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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 기정진의 출생 설화
전라북도 순창 지역에서 기정진의 기이한 출생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2002년 12월 순창문화원에서 간행한 『순창의 구전 설화(상)』에 수록되어 있다. 순창문화원에서는 1990년대부터 잊혀져가는 전통문화를 가르치고 지역 사회의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고자 매년 전라북도 순창군의 역사와 문화에 관련한 단행본을 출판해 오고 있다. 『순창의 구전 설화(상)』은 순창군에서 전해 내려오는 설화들을 조사하여 정리한 것으로 2002년 12월 31일에 펴낸 설화집이다. 편자는 양상화이다.
기정진은 조선 후기 순창 출신의 성리학자이다.
기정진의 본관은 행주(幸州)이고, 자는 대중(大中)이며, 호는 노사(蘆沙)이다. 기정진의 아버지는 증참판 기재우(奇在祐)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 권덕언(權德彦)의 딸이다. 순창군에서는 기정진의 출생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노사 기정진의 출생설화
기정진은 1798년(정조 22) 6월 3일 유시(酉時)에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방 조동[현재의 동산리]에서 부친인 기재우와 모친인 안동 권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기재우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큰아버지인 태온(太溫)에게 의지하여 살았다.
그는 부모님께 효행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겼다. 기재우는 자신이 효를 행할 수 있는 것은 부모님의 유골을 좋은 곳에 모시는 것임을 깨닫았다. 그는 풍수지리를 열심히 공부하여 풍수에 도통하게 되었다.
기재우는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에 대혈(大穴)이 많은 것을 알았다. 그래서 순창 복흥방의 조동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리고 풍수지리 학 상 길지라고 하는 황앵탁목혈(黃鶯啄木穴)에 부모를 모셨다. 이곳에 묘를 쓴 10년 후에 기정진을 얻게 된다.
권씨 부인은 나이 40이 넘어 아들을 낳았다. 기정진이 태어나던 날이었다. 아버지 기재우는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하녀에게 아들이냐 딸이냐고 물었다. 하녀가 옥동자라고 하자, 아무런 탈이 없더냐 하고 다시 물었다. 하녀가 아무 탈이 없는 옥동자라고 대답하자, 기재우는 사랑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
기정진이 태어난 지 7일째 되는 아침이었다. 하녀가 삼신께 제사 지내기 위해 방 청소를 하다가 그만 실수로 벽에 걸어 놓았던 가락을 떨어뜨려 아이의 눈에 맞았다. 아이가 죽을 듯이 울어댔다. 그러자 사랑방에서 두문불출하던 기재우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하녀가 거의 죽어 가는 목소리로 아이가 눈을 다쳤다고 하였다.
그러자 7일째 방 안에서 나오지 않던 기재우는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사랑방에서 나오면서 별일 없을 것이니 조용히 하라고 하였다. 황앵탁목 혈 묘 자리는 3대에 걸쳐 복을 받는데, 특히 3대 후손 중에서 눈이 한쪽 없는 아이가 태어나야 제대로 발복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기재우는 아들의 한쪽 눈이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하였던 것이다.
「노사 기정진의 출생 설화」는 명당 발복 담에 해당한다. 풍수지리에서 명당에 묘 자리나 집터를 정하면 후손이 번성하고 가문이 영광을 받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높은 관직에 오르거나 명문거족으로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내력을 명당과 관련지어 설명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노사 기정진의 출생 설화」도 이에 해당한다. 아버지인 기재우가 명당자리에 부모의 묘를 썼기에 발복하여 기정진이 대유학자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명당 발복담은 훌륭한 인물의 출생에 신비성을 더하는 기능도 갖고 있다.
