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소설
타자他者가 된 공간의 삶
- 최인호, 〈순례자〉에서
최인호(1945-2013)는 서울 예관동에서 태어나 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일곱 살 때 평동으로 이사해 덕수초등학교를 다녔다. 서울중학교를 거쳐 서울고등학교 졸업 즈음에는 북아현동으로 이사했고 연세대학교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다. 이 흐름은 그의 단편인 〈순례자〉의 공간적, 시간적 배경과 가깝게 닿아 있다. 갑작스럽게 서울이 팽창하면서 중심지에서 조금씩 밀려나가는 소시민들의 변두리 삶을 통해 작가는 변해가는 도시의 세태를 고발하듯 서술하였다.
군대 제대 후 아직 대학생이었던 최인호는, 1972년 〈별들의 고향〉을 발표하면서 신문에 연재한 최연소 소설가로 기록된다. 〈별들의 고향〉은 대히트했고 최인호는 그 수익금으로 1970년대 중반, 강남 신사동의 황무지를 구입해 단독주택을 짓는다.
예관동은 최인호가 유년의 시간을 보냈던 동네로 조선시대 책을 찍어내던 교서관校書館이 있어 교서관동 또는 운동으로 불리다가 나중에 운芸을 예藝의 약자로 잘못 읽은 것이 되어 지금껏 예관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충무로4가와 5가 동사무소 관할 아래 있으며 중부건어물시장과 방산시장을 옆에 두었다.
가을이 깊어진 11월의 어느 수요일 오후, 을지로4가역 10번 출구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심각한 길치인 나는 차를 잘못 타는 일은 다반사이고 종종 길을 잃고 또 헤매느라 약속시간을 충분히 두고 떠난다. 이번에도 갈아탈 곳과 내려야 할 곳을 몇 차례 혼돈하면서 그곳으로 가는 시간은 배로 늘어났다. 필요 이상 많이 걸은 것 말고는 헤맸어도 좋았던, 다른 때보다 무난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어서 위안이 되기도 했던 길이다.
사진을 찍기 위해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중간쯤 서서 멀리 도로 표지판을 올려다보았다. 표지판 너머로 현대식 빌딩이 높다랗게 그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다. 나는 오장동 사거리 쪽으로 가기위해 신호를 기다리면서 반짝이 등을 켜고 있는 자동차 행렬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마치 시간여행을 나선 사람처럼. 신호가 바뀌기 전 남은 길을 건너와 중부건어물시장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평일이어서 일까, 시장은 이상할 정도로 한산했다. 몇몇 상점들은 쉬는 날인지 가게를 내놓은 것인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예관동의 가을도 노랗게 익어갔다. 은행잎이 뚝뚝 덜어지는 가로수길을 따라 일대를 탐색하던 중이었다. 중부건어물시장이 있는 그곳은 과거 속 어느 장소처럼 현재의 시장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손님도 없이 불을 밝힌 가게마다 건어물만 진열돼 있고 시장엔 이따금씩 오가는 사람들이 보일 뿐이다. 백열등을 장식물처럼 걸쳐놓은 상점에서 하릴없이 앉아 있는 주인과 직원이 어쩌다 지나가는 다른 상인들과 건조한 이야기를 나눈다.
골목을 나와 오래된 건물들을 멀리 두고 사진기에 담고 있을 때였다. 나를 빗겨지나간 어느 초로의 여인과 아들로 보이는 청년이 누군가에게 선물할 조기를 사기 위해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청년은 이런 데까지 와서 선물을 구입하느냐고 짜증을 내고 여인은 이왕 하는 거 귀한 걸 선물하고 싶어서라고 맞받아쳤다. 귀한 건 백화점에 더 많다고 투덜거리는 청년의 뒤를 따라 여인은 툴툴거리며 걸어갔다. 겨울로 넘어가는 시간 안에서 그곳의 풍경은 옛날 사진처럼 가라앉아 칙칙하게 느껴졌다. 그들이 걸어간 길 따라 은행잎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데구루루 뒹굴었다.
