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노마드/영원회귀'
프리드리히 니체에 관한 들뢰즈의 독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들뢰즈가 지속적으로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흄과 베르그송에 관한 연구들(그리고 이러한 모든 철학자들
에 대해 쓰여진 책들과 그것들이 활용되는 것)을 참조한다 해도, 철학적 전통에 대한 그의 접근은 근본적
으로 어떤 긍정의 철학이라는 니체적인 목표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것이다.
들뢰즈가 어떤 철학자를 읽을 때, 그는 니체에 비추어 그들의 연구작업의 능력치와 그들이 창조한 개념들,
그들이 던지는 질문의 실증적인 효과를 가늠하며, 또한 그들의 철학이 삶에 어떻게 응답하는가를 음미한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에 관한 연구에서 어떤 실천철학의 이념을 정립하기 위해 신중하게 접근하는 동안, 몇
몇 스피노자의 이념들에 속한 니체의 사유 양상이 근대적 사유의 전통에 대한 급진적인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니체의 연구가 들뢰즈에게 중심적인 것을 형성해 가는 그 과정은 스피노자의 표현주의에 관한 그의 생각을 니체적으로 재작업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표현주의는 우리가 더 이상 어떤 사건을 아프리오리한 실체에 부착된 속성으로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만든다.
여기에는 어떤 질료나 일괴암적인 실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어떤 형상이나 질을 부과하거나 생성하
는 실체도 없다.
반대로 표현주의는 특정하고 특유한 질적인 것들의 생성 외에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제안한다.
그리고 이러한 질들 또는 사건들은 이러저러한 중립적인 근거나 실체들로 되돌아가 관계 맺을 필요도 없다
는 것이다.
들뢰즈는 니체야말로 이러한 ‘전인격적 특이성들’로 구성된 세계를 실재적으로 고려한 첫 번째 철학자라고 주장한다.
니체가 논한 바에 따르면, 우리는 행위를 주체나 ‘행위자’(doer)로 귀속시킬 필요도, 사건들을 효과들 또는
어떤 선재하는 원인을 가지는 것으로 볼 필요도 없다.
이러한 생각은 들뢰즈에게 내재성의 철학을 발전시킬 계기를 제공했으며, 존재를 일의성으로 이해할 수 있
게 하였다.
만약 실체라는 것이 없고, 그래서 생성만이 있거나 질적 특성들을 부과하는 실체들도 없다면, 존재와 생성
또는 동일성과 차이를 가르는 이분법도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여기에는 그 어떤 앞선 근거도, 통일성도 또는 스스로를 차이화하고 생성하는 실체도 존재할 필요가 없다.
대신에 오직 하나의 일의적 존재만이 있게 되는데, 그것은 원초적이며 구성적인 역능으로서의 차이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여기에는 원초적인 통일성이나 존재나 생성의 위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건들의 다양체 안에서 스스로를 표현하는 원초적인 생성이 있게 된다.
내재적이고 일의적인 존재의 파악은 우리가 실존적인 사건들을 어떤 초월적인 조건(이를테면 신, 주체
또는 존재)을 정립하지 않고 실존 그 자체로부터 고려하기를 요청한다.
들뢰즈가 철학자로서 니체를 강조하는 바는 니체의 탁월성이 영미 전통의 지배적인 니체 해석에서처럼
논증과 원리를 회피하는 문학 작가가 아니라 일의성의 전통 안에 놓으려는 것에서 있다.
내재성과 일의적 존재라는 개념의 전개와 더불어, 니체는 또한 특유하고도 적대적인 힘들 간의 갈등으로
서 삶을 바라보는 관점을 드러낸다.
니체를 독해하는 와중에 드러나는 들뢰즈에게서 ‘삶’(생명)이라는 개념의 용법은 생물학적인 것도 아니고,
인간주의적인 것도 아니다.
삶은 생물학주의에서의 질료도 아니며, 인간주의나 물활론에서처럼 적합한 형상이나 질료의 목표도 아니다. 삶은 특이화(sigularisation)의 역능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차이를 창조하는 힘이다.
니체에게 현상, 유기체, 사회 그리고 국가는 이러한 힘들의 특유한 형상화의 표현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삶의 이해에 관한 그의 가장 영향력 있는 기여들 중 하나는 의식과 도덕적 사유를 적극적(active) 힘과
반응적(reactive) 힘 간의 원초적 구분의 효과라는 측면에서 바라보았다는 점이다.
특히 한편으로 원한, 나쁜 의식 그리고 금욕적 이상과 같은 반응적 형식들과 다른 한편으로 주체성의 양태
들과 삶의 형식들 간의 연결에 대한 진단은 들뢰즈의 정치적 사유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와 비슷하게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에 관한 사상은 들뢰즈의 내재적 사유 그리고 반인간주의 철학의 발전
에 영향을 미쳤다.
그와 같은 내재적 원리, 즉 삶 이외에 어떤 것도 수용하지 않는 원리의 요청은 삶의 상이한 형식들 간의 분리에 관한 합법성과 그것의 생산에 집중하는 사유를 가능하게 했다.
니체의 관점에서 삶이란 공통되고 고갈되지 않는 역능을 위한 투쟁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며, 인간의 삶(그
규제적인 규범들 도덕적 판단들 그리고 사회적 진리들)은 단지 지나간 삶을 통해 이루어진 어떤 형식일 뿐
이다.
이런 니체주의적 철학은 서로 간에 촉발되는 힘을 주고받는 어떤 복수성과 상호촉발되는 존재자들로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역능의 양은 힘들 간의 미분적 요소들로 구성되며, 이는 삶에 관한 들뢰즈 자신의 철학에 끝까지
중차대한 것으로 남아 있게 된다.
니체를 따라가면서, 들뢰즈는 초월적인 인간 탐구 너머로 이동해 가고자 했다.
삶을 넘어선 이념들에서 기인하는 것은 삶의 가치와 목표를 결정한다.
니체의 작업은 우리 삶의 이념이 구성되는 생성의 보다 폭넓은 운동들에 참여하고자 하는 시도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이것은 니체로 하여금 여러 차이나는 차이의 형식들, 이를테면 언어, 유전적 발전과정들과 돌연변이들,
사회적 형식들, 역사적 사건들 등등에 집중하도록 이끌었는데, 이는 인간에 대한 이미지의 초점 이동을
야기했다.
들뢰즈도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그러한 것들을 이끌면서, 마찬가지로 니체의 계보학적 재해석을 전개한다.
니체가 잔혹함과 힘의 권능에 의한 감응(affect)의 다양성에서 도덕의 기원을 드러내는 곳에서, 들뢰즈는
이데올로기와 정치의 의미와 기능을 재사유하는 감응의 개념을 발전시킨 것이다.
사회적 코드의 이데올로기적 결정에 의해 특권을 부여하는 ‘정치적인 것’의 전망에 반대하여 연구하면서,
들뢰즈는 전주체적 또는 ‘비인간적’ 스타일과 강도들의 계열을 통해 정치학과 이데올로기론의 결과물들을
탐색했다.
들뢰즈는 어떤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결정이 있기 전에, 삶 자체의 도덕적 기초로 이후에 재파악
되는 바, 삶의 이미지와 도덕의 스타일에 있어서 어떤 무의식적이고 감응적인 투여가 애초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 Lee Spinks, ‘Nietzsche, Friedrich(1844-1900)’, ed., Adrian Parr, Deleuze Dictionary,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3, 178-80.
니체의 서구 형이상학에 대한 급진적 비판과 ‘플라톤주의의 전복’이라는 개념은 들뢰즈 자신이 주장한
‘재현의 요청 없는 차이의 사유’ 그 자체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니체는 또한 철학을 드라마화하기 위해 단편적이고 아포리즘적인 표현방식을 사용했다는 이유 뿐 아니라,
삶과 윤리학에 대한 접근방식으로 인해 들뢰즈에게 영향을 미쳤다.
왜냐하면 니체의 연구는 가치에 대한 전제를 결여하기 때문에, 가장 본질적인 의미에서 창조성을 옹호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창조성은 파괴와 자기파괴와 긴밀하게 엮여 있다.
들뢰즈의 개념으로 그것은 부정의 결과로서의 긍정(‘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오직 ‘예’라고 말하기 위해
서이다)이며, 그 반대는 아니다.
다른 말로, 오직 긍정하기 위해서 부정할 때, 긍정은 바로 들뢰즈와 니체가 경멸하는 반응적 허무주의의
유형을 숨긴다.
그보다 니체의 니힐리즘은 ‘적극적’인 것인데, 파괴의 목적이 언제나 창조에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저 너머의 다른 세계를 지지하면서 삶을 회피하는 어떤 종교나 가치 체계 또는 추상의 몇몇
다른 양상은 니체에 의해 강력하게 거부된다.
따라서 잘 알려진 오해의 여지가 있는 구절 ‘신은 죽었다’는 단순하게 ‘무신론’으로 이해될 수 없으며,
모든 항구적인 인간의 가치 체계들에 대한 불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들뢰즈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니체와 더불어 순진한 신앙의 시대는 지나갔으며, 언젠가 인간과 신의
조화가 칭송받을 것이며, 다른 측면에서 그것은 인간이 신을 대체하는 것이 될 것이다(N 148, 156).
다른 말로 신은 더 이상 또는 인간 보다 더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그보다 니체는 모든 가치체계의 지속적인 파괴와 재창조를 옹호하면서, ‘가치전환’에 초점을 맞춘다.
