運江墟 本文
在廣西𨿅容縣東南。濱臨柳江。隔江與象縣馬平二縣接界。
柳州 本文
唐置昆州。亦曰南昆州。又改爲柳州。尋曰龍城郡。又改爲柳州。治馬平。卽今廣西馬平縣治。宋曰柳州龍城郡。南宋治柳城。在今廣西柳城縣西南。明復移治馬平。元曰柳州路。明爲柳州府。清因之。民國廢。唐柳宗元嘗爲柳州刺史。世稱宗元曰柳柳州
運江
상주는 지세가 아주 복잡하여 도립하는 군산과 구릉지구로 산간사이로 소면적의 충적평원이 생겨나 강의 島嶼가 많고 물가에 촌락이 형성되었다.
수운이 주요한 교통통로로 12조의 강이 서로 엮여 흘러가는데 분지중앙의 柳江에 모인후 서강으로 흘러간다.
이후 주강으로 합해져 광동성에서 바다로 드는데 양광수운의 추뉴로 運江古鎭에 이르면 평정을 유지한다.
고구상포가 들어선 석판로변에는 지난 휘황한 시절을 말해주고 역사상 운강은 상주의 중요한 수륙전운지로 성당시기부터 민국시기에는 1300년간 운강은 배로 가득한 성황을 누렸다.
692년 무주 장수원년 조정은 영남지구의 행정관리강화로 무칙천은 계류운하를 확장하게 하고 계림과 류주로 통하게 만든다.
폭이 15미터에 달하는 계류운하는 계림의 회선진 사자암에서 청강을 거쳐 류강으로 연결하고 리강과 류강의 양대수계를 결합한 것이다.
계림과 류주의 수운항정은 150키로를 단축하여 상주는 운하서단으로 위로는 호남 귀주에 남으로는 양광지구로 연결된다.
이후 운강항운은 천년간 번성하고 청건륭 22년 1575년 조정은 흠정으로 광주를 유일한 대외통상구로 지정하자 월동의 상인들이 서강 류강을 거슬러 광서의 특산을 구매하려 몰려든다.
원목 약재 농산품등으로 대량의 화물은 상주나루에서 중간참으로 광주로 향하고 1930-50년대에 湘桂鐵道가 낙성되자 계류운하의 경제적가치는 사라져 운강고진은 침적하고 만다.
이곳은 3일장인 대집이 열려 고상부의 최후의 여운을 남겨 신세기후 현성으로 이주를 시작하고 한가한 곳으로 변한다.
이제 관광지로 다시 부각되는데 고대건축의 창상연륜과 운하를 따라 강중의 고진운치를 즐긴다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42 42권 서한집Ⅰ > 부록 > 趙素昻日記
제목 | 趙素昻日記 |
趙素昻日記
1887년 丁亥
1894년 甲午
1912년 壬子 中華民國 元年이다.
1913년 癸丑 袁世凱가 大總統이 되었다.
1914년 甲寅 國民黨을 개조하여 革命黨으로 만들었다.
1917년 丁巳 大同團結을 선언하였다. 소비에트 러시아가 성립되었다.
806년 元和(唐 憲宗의 연호) 元年이다.
713년 渤海가 나라를 세운 해이다. 唐나라 玄宗 때이다.
666년 淵蓋蘇文이 죽었다. 乾封 元年이다.
611년 陏나라와 高句麗가 전쟁을 시작하였다.
880년 廣明 元年에 黃巢가 서울(長安)을 함락시켰다.
양력 10월 28일 檀君 탄신일이다.
양력 10월 29일 國文(한글) 반포일이다.
132명 黨員 3명
50명 非主派
32명
132명
82명
50명
義理에 分한 勇氣.
活潑.
永久히 성실하자.
民族을 위해 犧牲하자.
自他에 공평하자.
公益에 勤勞 團結하자.
創造에 活潑하자.
亡國羞恥猶未雪 망국의 수치, 아직 다 씻어내지 못했는데
無人顧後復誰依 사람 없어 뒤돌아보니 다시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蜀山落日筇環墓 蜀山의 석양에 지팡이 짚고 무덤을 도는데
綦水悽風淚濕衣 綦水의 처량한 바람, 흘리는 눈물에 옷 젖네
饒苓匝子範周(의미불명).
