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에서 소아과약국을 운영하는 이 모 약사. 하루 10시간 근무하는데 절반 이상 조제에 할애한다. 조제 시간 대부분 "약을 갈고 쪼개고 분배하는 데 쓰고 있다"는 그는 최근 반자동 포장기를 들여 놔 예전보다 형편이 나아지긴 했으나 그래도 일손은 크게 줄지 않았다.
그는 가루약 조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노동강도 때문만은 아니다. 원래 제형과 용량을 무시하고 갈고 쪼갠 이 약, 과연 안전한가라는 의문이 항상 들기 때문이다. 약의 제조 취지를 살리면서 환자의 복용 편의, 안전성을 높인 약을 투약해야 한다는 약사로서 양심과 강박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다.
이 시점에서 발칙하지만 합리적인 의심을 해본다. 지금이 대체 어느 시대인데 약사가 꼭 손으로 약을 갈고 쪼개고 나눠야 하는 것일까. 도대체 왜 그래야 하지?
아주 오래전부터 가루약 조제는 약사의 당연한 의무이자 환자의 권리처럼 여겨지고 있다. 심심하면 터져나오는 ‘가루약 조제 거부’ 약국에 대한 사회적 비난은 공공연하게 퍼진 국민 의식을 방증한다.
대다수 약사들은 환자의 복용 편의성을 위해서라면 손이 갈라지고 손톱이 부서져도 약을 빻고 갈고 쪼개는 일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산제조제, 당연히 약사가 해야 하는 일 중 하나 아니냐"고 묻는 약사도 있는 게 현실이긴 하다.
하지만 의문이 든다. 약사의 단순 업무 가중을 넘어 사람의 손으로 갈고 쪼갠 그 약, 100% 안전한 것 맞습니까?
"한번에 갈아 한봉투에 믹스, 괜찮은건가"
0.33, 0.05T. 한눈에 보고도 그 정도를 가늠하기 힘든 소수점 아래 숫자. 약사가 계산하고 분배해 환자에게 제공해야 하는 가루약 용량이다. 만약 처방전에 0.05T가 찍혀 나오면 약사는 그 약 한알을 갈아 20포지로 나눠 담아야 한다. 정제 한알을 0.05T로 자르거나 쪼개는건 불가능하다. 약사의 손이 '나노 단위'를 다룰 만큼 정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처방전은 일반 정제 처방전 조제보다 평균 10배 이상 노동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 글에선 약사의 노동 강도는 배제하려한다. 그동안 가루약 조제에 따른 약국가의 수고는 숱하게 제기해 온 문제였지만, 메아리 없는 외침에 불과하고 되레 약사만 비난하는 빌미로 작용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더 근본적 문제에 접근해보려 한다. 사람 손에 의해 쪼개지고 갈아지고 나눠진 가루약, 진정 안전한 것인가란 그 합리적인 의심 말이다.
우선 약이 제조, 생산될때는 성분뿐만 아니라 제형, 용량 등도 그 약의 유효기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쉬운 예로 정제로 생산된 약을 분쇄했다면, 그만큼 약의 표면적은 넓어졌고, 화학적 분해 속도가 빨라져 정제일때보다 유효기간은 떨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 견해다. 한 예로 메디락S산과 같은 코팅제제의 정장제를 분쇄했을 때 안전성과 의약품 효과를 담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분배에 따른 용량 차이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 여러 성분의 약을 한꺼번에 갈아 하나의 포지에 분배해 담아내는 지금의 방식대로면, 약 포지 하나당 한정의 약이 동일하게 분포됐을 지 누구도 담보하기 힘들다.
