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잔 다르크(Jeanne d'Arc, 1412년∼1431년)
프랑스와 영국이 영토의 지배권을 두고 수 십년 동안
싸움을 반복하던 도중 프랑스가 궁지에 몰렸을 때
오를레앙에서 종교적 신념으로 일어난 평민 소녀.
잔의 기적적인 활약으로 전세가 역전되었고 결국 프랑스가
백년전쟁에서 이기고 영국을 대륙에서 구출해 내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잔다르크는 영국군에 사로잡혔으며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프랑스로 부터 구명도 받지 못하고
영국에서 마녀로 판결 받아 억울하게 화형 되었다.
사후 명예가 복권되었으며 프랑스의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받는다.
생몰년은 1412년 1월 6일(추정)∼1431년 5월 30일.
생일로 알려진 1월 6일은 주님 공현 축일인데 잔 다르크가
샤를 7세를 왕위에 올린 것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또는 잔 다르크에게 신성함을 부여하기 위해
사람들이 날짜와 이야기를 지어냈을 수도 있고
대충 그 무렵에 태어났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근대에 이르기까지도 가톨릭권 유럽에서는 부모들이
자식들의 생일을 실제 날짜보다는 가까운
가톨릭 축일 날짜로 기억하는 예가 흔하였다.
생일이나 나이를 사소하게 생각해서, 공문서의 나이조차
라틴어로 대략(vel circlter, ver circa)이란 말을 덧붙여 썼다.
잔이 태어날 무렵 밤에 닭들이 몇 시간 동안
날개를 퍼덕이며 울었다는 전설이 있다.
1412년이라는 생년도 종종 의심을 받는데
1407년이라는 설도 있지만 잔이 스스로 재판정에서
19살쯤 되었다고 말하였으므로 1411년에서
1412년쯤에 태어난 것은 확실해 보인다.
프랑스는 1412년 1월 6일을 공식 탄생일로 보고
2012년에 600주년 기념식을 하는 등 후하게 대접한다.
흔히 알려진 ‘Jeanne d'Arc’는 현대 프랑스어식 표기이며
중세 프랑스어로는 ‘Jehanne Darc(주안 다르크)’라 썼다.
영어로는 조운 오브 아크(Joan of Arc)라고 쓴다.
잔(Jeanne)은 라틴어 이름인 요안나의 프랑스어식 표기.
이외에 패색이 짙던 프랑스군에게 전환점이 된
오를레앙에서의 첫 승리를 기려 ‘라 퓌셀 도를레앙(la Pucelle d'Orléans,
오를레앙의 처녀)’이라고도 불린다.
어린 시절에는 잔이 아니라 자네트(Jeannette)라고 불렸다고 한다.
다르크 외에도 타르트(Tart), 다르트(Dart), 데이(Day) 등
다른 성씨를 썼다는 말도 있다.
사서에 따르면 동레미 남쪽의 아르캉바루아(arc-en-barrois)에서
태어나 성을 다르크(d'arc)로 썼다는 소리도 있다.
현재 통용되는 이름으로 확정된 것은 사후
25년이 지나서의 일로 재심 재판 공문서에 johanna darc로 기록됐다.
한국에서는 구한 말에 약안으로 불렸다가 일제강점기와
1950년대에는 ‘잔 닥크’, ‘짠 닥크’, ‘짠 다크’로 불리었고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는 ‘잔 다크’라는 표기가 많이 쓰여 졌다.
1980년대 이후로도 ‘쟌 다르크’, ‘잔느 다르크’ 등
다양한 표기가 있지만 현대 국어 표준어 표기로는 ‘잔 다르크’로 통일한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성녀 요안나 아르크’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가톨릭 세례명으로 쓰일 땐 ‘요안나’이다.
잔 다르크는 알자스-로렌 지방에 속한 동레미(Domrémy)라는
프랑스 동부의 시골 마을에서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양치기 아버지 자크 다르크와 어머니 이사벨 로메의
5남매 중 넷째 또는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때는 애칭인 자네트로 불렸다는 얘기가 있다.