[출처] 노사 기정진의 출생 설화
고전칼럼
성리학, 몸으로 실천한 철인(哲人)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上
글쓴이 : 박석무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 : 1798~1879)은 희대의 철학자이자 철학의 이론을 몸으로 실천했던 탁월한 성리학자였다.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이자 학문의 주조(主潮)이던 성리학은 높은 이론의 관념성 때문에 실천과 실행이 어려웠던 이유로 공리공론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왕조 말기에 혜성처럼 나타난 몇몇 높은 수준의 성리학자들 때문에 성리학은 공리공담(空理空談)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나 망국의 무렵에 나라사랑의 뜨거운 의병운동으로 승화되었다. 그런 운동의 사상과 철학을 제공한 대표적 성리학자가 바로 노사 기정진과 화서 이항로(1792~1868)였다.
전남 장성군 진원면 고사리에 있는 ‘고산서원’. 노사 기정진은 78세때 이곳으로 이사와 4년간 학문을 마무리하고 제자들에세 도를 전한 뒤 세상을 떳다. |사진작가 황헌만
더구나 노사 기정진은 유리론(唯理論)이라는 최고수준의 주리론(主理論)에 근거하여 행위와 실천이 없는 관념적인 이론은 진리일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지닌 학자였다. 자신이 밝혀내고 찾아낸 진리는 몸으로 실천해 보여야만 그 참뜻이 있다고 믿고, 82년의 평생 동안 가장 겸허하고, 가장 순수한 학자로서의 자세와 처신을 잃지 않았다. 마음과 몸으로 벼슬살이를 멀리하고 오로지 진리탐구에만 일생을 바쳐, 참으로 높은 수준의 성리학 이론을 터득해낸 대표적인 성리학자였다.
‘조선유학사’라는 저서로 유명한 현상윤(玄相允)은 그의 저서에서 몇백명에 이르는 조선시대의 성리학자 중에서 그래도 학자다운 학문을 이룩한 학자로 여섯 분을 꼽았는데, 퇴계·율곡·화담을 이은 학자로 녹문 임성주와 노사 기정진, 한주 이진상을 거명하였다. 그러면서 서세동점의 위기를 맞은 조선왕조의 마지막 무렵에 진정한 세분의 성리학자로는 노사와 화서 및 한주를 들면서 그분들의 업적으로 성리학의 역할이 그런대로 마무리되었다는 주장을 폈었다. 대체로 옳은 판단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화서는 경기도 출신이고, 노사는 전라도 출신이며 한주는 경상도 출신이었다. 화서는 노사보다 6년 연상이고 노사는 한주보다 20년 연상이지만, 나라가 기울기 시작하던 무렵의 비슷한 시기가 세 학자들의 생존 기간이었다. 서로의 정보교환이나 연락도 없었으면서도, 주리(主理)라는 큰 틀의 이론에 뜻을 같이 하였고, 위정척사의 논리에도 큰 차이 없이 망해가던 나라에 우국(憂國)과 애국(愛國)의 불꽃을 피우게 하였던 점도 큰 차이가 없었으니, 바로 그 시대를 이끌던 진운(進運)에 세 학자들이 앞장선 셈이었다.
-노사의 탄생-
노사 기정진은 정조22년인 1798년 지금의 순창군 복흥면 동산리, 일명 조동(槽洞:구수동)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해 6월 3일 해가 질 무렵이었다. 본디는 아버지 기재우(奇在祐)가 장성군 하남에 거주했으나 임시로 살아가던 구수동에서 태어났으니, 탄생지야 순창군이지만 선대 때부터 살아가던 장성을 고향으로 여길 수 있다. 어린 시절에도 고향인 장성의 하남을 찾은 적이 많았고, 친족들이 대부분 하남에 있었기에 왕래가 잦았다. 더구나 18세에 양친을 잃고 외로운 신세가 되자, 바로 고향인 하남으로 돌아와 그곳을 중심으로 해서 일생을 보냈으니 그곳이 고향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남은 지금의 지명으로는 전남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阿谷里)인데, 그때는 아치실, 즉 아곡(鵝谷)으로 불렀다. 그 아치실은 기씨 이전에 박씨의 마을인데, 한창 잘 나가던 시절에는 ‘아치실 기씨’라는 호칭이 나도록 떵떵거리며 살던 기씨의 명촌이었다. 지금은 노사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거의 폐허가 된 마을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선비의 생활에 넉넉한 삶을 살아가지 못한 노사는 아치실에서도 오래 정착해서 살지 못하고 그곳과 멀지 않은 맥동(麥洞), 매곡(梅谷), 탁곡(卓谷), 여의동(如意洞) 등지를 전전하면서 장년기를 보냈다. 그러던 중에도 마을에서 멀지 않은 산사인 관불암(觀佛菴), 남암(南菴), 백양사 등의 절에서 골똘히 독서하면서 학문연구에 여념이 없었다.
