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 제2함대사령부(평택기지)부대 내 충무동산에 세워진 서해교전 전적비와 바로 옆 육상에 전시된 고속정(PKM) 참수리 357호정을 볼 때마다 만감이 교차하지 않을 수 없다. 고속정 내부와 외부의 수없는 총·포탄 자국은 당시의 비참함을 그대로 말해준다.
서해교전은 2002년 6월 29일 오전 10시25분에 서해 연평도 서방 7마일(13Km)해상에서 남·북한 해군 간에 일어난 소규모 전투이다. 북한해군의 등산곶 경비정(PCF-684, 200톤급)이 NLL(해상북방한계선)을 침범 3마일(5.5km) 월선남하(越線南下)하였다. 북한경비정은 남하를 저지하던 우리 고속정 참수리357정(150톤급)을 지근거리(至近距離)에서 전포(85mm주포 포함)로 기습 공격하였다. 우리 2개 고속정편대(4척)와 북한 함정 1척 사이에 함포교전(艦砲交戰)이 한 동안 계속되었다. 우리 참수리357정은 침몰되고, 북한 684정은 화염에 휩싸여 동료함(PCS-388)에 의해 예인(曳引)되어 북상(北上)하였다. 북한 경비정(684)의 피해도 상당히 많은 것으로 파악되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승조원 28명중 고속정 정장(艇長)을 포함하여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당하였다.
▲ 서해교전 때 침몰한 참수리 357호가 인양되는 모습
교전이 일어난 이날은 2002년 한·일 월드컵(축구)에서 준결승전이 열리는 날이었다. 세계인의 축제와 4강 신화를 창조한 대한민국 국민의 자긍심에 큰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
북한은 사전에 치밀한 계획 하에 도발을 자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들이 그동안 남북간 화해와 협력을 위한다고 약속한 1992년의 남·북 기본합의서와 2000년의 6·15공동선언은 하나의 허구(虛構)임이 백일하(白日下)에 드러나게 되었다. 그날 우리 국민은 북한 ‘선군정치(先軍政治)'의 호전성과 무력적화의 야욕을 실감하게 되었다.
북한 경비정에 비해 성능(性能)과 사격통제장비(射擊統制裝備)가 우수한 우리 고속정 2척(PKM-357,358)이 편대로 기동하면서 초기에 전투를 했는데 왜 이렇게 되었는가? 무장(武裝)이 현대화된 오늘날 기습을 당한 후 반격하여 이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기습공격을 받고도 끝까지 용감하게 싸워 적(敵)을 격퇴하고 NLL을 사수(死守)한 우리 장병들의 군인정신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북한 경비정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다가 적의 공격에 숨을 거둔 고속정 정장 故 윤영하 소령,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함포(艦砲) 방아쇠를 당겼던 故 조천형 중사와 故 황도현 중사, M60 기관총 사수로 자신의 몸을 은폐하기도 힘든 노출된 갑판(甲板)에서 응전사격 중 산화한 故 서후원 중사, 조타장으로 교전 당시 타기(舵機)를 잡고 있었던 故 한상국 중사, 부상당한 전우를 위해 동분서주하던 중에 피격을 당하여 3개월여의 투병생활 끝에 꽃다운 청춘을 접은 의무병 故 박동혁 병장···, 먼저 이상 6명의 공적을 높이 기리며 전우(戰友)의 영전에 삼가 명복을 빈다.
그리고 교전 후 다리를 절단해야 할 만큼 심각한 부상을 당했으면서도 정장(艇長)을 대신해 교전이 끝날 때까지 부하들을 독려하며 지휘했던 고속정 부장(副長) 이희완 중위, 왼쪽 손가락이 모두 잘려나간 상태에서 오른손으로 탄창을 끼우며 대응사격을 멈추지 않았던 권기형 상병, 적의 사격 속에서 위험에 처한 전우를 향해 자신의 몸을 날린 이철규 중사, 적의 포탄에 의해 40mm 함포의 전원장치가 손상되자 즉각 수동으로 전환하여 적(敵) 경비정에 포탄을 퍼부은 황창규 중사, 이들의 전투능력과 정신력은 높이 평가되었다.