忠-族
孝-親
信-人
勇-戰
慈-動物, 衆生
1. ▲ ▲ ▲ ▲ ▲ ▲ ▲ ▲ ▲ ▲ ▲ ▲ ▲ ▲ ▲ 15
2. ▲ ▲ ▲ ▲ ▲ ▲ ▲ ▲ ▲ ▲ ▲ ▲ ▲ ▲ ▲ 15 45 simple
3. ▲ ▲ ▲ ▲ ▲ ▲ ▲ ▲ ▲ ▲ ▲ ▲ ▲ ▲ ▲ 15
1. 2, 3, 4, 5 3, 4, 5, 6 2, 3, 4, 5 4, 5, 6
2. 3, 4, 5, 6 3, 4, 5, 6 2, 3, 4, 5 4, 5, 6 65
3. 3 5, 6, 7, 8, 9 4, 5 3, 4
丁丑年(1937)
2월 9일 高 동지가 입원하였다.
2월 13일 金 동지가 입원하였다.
2월 15일 상오 5시 50분 김 동지가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오후 3시에 입관하고 6시에 무덤을 만들었다.
2월 12일 金昌煥 동지가 세상을 떠났다.
2월 1일 오후 세 동지가 들어왔다.
丁丑年(1937)
11월 21일 杭州의 일행이 길을 떠나서 28일에 南昌에 도착하였다.
11월 23일 밤에 南京에서 부두(埠)에 도착하여 머물렀다.
11월 24일 상오 민간 선박에 올랐고, 하오에 下關에 도착하였다.
11월 25일 頭關에 도착하였다.
11월 26일 頭關에 머물렀다.
11월 27일 頭關에서 和州로 갔다. 하루를 머물렀다.
11월 28일 上午 7시에 자동차로 和州를 출발하여 하오 5시에 蕪湖에 도착하였다.
11월 29일 자동차로 蕪湖를 출발하여 오후에 瀂港에 도착하였다.
11월 30일 瀂港에 머물렀다.
12월 1일 瀂港에 머물렀다.
12월 2일 새벽 5시에 瀂港을 출발하여 하오 7시에 和悅州에 도착하였다. 셋째(趙鏞周)가 불행히도 죽었다.
12월 3일 10시에 자동차로 和悅州를 출발하여 하오 5시에 貴池에 도착하였다.
12월 4일 7시에 자동차로 貴池를 출발하여 하오 6시에 安慶에 도착하였다.
12월 5일 하오 10시에 安慶에서 招商局 소속 증기선 江順號를 탔다.
12월 6일 밤 9시에 漢口에 도착하였다.
12월 7일 漢口에 머물렀다.
12월 8일 漢口에 머물렀다.
12월 9일 漢口에서 새벽녘에 鴻輝라는 작은 증기선에 올랐다.
12월 11일 상오 12시에 長沙에 도착하였다.
음력 동짓달 23일 두 분(부모님)이 장사에 도착하셨다.
戊寅年(1938)
1월 24일 청년회에 초대되었다.
4월 8일(음력) 불행한 일註 86_0이 있었다.
7월 16일 전보를 쳐서 안부를 전하였다.
10월 일 『救亡日報』에 오고 감이 기록되었다.
10월 일 救亡報 및 文化抗敵後援會에 나아가 참석하였다.
10월 17일 廣市에서 출발하여 증기선에 탑승하였다.
10월 18일 하오 5시 高要에 도착하였다.
10월(음력 8월 27일) 七星岩에 도착해 풍경을 구경하였다.
10월 22일 高要에서 민간 선박을 타고 출발하였다.
10월 28일 桂平에 도착하였다.
11월 16일 桂平을 출발하였다.
11월 30일 柳州에 도착하였다. 北大路 67호에 방을 정하였다.
12월
藤峽東西山最秀 藤峽의 동서쪽의 산들은 가장 빼어나고
石龍上下水偏淸 石龍의 상하류의 물은 매우 맑구나
스스로 읊었다.
桂平에는 西山이 있는데, 伏龍이라고도 하고 思靈山이라고도 한다. 북쪽에는 五指山이 있고, 西江은 항로가 불편하고 돌도 많고 급류이다. 날씨는 따뜻하기가 여름과 같다. 병력도 많고 기술자도 많았다.