아버지 자크 다르크는 1380년생으로 딸이 화형당한 이후
비통해하다가 2개월 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으나 실제로는 1440년 무렵까지 살았다.
잔이 계시를 받아 집을 떠나겠다고 할 때에는 자신의 아들한테
“잔을 돌에 묶어놓고 물에 던져야 한다”는 말까지 했지만
랭스의 대관식 때 잔과 재회했을 때는 그런 감정이 다 풀렸던 듯하다.
아무리 아버지라고 해도 감히 구국의 영웅한테
감정대로 화를 낼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애초에 그런 말을 한 것도 자신의 딸이
전쟁에 나가 위험하고 끔찍한 일을 당할까봐
염려하는 아버지의 마음이었을 테니 말이다.
어머니 이사벨 로메는 남편보다 3년쯤 일찍
태어난 1377년생으로 추정된다.
결혼 전 로마로 성지순례까지 다녀올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고 하며 자녀들에게도
가톨릭 교리와 신앙을 열심히 가르쳤다.
잔이 순교한 이후로는 오를레앙으로 이사를 가서 그 곳에서 살았다.
1457년까지 살았으니 당시는 물론 지금 기준으로도
꽤 장수한 셈이며, 덕택에 자신의 딸을 죽인
원수인 영국군이 프랑스 땅에서 완전히 쫓겨나고
딸이 명예를 회복하는 것까지 보고 갔다.
잔의 명예회복 재판을 위해 70대의 노구를 이끌고
교황에게 탄원했다고 하며 파리에서 열린 재판에도
참석했다고 하고 그 모정을 기리기 위해서인지
잔의 고향인 동레미에는 이사벨의 동상도 있다.
잔의 형제로는 자크, 피에르, 장이라는 세 오빠와
카트린이라는 누이가 있었다.
카트린은 잔의 언니인지 동생인지 분명하지 않으며
잔이 활약할 당시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는 것만 확실하다.
피에르는 여동생 잔을 따라 전장을 누비고 다녔으며
잔의 마지막 전투에도 동행해서 같이 붙잡혔는데
잔과 달리 무사히 풀려났다.
사실 잔과 달리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굳이 심문해서
죽여야 할 이유가 없어서 무사히 풀려났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잔의 집안에 대한 묘사는 서로 엇갈린다.
가난한 소작농 집안이라는 인식이 대부분의 학습만화 및
위인전에 나오지만 실제로는 지방의 부농이며
동레미의 말단 관리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물론 그렇게 부유한 집안은 아니었고
끼니 걱정을 하지 않는 정도. 집안 생활은 검소했다고 한다.
잔 다르크가 위인전에 나오는 것처럼 시골 출신의
평범한 소작농 출신이 맞다면 대다수의 농부 아이들이 그랬듯이
잔 역시도 부모의 농사일과 가축 돌보기,
바느질과 요리 등의 집안일을 돕는 평범한 소녀였다.
다만 보통 아이들과 다른 점은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신앙심이 아주 독실했다는 점.
그리고 대다수의 농부들이 문맹이었고 잔 다르크 또한 문맹이었다.
이 문맹이었다는 점 때문에 이후 잔 다르크의 업적이
하느님의 은총을 입었다는 심증의 근거로 채택되고 있다.
한편 잔이 살던 당시는 백년전쟁의 막바지로 전황은
프랑스에 대단히 불리했으며왕이 되어야 할
도팽(왕세자) 샤를은 대관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실제 그가 왕세자라 자칭하기는 했지만 아버지인 샤를
6세가 그를 호적에서 파버리고 잉글랜드 왕 헨리 5세를
프랑스 공주와 결혼시켜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왕으로 추대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샤를은 잔존 아르마냑파와 스코틀랜드의 도움에 힘입어
프랑스 남부에서 여전히 적법한 왕세자로 인정받고 있었고
북프랑스를 장악한 잉글랜드와 부르고뉴는 이를
토벌코자 하였으나 헨리 5세와 샤를 6세가 같은 해에 사망하고
갓난아기인 헨리 6세가 잉글랜드와 프랑스 왕이 되면서
정국이 어수선해져 본격적인 남하를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전쟁은 장기전, 약탈전 위주로 변하였고
서로 자기 영역권 내에서 기반을 닦는 데에 치중하고 있었다.