-면암 최익현과 매천 황현이 찾았던 하사리-
노사가 가장 오래 거주하면서 저술활동과 강학을 했던 중심지는 하사리였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장성군 황룡면 장산리(長山里)다. 65세 이후 20년이 넘도록 정착하면서 높은 학문과 사상으로 무장한 사상가 노사는 그곳에서 수많은 저술을 남겼고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래서 77세 때인 노경에야 노령산(蘆嶺山) 아래의 하사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노사(蘆沙)라는 자호로 부르고 ‘노사설(蘆沙說)’을 지어 저간의 입장을 설명하였다. 노문3자(蘆門三子)라 일컫는 대곡 김석귀, 일신재 정의림, 노백헌 정재규를 비롯하여 손자인 송사 기우만은 그들의 학문이 바로 하사리 노사의 문하에서 익어갔었다. 당대의 의기남아 면암 최익현(崔益鉉)이 대원군을 탄핵하다 반대파에 밀려 제주도로 귀양갔다가 해배하던 1875년 4월에 노사를 찾아뵙던 곳도 하사리이다. 또 15세의 어린 학동(學童)이던 뒷날의 유명한 지사(志士) 시인이던 매천 황현(黃玹)이 15세의 어린 나이로 노사를 찾아와 학문을 물었던 곳도 바로 하사리였다. 70이 넘은 노학자를 황현이 찾은 때는 1869년의 어느 날이니, 그때 노사는 신동이던 어린 황현을 보고 경계의 시 세편을 지어주었다.
보배로운 소년이 행전도 안 치고 찾아오니
놀랍기도 하지만 걱정도 되는구나
쉽게 얻은 것은 잃기도 쉬운 거니
연잎 위의 물방울 구슬 자세히 보라
(贈黃玹三首)
천재적인 시인 매천의 모습을 보고 재주만 믿고 경솔할까 걱정되어 경계의 시를 주었다. 그래서 매천도 그의 유명한 ‘매천야록’의 맨 끝 부분에 자신의 일생을 간략히 기술하면서 “15세에 노사선생을 찾아가 뵈었더니 기특한 소년이라고 칭찬해주었다”라는 내용을 자랑스럽게 적고 있다. 하사리는 지금 흔적이 없다.