이지현 약사는 "원래 약의 제형을 변경하는 것은 약효에 지장을 줄 수 있고 가루약 용량 차이가 조제실수로 간주되는 문제까지 야기시키고 있다"면서 "산제조제에 따른 위생, 투약 오류 문제와 더불어 여러가지 알약을 한번에 갈아주는 과잉 처방 또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이 약사는 "산제조제에 따른 약효 안전성, 투약 용량 등에서 논란이 많지만, 그보다 왜 그 많은 약을 갈아서 복용해야 하는 지 그것부터 따져봐야 할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가루약 조제 없는 미국 약국, 어떻게 가능한가
환자가 건넨 종이 한 장을 들고 조제실로 들어간 약사가 잠시 후 잔뜩 갈은 약을 담아 보이지 않는 봉투에 담아 건네고, 약사의 몇마디를 들은 환자는 건네받은 약을 확인도 하지 않은채 무심히 들고 약국을 나서는 모습. 한국 약국을 찾은 미국인들의 눈엔 문화충격일 수 밖에 없다.
그도 그럴 게 미국에는 가루약 조제가 없다. 산제 조제 자체가 불필요한 구조이기 때문. 다양한 제형, 용량을 생산하는 제약사, 환자 복약 편의성을 높이기 위해 그런 부분만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약국과 이를 지원하는 정부, 이런 구조적인 부분 이외 국민 의식 역시 가루약 조제를 불가능하게 하는 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한다.
정은경 교수(경희대 약대)는 "미국 국민은 자신이 복용하는 약은 최종 자신의 책임이 크다는 인식이 있다. 약 안전성 관련 사고가 발생한 이후 더 커졌다"며 "약을 확인하려는 의식이 있고, 그런 점에서 보이지 않는 봉투에 정체불명 가루약을 갈거나 쪼개 분배해 넣은 한국식의 조제형태는 그들에게 맞지 않는다. 그에 반해 우리 국민은 전문가인 의약사에 자신의 치료와 투약을 믿고 맡기는 측면이 있어 지금의 가루약 조제 구조가 가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미국 컴파운딩 약국 모습. 특정 환자들을 위해 약의 제형, 맛, 냄새 등을 개발해 조제, 유통하는 약국이다.
국민 의식에 앞서 생산돼 유통되는 약 역시 국내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미국에선 하나의 성분을 정제는 물론 시럽제, 산제, 츄잉제제, 붕해제 등 다양한 제형으로 제조된다. 같은 약이라도 환자의 특성에 맞게 제형을 골라 투약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용량도 마찬가지. 같은 성분 약의 용량을 다양하게 생산해 약국에서 굳이 처방된 용량의 포장 약이 없어 따로 조제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다. 와파린의 경우만 하더라도 1mg, 2mg, 2.5mg, 3mg, 4mg, 5mg, 6mg, 7.5mg, 10mg이 시중에 유통되고 있다. 하지만 국내에는 2mg, 5mg 단 두가지 용량만 유통된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래도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컴파운딩 약국들이 이를 채운다. 우리말로 용시조제를 하는 곳인데, 이 약국은 출시된 약을 소수 환자들의 복용 편의성을 위해 약의 제형 등을 변형하는 작업, 즉 제조를 하는 곳이다.
▲ 미국에선 와파린의 경우 1mg, 2mg, 2.5mg, 3mg, 4mg, 5mg, 6mg, 7.5mg, 10mg 등 다양한 용량이 유통되고 있다.
정 교수는 "그 약 고유의 맛이나 냄새, 안전성 등은 고수하면서도 출시돼 있는 그 제형을 복용하지 못하는 환자에게 맞춤 약 ‘레시피’를 만들어내고, 이런 약국에 대해선 정부 차원의 지원도 따른다"면서 "제약사가 시장성이 없어 굳이 만들지 않는 약의 제형이나 용량 등을 이곳이 담당해 만들고, 의사는 그런 특수한 환자는 이 약국을 가도록 돕는다. 컴파운딩 약국은 다른 약국들에게도 제조한 약을 유통해 조제를 돕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가루약 조제 ‘제로’, 진정 불가능합니까"
한국에서 가루약 조제가 100% 사라지는 일은 당장은 힘들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말이다. 하지만 지금보다 확실히 줄일 수 있고, 또 줄여가야한다는 데는 공통된 입장이다.