한편 전쟁의 여파는 잔 다르크가 살던 동레미 마을에도
들이닥쳐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군이 동레미 마을에
쳐들어와 약탈하고 불을 지르는 일들이 발생하였고
잔 다르크의 가족을 포함한 동레미 주민들은
그런 일이 발생할 때마다 인근 마을 뇌샤토로 피난해야 했다.
그리고 동레미는 샤를 7세의 아르마냑파를 지지하는
마을인데 비해 잉글랜드와 부르고뉴파를 지지하는 마을이
근처에 있어 동레미와 그 인근 마을 청년들이
서로 패싸움을 벌이는 일들도 있었다.
그런 혼란이 지속되던 와중 1425년 불과 13세의
잔 다르크에게 성 미카엘, 성녀 마르가리타,
성녀 카타리나의 모습과 함께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랑스를 구하라”는 목소리에 처음에는 당황해서 거절했으나
그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고 1428년, 마침내 16세의 나이에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명할 것을 결심하였다.
이 부분에 대한 현대 역사학의 관점은 이렇다.
중세인들의 사고방식은 당연히 현대인들과 다르다.
이들은 기적이나 하느님의 음성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현대인들보다 훨씬 더 민감했다.
현대인들에게는 당연한 현상도 이들에겐
초자연적인 기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중세인들은 모든 사물에서 기적을 보았다.
잔 다르크가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했을 때,
샤를의 궁정과 이후 잔이 받은 종교재판은 그것이 하느님의
음성인지 사탄의 음성인지 여부를 검증하려 했을 뿐,
음성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잔의 체험은 현대 과학의 관점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잔 생전의 유럽천지는 하느님의 섭리가 만물을 움직이며
그 권능이 성인들을 움직여 이적을 보여주고 있다고 믿는 세계였다.
정신의학에서는 잔 다르크에게 환각, 환청 등의
조현병 증세가 있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조현병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군대를 지휘해서
승리로 이끌 수 있나 이상할 수도 있겠으나
일반의 통념과 달리 조현병 증상을 가지고도
각종 전문직에서 문제없이 일하는 사람들도 심심찮게 있다.
그러나 중세에 하느님의 목소리, 기적, 예언 등으로 받아들여진
현상이 드물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시대착오적인 현상이다.
또한 잔 다르크의 성녀 이미지 어필이 본인이
지휘권을 잡고 통솔하는데 있어 유리하는데 작용했었던 점,
실제로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른 실제 잔 다르크의
성격상은 가슴이 이끄는 데에 충실한, 열혈적인 태도로
사람들을 고무시켰던 인간형이 아닌 냉철하고
지성미 있고 박력 있는, 머리를 앞세워 행동하는
냉철한 인간형에 가까웠던 점을 들어 잔은 마냥 신앙심에 이끌렸던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점을 철저하게 이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말도 나오곤 한다.
그러나 당시는 민중 신앙이 뜨거울 때라 잔의 신앙심은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고 잔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신앙을 지켰고 전쟁 중에도 가톨릭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했고 신앙심이 깊었기에 시성될 수 있었다.
그리고 문맹의 평민 소녀가 어떻게 제정신으로
자신에게 천재적인 군사적 능력이 있는지 알며 목숨을 걸고
성녀 코스프레(Cospre, 흉내 내기)를 하는지 설명할 수 없다.
결심을 굳힌 잔은 곧바로 보쿨뢰르 지방의
영주 로베르 드 보드리쿠르에게 찾아가서
시농 성에 머무르고 있는 도팽 샤를을 알현하게 할 것을 요청했다.
처음에는 당연히 거절당했으나, 잔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 곳에 머물러 지냈다.
영주는 잔이 마녀라고 의심하였기에 구마 의식을 할 수 있는
사제를 보내 시험해 보았으나 오히려 잔은 그를 반갑게 맞아들여
고해성사를 하며 그 의심을 풀게 했다.