-중암 김평묵과 영재 이건창이 찾았던 고산리-
이유야 알 수 없으나, 78세의 노인 노사는 그해 겨울에 오늘의 ‘고산서원(高山書院)’이 있는 장성군 진원면 고산리로 이사와 마지막으로 학문을 마무리하고 제자들에게 도를 전한 뒤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노사는 1875년 겨울에 이사와 1879년 12월 29일 생을 마치던 날까지 4년이 넘도록 ‘담대헌(澹對軒)’이라는 강학소를 짓고 거기에서 거처하면서 학술서적을 저작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아치실이나 하사리는 노사의 흔적도 전해주지 못하지만, 이곳 ‘담대헌’의 건물은 덩실하게 솟아있고, ‘고산서원’이 우람하게 서 있어서, 노사의 유적지는 이곳에 이르러야만 명확하게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은 ‘고산서원’의 강당으로 사용되는 담대헌, 마루에 올라 앉아 있노라면 툭터진 남쪽으로 아스라이 광주의 무등산이 보이고, 무등산 자락의 장망봉도 희미하게 보이는데, 그곳에는 노사의 부모님 묘소가 있다. 노년에 성묘하기도 어려워, 불효막심한 자신을 책하던 무렵, 그곳으로 이사와 부모님 묘소를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기에, ‘담대헌’이라는 이름을 걸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노년기의 작품인 ‘담대헌기’에는 그의 간절한 부모님 생각이 은은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곳 담대헌에도 명인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병자수호조약(1876)을 결사반대했던 최익현은 흑산도로 귀양갔다가 1879년 3월 해배되어 귀경하던 때에 병중에 신음하던 노사를 담대헌으로 찾아뵈었다. 도를 듣지 못하고 얼굴만 뵙고 떠나던 면암은 시를 지었다.
도학(道學)이 남쪽 고을에 있어 성망이 무거운데
공자처럼 사모한 사람 누구이던가
두 번째 찾아왔으나 도 못 듣고 얼굴만 뵈오니
50 되도록 배움 없는 사람 후생이 부끄럽네
(‘拜蘆沙奇丈’)
노사에게 도를 얻어듣지 못한 아쉬움을 토로한 면암의 시는 노사의 학덕이 어느 정도로 높았나를 간접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노사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담대헌은 적막하지 않았다. 노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 소선생(少先生)인 노사의 손자 송사 기우만이 담대헌의 주인이 되어 학자들을 맞이하였다. 1884년 12월 척사위정운동을 주도하다 전남 무안의 지도(智島)로 귀양갔다 돌아가던 당대의 학자 중암 김평묵이 노사의 유촉을 찾아 담대헌을 방문하였다. 화서 이항로의 수제자로 노사의 학문이 스승의 학문과 같은 내용이라며 극구 찬양하던 김평묵은 송사 기우만과 몇 밤을 새우며 ‘노사집’을 읽어가자 숭모의 정을 금치 못했다. 뒷날 노사의 주저(主著) ‘외필(猥筆)’이라는 글에 찬양의 발(跋)을 담았던 사람도 김평묵이었다.
그 뒤 1895년의 어느 날, 전남 보성으로 귀양갔다가 해배되어 돌아가던 희대의 문장가 영재 이건창(1852~1898)은 노사 학문의 보금자리인 담대헌을 찾았다. 송사 기우만과 함께 밤을 새우며 ‘노사집’을 읽어가던 영재는 노사의 깊은 학문에 탄복하면서 아낌없는 찬양의 시를 지었다.
‘납량사의’ 읽으며 마음 기울인 지 오래더니
담대헌에 오르자 사모의 정 새롭도다
사방을 둘러 싼 고산(高山)은 공경의 뜻 더 일고
성긴 대밭에서는 가난이 흐르는구나
정밀한 마음으로 얻어낸 도는 옛 사람을 능가하고
박학(樸學)으로 가문 이은 손자가 있네
탄식하노라 오늘의 만남 어이 쉽게 얻으리
돌아가서는 당연히 이야기 진진하리라.
(노사선생 고택을 지나며 손자 송사와 함께)
예나 이제나 가난한 노사의 집안, 가난이 흐른다는 대밭만 지금도 성긴 모습으로 대바람 소리만 내고 있었다.
한말의 거유이자 의기의 사나이들인 면암 최익현, 중암 김평묵, 영재 이건창 등이 찬양해마지 않던 노사의 학문. 그들의 찬양이 있었기에 외롭지 않게 ‘고산서원’의 우람한 모습이 호남학을 상징해주고 있다.
