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 조우인(曺友仁,1561~1625)선생은 조선조에 선조, 광해군, 인조등
3대 임금을 섬기며 시, 글씨, 그림등 3절로 이름났던 선비였으며,
특히 매호별곡(梅湖別曲)·자도사(自悼詞)·관동속별곡(關東續別曲)·
출새곡(出塞曲) 등 4편의 가사는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거나
EBS 수능특강, 고교모의고사나 수능고사 등에 자주 등장하기도 한다.
상주 사벌국면 매호리 낙동강변에 조우인 문학비와 어풍대 등이 있다.
이재 조우인선생 문학비(頤齋 曺友仁先生 文學碑)
이재 조우인선생의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여익(汝益), 호는 매호(梅湖)·
이재(頤齋)이며 예천에서 출생. 우부승지 조계형(曺繼衡)의 증손자이다.
조우인은 1588년(선조 21)에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됐고,
1605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1616년(광해군 8)에는 함경도경성판관을 지냈다.
1621년에는 제술관(製述官)으로 있으면서 광해군의 잘못을 풍자했다가
그 글로 말미암아 3년간 옥에 갇혀있던중 인조의 등극으로 풀려나
이곳 상주(尙州)의 매호(梅湖)에서 은거하며 여생을 마쳤다.
그의 가사집 이재영언(頤齋詠言)에는 매호별곡(梅湖別曲)·
자도사(自悼詞)·관동속별곡(關東續別曲)·출새곡(出塞曲) 등 4편의
가사작품이 실려 전하는데, 특히 매호별곡은 1624년경 그가 노경에
은거하던 바로 이곳 상주시 사벌국면 매호리에서 자연을 벗하며
한가롭게 살아가는 소박한 선비의 정경을 노래한 작품이다.
매호별곡(梅湖別曲) 시비
(중략)
이끼 낀 바위에 기대어 앉아 보며
그늘진 송근(松根)을 베고도 누워 보며
한담(閑談)을 못다 그쳐 산일(山日)이 빗겨시니
심승(尋僧)을 언제 할고 채약(採藥)이 저물거다.
그도 번거로워 떨치고 걸어 올라
두 눈을 치켜뜨고 만 리를 돌아보니
외로운 따오기는 오며 가며 다니거든
망망속물(茫茫俗物)은 안중(眼中)에 티끌이로다.
부귀공명 잊었거니 어조(魚鳥)나 날 대하랴
낚시터에 내려앉아 백구(白鷗)를 벗을삼고
술동이를 기울여 취토록 혼자먹고
흥진(興盡)을 기약하여 석양(夕陽)을 보낸 후에
강문(江門)에 달이 올라 수천(水天)이 일색인 제
만강풍류(滿江風流)를 한 배 위에 실어 오니
표연천지(飄然天地)에 걸린 것이 무엇이랴
두어라 이렁성그러 종로(終老)한들 어이리.
*이 가사는 2021년 11월 고등학교 2학년 전국연합에 출재된 일부 내용이다.
(왼쪽)조우인의 생애, (오른쪽) 문학비와 문학비 입구의 안내표지판
"자도사"는 광해군을 풍자했다가 옥고를 치른 1621∼1623년(61~63세)에
지은 것으로, 임금을 사모하는 충성스런 신하의 마음을 노래한것이다.
"속관동별곡"은 만년에 정철(鄭澈)의 관동별곡을 읽고 느낀 점이 있어
전날 젊은 시절에 유람했던 관동지방을 추억하며 쓴 기행가사다.
어풍대 가는길
"출새곡"은 1616년 가을에 경성부사로 부임하여 이듬해 봄에
변방의 산천풍토와 봄놀이를 두루 즐긴 뒤 쓴 기행가사이다.
서울의 흥인문을 떠나 임지인 경성에 다다르기까지의 노정에서 보고
느낀것과 임지에서의 봄놀이, 그리고 변방 목민관의 고독감 등을 노래했다.
저술로는 문집 "이재집(頤齋集)"과 가사집 "이재영언"이 있다.
상주 매호리앞 낙동강
출새곡(出塞曲)
북방 이십여 주에 경성이 문호인데 / 군사 백성 다스리기를 나에게 맡기시니
망국한 임금의 은혜 같을 길이 없구나.
서생의 일은 글쓰기인가 여겼더니 / 늙은이의 변방부임 진실로 뜻밖이로다.
임금께 절하고 칼을 짚고 돌아서니 / 만 리 밖 국경에 내 한 몸 다 잊었다.