산제 조제는 단순 약사의 노동과 역할적 측면을 넘어 환자 안전 차원에서 정부와 제약산업, 요양기관 등 관계 기관들이 모두 고려해 나가야 하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지금의 상황이 지속된다면 고령화사회에서 산제조제는 더 늘어날 수 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이렇게 간다면 약국에서 약사의 산제조제 업무 시간은 더 늘어나고, 나아가 산제조제만 따로 하는 약사를 고용해야 하는 상황까지 벌어질 수 있다는 가정도 가능하다.
국내에 뿌리내린 가루약 조제를 줄이거나 없애기 위해선 총체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게 대다수 생각이다. 식약처, 심평원의 정책적 고려부터 제약사의 제품 제형, 용량 생산에 대한 배려, 의사의 처방형태, 약사의 조제와 투약, 국민 의식까지 모든 부분에서 변화가 있어야 완전한 산제조제 청산을 이룰 수있다는 것이다.
가장 가까운 방법으로 고려해볼 수 있는 것은 제약사들이 선진국에서 제형 개발과 유통이 많은 현탁액제 개발, 생산을 늘릴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시장성이 크지 않은 국내 상황을 고려할 때 무조건 제약사들에게만 같은 약의 다양한 제형, 용량 생산의 짐을 지울 수 없다는 게 대다수 입장이다.
휴베이스 홍성광 대표는 "대웅 미리콘산의 경우 대용량 가루약이 생산됐지만 결국 단종됐고, 이제 산제로 생산되는 제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결국 산제를 복용해야 하는 환자들의 약에 대한 책임은 모두 약사에게 주어지는 상황"이라며 "제약사들이 생산 단가가 안맞아 다양한 제형의 제품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정부 차원에서 환자의 복용 안전성과 편의성을 높이기 위해 보조금 등을 지원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에필로그 '가루약 조제의 난(難), 이런 약국도 있다'
충남 내포신도시에 위치한 내포우리약국. 운영한지 2년이 된 이 곳은 지역 엄마들 사이에서 '깐깐한 약국'으로 소문이 나 있다.
이유는 이 약국의 트레이트 마크인 따로따로 조제, 포장 조제 때문. 가루약 처방이 나오면 약사는 약을 가짓수대로 따로 갈아 약별로 다른 약포지에 라벨, 지퍼백에 포장해 투약하고 있다.
그렇다보니 조제 시간과 노력은 처방나온 약 가짓수만큼 배로 소요되는 것은 물론이고, 라벨, 약봉투, 지퍼백 비용도 배로 들고 있다. 조제 업무가 다른 약국에 배로 들어 직원도 다른 곳들보다 더 고용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김희연 약국장은 안전한 조제를 위해선 '필요악'의 선택일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김 약사는 "처방약이 3가지면 3배의 인력과 비용이 들고, 약이 더 많으면 그만큼 더 많이 소요되는 상황"이라며 "하지만 환자가 안전하게 복용할 수 있는 약을 조제하기 위해선 당연한 과정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 약사는 또 "약을따로 포장해 자칫 환자가 헷갈릴수 있겠단 생각에 라벨링도 다 따로, 지퍼백 포장도 약별로 따로 하고 있다"면서 "환자가 불편해 할 수 있다고도 생각했는데 요즘 시민 의식이 워낙 높아 오히려 약국을 더 신뢰하더라. 엄마들이 일부러 약국을 찾아오기도 한다"고 했다.
김 약사가 이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가루약 조제의 위험성 때문. 제각각의 제형의 약들을 한번에 갈아 한봉투에 담아냈을 때 약별로 균일한 용량이 포지에 담길지도 의문이고 자칫 조제실수가 있어도, 한번에 갈아내는 가루약 조제에선 검수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일부 약 중에도 갈지 말아야 하는 것도 있는데 이 약 역시 함께 갈리는 것이 찜찜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 약사는 "약사들도 가루약을 한꺼번에 갈면서 찜찜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게 사실"이라며 "해외처럼 약의 제형, 포장단위 변화가 획기적으로 있지 않는한 노력과 시간, 비용이 몇배로 더들어도 따로따로 조제를 계속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