박석무(한국고전번역원장)
[출처] 〈고전칼럼〉 성리학, 몸으로 실천한 철인(哲人)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上
고전칼럼
성리학, 몸으로 실천한 철인(哲人)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下
글쓴이 : 박석무
최초의 척사위정 주장…국시로 세우다
노사 기정진은 성리학사에서도 독특한 이론을 전개하여 가장 철저한 주리론(主理論)의 제창자이자, 견고한 일원론으로 유리론의 체계를 세워, 아무도 넘볼 수 없는 학문영역을 개척한 학자였다.
노사 기정진의 묘소와 묘전비. “하늘이 우리의 도를 도와 선생을 낳으셔, 정기를 모아 진실로 대성하셨네”라는 비문은 제자 정재규가 썼다./ 사진작가 황헌만
-노사학파의 형성-
노사의 학문과 그 제자들을 노사학파라 부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노사 자신의 학문이 매우 독특한 데다,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걸출한 학자들이 집단을 형성하여 노사학문을 고수하고 전파하여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기에 충분한 때문이다. ‘고산서원’에는 노사를 주벽(主壁)으로 모신 신실(神室)인 고산사(高山祠)가 있고, 강당으로 담대헌이 있고, 동쪽으로 동재(東齋)인 집의재(集義齋)가 있고, 서쪽으로 서재(西齋)인 거경재(居敬齋)가 있다. 담대헌과 거경재 사이에는 노사문집의 목판본을 보관한 장판각(藏板閣)이 있다. 담대헌 남쪽에는 우람한 3간의 정문이 있으며 정문 밖 동편에는 서원의 관리사가 볼품있게 서 있다.
신실인 고산사에 배향(配享)된 제자 학자들의 면면이 바로 노사학파의 거장들이다. 우선 노문3자인 대곡 김석귀, 노백헌 정재규, 일신재 정의림 수제자 세 분에, 손자인 송사 기우만까지 네 분의 학자가 모셔져 있고, 또 다른 네 분의 학자들이 연달아 자리하고 있다. 월고 조성가, 석전 이최선, 신호 김녹휴, 동오 조의곤이 그들인데 모두가 당당한 학자들이었다. 1960년에 노사의 후학들에 의하여 간행된 ‘노사선생연원록’이라는 제자록에 의하면 친히 글을 배운 제자가 600여명에 이르고, 그들 제자의 제자들까지 합하면 6000여명에 이르는 대학단이 형성되었다고 여겨진다. 배향된 8명은 그 중에서도 대표자였다.
- ‘납량사의’와 ‘외필’-
노사 선생의 묘소 곁에 최근에 세운 척사위정탑.
노사 학문의 정수(精粹)는 누가 뭐라 해도 높은 수준의 성리학이다. 그런 성리학의 대표적 저술은 ‘납량사의(納凉私議)’와 ‘외필(猥筆)’이다. 46세의 왕성한 장년기의 저작인 납량사의는 그 당시 논쟁의 중심에 있던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주장이다. 이기(理氣)를 이원론(二元論)으로 잘못 해석하여 인(人)과 물(物)의 성에 대한 이동(異同)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유리론, 즉 이(理) 하나일 뿐이라는 일원론(一元論)의 입장인 노사는 인물성동이론의 어떤 것도 반대하면서 자기대로의 유리론을 주장하였다.
죽음을 몇 달 앞둔 81세의 말년에 저작한 ‘외필’은 주기론(主氣論)을 철저히 배격하느라 율곡 이이의 학설에도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 이기론으로, 뒤에 큰 파란을 일으킨 논문인데, 기(氣)란 이(理)의 대칭일 수 없는, 이(理)의 예속물이라고 설명하여 새로운 이기론을 세운 학술이론이었다. 치밀했던 노사는 46세 때의 저술인 ‘납량사의’를 77세 때에 다시 수정하여 새로운 이론을 보강하였고, 81세 때의 ‘외필’은 죽음이 임박한 때에 저술하여 당대의 석학들인 김석귀, 정재규, 정의림 등 세 제자에게 보여준 뒤 그들도 의심 없이 독실하게 믿겠다는 약속을 받은 뒤에야 세상에 내놓았던 글이었다. 80평생 가슴 속에 품고 있던 학문이론을 더 이상은 감출 수가 없기에 어쩔 수 없이 밖으로 알리지 않을 수 없어 사람들에게 보인다는 참으로 겸손하고 신중한 자세로 자신의 학설을 주장하던 모습이었다.