그리고 계속되는 끈질긴 요청에 장 드 메스와
베르트랑 드 폴뤼니를 비롯한 기사들은 잔의 뜻에 동조했고
결국 영주는 샤를에게 연락을 취한 다음 잔을 시농으로 보내게 된다.
그곳으로 가려면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군이
점령한 지역을 지나가야 했는데, 시농까지의 거리는
무려 435km로(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인 456km)
아주 먼 곳이다. 시작부터 그런 어려운 조건이 있었으나
아무런 신변의 이상 없이 무사히 도착한다.
그러나 샤를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해서 자신의 시종에게
화려한 옷을 입힌 다음 자기의 자리에 가게하고
초라한 옷을 입고 구석에 숨어서 잔을 불러냈다.
그런데 변장한 시종을 한번 보고 곧바로 외면한 다음
샤를을 찾아내서 예를 갖추었다고 한다.
그래도 마녀의 속임수라는 주장이 측근들에게서 계속해서 나오자
다시 푸아티에로 보내서 성직자들의 심문을 받게 했다.
물론 잔은 거짓 없는 언변으로 이 심문에도 통과했다.
결국 잔 다르크에게 신통력이 있다고 판단한 샤를은
잔 다르크에게 일군을 주고 질 드레, 라 이르, 장 돌롱 등의
유능한 기사들을 딸려주어 오를레앙의 포위를 풀도록 출병시켰다.
당시 오를레앙은 루아르강의 요충지로서 잉글랜드군에게
포위당한 상태였다.
잉글랜드군의 계획은 오를레앙을 함락시킨 뒤
루아르강을 건너 대번에 샤를의 본거지인 부르주까지 내려쳐
긴 전쟁을 끝내고자 했던 것인데 오를레앙 함락이 오랫동안
지체되어 양쪽이 서로 모두 지쳐있는 상황이었다.
출발 전에 기적 같은 일화가 있었는데
잔은 “천사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트 카트린 드 피에르부아 성당의 제단을 파보면
검이 있을 겁니다.”라고 했는데 정말로 그 곳에서
검을 찾아내어 자신의 지휘용 검으로 삼았다.
오래되어 녹슬은 검이었지만 한 번 닦아내자
새 검처럼 되었다고 한다.
곧바로 오를레앙을 구원하러 간 잔 다르크는
현지 사령관 장 드 뒤노아의 홀대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사람들을 설득해 군대를 조직하여 싸웠다.
한편 오를레앙에 입성할 때도 기적 같은 일화가 있었다.
잔 다르크가 군사들과 함께 오를레앙 성으로 입성하려면
성 앞을 가로지르는 큰 강을 건너야만 했다.
그러나 바람이 잔의 군사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불거나
또는 바람이 불지 않아,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곤란을 겪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잔 다르크가 기도를 올리자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그리하여 어려움 없이 잔의 군사들은 강을 건너
오를레앙에 무사히 입성할 수 있었다.
떠도는 말 중에 있는 잔 다르크가 오를레앙 전투엔
참전하지도 않았다는 것은 잘못 알려진 사실이며
영어와 프랑스어 위키피디아에서 오를레앙 전투 항목이나
잔 다르크 항목 어디를 봐도 잔 다르크가 참전하지 않았다는 소리는 없다.
오히려 전장에서 심각하게 눈에 띄는 순백의 갑옷과 옷을 입고
선두에서 싸웠으며 잉글랜드군을 차례차례로 패퇴시켰다.
마침내 1429년 5월 오를레앙을 해방한 잔 다르크는 한때
잉글랜드에 충성 서약을 하고 트루아 조약을 지지해서
프랑스 왕실의 의심을 사던 리슈몽 백작이 이끌던 군대를 만나
그에게서 “네가 성녀라도 두렵지 않고 마녀라면 더 두렵지 않다.” 하는
말을 들었으나 결국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이어서
파타이 전투에서 숫적 열세에도 적장 탈보트를 포로로 잡으며
잉글랜드군을 무찔렀고 루아르 전역을 이끌며 루아르 강변에 주둔하던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군을 연달아 격퇴했고 여러 교량을 확보하였다.
당연하지만 이때 프랑스군은 포로로 잡은 잉글랜드군 중에서
몸값을 지불하지 못한 포로들은 전부 몰살시켰다고 한다.