11월 16일 오후 4시 桂平을 출발하여 6시경 展灘에 이르러 좌초되어 유숙하였다.
11월 17일 아침에 船夫가 큰소리 지르며 배를 밀었으나 배는 움직이지 않았다. 기암괴석들 중에 넓적한 돌이 있었는데 큰 것은 천 명이 앉을 만하였다. 10시에 비로소 기선을 타고 출발하여 11시에 白灘에 도착하였다.
聞隨黔江百八灘 黔江을 따라 108개의 여울이 있다고 들었는데
我今纔度兩三關 나는 지금 겨우 두 세 개의 關만을 건넜네.
難關到處多奇趣 도처에 지나기 어려운 곳에 기이한 정취가 많아서
萬疊靑山一目看 겹겹이 포개진 靑山을 한 눈에 볼 수 있네.
白灘은 그 모양이 구불구불하였다.
11월 18일 6시에 勒馬津에 이르렀는데 小金剛이 볼만하였다. 느지막하게 石龍으로 향하여 도착하였다.
11월 19일 石龍에 머물렀다.
11월 20일 하오 4시 20분에 石龍을 출발하였다.
11월 21일 상오 7시 얕은 여울에 좌초되었다. 하오 5시에 또 출발하였지만 역시 저녁에 얕은 여울에 좌초되었다. 네 사람이 걸어서 柳州에 도착하였다.
11월 22일 음력 10월 1일 運江에 도착하였다. 그 지방 사람들이 전하는 이야기에 강 언덕의 나지막한 산은 바로 薛仁貴가 만든 淵蓋蘇文의 墓라고 한다.
11월 23일 6시 계자(鷄口㓼)에 도착하여 유숙하였다.
11월 24일 開天節이다. 담배를 끊었다.
11월 25일 큰 비가 왔다.
11월 26일
11월 27일 10여 명이 柳州로 나아갔다.
11월 28일 큰 물고기를 샀다.
11월 29일 洛垢에서 折□로 출발하였다.
11월 30일 柳州에 도착하였다. 6시에 (방을) 北大路 67호에 정하였다.
12월 1일 90元.
12월 2일 7元으로 쌀 50斤을 샀다. 땔나무 100근은 1元 9角이었다.
12월 3일
12월 4일 雅儒村을 방문하였다.
12월 5일 (柳州市의) 河南에 대공습이 있었다.
12월 6일 강에 이르렀다.
12월 7일 대피하였다.
12월 8일 대피하였다.
12월 9일 대피하였다.
12월 10일 담배를 桂幣(광서성 화폐) 1원에 샀다.대피하였다. 大洋 10元을 방세로 줬다.
12월 11일 일요일이다. 대피하였다. 쌀 백 근을 桂幣 15元에 샀다.
12월 17일 도서관에서 柳州郡誌를 읽었다. 날이 따뜻하였다.
12월 18일 鵲山을 방문해서 사방을 바라보았는데 매우 아름다웠다(尹公).
12월 19일 땔나무 60근을 桂幣 1원 3각에 샀다.
12월 20일 時元과 仁濟註 143_0가 와서 머물렀다.
12월 23일 땔나무를 샀다. 2원 4각.
고구려 유민 관련 금석문 > 묘지명 > 천남산 묘지명 > 해제
자료명 | 천남산 묘지명 (泉男産 墓誌銘) |
소재지/출토지 | 북경대학(北京大學) 새극륵고고여예술박물관(賽克勒考古與藝術博物館) 하남성(河南省) 낙양시(洛陽市) 맹진현(孟津縣) |
연대 | 702년(武周 長安 2년) |
크기 | 지석: 가로·세로 각각 75㎝×75㎝, 개석: 가로·세로 각각 76㎝×76㎝ |
서체 및 재질 | 楷書 미상 |
주제분류 | 당|묘지명 |
찬자 / 서자 / 각자 | 미상 / 미상 / 미상 |
집필자 | 안정준 |
판독문 일람 | · 원문 · 국역문 |
「천남산묘지」는 1923년 4월에 하남성(河南省) 낙양시(洛陽市) 동북쪽 20리 지점의 맹진현(孟津縣) 평락진(平樂鎭) 유파촌(劉坡村)에서 출토되었다. 표자총(豹子冢)이라고 불리는 무덤에서 출토되었다고 하는데, 출토 과정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지석과 개석이 함께 온전한 상태로 발견되었으며, 현재는 북경대학(北京大學) 새극륵고고여예술박물관(賽克勒考古與藝術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 지석은 가로·세로 각각 75㎝×75㎝이며, 개석은 가로·세로 각각 76㎝×76㎝의 크기이다. 지석은 총 28행에 745자가 새겨져 있으며, 지문의 지은이와 글쓴이, 새긴 사람은 모두 기재되지 않았다. 지석의 글자체는 해서체이며, 비면 상태가 좋아서 대부분의 글자들을 판독하는데 큰 문제가 없다.
