1920년대를 전후한 초기의 《렘베티카》는 피레우스 파와 스미르나(이즈미르) 파 라는 두 가지의 흐름을 보였다. 예컨대 <피레우스 파>는 타케를 기반으로 부주키와 바글라마를 주 악기로 하면서 렘베티스들의 심정을 노래했다. 반면 <스미르나 파>의 주 활약 장소는 터키의 영토로 편입된 스미르나, 이스탄불과 아테네, 그리고 그리스 이민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사는 뉴욕 등지의 카페였다. 악기도 바이올린과 산두리(Sandouri: 덜시머, 양금), 카노나키(Kanonaki: 찌터), 사즈와 클라리넷을 포함하고 있었고 가수의 중심은 여성이었다. 또 스미르나 파의 노래에는 '아망, 아망(Aman, Aman, Alas, Alas)' 이라는 감탄사를 쓰는 영탄조의 노래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그런 노래를 <아마네스(Ammanedhes)>, 그들이 출연하는 카페를 <카페아망> 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두 유파의 음악성의 차이는 반도부(半島部)와 도서부( 島嶼部)의 차이를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 두 유파 모두 노동 계급 사이에 존재해 왔던 것이라고는 하지만 세련된 동방 문화를 이어받고 대도시 카페의 통속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스미르나 파보다는 참다운 빈민 문화인 피레우스 파의 음악이야말로 '그리스의 블루스' 로 불려지는 《렘베티카》의 주류였다고 볼 수 있다. 《렘베티카》의 스타로는 오늘날 이 양식의 창시자로 간주되는 <마르코스 밤바카리스(Markos Vambakaris)>와 '렘베티카의 아버지'로 불리는 <바실 리스 찌짜니스(Vassilis Tsitsanis)>가 있다.
마르코스 밤바카리스는 시로스섬 출신으로 학교라고는 문 앞에도 가보지 못한 채 피레우스의 홍등가에서 깡패 생활을 하던 위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쟁의 여지가 없는 그의 예술적 재능과 대중 매체에서 받은 대단한 평판은 그의 출신을 둘러산 숱한 에피소드와 더불어 그를 전설적 존재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마르코스 밤바카리스는 15살 때, 배에 몰래 들어가 피레우스에 도착, 처음엔 부두 노동자로 밑바닥 생활을 시작했다. 같이 피레우스에 온 그의 형 하나는 살인죄로 종신형을 받았고 또 하나는 마약 중독으로 노상에서 객사했다고 한다. 1925년의 어느 날, 마르코스는 동료 하나가 연주하는 부주키를 듣는 순간부터 그 음악에 흠뻑 빠지고 말았다. 고향 시로스 섬에서도 부주키를 들은 적이 있지만 피레우스에서 들은 부주키 음악은 전혀 다른 음악이었다. 이렇게 해서 순전히 독학으로
부주키 연주법을 익힌 마르코스 밤바카리스가 피레우스의 음악계에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할 때쯤에는 이미 《렘베티카》가 연주되는 악기에 대한 원칙이 확고히 세워지게 되었다. 피레우스 파의 렘베티카에서는 산두리나 클라리넷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게 되었고 대신에 부주키와 바글라마가 《렘베티카》를 상징하는 악기가 된것이다. 마르코스 밤바카리스로 대표되는 1940년대 《렘베티카》는 확고한 리얼리티를 갖는 것이기는 해도 그 폭이 좁히는 것은 부인 못할 사실이었다.
체질화된 노동 계급적 생활 시각을 그대로 여과 없이 표현한 노래가 중산층을 포함하는 폭 넓은 청중의 공감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해서 밤바카리스가 자신의 체험을 넘어선 음악을 만들 만한 재주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 같은 한계를 극복한 인물이 <바실리스 찌짜니스>였다. 중부 그리스의 트리 칼라에서 부유한 은세공 장인 가정에서 태어난 바실리스 찌짜니스는 아테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아르바이트 삼아 타베르나(대중음식점)에서 부주키를 연주했다. 그는 1940년 그리스 제2의 도시 테살로니키에서 자신의 타베르나를 열고 매일 밤마다 거기서 부주키를 연주하면서 《렘베티카》를 써 나가기 시작했다. 빈민가에서 태어난 《렘베티카》가 처음으로 '존경스러운' 사회에 의해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오로지 <바실리스 찌짜니스>에 의해서였다.
(바실리스 찌짜니스는 《렘베티카》의 개혁자이다. 좀 더 자유롭고 보편적인 표현 양식을 갈구하던 음악가와 애호가들에게 렘베티카와 부주키를 한층 접근하기 쉬운 언어로 만들었다. Hommage a Tsitsa-nis, [Greces(Ocora C559010 HM65, France) 음반 사진 부분)]
밤바카리스 시대까지의 《렘베티카》는 언급한 대로 터키 음악의 영향이 기본구조를 이루고 있었고 곡은 선법 패턴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찌짜니스는 음으로 서구 음악을 하는 방법, 즉 하모니를 기초로 해서 곡을 쓰기 시작했다. 이처럼 찌짜니스는 착실하게 《렘베티카》의 폭을 넓혀 나가면서 차츰 피레우스 파와 스미르나 파 라는 두 개의 스타일을 혼합하는 데 성공 했고 《렘베티카》를 결속력을 갖춘 전체로서 다듬어 나갔다.
