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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칼리굴라 황제(재위: 서기 37년 3월 18일~41년 1월 24일)
젊은 황제
티베리우스의 사망과 칼리굴라의 등장을 로마 제국에서도 특히 본국 이탈리아와 수도 로마의 주민들은 길고 침울한 겨울이 지나고 화창한 봄이 찾아온 듯한 기쁨으로 맞이했다. 77세의 늙은 황제를 뒤이은 것은 24세 7개월의 아름다운 젊은이였다. 이것만으로도 민심으로 새롭게 하는 데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신격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던 사람들에게, 부모 양쪽에서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받은 칼리굴라의 등장은 말하자면 정통성의 회복이었다.
황제의 대항세력이었던 원로원도 칼리굴라의 등장을 환영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칼리굴라의 아버지인 게르마니쿠스가 원로원에 의지하는 태도를 보였던 것을 생각해내고, 그의 자식이라면 원로원에 서한을 보내 의결해줄 것만 요구한 티베리우스처럼 원로원의 권위를 무시하는 통치는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칼리굴라는 젊었다. 젊으면 원로원이 조종하기도 쉬울 거라고 생각했다.
일반 시민들도 두말없이 대환영이었다. 그들 사이에아직도 뿌리 깊게 남아 있는 ‘게르마니쿠스 신화'가 되살아난 것처럼 기뻐했다. 서민들은 검투사 시합조차 허락하지 않은 티베리우스의 긴축 재정에 염증이 나 있었고, 쾌락에도 굶주려 있었다.
병사들, 특히 라인강 방위선의 8개 군단은 칼리굴라의 즉위를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아장아장 걸어 다니던 시절을 라인강 연안의 군단기지에서 보낸 새 황제는 병사들이 만들어준 유아용 칼리가(로마 군화)를 신고 놀았기 때문에, 병사들은 그를 본명인 가이우스가 아니라 칼리굴라(작은 군화라는 뜻)라는 애칭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들의 총사령관이던 게르마니쿠스는 세 아들을 두었지만, 군단병들의 마스코트가 된 것은 셋째아들 칼리굴라뿐이었다. 그 칼리굴라가 이제 황제가 된 것이다. 티베리우스가 즉위했을 때와는 달리, 칼리굴라가 즉위했을 때는 봉급인상과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스트라이크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움직임은 상대가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약점을 갖고 있을 때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티베리우스의 약점은 그가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지 않았다는 데 있었지만, 칼리굴라에게는 이런 약점도 없었다.
서기 37년에 즉위한 칼리굴라만큼 모든 사람의 환영을 받으며 황제 자리에 오른 인물은 아무도 없다. 다시 말해서 적이 없는 상태로 제국의 최고권력자가 된 인물은 오직 칼리굴라뿐이었다. 칼리굴라의 즉위를 축하하는 사람들의 기쁨은 지극히 순수한 기쁨이었다.
민심의 일신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위기 상황에서 탈출하고 싶어서 뭔가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라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절박한 필요성은 없지만 단지 변화를 원하기 때문에 민심이 일신되는 경우도 있다. 전자의 경우,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의 기분은 행복하지 않고 여유도 없다. 반대로 후자의 경우에는 행복하고 여유도 있다. 칼리굴라의 등장을 환영한 사람들의 기분은 후자였다. 유대인 필로가 말했듯이, "행복은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이제 문을 열고 그 행복을 맞아들이기만 하면 되었다.
칼리굴라는 티베리우스가 반석으로 다져놓은 로마 제국이 누리고 있는 행복의 상징으로서 그 로마 제국을 통치하는 최고책임자 자리에 맞아들여진 것이다. 아니, 필로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믿었다.
나폴리 서쪽의 미세노에서 티베리우스가 숨을 거둔 것은 서기 37년 3월 16일이었다. 이튿날인 3월 17일에는 로마 전체가 황제의 죽음을 알았다.
그리고 3월 18일에 이미 원로원은 모든 권력을 칼리굴라에게 주기로 의결했다. 티베리우스의 유해와 함께 수도로 가고 있던 칼리굴라의 모습도 보기 전에 제국 통치권을 그에게 맡긴 것이다.