삶과 가치는 생성의 과정에 있는 것이지, 존재의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어떤 초월적 신이나 그와 같은 상태를 정당화하는 추상적인 사유체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방식으로 들뢰즈는 니체가 허무주의자라는 전형적인 주장 뿐 아니라, ‘신은 죽었다’라는 진부한
구절로부터도 니체를 분리시킨다.
들뢰즈도 마찬가지로 자주 니체를 따라 영원회귀를 어떤 순환, 평등 또는 동일성의 양상으로부터 분리
시키면서, 차이가 재현 없이 차이 자신과 관계되는 지점에서 하나의 예로 영원회귀를 내세운다.
『차이와 반복』에서 영원회귀는 ‘시간의 마지막 종합’으로 불리워지는데, 이는 습관의 수동적 종합
(반복)과 기억의 수동적 종합(차이)를 결합한다.
따라서 그는 니체적인 비유를 차이와 반복 간의 상호활동을 이해하기 위한 본질적인 것으로 가치화한다.
이러한 것이 바로 들뢰즈 사유에 대한 니체의 근원적인 영향을 증명하는 것이다. - E. B. Y.
- Eugene B. Young, Gary Genosko, Janell Watson, The Deleuze & Guattari Dictionary,
Bloomsbury, 2013, 217-18
<분문주석문헌>
Nietzsche et la philosophie,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Paris. 1988. [Nietzsche and
Philosophy. Continuum International Publishing Group: New York & London. 2006.]
유목적 분배(nomadic distribution)와 ‘왕관을 쓴 아나키’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차이와 반복』과 『의미의 논리』에서부터다.
여기서 이 개념은 언어학자인 라로쉐(Emmanuel Laroche)를 참조하면서, 유비에 반하는 차이의 분배를
기술하기 위해 도입된다.
‘노마디즘’이라는 개념이 제대로 활용된 것은 가타리에 의해서이다.
그는 이 개념을 토인비(Arnold Toynbee)와 이런 저런 사람들을 참조하면서 상당한 범위로 확장했다.
여기서 가타리는 역사 자체에서 실재하는 유목민을 묘사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주체성의 형식이
어떻게 매끄러운 공간(smooth space)에 거주하기 위해 발생하는지 묘사하기 위해 이 개념을 사용한다.
마찬가지로 그는 전쟁을 위한 어떤 잠재적 배치(dormant disposition)를 설명하기 위해서도 이 개념을
사용한다.
이 배치는 전쟁을 억제하려고 하는 그때에 하나의 전쟁기계로서 작동되는 것이다.
1.특별한 결합어로서의 ‘유목적 분배’라는 말이 있고, ‘왕관을 쓴 아나키’(Crowned Anarchy) 라는 개념
도 있다.
라로쉐에 대한 들뢰즈의 독해는, 위계적이고, 수목적(arborescent)이거나, 홈 파인(이 말들은 합법적인,
법률적인 이란 뜻을 가지며 ‘로고스’logos가 바로 그것이다) 제한된 공간의 분할들과 분배들에 저항하는
방향을 가진다.
들뢰즈는 독점적으로 폐쇄되기보다 창조된 공간 그 자체 안에서 다양한 위치들과 분할을 가진 무제한적인
공간으로의 분배를 말하고자 한다.
차이의 일의적 분배(univocal distribution)가 그러한 것이다. [LS, DR, TP]
라로슈는 νομος-νέμω 안에 있는 분배의 관념은 배당의 관념과 단순한 관계에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
νομος는 일단 점유의 장소를 지칭하지만 거기에는 명확한 경계가 없다(예를 들면, 마을 주변의 평야).
‘노마드’ 곧 ‘유목민’이라는 테마도 역시 여기서부터 성립한다. [DR 85, 309]
유목적이라 불러야 하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분배가 있다. (...) 여기에는 더 이상 분배된 몫에 속하는 것은
없다. 그보다는 열린 공간 안에서 스스로를 분배하는 자들의 사이의 몫이 있을 뿐이다.[DR 46, 36]
일의적인 것 안에서 유목적 분배 또는 왕관을 쓴 무정부 상태들은 유비의 정주적 분배들과 대립한다.
[DR 378, 304]
2.a. 토인비에 따르면 이 개념은 문명의 지체에 조응하는 삶의 방식을 기술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문명은 성장하지도 퇴행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종종 건조지역과 같은 환경에서의 변화들에 대한 어떤 응전(response)이며, 정주적인 삶의 방식
에 적응하기를 거부하는 것이기도 하다.
유목민은 (...) 다루기 힘든 요소들에 (...) 맞서기 위해 대담함을 가져야 했다.
사실 풀과 자갈로 뒤덮인 초원 지대는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 가래와 괭이로 경작할 수 있는 대지보다도
‘수확되지 않은 바다’와 닮은 점이 더 많았다.
초원지대의 표면과 바다의 표면은 모두 방랑자나 일시적인 체류자로서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공통
점이 있다.
거기엔 섬과 오아시스를 제외하고는 그 광대한 표면 어느 곳에도 인간이 머물러 정착 생활을 할 만한
장소가 없다[Toynbee, 1946, p. 166].
b. 들뢰즈와 가타리의 토인비 독해에서는 이주민이나 방랑자가 아니라 표면적으로는 황량한 공간들에
거주하는 주체들이 있다.
그리고 언제나 결과적으로 그들은 공간들을 방황하거나 움직여 나아간다.
하지만 그들은 실재로 절대적인(측정불가능한) 속도로 움직이며, 어떤 규정된 시작이나 끝도 없는 선과
궤도를 따라 움직인다. [AO, TP, N, D]
우리는 토인비의 제안에 따라 유목민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이 떠나기를 거부하는 매끄러운 공간을 고수하면서 움직이지 않고, 그곳을 이주하지 않은
덕분에, 다시 말해 그들은 정복하고 죽기 위해서만 떠나기 때문에, 유목민인 것이다.
제자리에서 여행을 떠나는 것, 이것이 바로 모든 강도(intensité)들의 이름이다.
비록 그들이 외연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할지라도 말이다.[TP 532, 482]
3.a. ‘노마드’(nomad)라는 말은 거주하고, 영토화하며,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는 어떤 행위주체에 적합
한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특수화된 점들 그리고 지역화되고, 지층화된 지역으로부터 독립된 일관성을 가지고 매끈한 공간을
구축한다.
유목민은 (...) 매끈한 공간을 형성하는 곳이면 어디든 있다. (...)
그들은 그들 안에 머물며,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양육하는데, 이는 유목민들이 사막에 의해 만들어진 것
만큼, 유목민들이 사막을 만든다는 사실을 확립해 왔기 때문이다.[TP 471, 382]
유목민(Le nomade)은 (...) 점들(샘점point d'eau, 거주점, 소집점point d'assemblée 등등)을 무시하지
않는다. (...)
샘점은 오직 뒤에 남겨 놓고 떠나기 위해서만 거기 도달한다. (...)
중간(entre-deux)은 모든 일관성을 취하며, 자율성과 스스로의 소유에 속한 어떤 방향, 둘 모두를 즐긴다. (...) 유목민은 이주민과는 전혀 같지 않다.
왜냐하면 이주민은 하나의 점에서 다른 점으로 원칙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TP 419, 380]
b. 들뢰즈와 가타리의 정치철학에서, 이 개념의 주체성의 탈인격화와 관련된다.
이와 같은 주체는 매끈한 공간의 다양체와 같은 것으로, 그들은 횡단하거나 거주하며, 국가와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하면서 공간을 구축한다.
또한 부차적인 상태들, 특히 통제되거나 상대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상태들과 더불어 전쟁-기계를 가동
시키는 홈파인 공간을 거부한다.
합당하게도 이들은 통제되지 않으며, 절대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속도를 지향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것은 외적으로 그리고 상대적으로 다양하다기보다, 강도와 감응(affect, 촉발)에 의해 내적으로 다양화된다.
수는 매끈한 공간을 점유할 때마다 어떤 원리가 되며, 그 안에서 주체로서 전개된다. (...)
수적 조직화의 종별화는 실존의 유목적 양태와 전쟁기계의 기능에 놓여 있다.[TP 430, 389]
국가에 반하는 어떤 활동, 예컨대 반항, 폭동, 게릴라전 또는 혁명적 행동과 같은 것들이 있을 때마다, 전쟁
기계가 재개되었으며, 새로운 유목적 잠재력이 등장해 왔고, 그것은 매끈한 공간의 재구축 또는 마치 매끈
한 공간 안에 있는 것과 같은 존재방식을 동반했다.[TP 426, 386]
속도는 매우 느리거나 또는 심지어 전혀 움직임이 없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속도임은 한결같다.
운동은 외연적이다.
그리고 속도는 강도적이다. (...)
오직 유목적인 것만이 절댖거인 운동, 다른 말로 속도를 가지고 있다.[TP 421, 381]
c. ‘유목적’이라는 말은 들뢰즈-가타리의 욕망 분석에서도 사용된다.
즉 사회적 (재)생산 또는 ‘흐름’의 다성적인 사슬을 형성하는 연언적 종합(conjunctive synthesis)이라는
의미가 그것이다.
주체의 형식은 제약, 다시 말해 차별의 조건들에 의해 스스로를 격리하지는 않지만, 스스로를 지속적으로
어떤 하등한 외부자와 동일시하며, 이에 따라 스스로 격리되어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연접적 종합의 유목적 다의적 용법은 분리된, 양의적인(bi-univoque) 용법과 대립된다.