「천남산묘지」에 대해서는 1920년에 나이토 토라지로(內藤虎次郎)가 소개한 적 있으며(內藤虎次郎), 나진옥(羅振玉) 역시 「당대해동번벌지존(唐代海東藩閥誌存)」에서 지석의 판독문을 수록한 바 있다(羅振玉, 11529~11530쪽). 이후 국내에서도 묘지의 판독과 역주뿐만 아니라, 이를 통한 연개소문 일가의 계보 복원, 그리고 당으로의 투항 과정과 당에서의 활동 등에 대한 여러 연구들이 진행되기도 했다.
천남산의 부친은 태대막리지(太大莫離支)를 역임한 연개소문(淵蓋蘇文)이다. 연개소문의 장남이었던 남생(男生)이 부친의 뒤를 이어 막지리가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의 일을 두 동생인 남건(男建)과 남산에게 일임한 뒤 지방의 여러 성들을 순방하러 떠났다. 이때 두 동생이 권력을 장악하고는 남생의 귀환을 가로막음으로써 그가 당으로 항복하게 되는 중요한 빌미를 제공했다. 고구려 멸망 후 남건은 당나라에 끌려가서 금주(黔州)에 유배되었으나, 남산은 용서받아 당의 조정에서 관직생활을 할 수 있었다.
다만 천남산은 형인 남생이나 고질(高質)‧고자(高慈) 부자 등 다른 고위급 고구려인들처럼 외부의 군사 원정 혹은 고구려 고지(故地)의 통치 등과 관련해 공적을 쌓았다는 내용은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천남산은 63세인 대족(大足) 원년(701) 3월 27일에 사저에서 사망했으며, 아들인 천광부(泉光富)의 이름이 지문의 말미에 기록되어 있다. 이 묘지는 천남산이 당에 들어간 뒤의 활동에 대해 기록한 거의 유일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를 통해 천남산이 당에 들어간 뒤에 생활한 모습과 역임한 관직들을 살필 수 있다. 그 외에도 연개소문 일가의 가계(家系) 기록과 함께, 고구려에서 유력한 귀족 가문의 일원으로서 역임했던 관직들과 그 승진 과정 등에 대해서도 많은 정보들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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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 선생 사적
동국통감〔東國通鑑〕
“삼가 아룁니다. 동해(東海) 밖에 세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마한(馬韓)과 변한(弁韓)과 진한(辰韓)이었는데, 마한은 곧 고구려요 변한은 곧 백제요 진한은 곧 신라입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시대에는 강한 군사가 100만이나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남쪽으로 오(吳)나라와 월(越)나라를 침범하고 북쪽으로 유주(幽州)와 연주(燕州) 및 제(齊)나라와 노(魯)나라의 지역을 동요시키는 등 중국에 커다란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황(隋皇 수 양제(隋煬帝))이 실각한 것도 요동(遼東)을 정벌한 것이 원인이었습니다.정관(貞觀) 연간에 우리 태종황제가 직접 육군(六軍)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천토(天討)를 삼가 행하였는데, 고구려가 위엄을 두려워하여 강화를 청하자 문황(文皇 태종)이 항복을 받고 대가(大駕)를 돌렸습니다. 우리 무열대왕(武烈大王)이 견마(犬馬)의 성의를 가지고 한 지방의 환란을 평정하는 데에 조력하겠다고 청하면서 당나라에 들어가 조알(朝謁)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때부터였습니다. 그 뒤에 고구려와 백제가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악행을 일삼자 무열이 입조(入朝)하여 향도(鄕導)가 되겠다고 청했습니다. 