이 내용은 다른 것도 아니고 잔 다르크 위인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물론 잔 다르크 본인이 직접 학살 명령을 내린 건 아니어서
가능하면 학살을 자제시켰고 오히려 전장에서 죽어가거나 부상당한
잉글랜드군을 직접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며 위로하기도 했다.
보장시 성에서는 패잔병들을 보자
각자 소지품을 챙기고 가도록 풀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 그리고 포로 학살이라는 부분에서 잔 다르크가
개입했다고 해도 비판받을 부분이 아니다.
사람들 ‘포로를 죽인다는 건 잔인한 행위다!’라는
시각을 갖게 된 것은 불과 수십 년도 채 되지 않았다.
포로를 사람답게 대해야 한다는 제네바 협약이
처음 나온 것이 1864년이며, 현재의 인권 개념이 담긴
협약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49년에 나온
4차 협약인데, 현대에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대인배의 전형이자 비기독교인임에도 당시 중세에서
인정받았던 살라딘도 리처드 1세와의 교섭이 실패하자
기독교 포로들을 학살했으나 당시에 이를 비난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포로는 승자의 취득물이며 따라서 사로잡은
이들이 어떻게 처리하든 상관없다는 개념이 퍼져있었기 때문이다.
잔다르크의 진격로는 매우 비범해서 지금도 종종
무슨 의도로 그러한 진격로를 생각해 냈을까에 대한
갑론을박이 생기곤 하는데 잔다르크의 진격로는
잉글랜드와 부르고뉴의 협공을 받기 정말로 좋은 루트다.
때문에 샤를의 측근을 비롯해 잔의 동료들도 이 계획을 뜯어 말렸는데,
놀라운 건 정작 가보니 행군 내내 눈을 씻고 봐도
잔의 말대로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군을 찾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잔의 대우회기동(大迂回機動)이 절묘하게 먹혀 든 이유는 간단하다.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군은 잔이 파리로 오리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잉글랜드-부르고뉴 군대의 대부분은 파리 인근에 모여 있었다.
그런 예상을 한 이유도 정말 간단하다.
지도를 보면 딱 봐도 오를레앙 바로 북쪽에 파리가 있다.
잔이 파리에 가지 않은 이유도 더더욱 간단한데
파리는 센강에 위치한 생루이섬-시테섬을 중심으로 발달한 요새도시다.
손쉽게 함락할 수 있을 턱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잔이 랭스를 함락시킨다면? 잉글랜드와 부르고뉴의
연결이 차단됨은 물론, 측면을 빼앗긴 잉글랜드군은
파리에 손발이 묶일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인적, 물적 자원이 월등한 프랑스로서는
말 그대로 물량 어택만 하면 된다.
그렇다고 오를레앙과 랭스, 트루아가 잉글랜드로서
공격하기 만만한 도시냐고 물으면 그건 아니다.
사실 저 계획이 성공한 시점부터 백년전쟁은
잉글랜드의 패배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5차례 거듭된 승리로 랭스까지 진격한 잔 다르크는
샤를이 대관식을 거행할 수 있게 해 주어
그를 프랑스의 왕 샤를 7세로 만들었다.
샤를 7세는 잔의 공로를 인정하여 소원대로
고향 마을 동레미에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이리하여 프랑스 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되기 전까지 동레미는 조세 면제구역이 되었다.
하지만 영광은 거기까지였다.
이후 잔 다르크와 잔의 수행자들은 프랑스 전역을 돌며
소(小) 영주나 국민들이 새로운 프랑스 왕 샤를
7세에게 돌아올 것을 호소했고 그것은 그런대로 먹혔으나
이는 왕실에게 양날의 칼로서 다가왔기 때문이다.
즉, 잔 다르크의 성녀 타이틀을 보고 프랑스 왕실을 지지한
사람들인 만큼 잔 다르크의 말 한 마디에 프랑스 왕실을
흔드는 내부의 적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령 자크리의 난처럼 농민반란이 일어날 경우 농민 출신인
잔이 그들에 동조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고 게다가
왕실로부터 의심받는 리슈몽 백작을 잔이 신뢰하고 있었음은
샤를 7세파에겐 눈엣가시 같은 조건 및 설정이었다.