망상(Le délire, 환각)은 두 개의 극과 같은 어떤 것을 가지는데, 그것은 인종주주와 인종적 극, 편집증적
-분리와 분열유목적인 극이다.[AO 115–16, 105]
- Eugene B. Young, Gary Genosko, Janell Watson, The Deleuze & Guattari Dictionary,
Bloomsbury, 2013, 220-22
(본문주석 문헌)
Différence et répétition.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Paris. 1989. [Difference and Repetition.
Translated by Paul Patton. Columbia University Press: New York. 1994; Kor. 김상환 옮김,
『차이와 반복』, 민음사, 2004
Toynbee, Arnold. A Study of History, Vol. 1: Abridgement of Volumes I–V. Oxford University
Press: Oxford and New York. 1946.[홍사중 옮김, 『역사의 연구』 동서문화사, 1978; 2007]
Mille plateaux. Éditions de Minuit: Paris. 1989. [A Thousand Platea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Translated by Brian Massumi. Continuum International Publishing Group:
New York & London. 2004.; Kor. 이진경, 권혜원 외 옮김, 『천의 고원: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
제2권, 연구공간 ‘너머’, 2000]
이것은 어떤 방황하는 그리고 심지어 ‘망상적’(délire) 분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사물/사태들은 일의적이고 분할되지 않은 존재의 전체 외연을 가로질러 전개된다.
존재가 재현의 요구들에 따라 분배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사태들이 단순한 현전
(일자-전체)의 일의성으로 존재하는 것들 안에서 분리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DR 36-7).
닫힌 공간을 분배하는 것과 열린 공간 안에서 사물/사태들을 분리하는 것, 어떤 공간을 사람들 사이에
부분으로 분리하여 분배하는 것과 분리되지 않은 공간 안에서 사람들을 분배하는 것의 차이는 우선 어떤
목가적인 의미이다(법이라는 의미로 되기 전에, 그리스어 단어 노모스nomos는 처음에 방목 행위를 가리
키는 것이었다-DR 36과 ATP 557 주석).
들뢰즈는 이 단어를 사유의 두 상태들, 즉 창조적 사유와 재현적 사유들의 차이에 적용하면서 은유를 사용
한 것인가?
분명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노모스의 두 가지 사회역사적 가치들 각각의 부분(존재의 유목적인 양태 대 정주적 양태)이
이러한 차이를 함축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유가 그 자체로 공간과 가장 밀접한 방식으로 촉발되며, 추상적 공간들, 즉 때로는 ‘매끈한’
그리고 때로는 ‘홈 파인’ 그 공간들에 일치해서, 또는 두 공간들의 여러 혼합에 근거해서 스스로를 정련
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것은 공간spatium과 연장extensio이라는 라이프니츠적 구분의 재발견이기도 한데, 두 공간에
관한 첫 번째 거친 개요는 “기관 없는 신체” 개념으로 확장되어진다(DR 228-44; ATP 153).
이 경우에 어떤 열린 목록이 구체적인 ‘모델들’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즉 그것은 기술적, 음악적, 수학적 등등의 모델들이다(ATP 14번째 고원).
철학은 왜 최초로 또한 무엇보다 이 개념과 연관되어지는가?
몇몇 사람들은 거기서 영원한 문제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미 주어진 개념들, 우리가 단순히 해야만 하고 그것들을 되찾아야 하는 공허한 조건에 놓인
그런 개념들을 상상한다.
그런 사람들은 어떤 고정되거나 정주적인 분배를 따라 추론하는 것이다.
또는 이와 다르게, 우리는 사유란 전진하는 비행경로를 따라 진행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플라톤 이래의 모든 위대한 철학자들이 진리의 재판소 앞에서 경합한다고 상상한다.
마치 모든 특유한 분배 바깥에 어떤 객관적 분배가 존재하기라도 한다는 듯이.
이와 같은 믿음은 초월적인 어떤 것을 함축하는 것이다.
다른 방면에서 보자면, 관념들은 어떤 영역에 속하는 것, 즉 그것의 ‘문자적’ 용법과 ‘형상적’ 용법을 가리
키는 대상에 대한 의미들로 드러난다.
이를테면 마치 ‘질병’이나 ‘죄수’라는 단어의 의미가 지칭되는 대상의 물리적 상태를 참조함으로써 모두
소진되어버리는 듯이 말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내재적으로 의미의 유목적인 특성을 인식하는데 실패함으로써, 어떤 문자적 이동의
권한을 관념들에게 거부하게 되며, 그것을 폐쇄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파악의 행동들은 전반적으로 어떤 함축적인 규칙 리스트에 의해 망라되어, 기껏해야 철학
에 대해 의미론적 이동들을 약하게 판단할 정도가 될 뿐이다.
그것들은 어떤 필연성과 완고한 종별화를 그것에 부여하게 만든다.
예를 들면, 과학적 관념들의 비과학적 사용들이 그것이다.
마치 발명의 계기 안에 놓인 과학이 그와 같은 비과학적 수입목록을 열심히 그리고 합법적으로 실행하지
않는다는 듯이 말이다.
우연을 단호하게 긍정하는 사유는 전적으로 차이의 사유다.
그것은 제멋대로의 환상에 권리를 부여하는 필연성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아무도 들뢰즈보다 더 필연
성의 주제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그 개념을 모든 전승된 방식 너머로 밀어붙였다. PS 16-17, 95; DR 138-9 참조.)
반대로 이러한 긍정은 사유를 필연성의 환영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시험이기도 하다.
여기서 필연성은 어떤 원본과 초월적 분배, 즉 사유가 오직 요청할 수 있기만 한 근거에 관한 정주적
환영과 관련되어 타진된다(LS 10, 12계열).
유목적 분배와 관련하여 주사위 놀이에서의 나누어지지 않은 공간은 들뢰즈에 따라 일자를 어떻게 이해
해야만 하는지에 대해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 놀이는 분배의 다양체로부터 스스로 거리를 두지 않으면서, 그것은 각각이 스스로를 유폐되고 고립
된 그리고 나누어진 일자의 신기루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해 주는 것이다.
즉 이것이 탈주선 또는 탈영토화의 선인 바, 이는 모든 존재자의 양상 또는 특유한 존재를 직접적으로
촉발하는 것이다.
(들뢰즈에게는 다양체 너머에 일자의 우선성 따위를 주장할 만한 어떤 기반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매끈한 공간에 거주한다는 사실에 의해서라기보다 마치 이주민들처럼 그 배치
들에 의해 유목은 정의된다(사막이나 스텝 지역-ATP 381). 궁극적으로 매끈한 공간은 존재의 일의성
또는 내재성의 평면이 된다(WP 36).
- François Zourabichvili, Le vocabulaire de Deleuze, Ellipses, 2003, 31-33
(본문주석 문헌)
L’anti-OEdipe. Éditions de Minuit: Paris. 1973. [Anti-Oedip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Translated by Robert Hurley, Mark Seem, and Helen R. Lane.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Minneapolis, MN. 1983; Kor. 김재인 옮김, 『안티오이디푸스』, 민음사, 1997; 2014
Proust and Signs, The Complete Text, trans. R. Howard (Minneapolis: Minnesota University
Press, 2000)
Logic of Sense, trans. M. Lester with C. Stivale, ed. C. V. Boundas (London: Athlone Press, 1990)
영원회귀는 생성으로서의 운동이다.
이것은 니체-헤라클레이토스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되돌아 오는 것, 그리고 영원회귀로서 존재에 끊임없이 나타나는 것이 생성이다.
니체는 헤라클레이토스의 개념에 영원회귀로서 존재의 모든 부분을 가로지르는 비시간적인 운동을 추가
하였다.
영원회귀는 존재에 대한 생성들의 운동인데, 이것은 놀이처럼 조직되어 드러난다.
존재는 이러한 생성에 의해서만 긍정된다.
그러므로 영원회귀의 ‘회귀’는 존재로서의 생성이 아니라 생성으로서의 존재라고 해야 한다(NP., 28).
니체에 따르면 생성들은 긍정하는 운동, 창조하는 운동이다.
생성들은 존재로 불리워지는 바, 영원하고 움직이지 않는 모든 진리에 반대한다.
이것은 창조하고 생성하는 ‘놀이’ 자체이다.
이러한 ‘놀이’로서의 영원회귀라는 개념은 말라르메의 ‘주사위 놀이’로부터 설명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생성의 놀이로서의 주사위 던지기는 승리하는 조합을 기다리거나 찾아내면서 우발적인 생성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여기서는 생성되는 모든 조합들을 통해 생성 자체를 긍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놓게 되면 존재, 즉 이기는 조합, 또는 ‘진리’보다 허위, 목표하지 않은 모든 조합들이 오히려
존재의 조건이 된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연구한 것도, 이런 식으로 존재와 생성을 혼합하는 것이었다.
이들에게 생성은 더 이상 존재를 변형하거나 변신시키기 위해 존재를 가로지르는 운동이 아니다.
그보다 더 나아가 생성은 존재의 조건이 된다.
영원회귀는 이로써 차이나는 것들의 영원한 반복, 생성자체가 된다.