그리하여 고종황제(高宗皇帝) 현경(顯慶) 5년(660)에 소정방(蘇定方)에게 조칙을 내려 10도(道)의 강병(强兵)과 누선(樓船) 1만 척을 이끌고 가서 백제를 대파하게 하였습니다. 그러고는 그 지역에 부여도독부(扶餘都督府)를 설치하여 유민(遺民)을 안무(按撫)하고 중국 관원을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였는데, 취미(臭味)가 같지 않은 까닭에 누차 이반의 보고가 올라오자, 마침내 그 사람들을 하남(河南)으로 옮기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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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요동의 경우에 있어서는 애당초 기자(箕子)가 봉지를 받은 국경으로 개원현(開原縣)은 바로 옛날의 부여국(夫餘國)으로 고구려 시조인 고주몽(高朱蒙)이 발상한 지역이며, 지금의 개평현(蓋平縣)은 바로 진한(辰韓)의 옛 국경으로 또한 우리 삼한(三韓)의 하나였습니다. 일찍이 고구려 전성기에는 모든 요동의 일대와 여진족들이 사는 곳이 대부분 모두 고구려의 국경 안에 있었습니다. 고구려는 이 때문에 해동의 강대국이 되었는데, 말엽에 이르러 군주와 신하가 도리를 잃어 땅은 수(隋) 나라와 당(唐) 나라에 빼앗겨 줄어들고 백성들은 양자강(揚子江)과 회수(淮水) 지방으로 옮겨가서 결국에는 국가가 전복되었으니, 불타고 남은 흔적을 다시는 찾을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에 이르도록 수천 년 동안 아직도 우리나라의 옛 국경을 수복하지 못하였습니다. 국가가 부흥하고 멸망하며 번성하고 쇠퇴하던 시기와 병탄(倂呑)하고 분열(分裂)되었던 자취가 모두 이 한 폭의 지도에 기재되어 있으니, 또한 국가를 소유한 자가 서글피 탄식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척연히 두려움을 생각하게 하는 도구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동사강목 제5상 병오 신라 혜공왕(惠恭王) 2년부터, 을미 신라 경순왕(敬順王) 9년까지 170년간계축년 진성 여주 7년(당 소종 경복 2, 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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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에 조공가던 사신 김처회(金處誨)가 바다에 익사하였다.
병부 시랑 김처회를 보내 당에 가서 선왕의 정절(旌節)을 헌납하게 하였는데, 바다에 익사하였으므로 다시 혜성군(橻城郡) 혜(橻)는 아마 혜(槥)인 듯하며 지금의 면천(沔川)이다 태수 김준(金峻)을 고주사(告奏使)로 삼았다.
이때 최치원이 부성군(富城郡) 지금의 서산(瑞山) 태수로 있었는데, 불러서 하정사(賀正使)로 삼았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흉년이 들고 도적이 잇달아 일어나 길이 막혀 가지 못하였다. 그 후 최치원이 다시 사신이 되어 당에 갔으나 당의 주현에서 공급(供給)이 계속되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당의 재상 태사시중(太師侍中)에게 서장을 올렸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동해 밖에 세 나라가 있으니 그 이름은 마한ㆍ변한ㆍ진한으로 마한은 고구려요, 변한은 백제요, 진한은 신라입니다. 고구려와 백제가 강성하였을 때에는 강한 군사가 백만이어서 남으로는 오(吳)와 월(越)을 침략하고 북으로는 유주(幽州)ㆍ연주(燕州)와 제(齊)ㆍ노(魯)를 난요(亂撓)하여 중국의 큰 해독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수황(隋皇 수(隋) 양제(煬帝))이 나라를 잃게 된 것도 요동(遼東)을 정벌한 때문입니다.