-병인양요에 올린 상소-
공리공담의 성리학을 뛰어넘어 깊숙이 연구해낸 성리학의 높은 학문을 실천으로 옮긴 학자가 기정진이었다. 69세이던 병인년에는 병인양요라는 전대미문의 난리가 일어났던 해다. 서양의 군대가 강화도를 침범하면서 세상이 요동칠 때, 그런 소식을 들은 노사는 나라를 근심하고 걱정하느라 식음을 전폐하고 병환에 이를 지경이 되자, 견딜 수 없는 애국심에서 곧장 임금에게 상소를 올린다. 이름 하여 ‘병인소(丙寅疏)’라는 참신한 내용의 상소였다. 그해 7월의 일인데, 이른바 척사위정(斥邪衛正)의 논리를 설파한 국내 최초의 상소였다. 같은 때에 화서 이항로도 비슷한 내용의 척사위정의 상소를 올리는데 그때는 9월의 일이었으니 노사보다는 2개월 뒤의 일이었다.
그 당시 대부분의 논의가 외적과 싸우지 말고 화의(和議)를 이루자며 전쟁을 피하자던 주장이 대세를 이루던 때에, 노사는 결사반대하고 전쟁을 위한 군비강화책을 열거하고 나라 안에서는 정치를 제대로 하고, 나라 밖의 외적은 반드시 물리쳐야 한다는 척사론을 폈다. 노사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외적과 싸워 물리쳤고, 노사는 벼슬이 올라 공조참판이라는 고관이 내려지기도 했다. 바로 그 상소가 천하에 노사 기정진의 이름을 알린 상소였고, 최초로 척사위정의 이론을 온 국민에게 알린 글이었다.
-장엄하고 아름다운 노사의 최후-
노사 기정진은 천재였다. 큰 선생 아래에서 글을 많이 배운 적도 없으나 4~5세에 이미 글을 해독하고 지을 줄을 알았으며, 7세에 지은 ‘하늘을 읊음(詠天)’이라는 시는 온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시가 되었다. ‘사람들의 선악(善惡)에 따라 빠르게 보답한다네’(隨人善惡報施速)라는 글이 어떻게 7세 아동에게서 나올 수 있겠는가. 하늘은 인간의 선과 악에 따라 지체없이 상을 내리고 벌을 준다는 뜻이니, 7세에 이미 세상의 이치를 터득했다고 여기지 않을 수 없다. 그가 11세에 지었다는 ‘춘추정기(春秋亭記)’라는 글은 노성의 학자도 짓기 어려울 만큼의 높은 수준의 글이었다. 15세에 일어난 평안도의 홍경래난에 대하여 예언했던 이야기도 그만큼 사리판단에 밝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명분이 없는 민란은 승리하기 어렵기 때문에 오래가지 못하고 난이 평정된다고 노사가 말했다고 전해진다.
학자로서의 학문이 대체로 이룩된 20대 후반인 29세에는 최초로 서울 나들이를 떠났다. 당대의 학자이자 문장가인 대산 김매순(臺山 金邁淳)을 찾아 보았고 충청도로 내려오면서는 강재 송치규(剛齋 宋穉圭)를 찾았다. 당시에 가장 큰 학자로 이름이 높았던 이유다. 마침내 34세의 나이로 진사과에 장원한다. 연천 홍석주(淵泉 洪奭周) 같은 높은 수준의 학자가 시관(試官)이던 때문에 그래도 노사가 진사에 장원으로 합격을 했다고 전해진다. 아버지의 유언으로 진사과에 합격하자 그는 끝내 과거에 응시하는 일을 중단했으나, 노사에게는 그때부터 벼슬길이 열렸다. 35세 때부터 나라의 부름이 있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응하지 않았다. 45세에 내린 전설사(典設司) 별제(別提)에 겨우 6일 동안 근무했던 것이 그의 벼슬살이의 전부였다.