늦은 오후가 되자 은행나무는 맥없이 잎을 떨궈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후두둑 후두둑 잎을 덜어내는 은행나무를 보면서 가을 길을 천천히 걸었다. 걷다보니 저만치 우래옥 간판이 눈에 띄었다. 서울 사람인 최인호가 평양이 고향인 아버지 따라 평양냉면을 즐겨 먹었다는데, 그는 우래옥 냉면을 좋아했다. 여름이 되면 하루 한 끼는 냉면을 먹었을 정도로 냉면 사랑이 남른 작가였다. 우래옥은 냉면 찾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줄 서서 기다리는 걸 싫어하는 나는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문화옥으로 가 문화인답게 느긋이 앉아 따뜻한 갈비탕을 시켜 먹었다. 분명 맛있게 먹었는데 어쩐 일인지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자꾸 하품이 올라왔다. 나는 멍한 상태로 그 일대 골목 구석구석을 도심 속 ‘순례자’가 되어 산책하듯, 탐색하며 돌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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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는 최인호가 196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6년 만인 1969년 2월, 《현대문학》에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작품은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견습환자見習還子〉와 1971년 소개된 〈타인他人의 방房〉과 성격을 같이 하는데, 이는 문명과 함께 변화해가는 도시적 삶의 공간 안에서 부조리한 개인의 존재를 끊임없이 의심하며 질문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작품은 3남 1녀 중 둘째인 ‘나’가 어머니와 함께 이사 갈 집을 보러 다니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를 담았다. ‘나’의 집이 ‘두 장’에 팔리고, 식구들은 돈에 맞춰 서울 변방으로 이사하기로 마음먹는다. ‘두 장’인 이백만 원으로는 서울시내에 집을 장만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변호사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6년간 벌이 하나 없던 ‘우리 집’ 수입원은 집을 줄여서 이사하는 방법밖에 없다. 더 보탠다면, 시내에서 조금 더 멀리로 이사를 가야 했다. 그렇게 이사를 가도 안방을 제외한 나머지는 세를 줘서 그 돈으로 장남인 형과 ‘나’ 그리고 남동생의 등록금을 마련해야 했다. 이번에 집을 내놓은 이유는 누이동생 결혼비용 때문이다. ‘우리 집’ 형편으로는 남들처럼 혼수를 폼 나게 해 줄 수가 없다.
아들들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조선집이 아닌 양옥집을 보자고 어머니를 설득한다. 수유리쯤만가도 싼값에 장미를 심을 수 있는 정원 있는 집을 장만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어느 토요일 아침, 신촌어귀에서 수유리까지 집을 구경하기 위해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길을 나선다.
도봉산행 버스가 혜화동을 벗어나면서 어머니는 벌써 지쳤는지 ‘나’의 어깨에 기대 아예 잠이 들었다. 경사가 심한 미아리고개를 넘으면서 ‘나’는 걱정이 태산이다. 수유리 쪽으로 이사를 하게 되면 매일같이 이 길을 오가야 할 텐데 생각만으로도 눈앞이 캄캄하다.
미아리고개를 넘어서면서부터 거리풍경은 지금까지와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꽃을 이고 언덕을 내려가는 여인이 보이고 느리게 걸어가는 노인이 보이고 개구쟁이들의 장난기마저 정스럽게 느껴지는, 낯선 동네이다. 종점 못미처 내린 모자母子는 기진맥진이다. “아는 사람이라곤 만날 수 없는”, “미지의 거리”를 그들은 천천히 걸어서 어느 마을에 도착한다. 주독이 올라 코끝이 빨개진 복덕방 할아범과 중학생 녀석이 장기를 두는데 우리가 집을 보러왔다고 해도 할아범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중학생 녀석이 큰소리로 귀 어두운 할아범에게 손님이 왔다고 일러주면서 ‘우리’는 할아범을 따라 집을 보러 다닌다. 하지만 반나절쯤 지날 때까지 별 소득이 없다. 할아범은 싼 집을 찾는 ‘우리’를 우습게 본다.