정관(貞觀 당 태종의 연호) 연간에 태종(太宗)이 친히 육군(六軍)을 거느리고 천벌(天罰)을 행하고서야 고구려가 위엄을 두려워하여 화친을 청하고, 문황(文皇 당 태종)이 항복을 받고서 군사를 돌렸습니다. 이때에 우리 무열왕이 정성으로써 일방(一方)의 난을 평정하는 데 도우려고 하여 당에 건너가 조알(朝謁)했는데, 신라의 조알이 이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 고구려와 백제가 종전대로 악한 짓을 하므로 무열왕이 일곱 번 조알하여 향도(嚮導)되기를 청하니, 고종(高宗) 현경(顯慶) 5년(660)에 소정방(蘇定方)에게 신칙하여 10도(道)의 강한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크게 깨뜨렸으며, 그 땅에 부여도독부(扶餘都督府)를 설치하고, 백제의 유민(遺民)을 불러 모아서 한관(漢官)으로써 다스리게 하였으나, 그 풍습이 같지 않기 때문에 여러 번 이반(離叛)하므로 드디어 그 인민을 하남(河南)으로 옮겨 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총장(摠章 당 고종의 연호) 원년(668)에는 영공(英公) 서적(徐勣 이적(李勣)의 본성이 서씨(徐氏)이다)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깨뜨리고 안동도독부(安東都督府)를 설치하고 의봉(儀鳳 당 고종의 연호) 3년(678)에 이르러 그 인민을 하남 농우(隴右)로 옮겨 살게 하였습니다.
고구려의 남은 유민들은 북으로 태백산(太白山) 아래 의거하여 나라 이름을 발해(渤海)라 하고, 개원(開元 당 현종의 연호) 20년(732)에는 당나라에 원한을 품고 군사를 거느리고 등주(登州)를 엄습하여 자사 위준(韋俊)을 죽였습니다. 이에 명황제(明皇帝 당 현종)가 크게 노하여 내사(內史) 고품(高品)ㆍ하행성(何行成)과 대복경(大僕卿) 김사란(金思蘭)에게 명하여 군사를 일으켜 바다를 건너가 그들을 토벌하게 하고, 우리 나라 임금 김모(金某 성덕왕(聖德王))를 계림대도독(鷄林大都督)으로 삼아 발해를 치게 하였으나 이때는 겨울이라 눈이 깊이 쌓여 번국(藩國)과 한인(漢人)이 모두 추위에 고생하므로 칙명을 내려 회군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지금에 이르는 3백여 년 동안 일방이 무사하고 창해(滄海)가 편안하여졌으니, 이는 곧 우리 무열왕의 공입니다.
이제 모(某)는 유문(儒門)의 말학(末學)이요 해외의 범재(凡材)로서 외람되게 표장(表章)을 받들고 낙토(樂土)에 내조하였으니, 예의상 마땅히 마음속에 있는 바를 다 터놓고 말하여야 할 것입니다. 삼가 보옵건대 원화(元和 당 헌종의 연호) 12년(817)에 본국의 왕자 김장렴(金張廉)이 풍랑을 만나 명주(明州)에 이르렀고, 중화(中和 당 희종의 연호) 2년(882)에 입조사(入朝使) 김직량(金直諒)이 초주(楚州)에서 하륙하였는데, 모두 주현의 호송을 받아 서울 장안(長安)에 들어온 전례가 분명히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특별히 수륙(水陸)의 여권(旅券)을 주시어 가는 곳마다 주선(舟船)과 음식, 그 여마(驢馬)와 초료(草料)를 공급하게 하고 아울러 군사와 장수를 차견하여 감송(監送)해서 가전(駕前)에 이르게 하여 주시면 참으로 다행이겠습니다.” 최치원의 문집에서 보충
고전번역서 > 강한집 > 강한집 제6권 > 서 또 당나라 군사가 두 나라를 멸망시켰을 때 두 나라의 376개 성(城) 가운데 김씨에게 귀속되지 않은 것이 거의 드물었습니다. 북으로 합란(哈蘭)에서부터 남으로 탐라(耽羅)에 이르기까지, 동으로 임둔(臨屯)에서부터 서로 안시(安市)에 이르기까지 날랜 매〔鷹〕와 준마(駿馬), 명주(明珠)와 대나무 화살 등이 모두 요석궁(瑤石宮)으로 들어갔으니 이것은 지극정성으로 당나라를 섬긴 데 대한 보답이었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