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신학의 평준화사상의 날이 오면...!
정영근
‘목회학’이라고 하면 혹시 신임서를 가진 교회의 목회자만의 학문이요 역활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까요. 아직도요.^^ 평신도는, 집사는 , 장로는 ‘목회'를 할 수 없나요. 결국 목회는 무엇이며 목회의 장은 어딘가의 문제가 되는 것만 같습니다. 근접하면 아니되나요. 영역이 다르나요.
그 답은 다음 한마디 속에 있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벧전 2:9)라고 했습니다. 심령의 부르심을 받고 즐겨 사명을 이행하곺은 이들이고 보면 다 하나님의 교회의 목회활동(목양활동)을 하는 목회자, 혹은 목양자일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이 성장할뿐 아니라 교회의 성장을 추구하는 이들이고 보면 누구나에게 그 목회학은 사명자의 학문이 되어질 것입니다. 영력이 바라는 리더십(leadership)의 원리는 바라는 자의 것일 것입니다.
이. 지. 화잇께서는 마지막사업은 평신도운동으로 이 사업이 마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당 하고 옳은 말씀입니다. 그래야만 이 사업이 속히 마쳐지게 되어질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다 지도자적인 사명의식과 충성심과 성실함의 정신을 소유한다면 교회는 얼마나 놀랍게 발전하고 부흥하겠는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께서는 서로간 목양자적인 교회의 역활론이 활발해 질 때 교회는 성장하고 부흥하고 발전하고 또 다른 교회를 개척하게도 되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 모두가 어서 속히 목양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하단부분에서 교회 안에서의 목양자의 정신 자세이며 관심사이며 역활론의 포괄성이 담긴 내용을 몇가지 실례를 들어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엇인가 때문에 내가 목양자가 되어야 하겠다는 모티브를 발견하게 되어지기를 바래집니다.
한분이 시각장애를 일으키고 있다는 심각한 이야기를 들은 후의 일입니다. 그분께서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정작 자리를 찾지 못하고 더듬고 있었습니다. 교회에서의 좋은 일로 만의 친교와 즐거움에 일관하지 아니하고 목양자는 성도님들의 장애와 불편과 정신적 욱체적인 도움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것과 관련하여 어떻게 영적인 면에서 그 영혼으로 하여금 그 심리적인 도움의 필요와 영적인 충족을 가능한 충분하게 가지게 할 것인지 생각하고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큰 도시에 우리 교회가 여럿 있습니다. 보이지 않게 성도님들의 무관심 속에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저 교회에서 이 교회로 이렇게 부유하는 성도님들이 계십니다.
한번 한 목자가 그 한분에게 왜 그러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그는 ‘나를 무시해서요!’라고 딱 한마디 말로 끝내고 말았습니다. 그 정황과 정신세계를 다 분석해 볼 수는 없는 일이지요. 다만 불행한 일입니다. 치유자는 누구여야 할까요. 만약에라도 목양자가 있다면 그 마음을 교회에 붙들어 메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요. 안정과 위안의 자리를 찾게 할 것입니다. 또 지속적으로 그의 인도자가 되어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복된 일이 될까요.
한 목사님이 대도시 큰 교회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이때쯤 청년이었던 분이 신학을 마치고 이전 목사님의 고향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이때 청년 목사님은 이전 목사님의 초라한 초가집 모습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이 일 후에 그 청년 목사는 이전 목사를 없신여기게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사람 일이니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의 비밀이나 사정 이야기를 할 수만 있으면 은폐하거나 비밀리 하려고 하고 그럴듯 하게 보이려고도 하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그 목사에게도 위로자는 필요합니다.
이상에서 몇가지 예를 들었지만 교회 안에 계신 성도님들의 심리와 영적인 상태와 다양한 사건들 속에는 예수님과 발맞춘 목양자가 많이 필요 되는 것이 사실이며 절실한 현실인 것입니다. 한낱 상담자의 차원을 넘어서 진실하고 성실한 목양자가 많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여하한 것들을 불문하고 인권의 본질적인 존중, 존중하고 사랑하고 드높이는 목양자들이 많이 요구되고 있다 라고 보아집니다.
우리의 진정한 목양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말구유 탄생은 공개적이었고 신성이 인성을 입은 인본주의 사랑의 소유자이셨습니다.
목양자는 바로 이분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주님은 숨길 것 말 것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온유겸손한 사상이셨습니다. 이 사상이 우주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시게 하셨습니다. 밑바닥을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에게는 누군가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별다른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부질없는 것이 없게 살고 본질을 추구하시는 삶을 사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 같이 산다는 것은 이런 참 가치관의 변화과정 속에 산다는 것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래서 예수님을 바라보자고 하는 것일 것입니다.
언젠가 본질적인 인권의 존중, 그리고 체험과 관찰의 날이 하늘에서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