게다가 잔 다르크가 이전에 보드리쿠르에게
“프랑스 왕국은 왕세자의 것이 아니고 주님에게 속하며
주님께서 왕에게 맡긴 것에 불과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해석 방식에 따라 샤를과 그 측근들에게 있어서는 대놓고
표현은 못하더라도 내심 불편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이즈음 샤를 7세 파의 주교 등이 잔 다르크가 갑옷 위에 입은
금실로 짠 옷과 말안장 밑을 장식한 비단으로 만든
천 등을 가지고 사치를 문제 삼기도 하는 등
서서히 잔 다르크와 프랑스 왕실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한다.
게다가 잔 다르크는 오를레앙 전투 및 곧바로 이어진
랭스의 진격처럼 공격적인 전략과 신속한 공세를 취했는데
이는 대관식 이후 비용이 많이 드는 전투를 통한 승리보다는
협상과 조약 등으로 이득을 취하려 하는 왕실과 상반되는 입장이었다.
물론 잔 역시 협상을 시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먼저 부르고뉴에 협력을 요청했지만 무시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샤를은 몇 주만 기다리면 파리를 바치고
항복하겠다는 부르고뉴의 제안에 낚이는 삽질을 하고 만다.
그래서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의 원군이 파리에
들어오도록 시간을 벌게 해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걸 알아차린 잔 다르크는 샤를을 설득하여 생드니 등
파리 주변 지역을 탈환한 다음, 1429년 9월 8일 성모 마리아의
탄생 축일에 마침내 파리의 생 토노레 성문까지 접근했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을 물리치며 성문을 열고
맞아 주리라는 잔의 기대와는 달리, 파리 시민들은
잔을 여자의 모습을 한 괴물, 마녀, 창녀, 탕녀로 욕하면서
입성을 거부하며 오히려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군과 합류하고 말았다.
결국 전투가 벌어지고 잔 다르크는 허벅지에 화살을
맞으면서도 지휘를 멈추지 않았지만
공성전이 조금씩 장기화될 듯하자 불과 이틀 만에
냉랭해진 왕실의 지원 부족으로 퇴각하였다.
물론 샤를 7세가 영지를 저당 잡힐 정도로 프랑스 왕실의
재정난은 당시 상당한 수준이기는 했지만
파리 함락이 성공할 경우 잔의 영향력이 더욱
커질 경우를 두려워해서 일부러 이른 날짜에
철수 명령을 내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부르고뉴인이 쓴 연대기 〈파리의 부르주아의 저널〉에 따르면
파리 시민들은 당시 잔 다르크가 군대를 끌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 성당으로 가 기도를 올리거나
집에 들어가 문을 닫고 숨거나 무기를 나르는 등
잔 다르크와 맞설 준비를 했다고 한다.
잔 다르크도 이러한 파리 시민의 반응에 열 받아서
“저녁때까지 항복하지 않으면 힘으로 들어가서
인정사정 안 보고 모조리 다 죽인다.”고 윽박질렀다고 하는데
당시 부르고뉴파가 잔 다르크에 대해 적대감을 가져서
과장하거나 왜곡해서 썼을 수도 있고 설령 파리를
함락시켰다고 해도 그 전이나 그 후의 일을 생각하면
학살이나 약탈을 저질렀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이 연대기는 잔 다르크의 화형 모습도 묘사했는데
딱히 적대감을 드러낸 건 아니지만 다른 증언들과 달리
잔 다르크의 화형대 위에서 십자가를 찾는 등
경건한 모습은 의도적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생략했기 때문에 명예회복 재판 당시의 기록과 증언처럼
교차검증 하거나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잔 다르크의 업적이 그리 큰 영향력을 지속하지 못했으며
잔을 이단자로 몰아넣은 재판이 합법적이었고
공정하다가 얘기하는 등 부정적인 인식을 표현하는
영국의 역사가 줄리엣 바커조차도 자기 저서에 화형 당시
모습에 대해선 십자가를 손에 쥐고 예수의 이름을 외쳤다는
표현을 썼으므로 화형 당시에 십자가를 쥐고
예수의 이름을 외친 일화 자체는 사실인 듯하다.