우리 고속정 장병들은 지휘관(정장)이 전사하고 부장이 부상당한 극한의 상황에서도 평상시 훈련했던 것처럼 필승의 전투의지를 가지고 당황하지 않고 최후의 순간까지 사력(死力)을 다해 싸우는 군인정신과 전우애를 보여줬다. 강인한 정신력과 불굴의 투혼, 하나로 뭉쳐진 전우애, 그리고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맡은 바 임무를 다한 장병들 모두가 그날의 영웅이었다.
침몰한 고속정을 인양(引揚)하는데 어려움이 매우 많았다. 실종된 한상국 중사를 찾기 위해 어떤 난관이 있어도 인양을 해야만 했다. 그는 전투 시 조타실(操舵室)에서 배의 타(舵)를 조종하고 있어서 조타실에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고 실제 그의 시신을 그곳에서 찾았다. 인양을 위해 구조함인 청해진함이 침몰현장에 투묘(3묘박)한 후 해난구조대요원이 체인(chain)을 고속정의 함수선저와 함미선저에 각각 연결하였다. 민간 해상크레인이 침몰 고속정을 인양하여 해상바지에 안치했다. 서해상의 강한 조류(潮流) 때문에 묘박하는데 많은 시일이 소요되었다. 침몰수심은 28m이나 3.4노트의 조류와 수중시정(水中視程)이 불량하여 하루에 작업 가능시간도 주간 중 1~2시간으로 제한되었다. 해난구조대 요원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
그리고 인양작업 위치가 북한해안으로부터 근거리(近距離)라 북한의 추가도발이 염려가 되었으나 미국의 도움으로 무사히 해결되었다. 한·미 양국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함은 물론, 주한 유엔군사령부는 구조함에 유엔사령부 연락장교(외국인)를 상주시키고 이 사실을 북한에 통보하면서 어떠한 도발도 바로 유엔에 대한 도발임을 엄중히 경고하였다. 억제는 말과 협상이 아니라 힘을 동반한 확고부동한 의지가 필수적임을 이번 인양작전을 통해 우리는 배워야 할 것이다. 굳건한 한·미 동맹의 힘으로 인양작전이 가능하였다.
서해교전을 회고하면서 앞으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
첫째, NLL은 1953년 이래 남북한간 실질적인 해상 군사경계선이자 절대 사수해야 할 우리의 생명선임을 명심해야 한다. NLL을 지키지 못하면 서북도서(백령도, 연평도 등)를 방어할 수 없으며, 이는 곧 자유 대한민국을 지킬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선배들은 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 목숨을 다해 사수한 것이다. 후배들은 선배들의 숭고한 희생과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전우가 사수한 NLL, 우리가 지킨다’는 구호대로 철저히 무장하고 오직 행동으로 실천하여야 할 것이다.
둘째, 적(敵)의 기습을 사전에 차단하여야 한다.
1999년 6월 15일의 연평해전과 2002년 서해교전에서 우리해군은 같은 해역에서 같은 적(敵)으로부터 유사한 방법으로 기습을 당하였다. 1967년 1월 동해의 NLL근해에서 어로보호 작전 중이던 우리의 경비함(PCEC-56함)도 적 해안포의 기습공격으로 침몰되고 다수의 장병이 전사하였다. 1970년대 동해에서 우리 해양경찰정도 적 함정으로부터 기습공격을 당하여 침몰되었다. 북한은 1950년 한국전쟁에서도 기습으로 남침하였다. 이처럼 북한은 끊임없이 불시에 기습으로 우리를 공격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적의 도발사례를 잘 연구하여 어떻게 기습을 차단하고 적시(適時)에 자위권(自衛權)을 행사할 것인지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셋째,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재인식하여야 한다.
금번 인양작전뿐만 아니라 연평해전 직후 북한의 추가도발을 억제하기 위하여 항공모함 전투단을 한반도에 급파한 미국의 조치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원을 내세우지 않고 다만 한국의 안보를 위해 묵묵히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생명선인 해상 NLL을 앞으로도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리고 지난 날 이를 위해 전사한 영웅들과 선배들의 희생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kon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