흥인문 내달아 녹양평에 말 갈아타고 / 은하수 옛길을 다시 지나간단 말이냐.
회양 옛 사실 소문만 들었더니 대궐을 / 중국 한나라 무제(武帝) 때 급장유(汲長孺)가
회양 태수로 선정을 베풀었던 일 / 홀로 떠나는 적객은 무슨 죄인가.
임금곁을 떠나 경성으로 부임하는 자신의 신세 / 높고 험한 철령을 험하단 말 전혀 마오.
세상살이에 비하면 평지인가 여기노라 / 눈물을 거두고 두어 걸음 돌아서니
서울이 어디요 대궐이 가렸도다. / 임금을 떠나는 안타까움
안변 북쪽은 저쯤에 오랑캐 땅인데 / 오랑캐를 정벌하여 천 리 밖 몰아내니
윤관 김종서의 큰 공적 초목이 다 알도다.
용흥강 건너와 정평부 잠깐지나 / 만세교 앞에 두고 낙만루에 올라앉아
옥저의 산하 하나하나 돌아보니 / 함경도 함흥 일대에 위치했던 고대 국가
천년의 풍패에 상서로운 기운 어제인듯 하구나.
함관령 저문 날에 말은 어찌 병들었는가 / 모래바람 자욱한데 갈 길이 멀었구나.
홍원 옛 고을의 천관도를 바라보고 / 대문령 넘어서 청해진에 들어오니
함경도의 요해지요 남북의 요충지라 / 충신과 정예 병사 무기를 늘어 놓고
강한 활과 쇠뇌로 요충지를 지키는 듯 / 태평세월 백년동안 전쟁을 잊으니
철통같은 방어를 일러 무엇하리오.
*출새곡은 조우인이 56세 되던 해 함경도 경성 판관으로 임명되어 떠날 때
변방으로의 부임 과정과 임지 생활에서 느낀 소회 등을 기록한 기행가사로
2023년 9월 고1 모의고사는 물론 고교시험에 자주 등장하는 가사이다.
어풍대(御風臺)
어풍대는 상주시 사벌면 매호리 낙동강변에 있는 대(臺)이다.
조우인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落鄕)하여 매호리에 있을 때
인조께서 이재(頤齋)같은 충절지사(忠節之士)가 지리풍수학적으로
여생을 보낼만한 안식처가 될 곳인지 어풍(御風, 임금이 보낸 풍수)을
보내 관찰하라고 하셨는데, 어풍이 왕명을 받고 매호에 도착하여
이 바위에서 산세와 지형을 관찰하고 갔다하여 "어풍대"라 이름하였다.
어풍대 안내와 내력
얼음이 꽁꽁언 낙동강과 강변의 어풍대
이재 조우인은 예천군 노포리(현 예천 개포면 일원)에서 태어났는데,
노포리는 부친인 증이조판서 조몽신(曺夢臣,1532~1593)이 기거하던 곳이다.
4,5,7,8대 국회의원 조일환(曺逸煥)은 조우인의 증조부인 조계형의 17세손이다.
매호리 풍경
매호마을 입구
매악산 국사봉과 매호십리강산
매호리는 이재 조우인선생이 1623년 승지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인조임금으로부터 국록으로 매악산 국사봉과 "매호십리강산"을 하사받아
매호정사를 짓고 살면서 "매호별곡" 읊으며 여생을 보낸곳이다.
담양 한국가사문학관에 전시된 이재 조우인의 자도사
조우인의 자도사(自悼詞)
임 향한 일편단심 하늘에서 타고나니 / 삼생의 인연이요, 지은 마음 아닙니다.
내 얼굴 내 못 보니 예쁘다고 할까마는 / 민낯이 곱든 밉든 생긴 대로 지녀 있어
연지와 백분도 쓸 줄을 모르는데 / 하얀 이 붉은 입술을 두었노라 하겠는가.
이 임을 만나 뵙고 섬길 일 생각하니 / 젊은 외모 믿자 하니 미모가 얼마이며(이하 생략)
*이 자도사(自悼詞)는 감옥살이를 할 때에 억울하고 애절한 심정을
남녀관계에 빗대어 노래한 가사로서 제목의 "자도사"는 스스로의
죽음을 슬퍼하는 글로서 곧 죽음을 각오하고 쓴 글이기도 하다.
이러한 조우인의 가사들은 교과서나 시험문제 등에 자주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