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풍경」에서 가운데의 현대식 건물은 1926년에 완공된 대표적 근대기 건축물인 경성부청(현 서울시청 구청사, 등록문화재 제52호)이다.
화폭에는 1927년 당시 ‘하세가와 마치’라고 불렀던 소공동 조선은행 뒤쪽 골목길 주변 풍경이 짜임새있게 그려졌다. 멀리 북악산과 경성부청(서울시청), 경성공회당의 첨탑(오른쪽 첨탑)이 보이고 그 아래 자잘한 건물들과 담벼락 아래 사잇길로 여인이 걸어간다. 하얀 원피스 차림에 빨간빛 양산을 쓰고 걸어가는 뒤태가 당대의 모던 걸이다. 폭염 머금은 햇빛을 받아 주위 건물들이 허연 광채를 내뿜는 가운데, 그 중심에 빨간 빛 양산을 둘러쓴 ‘모던걸’의 뒷 모습은 화룡점정처럼 화면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김주경(1902~1981)이 작품을 발표한 1929년 당시 인상주의 화풍의 영향이 두드러진 이 그림은 “장안 제일의 양화(洋畵)”라는 찬사를 들었다. 미술사학자 신정훈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구교수는 1920~1930년대 도록 등을 통해 그림 속 건물들이 “지금은 서울도서관으로 쓰이는 옛 서울시청 자리의 ‘경성부청’이 북악산과 북한산을 배경으로 보이고 그 옆 건물은 불이흥업주식회사로 추정된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도시적 요소인 ‘길’과 ‘담’에 그림의 생명이 담겨 건물이 생경하지도 경박하지도 않게 표현됐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김주경은 도쿄미술학교 출신의 엘리트 화가로, 해방 뒤 월북해 북한 평양미술대학의 학장을 오랫동안 지냈다. 당시 유행하던 일본풍의 인상주의 사조인 ‘외광파’의 영향을 벗어나 1930년대 중반 청명한 조선의 하늘과 자연의 색채감을 표현한 토착적 인상주의 화풍을 선보였다. 1938년 국내 최초로 오지호와 함께 출간한 2인 컬러화집은 우리 근대미술사의 획기적 사건으로 기록된다.
「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풍경」은 1929년 조선미술전람회 특선작으로 특유의 인상주의가 본격적으로 시도되기 전의 작품이다. 하지만, 근대건물들에 부딪히는 빛의 굴곡을 생생하게 부각시켜 일찍부터 인상파 화풍에 심취한 흔적을 보여준다. 근대회화의 아버지 폴 세잔의 한국판 풍경화라고 할 정도로 그림 속 건물들은 단단하고 구축적인 양상을 띠어 작가가 서구 근대회화사의 흐름을 체화했다는 것도 일러준다.
「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풍경」은 1938년 덕수궁에 전용미술관(이왕가 미술관)을 세운 이왕가(옛 조선왕실의 후신)가 수집한 몇 안되는 국내 작가 작품중 일부다. 이왕가는 일본 근대미술품들과 한반도 고미술품들은 집중수집했지만 국내 작가들 작품은 구입하지 않았다. 후대 사가들은 「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풍경」을 사들인 배경으로, 경성의 발전된 근대적 경관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당시 일제의 내선일체 정책을 뒷받침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보고있다.
김주경은 1927~29년 선전에 3회 연속 특선을 했지만, 그 뒤로는 선전을 어용전람회로 보고 아예 출품하지 않을 정도로 항일 성향을 보였다. 그런데도, 「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풍경」이 내선일체를 표상하는 컬렉션으로 이왕가가 구입한 덕분에 살아남았다는 건 아이러니다. 김주경은 자신의 작품들을 해방 뒤 학교와 신문사 등에 기증했으나 대부분 전쟁 때 소실됐다.
오지호와의 2인화집에 실린 『가을의 자화상」 등의 명작 10점도 전하지 않는다. 「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풍경」은 살아남았지만, 미술관에는 상처 투성이로 들어왔다. 해방 뒤 창덕궁에 방치됐다가 1980년 12월 함께 있던 서양화 10점과 함께 문화재관리국으로부터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소장처가 바뀌었다. 이관 당시 작품은 물감층 곳곳이 떨어져나갈 정도로 극심하게 훼손돼 별도의 수복과정을 거쳐야 했다.