3월 28일, 선황 티베리우스의 유해가 로마에 도착했다. 유해를 따라 로마로 들어온 칼리굴라는 아피아 가도 종점까지 마중 나온 두 집정관과 함께 원로원으로 갔다. 회의장에서는 속주에 나가 있는 의원들을 제외한 모든 의원이 25세가 되려면 아직 다섯 달이나 남은 젊은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열흘 전에 이미 의결된 제국 통치권을 이 젊은이에게 수요했다. 로마 황제가 되려면 원로원과 시민의 승인이 필요하다. 이날원로원은 공식으로 그에게 ‘승인'을 준 것이다. 그리고 수도로 들어온 칼리굴라를 맞이한 시민들의 환호와 그에게 던져진 수많은 꽃은 시민들이 그를 ‘승인'한 증거가 되었다.
칼리굴라에게 주어진 제국 통치권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제일인자'(프린켑스)-로마 시민 중의 제일인자라는 의미 밖에 없는 비공식적인 명칭이지만, 피지배자인 속주민을 지배하는 로마 시민권 소유자 가운데 제일인자니까 사실상 최고지배자를 뜻한다. 명칭이 겸허한 것은 시민 평등의 이념에 기반을 두고 있던 공화정 시대의 전통을 근거로 한 아우구스투스의 심모원려를 보여주는 한 예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런 로마 특유의 사정과는 무관한 속주민은 ‘제일인자'가 아니라 ‘카이사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카이사르'라는 호칭은 나중에는 ‘황제'의 별칭으로 정착하게 된다.
'황제'(임페라토르)-원래는 병사들이 지휘관의 능력을 칭송할 때 사용하는 호칭이지만, 카이사르 이후로는 로마군 최고사령관을 의미하는 명칭으로 정착한다. 칼리굴라에게는 로마의 모든 군사력을 지휘할 수 있는 통수권이 부여되었다.
‘호민관 특권'(트리부니키아 포테스타스)-황제가 군사적 권력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면, 호민관 특권은 정치적 권력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황제는 정책 입안권을 갖고, 원로원이 그의 정책을 부결하면 원로원의 결정에 대해 거부권(베토)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도 인정되어 있었다.
요컨대 원로원은 제국 창설자인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이유만으로 25세도 채 안된 젊은이에게 상징적인 존칭만이 아니라 군사적인 최고통수권과 정치적 권력까지 모두 부여했다. 광대한 로마 제국의 통치를 완전히 위탁한 것이다.
그로부터 다섯 달 뒤에 칼리굴라가 스물다섯 번째 생일을 맞자, 원로원은 또 하나의 선물을 주기로 의결했다. 그것은 ‘국가의 아버지'라는 존칭이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암살당하기 몇 달 전에 55세의 나이로 이 존칭을 받았다.
아우구스투스가 ‘국가의 아버지'가 된 것은 제국 통치의 최고책임자로서 30년 세월을 보낸 61세 때였다.
티베리우스는 치세 기간 동안 이 존칭을 세 차례나 증정 받았지만, 세 번 다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이런 영예를 칼리굴라는 25세 생일에 증정 받고,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였다. ‘국가의 아버지'라는 존칭만은 원로원이 마음대로 결정하지 못하고, 시민의 요망이 있어야만 비로소 그 요망을 받아들이는 형태로 증정을 결의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이것도 역시 제국 자체가 칼리굴라를 지지했다는 증거였다.
즉위한 지 얼마 되기도 전에 원로원과 시민들에게 이런 대권과 영예를 받은 칼리굴라는, 통치가 어떤 것인지는 몰랐다 해도, 티베리우스의 통치 후반기를 제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어떤 통치를 하면 사람들의 불만을 사는지는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자기가 원한 것도 아닌데 대권과 영예를 차례로 증정 받은 칼리굴라는 원로원에서 ‘시정 연설'을 하면서, 티베리우스 시대와는 정반대의 통치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원로원 의원들도 일반 시민들도 이 선언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칼리굴라는 상당한 웅변가이기도 했기 때문에, 연설 내용과 더불어 듣는 사람의귀를 즐겁게 해주었다. 젊은 황제가 약속한 것은 다음과 같았다.