점심시간이 지나서까지 집을 봤지만 마음에 드는 집이 없다. 세 시가 넘어 중국집으로 들어간 어머니와 ‘나’는 2층 창가자리에 앉는다.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며 “금속 부분처럼 반짝이는” 수유리 주택들을 내려다본다. 텔레비전 안테나들이 집집마다 꽂혀있는 제법 문화생활이 활발한 동네 같다. 소설을 쓰는 ‘나’는 습관처럼 동네를 내려다보며 재미있는 상상을 한다.
지친 어머니는 음식을 잘 드시지 못한다. ‘나’는 어머니가 남긴 음식까지 모두 먹어치운다. ‘나’에겐 “돈 주고 산 것은 남겨서는 안 된다”는 철칙이 있다.
다시 길을 나서 더위에 지친 아낙들이 그늘에 앉아 수다를 떨고 아이들이 굴렁쇠를 굴리며 뛰노는 동네에 이른다. 비눗방울 놀이를 하는 아이도 있고 집집마다 어린애 울음소리가 들리고, 울음소리 때문인지 동네는 온통 진공상태에 놓여 있는 것 같다. 그 마을에서 마음에 드는 집을 발견하는데, 그들이 원했던 집이면서 값도 싸게 나왔다. 게다가 전망까지 좋다. 구석구석을 둘러봐도 처음 느낌 그대로 마음에 드는 집임에 틀림이 없다. “몇 번이고 이제는 거의 우리들의 집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그 집을 꾸밀 기대에 부풀면서 다시 올 것을 약속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분명한 분이다. 얼마쯤 내려오다가 집을 사려면 동네사람들한테 어떤 사연이 있는 집인지 물어봐야 한다며 다시 왔던 길로 올라간다.
그 집은 6.25때 집단으로 시체를 묻은 곳이었다. 거기 사는 사람 중 한 해에 불구가 한 명씩 나온다는 말을 듣고 “가자꾸나”하면서 어머니는 언짢은 표정으로 돌아선다. “아, 아, 쌍것들이다.”라고 툭 뱉어내는 어머니 말끝으로 “예, 어머님. 쌍것들투성입니다. 하마터면 빛나는 우리 집 형제들이 유령에게 홀리 뻔했습니다.”라며 어머니를 웃기려 애썼지만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내 집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 그때부터 이상하게 마을이 달리 보인다. 하필 비까지 쏟아졌다. 비가 쏟아지는 마을은 음습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어머니마저 소화가 안 되는지 속이 불편하다며 상을 찌푸린다. 어머니를 업고 빗줄기가 쏟아지는 한길로 뛰쳐나가 어떤 여인이 알려준, 약국이 있다는 수유리 쪽으로 내처 뛰었다. 공연한 분노 같은 것이 소낙비 사이로 치고 올라왔다. 어머니는 너무나도 가벼웠다. 그 와중에도 ‘나’는 소설 소재를 생각해낸다.