이후 잔 다르크를 반대하는 국왕 측근 조르주 라 트레무유의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라샤리테 전투에 나섰다가
물자지원을 못 받으며 또 실패, 생피에르르무티에를 탈환하고
부르고뉴의 기사 강도들을 토벌하는 일 외에는
이렇다 할 승전을 올리지 못하면서 프랑스 왕실에서는
잔 다르크의 성녀 역할에 대해 서서히 의문을 가지기 시작한 듯 보인다.
결국 샤를 7세는 잉글랜드와 부르고뉴와 휴전을 하면서
잔의 뜻에 반대함을 대놓고 드러냈다.
일단 겉으로는 공로를 치하하며 잔과 가족들에게
귀족의 칭호를 주긴 했지만 그리 큰 봉토나 병사를 거느릴
권한도 없는 사실상 명예직에 가까운 자리를 주었다.
사실 샤를 7세는 이전부터 잔 다르크를 껄끄러워 하고 있었다.
중세에는 잔 다르크처럼 자신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주장한 것 자체가 왕권을 위협하는 요소였다.
이 무렵 서양에서 왕이 되려면 형식적이나마 교황의 승인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오직 교황만이 신성을 인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홀연히 나타난 잔 다르크가 앞으로의 왕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선택한 것이다.
이는 교황의 권리를 침해했다는 논란이 일기에 충분했다.
샤를 7세는 잔 다르크가 진짜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는지
확신할 수 없는데 마지못해 선택한 상황에서
섣불리 교황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파리를 비롯하여 잉글랜드와 부르고뉴가
점령한 지역을 공격해야 한다는 잔 다르크와 달리
샤를 7세는 전쟁을 계속할 의지가 없었다.
되도록이면 전쟁을 하지 않고 협상을 통해서 마무리 짓고자 하였다.
외교는 힘의 논리로 통한다는 것을 샤를 7세는 몰랐던 것이다.
그는 조용히 끝내고 싶었다.
한편으로 전쟁으로 잔 다르크의 명성이 계속 올라간다면
역으로 자신의 왕권이 추락할 것을 염려했을지도 모른다.
생피에르 르무티에를 함락시켰을 당시, 프랑스 병사들이
약탈하려고 하자 엄하게 이를 금지시키고 주민들을 지켜주었으며
스코틀랜드인 병사가 약탈한 송아지 요리를 자신에게
내놓자(또는 그가 약탈한 식품을 먹은 걸 알게 되자)
먹지 않고 엄하게 꾸짖었다고 한다.
또한 휴전기간 동안 부르주에서 빈민들을 구제하는 선행을 베풀었다.
다만 잔 다르크가 약탈을 금지시켰고 포로를 보호했다고 하는 등
선행 사례 대부분은 사후 명예회복 재판 당시 증언이나
그 이후 전설에서 미담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적당히 걸러들을 필요가 있다.
사실 잔 다르크가 참여한 전투에 민간인
약탈과 학살이 발생한 적이 있기는 하다.
잔 다르크가 자르조라는 마을을 함락시킨 다음에
포로와 민간인들이 학살당하고 마을과 성당까지
약탈당했다는 사례인데 일부 경우는 심지어
잔 다르크의 위인전에도 내용이 실렸다.
물론 잔 다르크가 관여되지 않은 투로 말하지만 말이다.
일단은 잔 다르크가 이걸 지시했거나 직접 약탈에 참여했는지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 잔 다르크 스스로는
약탈 자체에는 찬성하지 않은 듯하다.
다만 이게 사실일 경우라도 잔 다르크의 군사들에 대한
영향력과 통제력이 생각보다 강하지 않았던 듯 보인다.
즉 약탈과 학살에 잔 다르크가 관여하지 않았을 경우
잔 다르크의 지휘력 등 실질적인 능력이 있는지에
여부가 논란이 될 수밖에 없어 진퇴양난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민간인들이 죽은 경우 해당 웹사이트에도
간접적으로 표현되었듯이 당연히 잔 다르크가 직접
학살하라고 명령 내린 게 아니라
대포로 성을 공격하는 와중에 빚어진 참사로 보인다.
