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재(慵齋) 이종준(李宗準)
- 경주이씨 월성군후 대사헌공파(月城君後大司憲公派) 중조 27세
생몰(生沒)년은 1458~1499(연산군 5).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자는 중균(仲鈞), 호는 용재(慵齋)· 용헌(慵軒)· 부휴자(浮休子) 상우당(尙友堂)·
태정일민(太庭逸民)· 장육거사(藏六居士) 등이다.
안동(安東) 출신으로 만실(蔓實)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대사헌 승직(繩直)이고
아버지는 시민(時敏)이며 어머니는 현감 권계경(權啓經)의 딸이다.
홍준(弘準)의 형으로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85년(성종 16) 별시문과에 1등 3인으로 급제하였으며
뒤에 의성현령(義城縣令)으로 나가서 「경상도지도(慶尙道地圖)」를 만들었다.
1493년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이 되고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글을 잘 짓는다고 하여 일본호송관(日本護送官), 북평사(北評事) 등의
직책을 맡았고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에 이르렀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김종직(金宗直)의 문인(門人)으로
몰려서 함경도 부령(咸鏡道富寧)으로 귀양가는 도중에
단천군 마곡역(端川郡麻谷驛)을 지나다가
옛날 송(宋)나라 이사중(李師中)이 바른 말을 하다가 귀양가는 당개(唐介)를
송별하면서 지은 시 한 수를 써놓고 갔는데,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 이승건(李承健)이 이는 나라를 비방하고
왕을 기롱(譏弄 : 헐뜯고 농간함)한 것이라고 조정에 고하였다.
연산군은 이종준(李宗準)이가 원망하는 뜻을 가졌다 하여 서울로 압송하고
국문하다가 도중에 죽었다.
당시 홍귀달(洪貴達)이 그를 구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뒤에 신원(伸寃- 원통하게 당했던 신분이 원래대로 회복됨))되어
부제학(副提學)으로 추증(追贈)되고
안동(安東)의 경광서원(鏡光書院)· 백록리사(栢麓里祠)에 제향(祭享) 되었다.
시(詩)· 서(書)· 화(畵)에 능하였고 그림은 매(梅)· 죽(竹)을 잘 했다고 하나
전하지 않고 현재 장식화풍으로 그려진 <송학도(松鶴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점이 그의 유일한 유작으로 전하고 있다.
[저술활동- 편찬 및 간행]
저서로는 『용재유고(慵齋遺稿)』가 있고
『신선태을자금단(神仙太乙紫金丹)』 의서(醫書)가 있다.
그리고 이극돈과 《유양잡조(酉陽雜俎)》· 《당송시화(唐宋詩話)》·
《유산악부(遺山樂府)》 및 《파한집(破閑集)》· 《보한집(補閑集)》·
《태평통제(太平通載)》 등을 간행하였다.
경상좌도(慶尙左道) 지도를 제작하였다.
현재 장식화풍으로 그려진 「송학도(松鶴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점이
그의 전칭작품으로 전하고 있다.
○ 용재유고(慵齋遺稿)
조선 전기의 문신 이종준(李宗準:1458~1499)· 이홍준(李弘準:?~?) 형제의
시문집.
1책(48장). 목판본. 1824년(순조 24) 후손이 간행한 것을
1911년 후손인 도형(道炯)· 재윤(在胤) 등이 중간했다.
권두에 김희주(金熙周)· 이재집(李在緝)의 서문과
세보도(世譜圖) 다음에 시 20수와 소(疏)·계(啓) 각 1편,
발(跋)· 묘갈(墓碣)이 실려 있다.
소는 사직소이고 계는 김일손(金馹孫)·조위(趙偉) 등과 함께
문종비 권씨의 복위를 건의한 것이다.
부록으로 행장(行狀)· 묘갈명(墓碣銘) 등과 〈사화수말 史禍首末〉·
〈무오당적 戊午黨籍〉 등의 기록이 있다.