들뢰즈의 내재성의 철학은 영원회귀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영원회귀는 차이나는 것들의 반복이므로 언제나 극단적인 것, 과도한 것, 다른 것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우월한 형태를 이끌어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위의 주사위 놀이와 관련시켜 생각해 보면, 이제 중요한 것은 주사위 놀이의 모든 수의 조합‘들’이
아니라 주사위 던지기에서 “모든 주사위 던지기를 위한 유일한 던지기”(LS 1969, 211)가 된다.
“그것은 가장 다양한 사물들에 이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유일한 사건으로서 (...) 도래한다”(Ibid., 210).
- Arnaud Villani, Robert Sasso ed. Le Vocabulaire de Gilles Deleuze, Vrin, 2003, 101-102, 249,
145 참고.(신지영 옮김, 『들뢰즈 개념어 사전』, 갈무리, 2012, 108-109, 180-81. 207, 번역 수정)
(본문주석 문헌)
Deleuze, Gilles, Nietzsche et la Philosophie, Paris, PUF., 1962.
Deleuze, Gilles, Logique du sens, Minuit, 1969.
‘영원회귀’ 개념은 들리즈가 프리드리히 니체로부터 가져온 것이다. 이것은 내재성과 일의성의 철학의
급진적 확장에 있어서 관건적인 개념이기도 하다.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는 둔스 스코투스, 스피노자 그리고 니체를 일의적 존재를 긍정한 철학자
들로 논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일의성에 관한 유쾌한 이념이 적합하게 사유될 만한 철학자는 니체가 유일하다.
왜냐하면 니체야말로 ‘전인격적 특이성’의 세계를 상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러한 세계에는 ‘누구’나 ‘무엇’이라는 것, 즉 여러 특성들을 갖춘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어떠어떠한 것이 ‘있다’고 할 만한 누군가나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각각의 차이는 차이짓는 역능이며, 이것은 다른 어떤 것의 근거나 원인인 그러한 차이의 사건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의 긍정을 가로질러 감으로써, 그리고 어떠한 근거나 차이 이전 또는 그 너머의 존재를 포기
함으로서, 니체와 들뢰즈는 둘 다 영원회귀의 이념에 도달한다.
만약 차이가 이런저런 고유한 목적을 위해 발생한다면, 즉 만약 거기에 삶에 대한 고유한 목표나 목적이
존재한다면, 그때 생성의 과정은 관념적인 결말을 가지게 될 것이다.
비록 이것이 그저 상상되거나 이념적일 뿐이라도 그러하다.
하지만 차이는 그 자체로 즐거운 사건이다.
그것은 이러한 존재에 관한 또는 이러한 목적을 위한 그런 차이가 아니다.
각각의 차이나는 삶의 사건들은 변형된다.
그리고 삶은 그 자신 이외의 다른 것이 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삶은 차이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존재하는 유일한 ‘사물/사태’는 차이일 뿐이다.
각각의 차이의 반복은 이때 차이나는 존재이다.
오직 차이나는 것들만이 되돌아 오며, 그것은 영원히 되돌아오는 것이다.
시간은 차이를 뒤따라 오는 것, 시간은 차이이다.
따라서 차이는 시간 안에 위치할 수 없다. 영원회귀는 그러므로 궁극적인 이념이다.
이 난해하고 수수께끼같은 이념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대개 구체적으로 전개되
는데, 이로써 일반적으로 실존주의적 또는 비인간주의적 실존의 전망 중 하나로 이것을 해석했던 학계에
논란을 낳았다.
실존주의적 해석에 따르면 영원회귀의 사유는 우리는 어떻게 하면 제대로 살 것인가를 숙고하게 만든다.
이러한 생각은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즉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국면, 즉 고통과 쾌락 둘 모두가 어떤 잠재적으로 무한한 반복의 가면을 쓰고
되돌아오게 되는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을 갑작스럽게 깨닫게 되는가?
우리는 어떻게 해서 심지어 가장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사건들의 회귀를 정당화하기 위해 살아가야 할
필요가 있는가?
반대로 비인간주의적이고 우주론적인 독해에 따르면 니체의 명제는 역능의 철학에 관한 기초 공리로
이해된다.
이런 경우 영원회귀는 적극적 역능이 스스로를 반응적 힘으로부터 분리하고 대체하도록 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생성의 작동 원리로 스스로를 정립하는 것이다.
전후 니체에 관한 철학적 갱신 작업에 있어서 들뢰즈의 눈에 띄는 기여는 이러한 영원회귀에 관한 두
번째 독해를 수립했고, 권력에 관한 현대 이론들의 핵심부에 힘의 선별이라는 내용을 새겨 넣었다는
것에 있다.
그는 특히 니체에 관한 순진한 독해를 기각했다.
이전의 이 독해에서 영원회귀는 말 그대로 영원히 동일한 순서대로 모든 역사적 순간들이 무한한 회귀를
한다는 교조적인 주장에 물들어 있었다.
이러한 순진한 독해의 해악은, 들뢰즈에 따르면, 단순한 동일성의 원리로 차이의 역능들의 끊임없는 생성
이라는 니체의 전망을 뒤집어 버리는 것이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영원회귀를 동일한 것들의 끊임없는 되돌아옴이라는 방식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을
이해하는데 실패할 것이다.
대신에 우리는 영원회귀를 존재의 바로 그 중심에 있는 생성과 차이에 새겨넣어야 한다.
왜냐하면 영원회귀에서 되돌아 오는 것은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회귀의 원리는 오직 다기성(diversity)과 다양체(multiplicity)를 공유하는 한 가지로 구성되
는 것이다.
관건이 되는 것은 보편적인 동일성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나는 모든 것들을 생산하는 운동인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회귀는 생성의 종합, 생성 안에서 긍정되는 존재(자)로 이해되어야 합당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힘에의 의지’라는 이름이 함축하고 있는 바는 바로 역능의 차이와 반복이라는 근본적인
존재론적 원리로 드러나게 된다.
영원회귀를 생각한다는 것은 역능들의 적극적 되기(becoming-active)를 생각한다는 것이다.
회귀는 그 역능들이 표현하는 힘에의 의지의 역량에 따라 힘들을 선별한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과정을 의지의 긍정과 힘의 적극성에 따라 ‘이중적 선별’이라고 규정한다.
이 원리에 비추어 본다면, 우리가 의지하는 그 무엇이든, 우리는 그것의 영원회귀를 의지하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 그것을 의지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영원회귀는 존재의 생성으로부터 오는 반응적 상태를 제거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첫번째 선별은 가장 강력한 반응적 힘들을 제외한 모든 것을 제거하게 되는데, 이 힘들은 이제
그것들이 할 수 있는 것의 한계로 적극적인 것을 밀어붙이면서, 허무주의적 충동과 무(nothingness)에의
의지의 기초를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강한 반응적 힘들은 궁극적으로 부정성의 극복와 적극적 역능으로의 반응적 힘들의 전환이라는
결과를 위해 영원회귀 안으로 육화(incorporated, 구체화, 각인)되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반응적 힘들의 가치재평가는, 영원회귀가 완성을 향한 허무주의적 의지를 가져다 주기 때문에
발생한다.
절대적인 부정성의 영혼은 반응적 힘 자신의 부정도 함축하는 것이다.
이러한 부정의 부정이라는 것 안에서 반응적 힘들은 역설적인 긍정성이라는 이름 하에 스스로를 억압하고
거부하게 된다.
반응적인 것들이 스스로를 파괴하는 동안, 가장 강력한 영혼이 반응적 힘들의 적극적 힘-되기에 있어서
신체를 가지게 된다.
이 긍정성의 운동은 두 번재 또는 이중화된 선별을 구성하는 바, 이를 통해 영원회귀가 수행되는 것이다.
즉 반응적 힘들의 가치전환은 부정적인 것 자체의 긍정성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두 번째 선별은 사유의 선별에서 존재의 선별로 이행한다.
다시 말해 어떤 새로운 것이 이제 힘들의 재평가에 따라 등장하면서 존재 안으로 도입되는 것이다.
영원회귀는 이러한 가치전환이다.
이중적 선별에 따라 부정적인 것이 존재로부터 축출되는 동안, 오직 행위와 긍정이 돌아온다.
회귀는 이에 저항하는 모든 반응적 힘들을 제거하며, 그러는 동안 생성의 존재와 역능의 적극적-되기
둘 모두를 긍정하는 것이다.
- Lee Spinks, ‘Eternal Return’, ed., Adrian Parr, Deleuze Dictionary,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3, 82-84
'베르그송/지속/기억/다양체'
들뢰즈는 프랑스 철학자인 베르그송을 재생시킴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이로써 베르그송은 들뢰즈 세대의 핵심적인 사상가의 표본이 되었으며 베르그송의 저작들은 시간, 운동,
기억 그리고 지각과 관련된 분야들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게되었다.
라이프니트, 스피노자, 니체, 흄, 아르토, 가타리와 루크레티우스의 사상을 따라, 들뢰즈는 베르그송의
경험주의를 철학의 전통적 입장에 도전하는 것으로 취급했다.
특히 초월론적 요소들, 현상학적 가정들, 그리고 ‘인식’와 ‘진리’에 대한 탐색에 있어서 그러했다.
베르그송에 대한 들뢰즈의 철학적 관심은 그의 전체 저작의 중심에 놓여 있으면서 다양하게 펼쳐진다.
비록 20세기 후반의 철학의 고전에서 배제되긴 했지만, 20세기 초반에 베르그송의 저작은 유명했으며,
프랑스 입체파에서부터 영어원 작가인 휴움(T.E. Hulme)에 이르기까지 많은 예술과 문학의 무대에서
광범위하게 논의되었다.
