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조선의 역사, 대마도 탐방기 / 雪花 박현희
2017년 11월 17일, 가을이 거의 끝나갈 무렵 남편과 함께 대마도를 다녀왔다.
우리의 역사가 많이 남아 있다길래 진작부터 다녀오고 싶었으나
남편과 일정을 맞추기가 쉽지 않아서 미루고 미루다가
무작정 예약을 해놓고 나서야 남편은 마지못해 동행하는 눈치였다.
대마도는 부산에서 불과 51킬로밖에 떨어지지 않은 섬으로,
남북의 길이는 82km, 동서로는 18km, 총면적이 800km에 불과한 작은 섬이다.
섬은 대부분 산지로 구성되어 있고 약간의 농지가 있을 뿐이다.
부산에서 배를 타면 상대마도의 후추오카 항까지는 1시간 10분,
하대마도의 이시하라 항까지는 2시간 10분이면 닿는 아주 가까운 곳으로
일본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만 하는 자그마한 섬이다.
여행사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대마도는 음식이나 숙박시설 등이 매우 열악해서
대마도 관광을 흔히 생각하는 선진국 일본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조금은 실망하게 될 거란 얘기를 들었다.
그러나 대마도엔 우리 역사의 흔적이 많아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기억해주고
꼭 한 번쯤은 찾아갈 만한 할 가치가 있는 섬이란 얘기를 들었다.
가이드의 설명은 사실이었다.
항공 운송이란 개념이 없었던 시절, 오로지 배를 타고 일본을 가야만 했던 시절에
대마도는 꼭 거쳐야만 하는 중간 기점이었다.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대마도를 통해 넘어온 왜인들의 노략질과 침략을 막기 위해
고려 때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대마도를 정벌한 일이 세 차례나 있었다고 한다.
무려 세 차례에 걸쳐 대마도 정벌을 해놓고도 지금 현재 일본의 국토인 대마도,
그러하기에 조선의 역사적 숨결이 면면히 배어있는 대마도가 일본 땅임을 부정하고픈 생각이 드는 건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나 느끼는 생각이 아닐까 싶다.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 정치, 경제, 외교, 무역, 통상적인 차원에서 상호 교류가 필요하였다.
물론 임진왜란 이전에도 일본에 문물을 전파하는데 백제의 영향력이 매우 컸다는 사실은
이미 역사책에서 배운 적이 있다.
신라의 영토였던 부산이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깝기는 하나,
일본으로 닿기까지는 바닷물의 기류가 군산에서 출발하는 것이 훨씬 더 유리했기 때문에
주로 군산항을 통해서 백제의 문물이 많이 전파되었다고 했다.
조선 통신사란,
일본과 조선 양국의 상호 교류 차원에서 양국에 파견하였던 외교사절단을 일컫는 말로
양국이 서로 대등한 외교원칙에 입각해 사신을 파견한다는 뜻에서 통신사라는 명칭을 사용했으며,
매번 사절을 파견할 때마다 무려 500여 명의 사절단이 동행하였다고 한다.
일종의 평화 사절단이라고 여겼지만,
자국의 이익을 꾀하고 상대국의 정치적 상황이나 군사적 동향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정보 수집의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일본을 건너기 위해 꼭 거쳐야만 했던 대마도 통신사 사절단의 행렬 모습이
지금도 대마도에 그림으로 남아있었다.
대마도엔 조선말 고종의 딸이었던 덕혜옹주와 일본의 귀족 백작이었던
소 다케우키의 결혼을 축하한다는 비문이 서 있는 곳이기도 하다.
소 다케우키는 일찍이 대마도를 다스렸던 소 가문의 자손이라 한다.
한일합방 후 일본은 덕혜옹주를 일본으로 강제로 데려가
대대로 대마도를 다스렸던 소 가문의 자손 소 다케우키와 결혼까지 강제로 성사시켰다고 한다.
이 비문은 덕혜옹주와 소 다케우키가 결혼 후 대마도를 맨 처음 방문했을 때
대마도 섬 주민들이 세운 일종의 결혼 축하 비문이라고 한다.
이씨조선이 멸망하고 을사늑약의 체결로 한일합방 후 어린 나이에 강제적으로 일본으로 끌려가
고국과 어머니를 그리워하다 마침내 조현병까지 얻고,
결혼까지 일본제국이 정해준 인물과 강제로 혼인해
불행한 삶을 살다가 일생을 마감했던 조선의 마지막 덕혜옹주,
그녀의 불행한 삶은 어찌 보면 일제강점기 우리의 불행한 역사를 그대로 입증하는 셈이나 다름이 없다.
그녀의 조현병은 소 다케우키와의 결혼 생활을 불행으로 이끌 수밖에 없었던
원인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녀의 남편이었던 소 다케우키는 일본의 백작으로 학문과 예술을 사랑했고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일본제국이 멸망하고 나서 평민으로 전락해 국가로부터 귀족에게 지급하던 보조금이 없어지자
더는 그녀를 보살필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남은 재산을 처분해 그녀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고 마침내 그녀와 이혼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덕혜옹주를 사랑했고 또 덕혜옹주와의 사이에서 낳았던 딸을 무척 사랑했다고 한다.
덕혜옹주와의 이혼 후 하나뿐이었던 딸도 불의의 사고로 숨지자 큰 실의에 빠졌다고 하니
소 다케우키 그 또한 불행한 역사의 피해자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덕혜옹주를 측은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있는 그의 시가 있어 한 편 옮겨 적어 본다.
<미쳤다해도 성스러운 신의 딸이므로
그 안쓰러움은 말로 형언할 수 없다.
혼을 잃어버린 사람의 병구완으로
잠시 잠깐에 불과한 내 삶도 이제 끝나가려 한다.>
덕혜옹주가 일본으로 끌려간 후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드디어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후에서야 병자의 몸이 되어 대한민국의 품으로 귀환한 덕혜옹주,
공항에서 내려 대한민국의 땅을 다시금 밟았을 때의 그녀의 마음이 어땠을지,
만감이 교차했을 그녀를 생각하니 왠지 가슴이 찡했다.
대마도엔 조선통신사지비,
덕혜옹주 결혼 축하 비문 이외에도 최익현 선생 순국 추모비가 또 하나 세워져 있다.
최익현 선생은 74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항일구국운동을 벌이며
의병 활동을 하다가 일본군에게 붙잡혀 대마도로 유배를 온 후
왜놈들이 주는 음식은 받아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노라며 음식을 거절해 끝내 아사했다고 하니,
그의 지조 높은 순국 정신을 가히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대마도란 섬은 일본과 우리나라를 잇는 중간 기점으로서
우리의 슬픈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그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역사 유적지임에 틀림이 없다.
비록 대마도가 일본 영토라고는 하나 우리의 슬픈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대마도이기에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기울이고 또 한 번쯤은 찾아가서
가슴 아픈 역사의 발자취를 조금이라도 느껴보고 기억해주는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닐까 싶다.
이번 대마도 탐방을 계기로 지금까지 잘 알지 못했던 대마도에 대해 자세하게 알 수 있게 되었고
또 우리 선조들의 슬픈 역사의 발자취를 뒤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서
참 값지고 보람된 여행이었다.
첫댓글 감사~
고은 한주 멋과 맛 향기로 즐거운 시간 행복하시고 항상 건강 조심하세요~
지기님, 잠시 머물러 귀한 좋은 글 잘읽고 빵끗 웃으며 기쁜 맘으로
갑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