1950년대와 60년대는 《렘베티카》의 원숙기였다. 대중의 창조성의 물결을 타고 피레우스와 아테네의 빈민가에서 태어난 《렘베티카》는 곧 라디오, 음반 산업, 쇼 비즈니스 덕분에 급속도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계속되는 정치적 불안과 군사 독재의 파괴 효과는 그리스의 문화를 호되게 강타했지만, 어느 사이에 그리스 민족의 문화적 동질성의 상징이 되어버린 《렘베티카》는 미키스 테오도라키스(Mikis Theodorakis)로 상징되는 '네오 키마(Neo KimaNew Wave)' 라는 내밀한 체험의 표현으로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특히 멜리나 메르꾸리의 영화 '일요일은 참으세요 (Never on Sunday, 1960년)'와 안소니 퀸 주연의 영화 '희랍인 조르바(Zorba the Greek,1964년)'의 O.S.T는 런던에서 뉴욕, 서울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대도시들을 이 신비한 그리스 음악의 매혹적인 주문에 걸리게 만들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사방팔방으로 더듬이를 드넓게 뻗친 엄청난 작업 규모로 인해 테오도라키스 음악의 핵심과 전체상은 한눈에 잘 보이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이 앨범은 단지 한 사람의 예술가, 가수로서의 그를 만나게 해준다. "Mikis Theodora- kis Sings Theodorakis, (Intui- tion 30 59 2, Germany))
《렘베티카》는 앵글로색슨의 록이나 팝 및 낭만적인 발라드와 우열을 다투던 1980년대의 경쟁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새로운 상업적 요청으로 라이카(Laika)' 라는, 음악적으로 유연성을 더한 팝 스타일의 음악 또한 손을 내밀기도 했었다. 그러나 《렘베티카》는 그러한 여정을 통해 스스로의 창조적 특성을 찾을 수 있었다. 위대한 음악가는 언제나 과거 속에서 자양분을 발견하고 동시에 새로운 것을 고취시켜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낼 줄 아는 사람이다. 전설적인 존재인 마르코스 밥바카리스와 바실리스 찌짜니스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시대의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와 마노스 하지다키스(Manos Hadjidakis), 멜리나 메르꾸리
(Melina Mercouri), 마리아 파란두리(Maria Farandouri)에 이르기까지 《렘베티카》의 역사에 참여하는 영광을 가졌던 인물 중에는 이렇듯 불멸의 이름들이 포함 되어 있다. 이들이 열어 놓은 길을 오늘날에는 요르고스 달라라스(George Dalaras), 하리스 알렉씨우(Haris Alexiou) 같은 스타들이 따르고 있다. 사람들이 여전히 매혹적인 《렘베티카》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무엇보다도 자유/고독/시간/ 사랑/죽음 같은 영원한 주제들로부터 영감을 이끌어 내는 그 서정의 눈부신 미학을 발견하는 법을 가르치면서~.
ㅇ 출처 /《 월드뮤직 / 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 / 서남준 著, 대원사 刊(2003) 》 PS) 2003년에 출간되어 지금은 절판된 책 이지만 음악에 관심이 있으신.분들은 중고서적이라도 구입해 읽어볼 가치가 충분한 책 이라 사료되어 일독을 권해드립니다
(요르고스 달라라스는 무게 있고 드라마틱한 창법, 무엇보다도 기타와 부주키를 눈부시게 구사하면 라틴에서 록까지 다양한 외부의 요소를 스스로의 음악에 통합시키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그리스를 대표하는 가수로 손색이 없다. 스팅도 참가한 그의 2001년 앨범. George Dalaras The Running Roads(EMI 72 43 533065 26, Greece).)
(예나 지금이나 하리스 알렉씨우의 음악에는 부주키를 중심으로한 그리스 전통 음악의 사운드와때로는 7박자나 9박자조차 뛰어 넘어야 하는 복잡한 발칸반도의 리듬이 항상 그 배경을 이룬다. 1988년도 작품인 이 앨범에서 우리는 불꽃처럼 화려하게 타오르는그녀의 열정을 발견할 수 있다. Haris Alexiou, "The Night Calls For Love (Minos MCD 710, Greece).)
Haris Alexiou - Agnostos Tytlos
(하리스 알렉시우 - 언덕 저편에, 그리스 희귀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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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oL8SjY8eVD8?si=_NtsXFulvZL8M7qh
가사
자 이리 오세요 저예요.
손을 가볍게 잡아요
그대는 오르기 힘들테니까
내가 늘 가는 언덕 저편, 뒷산 숲길입니다
하늘과 땅이 맞닿은 저 곳에 서며
이 곳의 시끄러움이 들리지도 않고
그리고 먼지 조차 보이지않는 사진속의
풍경이랍니다.
물론 근심 걱정도 오르는 길에
바람과 땀방울에 사라져 버렸을테구요
비록 지금 비 오고 어두운 밤이지만
주변이 칠흑같이 어둡진 않아
큰 동네의 불빛들이 작은 길의 흔적을
희미하게나마 보여준답니다
어릴 적 언덕 저편의 그 곳은 신비와
꿈의 세상이었죠
그러나 알아요 언덕 저편의 집들도
울 집과 비슷하고 사람들도
나랑 같이 생겼다는 것을
그들이 걸어온 길도 꾸불꾸불
흙 길이었다는 것도
지금도 저 아랫동네 어느 집에선
한숨 소리가 있겠지요
그 소리에 마음 아파하는 이웃들이
더 많을테구요
그러나 작은 안개비 사이로 형체도 없는
희미한 색깔의 동네 불빛들
여름날의 은하수 한 자리인 듯 합니다
그 빨강, 파랑, 노랑, 하양의 불빛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양 큰 호롱불 마냥,
별빛의 깜박거림과 같은 졸음도 없이
평화로운 밤을 지키고 있지요
그래요 내가 먼저 보아 그 광경을
알거든요
그래서 그대와 같이 가보고 싶었거든요
마치 유년시절 낙원의 땅이 저기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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