베르그송에게서 들뢰즈는 그의 핵심적인 철학적 목적의 협력자를 발견한다.
그것은 주로 시간성에 관한 개념들과 아이디어들, 운동과 지속의 감응적 본성, 다양체(multiplicity)와
차이의 정치적 함축, 유전학적인 형태변이 운동 그리고 습관과 연합되는 계열로서의 사건들의 시간적
인과성이라 할 수 있다.
들뢰즈는 베르그송에 대한 그의 관심을 흄에 관한 책, 『경험론과 주체성』에서 암시해 놓았다.
그리고 1963년에 들뢰즈는 그의 책, 『베르그송주의』를 내 놓는다. 여기서 그는 ‘베르그송으로의 귀환’
을 주장하는데, 이는 그가 베르그송의 세 가지 핵심 개념이라고 말한 ‘방법으로서의 직관’, ‘과학의 형이
상학적 지향에 관한 발명과 실용성’에 대한 요청, 그리고 ‘다양체(다양성)에 관한 논리적 방법과 이론’을
통해 확장적으로 수행된다.
베르그송은 운동에 관한 존재의 운행규칙에 대해 의문을 가졌을 뿐 아니라, 그의 본래의 열정적인 관심사
였던 생명으로서의 주체와 대상들에 관한 글도 썼다.
들뢰즈는 후자의 방면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이는 그가 생기론(viatalism)에 관한 자신의 진술들을 가다
듬도록 만들었다.
베르그송의 개념들은 들뢰즈의 저작인 『차이와 반복』에 영향을 주었다.
여기서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 기억과 반복, 시간의 강도적 외연적 형식 그리고 시간의 물리적 운동들에
관한 생각들을 발전시킨다.
이 모든 것들은 베르그송의 책, 『물질과 기억』(1896)에서 논의된 시간의 역설적 양상들에 관한 논의들
에 빚지고 있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지속의 동적 모델을 제안한다.
지속의 개념은 공간적으로 먼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지적인 운동을 통해 그것의 과거로부터 끊임없이
대체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창조적 진화』의 후반부에서 베르그송은 그의 철학적 표현 안으로 영화적인 모델을 도입한다.
이때 베르그송은 일상적인 지적 사유에 관련된 고대 철학의 영화적 특성에 주목하고 있다(B1911: 331-33).
이 모델로부터(그리고 시간에 관한 칸트적 관념과 사유와 운동에 대한 헤겔적 개념으로부터) 들뢰즈는
영화 스크린의 움직이는 이미지와 관련된 지각이 작동하는 방식에 관해 설명을 전개한다.
이때 들뢰즈는 그러한 운동의 파악을 통해서가 아니라 음향과 시각적 등록과정의 특수한 순간들을 통해
설명을 수행한다.
이 들뢰즈의 논의는 그의 두 권의 책인 『시네마1: 운동-이미지』과 『시네마2: 시간-이미지』에 길게
전개되어 있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기억은 지각 이미지들의 시간적 융합으로 파악된다.
이 생각은 들뢰즈가 영화의 철학적 중요성에 대해 논의를 전개할 때 중요하고 핵심적인 전제가 된다.
들뢰즈는 영화에 관한 그의 두 번째 책, 『시네마: 시간-이미지』에서 가능한 기억의 상태들에 관한
상이한 유형들, 즉 꿈, 백일몽, 데자부 그리고 죽음에 관한 베르그송의 관심으로부터 내용을 이끌어 낸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 들뢰즈는 기억의 기능들, 즉 환영(fantasy), 환각(hallucinations), 우리가 현재(이제
과거가 되는)를 활용하는 미래를 위해 현재의 기억을 만드는 ‘약속-행위’(니체), 극장, 기억의 묘사 발명과
제거, 그리고 수적인 타자들을 통해 존재하는 ‘인지’ 과정 개념(알랭 로브-그리에)과 같은 개념들의 숨결
을 불어넣는다.
베르그송을 따라, 들뢰즈는 꿈이나 기억 사건들 또는 가상의 각성된 수용자의 지각적이고 인지적인 능력들이 어떻게 요인들의 복잡한 네트워크에 의존하는지 기술한다. 『물질과 기억』에서 베르그송이 논하는 바에 따르면, 지각적 주의력의 체계는 사태에 대한 ‘자동적’ 또는 ‘습관적’ 인지에 달려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기억하기(remembering)의 상이한 양상들은, 대상의 기술(description)뿐 아니라 대상 자체의 특성들에 감응하면서, 사태들에 관한 지각에 주어진 주의력의 수준에 따라 조절된다. 지속과 운동 그리고 시간의 다양체들에 관한 성숙한 개념은 베르그송으로부터 발전되어 나아간 것이다.
- Felicity J. Colman, ‘Bergson, Henri(1859-1941)’, ed., Adrian Parr, Deleuze Dictionary,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3, 26-28.
들뢰즈는 철학적 교설의 급진적인 시작점으로 베르그송에 관심을 가진다. 지속(durée)은 들뢰즈가 채택한 베르그송의 여러 핵심 개념들 중 하나다. 들뢰즈는 이 개념으로 차이의 철학을 전개한다. 베르그송에 대한 들뢰즈의 전형적인 접근방식은, 베르그송 개념에 대한 그의 해석과 사용인데, 이는 거의 전반적으로 그 개념들에 조응하지만, 파격적으로 기이한 방식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우리는 지속이라는 개념을 오직 철학적 직관(intuition philosophique)이라는 베르그송의 방법을 사용함으로써만 파악할 수 있다. 여기서 철학적 직관이란 신중한 반성적 의식(deliberate reflective awareness) 또는 의지적인 자기-의식(willed self-consciousness)이라고 할 수 있다. 직관은 의식성 또는 보다 일반적으로 정신적 삶이 본질적으로 시간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진행중인 정신적 활동은 그것의 운동역학 안에서 그리고 그 상태들의 상호간의 침투 안에서 우리 스스로에게 어떤 내적 시간을 구성해 준다. 정신적 삶은 따라서 어떤 종류의 흐르는 경험이며 지속은 이러한 흐름의 즉각적인 의식이다.
베르그송은 직관의 발견물들은 이미지들에서 가장 훌륭하게 표현되며, 그리고 지속은 음악에 관한 유비들을 사용함으로써 잘 설명된다고 본다. 정신의 상태들은 마치 멜로디의 부분들 처럼 함께 흘러 간다. 이 정신의 상태들은 지연되는 이전의 조각들, 조각들의 통일성을 예견하는 미래, 각각의 조각들의 침투로 이루어지는데, 이는 그것들의 상호연결에서 극도의 근접성을 드러내면서 상호간에 작동한다. 이 흐름을 조각들의 완전한 집합으로 파악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음악은 언제나 끝나기 바로 직전에 계속되며, 새로운 조각들의 부가에 의해 항상 대체되기 때문이다. ‘정신’(mind)이나 의식을 이해의 체계로 말하는 것은 지속의 유비적 속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흘러가고, ‘아직 아님’과 ‘이미’ 지나감이라고 불리워지는 것을 앞질러 간다.
베르그송은 지속의 양화(quantification)를 사유하면서, 그것이 그 순간들, 즉 살아 있는 실재들로 이루어진 불연속성이라고 본다. 그것은 ‘시계의 시간’, 다시말해 물리적이고 실증적인 삶의 시간과 대조를 이룬다. 이 실증적인 시간은 요소적인 순간들의 끝과 끝을 어떤 상호참조적인 격자 위에 정립함으로써 시간을 공간화하거나, 무신경하고 부정확한 물리적 이미지로 시간-조각의 숫자를 사용한다. 이러한 모델들에 일치시켜 정돈될 때, 시간은 분리가능한 순간들의 계열이 되며, 의식은 시간 안에서 시간적으로 이질적인 정신적 상태들의 계열로 ‘정립’된다. 그리고 이때 운동은 정적 위치들 사이의 관계로 파악되는 것이다. 다른 말로 시계의 시간은 지속의 관념으로부터 그것의 연속성을 일그러트린 채 추상된 것이다.
하지만 지속의 순간들의 구성적 통합은 과도하게 강조되어서는 안 된다. 베르그송의 직관은 마찬가지로 의식이 그 자체로 ‘하나의 긴 사유’는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그것이 아니라 의식이란 중요한 방식들로 서로 간에 상이한 정신적 상태들이 함께 가는 어떤 흐름이다. 베르그송은 정신적 상태들 간의 차이란, 어떤 단일한 흐름, 즉 하나의 의식으로 사고의 합류가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동안, 우리가 한 종류의 사고 또는 다른 것과 구분되는 하나의 특정한 사고를 지정하도록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테면, 지속은 특유한 것들 간의 차이와 관계들을 동시에 구성하는 변화의 흐름에 관한 즉각적인 관심(의식, 깨달음, awareness)이다.
지속의 이런저런 특징들은 들뢰즈에게 관건적이다. 흄에 관한 그의 초기 연구에서, 들뢰즈는 지속을 설명적인 도구로 사용하면서, 흄의 습관, 연합 그리고 시간에 관한 생각을 일신한다. 결과적으로 들뢰즈는 지속을 차이를 탐색하는 도구로 채택하면서 생명의 핵심 요소로 만든다. 만약 지속이 무언가 생생한 경험의 모든 질적 차이(‘종의 차이’)를 그 자체로 ‘포함한다’면, 들뢰즈는 그때 이러한 차이들의 생산적이고, 해방적인 잠재성을 마찬가지로 강조하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의 의식의 연속성 안에도, 창조성과 참신성을 허용하는 사건들 사이에 불연속이 존재하게 된다. 예컨대 우리는 기억을 재해석하기 위해 새로운 개념들을 상기하거나, 풍경들을 예술 작품에 드러내어 조명함으로써 새롭게 지각한다.