약국에서 활명수를 마시고 속이 편해진 어머니 팔짱을 낀 ‘나’는 장미꽃이 만발한 장미원을 바라보며 아름다움에 취한다. “우리는 꽃향기에 취한 곤충처럼 장미원으로 이끌려 들어갔다. 그리고 우리는 장미꽃 사이에 둘러싸여 그대로 수액이 오른 장미꽃이 되고 말았다.” 세상의 온갖 장미들이 모여 있는 곳. 그곳을 보면서 세상의 모든 것들을 용서해줄 것처럼 어머니는 눈을 가늘게 뜬다. “아아, 나는 여기에 집을 짓고 싶다. 오래도록 여기서만 살고 싶구나. 내가 죽을 때까지 말이다.” 어머니는 장미원에 당신의 집을 지어 정착하기를 소원한다. 한 폭의 그림이 되어버린 듯 꽃과 영혼을 나누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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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순례자〉는 1960~70년대의 고달픈 도시인의 삶을 보여준 작품으로 현대인의 도시적 삶을 우화적 수법으로 다루었다. 도시경제의 변천과 함께 그 시대의 부조리를 잘 드러낸 작품이기도 하다. 최인호의 60,70년대 발표된 다른 소설에서도 서울의 변천과정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데, 등장인물들의 내적갈등과 함께 드러나는 심리묘사가 최인호의 돋보이는 감수성으로 인해 섬세한 문장으로 살아난다. 도시의 변화에 따라 빠르게 일렁이는 소도시민의 삶을 느끼면서 현장 속에서 함께 경험하는 기분까지도 들게 한다. 결핍 안에서 흔들리는 소시민들의 세계를 사실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부조리한 세태를 고발한다는 점은 이 소설 〈순례자〉의 또 다른 감상 포인트이기도 하다.
1963년, 서울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최인호가 신춘문예에 도전한 일화는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교복 입은 18살 최인호가 시상식장에 나타났을 때 신문사는 그의 이름만 발표하고 작품은 싣지 않았다. 당선작 없는 가작입선이 그것이었는데 1968년 한국일보 화재로 그의 작품은 영영 소실되고 만다. 당시 심사위원인 황순원과 안수길이 단편 〈벽구멍으로〉를 보고 “신선한 문장이 돋보인다”고 평을 했는데, 작품이 소개되지 않고 그마저 불에 타 사라진 사건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당시에는 응모 소설은 물론 신문까지도 컴퓨터에 저장하던 시절이 아니었고 복사본도 없었던 터라 당사자마저도 자신의 작품을 다시 볼 수 없었다. 대학에 들어간 최인호는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견습환자見習還子〉를 응모해 당선되었고 같은 해 11월, 《사상계》에 단편 〈2와 1/2〉를 발표하여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에 이름을 알렸다. 그의 최초 신춘문예 당선이 시시하게 끝난 것에 대한 반항이었을까. 그의 도전은 화끈하면서 통쾌하기까지 하다.
최인호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로는 ‘최연소 신춘문예 당선자’ 외에도 ‘영원한 청년작가’ ‘기록을 만드는 남자’ ‘최연소 신문연재 소설가’ ‘작품을 가장 많이 영화화한 작가’ ‘책표지에 작가사진을 최초로 실은 작가’등이다. 그의 수식어는 단박에 그를 알리는 타이틀이 되었다. 여기에 이문열의 회고는 당시 최인호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게 해준다. “내가 등단할 무렵(1970년대 후반) 소설가 중에서 부업 없이 글만 써서 밥 먹고 사는 소설가는 최인호 선배 정도뿐이었던 같다”고 했는데, 최인호는 한국 소설계의 대문호로서 그야말로 자신의 이름값을 제대로 한 작가였다.
서울의 행정적 토대가 마련된 시기는 1960년대였다. 도시계획법과 건축법이 1962년 1월 20일 시행되었는데 이는 현대적 의미의 도시계획을 실행해갈 최초의 토대가 되었다. 서울의 행정적 경계가 세워진 해는 1963년이다. 청량리를 지나 망우리를 잇는 동쪽과 수유리와 우이동이 위치한 동북쪽, 서쪽으로는 영등포 그리고 동남쪽으로는 천호동, 서남쪽으로는 시흥이 위치했다. 그 중 수유리는 1949년 서울 성북구로 편입되었다.
1960년대 중반 서울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이로 인해 일자리와 주택 등이 턱없이 부족했다. 박완서의 소설(〈엄마의 말뚝〉,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을 보더라도 사람들이 인정하는 서울은 사대문 안이었다. 일제 말기, 개성에 살던 딸을 서울로 데려가던 어머니는 ‘문안’에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어머니한테는 ‘문안’만 서울이고 나머지는 서울이 아니다. 이처럼 인구 360만 명 정도가 모두 사대문 안에 모여 살았으니 서울 사람들이 생각하는 당시 서울의 덩어리는 크게 좁았을 만도 하다.