만약 잔 다르크가 직접 학살과 약탈에 관여했다면 훗날
잔이 재판을 받을 때 언급되었거나 피해자나
관련된 민간인 증인이 나왔을지도 모르는데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문제가 우선시되긴 하지만
재판하는 측에서 결정적인 도덕적인, 법적인
약점으로 물고 늘어졌을 찬스였는데도 거의 얘기가 나오지 않고
상리스 주교의 말을 훔쳤다는 정도의 내용으로만
추궁 받은 정황을 보아 직접 관여했을 가능성은 적은 듯하다.
잔 다르크도 프랑스군의 간부에 속한 이상
군사들의 약탈과 학살 등 민간인과 포로들이
비극적인 운명을 맞은 일에 대한 책임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물론 중세시대에 인권이 현대보다도
훨씬 부족할 수밖에 없고 현지에서 보급을 충당한다는
명목으로 민간인에 대한 약탈이 당연시된 시대이긴 했지만 말이다.
재판에서 언급이 거의 없던 이유도
잉글랜드군조차도 약탈을 당연시해서일 수도 있다.
한편 이 웹사이트에 따르면 잔 다르크가 민간인 약탈에 관여한 사례는 없고
약탈한 물건을 쓴 사례는 적이 쓰던 검을 빼앗아 쓴 거라고 하는데
이건 현대 전쟁에서도 당연히 여기는 전리품 획득이다.
역사가 스티븐 웨슬리 리치, 레진 페르노드, 낸시 골드스톤 등은
“잔 다르크가 약탈을 금지했다”고 자신의 저서에 밝히고 있다.
1430년 5월 23일 휴전한 사이에 다시 힘을 키운
선량공 필리프 휘하의 부르고뉴파 군대가 콩피에뉴에 침입하자
잔 다르크는 왕실의 무관심 속에 대략 200명에서 400명으로
추정되는 자기 휘하의 소수의 병력만을 이끌고 급파, 부르고뉴군을 기습했다.
초반에는 이들을 물리쳤지만 증원군 6천 명이 나타난 뒤
상황이 역전되어 성으로 후퇴하면서 후방을 방어해야만 했다.
잔은 자신이 먼저 성문으로 들어가는 대신에 자신의
병사들을 최대한 먼저 성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하지만 잔이 들어오기 전에 성문과 연결된 다리가 끌어올려져
고립되었고, 리니 백작 소속의 병사가 쏜 화살에 맞은 뒤
옷을 잡혀 낙마당하면서 포로로 잡힌다.
훗날 지원군이 뒤늦게나마 오면서 콩피에뉴의 방어에는
결과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잔 다르크 본인에겐 치명적인 상황을 맞은 것이다.
리니 백작은 포로로 잡은 잔이 탈출을 시도하자
더 굳게 가두는 한편 자기 집안의 여자들과 같이
식사를 하게 해주는 등 정중히 대접도 했다.
이때 잔 다르크와 가까이 지내던 리니 백작의 이모 ‘잔’은
잔 다르크에게 친절했는데 조카에게 “잔 다르크를 잉글랜드에 넘기지 마라.
이 말을 듣지 않으면 영지를 상속하지 않겠다.”고
경고 섞인 설득을 했으나 불행히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 해 9월에 사망했다.
한편 리니 백작은 샤를 7세에게 전형적인 중세 유럽식
포로 처리법대로 “몸값을 내고 잔 다르크를 데려가라”고
제의했지만, 왕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샤를 7세에게서 잔의 정치적인 용도는 이미 다 사라져 버린 후였던 것이다.
심지어는 체포당하는 과정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 듯
왕의 측근들이 콩피에뉴 전투 당시 체포되도록 배신 혹은 방관했다는 말도 있다.
결국 기다리다 지친 리니 백작은 1만 리브르 트르누아(Livre tournois)의
거액을 받고 잉글랜드 측에 잔 다르크를 넘겨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