들뢰즈는 지속을 시간과 차이에 관한 몇몇 중요한 철학적 지점들을 구성하기 위해 이용한다. 칸트의 경우 시간은 세계에 대한 수용적 경험의 형식이자 모든 인간 경험의 필연적 조건이다. 예컨대 칸트에게 시간은 경험적 개념이 아니라 모든 가능한 경험 아래에 놓인 선험적 필연성인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시간을 연속되는 순간들의 유사한 계열들로 구성된다고 고려하며, 그것이 종합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본다.
이와 반대로 지속은 언제나 우리의 경험에 주어진 것 안에 있는 현재이다. 그것은 경험을 초월하지 않으며, 철학적으로 추론되어져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더 나아가 지속은 물질과는 달리, 그것이 나누어지거나 재구성될 때, 그것들의 통일된 형태로서, 통합적으로 동일하게 남게 되는 요소들로 분해되지 않는다. 지속은 생생한 경험으로서, 통일성과 차이 둘 모두를 상호연결들의 흐름 안으로 합친다. 들뢰즈에게 이러한 대조는 다양성들을 포섭하고 질서잡는 ‘우월한’ 개념들을 창조하는 독단적인 철학과 변화와 다양성을 위한 기회를 창조하는 철학 간의 차이를 드러낸다.
- Cliff Stagoll, ‘Duration(durée)’, ed., Adrian Parr, Deleuze Dictionary,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3, 78-80.
들뢰즈는 오래된 기억들을 소환하기 위한 도구로서 파악되는 기억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와 같은 기억의 모델은 창조적인 잠재성을 결여하고 있으며, 어떤 대상이 과거에 경혐되었던 것과 동일한 것으로 재-현되고(re-presented), 재-인될(re-cognised) 수 있는 가능성을 함축한다. 하지만 그와같은 관점은 오늘날의 상기(recollection)가 시간적으로 맥락적으로 원래의 경험이나 이전의 상기들과는 어떤 매우 다른 경험이라는 점을 간과한다. 이와 같은 차이를 이론적으로 간과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과거에 묶어 둠으로써 기억의 작동 안에 고유한 것으로 들뢰즈가 고려하는 생산적 잠재력을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하나의 주제로서 기억에 대한 그의 천착이 부족하다고 선언한다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뢰즈는 이에 대한 그의 생각을 여러 번 연구했다. 흄에 관한 초기 연구에서 들뢰즈는 기억의 재생적이고 재현적인 효과들이 어떻게 인격적인 동일성이 환영에 관건적인지에 대해 다루었다. 왜냐하면 기억이 유사성과 인과성의 관계들을 수립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베르그송에 대한 그의 저작에서 들뢰즈는 그 자신의 차이의 철학을 전개하면서, 그와 같은 ‘습관적 기억’ 너머로 이동해 갔다. 이는 어떻게 ‘역사의 블록들’이 현재와의 생산적 연합으로 이동하는지, 그와 같은 방식으로 어떻게 과거가 새롭게 그리고 차이를 형성하며 살아나는지를 이론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들뢰즈의 의식에 관한 베르그송론은 두 가지 방식의 작용으로 대략 기술될 수 있다. 하나는 ‘물질성의 방향’(line of materiality)으로서, 이는 그가 정신과 신체를 포함한 물질적 세계 간의 관계를 이론화하는 것이다. 정신과 신체 간의 활동은 언제나 현재 안에서 발생하는 것이고, 과거와 현재 간의 순수하게 이론적인 경계로 이해된다. 이 방향에서 물질과 우리의 관계는 전체적으로 물질적이며 비매개적이다. 의식의 세계는 이런저런 종류의 운동에 의해 물질의 세계와 일치된다. 그와 같은 활동은 순수 인식보다는 항상 행동하는 실천적 삶을 지향한다. 이를테면 작동 중인 기억의 형식은 ‘습관적 기억’인데, 이는 과거에 유용하다고 증명했던 것들에 의해 조건화된 신체적인 응답들에 적합한 결정들을 반성하는 것이며, 여기에는 어떤 ‘순수 상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질이 의식과 구분되면, 물질성의 방향은 생생한 경험의 시간성을 고려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들뢰즈는 베르그송의 순수 기억에 관한 이론을 ‘주체성의 방향’에서 일깨운다. 베르그송은 순수기억이 특정하고도 상세하게 모든 의식의 사건들을 저장한다고 믿는다. 현행적인 실존의 지각들은 이미지들로서의 잠재적 실존 안에서, 생성하는 의식의 잠재성과 중첩된다. 따라서 모든 생생한 순간들은 한편으로는 지각과 더불어, 다른 한편으로는 기억과 더불어, 현행적이면서도 잠재적이다. 이것은 점차 성장하는 상기의 덩어리들이라고 할 수 있다.
베르그송으로부터 실마리를 이끌어내면서, 들뢰즈는 잠재적인 것이 의식이 되기 위한 그것의 잠재적 힘에 의해 정의된다는 것을 사유한다. ‘잠재적인 실재성’의 매개 안에서, 실재적인 것(the real)을 단순히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잠재적인 것은 현행적으로 만들어지며, 그래서 새로운 효과라는 몇몇 결과를 가지게 된다. 잠재적인 것이 실재화되는 방식은 그것의 현행화의 정교한 환경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순수하게 잠재적인 이미지들의 집합으로서, 기억은 어떤 심리적인 실존을 가지지 않으며, 대신에 시간안에서도 공간 안에서도 유지되지 않는 순수 존재론적 ‘과거 일반’이 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기억상실이란 순수 기억으로부터 어떤 ‘내용’의 상실로 인식되어서는 안 되고, 단지 상기 메커니즘의 붕괴라고 해야 한다. 잠재적 이미지들은 여러 패턴들로 정돈되는데, 이는 ‘평면들’(planes) 또는 ‘장’으로 파악되며, 모든 평면에서 몇몇 특유한 잠재적 이미지와 관련하여 분배되는 경험된 과거의 총체성을 담지하게 된다. 이로부터 평면 상의 모든 다른 것들이 의미와 역사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순수기억은 관련된 잠재적 이미지들이 현행화될 때 의식으로 드러나게 될 것인데, 문제는 이것이 베르그송의 텍스트에서는 거의 조금밖에 언급되지 않지만, 들뢰즈에게서는 중심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그와 같은 현행화는 상기의 과정으로서, 잠재적인 것들이 스스로를 뭔가 새로운 것이 되는 것을 통해 차이화하는 것이며 따라서 심리적인 의미를 전제하는 것이다. 이때 상기된 기억 이미지는 몇몇 행위나 환경과 연관된다. 이러한 과정에 관한 들뢰즈의 수수께끼 같은 기술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진다. 첫째로 기억은, 가장 밀접하게 관련있는 평면이 배치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과거로의 도약’에 의해 진행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 기억은 현재와 주어진 새로운 ‘삶’ 또는 현재 유동하는 환경들에 관련된 맥락 안으로 기입된다. 이러한 계기 안에서 심리학은 생생한 현재의 구성, 즉 들뢰즈가 생생한 시간의 흐름에 대해 본질적인 것으로 고려한 어떤 특별한 종류의 종합 안에서 존재론과 상호작용한다.
들뢰즈의 베르그송적인 기억론의 두 가지 측면은 그의 반-토대주의에 매우 중요한 요건이다. 첫째로 그것은 상기가 발생하기 위해 초월적 주체가 ‘소유한’ 기억에 관해 파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사실상 들뢰즈는 그 반대를 논증한다. 기억은 항구적이고 통일적인 자기(self)의 인상을 일으키도록 돕는다는 것이다. 두번째로 기억은 과거를 단지 되살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관심과 환경과 관련하여 어떤 새로운 현재로서의 과거를 구성한다는 것도 보여준다. 따라서 기억은 동일성을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이라기보다 새로운 것을 생산하는 창조적인 힘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 Cliff Stagoll, ‘Memory’, ed., Adrian Parr, Deleuze Dictionary,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3, 159-161.
‘다양체’(1)는 단언컨대 들뢰즈의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이 개념은 그의 저작 전체에 걸쳐 발견되어지며, 다른 중요한 개념들, 예컨대 리좀, 아상블라주, 그리고 ‘개념’ 자체와 같은 것에 기초가 된다. 그것은 또한 들뢰즈에게서 파악하기 가장 어려운 개념이기도 한데, 그 이유는 그가 이 개념을 연구에 활용하는 여러 상이한 방법과 맥락들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주목해야할 몇몇 본질적인 속성들이 있다.
(1)[번역자주]‘다양체’라는 용어는 『베르그송주의』(Le bergsonisme, 1966)에서 처음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곳은 가타리와의 마지막 공저인 『철학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a philosohpie?, 1991)이다.