가난에서 벗어나도록 60세에 내린 고향 근처의 무장(茂長)현감이라는 벼슬도 완곡하게 거절하였고 산림(山林)의 벼슬인 장령(掌令)이나 집의(執義)는 물론 69세 때의 동부승지나 호조참의 등도 모두 거절하였고 재신(宰臣)의 지위인 공조참판이 내려졌고, 79세에는 호조참판에 임명되었어도 모두를 사양하고 학문연구에만 생애를 바치고 말았다.
노사의 생애에 말년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시골의 노학자로 과거에도 합격하지 못했지만 승지·참의·참판의 벼슬이 내려져도 전혀 응하지 않고, 77세에는 그의 대표적 논문인 ‘납량사의’를 수정하여 다시 쓰고, 81세에는 ‘외필’이라는 독특한 유리론의 이기철학을 완성하였다. 79세에 병자수호조약이 이룩되자 병이 나도록 우국충정을 이기지 못했으나 면암 최익현이 도끼를 들고 반대상소를 올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기쁜 표정을 지으며, “우리나라에 사람이 없다는 비웃음은 받지 않겠다”고 말하며 부끄러움을 이기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79세 때의 시조가 전해진다. “공명(功名)도 너 하여라 호걸도 나 싫으며, 문 닫으니 심산(深山)이요 책 펴니 사우(師友)로다. 오라는 곳 없건마는 흥 다하면 갈까 하노라”라는 시조 한 수는 그의 마지막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웠나를 반증해주고 있다. 학문의 높은 수준에, 아무런 미련 없이 아름답게 생을 마치겠다는 그의 뜻이 담겨 있다. 81세, 죽기 1년 전에야 생애의 대작인 대표적 논문을 저작한 그의 삶이 너무나 멋지지 않는가.
-노사의 묘소와 척사위정탑-
노사의 학문과 사상을 이으며 학문이 강해지던 곳이 ‘고산서원’이라면, 노사의 가장 뚜렷한 유적지는 그의 묘소다. 당시의 행정구역은 영광군 지역이었으나, 지금의 행정구역은 장성군 동화면 남산리의 황산(凰山)마을이다. 몇 년 전에는 전국의 유림들이 성금을 바쳐 세운 ‘노사선생 신도비’가 우람하게 서 있다. 학자이자 의병대장으로 생전에 가장 노사를 숭앙했던 면암 최익현이 지은 글에 근래의 서예가 여초 김응현이 쓴 글씨다. 14세에 결혼하여 세상을 떠난 뒤 함께 합장으로 계시는 부인은 울산김씨로 하서 김인후 선생의 후손이다. 노사의 제자 중에 영남의 학자로 가장 큰 명성을 얻었던 노백헌 정재규가 지은 묘갈명이 새겨진 비가 우뚝 서 있다. “하늘이 우리의 도(道)를 도와 선생을 낳으셔, 정기(正氣)를 모아 진실로 대성(大成)하셨네”(天相斯道 正氣之會 展也大成)라는 찬사로 정재규는 선생의 높은 학문의 완성을 찬양하였다. 고산서원에는 노사의 학문이 살아서 강해진다면 묘소에는 노사의 혼이 잠겨 있다. 더구나 최근에는 이 나라에서 최초로 척사위정의 논리를 주창한 공로를 잊지 않기 위해, 묘소 곁에 척사위정탑이 장엄하게 세워져 후인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있으니, 역사의 땅이자 사상의 고향은 지나는 행인들의 마음을 되살아나게 해주고 있다.
[출처] 노사 기정진의 출생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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