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의 손 안에서
박용혁 가롤로 부산 바다의 별 Re. 단장
장이 파열되어 피범벅으로 병원 복도에 누워 있을 때 “제발 수술 한 번만이라도…” 하는 어머니의 절규에 의사는 “일단 한 번 해 봅시다”며 수술대에 올랐던 20대의 ‘저’였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던 중 타이어 펑크로 차가 몇 바퀴를 굴러 완전히 파손된 차 속에서 그래도 모질게 살아남았던 30대의 ‘저’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분께서 도구로 쓰시려고 이 세상에 남게 해주셨음을 뒤늦게야 알았습니다.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서야 물질의 욕망이 건강보다 못함을 일찍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참 많이도 왔네요. 이제 머리카락도 희끗할 즈음 뒤를 돌아다봅니다. 참 고만고만하게 살아왔습니다. 세례를 받지 않으면 결혼이 안 된다는 말에 신부님께 사정하여 한 달간 급행 교리를 받고 한동안 무늬만 신자였지요. 사람 사귀길 좋아해 친구도 많고 잡기에도 능해 세례 받은 것조차 무의미했던 날들을 보내다 아내의 추천으로 성령 세미나를 갔습니다.
연말부터 정초까지 하는 ‘지성인 세미나’ 라는 주보 광고에 무엇인지도 모르고, 또 한 번쯤은 아내의 말을 들어야겠기에 세미나를 갔는데, 구미에 맞지 않는(?) 손들고 노래하는 분들과 2박3일을 산속에서 보내게 되었어요. ‘이건 아니다’라며 동화되지 못한 채 하루하루 보내다 마칠 때가 되었지요. 근데 막상 내려가야 한다 생각하니 이상하게 뭔가 허전하고 가기가 싫은 거예요. 마중 나온 분들은 “얼굴 좋아졌다” “은총 받았다” 하는데 감흥은 없었지만 이왕 성당에 왔으니 뭘 해야 할지는 모르지만 이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집으로 왔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입단한 레지오 활동이 30년
“권 후베르또라고 합니다. 레지오 단장인데, 레지오 안 할 랍니까?” 뭔지도 모르고 정해진 날에 성당을 갔습니다. 손에 묵주(그때는 명칭도 몰랐음)를 들고 기도를 하는데, 기도문을 전혀 몰랐던 저로서는 그저 입만 중얼중얼(아는 체) 하다 보니 모임(주회)이 끝났어요. 새 식구 들어 왔다고 주변 가게 평상에서 막걸리 한 잔을 하는데, 대화가 사회에서 하던 거랑 전혀 다른 것이 뭔가 또 다른 사회에 와있는 것 같았어요. 어쨌거나 내 발로 왔으니 몇 번 더 가보자고 했는데, 이게 뭔지 모르지만 매력이 있는 거예요.
힘든 시설에 나가서 봉사도 하고, 교회 시설에서 노동도 하고, 놀러도 가고, 가끔 집에서 하는 모임에는 부부가 함께 나누고, 힘든 일이 생기면 서로 돕는 등 아! 이것 참 재미가 있어요. 그러다 보니 사회적 모임은 하나씩 떨어져 나가고 성당에 있는 날이 많아졌지요. 단원들과 함께 있는 날은 늦더라도 아내가 이해해 주었지요.
또한 꾸르실료에도 초대를 받았어요. 마냥 불이 붙었습니다. 만나는 분들이 전부 형님, 누님 연배들이고 나름대로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하시는 분들이었습니
다. 젊은 나이에 성당에서 내가 할 일을 찾는데 형님들이 교중미사 마치고 나오는 분들에게 커피 봉사를 해보라고 권하셨어요. 가까이 살던 아랫동서를 끌어들여 겨울이면 따뜻한 차와 여름이면 냉커피를 몇 년간 쉬지 않고 타다보니 성당 다른 분들과 안면도 많이 트게 되었지요.
내가 속한 쁘레시디움에는 높은 분(꾸리아 단장, 서기)들이 계셨어요. 그들이 하는 말 중 꾸리아, 꼬미씨움, 알로꾸시오, 쁘레또리움, 뗏세라 등등의 단어는 너무 생소했고 그만큼 열심한 분들은 달라 보였어요. 요즘과 달리 쁘레시디움 간부도 비밀투표로 뽑을 때이니 간부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지요.