다양체는 가장 기초적인 의미에서, 어떤 복잡한 구조로서 그보다 앞선 통일성을 지칭하지 않는다. 다양체는 단편화되어 있는 보다 큰 전체의 부분들이 아니며, 따라서 그것은 하나의 단일한 개념 또는 초월적 통일성의 다양한 표현으로 고려될 수도 없다. 이러한 근거에서, 들뢰즈는 그것의 형식들의 모든 면에서, 다양체에 대해 이분적 일자/다자 대당에 반대한다. 더 나아가 그는 중요한 것은 다양체를 그것의 주어적 형식, 즉 하나의 다양체로 고려하는 것이지, 어떤 형용사적 형식[속성]으로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들뢰즈에게 모든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다양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가 다양체 개념의 발전과 연관지어 자주 말하는 사람은 두 사람인데, 한 사람은 수학자인 리만(George Riemann)이며 다른 한 사람은 프랑스 철학자인 베르그송(Henri Bergson)이다. 리만으로부터 들뢰즈는 전체성이나 전부가 되지 않는 어떤 종류의 패치워크나 앙상블을 형성하는 상이한 다양체들로 구성되는 어떤 상태가 있다는 생각을 취한다. 예를 들어 하나의 집은 콘크리트 구조물들과 관성의 패치워크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우리는 이러한 사물들의 리스트를 작성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거기에 그 개별적인 집의 본질이 존재한다고 결정할 만한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을 설명하거나, 총괄하기 위해 집 그 자체의 바깥에 어떠한 것도 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저 단순한 패치워크일 뿐이다. 이것은 오직 다양체 그 자체에 대한 하나의 훌륭한 기술(description)로 취급될 수 있다.
들뢰즈가 이 방면에서 베르그송에 빚진 부분은 보다 근본적이다. 『베르그송주의』(1966)에서 들뢰즈는 처음으로 다양체에 대해 논하는데, 여기서 그는 베르그송 철학을 확장하려고 애쓴다. 들뢰즈는 우선 베르그송에게 두 가지 종류의 다양체가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하나는 외연적, 수적 다양체들이고 다른 하나는 연속적 강도적 다양체들이다. 이것들 중 첫번째는 베르그송에거 공간으로 특성화되며, 두 번째 것은 시간으로 특성화된다. 외연적인 것과 강도적인 것 사이의 차이는 아마도 여기서 가장 중요한 지점일 것이다. 부분들로 나누어질 수 있는(이것이 수적이라고 불리우는 이유다) 공간과 대조적으로 강도적 다양체는 본성의 변화가 없이는 나누어질 수 없다. 다른 말로 해서, 강도적 다양체에게서 어떤 변형은 그것의 본성에 있어서 총체적인 변화, 즉 강도적 상태에서의 변화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들뢰즈에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서로 간에 촉발되지 않고 남을 수 있는 개별적 다양체들의 본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또한 베르그송에 대한 자신의 독해의 맥락에서 다양체의 개념과 잠재적인 것의 개념 사이에 중대한 연결지점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것은 들뢰즈가 베르그송주의자로 남아 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이다. 들뢰즈가 흔히 잠재적인 것에 대해 논의할 때, 마르셀 프루스트의 잘 알려진 말을 기억과 관련하여 인용한다. ‘현행적이지 않은 실재적인 것, 추상적이지 않는 이념적인 것’이 그것이다. 따라서 잠재적 다양체는 세계 안에 필연적으로 구현되지는 않은 실재적인 것이다. 이때 잠재적 다양체는 추상적이고 대체가능한 가능성들을 표현하기 보다, 모든 특수한 상황에 고유한 변화에 실재적으로 개방적인 어떤 것을 형성한다.
이것은 아마도 들뢰즈의 잠재적 다양체에 관한 이론에서 가장 파악하기 어려운 지점일 것이다. 잠재적 다양체들이 특수한 사태(affairs)들의 상태에 구현되는 동안, 그것들은 조금이라도 초월적이거나 본질적으로 불변하는 것으로 고려되어져서는 안 된다.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의 라이프니츠에 관한 장에서 논하다시피, 잠재적인 것과 현행적인 것은 상호관계되어 있으며, 서로 간에 변화를 준다. 그래서 잠재적인 것이 현행적인 상황으로 구현되는 동안 현행적 상황들에 있는 변화들은 마찬가지로 잠재적 다양체들 안에 변화를 초래한다. 따라서 실존이란 현행적인 다양체들(사태[일, affairs]의 상태)과 잠재적 다양체들(변화의 개별적인 강도적 운동들)의 어떤 조합이 된다.
유난히 추상적으로 보이지만, 이 개념들은 들뢰즈에게 세계에 대한 매우 실천적인 상을 발전시킬 근거들을 제공한다. 다양체 개념은 구조나 실존의 법칙을 포함하고 있는 세계의 그 어떤 초월적 영역과도 관계하지 않는다. 우리는 현행적인 다양체들 그리고 우리 자신인 바 그 다양체들 사이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세계 안에서 언제나 요소들(elements)이며 행위자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과 인간의 실존은 탁월하게 실천적인 것이다. 우리의 현행적 다양체들의 잠재적 대당은 또한 연속되는 운동과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 심지어 현행성의 세계가 가장 완고하고 억압적으로 보이는 바로 그 지점에서도 그러하다.
- Jonathan Roffe, ‘Multiplicity’, ed., Adrian Parr, Deleuze Dictionary,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3, 176-77.
'잠재적, 잠재성/직관'
들뢰즈의 존재론에서, 잠재적인 것과 현행적인 것은 상호적으로 배제적이지만, 함께 충족되는 관계, 즉
실재적인 것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현행적/실재적인 것은 사태(일, affairs), 신체들, 신체적으로 혼합된 것들과 개체들의 상태다. 잠재적/실재적인 것은 공속면(a plane of consistency)에서의 비신체적인 사건들 그리고 특이성들이며, 순수 과거, 다시 말해 결코 충분히 현재가 될 수 없는 과거에 속해 있다. 현행적인 것과 닮거나 그것이 되지 않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재적인 것은 현행화를 야기하는 능력을 가진다. 하지만 잠재적인 것은 결코 그것의 현행화와 동일시되거나 일치하지 않는다. 들뢰즈는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에 기대어, 잠재적인 것(the virtual)이 어떤 가능태(potential)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잠재적인 것에 관한 그의 개념에 영향을 준 다른 철학적 전통은 베르그송이며, 가능태에 대한 그의 비판은 스피노자의 실체일원론의 사유이다. 스피노자는 실체를 그 무한한 속성들에 있어서 차이를 형성하고 언제나 그것의 양태들에서 더욱더 차이화하는 존재의 과정 안에 있는 것으로 본다. 마지막으로 니체의 ‘영원회귀’ 개념이 잠재적인 것의 개념에 영향을 미쳤다.
생성을 특성화하는 하나의 방법은 다음과 같은 도식이라 할 수 있다. ‘잠재적/실재적인 것↔현행적/실재적인 것↔잠재적/실재적인 것’. 그와 같은 다이아그램이 가리키는 바는 생성이란 하나의 현행적인 것으로부터 다른 것으로 가는 선형적 과정이 아니라, 어떤 사태들의 현행화된 상태로부터의 움직임이고, 그것은 잠재적/실재적 경향을 띤 동력학적 장을 지나, 새로운 사태의 상태에 속한 이러한 장의 현행화로 향해 간다. 이 도식은 잠재적이고 현행적인 관계들의 가역적 본성을 담고 있다.
한편 다른 맥락에서 들뢰즈는 베르그송에 대한 연구에서 잠재적인 것을 지속(durée)과 생명의 도약(élan vital)으로 파악했다. 『차이와 반복』에서는 문제들의 영역과 이념들/구조들로서 잠재적인 것이 이해된다. 이에 따라 여기서는 잠재적인 것의 다기한 현행화는 해들(solutions)로 이해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들뢰즈의 많은 텍스트들을 관통면서 그가 잠재적인 것들로 가리키는 바는 어떤 사건이다. 들뢰즈에 의해 잠재적인 것들에 주어진 여러 성격규정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 즉 잠재적인 것들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각각의 성격규정이 차례로 연루되는 정도는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잠재적인 것이 베르그송적인 지속과 생명의 도약이라는 것은 시간성의 구조와 관련된 들뢰즈와 베르그송 사이의 기초적인 일치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어떤 현행적 현재는 오직 모든 현재들이 현재로서 그리고 과거로서 구성되기 때문에 지나가는 것이다. 모든 과거인 현재들 안에서 전체 과거는 스스로를 보존하며, 이것은 결코 현재가 되지 못했던 과거(잠재적인 것)을 포함한다.
결코 현재화되지 못한 과거(태고의 과거)에 관한 생각은 또한 데리다와 레비나스의 저작들 속에서도 발견된다. 이 생각이 요구하는 추론은 여러 철학자들을 거쳐 다양하게 전개되지만, 거기에는 그들이 공통적으로 소유하는 한 가지가 있다. 즉 현재의 탈-현행화(de-actualisation)를 중시하는 어떤 철학은 과거나 미래의 원천에 닿기 위해 과거(플라톤의 ‘상기’의 경우)와 미래(몇몇 묵시록적 종말론의 경우)를 물신화하는 위험을 감수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물신화를 막기 위해, 태고의 과거와 메시아적 미래라는 관념들(들뢰즈는 순수 과거에 대해 그리고 차이나는 것의 영원회귀에 대해 말하기를 더 선호한다.)은 비결정론적 경향들을 전제하는 어떤 과정에 대한 생각을 옹호해야 한다. 과거는 ‘순수’하다고 말해지는데, 이는 그것이 문제들의 자리이고 현행화의 원천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해의 영역은 수들(numbers) 안에 한정되어 있으며, 잠재적 과거와는 달리, 그것은 확장되면서 풍요로워지고, 강도 안에서 빈곤하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위대한 예술가는 마치 아무도 현전하지 않았던 시간 안에서인 것처럼, 과거의 어떤 것을 그것의 실재적 존재로 던져 놓을 것이다. 들뢰즈와 베르그송이 지속이란 텅 빈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일치하는 한에서, 어떤 내재적으로 차이화하는 실재적인 것의 동력학적 과정이 있게 되는데, 이때 실재적인 것의 본성은 항상 새로운 차이화 안에서 스스로를 현행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의 적합한 이름은 ‘생명의 도약’이다.