(1) 정치적 이유로 본국에서 추방된 자에게는 모두 귀국을 허락한다.
(2) 통칭 ‘밀고자'(델라토르)라고 불리는 정보원 제도를 완전 폐지하고, 앞으로 밀고하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
이로써 황제가 제국 전역에서정보를 수집하는 체계까지 폐지되고 말았지만, 그 폐해를 깨달은 사람은 당시에는 아무도 없었다. 칼리굴라의 ‘시정 연설'은 계속된다.
(3) 티베리우스는 해마다 로마 중앙정부의 요직인 집정관, 법무관, 회계감사관, 안찰관을 원로원에서 선출하도록 규정을 바꾸었지만, 이것을 다시 원래대로 민회에서 선출하게 한다.
본국 이탈리아만 해도 유권자 수가 500만 명을 넘는다. 이런 상황에서 직접선거는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다. 따라서 칼리굴라가 겉으로 내세운 명분은 유권자를 존중한다는 것이었지만, 정치적 이유 때문에 그런 약속을 한 것은 아니었다. 원로원 의원들이 호선하면 선거운동을 할 필요가 없지만, 민회에서 선출하면 선거운동이 필요해진다. 선거운동이란 유권자를 초대하여 향응을 베풀거나 인기를 얻기 위해 검투사 시합을 후원하는 것이었다. 그 비용을 생각하며 후보자들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겠지만, 후보자가 될 걱정이 없는 일반 시민들이 이 공약을 열렬히 환영한 것은 당연하다.
(4) 평판이 나쁜 세금은 폐지한다.
세금은 무엇이든 다 평판이 나쁜 법이지만, 칼리굴라가 폐지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1퍼센트의 매상세였다. 그가 내세운 이유는매상세가 경제활동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 세금은 아우구스투스가 방위비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신설했고, 티베리우스도 이 세금을 폐지하거나 줄이라는 목소리가 높았는데도 끝까지 지킨 세금이었다. 칼리굴라라는 이 매상세를 폐지하겠다고 선언했지만, 그것을 대신할 재원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아마 그런 것은 생각지도 않았을 것이다.
(5) 티베리우스가 반사회적 언사를 농했다는 이유로 본국에서 추방한 작가들의 귀국을 허락하고, 그들의 작품을 간행하는 것도 허락한다.
이 작가들이 누구이며 작품은 무엇이었는지를 알려주는 사료는 없다.
(6) 역시 티베리우스가 추방한 배우들의 귀국을 허락한다.
티베리우스는 ‘팬'끼리의 충돌로 일어나는 혼란을 싫어하여, 그 원인 제공자인 유명 배우들을 본국 이탈리아에서 추방했다.
(7) ‘제일인자'는 수도 로마에 살면서 원로원 회의에 반드시 출석한다.
이래서는 원로원 의원들한테서도 일반 대중한테서도 호평을 받은 게 당연하다. 선황 티베리우스는 생각도 하기 싫은 존재처럼 완전히 잊혀 지고 말았다. 티베리우스는 시체가 되어 로마로 돌아온 지 닷새 만에 화장되어 ‘황제묘'에 묻혔지만, 그때쯤에는 그가 죽은 직후에 사람들이 외쳤던 "티베리우스를 테베레 강으로!"를 입 밖에 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국장은 많은 겨울날처럼 조용한 분위기에서 순조롭게 끝났다. 엄격하고 고독했던 티베리우스의 최후에 어울리는 장례식이었다. 장례식이 이처럼 조용히 치러진 것은 모든 사람이 무관심해진 증거였다.