현재 서울시민 대부분은 사실상 이주민 2~3세대라 할 수 있다. 자신들은 서울토박이라고 말하겠으나 서울에 살고 있는 사람의 95퍼센트가 이주민의 자손이며 1세대 이주민들의 삶이 난민의 삶이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들은 도시가 팽창하면서 일부는 신도시인 수유리로 일부는 강남으로 밀려났다. 계속되는 도시의 팽창은 2023년 11월 현재, 한 여당이 추진하고 있는 ‘김포시 서울특별시 편입’이 현실화될 거란 기대 쪽으로 기울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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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의 어머니와 ‘나’는 집을 보기 위해 서울시민의 행동반경인 사대문 안에서도 한참이나 밀려난 수유리로 간다. ‘나’도 ‘어머니’도 별다른 벌이가 없으니 도리가 없다. 어머니와 형과 ‘나’는 생활에 자기 자신을 맞춰 사는 사람들이다. “마치 주형에 납을 부어 자기 자신의 본을 뜨듯 생활에 자기를 액체처럼 던지는 것”이다. 이제 형과 ‘나’는 대학을 졸업했다. 형은 은행에 1등으로 합격했고 누이동생은 제약회사에 취업했다. 여동생은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다. 막내딸이 아픈 이유가 어머니 자신의 잘못이나 되는 양 늘 “내 탓이오. 큰 탓이로소이다”를 왼다. 그 딸이 결혼을 하게 되었다. 어머니 걱정은 언제나 누이에게 가 있다. 딸을 방치했다는 죄책감으로 쩔쩔매던 어머니는 혼사가 오가던 터에 공군 중위와 선 본 하나뿐인 딸을 결혼시키는데 성대하게 치르고 싶어 한다. 여동생의 혼수비용을 제하고 나머지 돈으로 집을 구해야 한다.
‘우리 집’은 목돈이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집을 줄였다. 집을 줄여서 이사를 간다 해도 방 한 칸만 달랑 식구들이 모여 살 공간이고 나머지는 세를 주어 다달이 받아들이는 월세로 생활을 이어갔다.
흐린 일요일 오후, 그들이 둘러보았을 법한 동네를 찾기 위해 자동차를 몰았다. 한신대학교가 가까이 있는 수유1동으로, 화계사 입구 쪽을 돌아보기로 했다. 서울이라 하기에는 너무나도 조용하고 한적한 동네, 학교 앞 인도 따라 길게 설치된 운동기구에 노인들이 한 사람씩 앉아 운동을 하거나 대화를 하거나 하릴없이 지나가는 자동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와 어머니가 복덕방할아범을 만난 지점이 이쯤 아닐까 추측해본다. 수령이 오래된 버드나무가 그들을 넉넉한 품으로 내려다보는 보고 있었다. 손바닥만 한 편의점과 정겨운 전통찻집, 김밥집, 커피집과 셀프빨래방까지, 길 양옆으로 가게들이 배치돼 있다. 하나같이 손님은 없고 썰렁한 실내에 켜진 전등불만이 공간의 존재를 알려주었다.
‘어머니의 집’을 보기 위해 서울시 강북구 삼양로 464번지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한다. 좌회전과 우회전, 그리고 짧은 직진거리를 반복하며 도착한 곳은 찻길 옆 좁은 골목에 세워진 ‘장미원골목시장’ 구조물 앞 시장입구이다. 40년 된 전통시장으로, 1980년대까지 장미 품종개량을 위한 대단지의 장미농원이 있었던 곳이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장미농원 자리에 주택이 들어섰고 주택가 사이에 작지만 정겨운 시장이 자리했다. 장미원 치킨과 장미원 머리방 그리고 장미전기철물점까지, 눈을 두는 간판마다 거의 ‘장미’가 붙어 있다. 그때를 놓치지 않으려는지 시장 군데군데 ‘장미’가 가득 피어나고 있었다. 옛 시간을 기억하려는 사람들의 정서가 묻어 있는 인정 넘치는 도심 속 마을이다. 골목을 스쳐 지날 때마다 건물과 건물 사이로 멀리 북한산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특별히 세련된 동네는 아니어도, 북적대며 성시城市를 이루는 시장은 아니어도 북한산의 맑은 정기를 받아서인지 마을은 깨끗하고 건강하게 느껴졌다.