몇 년이 지나 쁘레시디움이 분단을 하게 되고 드디어 부단장이라는 직책을 안고 첫 꾸리아 평의회를 나갔는데 황당한 일이 생겼어요. 꾸리아 단장 선거였는데 저를 단장으로 뽑은 거예요. 38살, 뭐가 뭔지도 모르는 젊은 단장, 커피 타면서 맺은 인연들이 표까지 연결되었는지…
그날부터 교본을 7번 읽었습니다. 처음에는 이해가 불가능하던 것도 마지막 읽을 때쯤에는 대충 감이 오고, 그 덕에 연세 많으신 간부들의 질의가 들어오면 “교본 몇 장을 보시면 되요”라는 답으로 단장 직을 무난히 유지했어요. 또 짧은 교회 지식이라 통신 신학원을 수료하고, 성서 40주간, 레지오 기사교육을 받는 등 당시 성당에서 하는 교육은 죄다 이수하며 꾸리아 단장을 연임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또 꼬미씨움 단장으로 부름을 받았네요. 꾸리아 단장들도 모두가 연상인데 레지아 평의회에 나가보니 연세들이 더 많아요. 거의 60, 70대들이라 43살의 젊은 꼬미씨움 단장이 만만하고 대견했던지 많은 일들을 맡겨주시고 잘 이끌어주셔서 주일은 물론 평일에도 성당일로 집안을 등한시하게 되고, 시간이 맞지 않으면 돈 되는 일조차도 놓치기 일쑤였지요. 그래도 아내는 두 가지를 다 가지지는 못한다며 이해를 해주는데 그 세월이 레지오 30년이네요. 지금까지도 가족에게는 상당한 미안합니다. 그렇지만 쉴 수 있는 공간을 주심에 감사드리며, 일용할 양식 주심에도 감사하며, 맡은 바 일을 할 수 있는 시간 있음에 자위하면서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을 달래보곤 합니다.
물이 모여 바다, 은총이 모여 마리아
꼬미씨움 단장 6년을 마친 후 잠시 쉬었습니다. 이제 새로이 사회 일과 경제적인 일에 전념코자할 때 또 공석인 소년 꼬미씨움 단장으로 제의가 들어왔어요. 차마
거절을 못하고 순명하여 6년을 보냈습니다. 소년단원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은 지금도 제가 레지오 마리애를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네요. 그 아이들의 혼배 소식이나 사제도 되고, 수도자도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래도 뭔가 디딤돌이 되었구나 싶고요.
이후 레지아 부단장으로 선출되어 연임 임기가 다되어 갈 즈음에 레지아 단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정말 멀리도 왔네요. 꾸리아 단장 이상의 간부만 25년간의 세월에서 레지오 마리애의 ‘순명’이란 말이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모자라는 능력은 함께하시는 분들이 채워주시니 그 자체가 성모님의 은혜가 아닐까 여겨집니다. 지금의 백 아우구스티노 부단장, 정 미카엘 서기, 강 마틸다 회계를 비롯하여 많은 간부님들과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꾸리아 단장시절의 김 헬레나 부단장님과 꼬미씨움 때의 김 루시아, 조 라우렌시아 부단장님, 소년 꼬미씨움 때의 이 아나다시아 부단장님 등 그분들이 함께 해주셨음은 모자란 저에 대한 성모님의 큰 배려겠지요.
‘할 수 없다’보다는 ‘해보자’는 마음은 젊은 혈기라기보다는 삶을 연장시켜주신 그분의 뜻이 아니었나 감히 생각도 해봅니다. 우리 단원들이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주님을 다시금 뵙고 섬기시듯이 동료들을 위해, 활동 대상자를 위해 노력한다면 그 뒤는 그분께서 이루어주시리라 굳게 믿고 임무를 완수해야겠지요.
“무엇이든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힘이 들 때 늘 되뇌는 성경구절입니다. ‘청하면 들어주시리라’ 믿고 기도합니다. 루도비코 성인께서 물이 모여 바다라 부르고, 은총이 모여 마리아라 하셨듯이 성모님과 함께하는 은총 속의 삶에 항상 감사하며 레지오 안에서 마침내 한평생 싸움이 끝난 다음 주님의 사랑과 영광의 나라에서 다시 모일 단원들과 평화의 발걸음을 함께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