『차이와 반복』 안에서는 칸트주의의 대담한 변형이 있는데, 여기서 들뢰즈는 잠재적인 것을 이념들과 동일시하기 시작한다. 이념은 칸트에게서 경험적인 세계 안에 어떤 예화(instantiations)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사유되어야만 하는 것[요청되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요청을 그가 잠재적인 것에 대해 생각할 때 유지한다.(이를테면 사유불가능하지만 사유되어야 하는 것[cogitandum]) 하지만 들뢰즈는 이념들을 모든 능력들의 동명사형태들(기억불가능하지만 기억되어야 하는 것[memorandum], 침묵이지만 말해져야 하는 것[loquendum] 등등)로 만듦으로써 다양화할 때 순수한 칸트주의를 넘어서게 된다. 이념들이 많은 부분에서 구조적이라는 주장은 『차이와 반복』을 통틀어 들뢰즈가 사용하는 지배적인 구조주의의 어휘로부터 유추되는 것이다. 후기 저작에서 들뢰즈는 이념들이, 그가 잠재적인 것의 본성을 공속면과 관련하여 기술할 때 구조화된다는 이 주장을 자세히 검토한다. 들뢰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잠재적인 것이 현행적인 것의 이중화나 유사성으로 이해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고, 초월적인 의미로도 이해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문제들은 그것들의 해를 재현하거나 그것과 유사하지 않다는 것이다.
잠재적인 특이성들과 현행적인 개체성들을 유비나 유사와 관련하여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들뢰즈가 단순히 동일성의 반복이라고 한 반복의 개념으로 그것들을 환원하게 될 것이다. 잠재적인 것이 어떻게 하나의 사건으로 특성화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들뢰즈의 ‘의미’에 관한 논의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동사의 부정법 안에 주어지는 것으로서, 명사나 형용사와 달리 동사가 생성의 존재론에 더 적합하다는 것이다. 동사들의 부정형에서, 그것들은 잠재적인 것의 ‘때 이른’ 본성을 가장 잘 도입하며, 주체들이나 대상들의 부재로 이해된다. 하지만 그것들은 마찬가지로 이상한 조합이기도 하다. 즉 그것은 다양체들이 절합되는 과정에서 상호간 무관심하면서도 역동적인 측면들을 드러내는 것이다.
-Constantin V. Boundas, ‘virtual/virtuality’, ed., Adrian Parr, Deleuze Dictionary,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3, 297-98.
들뢰즈는 ‘직관’이라는 개념을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사용한다. 몇몇 그의 후기 저작들(예컨대 가타리와 함께 쓴 『철학이란 무엇인가?』의 경우)에서, 그것은 내재성의 평면의 요소들 중 하나를 지칭하는 것이다. 개념들이 어떤 평면의 강도의 점들을 정의하는 반면, 직관은 그것의 운동을 가리킨다. 그와 같이 직관은 일반적 의미로 어떤 이념들 또는 심지어 ‘사유의 선들’로 간주될 수 있으며, 어떤 특정한 문제와 그것의 사유의 환경들에 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뢰즈는 보다 자주 직관을 베르그송으로부터 차용한 어떤 종류의 철학적 방법으로 논하기도 한다. 이것은 들뢰즈가 직관을 어떤 특정한 철학적 테크닉으로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어떤 항구적인 방법의 채택에 반대할 것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단일한 접근법이란 문제에 대한 전망을 제한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창조적 사유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들뢰즈가 진정한 방법을 가리킬 때, 그는 자주 베르그송의 철학적 직관(intuition philosophique)의 변형된 판본을 가지고 온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진화는 인간 정신안에서 초래되는 것으로서, 이때 정신은 합리적 탐구를 수행할 수 있게 되고 과학과 실천의 세계를 이끌어내는 관건적인 결정들을 한다. 정신은 우리 삶의 동력학에 대한 형이상학적 탐구들을 수행하는데 그렇게 적합하지 않다. 사실상 베르그송에게 우리의 분석적 지성을 철학적 문제들로 전환하는 노고는 우리가 ‘간파’하고 추상적으로 이론화하는 몇몇 정적, 물질적 이미지와 관련하여 우리가 고려하는 생생한 실재성을 명백하게 초래한다.
베르그송에게 우리의 생생한 실재성은 의식상태의 흐름으로 구성된다. 의식은 본질적으로 시간적이다. 정신적 활동의 진행 중에 누군가의 자기성에 내재한 시간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의 연속성과 존속은 우리의 인격성을 구성하며, 그 특이성은 우리의 개체성을 정의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단 우리가 우리의 분석적 정신을 생생하고 의식적인 경험으로 바꾸긴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연속하는 순간들과 공간 안에 수립된 이미지들과 관련하여 사고하는데 익숙하다. 이와 같이 철학적인 정확성이란 실재성이 더 이상 그 철학의 개념들로 이론화되지 않기 때문에 상실된다.
직관은 베르그송이 분석적 정신의 추상적 경향성을 회피하기 위해 옹호되는 철학적 방법이다. 그는 우리가 경험 안으로 ‘직접’ 진입해야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경험에 ‘동감’하고 ‘일치’된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를 성취하는 방법을 기술한다는 것은 그토록 많은 학문적 주석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난해하기 그지없다. 가끔 베르그송은 직관을 예술적 감성과 각성 또는 실재성으로부터 떼어낸 어떤 것과 더불어 논하기도 한다. 다른 때에 그는 직관을 순수한 본능과 연결시키기도 한다.
들뢰즈의 해석에 따르면, 직관은 다소 신비하지만 문제틀(problematic)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는 직관을 해방된 반성적 각성(deleberate reflective awareness) 또는 의지적인 자기의식(willed selfconsciousness), 의식의 작용에 대한 집중되고 직접적인 관심(이것은 사유를 그 자체로 투명하게 간주하기 위해 의식에 의해 의식을 관찰하는 것과는 대조된다.)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직관에 대한 기술은 정신이 그 자체로 부여하는 주의집중으로서의 의식의 직관이라는 베르그송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때 정신은 그것의 일상적 기능들을 진행하면서, 그것의 작용의 본성과 동시적으로 다소 분별적으로 된다. 만약 우리의 자연적 경향이 공간과 양과 관련하여 사물/사태들을 파악하는 것이라면, 그와 같은 직관의 노고는 성취하기가 극도로 어려울 것임에 틀림 없다. (들뢰즈와 베르그송은 둘 다 여러번 직관은 한계가 없으며, 동물들 그리고 심지어 영혼없는 사물들도 가지고 있는 ‘공감’과 ‘일체감’이라는 인간적 조건 너머로 우리를 데려갈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한 수단에 대해서는 신비로운 것은 남긴다.)
들뢰즈는 유별나게 직관을 선호하는데, 왜냐하면 차이를 재발견하기 위해 경험으로부터 그 경험의 우발적 조건들로 움직이고자 하는 그의 철학적 욕망이 형이상학적 환각 없는 의식의 특이성을 성취하기 위한 어떤 수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실재성을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또는 그것을 경험하게 하는) 개념들과 연관하여 생각한다면, 그때 그는 한 종류의 추상으로 다른 종류의 추상을 대체하는 것이 될 것이다. 들뢰즈는 그 대신에 자연적 결합에 따라, ‘나’라고 불리워지는 전체성의 국면들을 해소하고, 추상적이거나 일반적인 개념들에 기대지 않는 의식과 삶의 물질적 국면들을 파악하자고 요구하는 것이다. 베르그송의 직관은 경험의 자연적 결합에 따른 개념들을 창조함으로써 이를 성취하도록 한다. 의식의 흐름으로서의 생생한 실재성으로부터 들뢰즈의 직관은 그와 같은 결합을 기억, 능력들, 꿈, 희망, 농담들, 지각들 그리고 계산들로 드러낸다. 이처럼 들뢰즈는 구분의 방법으로서의 직관과 초월론적 분석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직관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직관의 정확성과 일반적 적용능력에 대해 베르그송은 가끔 들뢰즈보다 더 많은 의구심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베르그송은 독자들에게 의식의 어떤 직관적 연구의 결과를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개념화하고 상징화하는 것이고, 따라서 추상적인 것이라는 점을 일깨운다. 하지만 그는 직관일나 무릇 형식적 개념과 상징적 제한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그는 직관에 대해 대화하기 위해 표현불가능한 어떤 다른 것을 가리키는 은유와 암시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들뢰즈는 비록 그의 언어가 베르그송의 주장을 따르는 듯 암시한다 하더라도, 이와 같은 의구심을 전혀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하다.
- Cliff Stagoll, ‘intuition’, ed., Adrian Parr, Deleuze Dictionary,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3, 13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