뒤쪽에 이홍준(李弘準)의 〈눌재유고(訥齋遺稿)〉라는 이름으로 뒤에 붙였다.
여기에는 〈월성이씨가훈(月城李氏家訓)〉과 〈동약(洞約)〉이 들어 있다.
〈동약〉에는 부조(扶助) 항목과 벌칙, 각각의 세부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그밖에 행장 수편과 축문(祝文) 등이 들어 있다.
용재유고는 규장각, 고려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초간본》
저자의 문집은 후손 李昌郁(이창욱)이 흩어진 遺文(유문)을 모으고
저자의 동생 李弘準(이홍준)의 「訥齋遺稿(눌재유고)」를
附集(부집)하여 1책으로 만든 뒤,
權思浹(권사협)ㆍ李野淳(이야순)의 교정과 편차를 거쳐 1824년에 간행하였다.
《중간본》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 한국정신문화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그 뒤 후손 李相晉(이상진)ㆍ李相昇(이상승) 등이 家內(가내)에 전해 내려오던
기록과 朝野(조야)의 여러 遺稿(유고)에서 널리 收拾(수습)한 시문을 추가하여
崔益鉉(최익현)의 序(서)를 받아 1901년 목활자로 간행하였다.
《삼간본》
현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1911년에 후손 李相晉(이상진)ㆍ李道炯(이도형)과 金瀅模(김형모)ㆍ
徐翊洙(서익수) 등이 저자의 遺文(유문)과 後賢(후현)의 글을 增補(증보).
編輯(편집)하여 다시 간행하였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과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824年刊 초간본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장본이다.
이 중 附集(부집)된 「訥齋遺稿(눌재유고)」는 영인(影印)에서 제외하였다.
[구성과 내용]
저자의 遺稿(유고)는 사화와 병란을 겪는 과정에서 유실되어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다.
본집은 후손들이 흩어진 遺稿(유고)와 관계 기록을 收拾(수습)하여 편집한 것으로,
권수에는 序(서)ㆍ世譜圖(세보도)ㆍ목록이 있고 본집은 詩(시)ㆍ疏(소)ㆍ
雜著(잡저)ㆍ附錄(부록)으로 편차되어 있다.
이 중 詩(시)는 權五福(권오복)ㆍ南孝溫(남효온) 등 友人(우인)과 더불어
吟咏(음미)한 詩(시)와 〈題三笑圖(제삼소도)〉 등이 실려 있고,
疏(소)는 司憲府(사헌부)의 직책을 사임하는 상소이며,
雜著(잡저)에는 〈遺山樂府詩跋(유산낙부시발)〉ㆍ
〈前赤壁賦書帖跋(전적벽부서첩발)〉과
妹夫(매부)인 琴啓(금계)의 〈琴軍威墓碣(琴軍威墓碣)〉로
모두 3편의 글이 실려 있다.
附錄(부록)에는 權五福(권오복)ㆍ金馹孫(김일손) 등의 詩(시)ㆍ書(서)와 저자의
行狀(행장)ㆍ墓碣銘(묘갈명) 및 관계 기록과
저자가 享祀(향사)된 鏡光書院(경광서원)ㆍ栢麓里社(백려리사)에 관한 기록이 실려 있다.
○ 신선태을자금단(神仙太乙紫金丹) - 의서
- 의성현령 재직시
○ 간행한 책
– 경상도 도사 재임시에 경상감사 이극돈과 함께 간행
《유양잡조(酉陽雜俎)》· 《당송시화(唐宋詩話)》· 《유산악부(遺山樂府)》 및
《파한집(破閑集)》· 《보한집(補閑集)》· 《태평통제(太平通載)》
○ 경상 좌도 지도
– 의성현령 재임시
– 경상도 지도 제작시 '경상좌도 지도'를 제작함.
* 鄭弼溶(정필용)의 글에서 발췌함.
첫댓글 휼융하신 분이십니다 읽어 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