유언도 시민과 병사들에게 나누어주는 유증금 외에는 모두 무시되었다. 칼리굴라가 무시한 게 아니라 원로원이 무시했다. 티베리우스는 칼리굴라와 손자인 게멜루스에게 제위 계승권을 균등하게 남겼지만, 원로원은 칼리굴라 한 사람에게만 계승권을 인정했다. 칼리굴라가 오히려 제위 계승권을 인정받지 못한 게멜루스를 양자로 삼았을 정도였다. 황제의 양자가 된다는 것은 다음 제위를 이을 첫 번째 후보라는 의미를 갖는다. 원로원은 모든 점에서 티베리우스를 잊고 싶었다. 칼리굴라에게 성급하게 기울어진 것도 티베리우스에 대한 증오심의 반동이었다. 칼리굴라는 이것도 완전히 알고 있었다.
우리는 황제도 국왕도 대관식을 거쳐 즉위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로마 황제에게는 대관식이라는 게 없다. 로마 제정은 아우구스투스의 심모원려에 따라 독특한 형태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는 표면상으로는 시민 중의 제일인자에 불과하고, 따라서 다른 시민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관'이었다. 로마 황제는 ‘무관의 제왕'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화폐에 새겨진 황제의 옆얼굴도 그 절반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은'무관의 제왕'의 모습이다.
그렇긴 하지만 로마 황제는 대관식을 거쳐 즉위하는 다른 나라의 왕이나 군주보다 권위와 권력이 훨씬 강대하다. 황제의 조상을 만들거나 화폐에 새길 때, 머리 위에 아무것도 없으면 곤란한 경우도 많다. 로마 화폐는 로마 제국만이 아니라 그 주변의 야만족들도 탐내고 있었다. 신용할 수 있는 국제 화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 황제는 종종 월계수 잎이나 떡갈나무 잎으로 장식한 월계관이나 시민관을 쓴 모습으로 표현된다. 실제 잎사귀도 만든 것이든 잎사귀를 본뜬 금관이든, 그것은 관이기라기보다는 나뭇잎으로 장식한 리본 같은 느낌을 준다. 목덜미에 리본의 매듭 부분이 오기 때문에, 사내답게 굵은 목덜미에 리본을 묶는 것은 위엄을 갖추어야 하는 황제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황제가 차츰 오리엔트 색채를 강하게 띠게 되는 제정 후기에는 ‘관'의 형태도 바뀌지만, 제정 초기와 중기에는 리본 스타일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무엇 때문인지 이 리본식 ‘관'이 그들에게는 잘 어울린다.
그리고 대관식도 없이, 원로원과 시민이 승인하면 그때부터 치세가 시작된다는 것도 합리적인 로마인 다웠다.
그래서 칼리굴라의 경우도 대관식이나 즉위식을 거행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로마로 돌아오기도 전에 원로원이 그에게 전권을 수여한 3월 18일을 치세의 시작으로 본다. 원로원에서 ‘시정 연설'을 끝내고 선황의 장례식도 치른 뒤 새 황제가 맨 먼저 한 일은 전통적으로 가족을 중시하는 일반 로마인의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젊은 황제는 태풍이 다가오고 있다는 보고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로마 외항인 오스티아에 준비해둔 배에 오른다. 바람이 거세지고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배를 출하시켰다.
목적지는 벤토테네 섬과 폰차 섬이었다. 유배 중에 거기서 사망한 어머니 아그리피나와 형 네로 카이사르의 유해를 가지고 돌아오는 것이 목적이었다.
유해 단지를 품에 안고 로마로 돌아온 칼리굴라를 맞이한 것은 시민들의 눈물과 열광이었다. 눈물은 비명에 죽은 게르마니쿠스의 아내와 아들에게, 열광은 가족을 생각하는 젊은 최고권력자에게 바치는 공감의 표현이었다. 두 사람의 유해는 ‘황제묘'에 매장되었다. 그리고 칼리굴라는 이 일을 새긴 화폐를 발행했다. 이 일의 정치적의미를 그가 충분히 알고 있었다는 증거다.
이를 계기로 칼리굴라는 쇠사슬에서 해방되었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라는 쇠사슬에서 풀려난 것은 칼리굴라만이 아니라 원로원과 시민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것이 향후 칼리굴라의 통치를 이해하는 열쇠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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