내비게이션을 읽지 못해 주차장을 가까이 두고 뱅글뱅글 돌았다. 공영주차장을 안내 받기 위해 시장 입구 옷 수선집에 물으니 가까운 곳에 있다면서 필요할 테니 주차권 몇 장 가져가라며 통째로 건넨다. 물건을 사는 것도 아니고 도움을 청하는 이에게 주차권까지 건네는 집은 처음이었다. 한 시간이면 충분할 것 같아 30분짜리 두 장을 뽑아들고 수선집이 안내해준 공영주차장으로 향한다. 도로에 띄엄띄엄 빨간 장미 한 송이를 그려놓은 것이 재미있다. 담장을 통째로 장미로 채워 그린 집도 보인다. 흔적은 누군가 살아왔다는 시간의 증거여서 어느 곳에서도 보통으로 봐지지 않는다.
오랜 전통이 있는 재래시장이어서 사람들로 북적일 줄 알았지만 휴일인데도 시장 안은 한산하다.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나온 사람들이 세일하는 정육점에서 삼겹살 몇 근 사들고 나와 다른 상점들을 기웃거렸다.
수유리는 1950년 이전의 명칭으로 1914년 4월 1일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 대수유리와 소수유리 그리고 가오리와 화계동 등이 합쳐지면서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수유리로 불렸다. 1949년 8월 13일 서울특별시 행정구역을 확장하면서 서울특별시에 재편입되었고 당시 신설된 성북구에 속했다가 1950년 3월 15일 동명을 개정하면서 수유동이 되었다. 서쪽과 동쪽으로 북한산 자락과 우이천이 자리한, 서울에서는 자연환경이 빼어난 곳으로 알려졌다. 강북구에서는 강북구청과 수유역을 중심으로 상권이 가장 잘 형성되었으며 수유시장과 수유중앙시장, 장미원시장, 우이시장 등 카페거리도 활성화 되어 상권이 고루 발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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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의 소설을 접한 대중들은 ‘호스티스 문학’을 하는 저질작가라며 그를 매도했다. 하지만 대중의 반응에 일희일비하는 최인호 작가가 아니었다. 그의 소설이 단행본으로 출간되면서 1백만 부 넘게 팔렸을 때 문학평론가 김현의 부름을 받은 일화는 지금까지도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로 회자된다. 김현은 “당신은 참 좋은 작가였다. 그런데 《별들의 고향》으로 대중작가가 되려한다. 당신은 우리가 옹호하던 작가였다. 그런데 당신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난처한 입장이 점점 코너에 몰리게 되었다. 그러니(문학성을 인정받는 순수문학 작가로 남을 것인지, 문단에 발을 끊고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는 대중작가가 될 것인지) 양자 중에 하나를 택일하여 달라”고 제안한다. 최인호의 대답은 단호했다. “내게 신경 쓰지 마시오, 형님. 내가 못마땅하면 내 이름을 평론에서 빼시오. 내 이름이 부담스러우면 내 이름을 평론에서 제외시키시오.” 그 뒤 문학평론가들 글에서 최인호의 이름이 사라졌다. 이로 인해 덕을 본 작가들이 등장한다. 그는 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닦았다. 그에게 ‘왜 쓰는가?’는 작가정신의 더 깊은 이유였다. 소설을 발표하면서 영화 시나리오 작업에도 참여하는 등 예술을 향한 본래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1982년 〈깊고 푸른 밤〉으로 제6회 이상문학상을 받은 최인호의 수상소감도 인상적이다. 수상연설에서 그는 문학이 개인의 사설창구가 아니라는 자각을 한다는 고백과 함께 자신이 문학을 하는 자세는 “결코 ‘옆’을 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 ‘앞’만 봐야 하는 자세”라며 그런 걸 조금씩 느끼고 있다고 밝힌바 있다. 문학하는 사람의 성품과 마음씨에 대해서 언급하기도 했는데 최인호였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급격한 산업화로 인간소외가 극에 닿았던 1970년대 초, 최인호는 한국문단에 새롭게 소설 붐을 일으키면서 그 시대를 대표하는 소설가가 되었다.
1970년대 전후로 도시의 인구밀도와 주거의 불안전성이 극대화되었다. 해방 직후 서울의 인구는 150만 명 수준이었으나 한국전쟁이 마무리되면서 본격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하여, 1963년에는 300만 명, 1970년 500만 명을 넘어섰다. 이러한 폭발적인 인구증가와 도시개발로 인해 서울의 모습은 전체적으로 또는 근본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1971년 8월 광주대단지 소요사건은 1970년 4월 시민아파트 붕괴에 이어 서울의 폭력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예이다. 안이한 도시개발 계획이 맞이한 두 번째 파국이기도 했다. 거의 방치하다시피 한 서울시의 도시계획은 안이하고 무책임한 태도로 투기를 조장하는 정책과 맞물려 거대한 파국을 불러들였다. 1970대 중반부터 한국사회에 정착한 중산층은 부동산 투기를 순식간에 대중화시켰다. 목돈을 마련할 수 있는 중산층이 성장하였고 자영업자나 일용직 노동자의 수보다 매달 월급이 들어오는 고용 노동자의 수가 증가하면서 은행에서 대출받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부동산이 가장 현명한 투자처라는 사실은 점점 대중의 상식이 되어갔다.
강남의 지가地價가 강북을 추월한 것은 1980년대의 일이며 1979년 당시만 해도 신당동의 지가가 압구정동보다 여전히 높을 때였다. 그러나 1963년의 가격을 기준으로 상승률을 살펴보면 신당동은 250배가 뛰었고 압구정동은 875배를 넘어섰다. 그러니 실제 지가가 아닌 투자의 측면에서 본다면 강북은 강남의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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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가 급속도로 진행됨에 따라 물신숭배物神崇拜가 팽배했던 1970년대, 서울 사대문 안에서 변두리로 밀려가야만 했던 소시민들의 우울한 풍경은 한 시대의 살아있는 이야기로 단편 〈순례자〉를 통해 더욱 사실적으로 되살아난다. 최인호는 작품을 통해 한국의 산업화시기의 도시 생태계를 보여주면서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군상들의 심리적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탁월하게 접근했다. 삶에 지친 어머니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여기에 집을 짓자”고 한 것은 도심 속 보행자의 존재성이 드러나는, 현실에 저항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동시에 희망적 삶을 놓지 않으려는 원초적 욕망이었다. 또한 모성애의 몸부림이기도 하다. 사기치고 공갈이 넘쳐나는 쓰레기 같은 동네보다는, 건물이라곤 보이지 않지만 온통 꽃으로 가득한 그곳이야말로 우리 인간이 살아가야 할 지상낙원이 아닐까 해석되는 부분에서 유토피아문학을 떠올린다.
장미농원이 많아서 ‘장미원’으로 불렸던 동네는 옛날의 흔적이라곤 하나도 없이 아기자기한 골목과 상권이 형성되어 ‘장미원골목시장’으로써의 명목을 이어간다.
유난히 별이 많던 밤, 영원한 청년작가인 채로 자신의 별이 있는 고향으로 떠난 최인호처럼 ‘나’의 어머니도 장미가 한창인 장미원에 영원히 살고 싶은 ‘우리 집’을 짓자고 한다.
새로운 도시개발에 밀려 장미가 사라진 장미원에는 여전히 새로운 장미가 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